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손가락 - 신은 그들의 손가락에 위대한 수갑을 채웠다
사토 다카코 지음, 이기웅 옮김 / 예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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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매치기 현행범으로 잡혀 막 감옥에서 출소한 쓰지는 집으로 오던 길에 신출 귀몰한 솜씨로 지갑을 터는 10대 일당들을 보게 된다. 그들을 막으려다 오히려 오깨를 다친 그는 복수심이 불타 그들을 잡으려 한다. 한편 여장차림으로 점쟁이로 살아가고 있던 히루마 가루오는 쓰러진 쓰지를 보고는 집으로 데리고 온다. 변호사 아버지와 누나를 둔 그는 사법고시를 보라는 주위의 압력을 물리치고 혼자힘으로 살아가려 하고 있었다. 점쟁이로 그럭저럭 살아갈만은 했지만 문제는 그에게 도박중독 증세가 있었다는 것, 집세를 날려 버린 그는 돈을 마련할 길이 없어 전전긍긍이다. 그런 히루마를 본 쓰지는 자신을 도와준 댓가로 돈을 대주기로 한다. 물론  그의 천직인 소매치기를 해서 말이다. 그렇게 난데없는 사건 하나로 우연히 마주친 두 사람은 각자의 사연으로 동거를 하게 된다.쓰지가 10대 소매치기단들을 쫓던 사이 쓰지의 삼촌이라 불리는 소매치기 대장이 전철에 떨어져 손을 잃게 된다. 그가 떨어진 것이 자신이 쫓고 있던 소매치기단의 리더라는 사실을 알게 된 쓰지는 이제 본격적으로 그를 쫓기 시작한다. 한편 건실하게 길거리에서 점을 봐주던 히루마는 자신에게 점을 봐달라고 온 소녀에게 눈길이 간다. 그녀가 잡은 패가 너무도 어둡게 나왔기 때문이다. 왕따를 당하고 사는게 분명해 보이고, 집에서도 존재 가치를 부정당하고 사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히루마는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사람들을 많이 상대한 관찰력으로 그녀에게 무언가 위험한 비밀이 있을 거란 직감한 그는 소녀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부탁하는데...


소매기치들의 세계는 이렇게 돌아가는 구나, 라는걸 알게 해준 소설이다.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야 성공한다는. 그래서 그런 자질을 갖지 못한 소매치기들은 그런 자들을 부러워 한다는, 아니 그것을 넘어 존경한다고 하는 사실을 이 책을 보고 처음 알았으니 말이다. 하긴 어떤 재능이건, 특출나게 잘 한다는건 인간의 눈을 휘둥그래지게 하는 법이지. 천부적인 자질을 가진 채 태어나 한마리의 외로운 늑대처럼 살아가고 있던 쓰지는  자신만큼이나 솜씨가 좋은 소매치기를 만나게 된다. 그가 아직은 10대이고, 방식이 거칠다는걸 알게 된 쓰지는 그를 잡아서 무엇인가를 하고자 한다. 과연 그는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는게 이 책의 주요 줄거리인데,  작가는 여기서 쓰지란 소매치기범이 범죄자 치고는 진실하고, 비록 남의 돈을 등쳐 먹고 사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도 나름의 인간미와 살아가는 소소한 일상이 있는 사람임을 우리에게 들려준다.그렇다보니  작가에게 그럴 의도는 없었을지라도, 일면 범죄자를 옹호하는 그런 뉘앙스가 들어있어서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기분이 아리송했다. 그러니까, 소매치기범들도 직업으로 인정해 줘야 한다는 거야? 위험을 무릅쓰고 기술을 연마하며 타고난 본능으로 신중하게 남의 지갑을 턴다고 하니, 그런 그들의 노력과 담력에 대해 우리는 인정을 하고 박수를 보내줘야 하는 것이냐고. 돈을 잃고 귀중품을 잃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난 그럴거라고 생각되지 않는데 말이다.


