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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보우의 성
와다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들녘 / 2011년 1월
평점 :
일본 덴쇼 18년 (1590년), 전국 통일을 눈 앞에 두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마지막까지 반기를 들고 있는 간토지방을 평정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간토 지방의 제왕인 '호조' 가문의 비호를 받으며 100여년간 평화롭게 영지를 다스리고 있던 오시성의 나리타 가문은 그 소식을 듣고 고민에 휩싸인다. 호조를 배신하고 히데요시에 항복을 할 것인지, 아니면 명분을 쫓아 전쟁을 할 것인지가 문제였던 것이다. 무사 가문의 정신이나 충정을 생각하면 전쟁을 불사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성주와 대신들은 분함을 참으며 실리를 따르기로 한다. 성주가 자신이 호조성에 들어가 있는 동안 항복해 줄 것을 당부한 사이, 히데요시의 오른팔이라고 불리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대군을 이끌고 와 성을 포위한다. 무훈을 세워 히데요시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생각이던 이시다는 뜻밖에도 오시성 사람들이 항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오자 호적수를 만났다며 기뻐한다. 오라, 내 뜨거운 맛을 보여주마, 라며 시작된 전투는 하지만 어째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엉뚱하게 전개되 가는데....
자, 이제 오시성의 사정을 들여다보자. 성주인 사촌으로부터 항복할 것을 위임받았던 나리타 나가치카는 농민들에게조차 얼간이(노보우)라고 불리면서 희희낙낙하는 천하 태평한 자이다. 농삿일이 재밌다며 꼬박꼬박 거들러 가지만 제대로 하는 것이 없에 네살짜리 꼬마아이에게조차 구박 받는 그를 사람들은 격의없이 대한다. 그런 그에게 아무리 바보라도 항복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싶어 맡긴 임시 성주 자리에서 그는 사고를 치고 만다. 모두가 경악하게도 항전을 선언해 버린 것! 2만 2천명 대 5백, 말도 안되는 숫적 열세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어차피 승산이 없었다. 하지만 약자를 짓밟는 세력에게 물러설 수 없다고 외치는 노보우, 그의 말에 중신과 무사들은 갑자기 힘을 얻고 당당해진다. 당장 전투 태세에 돌입한 무사들은 성 주변의 농민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처음엔 우리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거절하던 농민들도 총사령관이 노보우라는 말에 도와줘야 한다면서(?) 달려온다. 농민들의 가세로 전투력이 4배(2천 정도) 늘어난 오시성은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다는 듯 기세가 등등해진다. 하지만 전쟁이 어디 기세만으로 이길 수 있나? 라는 비관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첫번째 전투에서 오시성 사람들은 대승을 거둔다. 작은 고추라고 얕잡아 봤다가 큰 코 다친 이시다 사령관은 째째하게 싸우느니 통 크게 수장으로 나가자고 결심한다. 사람들을 동원 임시둑을 만드는 거대 공사를 진행한 이시다 진영은 드디어 둑을 무너뜨리고, 물밀들이 밀려오는 물 앞에서 오시성 사람들은 두려움에 떤다. 단 한 사람, 얼간이 노보우만 빼고 말이다. 수장전략은 실패할 것이라면서 마냥 태연한 노보우의 속셈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오시성 사람들의 운명은?
대략 2만대 2천이라는 숫적인 열세에도 꿋꿋하게 대군을 맞이해서 잘 싸워준 오시성 사람들의 기개와 무사 정신을 그려내고 있는 소설이었다. 과장해서 말하면 일본판 적벽대전이라고나 할까. 물론 아주아주 많이 과장을 하고, 일본과 중국의 스케일의 차이도 고려해야 하며, 무엇보다 나관중과 와다 료라는 작가의 역량은 비교에 넣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를 달고 말이다. 저자는 아마도 과거 무사 정신을 낭만적으로 회상하는 사람인가 보았는데, 17세기 이야기라고 해서 고리타분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현대적인 해석이 더해져서인가 아니면 기본적으로 인간이라는게 달라질게 없어서인가 현대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특히나 등장인물들이 개성적이라는 점에서 읽는 재미가 있었다. 얼간이라고 불리면서도 전혀 노여움을 타지 않는, 모든 면에서 무능해 보이지만 진짜 나서야 할 때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줄 아는 나리타 나가치카는 새로운 리더상을 제시하고 있었고, 그의 소꼽친구 단바는 평소 무능한 친구가 한없이 못미더워했지만 결국 자신보다 그릇이 큰 인물이라는 점에 고개를 숙인다는 것이 멋졌다. 꼬꼬마 시절부터 무사기질을 보여주던 이즈미는 단바와 최고 무사 자리를 경쟁하다 드디어 진짜 전투를 하게 되서 신이 난 인물이고, 자칭 전술의 천재지만 체력이 약해 실기 한번 치뤄보지 못한 풋내기 무사 유키에나, 모두들 나가치카를 얼간이라고 부를 때 그의 진면목을 알아봐준 성주의 딸 가이히메 역시 틀에 박힌 성격이 아닌 본인 고유의 성정이 살아있어 마치 살아있는 사람들을 보는 듯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재밌었던 것은 농민들이었다. 자신들이 죽을지도 모르는 전투를, "우리가 도와주지 않으면 얼간이는 아무것도 못해..."라는 마음으로 나섰다고 하니 이 얼마나 감동적인가. 인간의 마음은 과연 무엇으로 움직일까? 그건 돈일 수도 있고, 폭력일 수도 있으며, 간계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위에서 아래를 다스린다는 종속적인 사고관은 인간의 마음을 진심으로 움직이게 하지 못한다. 단지 이해관계가 달렸을 때 잠시의 복종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면에서 얼간이는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고, 그것이 가식이나 허례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기에 힘이 있었다. 바로 그것이 그가 오합지졸을 이끌고 대군을 상대로 당당하게 싸울 수 있는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작가가 과거의 잊혀진 전투를 굳이 재조명해서 보여주려 한데는 그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근대 일본사史인데다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 나랑 뭐 관련이 있겠어? 재미 있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괜찮았다. 전쟁에 관심 있으신 분들에겐 흥미있는 책이 되지 않을까 한다. 딱히 전쟁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뭐 읽는데는 상관없지만서도. 이 전투는 백년 뒤에도 후손들이 언급할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던데, 삼백년이 지난 후에도 그들을 기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뿌듯해할까 싶다. 하긴 그들의 기개와 기상 ,꺽이지 않는 절개, 종속이 아닌 평등,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목숨을 걸고 보여주었으니 그래도 되지 싶다. 문득 책을 보니 표지에 이런 말이 쓰여져 있다.
" 애초에 저 성을 총칼로 빼앗으려 한 것은 실수가 아니었을까? "
그렇다. 실수였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은 수치로 환산하기 어려우니, 히데요시와 미쓰나리의 실수는 봐줄만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착오와 실수들이 역사를 재밌고 풍성하게 만들어 주니 말이다.
장점이 많은 책이긴 했지만, 소설적인 면에서는 작가가 간간히 흥분하고 오바하는 문장들을 사족처럼 끼워넣은 것이 별로였다. 본격 소설이라기 보다는 드라마나 영화 대본으로 쓰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올해 영화로 만들어져서 개봉된다고 한다. 과연 배우가 주인공인 얼간이를 어떻게 연기해 낼지, 다른 등장인물들이 책 속의 유머와 비장미를 어떻게 살릴런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영상으로 만들면 이야기가 더 풍성해 보이지 않을까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