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심리백과 - 완벽한 부모는 없다
이자벨 피이오자 지음, 김성희 옮김 / 알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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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한때 좋은 부모가 되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자신의 피붙이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부모가 되자 그렇지도 않다는 사실에 저으기 실망하고 말았다. 씁쓸했다. 아이에게 관심이 없는 부모, 냉정한 부모, 놀아 달라고 매달리는 아이를 매정하게 뿌리치는 부모, 아이를 때리는 부모,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 새 애인을 위해 기꺼이 아이를 버리는 부모등...오히려 좋은 부모는 드물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그들 모두는 자신을 좋은 부모라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일까? 그들은 양심도 없는걸까? 여기 이 책안에 그에 대한 해답이 들어 있다.

 

얼마전 이웃 블러그에서 "아이를 때리지 맙시다."라는 간곡한 취지의 포스팅이 게재된 적이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를 뭘 그리 새삼스럽게 하시나 심드렁하게 들여다보고 있던 난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에대해  반박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부모들, 자신들을 일선 현장에서 전쟁을 치르는 전사라고 말하는 그들이 오히려 강한 어조로,' 아이들을 때리지 않고 어떻게 키우냐, 아이를 키워 보지 않는 사람은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 며 볼멘 소리를 해댔다. 와, 우리나라  육아실정이 아직 이 정도 수준밖엔 안 되는구나 싶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이를 위해, 그리고 사회에 해가 되지 않는 인간으로 키우기 위해 매를 들 뿐이라는 그들의 확신이 어찌나 강하던지, 그 어떤 말로도 그들의 신념을 무너뜨릴 수 없어 보였다. 그 점이 특히 날 우울하게 했다. 논리와 현장성을 앞세운 그들의 논쟁을 무기력하게 들여다 보고 있던 나는 어쩜 이런 논의 자체가 문제의 핀트에서 벗어난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아이를 때린다" 는 것이 논리나 신념이나 배움의 문제가 아니지 않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아이들을 때리는 것일까?

 

가장 간단한 대답은 그들이 맞고 컸기 때문이란 것이다. 어릴적 힘없는 자신을 때린 부모를 원망하다가도 막상 자신이 부모가 되면 자녀를 때리게 되는 메카니즘을 자동성의 원리라고 한다. 다르게 행동하고 싶어도 다른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어릴적 경험한 그대로 반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이가 떼를 쓰고, 반항을 하고, 침을 뱉고, 하지 말라는 짓을 되풀이 하고, 다른 아이를 패서 오고, 장난감 안 사준다며 뒹굴고,  한마디로 부모를 당황하고 열받게 할때, 때리는 것 외엔 다른 해법 메뉴얼이 그들에겐 입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이가 잘못했다고만 때리나? 그렇지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아이가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고 해서 때리는 경우는 드물다. 부모는 반사적으로 때리고, 습관이 되어서 때리고, 몰라서 때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무력감에 지치고 화가 나서 때린다. 더 이상 뭘 해야 할지 모르고 자신의 감정을 제어할 수가 없어서 힘을 되찾기 위해 때린다. 타인을 아프게 하는 것은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회복하려는 시도다." 나는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할 수 있다.= 나는 힘이 있다. =나는 중요한 사람이다."--83

 

아이를 때리는 것은 아이를 길들여야 하는 동물 취급하는 것이라고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동물을 때리는 것도 학대라고 규정하는 이 마당에 아이를 때리는 것을 묵인한다니... 참 괴상한 논리 아닌가? 아니, 그건 슬픈 논리다. 다음을 보자.