하여간 범죄자에 대한 낭만적인 미화가 눈살을 거슬리게 하던 소설이 되겠다. 다만 장점이라면 가독성은 높다는 점! 범죄 미화에 대한 거부감이 없으시다면 술술 읽어 나가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원래 이 작가가 이야기를 잘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일본 서점 대상" 을 탄 작가라는 수식어가 무색하지 않게, 적어도 읽지 못할 정도의 책은 내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말해도 말해도>나 < 한순간 바람이 되어라>같은 전작의 감동을 기대했던 나로써는 적잖이 실망이었다. 그런 작품들에선 사람들 냄새가 났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가 만들어 낸 주인공들을 전적으로 지지해주고 싶었고 말이다. 왜 갑자기 범죄자와 범죄 세계를 소설의 주인공과 무대로 쓰고 싶으셨을지는 모르겠지만,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글발로 다른 소재로 글을 썼다면 훨씬 더 공감하기 좋았을테니 말이다. 소재를 선택하는데 있어 실패한게 아닐까 한다. 왜냐면, 이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낸 책 주인공들을 마치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절대 악한으로 볼 수 없다. 말하자면 객관적이여야 할 작가가 지극히 주관적인 잣대로 주인공을 대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보니 이런 일이 생겨나는 것이다. 우린 소매치기범들을 옹호해야 하는 것일까? 그들의 재능을 높이사서 천연 기념물 정도로 말들어야 하냔 말이다. 그런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좋은 책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 한다. 나쁜 것은 나쁜 것이다. 내가 그런 행동을 한다고 해서, 내가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을 잘 안다고 해서 나쁜 일이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설득하는 변명은 반갑지 않다. 그게 논픽션인 소설이라도 말이다. 더군다나 이렇게 글을 잘 쓴다고 할만한 작가의 입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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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서기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희정 옮김 / 지혜정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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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런 두 아이와 남편, 자신만의 가족을 건사하는 일상으로 평범하게 나날을 보내고 있던 올가는 뜻밖의 상황에 맞닺뜨리게 된다. 남편이 젊은 여자랑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 버린 것, 비교적 자신을 착한 여자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던 그녀는 한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아이를 건사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이웃들에게도 더이상 예전의 올가가 아닌 퉁명스런 올가로 등극하게 된 그녀는 점차 자신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남편의 바람으로 상처를 입었음에도 여전히 남편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과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모성도 귀찮기만 한 그녀의 일상은 서서히 그렇게 무너져 가고, 결국 자신은 이렇게 실패자로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인가 자괴하게 된다. 과연 그녀는 처절하기만 한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홀로서기를 할 수 있을 것인가?


기대를 많이 하고 본 책인데, 의외로 평범하달 정도로 단순한 책이었다. 남편이 바람이 났다. 그것도 이웃에 살던 소녀에 가까웠던 아이랑. 그들의 파렴치함에 분노를 해야 하건만, 그녀가 바라는건 남편이 돌아오는 것이라는 사실에 본인조차 놀라고 만다. 그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기만 한다면 다 용서해줄 것만 같은 기분인데, 이 더러운 연놈들은 그럴 생각조차 없다. 오히려 오죽하면 남편이 바람나는 것도 몰랐냐는 식이다. 그러니 버림을 받는다면서. 그렇게 막장 드라마의 한가운데 떨어진 그녀는 자신이 자랑스런 엄마였다는 사실도 잊어버린채 깊은 우울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왠지 자신을 여자로 봐줄 것 같은 사람에게 비참할 정도로 매달린다. 과연 이것이 여자의 운명일까? 과연 이 나약한 여자는 홀로서기가 가능할까?


순화되지 않은 감정을 걸러내지 않은 언어로 만나게 하던 소설이었다. 홀로서기를 하는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게 되는 아름다운 소설일거라 생각하심 착각이다.--실은 나는 그런 기대를 하고 이 책을 집어들었었다.--기대를 완전히 깔아뭉개는. 도무지 버림을 받았다고 이 정도로 망가져야 하는 것일까? 주인공이 하도 악다구니를 쓰고 발악을 하다보니, 중반을 지나니 어느새 남편이 이해가 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나라도 이 여자랑은 살고 싶지 않겠다. 상대가 있건 없건 간에. 그나마 그동안 이 여자랑 살아준 남편은 많이 참은 걸지도 몰라 하면서. 아무리 남편의 불륜에 화가 나고, 참을 수가 없고, 인내하기 힘들다고 해도 말이다. 이 정도는 좀 심하다 싶다. 이런 것 까지는 알고 싶지 않았어 라는 심정이었다고나 할까. 어쩜 이 책은 이 주인공과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분들에게 더 많이 와닿을 책이 아닐까 싶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감정이 생기는지 아닌지 알고 싶지도 않을테니 말이다.


