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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유령일 뿐
유디트 헤르만 지음, 박양규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의 근거지인 베를린을 떠나 여행을 간 사람들의 이야기 일곱편을 묶은 단편집이다. 아마도 작가는 베를린이란 도시만으로는 갑갑했던 모양이다. 아이슬란드로, 미국으로 ,이탈리아, 프랑스, 체코, 노르웨이 등으로 여행을 떠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쓴 걸 보면 말이다. 나이도 성별도 떠난 이유도 다 제각각인 소설속 주인공들이 들려주는 일곱가지 색깔 이야기, 닮은 듯 다른 이야기를 한데 묶어냈다는 것만으로도 작가의 역량이 짐작된다. 그런데 왜 작가는 여행을 소재로 글을 쓴 것일까? 그 질문에 답을 하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는 왜 여행을 하는 것일까에 대한 의문이 떠오른다. 그렇다. 우리는 왜 떠나는 것일까? 혹 이방인이 되고 싶어서 떠나는 것은 아닐까? 나와 다른 나를 연기해도 얼마든지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말이다. 너저분한 일상이나 어딘가 버렸음 딱 좋겠을 책임과 의무들, 마주치고 싶지 않아도 만나야 하는 사람들을 잠시 피해서, 오로지 진정한 나 자신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떠날 수 있는 것이 여행 아니겠는가. 마음껏 내 자신이여도 좋고, 또는 마음껏 내가 아니여도 상관없는 자유가 주어지는 것, 그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이 단편들의 특징을 꼽자면 지극히 일상적이고 담담한 톤으로 그려냈다는 점을 들어야 하겠다. 작가에게 여행은 거대한 이벤트가 아니라 (악!!! 나 드디어 여행가요! 가 아니라는 말씀) 그저 일상의 연장으로써의 의미밖엔 없어 보였다. 그저 사물을 좀 더 객관적이고 심층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닫힌 장소로써 쓰여다고나 할까? 물론 감각이 깨여있다는 점은 일상과는 달랐다. 주로 느른하고 소심하며 말을 내뱉기보단 삼키길 잘하는 사람들이 주인공들이다보니-- 아마도 작가가 그런 성향의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그들에게 무슨 말을 시키려면 여행이라는 조치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이 대단한 것을 발견했냐고? 아니, 그렇지는 않았다. 작가는 한 치도 높아지지 않는 톤으로 그들의 여정을 설명한다. 그리곤 잡힐 듯 말 듯 그들이 느낀 것들을 풀어놓는다. 너무 미묘하게 풀어놓은 통에 그들이 어떻다는 것인지도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그들이 행복해졌냐고? 그들이 깨달음을 얻었냐고? 본질적으로는 그들이 달라졌냐고? 글쎄. 어쩜 그들은 굉장한 것을 손에 넣었을 수도 있다. 아님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그저 돌아왔을 뿐이거나... 우린 여행을 통해 어떤 것을 얻기를 바라지만 실제로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 있고, 반대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많을 것을 얻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어떤 것도 해석이 가능하다. 작가가 말하려는건 그들이 무엇을 했고, 말하던지간에 우리의 본질을 흔들어 놓는 사건은 우리 내면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말하려 하는게 아닐까 싶었다.
일곱개의 단편들 중 친구의 애인과 바람이 나면서 친구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나 (루스) 일생일대의 사랑을 만났으나 한마디로 하지 못한 채 보내버린 가이드의 이야기 (차갑고도 푸른 ), 취소된 카니발에 초청가수로 세상 끝 마을에 도착한 두 남녀가 일상에 지친 한 부부와 조우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단편(아리 오스카손에게 향한 사랑)등이 인상적이었으나 , 이 책의 백미를 꼽으라면 단연 < 단지 유령일뿐>이었다. 닳고 닳아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연인이 미국 사막으로 여행을 간다. 더 이상 운전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머문 마을에서 그들은 이상한 체험을 하게 된다. 손바닥만한 마을, 빈방있다고 선전하는 모텔, 혼자 사막을 걷는 여인을 두고 지나치지 못하는 트럭 기사, 마치 <바그다드 까페>를 연상시키는 술집, 유령을 잡겠다며 요란스런 기구를 들고 찾아온 중년의 여성, 카리스마 넘치는 술집 여주인, 사막에서 한번도 떠난 적이 없다는 한 사내를 그들은 하루밤 사이 만나게 된다. 아내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지만 아이의 엄마기에 그녀를 떠날 수 없다는 사내와 그런 그를 강렬하게 바라보는 술집 여주인을 보면서 둘은 마음이 풀어진다. 유령 사진을 찍겠다고 나선 정신나간 여인의 소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막 거주자들의 인정에 휩쓸려 버린 두 사람, 결국 모두와 함께 사진을 찍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다음 날, 마치 오랫동안 인적이라고 없어 보이는 술집 앞에 선 그 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 둘 만의 인생을 시작한다는 것이 줄거리다. 눈이 번쩍 트였을 만치 돋보이는 수작이었다. 그냥 그대로 영화로 만들어져도 손색이 없을 만큼 탄탄한 이야기에 기승전결이 뚜렷한 구성, 신비롭고 흥미가 동하는 사람들, 지도상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막의 외진 마을의 버려진 듯한 분위기,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좌절과 절망, 그들이 말하는 희망과 삶의 끈기, 별종에 대한 다정한 관심등이 세련된 묘사로 그려져 있었다. 단지 일상적인 디테일만으로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꾸며 내던 이야기꾼으로써의 작가의 역량이 탁월해 보인다. 작품을 읽으면서 다소 심드렁했던 자세를 한 순간에 고치게 만든 단편으로, 이 한편만을 위해 이 책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니, 혹 다른 작품들을 읽으면서 취향에 안 맞는다고 실망하신 분들이라도 꼭 <단지 유령일뿐> 만은 읽고 넘어가시라고 권하고 싶다.
<밑줄 그은 말>
나중에 나는 그의 말을 바로 알아차렸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사실이 달라졌을지, 내가 다른 결정을 내렸을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의 말을 의심없이 들었어야 했다. 그가 "넌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니? "라고 물었을 때 나는 그가 뜻한바와는 전혀 다르게 이 말을 이해했다. 그런데도 그는 나를 바로 알아보았다. 그는 사실 이렇게 말했다. " 너한테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고, 너는 어떤 약속을 받아낼 수도 없는 그런 배신자니? "그는 "나 때문에 루스를 배신할 거니?하고 물었고 나는 " 그래. "라고 대답했다.--54
몇년 뒤 그녀는 펠릭스와 함께한 그 시간을 통해 적우도 한 가지는 배운 게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에게 아무것도 강요할 수 없다는 것, 특히 사랑 같은 것은.우스꽝스러운 깨달음이긴 하지만 그런데도 위로가 되었다.--193
버디는 그의 아내가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잃어버렸는데, 어쩌면 여기 오스틴에서의 삶 때문이거나, 아니면 삶 자체가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아이의 엄머니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녀를 사랑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난 그녀를 사랑해. 그녀는 내 아들의 엄마잖아."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그들 사이에 머물러 있었다.엘런이 애니를 향해 몸을 돌려 포도주 한 잔을 시킬 때까지, 한참 동안.
"넌 어딘선가 나온 말이나 문장들, 소위 순간들에 너무 매달려 있는 경향이 있어." 펠렌스가 엘렌에게 언젠가 말한 것이 있다.--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