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로 날아간 집오리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28
이상권 지음 / 자음과모음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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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산을 가기 시작한 것은 몇 년 되지 않는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산을 잘 오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상을 꼭 밟고자 가는 것도 아니었다. 시작은 아주 낮은 울집 뒷산부터 시작을 했는데 그것도 헉헉 이었다.하지만 한 발 한 발 천천히 더 진행하다보니 '야생과 자연'이 보이기 시작하여 타의가 아닌 내 스스로 철마다 자연을 찾게 되었고 그렇게 산에 가는 재밌는 들이게 되었지만 역시나 지금도 산을 잘 오르지 못한다.하지만 남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온다고 자부할 수 있다. 천천히 쉬엄쉬엄 가다보니 더 많은 것을 보게 된다. 그렇게 산에 갈 때마다 꼭 '다람쥐'를 만나고 와야 그날 기분이 좋다.산을 다녀온 듯한 기분이 난다. 울집 뒤산에도 두어해 전까지는 늘 다람쥐를 보았는데 요즘은 다람쥐를 보지 못했다. 다람쥐를 만날까 하고 찾아 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뒷산 주변에는 대단지 아파트 들이 많이 들어서고 더 많은 사람들이 산을 찾는다. 새는 늘 시끄럽게 지저귀는데 다람쥐는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의 소리 때문일까.사람과 야생 동물이 공존하려면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야 한다. 산에 간다는 것은 우리가 그들의 집을 방문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용히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저자의 책을 한 권 읽고 동물과 인간에 관한 소설이라 빠져 들었다. <고양이가 기른 다람쥐>,인간과 가까이 하거나 함께 사는 동물과 인간의 이야기라면 이 책에 있는 이야기는 '야생'을 가진 동물들이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동물들 입장에서 혹은 사람의 시선으로 쓴 소설이지만 세세하니 잘 그려져 정신없이 읽다 보면 '에효' 하고 한숨을 쉬게 된다. 우리는 점점 자연과 멀어지며,자연을 해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문명의 발전으로 인해 우리 동네만 해도 아주 작은 뒷산만 남겨지고 모든 산이 허물어져 아파트 단지가 되었다.자연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보다는 허물어 인간의 욕심을 채우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그 속에서 점점 야생의 동물들이 설 자리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지난 겨울에 뒷산에 갔다가 노루를 만났다. 나 한사람의 발자국 소리였는데 녀석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산은 정말 얼만 되지 않는다.그들이 살아갈 공간이 있기라도 한 것인지 의심이 되었다.

 

이렇듯 점점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야생이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는데 그런 속에서 지리산 산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서른이 넘은 양갑수씨는 오리를 키우기 위하여 집 앞에 연못을 파고 오리를 야생처럼 키운다. 하지만 그곳이 산 속이니 오리를 노리는 동물들이 많다. 그만큼 생태계가 아직 살아 있음을 보여 준다.오리를 살리기 위하여 인간도 노력을 하지만 오리 스스로도 노력을 한다. 하지만 약한 것들은 모두 오리보다 더 위에 존재하는 동물들에게 잡혀 먹고 저돌적이고 강한 검은 오리 한마리만 남았다. 녀석은 스스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하면서 끝까지 살아남게 되고 그 연못에 날아 온 청둥오리와 짝을 이루어 새끼까지 낳는다. 그렇다면 그 새끼들은 야생을 물러 받았으니 야생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아무리 강한 야생의 청둥오리라도 그 위에는 천적과도 같은 동물군이 있어 살아 남지 못하자 검은 오리는 새끼들에게 날아 남는 방법인 하늘로 날아 오르는 법을 가르친다. 그렇게 하여 검은 오리가 죽고 살아 남은 집오리는 청둥오리들과 하늘로 날아 오르는,그야말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 닭이나 집오리는 날지 못한다고 알고 있다.날개를 가지고 있지만 퇴화되어 날지 못하는 조류,하지만 자신들이 살아 남기 위하여 그들은 날개를 다시 재생시킨다. 언젠가 티비에서도 높은 나무 위에 날아 올라가서 자는 '닭'이 나왔다. 그 닭은 야생동물에게 잡혀 먹지 않기 위하여 조금씩 올라가다가 높은 나무게까지 올라가서 자고 알고 까치집에 알도 낳는다. 자연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모두 생존을 위한 방법이다.