어쨋거나 어쩜 이게 현실일지도 모른다. 부부들은 평범하게 살다가 한쪽이 바람을 피고, 그리고 버림을 받은 나머지는 이렇게 분노하고 길길이 뛰고 상처로 눈물을 흘릴 지도 모른다. 주인공이 보이는 증상은 우울증의 전형적인 증상으로 그녀는 치료를 받지 않으면 홀로서기는 커녕 아이들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그렇게 강하지 못한 존재이니 말이다. 그녀는 홀로서기를 하겠다고 나서긴 하는데, 과연 그게 가능할지, 그건 잘 모르겠다. 바람에 대처하는 주인공의 자세를 보니, 어째 잘 헤쳐 나갈 것 같이 보이지 않아서다. 하여간 감동적인 성장 소설을 기대하신다면 이 책은 피하심이 좋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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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에는 일어나는 이유가 있다 - 내 인생의 풀리지 않는 의문들 그 진정한 의미를 찾아서
미라 커센바움 지음, 김정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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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일에는 일어나는 이유가 있고, 곰곰히 그걸 들여다보면 마냥 끔찍한 일들도 사실은 당신을 성장시키려는 우주의 지략이었음을 알게 된다고 설파하는 미라 커센바움의 책이다. 세상은 우주의 유치원이니,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선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자세히 들여다 봐야 한다나. 뭐, 그런 이야기. 한마디로 이 세상에 아무런 의미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으니, 마냥 슬퍼하지 말고 그 의미를 찾아 나서란 말이다. 그 뜻을 알고나면 더이상 일어난 일에 고통을 당하지 않을 거라는 말씀.


인간은 묘하다. 고통이 생기면 어떻게 해서든 그걸 없애려고 노력을 하게 된다. 자신에게 그런 고통을 안겨준 일에 대해 합리적인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고, 만약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 노력이 얼마나 철저하고 가혹한지, 인간은 어떤 답이건 간에 명쾌한 설명을 듣기 전까진 벗어나지 못한다. 이 우주는 너무도 자애스러운 곳이라, 당신이 일부러 고통을 당하도록 하지 않는다는게 인간의 생각이다. 하니, 이유가 있을 거라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인간은 참으로 순진하고 낙관적인 존재가 아닌가? 자신에게 그렇게 많은 고통을 안겨준 인생에게 그래도 이해를 하려 그렇게 애를 쓰니 말이다.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다 나를 깨우치게 하기 위해 지구가 써놓은 각본이라고, 그러니 나는 그걸 열심히 찾아야 한다고. 그걸 찾으면 더이상 고통에 시달리지는 않을 거라고....이렇게 써놓고 보니, 인간이라는 존재가 참으로 애처롭네. 꼭 이유없이 엄마에게 맞은 아이가 엄마는 틀릴 리 없으니 뭔가 내게 문제가 있었을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게 없어 보이지 않는가. 뭐, 그건 내 생각이니 쾌념치 마시고...


여기 이 책의 작가 역시 그런 생각이시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게 나쁘진 않다.딱히 틀렸다고도 말 못한다. 어느정도는 맞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완전하게 맞는 말이라고도 못하겠다. 지구라는 학교가 당신의 성장을 위해 고통스런 일을 생기게 했고, 그러니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은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한탄하기 보단 그 일에도 이유가 있으니 그 이유를 찾으라는 말에 완전히 동의를 못하겠다는 말이다. 왜냐고?


