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
A.M. 홈스 지음, 이수현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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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의 부촌에 홀로 사는 리처드 노박은 겉보기엔 부족한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살뜰히 보살펴 주는 가정부에 몸매를 관리해주는 트레이너, 노화방지 식단을 챙겨주는 영양사까지 주식으로 번 돈으로 돈 칠갑을 하면서 흥청망청 살아가던 리처드, 그의 평온한 삶은 갑작스런 통증으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대도 911에 대신 전화 걸어줄 이 조차 없다는걸 깨달은 그는 병원에 도착해 전화 걸 사람조차 없자 막막해진다. 용기를 내어 전처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돌아오는건 야박한 핀잔, 기가 꺽인 그는 더 이상 전화기에 손을 댈 생각을 하지 못한다. 병명을 모르겠다는 의사들의 말에 우울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오던 그는 갑자기 도넛이 먹고 싶어 충동적으로 도넛 가게에 들어간다.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나듯 그를 반기는 도넛 가게 주인 앤힐에게 리처드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주절주절 늘어놓는다. 리처드를 재치있게 위로하면서 앤힐은 그에게 도넛 상자를 건네주고, 돈을 건네는 리처드에게 자신을 무시한다면서 화를 낸다. 리처드는 이렇게 삭막한 도시에서도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위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는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하룻밤 사이에  자신이 서먹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건강하게 산다고 엄청난 돈을 쏟아 부었지만 정작 음식다운 음식은 먹지 못하고 살았던 것처럼 인간다운 접촉없이 오랜 세월을 보냈던 그는 울음을 멈출 수 없자 당황한다. 앤힐이 메르세데즈를 몰고 싶다는 말에 자신의 차를 몰고 도넛 가게로 향하는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통증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궁리하게 된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일 중독자였던 아내를 떠나 LA로 이사온 지 어언 10여년째, 아들 벤과 거리가 멀어진 것에 가슴이 찢어졌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 고통을 차단해왔다는걸 느끼게 된다. 아내를 벤을 동생을 만나야 겠다는 생각도 통증을 없애지는 못하자 그는 결국 진료를 받기로 한다. 의사는 심리적인 고통이 육체적인 고통을 야기할 수도 있다면서 그에게 고통을 유발할만한 일들이 혹 있었는지 되돌아보라고 한다. 다시 한번 곰곰히 과거를 돌아보던 그는 마트에 들렸다 야채가게 코너에서 울고 있는 한 여인을 발견한다. 왜 울고 있냐는 그의 질문에 당신은 변태냐고 앙칼지게 대꾸하던 그녀는 곧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엄마가 하인인줄 알고 있는 아이 셋에 무심한 남편, 반복되는 일상에 숨이 막혀버렸다는 그녀는 혹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는 그의 전화번호를 받아들고는 헤어진다.

 

한편 그의 거대한 저택 한쪽 정원에 구멍이 뚫리자 그는 다시 911에 전화를 건다. 로스앤젤스의 특성상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면서 혹 집이 무너질지도 모르니 대비를 하라는 공무원의 말에 리처드는 하는 수없이 말리부의  하얀색 집을 임대한다. 그 구멍에 이웃집 소녀의 말이 빠지자 그는 말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옆집 남자가 유명 배우라는걸 알고 있던 그는 허탕삼아 도움을 구하고, 배우가 헬리콥터까지 동원해 말을 구해내자 뿌듯해 한다. 말리부의 집에 둥지를 틀은 그는 거지같은 차림새로 쓰레기통을 뒤지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를 돕고 싶은 마음에 옷가지를 내다 놓았던 리처드는 그가 옆집에 사는 시나리오 작가라는 말에 깜짝 놀란다. 옆집 남자와 우정을 쌓고, "울던 여자" 가 집을 나오자 그녀를 도와주며, 간강범에게 납치되어 가던 트렁크속 여자마저 구한 그를 미디어에선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서, 자신마저 그런 일을 하는 자신이 낯설다고 말하는 그에게 드디어 아킬레스건이었던 아들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아들 벤을 만날 생각에 설레던 리처드는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벤의 격렬한 반항에 부딪히자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하는데...

 