 

그런가 하면 <나산강의 물귀신 소동>에는 우리가 잘 볼 수 없는 '수달'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사람 눈을 피하여 맑은 물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수달,그 수달을 나산강 주변의 사람들은 '물귀신'이라고 한다. 언젠가는 인간과 함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인간에 의해 멸종 단계에 접어 들었고 '그런 동물이 살았었나?' 하고 모두 가물가물 할 때 나타난 것이다. 자연은 자연에 있게 놔 두어야 하는데 그것을 인간이 인간들에게 어디에 사는지 말해 놓으면 더이상 그곳은 수달이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인간 지배의 공간이 되고 만다. 인간은 욕심을 부려 희귀한 것을 '돈'으로 환산한다. 야생과 동물은 어느 정도의 거리가 있어야 야생이 살아가는데 인간이 침범을 하면 살아갈 수가 없다. 야생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동물로 취급하여 덫을 놓거나 그물을 쳐 놓는 사람들,모두가 다 똑같다. 하지만 개중에는 자연을 야생 그래도 지키고자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해남 할아버지는 수달이 살았던 그 오래전 시절도 기억하고 있지만 야생이 어떻게 해야 지켜지는 지도 잘 알고 있다. 인간의 욕심에 의해 또 한번 수난을 당하고 고난의 시간이 오지만 지키고자 노력하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수달은 다시 자신의 집과 같은 공간을 가지게 된다. 자연은 자연에 있을 때가 가장 빛이 나고 오래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어릴 때에는 동네에서도 가끔 '족제비'를 보곤 했었다. 다람쥐보다는 약간 큰 것이 노르끼리한 색을 띠고 있으면서 무척 몸짓이 날렵했던 녀석이 족제비다. 오래전 우리집에 할아버지의 유품처럼 있던 붓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것이 족제비꼬리털 이라고 하셨다. 믿을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털이 좋다는 말로 이해를 했다. 그래서 내겐 족제비가 더 가깝게 느껴지곤 했다. 문태형은 족제비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인지 누구보다 족제비를 잘 잡고 가죽도 잘 벗겨낸다.그러니 비싼 값에 팔 수가 있다. 족제비란 족제비는 씨가 마르도록 그가 다 잡는다. 생태계에서 어느 한 동물만 죽이면 다른 동물군이 무너지며 생태계 교란이 오는 것이다. 이작품에서는 그렇게 문태가 족제비를 잡게 되고 족제비중에 최고와 같은 <두 발로 걷는 족제비>와 엎치락 뒤치락 하며 그것을 잡기까지,아니 죽음에 이르게 하기 까지 우여곡절이 담겨 있다. 인간은 족제비를 잡으려고 했지만 족제비 또한 인간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다. 자연이 그런 것 같다. 그리곤 복수를 한다.인간이 키우는 닭이며 그외 동물을 죽게 한다. 정말 복수일까? 그 족제비가 죽음으로서 비로소 그와 동물에 대한 줄다리기는 끝이 난다. 어느 한쪽이 죽음에 치달아야 인간의 욕심도 끝이난다.죽기 전까지는 자신의 욕심인지 모르지만 죽고 나서야,자연의 질서가 무너지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저자가 그리는 야생의 동물과 인간이 공존하는 법칙에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야생이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오면 영락없이 인간의 욕심이 작동을 하여 야생을 죽이게 된다. 야생은 인간에 의해 길들여질 수가 없다. 길들여진다고 해도 '집오리'처럼 자신 안에는 야생이 감추어져 있다.자연이라는 것이 인간만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동물만 살아가는 세상도 아니다. 모두가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가끔 생태계 질서가 무너져 서로 곤란에 처하게 된다. 도심에 가끔 멧돼지가 출몰하여 시민들을 곤경에 처하게 하는가 하면 산 주변의 밭이나 그외 농가들의 농작물에 극심한 피해를 준다. 개체수가 늘어나서이기도 하지만 서로 있어야 할 침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인간의 욕심에 의해 자연이 너무 허물어져 가고 있다. 성냥갑처럼 인간만 들어가 살 수 있는 아파트숲이 여기저기 들어선다고 우리가 행복을 누리고 사는 것은 아니다. 자연이 있어야 살아가는 것인데 점점 인간의 욕심이 이 땅을 지배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 책은 그런 자연 파괴에 경고를 하듯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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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공부 - 창의성의 천재들에 대한 30년간의 연구보고서
켄 베인 지음, 이영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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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천재와 바보의 차이는 무얼까? 난 '노력'이라고 본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 했다. 무엇이든 자신의 가슴에서 우러나 즐겨야 비로소 내것이 되는 것 같다. 무엇이든 일만시간을 투자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일만시간을 투자해 보고 '나 못해' 하는 것이 있을까? 지금까지 난 일만시간을 온전히 투자하며 노력해 본 것이 없는 듯 하다. 몇 년 독서와 글쓰기를 해 오고 있지만 그것 역시나 아마추어이고 읽으면 읽수록 리뷰는 쓰면 쓸수록 더 힘들어진다. 그리고 욕심이 생긴다. 좀더 잘해보고 싶어 노력을 기울이면 더 안되는 것이 글쓰기인지도 모르겠다. 쉽게 읽었거나 공감하는 부분을 머리 아프지 않게 짜맞추지 않고 쓰고 싶은대로 쓰면 그 글이 더 와 닿을 때가 있다. 머리를 짜내며 쓴다고 좋은 글이 될 수 없다.