 

정말로 심하게 맞지 않는한 (안타깝게도 정말로 심하게 맞는 경우조차 종종) 아이들은 자기 부모를 용서한다. 아이들은 맞는게 당연하다고 여기고 부모를 정당화해준다. 자기들이 고약하게 굴었고 말을 안 들었고 어리석은 행동을 했기 때문에 맞는 거라고 여긴다. 아이가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여기고 부모는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신체적인 고통보다 더 해로운 것은 바로 그 점이다. 모니크 타즈루는 그러한 측면을 아주 정확하게 표현했다." 매를 맞는 것으로 그치는게 아니라 맞는 것에 따른 영향이 나타나게 되며 아이의 인격이 병든다." --80

 

사랑받지 못한 아이들, 관심 받지 못한 아이들, 이해 받지 못한 아이들, 그리고 버림 받은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의 인격이 병들고 있다. 그럼에도 부모들은 자신들을 합리화하기 바쁘다. 완벽한 부모를 바란것도 아니건만, 좋은 부모 노릇도 그렇게 힘든 것인가보다. 그렇다면 힘들다고 우린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럴 순 없다. 이 책의 장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새로운 메뉴얼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놓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대충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1.아가들의 단계 성장별로 핵심 포인트를 알아두자. 그들은 어른이 아니다. 머리가 막 자라는 중이기 때문에 어른처럼 행동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의 성장별 심리를 알아둔다면 불필요한 오해와 충돌을 피할 수 있다.

2. 어릴적 부모에게 나쁜 대접을 받고 자란 사람들은 필시 자신을 경계해야 한다. 아무리 그것이 불쾌한 경험이었다해도 자신의 아이를 키울때가 되면 마치 그것이 유일하고 올바른 육아방법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나만 당할 수는 없지라는 심리가 있다고도 하던데, 자신이 보호해줘야 할 아이에게 보복이라니, 내 대에서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자각이 필요하다.

3.어떤 경우에서건...

 1) 아가들은 사랑받고 싶어하고 사랑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2) 아가들은 연약하다. 그리고 어른들에게 맞추려 최선을 다한다. 그들이 얼마나 어른들 마음에 들고 싶어하는지 안다면, 그들을 때리거나 모욕하는 짓은 절대로 못할 것이다.

 3)아이들은 이해 받으면 곧장 어른을 용서해준다. 하니 야단치기 이전에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라.

4. 자신이 좋은 부모가 아니라고 생각되면...우선 자각하라. 자각후에도 여전히 행동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건 강박적인 중독이다. 그럴땐 전문가의 개입을 요구하는 편이 좋다.

 

조카를 키우면서, 그리고 친구의 아이들이 커가는 것을 보면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에 대해 고민과 의혹이 참 많았었다.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별 일 아니라는 듯 내뱉는 부모도, 아이를 때리는 부모도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일 수 있다는 점이 그 중 하나였다. 그 많은 의문점들을 이 책 하나로 해결할 수 있어서 속이 다 시원했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었다. 그들은 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단지 다르게 행동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어른들이었을 뿐...하니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은 어른들에게 적극적으로 권한다. 이 책 한권으로 아이들도 이해되고, 당신 자신도 이해될지 모르니 말이다. 때론 아는 것이 시작일때도 있는 법이다. 사실 이 정도면 충분히 멋진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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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 백과사전을 통째로 집어삼킨 남자의 가공할만한 지식탐험
A.J.제이콥스 지음, 표정훈, 김명남 옮김 / 김영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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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목 그대로 이해하심 된다. 어렵지 않다. 브리태니커 전질을 읽고서 한 권으로 추려 준것이라 보면 되니까... 그럼 백과사전의 축약판이냐 하면 그건 아니고,  이 블러그처럼 브리태니커를 읽고 난 후 리뷰를 썼다고 보심 정확할 것이다. 브리태니커가 워낙 방대한지라 보통 각오 없이는 읽기 힘드니 --  제정신이 아닌란게 더 맞긴 하겠지만서도. -- 그걸 다 읽고 달랑 포스팅 한 개 정도로 끝내기는 좀 서운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1년 가까이의 시간을 들여 읽어낸 것들이니 리뷰가 책 하나 정도의 분량이 된다해도 무리는 아니지 싶다. 실은 책 한권 분량도 살짝 넘어간다. 브리태니커 못지 않는 위용을 자랑하는 두께다. 흐흐흐, 적어도 두께가 브리태니커 못지 않다는건 자랑으로 삼아도 되지 않을까 한다.어쨌거나 그건 이 저자가 그만큼 할 말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2.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로 고민하는 시간에 책을 읽었다면 진작에 다 읽었을 책이다. 이상하게도 이 책은 한번 손에서 놓으면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아 읽는데 애를 먹었다.  물론 이유는 있었다. 이야기가 본인 신변 잡기 위주로 새 버리기 일쑤라는 점과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정보들의 나열이라 다 읽는다해도 읽기전보다 똑똑해질 것 같지 않다는 것 등등...아예 본인의 신변잡기만 쓰던지, 아님 정보만 다루던지 했으면 좋았을거란 불평에 갈등하느라 시간 다 보냈다. 정보만 다뤘다면 안 읽으면 되는 것이고,--어차피 필요 없으니까, 난 이 나이에 별로 더 똑똑해지고픈 생각이 없다. 적어도 백과사전을 통채로 읽어서는 아니다.--신변 잡기만 썼다면 휘리릭 읽으면 됐을테니 시간이 절약됐을 텐데...그런데 이도 저도 아니니, 성격 이상한 사람 만나서 제대로 엮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그닥 유쾌한 독서는 아니었음에도 밀고 나간 이유는, 글쎄, 아무래도 저자가 착해 보여서가 아닐까?