왜냐면, 사건이란 그저 무작위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일 뿐이라고 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걸 막을 방법은 인간에겐 없다. 사건이란 벌어지게 마련이다.  범죄는 일어나게 마련이고,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해도 그를 영원히 살게하는 방법은 없으며, 이런 저런 질병과 불안에 시달리면서 살아가게 된다. 실패를 할 확률이 성공한 확률보다 월등히 높으며,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살 가능성은 더 높은데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그야말로 희박하다.그것이 인생이다. 한마디로 내가 원하던 대로 완벽하게 통제된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있다 해도 진공상태만큼이나 희귀할 것이다. 그런 무작위속에서 사는 우린 , 우리 인생이 내가 바라던 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마냥 한탄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 아무리 하소연을 해봐야 나아지는게 없는 것은 물론이고, 불가능에 항의를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곤조를 부려도, 이런 삶이 싫다고 반발을 해도 별 소용이 없다. 왜냐면 그게 바로 인생이니까. 우리가 거기서 무엇을 배우건 아니건 간에, 사건들을 벌어지게 마련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개를 떨구고 그저 인생에 항복하는 일밖엔 없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게 무기력한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미라 커센바움은 거기서 물러나지 않는다. 두 손을 불끈 쥐고, 거기엔 이유가 있으니 물러서지 말라고, 그 이유를 잘 찾다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면은 맞는 말이다. 우리에게 감당하지 못할 엄청난 사건이 터지고 나면 그 충격으로 우린 한동안 정체기를 겪을 수도 있다. 때론 그 충격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한순간에 날려 버리기도 한다. 그것의 가치를 더이상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론 의도하지 않게 그간 자신의 마음 속에 숨겨 두었던 두려움이나 슬픔을 날려 버리기도 하고,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생각때문이다. 이별을 경험하면서 실은 내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고, 갖가지 미명하에 내 자신을 속여왔다는 것을 알게 될 수도 있다. 장막이 걷히면서 내가 보지 못한, 내진 보려 하지 않은 진실이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성장일 수도 있고, 내가 가야 하는 제대로 된 길일 수도 있으며, 아니면 그저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일 수도 있다. 그렇게 우린, 고통스런 일을 맞닥뜨렸을때 적어도 그 고통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머리를 굴린다. 그리고 같은 경험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는 것이 바로 이 저자의 견해다.


그래,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어서 그 이유를 곰곰히 따져보면 그렇게 나쁜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고 믿는 것은 좋다. 일단 사태를 낙관적으로 보게 한다. 이렇게 끔찍한 일도, 어떤 의미있는 것으로 바꿀 수 있다면 견딜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될테니 말이다. 이 책의 저자인 미라 커센바움은 늘 느끼는 것이지만 참 선한 분이신 것 같다. 그녀의 선한 심성이,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에 대해 공감하고, 그 고통을  줄여주려 노력하다보니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 않는가 한다. 실은 이런 생각이 그녀만의 전매특허는 아니다. 그녀 전에 C.S 루이스가 말했고, 개리 주커브 역시 더 심오한 철학으로 같은 생각을 피력하셨었다. 어쩌면 그들의 말이 이 저자보단 더 설득력 있게 들려올 것이다. 이해하기 쉽기는 이 책이 더 나을지 모르겠지만서도, 하여간 더할나위 없이 선한 분들인 그들이 그렇게 인간의 고통에 대해 의미를 찾게 해주려는 노력은 감사할 뿐이다. 어떤 이들에겐 이런 사고야 말로 하늘에서 내린 구원의 동아줄처럼 여겨질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말이지. 그렇게 이유를 따지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살다보면 말이지, 세상에 모든 일들은 그저 아무런 이유 없이 생겨나기 마련이며, 거기에 이유를 따진다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되어질때가 있다. 뭐, 극단의 상황에 이르른 경우에 한정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서도, 하여간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우린 그저 태어났고, 살아있으니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 그리고 이런 의미를 따지는 것이 혹시나 고통을 회피하기 위한 우리 뇌의 착각이나 쇄뇌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고 만다. 결국 자신을 기만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뭐, 결과가 좋다면 어떤 것을 믿건 상관없을 것이다. 실제로도 이 책의 저자가 만난 사람들은 자신이 말한 사고방식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다니 나쁠건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그녀의 사고가 나에겐 완벽하게 설득되지 않았다. 


