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손을 놓지 마라
고든 뉴펠드 외 지음, 이승희 옮김 / 북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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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원제가 이 책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  Why Parents Need to Matter More Than Peers ' 왜 부모가 또래들보다 더 중요해야 하는가...얼핏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는 말일지도 모르겠는데, 들어보면 별로 어려운 말 아니다. 성장하는 아이는 아직 미숙한 시기니 그들을 이끌어 주는 것은 당연히 좀 더 성숙한 어른이여야 한다는 것, 만약 그 기능이 부모등 어른이 아닌 또래에게 맡겨진다면 재난이 예상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중요한 시기에 아이의 손을 또래에게 맡겨 버리는 것일까?  저자의 견해에 의하면 그것은 사회성과 독립성을 키워주는 것이 아이들의 성품을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모의 판단착오 때문이라고 한다. 부모는 그들의 품에서 아이를 일찍 떼어 놓으면 보다 더 독립적이고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아이를 귀찮게 생각하는,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해서든 아이를 마음 편하게 떼어 놓고 보자는 부모의 이기심도 한 몫 한다고 한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늘 장미꽃 향기를 맡는 즐거운 일인 것만은 아니니 말이다. 그렇게 부모에게서 따돌림을 당한 아이들은 어디로 갈까?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외로워진 아이는 자신을 받아주는 또래 집단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엔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제 문제라면,  그 집단이 얼마만큼 아이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단언한다. 미성숙한 또래들을 모아놓으면 미성숙한 집단이 될 뿐이라고...아이들의 우정이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묻는다. 만일 당신이 아이의 사회성과 독립성을 위해 아이를 또래에게 맡기는 것이라면 과연 극단적인 또래 집단인 스트릿 갱단들은 과연 얼마나 사회성과 독립성이 넘친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물론 사회성은 차고 넘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과연 그것이 부모들이 바라는 사회성이고 독립성인 것일까? 과연 우리는 아이들이 갱단으로 자라주길 바라는 것일까? 약한 아이를 왕따시켜 죽음으로 모는 아이들로 성장하길 바라는 것일까?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캐나다의 발달 심리학자가 아이를 키우는데는 대가족이 유리하다고, 아이는 되도록이면 오랫동안--적어도 19살때까지는-- 부모 품안에 넣고 키우는게 좋다고 말하는걸 보곤 깜짝 놀랐다. 독립적인 개인주의를 우선시하는 서양에서 그런 견해가 나오리라곤 상상도 못했었기 때문이다. < 파리 대왕 > 에 나오는 폭력적인 아이들을 떠올려 본다면 어른들의 감시나 통제가 없는 또래 집단의 가학성이 얼마나 끔찍한지 짐작이 되실 것이다. 아직 무엇이 그른지 옳은지 알지 못하는 또래집단은 원자폭탄만큼이나 파괴적일 수 있다. 죄책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래도, 비슷비슷한 미성숙의 정도를 달리는 아이들이 서로의 미래를 결정해준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뻔할 것이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아이의 손을 놓지 말라는 저자의 말이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그 첫 걸음으로 부모는 아이와의 애착을 굳건히 해야 한다고 저자는 조언한다. 부모가 믿음직스럽고 , 아이가 충분히 부모에게서 사랑받는다고 느낀다면 굳이 또래들에게 달려갈 필요를 느끼지 못할테니 말이다. 또래들과의 사귐은 그런 부모를 둔 아이들과의 만남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내 경우만 봐도, 어린 시절의 우정이 늘 바람직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나나 내 친구나 서로가 힘들고 어렵다는걸 이해할만큼 성숙하지 못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보면 나를 이끌어준 것의 80%는 다정한 어른들이었던건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우린 서로를 이끌어줄만큼 여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이젠 내가 아이의 손을 잡아줘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나의 손을 잡아준 어른들보다 더 잘해낼 자신은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안다. 아이의 손을 놓으면 안 된다는 것을... 손을 놓는다는 것은 절대 아이에 대한 배려가 아니다. 손을 놓는다는 것은 그저 떠나 보냄과 같은 말이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아이의 손을 놓아서는 안 된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아이의 손을 놓치 말아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들려 주고 있는 것은 좋았으나, 다소 과장하는 면이 있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겠다. 또래들이 늘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부모들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또 또래들 사이에 성숙이란 생각할 수 없다고 저자는 단언하던데, 반드시 그렇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물론 단순화를 위해 그렇게 극단적인 발언을 한 것일거라 이해는 하지만, 또래들도 성숙을 위한 지표가 된다. 발전을 위한 모델도 되고... 뭐,  어떤 것을 읽던지 필요한 것만 가려 취하면 되니 큰 문제라고 보긴 그렇다. 그러니 독자분들은 자신들의 경험에 비춰 이론을 받아들이시면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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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돌보며 - 딸의 기나긴 작별 인사
버지니아 스템 오언스 지음, 유자화 옮김 / 부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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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큰일을 당한 사람이 "왜 나여야 하지?"라고 묻는 것에 논리를 따져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멀쩡한 정신으로 "왜 내가 아니지?"라고 물을 리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물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우리 어머니가 파킨슨 병에 걸려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어머니를 대신해 "왜 우리 어머니지?"라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세상에 그런 일을 당해서는 안 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우리 어머니여야 했다. 마음 좋고, 관대하며, 유머 있고, 정도 많은 우리 어머니는 살면서 이미 크고 작은 고난을 수도 없이 겪었다. 하지만 질병이라는 재앙은, 그런 일을 당해 마땅한 사람에게만 일어나지 않는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처럼 삶의 고난은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닥친다. 어머니를 돌보아야 하는 임무가 어느 여름날 폭풍우처럼 느닷없이 내게 쏟아졌듯 말이다."---본문 6쪽에서.

