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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7년, 근대의 탄생 - 르네상스와 한 책 사냥꾼 이야기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이혜원 옮김 / 까치 / 2013년 5월
평점 :
무지를 피해 달려라~~~라는 말이 어쩜 인간사를 한마디로 압축한 것이 될 수도 있겠다는 것이 이 책을 내려 놓으면서 든 생각이다. 인간은 얼마나 무지하고, 야만적이며, 잔인하고, 비합리적인데다, 편견에 사로잡혀 있고, 완고한지...종종 이런 저런 역사를 뒤적이다 보면 한숨이 나올 때가 부지기수다. 그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과거에 살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고나 할까. 적어도 지금은 신을 믿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고, 신이 없다고 생각한다고도 꺼리낌없이 말할 수 있으며, 지구는 해 주위를 열심히 돌 뿐이라고 주위에 소란을 벌이지 않으면서 말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리처드 도킨이 < 만들어진 신>라는 책에서 신은 없다는 과학자로써 지극히 당연한 말을 하는데도 벌벌 떤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개인이 신을 안 믿는다는 것과는 별개로 신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화형에 처해질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 책 속에서 보듯, 당연한 말을 당연하게 했을 뿐인데도, 다들 고문과 형편없는 대우속에 비극적인 최후를 보내야 했던 사람들이 비일비재했다는 것을 나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과거의 잔재속에 살고, 그런 과거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이라면 조금은 겁을 집어 먹는게 당연하지 않을까. 내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말 일 지라도 , 그것이 아무리 진실에 근거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역사가 증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보니 추측해보게 되는 것이다. 과연 과거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갔을까? 분명 지금과 똑같이 우리처럼 생각하고 지식을 키워 나갔을텐데,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상식에 어떻게 도전을 했던 것일까? 거기에 대한 해답이 궁금하신 분들은 이 책을 보시면 되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이야말로 과거 합리적인 것과는 결연히 담을 쌓고 살았던 유럽 중세 시절, 근대로 향한 광명의 문을 열어 제낀 한 사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가 누구냐고? 바로 그가 포조 브라촐리니다.
그가 누구신지 모르시겠다고? 당연하지.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그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는 그저 비천한 가문에서 자라나, 재능 하나만으로 교황의 비서 자리를 꿰차고 그럭저럭 죽음을 당하지 않고 78세까지 산 덕분에 한 도시의 총리도 하고, 여러 자식을 거니르고 살았던 한 사내에 불과하니 말이다. 아무도 그를 기억해야 할 필요도,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없는 그저 평범한 과거속의 한 인물이었을 뿐이다. 이 책의 저자가 난데없이 그를 무덤에서 발굴해 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책의 시초는 저자의 하버드 대학교 시절, 암울한 시간을 견디고 있던 그의 손에 우연히 한 권의 책이 들어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건 바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것으로,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100년전에 쓰여진 그 책은 당시나 지금이나 깜짝놀랄만큼 위험한 사상이 들어있었다. 2천년 조금 남짓한 세월을 묵은 것이라도 여전히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통찰력이 살아있다는 것은, 단지 문장이 가진 생명력이 그만큼 탁월하단 뜻이었으니 말이다. 읽는 자체만으로도 사람의 이성을 일깨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 책은 당시 인생이 의문과 우울 자체였던 저자에게 광명과 같은 빛을 던져 준다. 그리고 그런 경험은 후에 저자로 하여금 어떻게 이 책이 중세의 암흑같은 시기를 살아남아 후대에게 전해지게 되었는지 관심을 갖도록 하기에 이른다. 그리곤 뜻밖의 사실에 저자는 놀라고 만다. 이 책을 중세의 무지와 불구덩이 속에서 건져낸 것이 바로 교황의 비서 출신의 한 필사가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누구보다 종교의 중앙에 서 있는 교황의 최측근이, 우주는 신의 도움 없이도 움직이고, 사후 세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가장 좋은 것은 현재의 삶을 즐기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책을 수도원 먼지 구더미 속에서 구해내 유포시켰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이율배반적인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그것이 이 저자로 하여금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한다. 루크레티우스는 과연 어떤 사람이였길래 2천년전에 저런 글을 아무렇지도 않게 써 갈겼으며, 그의 글에 동조했던 당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사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고 이런 불온한 사상이 담겨진 책을 열정을 담아 구출해 낸 중세 포조란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라는 상상...포조는 과연 이 책의 내용을 과연 알고 필사해 낸 것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고대 책에 대한 열정 때문에 내용을 알지도 못한 채 세상에 내보낸 것일까?이런 호기심은 저자로 하여금 이 책이 처음 출간된 2천년전의 그리스와 이 책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구원받게 된 중세 시절을 탐구하게 하기에 이르는데..저자가 가진 의문과 호기심에 답하고 있던 책이 바로 이 것이 되겠다. 과연 저자는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결국 저자가 궁극적으로 묻고 있던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다. 과연 우리보다 더 먼저 살았던 사람들은 우리보다 멍청했을까? 아니면 우리보다 더 똑똑했을까? 과연 똑똑했다면 그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우리보다 배운 것도 적고, 이런 저런 미신에 시달렸으며, 과학적인 사고는 전무한데다, 이성이라고 할만한 싹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인데 말이다. 그것에 대한 해답이 바로 이 책 안에 있다. 뭐라 할까? 인간이 언제나 대단한 존재들이었고, 결국 시대를 넘나들면서 남겨지는 것들은 진실밖엔 없구나라는걸 깨달았다고나 할까. 진실만이 시간을 견디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다만 인간이 그걸 자각할 수 없는 이유는 그 누구도 2천년을 살지 못하기에, 그걸 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일테지만서도..아무리 똑똑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천년의 시야를 가질 수는 없는 법이니 말이다.