결국 ,작가의 전작에서 보여준 통찰력 때문에 뭔가 보여주겠지 싶은 생각에 든 책인데, 처음으로 그녀에게 실망한 책이 되겠다. 특별하게 이거다 싶은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만의 독특한 시각이랄 것도 없고. 다시 말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게 그녀가 처음은 아니니 말이다. 더군다나 마냥 낙관적인 시각에, 강한 종교성향이 다소 거슬렸다. 뭐, 작가의 말대로 모든 일에는 일어나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건 좋다. 하지만 실제로 모든 일에 일어나는 이유가 있다고 보긴 힘들다. 그저 모든 일은 벌어지게 마련이다. 그게 옳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건, 아무런 방향성 없이 제시되는 것이건간에, 우리 인간이 그 사건 뒤에도 살아남아 여전히 살아남기를 원한다면 아마도 이유를 묻게 되겠지.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서 말이다. 거기서 어떤 교훈을 발견하게 되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를 찾게 된다면 거기에 감사. 하지만 명심할 지어다. 때론 인간의 머리란 매우 교묘해서, 당신을 엉뚱하게 설득하려는 술책을 쓸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작가의 말에 그다지 감동을 받지 않은 것은 어쩜 바로 거기에 있다. 인간이 고통을 피하는 방법에는 단지 이유만 찾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니, 당신이 내린 답이 인생이 당신에게 주려한 교훈이 아닐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뇌란 참으로 간사하고, 영리해서 말이다, 당신의 마음을 속일 수도 있는 것이니 말이다. 현실을 왜곡하기 위해,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뇌가 어떤 술수를 쓰는지 알게 된다면 마냥 이렇게 이유가 있으니 찾으로는 한가한 말은 못하지 않을까. 하여간 작가의 낭만적인 낙관에 동의를 할 수 없어 조금은 아쉬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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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책 읽는 시간 - 무엇으로도 위로받지 못할 때
니나 상코비치 지음, 김병화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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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나도 이럴줄 몰랐다. 다른 리뷰어의 글을 읽고는 맘에 들 줄 알고 기대 잔뜩하고서 본 책인데,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 말이다. 왜일까?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이런 상황이 전혀 마음에 들지도 않고 말이다.


일단 암으로 죽은 언니에 대한 이야기가 늘어지는 것이 별로였다. 왜 죽은 사람은 늘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이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착하고, 영리하고, 똑똑하고 ,선량하고, 재밌고 뭐, 절대 죽지 않았음 좋겠을 특별한 사람이 죽었다는건 알겠다. 그런데 그걸 너무 자세히 설명하다보니 오히려 반발심이 생기더라. 암으로 고통스럽게 죽은 사람에 대해 반발심이 생기게 하는 글쓰기라...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 되었지 않나? 그런 사연이 있을 시 원래 뉘앙스만 내비쳐도 사람들은 뭐라 못한다. 세상에, 가족이 암으로 죽었다네! 그것도 비교적 젊은 나이에! 고통스럽게!!!  거기에 어떤 다른 말이 필요하겠는가. 덧붙이지 않아도 사람들은 충분히 어떤 기분일지 이해한다. 동정받고 이해받지 않기가 불가능한 그런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 비극을, 언니의 특별함과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해선지 올망졸망 이말 저말을 사이사이에 하도 늘어 놓다보니 어느새 반발심이 드는 나를 발견하게 되더라. 그래, 죽은 가족이 있는게 너뿐이더냐. 고통스럽게 사는게 너뿐이냐고? 그만 좀 해라 싶은... 아마도 나는 작가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녀의 언니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녀의 자매 사이의 일화에 대해서도. 아니, 솔직히 그녀 가족들의 이야기 자체가 전부 별로 땡기지 않았다. 그녀가 생각하는 만큼 그녀의 가족이 흥미롭진 못했던 모양이다. 적어도 내겐 말이다.