 

3.이 책을 읽다보니 나도 대학생 시절 백과 사전을 읽어 보겠다고 나섰던 기억이 났다. 만 하루만에 끝이 났던가 하루도 못 갔던가 그랬는데, 두 손 두 발 다 들고 집어치운 사연이 아직도 생생하다. 상상력이 부재한 정보만의 나열을 아무런 연결점없이 읽어 내려 가려니 딱 미칠 것 같더라. 이거 철저히 무의미한 짓이 아니고 뭐냐 하면서 서둘러 프로젝트를 포기했더란다.모름지기 백과사전이란 모르는 것이 생겼을때 참고만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위로하면서. 그런데 그걸 이 저자는 해냈단 말이지. 그냥 책들을 1년 내내 읽으라면 못 읽을 거 없다. 10년을 읽으라면 못 읽을까? 100년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백과사전은 보통 책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저자가 대단해 보였다. 비록 그가 간간히 불평을 하는 것만으로 그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짐작하긴 곤란하겠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가 남들이 해 내지 못한 일을 해낸 것만은 틀림없었다.

 

4. 브리태니커 전권을 통채로 삼킨 이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똑똑한 아버지와 그보다 더 똑똑한 선조, 그리고 막강 똑똑한 고모와 얄미울 정도로 똑똑한 처남등 온통 똑똑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그 자신의 똑똑함에 주눅 들어 있는 사람이었다.(그렇다고 자의식이 낮은 사람인가 하면 그건 아니니 오핸 마시길.) 어쩜 그가 이런 무모한 백과 사전 다 읽기에 도전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남들이 못하는 것을 시도해 자신의 똑똑함을 증명하는 것... 그런데 실은 사람들이 타인에게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은 똑똑함때문이 아니다. 내가 못마땅했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자신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아내를 사랑하고, 아이를 간절히 바라는 가정남에 소아 성애자와 소년병을 혐오하는 도덕주의자, 유머를 적절히 구사할 줄 알고, 여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사과할 줄 아는데다, 자신이 똑똑한 바보가 아닐까 노심초사하는등...한마디로 괜찮은 남자였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글을 쓸 수 있었으려만, 아마도 똑똑한 집안에 살다보니 그것만을 가지고 글을 쓴다는게 컨닝처럼 느껴졌는가 보다. 개성이란  누구나 있는 자질이니 말이다.

