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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 뜨는 여자
파스칼 레네 지음, 이재형 옮김 / 부키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미용사 견습생 뽐므는 어느날 대학생 에므리를 만나 속절없이 사랑에 빠지고 만다.사랑은 번개에 맞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던가? 벼락에라도 맞은 듯 대책없이 사랑에 빠져 버린 그녀는 고민하는 흔적 하나 없이 그와 동거를 시작한다.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조차 가늠하지 못하던 이 순박한 소녀는 사랑에 빠졌으니 그와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남자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여느 부부들처럼 집을 꾸미고 음식을 만들며 옷을 꿰매고 뜨게질을 하며 남자를 위해 모든 것을 맞춰 나가는 뽐므의 헌신은 에므리를 점차 질리게 만든다.그녀가 자신과 다르다는 것에 대한 경멸과 질투,의심과 갑갑함은 결국 그녀의 모든 것을 질시하기에 이르고, 그는 마침내 그녀에게 이별을 통고한다.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한 창녀의 딸과 미래 박물관장이 꿈인 대학생,공통점이라고는 이방인異邦人라는 것뿐이었던 두 사람의 관습적인 사랑은 그렇게 파국을 향해 치닫는데..
신분이 다른 남녀가 만나 사랑에 빠지고 동거를 하다 파국을 맞는 이야기는 많다.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런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는걸 보면 아마 그 이야기기속의 변주들이 아직 다 파헤쳐지지 못한 채 남아 있는 모양이다.책을 받아 들고는 얼핏 진부하기 그지없는 소재라 새로울만한게 있을까 했는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작가가 새롭게 들리면서도 설득력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걸 보면서 좋은 소설이란 소재의 참신성도 중요하겠지만 그것보다도 그걸 어떻게 들려 주는가 하는 역량에 달린 것이로구나 싶었다.
이 책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한다면 진정성에서 오는 참신성이었다.
처음 둘의 사랑은 물론 진실했다.하지만 그때조차 남자는 언젠가 그녀가 지겨워질 것이라는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뽐므,자신의 육감적인 매력과 가치에 둔감한 이 소녀에겐 그런 예지감 같은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그저 사랑을 믿을 뿐...
사랑을 철썩같이 믿는 소녀와 사랑이 진실하기는 했지만 이별이 내정되어 있다는걸 알고 있던 남자.자신을 무조건 믿는 여자가 지겹기만 한 남자와 사랑이 식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그저 순종만 하던 여자,결국 남자는 그녀를 버리고,버림을 받는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다 미쳐 버린다.그 누구도 그녀에게 그것이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는걸 확신시킬 수는 없었으리라.이 책을 보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단지 멍청하다고 비난하기엔 너무도 뿌리 깊은 자아에 대한 인식이라 돌려 놓을 수가 없어 보였으니까.왜 그녀는 그런 인생을 택할 수밖에는 없었을까?우리가 한탄한들 어쩌겠는가? 그것이 그녀의 유일한 선택이라면 수긍할 밖에는...
이 책에서 가장 설득력있던 부분은 한 여자의 일생을 망쳐 놓은 에므리가 후에 그 사랑을 회상하며 자신의 젊은 날을 뿌듯해 하는 장면이었다.그래,사랑이란 때론 그렇게 잔인한 게임에 불과한 것이지.상대방의 진심을 부셔 놓고 영혼을 산산조각 내버리고 난 후에도 당사자가 그 사랑을 미화하는 장면들을 난 얼마나 많이 보아 왔던가.아무도 그 진실을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말이다.미화된 사랑 뒤에 가려진 사랑의 상처와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한숨 짓게 하던 소설,문체는 시처럼 우아하고 문장들은 군더더기 없이 매끄러웠다.통속적인 소재에 순애보적인 뽐므의 순정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종종 번득이는 예리한 통찰력에는 고개가 절로 끄떡여지던 소설이었다.
그런데 지금도 뽐므같은 여자가 있을까 ?아마도 그렇겠지.적어도 이젠 뽐므같은 여자가 시대착오적으로 여겨진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 아닐런지라는 생각을 해본다.
<밑줄 그은 말>
게다가 에므리는 그가 애정이라고,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알고 보면 하나의 거래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분명히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하기야 그런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조차 계약 내용의 일부일 성싶다.
그가 그녀에게 느낀 애정은 물론 거짓으로 꾸민 것은 아니지만,그래도 나중에 스스로 분개하리라는 건 처음부터 알았을 법했다.--117
언젠가 박물관장은 자기가 거의 어린아이나 다름 없던 스무살 때 불가사의할 만큼 초라한 한 소녀를 알았다는 사실을 회상하게 될 것이다.그는 어렴풋하게 양식화되어 남은 자신의 모습에,연인이 된다는게 얼토당토않아 보이던 여자와 남자가 한때나마 함께 있었던 모습에 감동 어린 눈길을 보낼 것이다.그는 젊은 시절의 그 이상한 사건을 흐믓한 마음으로 떠올리면서 거기서 자신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다며 좋아할 것이다.그것은 ..그가 저지른 한 건의 은밀한 사기 행각이었다.그의 향수,심지어는 그의 회한까지도 섬세하고 소중한 감정들로 이루어진 그의 부정한 자산을 조금씩 형성할 것이며,그는 이 자산에서 생기는 이자를 거의 날마다 조금씩 챙길 것이다.--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