원인을 알 수 없는 격렬한 통증덕분에 자신의 삶의 진정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한 사내의 이야기다. 처음 그는 통증의 원인을 몰라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짐작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일중독으로 인한 외로움을 아내와 대화로 풀어내지 못한 그는 한마디 저항도 못한 채 이혼을 하게 된다. 이혼을 하면서 아들 벤과 멀어지게 된 그는 자신이 슬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어 무감각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 마치 느끼지 못한다면 아무런 실패도 없었을 거라는 듯이... 감정은 그를 속일 수 있었지만 정직한 몸은 그렇지 않았다. 그 슬픔을 고스란히 간직했다 한꺼번에 터뜨려 버린 몸, 몸은 더 이상 고통을 담아둘 수 없었던 것이다. 하는 수없이 몸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이게 된 그는 꽁꽁 얼러두었던 자신의 감정을 되돌이켜 보게 된다. 그러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감정이 살아있는 섬세한 사람이었으며 , 사랑을 하고 도움을 주며 사랑을 주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마치 어제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다른 삶을 살게 된 그는 흐르는 물처럼 자신의 삶이 유연하게 흐르는 것에 놀라고 만다. 하지만 그런 유연함도, 남을 도우려는 다정함도, 타인과 공감하려는 마음도 과거의 고통을 다 치유해내지는 못한다. 남들에게 그렇게 친절하면서 왜 내겐 그렇게 하지 못했냐고 울부짖는 아들 벤을 보면서 비로서 그는 과거를 직시하게 된 리처드, 자신의 아들을 향한 절절하고 애타는 사랑을 한번도 전하지 못했던 것을 그제서야 후회하는 그는 과거의 잘못을 어떻게 바로잡아 나갈 것인가?

 

깜찍할 정도로 매력적인, 잘 짜여진 소설이었다. 20억년전에 멸종된 검치 돌아다닌다는 믿거나 말거나 소식을 뉴스로 전하는 이상한 도시 LA, 그 기괴한 도시에서 마찬가지로 기괴한 삶을 살고 있던 한 남자가 어떻게 이러저러한 소동을 거치면서 인간성을 되찾게 되는지 보여주고 있었는데, 넘쳐나는 소동과 어디로 흘러 들어갈지 모르는 사건들 속에서도 시종일관 잃어버리지 않던 작가의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한마디로 읽는 내내 흐믓한 미소가 멈추질 않았다. 처음 제목을 보고는 " 참 꿈도 크시네, 꿈 깨셔 "라며 비웃었는데, 처음 몇 페이지를 읽어가면서 그 냉소는 사라지고 말았으니... 물론 재밌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난 재미만 있다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 오랜만에 게 거품 물면서 엄마에게 읽을만한 책을 찾았다고 떠들어댔더니--눈이 나빠진 엄마는 요즘 내가 추천하는 책만 읽는다.--대강 줄거리를 들은 엄마도 수긍을 하신다. 특이한 이야기라고... 읽어가면서 마치 영화를 보는 듯 그림이 그려지길래 이건 누가 영화로 안 만드나, 영화로 만들기 딱일 것 같은데 했더니만 이미 영화로 만들고 있단다. 놀랍지도 않다. 기대된다. 누가 주인공으로 나올지, 울고 있는 여자는 누구일지, 옆집 작가 남자는 누구일지, 지극히 인간적이던 도넛 가게 주인은 또 누가 맡을 지...이런 저런 자잘한 이야기들로 아마 누가 감독을 맡는다 해도 말아먹긴 좀 힘들지 않을까 한다. 하여 이 영화도 미리 찜한다. 피할 길 없는 통증으로 인해 시작된 한 남자의 삶 되돌아보기 여정을 통해 감동과 재미를 느끼고 싶다시는 분은 보셔도 될 듯... 섬세한 붓으로 터치하는 듯했던 세밀하고 탄탄한 문장들이나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들, 그들이 나누는 개연성 넘치는 대화,이혼한 아버지의 심정을 생생하게 그려낸 것들이 다른 소설과는 차별되던 신선한 점이었다. 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하지는 못할 지라도 적어도 지루한 순간만큼은 구할지도 모른다고 감히 단언한다. 단지 단점이라면 좀 심하게 착하게 흘러간다는 것이니, 착한 것들에 알러지가 있는 분들은--특히 남자분들-- 멀리하셔도 상관없겠다. 난 분명히 경고했으니 나중에 딴소리 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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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lph 2010-01-31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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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에 하루키에 빠지지 않으면 바보고, 30대에도 하루키에 빠져 있으면 바보다>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다. 출처가 어디었던지 간에, 언젠가 그 말을 듣고는 그런가 머리를 갸우뚱했는데 이 책을 보니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건 아무리 좋게 보려해도 이 책이 좋아지지 않았는데, 그게 나이탓이지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바보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고, 정색을 하고 읽자니 매력적인 구석을 못 찾았다는 의미다. 이런 책을 재밌게 읽으려면 나사 하나는 빼놓고 읽어야 실감이 나련만, 이미 삶의 경험이 많다보니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조잡한 환상 소설을 읽기엔 내가 나이가 너무 많이 들었구나 싶었고, 육순의 나이에도 이런 글을 정색하고 써대는 하루키는 참 대단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필에선 그렇게도 공감가는 문장을 양산해 내시는 분이, 정작 본인의 주 종목인 소설에서 공감가는 문장을 못 만들어 낸다는건 좀 어이없지 않는가? 아,물론 다른 사람들은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거 안다. 의미심장하게 내 뱉어진 "당신의 하늘에는 몇 개의 달이 떠 있습니까?" 라든지 " 겉모습에 속지 마셔요, 현실이라건 언제나 단 하나 뿐입니다." "육체야말로 인간의 신전이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의 빅 브라더스의 대주자격인 리틀 피플의 등장, 아오마메가 집착해 듣는 바람에 그녀가 등장하는 곳엔 울려 퍼지는 "신포니에타" 난독증의 천재 소녀 후카오리가 좋아한다는 마태 수난곡, 읽는 것만으로도 침이 고이게 하는 요리들, 무엇보다 1984년의 조어 바꿈인 1Q84까지...열광하는 사람이 많다는거 잘 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내겐 별로 와 닿지 않았다. 그보단 별 의미없는 것들을 근사하게 포장하는데 하루키만큼 천재적인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뿐이다. 그만큼 글을 잘 쓴다는 의미일텐데, 그 잘 쓰는 문장력을 가지고 이런 대중소설밖엔 못 쓴다니 실망이었다. 물론 본인이나 다른 독자들에겐 안타까울 상황이 전혀 아니겠지만서도... " 이봐. 친구, 이건 소설이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구, 그냥 읽고 재밌으면 되지 않나? 내가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닌데 그렇게 정색할 건 없잖아?" 하루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맞다. 이건 그냥 소설이다. 심각할 것 전혀 없다. 그냥 심심풀이로 읽곤  망각속으로 던져 버리면 된다. 그래도 난 아마 기대를 한 것 같다. 하루키의 이름값이 있으니 읽을 만한 소설이 나와줄 거라는, 더군다나 10년만에 내 놓은 소설이었으니 말이다. 덧붙여 항변을 해보자면  " 저기, 하루키상, 이 건 재미도 없었다구요!"다. 조잡한 것도 유치한 것도 참을 수 있지만 재미없는건 못 참는다. 내 독서 취향 아시지 않는가?