그런데 실은 그렇지 않다. 그런 자질은 아무나 갖고 있는게 아니다. 그도 언젠가는 자신의 가치를 다르게 평가하는 날이 오겠지 싶다. 만약 진작에 그랬더라면 독자들로 하여금 이런 고문을 당하게 하진 않았을 텐데 싶지만서도, 어쩌겠는가, 인간은 원래 실수하면서 크는 법 아니겠는가. 어쨌거나 이 책을 읽고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건--지적인 전통이 풍부한 집에서 태어나건 아무런 전통이 없는 집에서 태어나건---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는걸 깨달았다. 한 권으로 추려진 브리테니커를 읽고 난 소감으로 치자면 너무 엉뚱한가? 어쩜 바로 그것이 이 책의 핵심어 일지도 모르겠다. 엉뚱하게 흘러갈 거라는 것, 그대가 무엇을 읽던지 간에 말이다......그리고 덧붙이자면, 전지는 불가능하니 도전하지 않는게 좋을 거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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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나이트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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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나치 전범으로 뉴욕에서 잡힌 하워드 캠벨 2세는 이스라엘로 압송된다. 전직 희곡 작가이자 나치 홍보 전문가, 나치 대중연예 선전부에서 라디오 선전원으로 일했던 그는 재판 전까지 할 일이 없자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선량한 미국인이자, 아름다운 독일 여배우 헬가를 아내로 둔 극작가였다는 그는 어쩌다 전범이 된 것일까? 알고보니 그는 미국 첩보원이었다. 본격적으로 유대인 학살이 시작될 즈음, 자신을 찾아온 미 정보원에게 포섭된 캠벨은 라디오를 통해  겉으로는 나치를 홍보하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정보를 미국에 전달하는 역활을 맡게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중 생활을 한 셈.  철저하게 자신의 역활에 몰두했던 그, 평화를 위해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한 그를  사람들은 그렇게 기억해주지 않는다. 전쟁 후 괴벨스 못지 않은 악질 전범으로 몰려 죽을 처지에 놓인 그는 간신히 미국으로 가게 된다. 뉴욕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삶을 살고 있던 그는 우연히 아랫층 사람과 친해지게 되고 그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려준다. 그 이후  캠벨은 생각지도 못한 소동에 휩싸이게 되는데....

 

작가의 비교적 초기 작이라 구입을 꺼리다 유혹에 져 버리고 말았다. 결론만 말하자면 좀 더 버티는건데 후회하고 있다. 흑, 역시 유혹에 지면 후유증이 심각하단 말이지. 그나마 유일하게 건진 소득이라면  왜 이다지도 인간적이고 명민한  커트 보네거트가 노벨상을 타지 못했는지 이해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소설의 소재와 주제가 너무 중복된다. 한마디로, 한 이야기를 또하고 또하고 또하고 계셨더라. 이건 뭐, 보고 또 보고 드라마도 아니고, 햇수로 세어보니 장장 50여년에 걸쳐 자신의 참전 경험을 우려먹은 셈인데, 이 정도 되면 식상한 정도가 아니라 신물이 난다. 만약 노벨상 위원회가 그에게 문학상을 수여했다면 전 세계에서 "아니, 그 똑같은 이야기만 반복해서 하는 그 작가 말이야? 말도 안 돼!" 라며 원성이 자자했을 것이다. 참, 한 권만 (타임 퀘이크 ) 읽을땐 너무 멋있고 대단하고 근사해 보였었는데 말이지. 두권째도(제 5도살장) 괜찮았다. 세 권째도(나라없는 사람) 그지없이 신선했지만 네 번째 읽으려니 물린다. 좋은 것도 한 두번이라고 그렇게 자꾸 울궈 먹으면 쓰나, 좋다는 사골도 3번 우려먹으면 더 이상 먹을 게 없는데 말이다. 그러니 만약 커트 보네거트를만큼 읽으셨다는 분들은 참고  하시길 바란다. 이 책이 다른 책들과 소재도 중복되고, 그의 전쟁에 대한 시니컬한 자세도, 인간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도, 그리고 그걸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자세도 비슷하다는 것을. .. 보네거트란 이름을 생전 처음 듣는다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아 애매작으로 넣긴 했지만 한마디로 새로울게 하나도 없는 보네거트였다. 유머가 다른 책에 비해 다소 떨어진다는 것만 빼면...

 

그래도 한가지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었다. 전쟁이 끝나기전, 독일을 탈출 막판 전에 처가댁을 찾아간 그는 장인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된다. 너(캠벨)를 너무 싫어해서  첩자가 아닌가 하고 늘 감시를 했었다고. 라디오를 들으면서 뭔가 첩자라는 단서를 흘리지 않을까 늘 주시했었는데 이젠 상관없다고...왜냐면 네가 정말로 첩자였다고 한들, 독일을 위해 한 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나. 첩자 노릇을 제대로 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적국에게 이득이 되는 행동을 할 수 밖엔 없었고, 그 덕에 자신이 원하지 않은 전범이 되어버린 한 사내의 아이러니를 제대로 보여주던 장면이지 않는가 한다.

