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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데이비드 실즈 지음, 김명남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다큐멘터리 소설가라고 불린다는 데이비드 실즈의 에세이다. 유년기와 아동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와 죽음...이렇게 네 쳅터를 통해 태어나면서부터 죽을때까지의 인간의 성장과 소멸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생물학적, 감정적, 그리고 가족적인 모습 전반을 스케치하고 있었는데, 인간으로 살면서 겪을 모든 것들은 건드려 본다고 보면 된다. 어릴땐 이랬고, 중년기엔 이러하며, 노년기엔 이렇게 되는구나, 간략하게 브리핑 들은 기분이랄까. 최신 의학적인 견해들로 인간의 생을 꼼꼼하게 해부한데다, 역사적인 인물들의 생에 대한 견해들을 모아놓은 것이 특징. 책을 쓰기 위한 것이라고는 하나 다양한 사람들의 견해를 모아놓는 것도 쉽진 않을텐데, 좀 조사를 했지 싶다. 나름 애를 썼다는 말씀.
그렇게 생에 대한 간략적인 스케치를 보여주고 있으나, 그보다 저자가 중점을 두고 하려는 이야기는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였다. 97살이 되었는데도 아직 죽기를 거부하면서 "나는야 삶이 좋다네"를 연호하는 아버지와, "죽는것도 그렇게 나쁘진 않아요" 라면서 아버지에게 죽음을 이해시키려는 51살의 아들의 이야기이니 말이다. 넌 제대로 살지도 않았는데 왜 그렇게 죽음에 집착하냐가 아버지의 질문이라면, 그렇게 오래 사셨는데 이젠 죽음을 받으들이셔도 되지 않나요? 그게 어른스러운게 아닐까요? 아들의 대꾸 되겠다. 넌 왜 늘 그렇게 비관적이냐?(아버지) 대 아버진 좀 이기적인 것 같지 않으셔요? (아들)의 결전이라고나 할까. 보시다시피 둘 다 질 생각이 없고, 둘 다 막상막하다. 어릴적부터 스포츠로 단련된 경쟁의식 덕분인지, 조금도 밀려나는 법 없이 자신의 견해를 고수하고 있는데, 둘이 부자지간이라는 것도 신기하고, 둘이 서로를 납득시키지 못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피를 나눈 혈연이라고 해도 이렇게 다를 수 있단 말이지...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요즘은 영원히 살겠다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성형수술로 플라스틱 미소밖엔 지을 수 없는 미녀를 만난 기분이랄까. 자신의 때가 되서 죽는것도 나쁘지 않다. 우리 모두 언젠가 죽는데, 그 죽음이 무서워 하루라도 더 연장하기 위해 벌벌 떠는 일은 사절이다. 내 자신에게만 그런게 아니라, 남이 그러는 것을 보는 것도 싫다. 역겹다. 포기를 배우는 것도,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우리가 배워야 할 점들이고, 그건 본인만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런면에서 난 작가의 시선에 공감한다. 삶이 아무리 좋다한들, 난리 버거지를 피면서 하루라도 더 연장할 생각은 없다. 작가는 말한다. " 죽음을 받아들이세요."라고...
이에 아버지는 대꾸한다. "삶을 받아들이거라..." 뭐,틀린 말도 아니다. 설사 틀린말이라고 해도 타인의 견해에 대해 왈가왈가할 입장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들었다. 아들이 보기에 아버지의 태도가 참 부담스럽겠구나 라는...자식의 입장에서 죽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는 부모를 보는건 그리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니 말이다. 아니, 그보단 민망하다고 해야 하나? 난감하다고 해야 하나. 한없이 불편하다. 죽음이란게 인간이 피해갈 수 없는 한가지 고비라면, 그걸 (나만은)넘지 않겠다고 발버둥치며 억지를 써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꼴만 사나워진다. 그런데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나이의 문제는 아니라서, 어린 나이에도 차분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는 반면, 97세의 나이에도 죽을 생각이 전혀 없는 저자의 아버지 같은 사람도 있다. 그럴때 자식이라면 생각하지 않을까. 부모는 우리보다 오래 살았으니 삶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철이 들었을 것이라고...그런데 죽음의 문턱에 섰는데도 준비는 커녕 죽음을 자신의 문제로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면 황당하지 않겠는가. 죽음이란게 그렇게 힘든 과제일까? 언젠가 아버지의 나이가 되면 나 역시도 그렇게 되는게 아닐까? 난 그러고 싶지 않은데...아들인 데이비드 실즈는 고민하고 반추하고 연구한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이 책 속에서 죽음을 어떻게 풀이하고 있을까? 과연 그는 죽음에 대해 모든 것을 고찰했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진 않다고 본다. 죽음을 파헤치기엔 그는 철두철미하게 잔인한 편이 못 된다. 비관적인 성향의 현실주의자이긴 하지만, 불편한 진실을 그대로 입 밖엔 내 놓을 정도로 불행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처럼 나르시스트도 골수 쾌락주의자도 아닌 그는 평범하고 따스한 가정이 최고인 가장일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은 죽음을 다루고 있다고는 하지만 작가의 성품답게 따스하고 정감이 넘친다. 그건 어느정도 죽음에 대한 본질적인 직시를 못했기 때문이라 본다. 죽음을 향해 살짝 사시눈을 뜨고 훔쳐 본 느낌 정도? 그는 왜 신랄하지 못했을까? 죽음을 피하려는 아버지를 보면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과거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추억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아버지가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아버지가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 설명하면서 아버지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그는 착한 아들이기에 결코 아버지에 대한 본심을 털어놓지 못했으리라 본다. 그런 주저가, 고발의 지연이, 저자가 죽음에 대한 모든 것을 고찰했음에도 결국 핵심을 빼먹은 듯 싱겁게 만든게 아닐까 한다. 그렇다. 본질에서 비켜가다보니, 말랑말랑하기 이를데 없다.
하니, 만약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으신 분들은 미국 단편 드라마인 < You don't know about Jack.>을 보시라고 권해 드린다. 인간은 죽음에 대해 너무 모른다. 평생 알아온 것이 삶뿐이니 놀랄 만한 사실도 아니지만서도.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환상이나 착각이라는 것을 그들은 짐작도 하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진실을 말하는 잭이 오히려 우리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알고 싶어하지 않은 진실을 확성기 들고 다니면서 떠들어 대니 말이다. 잭에 비하면 이 작가는 감상적이다. 왕따당할 것을 감안하고 글을 쓸 정도로 무자비한 사람이 못된다. 정직도, 용기도 부족하겠지만 죽어간다는 것을 곁에서 지켜본 경험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다. 만약 그런 경험이 있었다면 이 책이 이렇게 한가한 고찰로 끝나진 않았을 것이다. 뭐, 어쨌거나 죽음에 대한 전반적인 생각을 들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 그것이 본인이 죽음을 맞이했을때 어떤 도움이 되려나는 모르겠지만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