그래도 이런 저런 책에 대해 이야기 한다기에 ,적어도 새로운 책에 대한 정보를 얻겠지 라며 내심 기대를 많이 했건만 ,그것도 별로 소득이 없었다. 그녀의 말에 별로 공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 읽은 책이라서 그런건 아닐 것이다. 걔중엔 읽은 책도 꽤 있었으니까, 그리고 읽은 책에 대해서만 공감을 한다면 서평에 대한 책이 왜 필요하겠는가. 다른 작가의 서평책에선 읽지 않은 책임에도 그들의 생각을 따라가다보면, 공감을 하는건 어렵지 않았다. 단지 이 책에서는 그게 안 됐을 뿐이다. 이걸 설명해줄 가장 가능한 설명은 아마도 취향차라는 것일 것이다. 그게 가장 그럴듯한 설명이다. 책을 감상하는 눈도 내 기준으로 보면 감상적인 쪽으로 치우져서 배울만한 점이 없었다. 같은 책에 대한 느낌도 상당히 달라서 우리가 같은 책을 말하고 있는게 맞는가 했다.  오히려 작가의 설명을 듣다보면 내가 읽은 그 책에 대한 느낌이 오염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대표적인 걸 들자면, 얼마전 내가 수작이라고 거품을 문 <버드나무 ...>를 이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버드나무 숲에 부는 바람>의 동물들...(아서왕을 읽은 다음에 본 책이라) 영국 시골 생활은 정말 지루해 보였다. 몰과 래트의 모험이라는 것도 실은 한바탕 헛소동일 뿐이고, 마지막 전투를 읽을 때는 하품이 났다. 족제비의 침공이나 미끌미끌한 두꺼비로는 흥분하기에 부족했다. >...음, 내겐 전혀 지루하지 않았는데... 전작으로 뭘 읽었는가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리고 몰과 래트라...두더지와 물쥐를 말하는 것 같은데, 왜 그냥 명사로 직역을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족제비가 침공하는 부분이 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있다고 해도 줄거리엔 크게 상관이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미끌미끌한 두꺼비가 그 책의 하일라이트인데, 왜 흥분하지 않았을지. 내겐 충분히 흥분할만한 캐릭터였는데 말이다. 하여간 이렇게 같은 책을 두고도 보는 눈이 다르니 이 책이 재밌을리 없었다. 작가의 설명이 그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건 말할 것도 없고. 추억조차도 되살려 주지 못하더라. 왜 같은 책을 읽은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그 오묘하고 아련한 공감대 말이다. 뭐, 그럼에도 책 뒷편에 그녀가 읽은 책 목록이 주루륵 나와있다는 점은 반가웠다. 모르는 새 책을 잔뜩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 작가의 설명은 싹 잊어버리고 그 책들은 읽어볼 생각이다. 그게 오히려 더 낫지 않을까 싶다.

 

그나저나, 난 왜 이 책이 맘에 들지 않은 것일까?  내가 지금 조금 이상한 상태인걸까? 상태가 이상하다고 괜히 심술을 부릴 나는 아닌데 말이다. 더군다나, 언니가 죽어서 그 상실감과 고통에 책을 읽게 됐다고 말하는 착한 동생의 책 아닌가? 이렇게 되면 난감해지고 뜨끔해진다. 싫은 소리 하기 곤란해지고 말이다. 괜히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거 같은 기분이 든다. 어쨌거나 죽은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맘에 안 든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할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해서 나도 기분이 좋지많은 않다.


아, 그렇다고 오해는 마시길. 작가가 글을 못써서 내가 싫어한다고 말이다. 그건 아니다. 이 작가가 분명 글을 잘 쓰긴 한다. 오히려 너무 잘 쓴다. 술술 매끄럽게 이야기를 너무도 잘 펼쳐지니 말이다. 그런데 난 그 문장들 속에서 진심을 발견하지 못했다. 공감을 주고 통찰을 얻게 하며, 세상에 대한 이해를 돕는 그런 진심 말이다. 사람의 마음을 울리게도 하고, 눈물을 흘리게도 하며, 아하~~~라는 순간을 만들어주기도 하는... 독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하고, 고개를 저절로 끄덕이게 만드는 그런 진심 말이다. 더불어 작가가 옆에 있다면 꽉 안아주고 싶어지게 하는 그런 진심. 왜 나는 이 책에선 그런걸 못 느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느끼지 못한걸 느꼈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별 한 개를 주고 싶지만, 1년 내내 하루에 한권씩 읽었다는 정성이 대단하고, 언니를 잃었다니 가엾고, 또 내가 지금 정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전제하에, 별 한 개를 더 추가한다. 그러고보면 책도 사람처럼, 만날 때가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다른때 이 책을 봤다면 그녀의 말에 절절히 공감을 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뭐, 지금보단 낫게 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서도 , 솔직히 절절히는 자신이 없다. 하여간 약간의 여지는 남겨 두자는 의미에서 미련없이 별 두 개~~! 예쁜 표지값도 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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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5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네사 2012-06-05 10:53   좋아요 0 | URL
하하하...수정 했는데, 이제 괜찮나요? 글씨가 커도 보기 안 좋군요. 전 너무 글씨가 작을까봐 일부러 크게 한 거였는데, 앞으로 참고 해야 겠습니다.