그리고 굳이 소설적인 단점을 하나 더 꼽자면 , 선량한 시민이 처한 이중첩자의 비애를 그린 작품이라 그런지 작품 내내 전범에 대한 양가 감정으로 시선이 오락가락하는것도 좀 껄끄러웠다. 아무리 선량한 시민이라도 그런 처지에 몰리면 내키지 않아도 그런 일들을 하게 되며, 또 악한이라 불리는 집단도 알고 보면 피해자이기도 하다는걸 보여 주려는 시도는 충분히 짐작하겠는데, 초기 작품이라 그런지 후기 작품들에 비해 그걸 설명하는데 무리가 있어 보였다. 역시 사상이란...  나이를 먹어가면서 완성되는 모양이다. 아무리 대가라 해도 말이다. 어쨌거나 이 책 덕분에 앞으로 커트 보네거트의 작품을 대하는데 좀 더 신중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보네거트라고 해도, 반복은 딱 질색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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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카민스키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13
다니엘 켈만 지음, 안성찬 옮김 / 들녘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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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 잡지 기자인 쵤러는 과거 위대한 화가로 명성을 날렸던 마누엘 카민스키의 자서전을 집필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고 뛸듯이 기뻐한다. 어떻게 해서든 카민스키에게 이야기를 끌어내서 자신의 이름을 날릴 기회로 이용해 먹겠다고 다짐하는 그,  '책은 반드시 카민스키가 죽은 다음에 내야 해, 난 이제 인세만으로  떵떵거리며 먹고 살 수 있겠지' 라며 이솝 우화에 나오는 계란 팔러 가는 처녀처럼 꿈에 부푼다.  하지만 그런 그의 희망은 산 꼭대기에 살고 있는 카민스키의 집을 방문하면서 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너무도 늙고 쇠약해서 죽었다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카민스키, 그를 인터뷰하려 안달이 난  쵤러는 그 "원천 자료 그 자체"를  이용하는데에 심각한 장애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카민스키의 딸인 미리암으로 그녀는 사사건건 자신에게 물어보라면서 쵤러가  아버지에게 접근하는 것을 차단한다. 성공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용의가 있던 쵤러미리암이 집을 비운 사이 카민스키에게 접근하는데 성공한다. 쵤러가 무심결에  카민스키의 첫사랑에 살아있다고 발설하자, 오랫동안 그녀가 죽은 줄 알았던 카민스키는 갑자기 그녀에게 데려가 달라고 명령한다. 하는 수 없이 카민스키를 데리고 길에 나선 쵤러는 멍청하고 힘없는 노인네인줄로만 알았던 카민스키에게 자신이 휘둘린다는 인상을 받지만 애써 그럴리 없다고 무시하는데... 과연 성공을 위해 못할 것이 없다는 이 시건방진 사내는 그의 계획대로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미리암에게 감옥에서 빼내 줘서 고마워 하더라는 카민스키의 말을 전하자 그녀가 정신없이 웃어 제낀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영리한 줄 아는 31살의 쵤러, 타인은 멍청하고 무식해서 세상 돌아가는걸 잘 모른다고 자신하는 이 밉살맞은 사내가 늙은데다 병들었으며 눈까진 먼, 한마디로 만만한 노화가에게 어떻게 멋지게 당하는지 제대로 음미할 수 있었던 참신한 소설이었다. 짧은 분량임에도 어찌나 많은 이야기를 쉴새 없이 풀어놓고 있던지 따라가기에도 정신 없었는데, 독일 문학계의 재담꾼이라는 닉네임이 무색하지 않은 입담이지 않는가 한다. 얼마전 읽은 <세계를 재다>의 저자 다니엘 켈만의 작품으로 역시 그의 탁월함은 일회성이 아니란 것을 확인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영화감독인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던데 , 특히 과거의 회상들을 현재 들려오는 대화 장면으로 자연스럽게 전환하는 수법은 마치 영화를 보는 듯 했다. 희곡성이 워낙 농후해서  각색 필요없이 책 그대로 들고 영화를 찍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아마 그랬다면  깜찍한 블랙 코미디 수작 한편이 나왔겠지...

