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거 소텔 이야기 1
데이비드 로블레스키 지음, 권상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책을 내려 놓으면서 처음 든 생각...아니 오프라가 왜??? 였다. 왜 이 책을 추천한 것일까? 가끔가다 엉뚱한 책을 추천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는 작품성이 있는 책을 선정하고 했었는데, 도무지 이 책은 아니올씨다였다. 오프라가 작년 키우던 개 소피가 죽는 과정을 겪더니 아무래도 좀 감정적으로 흐른 모양이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도무지 왜 추천작에 올랐을지 추측이 불가해 보였다. 흠. 작년 오프라 쇼를 시청하진 못했지만 이 책에 대해 난리를 친 것만은 알고 있었는데, 책을 다 읽고보니 그들의 뜨거운 반응들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실은 무안할 지경이었다. 한마디로 딱 데뷔작스러운 엉성한 소설이었는데...이 책에 뭔가 있다고 떠들어 대던 사람들은 다 정신이 어디로 갔던 것일까?

물론 이렇게 방대한 책을 단숨에 일필휘지로 끌고가던 탁월한 문장력만큼은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야기 전개가 부자연스러웠다. 그닥 재미있지도, 흥미진진하지도, 아귀가 딱딱 맞지도,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이해되거나, 이야기 전개가 상식적이거나 개연성 있거나 하진 못했으니 말이다. 통찰력은 논할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그저그런 통속소설에 불과했다. 오프라가 앞에 나서서 떠들지 않았다면 아마도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넘어갔을 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그다지 애석해 필요가 없다고 봐지는 것이, 그러니까 전반적으로 지루했다. 하, 어찌나 지루하던지...(특히나 2부) 결론을 보겠다는 일념하게 인내심을 갖고 본 2부, 드디어 끝장을 넘기는데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가 개를 키우지 않아서 이 책이 별로인 것일까 머리를 굴려 봤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냥 잘 쓴 소설이 아닐 뿐이다. 역자분이 존경스러웠다. 나라면 지루해서 도저히 마감을 못 했을테니 말이다.

 

