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여 바다여 1
아이리스 머독 지음, 안정효 옮김 / 문예출판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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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배우겸 연출가였던 찰스 애로우비는 은퇴를 하고 고즈넉한 바닷가에 오두막을 사서 이사를 온다. 수영과 요리로 시간을 보내던 그는 자서전을 집필하기로 결정하고는 과거를 회상한다. 그가 바닷가에 은둔했다는 소식에 한때 그의 연인이었던 여자들이 불쑥 찾아오기 시작한다. 평생 여자를 유혹했다 버리고의 반복을 되풀이 한 찰스의 과거가 이제 그의 발목을 잡고만 것이다. 현재 길버트와  살림을 차린 리지는 아직도 그를 사랑한다면서 언제라도 불러달라고 매달린다. 난생 처음 가정다운 보금자리를 꾸민 동성애자 길버트는 그것이 거짓된 것일지라도 망가뜨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찰스를 위해 남편을 버렸던 로시나는 그가 딴 여자와 사는건 볼 수 없다면서 복수의 칼날을 간다. 찰스가 아내를 유혹해 준 것을 마치 그가 자신에게 대단한 친절을 베푼 것인양 굴던 페리 역시 그를 찾아온다. 과거의 인연의 망령들이 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찰스는 길거리에서 자신의 첫사랑 하틀리를  보게 된다. 한때 미모와 순결을 자랑했던 그녀는 이제 육십을 넘긴 초로의 수염이 거뭇거뭇하게 난 노인네가 되 있었다. 그녀 때문에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던 찰스하틀리에게 남편이 있다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따라다닌다. 하틀리 부부의 대화를 엿들은 찰스는 그녀가 불행한 결혼을 하고 있다고 짐작하고 하틀리를 구출하기로 마음 먹는다.  타인의 결혼 생활에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주변 사람들의 충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틀리를  꼬여내어 집에 가둔 찰리, 하틀리가 집에 보내 달라고 비명을 질러대도 마이동풍이다. 그의 이상한 행동을 아무도 제지하지 못하고 있던 중, 찰스의 사촌인 제임스가 찾아온다. 강경하던 찰스도 군장성 출신인 제임스의 권유에 하는 수 없이 하틀리를 보내게 된다. 하지만 그 후에도 그는 그녀에 대한 집착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데...

 