 

줄거리는 뭐, 길게 쓰려면 한없이 늘어질테니 최대한 간단히 줄여 보도록 하겠다. TV수신료 징수원인 아버지에게 일요일마다 수금에 끌려 다녔던 덴고와 사이비종교집단의 부모를 가진 아오마메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열살 무렵 서로에게 끌린다. 좋아한다는 말도 못한 채 손 한번 꽉 잡아보아 보는 것이 애정표현의 끝이었던 둘은 서로가 상대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채 서로를 그리워 한다. 소설가가 되려 했지만 지금은 고작 고스트 라이터인 덴고와 여자를 폭행하는 질 나쁜 남자를 다른 세상으로 이사 보내 버리는 일을 맡고 있는 킬러 아오마메, 한마디로 사회적으로는 성공했다고 볼 수없는 일을 하고 있던 둘은 <공기 번데기> 라는 책을 들고 나타난 난독증 환자 후카에리와 그녀의 아버지를 통해 서로에게 다가가게 된다. 리틀 피플이라는 상대를 통제하는 어떤 존재로부터 도망친 후카에리와 그녀가 도망치면서 남기고간 도터와의 교접으로 교단의 교주가 되버린 그녀의 아버지, 바람 피우던 엄마에 대한 기억으로 아버지가 생부가 아닌게 아닐까 의심하는 덴고, 덴고에 대한 아련한 사랑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진정한 애정은 멀리한 채 하룻밤 섹스에만 몰두하는 아오마메... 그렇게 종교와 섹스와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들과 요리과 음악과 역사와 살인과 폭력이 두 편에 걸쳐 난무하는 가운데, 진정한 사랑을 위해 아모마메는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하는게 되니,  과연 덴고와 아오마메의 서로를 향한 진정한 사랑은 이뤄질 수 있을 것인가? 결론은 다음편에...

 

이 책에 대한 칭찬은 다른 리뷰어들이 넘치도록 했으니 난 맘에 안 든 것만 쓰기로 하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의문이던 것은 소설의 기승전결이 있다면 기승만 보여주고 끝을 맺는 황당함이었다. 다음 편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면 소설적인 실수인걸까 싶었는데 어제 뉴스에 보니 하루키는 다음 편을 이미 쓰고 있다고 한다. 그럼 그렇지... 그렇다면 적어도 끝이 그런 것이 이해가 간다. 전쟁을 막 시작을 해놓곤 달을 보는 것이 마지막이라는건 마무리론 영 어색했다. 다음에 이어질 것이 있다면 수긍이 되는 장면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피곤에 절어 서둘러 끝을 낸 불성실한 작가라는 말을 들었어야 했을 것이다. 아니면 길이 조절에 실패했거나...어쨌거나 그 의문에 대한 것은 후편을 쓰는 중이시라니 해결 됐고.