 

얼마전 티비에서 잠깐씩 <공부하는 인간>인가 하는 프로를 봤다.정신을 집중하고 본 것은 아니고 어떠다 틀어서 나오면 보고 했던 기억이 있는데 동양과 서양의 공부 방식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우린 어려서부터 어쩌면 성적위주의 주입식 교육만 받고 자라 '정답'이라고 외치는 것에는 뛰어나지만 자신의 생각을  남들앞에서 말하거나 토론하고 질문하는데는 서투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부하는 환경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서양식 공부는 우리와는 다르게 '열린 생각' '열린 공부' '창의적 사고' 를 갖게 하는가 하면 우린 정답에 꿰어 맞추려고 하니 생각이라는 가지를 미리 잘라 버리는 교육을 받아 창의성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보며 나 자신이 내 아이들에게도 그런 교육을 지금까지 주관해오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 본다. 과연 '최고의 공부' 라고 할 수 있는 일반인들과는 2%가 다른 이들의 공부는 어떻게 다를까?

 

이 책은 저자가 30년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옮겨 놓은 이야기들이다. '위대함을 만드는 2%의 비밀-그 비밀을 풀어라'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어떻게 가르쳐야 하고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어떻게 공부해야 '최고의 공부'라고 할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며 제일 많이 느낀 것은 그들의 공통점은 '독서'다. 어려서부터이건 언제든 독서를 많이 한다는 것이 공통점인듯 하다. 독서만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글로 써보는 '글쓰기'도 함께 병행을 해야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는데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신의 가슴이 스스로 원해서 하는 '자슴이 시키는 일'을 할 때 공부의 효과는 더 높게 나온다는 것을 모든 면에서 보여주고 있다.자신이 싫어하는 일에서 성과를 거두기는 어렵다. 좋아해서 하다보니 그 분야에서 최고가 나오기도 하고 전공은 다르지만 좋아해서 하다보니 전공과는 다른 분야를 하게 되기도 하는 것은 모두 가슴이 시켜서,원해서 하는 일들이다.