살면서 혹 이런 사람을 만나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다. 내가 돈까스가 먹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것보다 우동이 낫다면서 아예 우동을 시켜 준다든지, 예의상 핸드폰이 멋지군요? 했더니 죄송하지만 이건 줄 수가 없는데요? 라고 대꾸한다든지, 더 나아가 난 전혀 좋아하지 않는데도--실은 이상한 사람 아닌가 경계하고 있는 중인데도--엄청 좋아한다고 철썩같이 믿는다든지, 함께 보낼 시간을  많이 못 내줘서 -- 실은 난 같이 있을 생각이 없는데!---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든가, 솔직하게 난 당신이 별로다라고 말했더니 농담하는줄 안다든지...한마디로 내가 무슨 말을 하던지 간에 자신이 듣고 싶을 말로 해석해 듣는 사람, 그것이 얼마나 상대에게 복창 터지는 일인지도 모르는 사람, 바로 이 책의 주인공 찰스 애로우비가 그런 작자이다. 이기주의를 넘어서 경계성 인격 장애나 나르시스트가 아닐까 추측이 되는 찰리는 기계적으로 여자를 유혹했다 버리는 일을 되풀이 하면서도 죄책감 하나 없던 인물이다. 평생 권력과 통제만을 추구하며 여우처럼 밉살맞게 살아왔던 그는 쓸쓸히 은퇴생활로 접어들려다 우연히 첫사랑 하틀리를 만나면서 집착과 통제의 화신으로 거듭나게 된다. 자신을 버린 유일한 여자였던 하틀리를 만난 그는 그녀의 결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틀리가 뭐라 하건간에 자신이 생각하고 싶은대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는 찰리, 그 덕분에 이 책속엔 등장인물 간에 진정한 대화라고 할만한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 특징적이었다. 마치 상대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 제멋대로 해석하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어리둥절해하는 등장인물들의 대화와 행동들속에서 진실을 알아차리는 것은 당사자를 뺀 독자들뿐이지 않을까 싶었다. 지고지순한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한 채 하틀리를 구속하는 찰스와 그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하틀리, 그렇게 레일에서 벗어난 기차처럼 파멸을 향해 내달리는 찰스제임스라는 복병을 만나면서 제지당하게 되지만, 과연 그것이 그에게 평생에 한번쯤 정신을 차리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아이리스 머독이 그렇게도 바라고 바랬다던 부커상을 그녀에게 안겨다준 작품이다. 부커상 수상작이라고 해서 기대를 많이 하고 봤는데, 데뷔작 <그물을 헤치고>보다는 별로이지 않는가 싶다. 연극처럼 쉴새없이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해 이야기를 풀어냄에도 흐트러지지않는 탄탄한 구성에 개연성 높은 심리묘사, 현실감 있는 등장인물들과 마치 실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 주는 듯한 현실성,그리고 동양 불교의 신비주의와 서양의 철학등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만한 요소들이 이 소설에서도 여전했지만, 마무리가 약간 어색하지 않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비유를 하자면 상상력이 바닥나는 바람에 어떻게 끝을 맺어야 할지 감을 못잡은 상태에서 억지로 쓴 듯한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이 작품에 부커상을 주었다니, 아마도 그녀가 이미 쌓아올린 업적을 감안해 받게 된 상이 아닐까 싶다. 어쨌거나, 무뚝뚝한 머독씨. 남자들의 심리를 너무 잘 파악하는 그 통찰력만은 알아줘야 할 것 같다. 우스운 것은 요리에 대한 장면이 유난히 많이 나오길래 머독의 여성적인 면이 드러난 것이겠거니 했는데, 알고보니 그게 머독의 남편 공이라는 점이었다. 이래서 추측은 함부로 해선 안 된다니까. 참, 아이리스 머독의 책은 일단 이 소설을 끝으로 일단락 짓기로 했다. 특이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세권째를 연달아 읽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작가는 못되는가 보다. 하긴 어떤 작가가 그렇게 매력적이겠는가 만은, 어쨌거나 좀 지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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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인 섹스 - 일하는 뇌와 사랑하는 뇌의 남녀 차이
앤 무어.데이비드 제슬 지음, 곽윤정 옮김 / 북스넛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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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데, 도무지 왜 내가  애초에 이 책을 읽으려고 했는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브레인 섹스라는 제목 때문이었까? 아마도 부제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일하는 뇌와 사랑하는 뇌의 차이,바로 남녀의 차이를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가입되어 있는 독서 카페에서 책 제목을 검색했더니, 해당 단어가 금칙어라 검색이 되질 않는단다. 브레인이란 단어 때문일 리는 없고, 섹스란 말 때문인 모양이다. 아니면 브레인하고 섹스를 함께 붙여놔서던지... 어쨌거나, 책 내용을 생각하니 웃음이 실실 나왔다. 과학적으로 남자와 여자의 뇌가 다르다는 걸 설명하고 있는 대체로 성적이지 (non-sexual) 않은 책을 검색도 안 되게 할 필요는 없을텐데... 그러니 책 제목에 반감을 가지시는 분들은 일차적으로 이 책이 성에 관련된 야한 책이 전혀 아니란 점을 알아주시기 바란다. 그저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 모든 종들에게서 남녀간 성 차이가 발견된다는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이니 말이다.

 

몇년 전 유아 프로인 텔레토비의 보라돌이가 본의 아니게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핸드백을 들고 다니던 보라돌이가 동성애자임이 틀림없다면서 녀석의 하차를 주장하는 미국 골수 보수 기독교 목사의 발언때문이었다. 보라돌이의 행동이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성 정체성에 혼란을 줄 수 있다는 말에 하도 어이가 없어 크게 웃은 기억이 난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내 이야기를 들은 친구의 반응이었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으로써 그 목사의 말이 옳다고 하는데 어찌나 기분이 상하던지...정나미가 뚝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아마 제주도까지 들렸을 것이다. 친구야, 우린 그렇게 태어나는 거지, 학습되는게 아니야, 라고 말을 했지만 그녀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없는 빈 공백이라 우리가 어떻게 보여 주는가에 따라 다르게 행동한다면서, 보라돌이에 익숙해지면 아들은 커서 동성애자가 되고, 딸은 동성애자에 너그러워져 안된다고 하는데 기가 막혔다. 아니, 보라돌이 때문에 남자아이들이 동성애자가 될거라는 말은 제쳐 두고서라고, 여자들이 동성애자들에게 너그러워져 안된다니.... 그들도 같은 인간인데 좀 너그러워 지면 안되냐? 이해할 수 없는 논리를 펴는 친구가 안타까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성은 학습되는 거라는 그녀의 말에 체계적으로 반박할 수 없어 슬펐다.

