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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덴바덴에서의 여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3
레오니드 치프킨 지음, 이장욱 옮김 / 민음사 / 2006년 4월
평점 :
소설속 화자인 나는 "한 낮의 기차를 타고 " 도스토예프스키가 말년을 보낸 레닌그라드로 향한다. 평소 도스토예프스키를 흠모하던 나는 그의 두번째 아내인 안나의 자서전을 들여다보면서 과거를 회상한다. 나의 시선을 따라 시간은 어느새 안나와 도스토예프스키가 신혼여행을 떠난 18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빚쟁이에게 시달리던 도스토예프스키는 두 달 안에 소설을 써야만 하는 절박함에 속기사를 고용하는데, 행운의 반전인지 바로 그 속기사가 그의 두번째 아내가 된 안나였다. 간질 발작과 끊이지 않는 집안의 불행, 첫 아내와의 불행한 결혼생활과 이혼, 그리고 게으르고 뻔뻔한 가족들의 착취와 도박중독등으로 절망속에 살고 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녀가 자신의 구원의 동아줄이라는것을 즉시 알아본다. 그의 천재성과 인간성에 반한 안나는 그의 청혼을 어렵사리 받아들이지만, 시기심많은 친척들은 둘의 결혼을 못마땅해한다. 결국 친척들과 빚쟁이를 피해 도망가다시피 독일의 바덴바덴으로 떠난 신혼 부부는 곧 도씨의 도박으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오붓하게 신혼을 보낼 줄 알았던 안나는 가엾게도 난생처음, 그것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국에서 처절하게 가난하고 비참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안나의 극심한 고통에도 도씨가 도박에서 헤어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안나는 극단의 조치를 생각하게 되는데... 레닌그라드 거리를 거닐면서 나는 힘든 시간을 보내던 도씨 부부를 마치 눈에서 보는 듯 아련하게 회상하면서 과거의 빛나는 문학적 영광이 점차 희미해져가는 러시아의 현재를 떠올린다.
이 책의 작가인 치프킨이 레닌그라드를 여행하면서,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겨내지 못했을 고난과 인고의 시절을 사랑과 존경으로 이겨나간 도스토예프스키 부부의 망명 시절과 독재로 인해 정치적으로 암울한 현재를 조명하고 있던 소설이다. 공들여 만든 티가 역력하던, 과거와 현재로의 넘나듬에도 이음새가 보이지 않던 완벽한 수작으로 평소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던 나로써는 반가움을 넘어 애틋함마저 느껴지던 작품이었다. 마치 도스토예프스키를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 사실감 넘치던데, 도스토예프스키를 완벽에 가깝게 입체화시키는데 성공한 소설이지 않는가 한다. 도씨라는 문학의 거장을 어찌나 무리없이 분석해 놓았는지 기가 막히던데, 이름마저 생소한 러시아 작가가 쓴 작품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작가의 상상력과 감정 이입능력,그리고 감수성과 통찰력에도 놀랐지만 무엇보다 도씨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면 쓸 수 없는 책이란 점에서 감동적이었다. 수잔 손택이 이 작품을 가르켜 " 간결하고 시적인 걸작" 이니 "감동적이고 신비하다." 라고 찬사를 늘어 놓았다던데, 읽어보니 정말 과장이 아니었다. 귀에 대고 들려 주는 듯 친근하게 들려오는 나직한 나레이션과 가슴으로 촉촉히 울려오는 훌륭한 문장들, 순간을 잡아내는 탁월한 순발력과 치밀한 묘사, 그리고 자연스런 문장들엔 마치 맨발로 책속을 거니는 듯 꿈꾸는 기분이었다. 슬라브 민족주의를 주창하던 도씨를 (다른 말로 하면 유대인을 혐오했음) 사랑한 유대인 의사의 소설이라...비록 인종은 다를지 모르나, 인간의 고통을 직시한 인간애를 가졌단 점에서 공명하던 두 사람이기에 가능한 작품이 아닐런지 싶다. 내 장담하지만 아무리 도씨가 유대인을 싫어한다해도 이 작가와 책만큼은 인정의 미소를 보낼거라 본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사랑하거나 더 알고 싶은 독자라면 놓치지 말고 보시길...
<밑줄 그은 말>
그 19세기 러시아 작가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어떤 행복도, 설령 그것이 전 인류적 행복이라 하더라도, 타자의 고통을 딛고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그것이 한 사람의 생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겨우 단 한 사람의 망가진 생이라 하더라도, 특히 아이들의 고통 위에서는.--90
나는 다른 뭔가 새로운 빛을 던져줄 만한 견해 말이다. 조금이라도 다른 방향, 모든 문제를 조금이라도 새로운 시선을 보려는 시도 같은 것을 찾아보고 싶었다. 유대인들은 오직 자기 종교를 고백하는 것이 허용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한 민족이다. 내게 믿을 수없을 만큼 이상하게 느껴진 것은, 소설에서는 인간의 고통에 대해 예민한 사람이, 학대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열성적으로 옹호하던 사람이,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에게는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거의 미친 듯 설파하던 사람이, 잎새 하나와 풀잎 하나하나에 환희에 찬 송가를 바치던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 수천 년 간 쫓기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옹호도 변호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그는 정말 눈이 멀었던 것일까? 아니면,아마도 증오의 눈 멀었던 것은 아닐까?--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