아, 그나저나 저도 동지 만나 반갑네요. 전 제가 이상한갑다 했더라니까요.
다들 좋다고 하길래 전혀 의심하지 않고 보게 된 책이었거든요. 도무지 건질게 없는 말에 왜 그렇게들 광분을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어요. 어쨌거나 안심입니다. 크게 실망한게 저만이 아니라는걸 알게 되셔요.^^ 좋은 하루 되셔요~~
 





40년동안 결혼 생활을 한 에블린은 남편이 죽은 뒤 빚이 많다는걸 알게 된다. 판사인 그레이엄은 동료 판사의 장황한 은퇴 연설을 듣던 중 은퇴를 결심한다. 더글라스와 진 부부는 딸 사업에 투자를 했다가 퇴직금을 몽땅 날린다. 부잣집 가정부겸 집사였던 뮤리엘은 평생을 일했던 집에서 늙었다는 이유로 해고된다. 고관절 수술을 해야 하는 그녀는 인도 병원으로 가라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아이를 봐달라는 딸과 사위의 요청에 마지는 가방을 싸서 집을 나온다. 또다른 남편감을 찾아서...나이에 상관없이 여전히 뻔뻔스러울만치 여자를 밝히는 노먼은 상대를 구하기 점점 힘들어지는 현실이 슬프다. 


 그렇게 각각 다른 사연을 가졌지만 황혼의 나이에 갈 곳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던 일곱 명은 인도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라는 웹싸이트 광고에 혹하고 만다.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품격있고 고풍스런 궁전으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그곳은 바로 <베스트 엑조틱 메리 골드 호텔>!  웹싸이트에 소개된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비슷은 하겠지라는 심정으로 호텔에 도착한 일행은 영락한 전경에 실망하고 만다. 포샵을 했다는 항의에도 지금은 단지 '리모델링' 중이라서 그렇다고 대꾸하는 인도 청년 소니, 그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호텔을 재건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으로 동분서주중이었다. 다만 문제라면 그에게 있는 것이 젊음과 야심과 한없이 긍정적인 마인드 뿐이라는 것, 돈도 능력도 요령도 경험도 부족한 그는 주먹구구식으로 호텔을 운영하면서 마냥 헤매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숙박객들이 인생 경험 풍부한 노장들이라는 것은 그에게 다행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사기라고 소란을 떠는 대신 실망을 접은 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인도에서 시작된 그들의 새로운 인생,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다양한 사연으로 인도에 오게 된 일곱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자신의 노년이 맘에 드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 나오는 일곱 명의 사연을 들어보면 늙는다는게 다소 두렵기까지 하다. 40년을 함께 살아왔지만 남편이 빚을 비밀로 했다는걸 알게 된 에블린은 자신의 결혼 생활에 회의를 느낀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언어로 남편을 학대하는 맛에 살고 있는 진은 그럼에도 자신을 이해하려는 착한 남편이 밉살맞기만 하다. 로맨스와 섹스를 빼고 나면 자신들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면서 미지의 상대를 개척하기 위해 나선 마지와 노먼은 인도에서도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평생 한 가족만을 위해 살았지만 결코 그들의 가족이 될 수 없다는걸 뒤늦게 깨달은 뮤리엘은 그녀가 그토록이나 싫어하는 유색인종들 사이에 있게 된 것이 못마땅하다. 마지막으로 그레이엄 판사, 게이인 그는 그제서야 용기를 내어 40년전의 사랑을 찾아 나선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사랑, 그때만큼 행복했던 순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없었다는걸 깨달은 그레이엄은 지금이라도 그를 만나야 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상대 역시 그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제와서 그를 찾아도 되는 것일까? 기대와 함께 두려움이 교차한다. 


그렇게 한평생을 열심히 살아왔지만 어째 말년이 그다지 괜찮지 않은 숙박객들은 뒤늦게 자신들의 삶을 바로 잡으려 한다. 삶을 정리해야 하는 때이지 시작하는 때가 아닌 황혼에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낙관적이기만 한 인도 청년 소니는 " 끝은 언제나 괜찮아야 한다. 괜찮치 않으면 끝이 아닌 것이다." 라는 말로 그들을 계몽하지만 과연 그게 맞는 말일까?