 

아, 그때 이 책이 나왔으면 좋았으련만... 이 책의 저자에 의하면 남녀의 차이는 성기 뿐만이 아니라 뇌에 의해서도 차이가 난다고 한다. 태어날 때 이미 우리는 평생 어떤 성으로 살 것이고 행동을 하게 될 것인지가 이미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프로그래밍에 따라 사용하는 뇌의 구조나 부위도 달라진다고 하니, 바로 그런 이유로 남녀의 미묘한 또는 현격한 차이가 생겨나는 것이었다. 남자가 공격적이라든지, 수학을 잘 한다거나, 일 중독자일 경향이 농후하거나 바람둥이 기질이 있다면, 여자들은 언어에 유능하고 관계 지향적이며 평화를 선호한다는 것이 다 뇌의 차이로 설명 가능하다고 한다. 그외에도 동성애자가 생기는 이유로 엄마의 자궁 속에서 노출된 호르몬 때문이라는 학설도 조심스럽게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제기하고 있었다. 놀라운 사실인가? 글쎄. 내겐 별로 그렇지 않았다. 이미 대충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난 남녀가 다르다는걸 알기 위해 이런 책이 필요없는 사람이다. 경험으로도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남자 형제 셋 사이에서 성장한 나는 남녀간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내 부모가 공평하게 키웠음에도 우린 저절로 달라졌기 때문이다. 가령 내 남자 형제들은 다 차를 좋아하고 운전을 잘하며 길을 잘 찾지만, 난 아니다. 남동생이 버찌를 따겠다면 나무에 올라가면 밑에서 떨어지까봐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은 나였다.  조카가 태어났을때 금세 아기를 다루는 법을 익히는 쪽도 나였고, 집안에 더러워지면 신경이 날카로워 지는 것도 나였으며, 인형 놀이를 재밌어 하는 사람도 나였다. 대신 칼 싸움을 좋아하고, 운동경기에 환호하며, 바퀴벌레를 콱 밟아 죽이는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난 남녀의 차이 때문에 이 사회가 더 재밌고, 풍요로우며, 안정적이 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남녀는 경쟁하는 사이가 아닌 서로 보완해가는 사이라고 본다. 가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대부분 남자들이란 사실 때문에 좀 배가 아프긴 하지만, 여성들이여, 감옥을 보라. 거기도 대부분 남자들이 가 앉아 있다는걸 생각하면 그리 부러워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한다. 하여간, 말이 두서가 없긴 한데, 남녀가 성차에 따라 왜 다를까가 궁금하신 분들은 한번 들여다 보시면 되겠다.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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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을 헤치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8
아이리스 머독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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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알아가는데 선입견만큼 방해되는건 없지 싶다. 내가 비교적 유명한 여류 작가인 아이리스 머독을 이제서야 읽게 된데는 그녀의 말년을 다룬 영화인 <아이리스>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탁월한 지성을 자랑하던 그녀가 알츠하이머 병에 걸려 급속하게 기억을 잃어가는 영화를 보면서 머독에게서 어떤 매력을 발견하기란 어려웠었다. 아니, 그보단 그녀의 남편으로 나오는 존 베일리에게 매력을 찾지 못했다고 보는게 정확할 것이다. 젊었을때는 아내의 빛나는 재능에, 늙어서는 치매 간병에 절절매던 그가 한없이 무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인데, 아마도 그건 영화를 더 드라마틱하기 보이게 하기 위한 트릭이었지 싶다. 이런 소설을 쓸 사람이라면, 그리고 이런 소설을 쓰는 여자랑 살았던 남자라면 그렇게 무능하게 상황에 끌려갈리 없으니 말이다. 하여튼, 이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왜 사람들이 아이리스 머독을 가르켜 시대의 지성 ,지성하는지 이해할 수 있던 알토란같이 탄탄한 소설이었다. 줄거리를 들여다보면...