 

우습게도 가장 감동을 받아 마땅한 이 문장에서부터 마음이 삐딱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작가 나이 육순에 사작된 엄마의 투병은 그녀의 일상을 철저하게 파괴해 버린다. 파킨스 병에 이은 치매는 엄마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불행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아 아버지의 심장병과 자신의 발명이 이어지자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바를 몰라 전전긍긍한다. 그 막막하고 한없이 길기만 했던 7년간의 간병을 기록한 것이 바로 이 책인데, 작가는 그 기간동안 왜 나여야 하지? 왜 엄마여야 하지?를 끊임없이 되뇌였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내가 되묻고 싶은 말은 바로 이거였다. " 왜 너는 아니여야 하는데?" 그럼 다른 질병이나 범죄의 피해등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런 일을 당해도 된다는 말이야 ? 그들은 그런 일을 당해도 될만큼 악하고, 모질며, 관대하지도 않았던데다, 유머도 없고, 정이 없기에 그런 질병에 걸렸다는거야?  고통이 심한 나머지 지극히 주관적인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걸 모르진 않았지만, 삐딱해지는 마음을 어쩔 수는 없었다. 오, 난 이런 하소연을 굳이 책을 통해 읽을 필요는 없었다. 왜 나냐고? 그건 피할 길 없는 고통에 처한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묻는 질문이다. 바보라도 그런 질문은 할 수 있다. 아니, 바보들이야말로 그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바보들의 징징대는 하소연을 들으려고 시간을 낭비하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철저히 시간낭비였다.

 

처칠은 용기란 철저히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우아함을 잃지 않는거라고 말했다고 한다. 작가가 처한 상황이 심각하다는걸 모르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비슷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인 징징댐을 위해 책까지 써야 할 필요는 없었다고 본다. 더군다나 그녀는 그 경험에서 한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자신을 철저히 주관적으로만 인식한 나머지 사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만한 눈을 키우지도 못했고, 거기서 벗어날 만한  통찰력이나 지성,사랑도 부족했으니 말이다. 한마디로 그녀에겐 용기가 부족했다. 오로지 기록에 대한 집념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다.

 

안타깝게도 좋은 책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 왜 나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그럴때 어떻게 위로를 받아야 하는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시선이나 견해니 말이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에 의하면 그럴 정도로 시야가 트인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리고  그건 이 책의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본인의 처절한 경험을 통해 보다 성숙하고 선명한 지혜를 기대한 나로써는 실망이었다.