 

언젠가 하루키의 수필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아이를 낳아 길러본 적도 없고, 심지어는 갓난 아기를 얼러 재워 본 적도 없는 사람이겠단 추측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때론 자라지 않은 청년 같다는 느낌을 준다. 20대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 난 사랑을 관념으로만 본다는 것을 들겠다.--쉽게 말해 환상에 산다는 뜻이다. -- 그런 사랑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것은 우리가 사랑을 일상에 대입해 봤을 때 시작된다. 사랑은 관념이 아니고, 일상이라는 것을, 하여 가장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일상을 나누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야말로 성숙의 한 단계라고 난 생각한다. 다른 독자들이 가장 부러워한 이 소설의 주인공들의 사랑을 보자. 그 둘은 열 살때 만나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다. 불우한 가정, 어른답지 않은 부모를 둔 불행의 그늘을 서로에게서 읽은 둘은 평생 서로를 그리워하며 사랑한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사랑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육체적인 것으로만 한정하면서도 서로를 찾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사랑이 깨지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관념적인 사랑이나마 머리속에 간직하는게 나았던 것이다. 어떤 사람이 보기엔 그것이 대단한 사랑으로 비춰질 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보기엔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어떻게 육체와 사랑이 그렇게 철저히 분리될 수 있나? 하루키가 남자라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할 지는 모르겠으나, 그건 육체에 대해서도 사랑에 대해서도 모욕이다. 모욕에 앞서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부족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두뇌가 그렇게 작동하면 얼마나 좋겠나 만은 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위한 단순화를 위해 그렇게 터프한 성격의 주인공이 등장해야 했는지 모르지만, 그래서인지 소설속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한결같이 현실성이 떨어져 보였다. 매 맞는 아내들은 자살로 생을 끝맺고, 섹스는 꼴리는 대로 아무나와 하면 되는 것이며, 아버지와의 근친상간이 횡횡하는...그들의 인생엔 삶이란게 없다. 자극적인가? 맞다. 오로지 자극적이다. 나름대로 수긍이 되는 이유가 있긴 했지만 어쩐지 작가의 의도가 다분히 숨겨져있는 설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독자들의 심성을 자극할 것. 도발적이면 도발적일수록 좋음이라는 단서를 달아서...그런거 외엔 독자의 주목을 끌만한게 그렇게 없단 말인가 싶어 섭섭한 마음 금할 길 없었다. 우리 그것말고도 재밌다고 생각하는거 엄청 많은데 말이다.

 

이 책을 보면서 동경 지하철 사건이 하루키에게 미친 여파가 꽤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옴 진리교의 아사하라 교주였던가? 그 사건에 대해 하루키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집착 수준일 줄은 몰랐다. 10년에 걸쳐 쓴 소설의 주 무대가 사이비 컬트 종교 집단이라니...달리보면 그건 그 10년동안 일본에 그렇게 관심을 끄는 사건이 없었다는 말도 된다. 언젠가 일본 작가들이 우리나라 작가들을 부러워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전쟁에 분단에 이데올로기 싸움에 독재에 민주화에 영호남 패 가르기 등등 워낙 사건 사고가 많은지라 작가로썬 쓸만한 재료가 무궁무진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치고 박고 싸우고 네가 옳으니 아니야 넌 틀리니 하다보니 아무래도 치열하게 상황을 주시하게 되고, 공론을 거치다보니 어떤 것이 인간적인가? 휴머니티적 심성이 저절로 발달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보면 불행이 때론 결과적으로 100% 나쁘기만 한 건 아니지 싶다. 적어도 넓게 보는 시야를 틔워 줄 수고 있고, 삶에 대해 나태하기 힘들며, 무엇보다 휴머니즘이라는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게 되니 말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하루키가 노벨상을 타지 못한다면 그건 전적으로 일본에서 태어나서라고. 저런 재능을 가지고 우리나라나 이스라엘에 태어났다면 그는 40대에 이미 노벨상을 타고도 남았을지 모른다고 말이다. 홀로 달리기를 하면서 자신에게 적당히 게으를 시간을 주지 않는 사람이라는건 알겠는데, 아마도 너무 오래 홀로 달린 모양이지 싶다. 우린 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런면에서 그의 책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내겐 좀 의외다. 재미가 있어서? 책 장이 잘 넘어가서? 단지 그런 이유로? 오~~~ 사랑 타령을 할 생각이면 말을 꺼내지 마라. 삶을 공유할 생각이 전혀 없는 관념만의 그리움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미 안다. 솔직히 덴고를 위해 죽겠다는 아오마메를 보곤 웃고 말았다. 뭐야. 이건, 메트릭스의 네오도 아니고 말이지. 네오는 적어도 멋있기라도 하지...