 

재능은 있지만 게으른 탓에 여자친구집에 얹혀 살고 있던 제이크는 여자친구에게 결혼할 상대가 생기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 앉고 만다. 그런 그에게 기생하고 있던 친구 핀과 함께 짐을 싸들고 나온 제이크는 할 수 없이 옛 애인 애너를 찾아간다. 오랜만에 애너를 만난 제이크는 그가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갈 곳이 없다는 제이크의 하소연에 애너는 동생 새디에게 가보라고 일러준다. 유명 영화배우가 되어 있는 새디는 제이크에게 치근대고 있는 남자를 막아 달라는 조건으로 집에 머물게 해준다. 새디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던 제이크는 그 스토커가 그의 옛 친구인 휴고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란다. 감기 시약 실험실 병동에서 휴고를 알게 된 제이크는 특이한 사상을 갖고 있던 그의 인간성에 반했었다. 별 생각없이 그와의 대화를 기록했던 제이크는 어물쩍 그것을 책으로 출간해 버렸고, 그 뒤 타인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인양 책으로 냈다는 죄책감에 휴고와  연락을 끊고 말았다. 이 참에 자신의 과오를 휴고에게 고백해야 겠다고 마음 굳게 다진 제이크, 하지만 휴고를 만나는 것은 힘들기만 하다. 제이크는 일련을 사건들을 쉴새없이 겪으면서 점차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된다. 과연 적당히 살아가는데 적응이 된 이 뻔뻔한 주인공은 어떻게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나가게 될것인가?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현란한 개성이 살아있던 소설이었다. 나는 나를 사실주의 작가로 본다. 나는 진짜 사람들과 진짜 살아있는 일상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다. 라고 머독이 말했다는데, 정확하게 이 책의 성격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한다. 어찌나 실제 같은지, 상상력으로 그려낸 허구가 아니라 마치 머독이 제이크라는 사내를 카메라를 들고 쫓아다니면서 핸드 헬드 기법으로 찍은 영화같았으니 말이다. 게으른 탓에 열심히 일하기 보단 기둥 서방으로 대충 사는 것에 만족하는 제이크, 그런 제이크에게 얹혀 사는 친구 핀, 자신이 얼마나 틀에 박히지 않는 사고를 하는지 전혀 모르는, 한마디로 자신의 가치에 대해 무지하기만 한 휴고, 그런 휴고를 싫어하는 영악한 새디, 침묵으로도 자신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다는걸 알려주는 구멍가게 주인 팅컴 부인등...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얽히고 설힌 이야기들이 너무도 매끄럽게 머독에 의해 이끌려 나오고 있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머독이 단 한 순간도, 단 하나의 등장인물도 낭비하는 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어쩌다가 허튼 소리도 좀 하고, 객쩍 말도 좀 날리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이야기로 쉬어 갈 법도 한데, 그녀는 내처 핵심 주제들로만 내달리고 있었다. 비유를 하자면, 농담 한 마디 없이 일사천리로 진도만 나가는 선생님을 떠올리면 되려나?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겠다고 주제에서 벗어나는 말을 꺼냈다간 당장 험악한 눈초리가 날라올  것 같은 선생님, 그녀가 바로 그랬다. 자신도 헛소리를 하지 않지만, 남에게도 헛소리를 허락하지 않는 대단한 집중력의 작가,  과연 사람들이 경외할 만한 지성이란  생각이 든다. 뭐, 그렇다고 팍팍하고 어려운 소설인갑다 생각하시진 마시길... 영리한 선생님답게 일목 요연하고 쉽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인간의 이면을 들여다볼 줄 아는 깊이있는 통찰력에 그 어두움의 희극성을 캐치할 줄 아는 유연함, 그리고 자신의 자아 탐구에 시간과 장면을 다 할애하는 작가들과 달리 본질을 캐내는데 무게 중심을 둘 줄 아는 균형 감각과 사태를 여러 각도로 해석하는 영리함 덕에 간만에 탄탄한 소설을 읽은 듯 너무 반가웠다. 이 책이 머독의 데뷰작이라고 하던데,  정말 신이 내린 작가는 따로 있지 싶다. 무게있는 소설이 그리운 분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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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
메리 앤 셰퍼.애니 배로우즈 지음, 김안나 옮김 / 매직하우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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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이 끝난 영국, 막  작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서른 둘의 줄리엣은 영국령 건지섬에서 보내온 편지 한 통을 받게 된다. 찰스 램에게 반했다는 도시라는 사내가 보낸 그 편지를 통해, 줄리엣은 건지섬의 북클럽이라는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 파이 클럽>에 대해 알게 된다. 독일 점령하에의 암울한 시기에 클럽 회원인 엘리자베스의 기지로 우연히 만들어 졌다는 감자껍질파이 클럽, 새로운 글감 소재를 발굴 중이던 줄리엣은 그들의 이야기가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사람들의 감성을 울릴만한 소재라고 생각한다. 도시에게 보다 많은 자료를 부탁한 줄리엣은 클럽 회원들이 하나 둘씩 보내오는 편지들에 홀딱 반하고 만다. 마침내 줄리엣은 건지 섬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설레는 여행을 떠나고, 그런 그녀의 그런 행보가 그녀의 구혼자인 미남 재벌 마컴 레이놀즈에겐 못마땅하기만 하다.

