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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재다
다니엘 켈만 지음, 박계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평점 :
빙퉁맞은 천채 수학자 가우스가 여행가기 싫어 발버둥을 치는 첫페이지를 읽는 순간 그만 홀딱 반해버린 책이다. 사정을 들어보니 방콕족인 가우스가 역마살족인 훔볼트의 초대를 받아 베를린으로 가야 한단다.같은 방콕족으로써 안 가겠다고 버티는 가우스의 심정이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에궁...얼마나 귀찮았을고.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행을 떠나야 했다. 왜냐면 그가 가려는 곳에 훔볼트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18세기 독일의 신지식인들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한자리에 모인다니,상상만으로도 벌써 흥분 되는 사건 아니겠는가?어떻게 그 둘을 한자리에 모아 놓을 생각을 한 것인지,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에 혀를 내둘렀다.작가는 그 둘을 모이게 한 사정에 대해 이렇게 털어 놓는다.
주인공인 훔볼트와 가우스는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의 본질을 탐구했다.홈볼트는 아프리카와 남미를 돌아다니며 세계를 탐험한 반면,가우스는 집에 칩거한 채 수학만으로 우주 공간이 휘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두 사람을 한자리에서 만나게 하면 인간과 세계를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828년 자연과학 회의에서 둘이 만나는 장면에서 시작하는 이 소설은 그 후 그 둘의 인생을 교차해 보여주면서 두 사람이 어떤 사람들이고 당시의 시대상은 어떠했는지,그리고 그들의 업적과 주변 사람들에 대해 재미나게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다.우선 부유한 집안의 둘째로 태어난 훔볼트는 엄마가 돌아시자 이제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다고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타고난 탐험가였다고 한다.목적을 위해 수단은 가리지 않는다는 확고한 소신의 못말리는 경험주의자였던 그는(=풀어 설명하면 호기심이 생기면 즉각 몸으로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란 뜻이다.) 아마존을 탐험하고,남미의 가장 높은 산에 오르며 ,동굴속의 시체를 가져 오는등 당시로써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을 벌리고 다닌다.무모한 저돌성이 이성적인 합리성과 만났을때의 파괴력을 여실히 보여주던 이 괴짜 탐험가의 여정은 비행기도 기차도 인터넷도 없던 시대의 인간적인 낭만을 제대로 음미하게 해주었다.거기에 막가파였던 훔볼트와 어쩌다 그의 여행에 동참해서 생고생을 있는 대로 하고 있던 봉플랑과 티격태격하는 장면들은 어찌나 웃기던지...돈키호테와 산초의 독일 버전으로 보일 정도로 감칠감 넘쳤다.평소 지리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훔볼트에 대해 궁금했던 나로써는 맛깔나게 그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한편 가우스의 경우는 천재의 일생을 대단히 흥미롭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특이할만했다.어린 시절 천재성을 알아본 선생님의 설득으로 간신히 학문의 길로 나선 그는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고등수학을 이해했을만큼 신동이었다고 한다.스무살에 벌써 수학자들이 평생 걸려도 못해내는 업적을 가비얍게 해낸 가우스는 하지만 일상적인 면에선 어이없을만치 둔감한 사람이었다. 아내가 아이를 낳고 나서야 아이를 가진것을 알았다거나 신문을 안 읽는 바람에 전쟁이 난 것도 몰랐다는 일화만 봐도 그렇다.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천문학장이 된 그는 자신의 천재적인 영감을 우주를 헤아리는데 쓰게 되고 아인슈타인이 탄생하기 100여년전에 이미 우주가 휘어졌다는 것을 알아낸다.아들이라해도 두뇌회전 느린 사람에 대해 경멸감을 숨기지 않던 이 까다롭고 직선적인 가우스가 툭툭 예언처럼 내뱉던 미래에 대한 비전이 200년이 지난 지금 그대로 실현되었다는 것은 또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어쩜 천재들의 영감이야말로 이 세상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한바탕 소동으로 끝이 나고 만는 그 둘의 조우를 읽으면서 난 과거 선조들이 이렇게도 대단하단 사실에 으쓱했다.현대의 너그러운 기준으로 봐도 "괴짜"임이 분명한 이 특이하고 엉뚱하며 기발한 두 위인들이 자신의 길을 개척해 간 여정들엔 귀감 삼을 만한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아무것도 없던 시대에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던 그들의 용기와 넘치는 자신감,그리고 굴하지 않은 탁월한 지성에 감탄하면서,현대인들의 거만한 코를 납작하게 만들던 18세기 천재 둘을 이처럼 참신하게 발굴해낸 작가의 안목과 생뚱맞은 상상력에 박수를 보낸다.천연덕스러운 해학과 순발력 넘치는 재치, 마치 영화를 보는 듯 생동감있는 표현,개성 넘치는 등장인물들과 그들에 대한 모순없는 통찰,그리고 그들이 주고 받는 매혹적인 대화들로 모처럼 독서의 재미를 만끽하게 해준 책이었으니 박수를 받는다해도 어색하진 않을 것이다.더 기막힌 사실은 이 책이 작가 나이 겨우 서른에 쓴 작품이라는 것이다.나이가 믿겨지지 않을만큼 소재를 다루는 솜씨가 노련하던데,앞으로의 행보를 주목해서 봐야 할 작가가 아닌가 한다.꽉 끌어안고 뽀뽀해주고 싶을 정도로 깜찍한 매력을 가진 책,지적인 유희를 즐기시는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인간은 동물이 아니오.훔볼트가 말했다.
가끔은 동물일 때도 있습니다.봉플랑이 말했다.
홈볼트는 칸트를 읽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프랑스인들은 외국 사람이 쓴 책은 읽지 않습니다.--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