 

그럼에도 도입부의 고속도로 사건이 매우 호소력있었다는 점만은 인정하고 넘어가야겠다.  그때의 박진감과 신선함을 이어나갔더라면 참 좋았으련만, 한 200페이지 넘어가면서 집중이 흐트러지길래 그때부터 아예 기대를 접고 봤더니 편하더라. 그나저나 다음편을 쓰고 계시다고? 에고, 다음편이 나올땐 또 얼마나 호들갑을 떨런지...벌써부터 아득해진다. 신빙성 넘쳐나던(?) 리틀 피플이랑 꼭 싸울 필요는 없다고 누가 덴고와 아모마메에게 전해주면 좋겠다. 그냥 무시하면 없어질지 모르니 그 방법을 쓰면 어떻겠느냐고 말이다. 물론 안 먹혀 들어가겠지?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달리면서 리틀피플과 어떻게 싸워야 할지 고민하고 계실 하루키님에게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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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영차 2009-09-29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가 옴진리교 사건(도쿄지하철 사린가스살포사건)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에 의아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최근 읽은 후지와라 신야의 '황천의 개'를 읽고서 그 사건의 배경과 일본인이 그 사건에 가지고 있는 충격의 저변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네사 2009-09-29 21:36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아마도 겉에서 보는 것과 달리 일본 사람들에게 다른 의미의 충격이 있었던 모양이네요.
뭐, 이런 말하면 그렇지만, 광신도들이 문제를 일으키는건 비단 일본 사람들의 문제만이 아니죠. 우리나라에서도 집단 자살이 있었고 말이죠.
황천의 개를 읽어보면 저도 일본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가려나요?
한번 봐야 겠군요.^^

lazydevil 2009-11-09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며 읽었습니다.^^ 그래도 재미는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그 작가의 그 글발에 대한 반가움이 컸지만요.
'아오마메의 결심' 역시 황당했더랬습니다. 근데 아오마메는 네오쪽보다는 트리니티 쪽인 거 같지만요.^^;

이네사 2009-11-11 11:07   좋아요 0 | URL
많은 분들이 그래도 재미는 있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런면에서 저랑은 다르신 것 같더군요. 전 별로 재미도 없었거든요. 하루키의 글발에도 별로 감흥이 없었구요. 아마도 제 취향이 아닌 모양이여요.

여자라서 트리니티라고 하신 거죠? 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음을 결심한다는 의미에서 네오라고 한 거랍니다. 2편에서 그런줄 알고 있는데. 제 기억이 잘못 되는지도 모르겠네요. 어쨌꺼나 누가 됐던지 간에, 비슷한 설정인데, 이 책속에서는 웃음이 나오더라는... 참 ,손발이 오그라드는 사랑이네 하면서요.
 
더크 젠틀리의 성스러운 탐정사무소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공보경 옮김 / 이덴슬리벨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만약 당신이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 팬이라면, 이 책은 왠만하면 패스하는게 좋지 않을까 한다. 횡설수설이 정신 사나움의 경지에까지 이르는걸 보면서 심히 심난해졌으니 말이다. 도대체 이 책은 언제 쓰신걸까? 궁금해진다. 마지막 작품이 아니길 바랄뿐이다. 4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은 것도 억울한데, 이런 작품으로 이미지까지 구긴 채 죽었다면 정말로 억울할 것 같으니 말이다.  '만회할 기회를 줘 ' 하면서 이 책에 나오는 고든처럼 유령으로 지구를 떠돌고 있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가 될 만큼 엉성했다. 얼마전 읽은 밀레니엄 3부엔 편집장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을 읽으면서 과연 작가는 그 글을 쓸때 자신이 얼마후 그렇게 죽을 거란 것을 짐작이나 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어 우연치고는 희한하단 생각이 든다. 이 책속엔 고든이란 인물이 등장하는데, 영문도 모른 채 급사하자 자신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는 말이 쓰여져 있었다. 아마 더글라스 애덤스가 말을 할 수 있었다면 그 역시 죽어가는 순간에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걸 보면 작가들이야말로 등장인물을 죽일때 조심해야 될 것 같다. 자신이 창조해낸 등장인물이 죽는 그대로 자신이 죽게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말이다.

 

줄거리는 분명 하는 일도 없어 보이는데 대학에 영구히 짱박혀 살고 있는 리즈 교수님의 부름을 받고 리차드가 학교를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동창인 더크 젠틀리의 소식을 아냐고 묻는 리즈의 말에 리차드는 엉뚱하다고 말하기엔 어휘가 부족한 인물이던 그를 회상한다. 리차드의 상사인 고든은 무엇이든 믿도록 프로그램이 입력된 전자수도사에게 살해되자 유령이 되서 떠돌게 된다. 한편 탐정이 된 더크 젠틀리는 리차드를 협박해 리즈 교수님의 비밀을 알아낸다. 교수가 타임 머신을 갖고 있다는걸 알아낸 두 사람은 타임머신의 이용을 간절하게 원하는 사락사란 외계인의 추척을 받게 된다. 지구의 생명체의 기원이 되었던 우주선 폭발을 주도한 인물이었던 죽은 사락하는 그동안 유령이 되서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타임머신을 이용해 폭발전 과거로 돌아가서 모든 일을 바로 잡고 싶다는 사락사의 염원은 과연 이뤄질 수 있을까?... 결론이 궁금하신 분은 아쉽게도 다른 편인 <길고 어두운 영혼의 티타임>을 기다리셔야 겠다. 그것까지 보면 이 책이 좀 사랑스러워 보일라나? 어쨌거나 강조하고픈 말은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한번도 웃지 않았다는 것이다. <은하수>를 쓴 작가라면 적어도 한번은 웃겨야 하는게 아니야?  하여 이 책의 교훈은 심각한 더글러스 애덤스는 굉장히 심난하다는 것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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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혼돈 - Quiet Chao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초췌한 모습의 남자가 벤치에 앉아있다. 실은 그는 딸의 학교 앞 벤치에서 진을 치고 있는 중이다. 다소 흐트러진 차림이지만 얼마전까지만해도 넥타이에 명품 양복에 완벽한 출근 복장으로 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도대체 그는 어떤 이유로 학교 앞 벤치를 지키게 된 것일까?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기로 하자.

