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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나의 마나님
다비드 아비께르 지음, 김윤진 옮김 / 창비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아내가 첫째를 낳고 있는 사이 분만실 밖으로 쫓겨난(?) 작가는 이런 시를 짓는다.
나는 기다리는 것이 좋아.
모르는 것이 좋아.
무지한 자로 남는게 좋아.
투명한 건 더이상 견디지 못해.
태어나기도 전에 아이에 대해 모든 걸 알아두어야 하는 그런 방식은.
다시 비밀스러움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네.성스러움으로....(중간 생략)
유아 체중계나 기저귀를 팔아먹는 짓은 제발 좀 그만했으면,그리고 산부인과의사들에게 두 배로 과세를 했으면.난 10킬로만 살을 빼면 좋겠네.젊은 부모들을 위한 잡지들 좀 발행 금지하면 좋겠네.
책을 펼치니 맨처음 저자 서문이 눈에 뜨인다.한국에서 자신의 책이 번역 될거라는 말에 흥분하면서도 과연 자신의 말이 우리에게 먹힐까,혹 오해는 사지 않을까 걱정하는 모습이 역력했다.그리고 왜 한국일까? 작가 자신도 갸우뚱하는 듯 보였다.'내 말이 한국 사람들에게 일리있게 들릴까?' 라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면서도 되도록 좋게 봐달라고 귀엽게 아부하는 그의 서문이 따스하게 다가왔다.아,참,걱정 안 하셔도 되는구만,우리도 그렇게 꽉 막힌 사람들아닌데,했지만 한편으로는 남녀차별이 유난하다는 동양에서 자신의 책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걱정하는 그의 모습이 무리는 아니지 싶었다.그렇다면 도대체 이 책엔 어떤 내용을 담겼길래 그가 이렇게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일부 다처제가 자신의 일생 일대의 꿈이라고 너스레를 떨긴 하지만 실은 가족 지상주의자인 그가 두 딸을 키우다보니 할 수 없이 육아에 적응해가는 이야기와 결혼해 살다보니 아내의 잔소리에 수긍하게 되는 과정들이 결혼생활의 잔잔한 에피소들과 함께 유머러스하게 펼쳐지고 있는 책이다. "아,유부남은 괴로운 것이여!"라는 넋두리를 프랑스 넘어 한국에까지 들리도록 시시콜콜 풀어내고 있었는데,그의 투정을 잘 들어보면 아마 금새 그 모든 것들이 실은 <가족 찬가>의 변주곡이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채실 수 있으실 것이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생각지도 않게 자유를 잃고,토끼같은 마누라와 긴팔 원숭이같은 딸 둘을 거느린 가장이 되어버렸다는 그는 결혼 생활이 자신이 상상하던 것과는 거리가 멀기도 하거니와 자신이 생각지도 못한 세계에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기저귀나 공원 놀이터,유아용 콧물 흡입기,그리고 아내의 게이 친구등에 적응하는건 분명 독신들이 꿈꾸던 생활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 상황에서 그가 무엇보다 절망(?)한 것은 그보다 아내가 더 적응을 잘 하더라는 것. 결혼 생활 8년만에 견적을 내보니 자신이 아내보다 봉급도 작아요,제대로 하는 일 대충 없어요,게을러요,뚱뚱해요,못하나 박으려면 폼 잡다 날 새요...자신의 처지를 곰곰히 생각해본 그는 결국 남자의 시대는 갔다는 결론을 내린다.남자의 미래는 여자라는 명제가 사실이었다고 놀란 척을 하면서,가장으로써의 체면은 벗어던지고 아내에게 자신을 버리지만은 말아 달라고 짐짓 엄살을 떠는 그를 보자니 내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이 남자,여자를 좀 안단 말이지.우리가 내숭 +엄살 떠는 남자들에게 약한걸 어찌 알고 말이지.흐흐흐...
그는 말한다.담배 없이는 살아도 아내 없이는 못살아! 이렇게 우리나라 남성들에게 돌팔매를 맞을 만한 발언을 꿋꿋히 던지면서 남성 제국 몰락사를 서글프게 읊조리는 것 같지만, 실은 그저 휴머니즘& 사랑이야기 빼곤 남는게 없어 보이는 책이었다.평범한 가장이 제대로 가장 노릇을 하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과 그 과정을 겪어 가면서 성장하는 자신을 대견하게 여기는 작가의 자부심이 느껴지던 책,읽고 나니 흐믓했다.여전히 이 지구상 어딘가엔 이렇게 가족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아마 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여자가 남자의 미래라고는 하지만 그 여자를 지탱해 주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남자란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