<줄거리> 대대로 개를 키우는 농장을 하고 있는 소텔 집안에 에드거라는 농아 아이가 태어난다. 듣긴 하지만 말을 못하는 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소텔 부부, 하지만 에드거의 입과 손과 발이 되어 주는 것은 애완견인 엘먼딘이다. 개를 돌보면서 잔잔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소텔가족에게 오랫동안 떠나있던 에드거의 삼촌이 돌아오면서 소설은 전화점을 맞게 된다. 아버지 못지 않게 개를 잘 돌보지만 개에 대한 견해차이로 사사건건 아버지와 대립하던 삼촌 클로드는 결국 아버지를 살해하고 만다. 아버지의 죽음에 삼촌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에드거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릴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엄마마저 삼촌의 청혼을 받아 들이자 비탄에 젖게 된다. 그 사태를 사람들에게 알리려던 에드거의 노력은 또다른 살인을 불러오고, 에드거는 엄마의 명령에 따라 가출을 하게 된다. 자신이 기른 개 네 마리와 함께 길을 나선 에드거는 결국 종결을 위해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 책에서 가장 그럴 듯했던 것을 꼽아 보라면 (사람들이 존재를 의심하는) 유령을 들고 싶을 정도로 내용에 신빙성이 떨어졌다. 우선 형을 죽이고 형수와 결혼을 하는 삼촌 클로드가 왜 그런 일을 벌이는지에 대해 설명이 부족했다. 그냥 악한 사람이라서? 형의 설명에 따른 "겐 자신이 원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가져"라는 말로는 삼촌의 악랄함이 이해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에드거를 파멸시키는 계략까지 세우는 삼촌의 말을 모든 사람들이--심지어는 에드거의 엄마까지---의심하지 않고 다 믿어 준다는 것은 좀 놀랍지 않은가? 거기에 세상을 다 돌아다닌 삼촌이 촌 구석에 짱박혀 있는 형 집에 기어들어와서 형을 파멸시킨다는 설정도 우스웠다. 햄릿의 아버진 그래도 한 나라의 왕이기라도 하지. 겨우 농장 하나 차지하겠다고 형을 죽인다는게 말이 되나? 그리고 아무리 내성적이라 속을 잘 알기 힘들다지만 그래도 아들인데, 아들의 말을 믿지 못하는 엄마는 또 어떤가? 거기다 남편이 죽어 좀 경황이 없다고는 하나, 남편이 죽은 뒤 4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시동생과 동거를 시작하다니... 것도 남편이 생전에 그렇게 싫어한 시동생과 말이다. 이해되지 않았다. 결말은 또 어떤가? 에드거를 굳이 죽일 필요가 있었을까? 그 과정은 또 얼마나 엉성한던지...아버지를 왜 죽였는지 물어봐야 한다면서 보안관이 벙어리 소년을 납치하는 바람에 일이 커져 버리는데, 그냥 대낮에 소환해서 물어보면 되는 일을 그렇게 멍청하게 처리하다니, 다분히 어색했다. 이 책에서 유능한 사람이라고는 살인을 감쪽같이 해낸 삼촌뿐이었는데, 그닥 설득력있게 악인같지 않던 삼촌만이 유능하다는것도 영 석연잖았고... 아, 한도 끝도 밀려드는 단점들. 구멍 숭숭 뚫인 듯 치밀하지 못한 전개에 대한 성토는 이쯤에서 접기로 하는게 낫겠다. 비추천작으로 넣어도 그닥 아쉽지 않을 책이긴 하지만, 어쩜 내 취향에 문제가 있는게 아닐까 싶은 노파심에 애매작으로 넣는다. 혹시 개를 아주 좋아하신다거나, 개와의 교감에 대한 설명하다 만 듯한 리포트라고 얻으실 요량이시라면 한번 들어보심도 좋을 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풍장의 교실
야마다 에이미 지음, 박유하 옮김 / 민음사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풍장의 교실이라고 제목을 들었을때  내가 기대한 내용은 절대 이런 것이 아니었다.얼렁뚱땅 덜렁이인 나는 풍장 風葬을 풍경風磬으로 잘못 알아듣고는 학교에 물고기 풍경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가운데 선생과 제자 사이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감동적인 스토리가 전개되는 소설일거라 맘대로 짐작해 버린 것이다.그런데 아무리 읽어도 감동적인 스토리가 전개될 생각을 도무지 안 하지 뭔가. 반어적인 제목인가보다 뜨악해 하면서 읽은 결과 드디어 알게 된 사연인 즉슨, 그 풍경이 아니고 풍장이었다는 사실이었다. 하필이면 작가가 풍장의 유래를 마지막에 소개하는 바람에 다 읽는 동안에도 전혀 눈치를 못챘으니 이걸 누구에게 탓해야 하는지 참으로 (물론 나지만!) 뻘쭘했다. 그나 저나 초등학교 교실에 난데없는 풍장 風葬 타령이라니,어찌된  영문일까?( 風葬---들에 시체를 그냥 내 버려두는 매장법,자연이 알아서 시체를 해체 하도록 둔 뒤 몇 년 뒤에 남아 있는 뼈를 수습해 정식 장례를 치른다고 한다.)

 

야마다 에이미의 걸작 단편 셋을 모은 단편집이다.<풍장의 교실><나비의 전족>그리고 <제시의 등뼈>라는 단편들로,저자의 개성이 유감없이 일관되게 발휘되고 있던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었다.첫번째 단편인 <풍장의 교실>에서는 전학 온 주인공이 서서히 반 아이들에게 왕따 당하게 되는 과정을 그렸는데 ,왕따에 못이겨 자살을 생각하던 주인공은 결국 다른 교우들을 마음속으로 죽임으로써 그들의 잔인함에 대응하게 되는 과정들을 그린 것이다. 풍장이란 마음속에 버려진 교우들의 시체를 상징하는 주인공의 비유라고 보심 되겠다. <나비의 전족>은 우정이라는 미명하에 자신을 후광처럼 달고 다니는 친구에게 벗어나기 위해 남자와 섹스를 하고 다니는 소녀의 심리를 <제시의 등뼈>는 흑인 남자친구의 혼혈 아들을 돌보면서 생기는 갈등을 조명한 것이다.

확실히 야마다 에이미는 다른 작가와는 차별되는 면이 있어는 보였다. 극단적일만치 섬세한 심리묘사도 그랬지만 섹스를 다루는 범상 찮은 태도에서도 그녀가 다른 작가와 다름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의 소설이 히트를 친 후 그녀의 문란한 사생활이 논란거리가 되었다고 하던데 전혀 이상할 게 없더라. 너무도 적나라하고 거침없는 표현들을 보고 있자니 나 역시도 작가의 실제 경험이 아닐까 라는 추측이 들었으니 말이다. 어쩜 작가가 글을 잘 쓰긴 한다는걸 확실히 보여주는 예이기도 했지만 찜찜한 심정을 숨기기는 힘들었다.  