 

한편 건지섬에 도착한 줄리엣은 클럽의 중심에 엘리자베스라는 여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클럽 회원들의 증언을 통해 줄리엣은 그녀의 모습을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어릴적 단짝 친구가 애를 낳는 것을 지켜주고자 섬에 남게 되었다는 엘리자베스는 수용소 사람을 숨겨 주었다는 이유로 독일군에게 잡혀간 이후로 소식이 끊겼다. 독일군의 만행을 미워하긴 했으나, 독일군과 인간으로써의 독일인을 혼동하지 않았던 현명한 여인, 적군의 군의관을 사랑해서 아이를 낳은 정열의 여인, 기지가 넘치고 용감했던 그녀를 사람들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인간성에 반한 줄리엣은 그녀의 딸인 키트를 입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보다 그녀를 더 사로잡는 한가지 사건이 발생했으니, 바로 그녀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줄리엣은 건지섬에 온 순간 알게된 그 느낌을 상대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게 되는데...

 

 영국의 작은 섬을 배경으로 2차대전 중 섬 사람들이 겪은 이야기와 그들의 이야기에 반한 도시 처녀의 우정을 날줄로, 그리고 그 도시처녀의 사랑찾기 여정을 씨줄로 엮어낸, 미스 마플 같은 사서 할머니가 썼음 직함 로맨스 소설이었다. 장점을 꼽자면 우선 제목을 너무 잘 지었다는 것을 들어야 할 것이다. " 건지 아앨랜드 감자껍질 파이 클럽" 이라니...제목 만으로도 구미가 확 당긴다. 그럼에도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했던 것은 지나치게 말랑하지 않을까 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지나치게 유치한건 아닐까 라는 우려... 읽어보니 다행히도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다른 로맨스 소설에 비하면 우아하고, 기품 있었던데다, 재기 넘치는 대사들에, 선정적이거나 악당들이 득세하는 장면도 없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하는데 일조하지 않았을지 싶었다. 단지 의외라면 할머니가 썼음에도 지극히 로맨스 소설답게, 로맨스 소설의 한계를 고수하고 있더라는 점이었다. 아마도 작가인 메리 셰퍼 여사님이 굉장히 착하고 낭만적인 여성이셨던 모양이다. 그 나이에도 이런 상상력이 숨겨져 있었던걸 보면 말이다. 하니 로맨스 소설의 고질적인 문제점들이 고르게 들어있다는 점을 알아주셨음 한다. 로맨스 소설을 싫어하시는 분들도 꽤 되니 말이다.(특히 남성 분들에겐 뇌리에서 싹 지우셔도 될만한 책이 아닐까 한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사고, 보나 마나한 낭만적인 결론들, 거의 영웅적인(=개연성 희박한) 여성 주인공들에,그 영웅적인 주인공들에 걸맞는 엉뚱하고 선한 이웃들에다, 전쟁중의 혼란에 흔연히 대처하는 교훈적인 모습들이 어딘지 어색하고 작위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전쟁중에도 그런 휴머니즘이 살아있다면  참 좋긴 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에선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단 말이지. 어쨌거나, 해피엔딩에 훈훈한 이야기라 적어도 시간 낭비란 생각은 안 드실 것 같아  추천작으로 넣는다. 그나저나 찰스 램의 돼지구이 이야기에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것이 비단 나뿐이 아니란 것을 알게된 것은 매우 반가웠다. 역시 좋은 이야기는 인종이나 세월, 그리고 언어와 나이를 초월하는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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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다 우울한 밤에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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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관 생활 9년차에 접어들고 있는 나는 주임으로부터 자포자기 상태에 있는 사형수 야마이를 지켜 보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신혼 부부 2명을 잔인하게 살해한 죄로 사형을 언도 받은 그는 항소도 하지 않은 채 긴 긴 밤을 힘들게 보내고 있었다. 항소를 하라는 주위의 권고도 무시한 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야마이를 보면서 나는 아직도 찾지 못한 동생을 떠올린다. 어린 시절을 보육원에서 보낸 나는 초등학교 시절 자살을 시도해 봤을 만큼 사는 것이 힘들었다. 무의미하게만 느껴지던 삶을 끝내고자 했을 때 나를 잡아준 것은 바로 다름 아닌 보육원 원장님이었다. 그는 아메바와 나와의 연관성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 놓은 뒤, 삶의 기적을 함부로 포기해선 안 된다며 나를 다독였다. 그리고 그 뒤로도 끊임없이 내게 간섭했었다. 읽을 거릴 주고, 음악을 들려주고, 구석방에서 혼자 삭힐 시간도 주고, 성장기의 소소한 일탈도 눈감아 주면서 그는 내가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특권을 함부로 버리지 않도록 지치지도 않고 나를 격려했다.

