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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 열여섯 소년, 거장 보르헤스와 함께 책을 읽다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수정 옮김 / 산책자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며칠 전 매트릭스 1을 우연히 보다 깜짝 놀랐다.심오하게 철학적인 내용이란걸 깨달았기 때문이다.게다가 곳곳에서 느껴지는 보르헤스의 숨결이라니,뜻밖이었다.특히 네오가 가상의 공간을 걸어가는 장면에선 네오 대신 보르헤스가 걸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중년에 장님이 된 보르헤스는 그가 사랑하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를 누군가의 팔장을 끼고 그렇게 걸어 다녔다고 한다.그가 지각하던 공간 감각은 분명 우리완 달랐을 것이다.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 중심에 서서 무언가를 느끼고 상상했을 보르헤스,세상의 중심에 선 사람처럼 서서 그는 무언가를 알아내려 자신의 모든 감각을 열어놓고 있었을 것이다.마치 네오처럼...가상 공간에서의 네오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르헤스,전혀 공통분모가 없어 보이는 그 둘은 생각보다 많이 닮아 있었다.그나저나 이 겸손하고 능글맞아 보이는 보르헤스란 작가는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걸까? 그가 알고 있는 진실들에 소름이 끼친다.거기에 그가 깨달은 수많은 진실들 중 우리가 제대로 해석해 낸 것이 얼마나 될까를 생각하면 진땀마저 흐른다.그에겐 내가 파악하는 이상의 뭔가가 있을거라는 어렴풋한 짐작이 점차 확신으로 변해간다.그를 알아가면 알아 갈수록.하지만 이제 겨우 난 기껏 짐작만 할 수 있을 정도이니...그를 정확하게 알아 낼 수 없다는 사실이 현재로선 안타까울 뿐이다.
열여섯살의 알베르토는 장님이 된 자신에게 책을 읽어주지 않겠냐는 보르헤스의 부탁을 받고는 그의 집으로 간다.그로부터 4년 남짓 보르헤스를 방문하면서 알게된 이야기들을 과장없이 적고 있는 수필집이다.그 방문이 특권이란것을 깨닫지 못한 소년 알베르토는 하루 하루를 보르헤스와 별다르지 않게 보낸다.그와 대화를 나누고,책을 읽어주며,책과 생리적인 교감을 나누고 있는 듯한 보르헤스는 지켜 보면서.그때의 기억들을 통해 멩구스는 보르헤스가 어떻게 자신의 상상력과 생각을 소설속에 녹여 냈는가 들려 준다.그 덕분에 " 원형의 폐허들"이나 "바벨의 도서관","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그리고 "세익스피어의 기억","알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할 수 있어 좋았다.하지만 무엇보다 보르헤스의 진면목과 에피소드들을 알게 된 것이 더 큰 수확이었다.인간적이고,말할 것도 없이 지성적이며,개구장이처럼 짖굳고,<시네마 천국>의 알프레도 아저씨처럼 다정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던 보르헤스,그런 인간을 만나는 것이 맨날 일어나는 흔한 일은 아니니 말이다.수천년부터 시작 돼 한번도 끝이 난적이 없는 대화를 자신이 이어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인식했다는 천재,작가이기에 앞서 책이란 독자들에 의해 재탄생하는 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열정적인 독자였던 보르헤스,그가 궁금하신 분들에게 추천한다.얇다.솔직히 이런 책은 더 두꺼워도 상관없는데...
<책속에서>
우주를 도서관이라고 부르고 낙원을 '도서관의 형태로'상상한다고 실토한 사람의 서재치고는 그 규묘가 실망스러웠는데,어떤 시에서도 말했듯이 언어란 단지 '지혜를 모사'할 수 있을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책이 넘치는 공간,책으로 터져나갈 것 같은 책장,원고더미가 길을 막고 빈 틈새마다 빼곡한 잉크와 종이의 정글을 기대했다.그런데 정작 와서 보면 몇 귀퉁이에만 얌전하게 책이 꽃혀 있었다.50대년대 중반이었으니 아직 젊었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보르헤스를 찾아갔다가 집이 소박하다면서,거장께서 왜 좀더 품위있고 화려한 곳에 살지 않느냐고 물었다.보르헤스는 그 말에 심기가 몹시 상했다.
"리마에서는 그러는지 모르겠군."그는 생각이 짧은 페루 작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여기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은 허세 부리는걸 좋아하지 않는다네." p.28
보스헤스의 현실의 정수는 책 속에 있었다.책을 읽고,책을 쓰고,책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그 알맹이었다.그는 수천 전에 시작돼서 한번도 끝난 적이 없는 대화를 이어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인식했다.책은 과거를 복원했다....그는 유행을 쫓는 문학이론에 질색했고,책이 아니라 학파와 파벌에 몰두한다며 특히 프랑스 문학을 비판했다.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는 언젠가 문학계의 지인 가운데 "관습과 관행,또는 나태에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은 보르헤스뿐이라고 얘기했다.
"나는 즐거움을 추구하는독자야.책을 구입하는 것 같은 사적 영역에 의무감이 끼여들게 한 적은 한 번도 없어."
젊은 작가에게--마누엘 무히카 라이네스
전진의 꿈을품는 것은
부질 없나니.
바다만큼 많은 글을 쓴다고 해도
이미 보르헤스가 썼을 테니까.
보르헤스의 보에노스아이레스는 세계의 형이상학적 중심이기도 했다.베아트리즈 비테르보네 지사실로 이어지는 열 아홉번째 계단에서는 온 우주가 수렴하는 점인 알렙이 보이고 칼레 멕시코 거리에 있는 국립도서관은바벨의 도서관이 된다.
보르헤스는 예민한 몽상가였고,꿈 얘기를 즐겨했다.꽉 움켜진 생각들이나 두려움을 놓아 버릴 수 있고,그렇게 자유롭게 풀어놓은 것들이 제 나름의 이야기를 꾸며낼 수 있다고 느꼈다.특히 잠들기 전의 짧은 시간,'의식이 사라지는 것을 의식할수 있는'잠과 깸 사이의 시간을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