탄탄한 문장에 섬뜩하게 공감시키는 심리묘사,유려한 문체에 영리한 전개등은 어쨌거나 그녀가 무게 있는 소설가임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일본 소설의 특징인 가벼움에서 탈피해 진지한 주제 의식을 가지고 있던 작가,단 한편만 읽은 상태에서 이렇게 말하긴 좀 그렇지만 요시모토 바나나가 아직도 소녀적인 감성에서 벗어나지 않은 듯 했다면  그녀는 초등 시절에 이미 소녀시절과 바이 바이 한게 아닐까 싶게 조숙한게 아닐까 싶었다. 실은 너무 조숙해서 현실성이 없어 보였다고나 할까. 되바라진 적이 없었던 내가 현실성 운운한다는게 우스운 일일지 모르겠지만서도.예민하고 삐딱하며 영악하고 발악하듯 현실에 대처하던 다양한 연령층의 여자들을 만나 볼 수 있던 소설,잘 쓴 소설이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다.나와 취향이 다른 분들에게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이는 어둠 - 우울증에 대한 회고
윌리엄 스타이런 지음, 임옥희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9월
평점 :
품절


카뮈는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죽이고 싶어하는 자살 충동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반 고흐는 "앞날의 예감도 어둡다.나는 미래를 행복한 빛 속에서 보는 것이 전혀 되질 않는다" 라고 동생에게 썼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보,내가 미쳐가고 있다는걸 느낍니다. 나는 내가 또다시 그러한 지독한 시간을 극복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다시 건강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라는 유서를 남기고 주머니에 잔뜩 돌맹이를 쑤셔 넣은 채 우즈강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우슈비츠에서도 살아 남았던 프리모 레비는 아파트에서 몸을 날려 그를 경외하던 모두를 혼란 속에 빠뜨렸다.그리고 로맹 가리...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아들의 대학 입학을 기다렸던 그는 " 나는 나를 완벽하게 표현했다"는 말을 남긴 채 권총을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잡아 당겼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평범한 일상을 소란없이 채워가며 하루 하루를 살아 나간다.그런데 왜 어떤 사람들은 일상이란 습관에서 벗어나 자기 살해라는 끔찍한 결정을 하게  되는 것일까? 과연 그들은 우리의 통념대로 무책임하고, 나약하며,생명을 존중하지 않고,성격 파탄에,자기 생각만 하는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애정 결핍인 사람들일까? 여기 그것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나선 한 작가가 있다.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자.

 

<소피의 선택>의 작가 윌리언 스타이런은 1985년 육순의 나이로 우울증을 앓게 되면서 우울증의 격심한 고통이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우울함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통제가 불가능한 고통과 마주한 그는 비로소 자살자의 심리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정당방위일수도 있겠다는걸 깨닫는다. 냉철한 판단력을 가진 그도 딱히 꼬집어 설명할 수 없던 정신적인 고통,꼼짝도 할 수 없는 무력감과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 같은 질식 상태,불면증과 함께 찾아오는 극도의 피곤함,무각감과 자존감의 상실,정신이 와해되는 듯한 좌절감과 쉴 새 없이 밀어 닥치는 고통에 압사될 듯한 두려움등...그들이 자살을 하려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게 없었다. 그 고통이 쉽사리 물러나지도, 치유되지도 않을 거라는 절망감에 휩싸인 그는 결국 자살 충동과 싸우던 내면의 전쟁을 그만두기로 한다. 자살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 마치 총살대 앞에 서 있는 사람처럼 심장이 마구 뛰는 것을 느꼈다.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치닫고 있었다.중증의 우울증 상태를 경험한 많은 사람들은 제2의 자아가 따라다니는 것 같다고 말한다.제2의 자아는 일종의 유령같은 관찰자로서,본래 자아가 경험하는 치매 상태가 전혀 없는 냉정한 호기심을 갖고,그가 다가오는 재앙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혹은 어떻게 무너지고 마는지를 관찰한다. 나는 자기 살해자인 동시에 희생자였으며,고독한 배우인 동시에 외로운 관객이었다."