 

별장으로 휴가를 간 피에트로 팔라리니( 난니 모레티 역)는 해변에서 동생과 공놀이를 하다 물에 빠져 살려달라는 여인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위험하다는 주위의 만류에도 물에 뛰어든 그 둘은 다행히 여인들을 구하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조차 하지 않자 괜한 일을 했다며 불평한다. 구해준 여인들의 미모가 어땠느니 저땠느니 하며 별장으로 돌아온 형제는 그 사이 피에트로의 아내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걸 알게 된다. 아빠를 발견하고 뛰쳐 나온 딸은 도대체 아빠는 어디에 있었냐고, 내가 그렇게 불러댔는데 라며 절규한다. 믿기 힘든 현실이 갑자기 자신의 앞에 뚝 떨어진 피에트로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채 멍한 표정을 짓고 만다.
 

아내의 장례식이 끝나고 난 뒤 딸의 첫 등교일... 딸이 한없이 안스럽기만 피에트로는 딸에게 학교 밖에서 지키고 있을테니 걱정말라고 말한다. 그리곤 그 말 그대로 하루종일 학교 앞에서 죽치고 앉아 딸을 기다리기 시작한다. 단 하루로 끝이 날 줄 알았던 그의 학교 지킴은 그 이후로도 쭉 이어져서 점차 그는 학교앞 생활에 익숙해지게 된다. 비서를 통해 회사 일을 하고, 친구들도 벤치로 그를 찾아오며, 학교 창문을 통해 딸과 손 인사를 하고, 주변 까페에서 식사를 해결할 곳도 마련한다. 매일 학교 앞을 어슬렁대면서 주위를 살피던 그는 늘 같은 시간에 지나치는 낯선 사람들에게마저 익숙해진다. 차의 삑삑대는 경적 소리를 좋아하는 다운증후군 아이를 위해 매번 신호를 보내주고, 개를 산책시키는 미모의 여성에게 반하기까지 하는 그. 괜찮다는 말에도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지인들은 그가 아내와의 사별로 정신이 완전히 나간 모양이라며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 중 한 인물이 바로 처제 마르타다. 언니의 죽음으로 형부 못지 않게 맛이 간 그녀, 아니 그보다 더 화끈하게 맛인 간 그녀는 형부를 만나러 온 학교 앞에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옷을 벗을 만치 열정적인 여자다. 유부남의 아이를 가졌다고 고백하는 그녀는 너무도 냉정하게 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형부를 비난한다. 사랑하지 않았으니 언니의 죽음을 그렇게 침착하게 받아들이는게 아니냐고 다그치는 처제에게 피에트로는 발컥 성을 낸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피에트로의 동생도 그를 찾아 학교로 온다. 넋을 잃은거냐, 비탄에 잠긴거냐, 상심해서 이러는거냐는 동생의 질문에 피에트로는 다 아니라고 대답한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자신은 상관하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한편 저녁식사 모임에 나갔던 동생 카를로스는 할 말이 궁해지자 해변에서 여인들을 구해준 이야기를 모험담처럼 들려준다. 그의 말을 유심히 듣고 있던 엘레노라라는 여인이 통곡을 하고, 동생은 그때 해변에서 구해준 여인중 하나가 그녀임을 알게 된다. 감사 인사를 하겠다면 역시 학교 앞으로 피에트로를 찾아온 엘레노라는 자신을 구해주러 갈때 만류했던 인물이 누군지 혹 알겠느냐며 사진을 건넨다. 구조를 만류했던 남자가 사진속의 인물이며 그가 알레노라의 남편임을 알게 된 둘은 조용히 충격에 휩싸인다. 피에트로가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있던 그 순간에 한 남편은 아내가 죽기를 바랬으며,  또 그런 그녀를 자신이 구했다는 아이러니가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런걸 두고 운명의 비틀림이라고 하는 것이겠지. 후에 엘레노라가  대기업 회장의 정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불행한 부부의 숨겨진 뒷 모습을 보게 된 것 같아 찝찝해 한다. 친구인 장 끌로드의 험난한 결혼 생활마저 피에트로를 심난하게 하는 가운데, 그는 엘레노라의 매력에 잠시 빠져든다. 