 

좋은 작가란  모름지기 자신의 고통안에서 침잠해 버려선 안 된다. 남의 고통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들도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고, 그들의 고통도 당신의 고통 못지 않게 비참하단걸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걸 망각해 버린다면 그건 그냥 넋두리를 늘어놓은 일기에 불과하다. 작가로써 그런 시시콜콜한 일기를 들여다보는게 독자에게 엄청나게 즐거움과 감동을 줄거라 생각했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독자들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적어도 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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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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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평생의 연인이었던 아내와의 사별 후, 살던 집에서 쫓겨나 요양원에 들어가게 된 칼 프레드릭슨은 생활을 꾸려 가느라 미처 떠나지 못한 남미로의 모험을 해보기로 결심한다. 풍선장수였던 그는 자신의 장기를 살려 거대한 풍선을 매달아 통채로 집을 하늘로 날려버린다. 이제서야 자신의 뜻대로 일이 펼쳐나가는 것에 저의기 만족한 칼, 커튼을 돛대 삼아  바람을 가르며 평화로이 하늘을 날던 그는 밖에서 "똑똑똑" 하는 소리가 들리자 자신의 귀를 의심한다. 

  속는 셈치고 대문에 나섰던 칼은 불청객 하나가 무임승차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바로 며칠전 칼의 집에 나타나 "노인 공경 뱃지"를 타야 한다면서 도와줄 일이 없냐고 묻던 8살짜리 소년 러셀이었다. 자칭 황야의 탐험가로 수많은 체험 뱃지를 탔지만 실은 야외에 한번도 나가본 적이 없고, 텐트를 쳐 본 적도 없으며, 밴드를 어떻게 붙여야 하는지도 모르는, 한마디로 아는 것은 많지만 경험은 전무한 이 소년 훼방꾼은 칼의 요청대로 '도요새'를 쫓아 다니다 본의 아니게 칼의 모험에 끼여들게 된 것이었다. 당황한 칼은 어떻게 해서든 러셀을 떨궈 놓으려 하나, 곧이어 나타난 거대한 적난운에 휘말려 그만 러셀을 돌려보낼 시기를 놓치고 만다. 

 

폭풍에 휘말렸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칼은 안개가 걷히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놀라고 만다. 그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그 남미의 폭포가 건너편에 있는게 보였기 때문이다. 폭포 위에 집을 짓고 싶어하던 아내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칼은 죽는 한이 있어도 집을 끌고 폭포앞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마치 전생에 엄청난 잘못이나 저지른 듯, 풍선이 매달린 집을 끌고 한발 한발 폭포쪽으로 걸어가는 칼과 러셀, 만약 그들에게 더 이상의 불청객이 없었다면 칼의 소원은 보다 일찍 이뤄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엄청나게 먼 남미에서도 그들을 반기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으니....
 

초코렛을 매개로 친구된 새 케빈러셀은 곧 환상의 짝을 이룬다. 칼은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는 생전 처음 보는 새 케빈을 돌려 보내기 위해 애를 쓰나 오히려 케빈은 그를 놀리려는 듯 열심히 쫓아다닌다. 케빈을 떨쳐내려 애를 쓰고 있는 사이 말하는 개 더그가 나타나 일행의 진로는 한층 더 정신사나워진다. 목에 찬 개 통역기를 통해 인간의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더그는 실은 개 무리에서 멍청이로 통하는 왕따 신세, 더그는 새를 잡아가면 주인에게 칭찬을 받는다면서 케빈에게 "포로"가 되달라고 애처롭게 애걸한다. 둘이 다 싫다면서 따라오지 말 것은 주문하는 칼, 하지만 그가 어디로 가든 어디에 있든 그 둘이 한발 앞서 기다리고 있자 칼은 절망에 빠진다.  과연 칼은 이 구박을 받아도 꿋꿋한 낙천주의자들이자, 가는 곳마다 사고다발인 러셀 일행을 따돌리고 집을 폭포에 갖다 놓을 수 있을 것인가? 

 과거 전설적인 탐험가였던 찰스 먼츠는 자신이 남미에서 가져온 새 화석이 가짜라는 추문으로 사회에서 매장된다. 기필코 그 새를 찾아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 한 그는 일단의 개 무리와 함께 남미 동굴에서 칩거하고 있었다. 개 무리에 쫓겨 절체절명의 상황에 빠진 칼 일행은 다행히 먼츠를 만나 구조된다. 개 주인이 어릴 적 자신의 영웅 먼츠라는 걸 알아본 칼은 매우 기뻐하나, 그가 찾고 있는 새가 케빈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잽싸게 도망간다. 새를 잡겠다는 먼츠의 의지는 이제 거의 강박 수준, 그가 찾는 새가 러셀의 애완새라는걸  알게 된 먼츠는 칼 일행의 뒤를 쫓는다.  칼과 러셀케빈더그의 도움으로 간신히 먼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만 그  도중 케빈은 다리를 다치고만다.  새를 잡겠다는 먼츠의 집념이 도를 더해가는 가운데, 러셀은 다리를 다친 케빈케빈의 아가들에게 데려다 주자고 주장한다.  마지못해 따라 나선 칼, 과연 칼 일행은 무사히 케빈을 집에 돌려 보낼 수 있을 것인가? 폭포 옆에 집을 짓고 싶다는 칼의 꿈은그렇게  점점 멀어져만 가는데...
 