군더더기 없는 속도감 있는 전개에 , 개연성 넘치는 개성덕분에 살아 돌아 다니는 듯 생생한 등장인물들 , 저널리즘과 예술의 위선에 대한 과감한 풍자, 인생을 통찰할 줄 아는 시선등으로 꽤 재밌게 봤다. 저자가 28살에 쓴 소설이라는데...참, 할 말이 없다. 이 정도의 탄탄한 글재주라면 사방팔방으로 건방을 떨고 다녀도 되지 않을까 싶다. 식상하지 않는 소설을 읽고 싶다시는 분에게 권한다. 그리고 이렇게참신한 작품을 골라 꾸준히 출간해주시는 들녁 출판사에게도 그냥 넘어갈 수 없어 한마디... 그들의  안목에 박수를 보낸다. Good J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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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라이크 미 - 흑인이 된 백인 이야기
존 하워드 그리핀 지음, 하윤숙 옮김 / 살림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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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3 때 선생님은 우릴 고등학교로 보내면서 서운한 마음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른이 되더라도 기지의 눈으로 살지말고 늘 미지의 눈을 뜨고 살아라...라고. 그땐 몰랐다. 그 말이 얼마나 실천하기 어려운 말인지를...선입관 가득한 눈, 견해로 점철된 머리, 아집으로 똘똘 뭉친 가슴, 타인은 영원히 타자일 뿐이라는 냉랭한 시선, 함부로 판단내리고 시류에 휩쓸리는 조급함...아, 그렇게 살기란 얼마나 쉬운 것인지. 그땐 미지의 눈을 뜨고 산다는 것이 단순히 " 어린아이처럼 천진하"라는 말과 동의어인줄 알았다. 요즘에서야 그것이 늘 지성을 깨워 놓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란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걸 실천하며 산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란 것도...여기 그런 용감한 여정에 나선 한 사내가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자.

 

흑백 차별이 횡행하던 1950년대, 백인인 존 하워드 그리핀은 미국 남부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보기 위해 흑인으로 변장해서 거리로 나선다. 물론 그건 단지 호기심 충족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백인들은 흑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모른다는 것이 차별의 주요 원인이라 판단한 그리핀은 그들에게 실상을 알려주고 싶어했다. 기득권층인 백인들이 일부러 나서서 알려고 할 리는 없고, 흑인들의 말이 백인에게 들릴 리 없으니, 그 중간에 선 그 누군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살해될 지도 모른다는 주위의 우려에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용감하게 거리로 나선 그는 생각보다 끔찍한 현실에 충격을 받는다. 단지 피부색이 까맣단 이유로 멍청하거나 가난하거나 굽신대야 하거나  섹스머신이라는 도발적인 언어폭력에 시달리거나 무조건 불신의 대상이 되는 것이 흑인들의 처지란 것을 금세 깨달을 수밖엔 없었기 때문이었다. 살해되지 않거나 맞지 않으려면 속없는 엉클 톰 아저씨의 톤으로 네네 거려야 한다는것을 파악한 그리핀은 왜 정의롭다고 자신하는 백인들마저도 흑인들의 불신을 살 수밖엔 없는지 이해하게 된다. 흑인들이 바라는 것은 정의고 이해지 은혜를 베푸는 듯한 동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인간으로써, 그리고 아이를 잘 키우고 싶어하는 부모로써 백인과 다를바 없는 흑인들을 보게된 그리핀은 편견이 그 둘을 갈라 놓는 한 , 구호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개닫게 되는데....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퍼붓는 모든 차별과 편견에 대한 탁월한 보고서였다. 흑인이나 백인이 똑같은 인간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시도였을 백인의 흑인 되기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실행해가는 그리핀을 보면서 존경심이 저절로 생겼다. 하지만 그가 위대한 것은 단지 구상의 참신함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편견을 가볍게 뛰어 넘을 정도로 선명한 통찰력 때문이라고 보는게 적확할 것이다. 백인과 흑인이 서로를 백안시하게 만드는 편견의 선을 어찌나 쉽게 설명해 내던지... 감탄스러웠다. 어떤 수백 마디의 말보다 더 웅변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고 있던 그리핀. 개차반 미국이 그나마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어쩜 이런 소수의 사람들 덕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60년전 생명을 무릎 쓴 그의 용감한 행동이 바래지지 않게도 최근 미국은 흑인인 오바마를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뽑았다. 이젠 그리핀도 천국에서 발 뻗고 주무시지 않을까...쉽게 쓴데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많았기에 소설처럼 재밌게 읽힌다는 것이 장점이다. 그가 흑인으로 변장한 백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흑인들, 그리핀의 선의를 알아본 그들의 반응은 또 얼마나 귀엽던지... 타인을 타자시하는 굳어진 마음에 조금이나마 경종을 울리고픈 심정에서 모든 이들에게 강추한다. 나 역시도 배운게 많았기에...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스털링은 나를 매우 친근한 사람처럼 대했고, 내가 한때 백인이라는 것도 모두 잊었다. 그는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우리 처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 자신이 흑인이라고 철저히 믿는 바람에 나도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같아졌다. 처음으로 친밀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흑인이며, 우리의 걱정거리를 백인이다. 어떻게 그들과 지낼 지, 어떻게 백인 앞에 머리 숙이지 않으면서 그들에게 존중받고 당당하게 설 수 있을 지, 어떻게 백인이 우리에게 없는 자기만의 특별한 권리를 하나님이 자기들에게만 주었다고 단 한 순간도 생각하지 않도록 할 수 있을지, 우리의 관심은 온통 그 문제로 향했다.--58