영화는 결국 소니의 말이 (한편으론) 옳다는 것을 증명해내고 있었다. 즉,  괜찮지 않다면, 인생의 어느 순간에라도 고통이 있다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비참한 인생이라도 인내하고 참고 버티는게 아니라 괜찮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걸 보여준다는 점에서 점수를 높이 살만하다. 그래, 다들 행복하기 위해 산다고 말들은 하지만 과연 진짜 행복을 느끼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책임과 의무에 짓눌려서, 내진 불행과 고통에 절어버린 삶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다른 삶을 꿈꾸는 것이 불가능해진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지 않을까. 그렇게 이게 삶이겠거니 하면서 저항마저 잊어버린 사람들에게 다른 대안을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다. 그걸 해결하는 산뜻한 방식에도. 그리고 행복이 찾아왔을때 마다하지 않고 손을 내미는 그들의 주름진 손에도. 삶이 이어지는 한, 아직은 괜찮아질 수 있다고, 고통이 있다면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는 노년의 지혜에 박수를...


대배우라 할만한 영국 배우들이 총출동하기에 보게 된 영화다. 그들이 다 나온 영화 치고는 작품성이 높진 않았지만--이런 배우들을 가지고 이런 영화밖에 못 만든다는 것은 낭비지 싶다. 하지만 뭐, 대배우라고 해서 늘 걸작에만 출연해야 하는건 아니니까.--그렇다고 그들의 이름값도 못하는 영화는 아니었다. 일단 빌 나이나 주디 덴치, 매기 스미스등의 배우를 한 영화에서 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그들의 연기야 뭐,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건 황홀하게 들려왔으니 말이다. 배우는 목소리가 좋아야 한다고 하던데, 대배우들의 특징이 그것이 아닌가 한다. 얼굴이 아니라 목소리만으로도 연기가 가능하다는 점. 언제나 매혹적이다. 내용도 괜찮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나쁘진 않았다. 썩 마음에 든 것도 아니지만서도... 별다른 기교 없이 이야기에만 충실했던 통에 살짝 지루해지는 순간들도 있었는데, 그건 눈감아 주기로 하자. 심각한건 따로 있었으니 말이다.


그건 바로 인도 배우들의 연기가  이 영화에 어울리지도 매끄럽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보여준 오글거리고 과장된 연기는--아마도 인도 영화 특유의 표현방식일-- 침착하고 안정된 연기를 하는 영국 배우들 앞에서 그 어색함이 두드러졌다. 왜 그들은 아직도 제 3세계 무지 몽매한 유색인종으로밖에 자신들을 보여주지 못하는지 씁쓸하다. 그것이 아직도 인도인에 대해 서양인들이 가진 편견이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국인인 인도 배우들은 알 것 아닌가. 자신들도 그냥 별다를게 없는 보통 인간이라는 것을 말이다. 오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기를 했다면 오히려 설득력이 있었을 텐데도, 지상에서 10 센티미터 정도는 붕 떠서 살아가는 듯한 그들이 나와 떠들어대기 시작하면 영화가 확 이상해져 버렸다. 장르 구분조차 애매해진다. 노년의 희망을 다룬 진지한 드라마인지, 아니면 노년의 비참함을 부각시켜 웃기려 한 코미디인지 말이다. 그들이 빨리 화면에서 사라져주길 바랄뿐이었다. 그나저나 서양인들이 인도인들과 어울리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현실에서 말이다. 보통 평범한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이해하는게 가능하지 않으려나? 갑자기 궁금해진다. 충분히 그럴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말이다. 하여간 배우들의 연기 톤의 부조화가 영화를 망치고 있었다. 물론 그래도 못 봐줄 정도는 아니었지만서도. 그저 완벽하진 못했다는 뜻이다. 그랬더라면 영화가 더 재밌었지 않았을까, 하지만 아마도 지금 현실에선 그게 최선이었을꺼야 라는 생각을 하면서 영화관을 나왔다. 언젠가는 인도 배우들도 자연스럽게 연기를 해도 된다는걸 깨닫게 되는 날이 오겠지. 그날이 오게 되길 기대하면서. 설마 안 오는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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