딸에게 책을 읽어주는 피에트로, 눈이 오던 날 기뻐 날뛰는 딸을 보고 흐믓해진 피에트로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뭘 받고 싶냐고 묻는다. 큰 선물을 하고 싶다면서... 엄마의 죽음을 조용히 당차게 이겨내고 있던 딸은 아무리 좋은 일도 두번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면서, 이젠 자신을 그만 지켜도 되니 아빠의 회사로 돌아가라고 주문한다. 영리한 딸의 말에 말문이 막혀 버린 피에트로, 그 누구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던 그는 그렇게 딸의 한마디에 고집을 꺾게 된다. 그가 딸의 학교를 등지고 회사로 차를 몰고 가는 장면으로 피날레를 장식하던 영화였다.
 
사랑하는 배우자나 형제등을 잃은 사람에게 세상은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생판 다르게 느껴지는 세상에 허둥대며 적응해나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무엇보다 상실감은 소화해 내기 쉽지 않은 감정이다. 그럴때 평소때라면 전혀 하지 않을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어쩜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슬픔은 당신만의 것이라고 믿는 우리네 세상에선 소리높여 우는 것마저 여의치 않다. 죽은 이를 묻는 절차를 밟고 나면 남겨진 이들이 곧바로 정상적인 일상으로 되돌아 올 거라 믿지만 ,그들은 알까? 그때가 바로 남겨진 자들에게 고통과 홀로 대면해야 하는 시간의 시작임을 말이다. 그렇게 남겨진 자들은 자신들의 일상을 어떻게 살아나갈까? 라는 질문으로 시작된 영화는 상실의 충격에서 절절매는 한 남자를 등장시켜 죽음에 대해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비록 겉으로는 조용하고 침착해 보이지만 속은 죄책감과 고통과 불안이란 감정의 회오리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이 연약하기 그지없는 남자를 통해서 말이다.
 
그 남자는 학교 앞 공원 벤치에서 하교하는 딸을 기다리며 하루종일 진을 치고 산다. 그건 아무리 너그럽게 봐준다해도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이다. 비록 그것이 엄마를 잃은 딸을 위한 배려 같아 보이지만,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않다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아내를 잃었다. 달랑 세명뿐인 가족이었지만, 자신의 가장 소중한 울타리에 구멍이 뚫려 버렸다. 주인공은 나머지마저 잃게 되는 것은 아닐까 불안에 떨게 된다. 그런 이유로 그는 딸의 학교 앞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지키고 있으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다른건 몰라도 사별의 고통만큼은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주인공은 그리하여 오늘도 내일도 학교 앞을 지킨다. 그런 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지인들은 그를 보면서 혀를 찬다. 아내를 잃더니 완전히 맛인 간 모양이라면서...물론 그는 그들의 반응에 상관하지 않는다. 타인의 생각에 응대할 정도로 감정의 여유가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묘미는 학교 앞에서 진을 치고 있던 그가 점차 주변의 상황을 의식하게 되면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상대하던 그는 자신의 상황을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된다. 바람 핀 아내가 죽기를 바랐던 남편과 아무리 바람이 났다지만 그래도 아낸데 살릴 생각을 안 한 남편에게 충격을 먹은 아내, 건 입을 주체 못하는 아내에게 열 받은 남편과 그런 남편을 정신병자 취급하는 아내등 타인의 비참한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결혼을 되돌아본다. 그리곤 비록 생각지도 않게 아내를 잃어야 했지만 아내를 사랑함에는 모자람이 없었다는 생각에 위안을 얻는다. 아내가 없는 삶에 새로운 일상이 되어준 사람들에게 다정한 시선을 보내던 그는 점차 아내가 없다해도 삶이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을 얻게 한데 다른 누구도 아닌 딸의 도움이 컸다는 것은 의미심장했다. 사별의 고통을 함께 겪은 딸만이 그를 통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일도 두번은 안 일어난대, 그러니 나쁜 일이야말로 두번 일어날리 없지 않겠어? 아빠, 내 걱정말로 이젠 세상을 향해 나가...라며 아빠의 등을 떠미는 딸, 참 흐믓한 장면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이탈리아 영화로, 그들의 세상을 바라보는 다정하고 인간적인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감독이 슬픔을 극복하는 시간을 지극히 천천히 흘려 보낸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에게 슬픔이란 정면을 마주하기 힘든 감정이다. 고통에 처한 사람들에게 "빨리빨리" 회복될 것을 주문하는 것은 그만큼 그것이 불편하단 증거일 것이다. 내 마음 편하려고 네 감정을 추스리라 다그치는 우리 사회에선 "아직도? 여전히?" 고통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이 감정적인 사치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될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별의 고통은 정말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감정적 에너지다. 격하게 울지 않는다고 해도 그 속이 어떨지 짐작할 수 없는 것이며, 고통때문에 맛이 살짝 가도 괜찮다고 할만큼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놀란 것은 아내를 잃은 그에게 사람들이 시간을 준다는 것이었다. 비록 완벽한 이해를 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두 공감하고 있단 뜻이다. 솔직히 그런 여유가 보는 내내 참 부러웠다. 감정을 겪어내고 이겨내는 것은 지극히 사적인 경험이며 자신이 아니면 극복해낼 수없는 것이니 말이다. 도움을 줄 수는 없지만 기다려 줄 수는 있다는 그들의 태도는 우리가 배워야 하는게 아닐까 싶었다. <아들의 방>을 감독한 난니 모레티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한번 봐도 좋을만한 영화로, 어찌된게 그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멋있어지지 싶다. 그를 좋아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인생의 불공평함을 목청 높여 주장하고 싶어졌을지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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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지대 고라즈데
조 사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논그림밭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책을 펼쳐드니 <신은 위대하지 않다>의 저자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헌사가 쓰여져 있다. 세계 10대 지성답게 적확하고 매끄러운 글솜씨, 그가 이 책이 괜찮다고 칭찬을 한다. 그냥 하는 말 같지는 않아 믿음직스러웠다. 닉 혼비도 칭찬하고, 히친스까지 나서서 괜찮다고 했으니 이젠 읽어보기만 하면 되겠네 ...라는 마음으로 다음 장을 열었다. 실은 이 책을 읽는 것이 꽤나 망서려졌었다. 우습게도 난 전쟁에 관한 이야기 듣기를 싫어한다. 그들이 얼마나 인간답지 않은 일들을 행하고 있다고 한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고, 또 그들의 인간답지 않은 일들을 시시콜콜 듣는다는 것이 적잖이 고역이기 때문이다. 가슴을 후벼파는 이야기나 등골이 서늘해지는 이야기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다. 그래서 이 책을 집어들면서도 제발... 너무 잔인하거나 무섭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보스니아 내전을 다룬 책이라면 그걸 기대한다는 것이 무리일지도 몰랐지만서도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책의 저자는 그걸 해냈다. 너무도 쉽게 해내서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말이다. 저자의 명성이 어디서 왔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는 자극적인 묘사나 드라마틱한 이야기로 눈길을 끄는 작가가 아니었다. 단지 인간을 보다 더 이해하고 도와주려는 따스한 마음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었지... 히친스가 칭찬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이 책안에 무엇을 담고 있을까 ? 