 

인간의 목숨은 하나뿐이다. 삶과 죽음을 갈라 놓는 다리를 스스로 건너겠다고 마음 먹는 사람도 그걸 모를 리 없다. 여기서 우린 이런걸  한번 생각해 봤음 한다. 한평생을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사람들은 암에 걸리고, 실직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도 겪으며,실망도 느끼고,끔찍한 일도 당하지만 그렇다고 그들 모두가 자살을 하는 건 아니다.그렇다면 왜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중에는 유독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이 많은 것일까? 그건 그만큼 우울증의 고통이 참을 수 없을만치 지독하단 반증이 아닐까?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되돌아온 스타이런은 "폭풍우를 견디고 살아 남는다면 광포한 폭풍우는 언제나 약화되면서 사라진다" 는 깨달음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격리와 안정,적절한 약물 치료를 통해 증세가 호전되자 단박에 자기 파괴의 환상이 사라진걸 보고 그 역시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우울증의 고통이 아니었다면 자살을 택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그는 그러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우울증에 대해 인식이 재고 되기를 주문한다.비난이나 비판,섣부른 판단 대신 정확한 이해와 사랑,그리고 격려만이 또다른 자살을 방지할 수 있다고 하면서.물론 환자 자신의 도움을 구하려는 태도와 인내도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건강이 회복되고 다시 평정과 기쁨을 즐길 수 있게 된 그는 그것이야말로 절망을 넘어서 절망을 견딘 자들에게 돌아가는 충분한 보상이 아니겠느냐고 말한다."그래서 우리 빠져 나왔도다, 다시 한번 별을 보게 되었노라."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민 케인 - Citizen Kan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는 한 재벌의 죽음을 알리면서 시작한다. 찰스 케인, 엄청난 부를 바탕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며 남들이 누려보지 못한 삶을 살았던 그가 노환으로 사망한 것이다. 부고 기사를 쓰기 위해 모인 기자들은 남다른 삶을 살았던 그에게 흥미를 느끼고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삶을 조명해 보기로 한다. 기이한 인물이었던 만큼 그에 걸맞는 특별한 기사를 쓰고 싶은 담당 기자는 그가 마지막으로 내뱉었다는 <로즈버드>란 말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건 아닐까 추측하게 된다. 과거에 케인과 연분이 있었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 말의 의미를 캐던 기자는 그 뜻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저으기 실망한다. 케인의 전처와 매니저, 친구,그리고 정적을 차례로 만나보면서 재벌에 얽힌 흥미진진한 일화를 기대했던 기자는 오히려 외롭게 죽어갈 수 밖엔 없었던 재벌의 사연만이 드러나자 한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마음이 짠해지는데...

 
만약 당신의 배우자가 비열하고, 자기 밖엔 모르는데다, 냄새 나고, 추잡하며, 착하거나 선량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해보자.그런 사람을 견뎌내고 결혼 생활을 지속해 나가려면 상대에게 얼마만큼의 돈이 있어야 할까? 대략 50억이 마지노선이라고 한다. 다르게 말해보면 인간의 품성값이 50억은 된다는 뜻이다.

여기 이 영화의 주인공 케인은 그보다 더 돈이 많은 사람이다. 그야말로 전 세계에서도 손꼽힐만한 재벌이다. 그런데도 그의 주변엔 사람이 남아 나질 않는다. 덕분에 그는 하인을 부르면 메아리가 울려오는 넓고 넓은 저택에서 홀로 쓸쓸히 외롭게 죽어간다. 그의 친구도, 전처도, 매니저도, 그의 일생을 추적하던 기자도 그런 그가 한없이 안스럽지만, 그렇다고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을 수는 없었다. 