 

그런 원장의 간섭은 내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이어진다. 친구가 자살을 했을 때도, 힘없고 순진해 보이던 죄수 한명이 실은 악랄한 연쇄 강간범이었다는걸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을 때도, 그리고 그 죄수가 너도 나와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는 말을 던졌을 때도 , 내가 한계를 넘어서지 않은 것은 그 분 덕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살인 본능이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나는 사형수 야마이가 고아였고, 친척 부부로부터 엄청나게 학대를 받고 자랐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그가 안스러워진다. 야마이의 자살 시도 후, 부쩍 친해진 그에게 나는 왜 그 신혼 부부를 살해했느냐고 묻는데...

 

모든 게 다 우울한 밤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딱히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여기 등장인물들은 우울해서 미칠 것 같은 사람들이다. 부모가 계속해서 싸우는 것을 지켜보고 성장한 주인공의 친구는 좌절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을 하고 만다. 고아로 태어 날때부터 맞는데 이골이 난 야마이는 때리는 것에 익숙해지다 못해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그 둘이 우울한 밤을 이겨내지 못하고 파멸의 길로 들어선 것은 어쩜 그들 주변에 인간의 온기가 없었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주인공에게 보육원 원장님이 있었던 것처럼 그 둘에게도 따스한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들의 운명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들 역시 그 밤을 이겨내고 새 날을 맞이 했을 것이다. 때론 삶이란 그런 날들의 이어짐일 때도 있으니 말이다.

 

흡인력있는 전개 방식과 군더더기 없는 묘사가 돋보이던 작품으로,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던 집중력이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글을 쓴 점이 장점이다. 사형제도의 비합리적인 점을 꼬집고 있긴 했지만 , 그런 이야기들은 그동안 워낙 많은 매체에서 들려 주었던 주제인지라 그닥 새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이 작가가 아동 학대나 청소년들의 살해본능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점이었다. 어딘지 개인적인 경험에서 기인된 것이 아닐까 싶던데, 만약 그렇다면 참으로 안 된 일이지 싶다.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런 경험이던데, 그걸 겪어 냈다면 그 고통스러움에 대해 더 말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그리고 하나 더, 얼마전에 본 < 천사의 나이프>에서도 느낀 건데, 일본 작가들은 법에 대해 좀 무지하게 아닌가 싶었다. 아님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이던가... 이 책에서 야마다가 열 여덟 육개월의 나이에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에 사형 선고를 받은 것에 대해 육개월의 차이로 사형이나 아니냐를 가른다는건 비합리적이라고 말을 하던데, 법은 단 한 개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합의에 의해 바꾸기 전까진 그것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마지노선이 된다는 의미다. 사적인 이유를 들어 나만 봐달라는 이야기는 다분히 유아적인 사고가 아닐런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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