 

우리는 어려서 혹은 자녀들에게 '이달에 성적을 얼마 올리면 니가 원하는 000을 사줄께.' 라는 외적 보상이나 외적 동기를 준 적이 한번이라도 있을 것이다. 그런 외적 보상을 듣게 되면 갑자기 목표가 생겨서 단기간에 성적이 오르기는 하지만 그것이 계속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내적 동기가 함께 작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잠깐 '외적 보상' 이라는 목표를 이루었기에 하산을 하듯 원위치가 된 것이다. 내적 동기가 함께 움직여 자신이 무언가 세워 놓워 놓은 공부에 대한 '목표'가 뚜렷한 사람은 그 목표를 향하여 열심히 공부를 한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노력을 하게 되어 있다.하지만 그런 내적 동기가 없이 그냥 물 흐르듯 남이 가는 길을 따라가는 사람에게서 최고의 공부가 나올까? 공부도 환경이 중요한 듯 하다.맹모삼천지교처럼 어떤 환경에 놓이게 되느냐에 따라 관심은 달라지게 되고 노력 또한 달라지게 되는 듯 하다. 천재는 어떻게 보면 자신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점점 사회는 '멀티플레이형' 인간 '메타 인지 능력'을 가진 사람을 원한다. 한가지에 빠지기 보다는 모든 면을 두루두루 섭렵하면서 거기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열심히 달리다 보면 '무기력'에 빠지기 쉽다. 무척 열심히 달려 왔는데 노력에 대한 댓가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더욱 지치고 무기력에 빠질 수 있다. 나 또한 계속적으로 책을 읽고 리뷰를 작성하다보니 어느 순간 '딜레마'에 빠지듯 무기력증이 찾아 와 한참을 헤매이기도 했다.하지만 '공부'란 것이 마침표를 찍는 그 순간까지 멈출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늘 끊임없이 노력하다 보면 그 속에서 자신이 원하지 않았어도 비 온 뒤에 땅이 단단해지듯 무언가 스스로 갑자기 커지고 단단해진 사진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희열감에 공부를 더 하게 되는 듯 하다. 자기 성취감에 머물러 안주하게 된다면 더 나아가지 못하겠지만 '지적 호기심'이 계속적으로 작용해야 하는 거 또한 중요한 부분인 듯 하다. 쳅터마다 예로 들어 놓은 사람들은 대부분 '지적 호기심'에 '창의력'을 습관화 하지 않았나 한다. 한가지로 정의하기는 어려울 듯 하다.공부의 정도가 있을까?

 

'당신의 능력은 한계가 없다.'

난 여기가 끝이야 하고 안주하게 되면 더이상 발전을 하지 못한다. 구십세의 나이에 시를 쓰고 60이 넘어 작가가 되거나 화가가 되는 이들도 있다. 늦은 나이에 자신안에 잠자던 '잠재력'을 발견하고 비로소 밖으로 끄집어 내어 천재성을 발휘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동안의 연륜이 잠재력과 보태어져 시너지효과를 내는 경우도 분명 있다. 자신의 능력은 자신이 한계를 짓는 것 같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의 몇 프로도 사용하지 못하고 죽는다고 들었는데 누구나 가능성은 가지고 있지만 그 가능성을 얼마나 퍼내려고 '노력'을 하느냐에 따라 가능성이 빛이 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달려 있는 듯 하다.개그맨 김영철은 영어 강사로 번역가로 저자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그가 영어에 쏟은 노력은 일만 시간을 헤아릴 수 있고 그가 라디오에서 하는 이야기를 듣다보니 누구라도 노력을 기울인다면 자신안의 천재성으로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들었다. 그는 자신에게 맞는 영어학원과 선생님을 만나기 위하여 강남의 학원이라 학원은 모두 다녀 보았다고 한다. 최고의 공부라는 것을 정의하지 못하듯 최고의 선생님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이사람에게는 이런 장점이 저사람에게는 다른 장점을 캐취할 수 있어 옮겨 다녔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지금도 하루에도 몇 시간씩은 영어에 투자를 한다고 한다.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능력을 변화시킨 것이다.