돈잔치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호화롭기 그지없는 성을 지어 살고 있는 케인, 화려한 외양과는 달리 거대한 무덤이 되버린 저택에서의 그의 삶은 가히 충격적으로 비춰졌다. 돈만 있으면 행복이건 우정이건 사랑이건 다 살 수 있을거란 단순한 믿음이 환상에 불과하다는걸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상은 그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오히려 돈이 인간성을, 성품을  보충해주진 못한다는걸 설득력있게 증명하고 있었다. 돈이 아무리 많으면 뭐하나. 외로워 소리를 질러도 응대해 줄 사람 하나 없이 적막하기만 한데... 그런 삶을 그 누가 행복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케인은 현대와 같은 금전 만능주의 세태에서도 돈으로 사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전세계에서 수집해 온 온갖 유물과 보물로 자신의 저택을 채워 놓았지만 정작 인간의 온기는 채울 수 없었으니 말이다. 인간적인 유대가 박탈된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가를 보여주고 있었던 찰스 케인, 혹시 이 세상에 돈으로 사지 못하는건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 사람이 있으시다면 한번 이 영화를 보시길 권한다. 너무도 쉽게 생각이 바뀌실 테니 말이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만한 걸작이라는 명성이 헛된지 않던 영화였다.정녕 이런걸 두고 시대를  앞서가는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너무 현실적이고 사실적이라 지금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으니 말이다.오히려 지금의 영화들은 이 영화에 비하면 퇴보했다고 보여질 정도였다. 보기 전엔 67년전에 찍은 고전이라 다소 촌스럽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필요없는 기우였다. 오히려 현재 영화를 찍어 내는 날고 긴다는 감독들중 이런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실은 이런 영화가 만들어 졌다는 사실조차 믿겨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탁월했다.영리한 대본에,완벽한 연기,군더더기 없는 카메라 워크, 설득력있는 심리묘사, 등장인물들의 뚜렷한 개성,상황을 드라마틱하게 강조하던 인상적인 조명 처리,이야기를 풀어가는 짜임새 있는 구조, 유치하지 않는 현실성있는 줄거리,모순 없는 인간에 대한 통찰력, 재치 있는 대사등, 한 천재의 번득이는 창의력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극치를 보는 듯했다. 시민 케인에 대한 찬사는 결코 호들갑이 아니었으니,탁월한 Masterpiece라는 평에 조금의 이의도 제기할 수 없었다.특히 오손 웰스의 천재성이라니...너무 잘 만들어서 저주 받았다는 말이 그저 영화광들의 호들갑인줄 생각했는데, 세상에, 정말 그렇더라.도무지 어떤 인간이길래 저런 영화를 25살에 찍어낼 수 있었던 것일지, 오손 웰스에 대한 궁금증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뭐, 장점들만 떠든다 해도 일박 이일도 모자라지 않을까 싶으니,다른 건 제쳐 두고 내가 이 영화에서 인상적으로 본 주인공의 심리를 분석해보기로 하겠다. 이 영화속의 주인공의 심리에 대해 생각나는데로 적어 보자면...

 1.우울증에 대해--주인공 케인은 무엇이건 사들여 집안을 꽉꽉 채운다.그리고 하나도 버리지 않는다.돈이 많으니 사고 싶은걸 사는게 뭐 어떻냐고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필요없는 물건을 과도하게 사들이는 것은 우울증의 전형적인 증세이며 물건을 버리진 않는건 심리적 불안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자와는 달리 남자들의 우울증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중에서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나는 증상이라 한다면 아무 생각없이 무조건 사들이고 보는 것이다.그러니 만약 배우자가 정신없이 사들이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면 돈을 낭비한다고 바가지를 긁기 전에 우울증에 걸린게 아닌가 의심을 해보는 것이 좋다.엄청난 갑부들이 갑자기 자살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그들은 모두 죽기 전에 한동안 엄청나게 사들이는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사람들은 그들이 돈 자랑이나 투자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진실은 그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알고보면 도와 달라는 비명 소리였다는 것을 그 누가 그걸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인간의 심리라는 것은 그렇게 겉보기와는 다를때가 많다.

 

2.경계성 인격 장애에 대해--자칭 "보통 사람 ,시민 케인" 이라고 자신을 홍보하고 다녔던 그, 하지만 재밌게도 보통 사람일뿐이라는 그의 주변엔 인간이 남아나질 않는다. 그를 겪어 보지 않는 사람은 그게 선뜻 이해되지 않을지 모르겠는데, 친구들이건 애인이건 아내이건간에 그 넘쳐나는 돈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입고 도망가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 <경계성 인격 장애>의 전형으로 보여지던 케인, 전형적인 증상을 보자면 자신만을 사랑하는 성향에 사람들이 늘 자신을 버리고 떠난다고 불평한다는 것이다.남을 사랑하는 능력이 아예 없다고 보면 되는 사람들로, 그 남이란 리스트에는  배우자,친구,심지어는 자식까지 포함되니 참,기막힐 노릇이 아닐까 한다. 심리학계에선 자라는 동안의 어떤 트라우마나 유전이 성격에 영향을 미친게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는데, 이 영화속 주인공의 경우는 어린 시절 엄마와 일찍 헤어져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야 했던 것이 주요한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그가 죽어가면서 외친 <로즈버드>의 의미는 이와 일맥상통한다.그가 유일하게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이니까.-- 

안타까운 것은 현재까진 이런 사람들을 고칠 약이 없다는 점이다. 왜냐면 그건 성격으로 형성된 것이지 정신병이 아니기 때문이다.그렇다고 안 됐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그들의 파괴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영화속에서  케인의 두번째 처인 수지가 자살을 시도 하고, 불평을 해대다, 결국 살기 위해 떠나는 장면을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란다.이는 경계성 인격 장애자와 사는 사람들이 겪게 되는 전형적인 전개 과정이니 말이다.그러니 당신의 딸이나 아들이 배우자감을 데리고 왔다면 다른건 차지하고서라도 혹 그들이 경계성 인격 장애가 아닌가 정도는 살펴 보시는게 좋을 것이다.최소한  자녀가 자살하는 모습만은 보고 싶지 않으실테니...