 보스니아 내전이 끝나갈 무렵, 세르비아계 무장군에 둘러싸인 무슬람 마을이 있었으니 바로 이 책의 제목인 고라즈데다. 유엔 평화 유지군에 의해 안전지대로 지정된 이후, 역설적이게도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지 않은 지대가 되어버린 고라즈데, 봉쇄정책으로 사람들이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않은 상태를 2년간 겪고 있던 그곳에 기자신분으로 가게된 조 사커는 과연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생각과는 달리 그들은 잘 살고 있었다. 부족한 것 많고, 많은 것들이 파괴되었으며, 친척들과 지인들 대부분이 죽어나갔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삶을 살아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왜냐면 희망을 잃는 것은 바로 다름아닌 미친는 것과 동일어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를 경계했던 무슬림인들도 그의 진심을 알고는 경계를 풀게 된다. 외국 기자들에게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들을 최선을 다해 보여주려 애를 쓰던 통역인 에딘, 입만 열었다 하면 팝송을 불러 제끼던 리키, 그들의 절망을 보여주지 못해 화가 난 다른 통역인, 미친 사람, 부족한 물자로 사람들을 먹이려 최선을 다하던 여자들과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앞장 서 나선 사람들, 밀려드는 부상자들을 치료하다보니 잠을 잘 수도 없었다는 야전병 의사와 간호사들...그들의 겪은 전쟁은 이루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하지만 조 사커가 놀란 것은 그들이 대단히 침착하다는 것이었다. 한때 친구였던 사람들이 총구를 겨누고, 목을 따는 것을 지켜봐야 하고 ,인종 청소란 이름으로 강간을 자행하는걸 겪었음에도, 그럼에도 살아있기에 삶이 계속된다는걸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작은 것들을 소망하는 그들을 보면서 조 사커는 돕기 위해 나선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들의 봉쇄는 얼마후에 풀렸다고 한다. 

이 책을 보면서 과연 우리나라에 전쟁이 일어났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우리도 일상을 영위하려 애를 썼을 것이다. 비극을 뒤로 한채 새로운 삶을 살아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겠지. 왜냐면 그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지나간 뒤라도 어찌 인간이 인간 아닌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전쟁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사람들의 고통과 상흔, 그리고 삶에 대한 애착과 일상에 대한 소중함을 잘 그린 만화였다. 쉽게 읽히고 공감이 빠르다는 것이 장점. 무엇보다 감정이입이 어렵지 않아, 마치 내가 전쟁의 당사자인양 몰입이 되었다. 전쟁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알고 싶으신분들은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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