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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즌 빈스 ㅣ 블랙 캣(Black Cat) 12
제스 월터 지음, 이선혜 옮김 / 영림카디널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제목이 암시하는대로 시민이 되어 보는 것이 소원인 한 남자의 이야기다. <시티즌 케인>에서 기자들이 재벌 케인에게 " 당신은 도대체 누구냐?" 고 묻자, " 난 그저 평범한 일개 시민일 뿐이다." 라고 했던 것과 정반대 의미라고 보면 될까? 케인이 말한 '시민' 이란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겸손떨기 위해 말하는 것이었다면, 여기 빈스는 범죄자였던 사람이 (즉 아래에서 올려다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아봤음 좋겠다는 소망을 담은 것이니 말이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고, 따분한 직장에 출근하며, 아이를 키우고, 투표 시즌이 오면 누구를 찍어야 하는가 설전을 펼치다, 투표를 하러 투표장으로 향하는...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영위하는 일상을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들이마시는 공기만큼이나 간절하게 원하는 이 남자, 과연 그의 간절한 소망은 이뤄질 수 있을 것인가?
소설은 출근하러 가는 길에 자신이 알고 있는 죽은 사람의 숫자를 세고 있는 빈스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도덧가게 제빵사인 그는 근처 술집에서 도박을 하는 것으로 출근 전의 시간을 때운다. 지나가는 길에 들려오는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 잘 아는 사이인 창녀의 목소리라는걸 알게된 빈스는 어물쩍 빠져나가려 한다. 자신의 몸에 손을 댔다면서 화를 내는 창녀,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는 창녀가 어딨냐며 실갱이를 하는 고객...하는 수 없이 빈스가 나서서 중재를 한다. '이 여자 정말로 몸에 손대는걸 싫어한다고...' 그녀는 정말로 특이한 창녀였다. 누군가의 아이를 가졌다는걸 알게 된 뒤 독하게 마약을 끊었고, 지금은 지극 정성으로 아이를 키우고 있으며, 언젠가는 부동산 중개업자가 되는 것이 꿈인, 몸을 파는건 괜찮지만 몸에 손을 대는 것은 사양하는 창녀였으니 말이다. 여기까지 듣고 나서 그녀에게 연민이 생기지 않거나 그녀의 편을 들지 않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무사히 중재에 성공한 빈스는 행여나 창녀에게 엮일까봐 서둘러 자리를 피한다. 그녀가 그를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14살때부터 범죄를 저지르며 살아왔던 빈스는 형을 면제 받는 조건으로 갱단 두목의 범죄를 증언하게 된다. 증인면제 프로그램 대상으로 한적한 마을 스포켄으로 보내진 그는 이름도 직업도 바꾸고,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리를 잡아 나가게 된다. 어느 정도 새 삶에 적응이 되자 빈스는 과거 자신의 주 경력이었던 카드 위조를 시작한다. 그것이 자신의 발목을 잡을 거란 걸 알지 못한 채.... 때는 1980년 , 카터의 재선이냐, 레이건의 초선이냐를 두고 미국 전체가 들썩이는 가운데 처음 투표명부를 받게 된 빈스는 누구를 뽑을까 고민이다. 도넛 가게에 자주 오는 짝사랑하는 여자 손님의 눈에 들려고 항시 책을 들고 다니는 빈스는 어쩌면 자신이 꿈에 그리던 평범한 삶을 살게 되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향해 총부리를 겨눠대는 암살범이 등장하기전 까지는 말이다. 뉴욕의 갱단이 자신의 소재를 알아챈거라 판단한 빈스는 과거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 뉴욕으로 향한다. 그때 빈스의 카드 위조를 도와주던 사진사 사장이 살해된 채 발견되고, 피살자와 빈스와의 관련을 눈치 챈 신입 형사는 그를 쫓아 뉴욕으로 향한다. 목숨을 건지고 첫 투표를 마치고 싶은 빈스는 하는 수 없이 과거의 업과 조우하게 된다. 한편 빈스를 쫓아 뉴욕으로 달려간 어리버리 형사는 공항에서 자신을 마중나온 뉴욕 형사가 부패할 대로 부패한 자라는 사실에 경악하고는 그것부터 바로 잡겠다고 마음 먹는다. 과연 그의 정의는 실현될 수 있을까?
불우한 가정에서 자라 아무 생각없이 범죄자의 길로 나선 빈스는 한때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개과천선할 길을 찾아보려 했으나 결국 증인면제 프로그램 대상 신세가 되어 생판 다른 사람으로 살고 있는 자다. 비록 범죄자의 굴레에서 벗어나진 못했으나, 그 누구보다 평범한 삶을 갈구하던 그가 어떻게 자신의 삶을 되찾아 가는 과정을 흡인력있게 보여주던 책으로, 추리 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기는 했지만 줄거리보단 살아있는 캐릭터가 인상적인 소설이었다. 무뚝뚝하지만 인정 많은 빈스, 그런 그를 사랑하는 괄괄한 성격의 창녀, 빈스가 짝사랑하는 아름다운 변호사 비서, 그녀와 불륜 관계인 주지사 후보, 빈스의 친구를 자처하는 변호사, 정의감만은 투철하기 그지없는 어리버리 형사, 딸을 병으로 잃고는 부패 경찰이 되어버린 뉴욕 경찰, 포악함으론 따라갈 상대가 없지만 상황을 읽어 내는데 누구보다 날카로운 갱단 두목등... 한마디로 신선한 캐릭터의 향연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책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어찌나 설득력 있던지, 지어낸 소설이라는 것이 안 믿겨질 정도였다.
무엇보다 이 책이 다른 추리 소설과 차별되던 것은 미 대선 일주일 전 풍경을 잡아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민주 공화당을 둘러싼 당시 논쟁거리들을 풀어내면서 추리 소설로써는 드물게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도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생 처음 투표권을 받아들고 곰곰히 누구를 뽑아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빈스,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냉소적인 그가 여전히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물론 그의 한 표가 사회에 어떤 여파를 줄 것이라고는 그도 나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으로 주어진 권리를 무가치하게 버리는게 아니라, 소중하게 행사하려는 것이 참 보기 좋았다. 뭐랄까. 그에게서 어떤 삶의 철학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그런 면에서 빈스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기란 무척 어려울 것이다. 한마디로 나완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지만 공감하기 어렵지 않도록 매끄럽게 서술되어 있던 매혹적인 책이었다. 제때 터지는 저자의 유머 감각도 일품이었으니,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사람들의 개성 넘치는 이야기가 고픈 독자분이나, 이 더운 여름 괜찮은 추리 소설을 읽고 싶으신 분들에게 추천한다.
추신-- 닉 혼비의 < 런던 스타일 책일기> 에서도 닉 혼비가 이 책을 칭찬하는 장면이 나온다. 같이 읽으면 흥미로우실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