이 영화를 두 마디로 정의하자면 "허를 찌르는 유머와  참신함"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군더더기 없는 전개에 재치있고 맛깔난 대사들, 아귀 딱딱 들어맞는 구성과 주인공들의 개성 넘치는 행동 하나하나에 곁들여진 유머, 일관성있고 설득력있는 주인공들의 성격때문에 만화 영화임에도 그다지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만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끌어나갔다는 의미다. 칼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아름다운 부부애, 칼이 풍선 집을 만들게 된 사연과 러셀의 등장,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탐험등 어찌나 정신 사납게 관객들을 끌고 다니던지... 웃고 ,감동하고, 공감하고 다시 웃어대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재밌고 기억에 남는 영화였는데, 누가봐도 귀엽고 깜직한 주인공을 내세운게 아니라 공감이 가는 등장인물들을 내세운 것이 무엇보다 맘에 든다.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한 뒤 더 이상 잃은 것이 없다는 심정으로 모험이 나선 괴팍한 칼 할아버지, 그 팍팍한 인상 뒤에 그리도 찐한 정이 남아 있을 줄 누가 알았으리요. 러셀 일행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할아버지 인디애나 존스가 되어버린 그를 보면서 힘이 솟는 듯했다. 귀여운 구석이라곤 찾을래야 찾기 힘들지만 알고보면 선하고 딱한 사정을 가진 러셀은 또 어떤가? 영화가 끝날 즈음엔 그가 그 어떤 만화속 주인공보다 귀엽게 느껴졌다. 그외  천방지축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도통  말이 안 통하는 괴짜 새 케빈, 여차하면 망신용 때깔을 쓰고 벌을 받는 왕따 개지만 충성심만은 누구 못지 않는 개 더그등 네 명의 주인공들이 벌이는 하모니가 뛰어났다.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도 진실로 사랑스런 면이 있다는 점을 설득력있게 표현하고 있었던 점이나,  생각지도 못한 세대를 뛰어 넘는 가슴 벅찬 우정, 무엇보다 그들이 자신의 희망과 꿈을 찾아가는 모습은 감동적이었으니, 비록 보는 내내 한없이 정신 사납긴 했지만, 마음 따스해지는 장면들로 끝을 맺던 영화이자,  놀랍도록 선명한 그림에 힘입어 프레임 하나하나가 입이 딱 벌어지도록 아름답던 영화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단 아주 어린 아가들이 보기엔 좀 무서운 장면들이있다는 점을 알려 드리고 싶다. 하늘로 나는 장면이라든지, 폭풍에 집이 휩쓸려 간다는지, 절벽 앞에 서 있는 장면이나, 케빈을 구조하기 위해 하늘에서 벌이는 소동들은 어른인 내가 보기에도 아찔했으니 말이다. 객석에서 간간히 "아빠, 무서워...."를 외치는 아가들의 소리가 들려 오던데, 비록 내 관객들과 함께 웃긴 했지만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도무지 이걸 3D로 보면 기분이 어떨까? 혹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멀미를 하는건 아닐까? 조만간 확인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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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잠깐 잃어버렸어요 (보드북) 아기 그림책 나비잠
크리스 호튼 지음 / 보림큐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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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벅꾸벅 졸던 아기 올빼미가  둥지에서 떨어져 버렸다. 잠결에 영문도 모른 채 통통 ~~~~통대며  떨어지는 올빼미. 팍 엎어져 있는 아기 올빼미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나 역시도 웃음이 실실 나왔다.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재밌지만, 꼬마 올빼미의 액션까지 따라서 보여주면 그야말로 인기 만점이다. 떨어진  바람에 정신이 든 아기 올빼미는 엄마를 잃어버렸다고 걱정이 태산이다. 이에 오지랖 다람쥐 아줌마가 나서 엄마를 찾아주겠노라고 안심을 시킨다. 다만 문제라면 아기 올빼미의 엄마가 누군지 알지 못한다는 것! 아기 올빼미가 묘사한 단서를 근거로  엄마를 찾아나선 다람쥐 아줌마는 자꾸만 엉뚱한 동물에게 아기 올빼미를 데리고 간다.