인간의 무지와 대비해 꺼지지 않는 불꽃인 이성, 그리고 중세를 바라보는 탁월한 내지는 통찰력있는 시선이 압권인 책이다. 다만 걸리는 점이라면 중세의 암흑기를 끝낸 시점으로, 그리고 근대를 탄생하게 한 시점으로 저자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포조에 의해 발견된 1417년으로 본다는 것은 물론 조금 비약한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그 책이 후대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세익스피어, 몽테뉴, 그외 다른 과학자들까지...--근대의 합리적인 정신을 함양하고 확신을 얻게 해주었다는 저자의 주장이 맞다고 한들, 책 한 권으로 인해 역사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주장하는건 좀 너무 오바한 게 아닌가 싶다. 물론 그거야 적당히 가려 들으면 되는 것이니 신경 쓸 부분은 아니고, 그보다 더 관심을 갖고 지켜 봐야 하는 것들이 바로 근대의 사상을 형성하게 했다는 그 유명한 책에 대한 것이다.
듣고보니 정말로 그 책은 대단하더라. 2 천년전에 쓰여진 것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통찰력이 넘쳤으니 말이다. 이런 내용이 2천년 전에도 쓰여졌다는걸 생각하면 우리는 양적인 면에서는 문화적 진보가 이뤄졌다고 자부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질적인 면에서는 과거보다 낫다는 말을 하기 힘들겠다 싶었다. 우리가 한 생각들은 과거 우리 선조들도 다 한 생각들이라는 것은 도무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2천년전 사람들이 다 이미 알았던 것들을 아직도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부끄럽기만 하다. 물론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들이 어떻게 그런 생각들을 해냈는지 놀라울 따름이고, 또 그런 놀라운 사상들이 이단이나 불온하다고 박해받고 처단되었다는 사실에는 어이가 없을 뿐이다. 개개인인 인간은 천재일 수 있을지 모르나, 대중인 인간은 우매할 가능성이 더 높은 것 같으니...어쩜 가장 무서운 것은 대중이라는 이름의 무지와 무관심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보자면, 우리 인간은 정신적인 면에서는 전혀 발전을 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 싶다. 아무리 최고를 갖다 줘도 알아보지 못하며, 그것을 배우지 조차 못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인간이라는 종은 이러니 저러니 잘난 척을 해도 결국 성장을 하지 못한 채 한 자리만 맴돌면서 어제 배운 것을 오늘 잊어 버리는 존재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우리가 여전히 옳다 그르다를 반복하고 있는 주제들에 대해 2천년 저자가 이미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우린 어쩜 답을 모르는게 아니라, 답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답을 알려 줘도 망각 속으로 밀어넣은 채 다시 어리석음과 무지의 향연을 벌이면서 인생을 낭비하고 있겠지. 우리는 무지를 피해 열심히 달리고는 있지만, 그것이 이성이 아닌 또 다른 무지를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늘 생각해 봐야 겠다. 다소의 비약스러운 점은 무시 못하지만, 그럼에도 <사물의 본성>이란 책을 알아본 저자의 안목에서 보듯, 간간히 통찰력이 번득인다. 그것이 그가 그렇게도 받들어마지 않는 <사물의 본성>처럼 이 책의 생명을 길게 만들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서...여러면에서 읽을만하다. 재밌는 것은 얼마전에 몽테뉴를 다룬 <내가 고양이를...>를 읽으면서 오히려 그를 잘 모르겠다고 투덜댔는데, 이 책속의 몽테뉴는 그보다 선명하게 조명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고양이>가 책 한 권 속에서도 보여주지 못한 몽테뉴의 진가를 이 책속 단 몇 줄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 것일까? 그만큼 이 저자의 통찰력이 대단했다는 뜻이겠지. 흥미로운 책 사냥꾼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시는 분들은 어쩜 실망하실지도...책 사냥꾼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아닐 수 있으니 말이다. 그보단 암흑의 시기에도 진보적인 자신을 외면하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는게 맞지 싶다. 인간의 정신력의 위대함을 보고 싶다시는 분들에게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