 

흑인이든 백인이든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처음으로 사물의 통속적인 이미지와 사물 자체를  혼동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나는 그의 태도가 아이에 대한 넘치는 사랑에서 비롯되었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향한 사랑이 너무 깊어서 이 사랑이 인류 전체로 흘러넘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능력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치유해 주는지 그 남자는 자신은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비 내리는 앨라배마의 밤, 타인에게 수없이 상처받고 지친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사랑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인간이 가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자비심과 형이상학의 회복이라고 했던 자크 마리탱의 주장이 생각났다. 아니,보다 단순한 것으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격언이 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너희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하라." 사랑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 서로를 속이고 서로에게 냉담한 곳에서 살다보면 점점 더 깊이 죽음에 사로잡히며 미덕 이외에는 어떤 것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는다.--182

 

"우리는 저들에게 정당한 권리를 돌려주고 정의로운 평등을 다짐해 줘야 한다.그런 다음 아무런 간섭도 하지 말고 모든 이를 그냥 내벼러 두어야 한다.우리는 온정주의를 베풀는 과정에서 편견을 드러낸다. 온정적인 태도는 저들의 존엄성을 훼손시킨다."-241

 



오랫동안 내 안에 들어 있던 감정의 찌꺼기들, 편견 , 부정, 수치심 , 죄의식은 '타자'가 결코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모두 씻겨 나갔다. 모든 인간은 사랑하고, 아파하고, 자신과 자기 아이들을 위한 인간적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그저 존재하고, 필연적으로 죽는, 이 모든 동일한 근본 문제에 똑같이 부딪힌다. 이는 모든 인간 안에 들어 있는 기본 진리며, 모든 문화, 모든 인종, 모든 민족이 다 같이 가진 공통적인 특징이다.--365

 

시력을 잃고 살았던 10년동안 그리핀은 '타자'가 된다는게 어떤 것인지를 경험했다. 시각장애가 없는 사람은 그를 장애인으로 보며, 시각장애와 관련이 없는 면에서도 열등할 것이라고 여긴다. 그리핀은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시력을 잃은 한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잃은게 없다는 점을 이해하라.그의 지성도, 취향도, 감수성도, 이상도,존중받을 권리도, 그 어느 것도 잃지 않았다.그는 늘 그랬듯이 여전히 한 개인으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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