좋은 영화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생각들과 풍부한 영감을 주고, 색다른 시선으로 사물을 보게 하며,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튀우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영화는 두말할 것도 없이 좋은 영화 ,수작인 영화였다. 영화사에 길이 빛날 <시민 케인> ,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한번은 꼭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꿀벌의 집
가토 유키코 지음, 박재현 옮김 / 아우름(Aurum)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아버지의 자살 이후 엄마와 삐걱대며 살아온 리에는 6개월간 동거한 남자친구마저 홀연히 집을 나가자 마음이 상해 버린다. 심난한 마음에 직장까지 때려친 그녀는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일단 성인이니 자신의 의식주는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것도 이유중 하나였으나 그것보다는 왜 좋은 직장은 때려 친거냐는 엄마의 잔소리가 듣기 싫은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직장을 알아보던 그녀는 우연히 꿀벌의 집이라는 곳에서 입주 직원을 구한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외딴 산골이면 어때? 내가 모르는 분야에 한번 도전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지원서를 낸 그녀는 마침내 낯선 산골 역에 내리게 된다. 양봉업자인 여사장 기세의 안내로 일터를 돌아본 리에는 종종 곰이 출몰한다는 말에 기겁을 하지만 은근히 양봉이라는 것에 매력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드디어 "꿀벌의 집" 정식 직원이 된 리에는 서서히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알아간다. 말수가 적은 푹주족으로 성실하기 그지없는 겐타, 거식증으로 사경을 헤매던 소녀였으나 꿀벌의 집에 와서 건강해 졌다는 아케미, 한때 교사였지만 10년전부터 양봉업을 하고 있는 사장 기세, 친절한 마을 사람들과 드라마틱하게 등장한 기세의 혼혈아들 조지까지....도쿄의 직장 생활에선 느끼지 못한 푸근한 정에 끌린 리에는 점차 마음을 열고 사람들에게 다가서게 된다. 물론 그것은 꿀벌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칙칙한 파리 정도로 여겼던 꿀벌이 찬란한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찬사를 보낼 정도가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꿀벌집에서의 적응과는 별개로 엄마와의 사이는 여전히 냉랭하기만 하다. 외로움에 의한 알콜중독과 위암으로 엄마가 결국 입원하고 말자, 리에는 하는 수없이  엄마를 꿀벌의 집으로 데려온다.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엄마가 잘 적응하자 그녀는 놀라고 마는데...

 

고통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있으랴? 만은 이 소설의 주인공 리에는 젊은 나이에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 처녀다. 자살한 아버지와 만났다하면 싸우기만 하는 엄마, 한심한 남자친구에다 맘에 안 드는 직장생활... 어디에서도 위안을 찾지 못한 리에가 도피하다시피 도착한 꿀벌의 집에서 생각지도 못한 치유를 얻게 되는 모습들이 참 듬직해 보였다. 넉넉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품에서 서서히 자신의 마음의 고통을 잊어가던 그녀가 얼마나 대견하던지... 리에 자신이 너그러워지자, 늘 어긋나기만 했던 엄마와의 관계가 천천히 회복되더라는 것은 어쩜 당연한 수순이었을른지도 모른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속에서 타인을 이용하고 착취하는게 아니라 공생의 관계라는걸 배우는 리에, 마치 갓 태어난 아기처럼 꿀벌을 돌보는 리에는 보면서 흐믓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욕심없이 사는 듯 한적한 시골 사람들의 정취가 살아있던 소설로 산골의 정경 묘사가 마치 진짜 꽃 향기나 꿀벌 내음을 풍겨올 듯 생생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이 책을 읽다보니 오래전 본 일본 영화< 추억은 방울방울 > (おもひでぽろぽろ: Memories Of Teardrops,1991년도작) 이 떠오른다. 이 참에 집안 어딘가에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을 DVD를 꺼내 추억을 한번 되새겨 볼까나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