" 덩치가 아주 커요! " 그러니?--->  아기 올빼미의 손을 잡고 곰에게 달려가는 다람쥐 아줌마.

" 귀가 쫑끗쫑끗해요!" 그러니? ----> 진작 말하지 그랬어, 잉~~~! 토끼에게 달려 가는 다람쥐 아줌마 .

" 눈이 부리부해요. " --->개구리 앞에선 아기 올빼미는 다람쥐 아줌마에게 자신의 엄마는 날개가 있다고 말한다.

매번 이번엔 틀림없다며 아기 올빼미를 데리고 다니는 다람쥐 아줌마, 과연 이번에 엄마를 찾아줄 수 있을까?

 

아가들에게도 유머감각이 있음을 알게 해준 책으로 , 액션까지 취해 읽어주면 웃느라 난리가 난다. 그럴 듯한 이야기에 맛깔난 대사들, 단순화시킨 동물들의 풍부한 표정과 유머감각 덕분에 작은 보드책임에도 작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엄마를 잃어버려도 침착하게 차분차분  찾으면 된다는 걸 알려줄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비록 아기 올빼미를 엉뚱한 곳으로 끌고 다니긴 했으나, 열심히 엄마를 찾아 주려는 다람쥐 아줌마의 친절도 눈에 뜨인다. 그 소동을 겪으면서 간신히 엄마를 찾은 아기 올빼미가 다시 꾸벅꾸벅 조는 마지막 장면의 반전도 압권이었으니,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갈 수 밖엔 없는 이유기도 하다. 워낙 재밌어서 한번으로는 성이 안차기도 하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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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멍 금붕어 그림책 도서관
질리언 쉴즈 지음, 댄 테일러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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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가 이런 말을 하게 되는 날이 오지 않기를 비는 어른들이 많을거라 본다. " 강아지를 갖고 싶어요" 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 남들은 다 있는데 왜 난 없나요 ?" 라고 처량맞은 눈을 하고는 물어보면 대꾸해줄 말을 쉬 찾지 못해  난감해질 것이 뻔하니 말이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별이라고 따다 주고 싶은 것이 부모들의 마음! 하니 " 안 된단다" 라는 말에 덧붙여 이유를 대야 하는 상황에 몰리는 것이 그다지 유쾌할 리가 없지 않을까? 어쨌거나 이 동화책에선 강아지를 사달라는 아이의 소원에 엄마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렇게 멋진 금붕어가 있는데 왜 강아지가 필요하니? 

흑!!! 이런이런... 이래서 아가를 우습게 보면 안된다니까. 벌써 다 컸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 너무도 잘 안다. 금붕어는 할 수 없지만 강아지는 할 수 있는 것들을 그자리에서 읊어대는 녀석. 막대기 받고, 산책하고, 얌전히 앉아 있고, 꼬리 흔들고....그러고보니 강아지랑 할 수 있는 것들이 꽤 되지 싶다. 하지만 엄마의 반격 역시 만만치 않다. 강아지를 키울 수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대는 엄마, 결국 강아지를 포기해야 할 수 밖엔 없다는걸 알게된 아이는 타협책을 찾기로 한다. 신문 읽는 금붕어, 산책하는 금붕어, 막대기를 물고 오는 금붕어, 꼬리 흔드는 금붕어등 금붕어를 교육시켜 멍멍 금붕어로 만들겠다는 아이의 상상력에 혀를 내둘렀다. 하니 아이의 얼굴에서 행복한 표정이 떠오를 것은 당연지사.... 아이야, 강아지가 아니라도 행복할 수 있는 거란다. 물론 너도 잘 알고 있겠지만 말이야.

 

아이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칭얼댈때마다 고민이 된다. 과연 어느선까지 들어줘야 하는지, 어떤 결정이 옳은 것인지 늘 헷갈린다. 이 동화책을 보면서 어쩜 중요한 것은 갖고 싶은 것을 갖는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무엇을 느꼈는가 라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구를 하고 의견을 제시하고, 결정을 하고, 포기와 타협을 하고, 대안책을 찾게 되고...그 과정에서 재미와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인생은 그렇게 굴러 가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 무엇이든 흘러가게 두라,자연스럽게, 아이를 키울 땐 그것이 정답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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