 

'베이커 교수의 수업을 들으면서,교수님들을 위해 공부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죠. 그들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는 않으니까요.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는 순전히 내 손에 달려 있었어요.'

 

'창의적이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정신을 이해하고 통제하며 향상시킨다.'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사람은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포용할 줄 알며,그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는다는 것이다.'

 

최고의 공부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끊임업시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목표는 무엇을 세우고 있고 어떻게 노력하고 있으며 자신을 비판하고 관찰해야 한다는 것 또한 느꼈다. 멈추어 서서 자신이 발전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끊임없이 노력하다 보면 그 노력은 헛되지 않고 분명 언젠가는 빛을 보게 되어 있다.헛된 공부란 없는 것 같다. 지금의 노력이 바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다고 포기하거나 목표를 접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성적을 위한 공부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위해 자신의 노력을 과감히 쏟아 붓는 것이다. 나 또한 두딸들이 원하는 것을 해보게 하고 지켜 보고 있다. 원하지 않는 것을 시켰다면 힘들 때마다 불평 불만을 했을텐데 자신들이 원해서 하는 일아라 그런지 재밌게 즐겁게 즐기고 있다. 그것으로 만족한다. 아직 자신들의 미래가 불안하고 불투명해 보이겠지만 현재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 대견하다. 누구나 최고가 되기 위하여 노력을 하기 보다는 자신의 맡은바 위치에서 최선을 노력을 기울였기에 최고가 된 것이라 본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최고로 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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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시작해 - 개그맨 김영철의 톡톡 튀는 도전기
김영철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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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열정은 정말 대단한 듯 해요.노력으로 이룩해낸 것들이 정말 본받아야 할만한. 개그맨이라 그 속에 머물지 않고 다른 세계를 치열하게 이룩해낸 것이 대단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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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옆지기와 둘이서 외식 [월남쌈 김상사]

 

 

오늘은 우리의 결혼기념일 날,어제 옆지기가 회식을 했는데 조금 과하게 술친구를 하고 와서

오늘은 그도 나도 힘든 날을 보내게 되었다. 먹은 사람이야 너무 과해서 힘들었지만

난 옆에서 괜히 그 때문에 잠을 못자 피곤하고 힘든 하루가 되었다.결혼기념일이라고 해도

아이들이 옆에 있어야 맛이날텐데 아무도 없이 혼자 하루종일 있었으니 그런가보다 했고

저녁엔 옆지기가 MTB를 타고 가서 회사에서 저녁을 먹고 오라고 했는데 그는 굳이 늦어도

그냥 오겠단다.어젯밤 일을 만회해 보려는가 본데 난 그저 별 반응이 없었다.

 

 

옆지기가 회사에서 7시쯤에 출발,집에 8시쯤에 도착한다고 해서 무얼 먹을까 생각을 해 보았는데

대부분 9시까이니 먹거리가 많을 듯 하면서도 그리 없다.먹으려고 하면 그렇다. 그래서 [맛집검색]

을 해 보았더니 울집 근처 모두 식당들인데 입맛이 당기는 곳이 없다.그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고

할까 하다가 "샤브샤브 어때?" 했더니 그는 늘 우리가 자주 가던 [등촌칼국수]인줄 알고 그곳으로

가자고 한다. "아니 거기 말고 [월남쌈 김상사]에요?" 했더니 '거기' 한다. 집근처이긴 하지만 요즘

바랍도 매섭고 겨울날씨 같은데 그가 나가면 술한잔 할지 모르니 걸어가잖다.그래서 두툼한 겨울티

를 입고 겉옷을 걸치고 나갔는데 식당에서는 덥다.불앞이라.잘못 입고 온 것이다.거기에 그가 소주

한 잔 하자고 하여 한모금 먹은 것이 안먹는데 오래간만에 한모금 한것이 오른다. 에효.

 

 

이곳에서 우리가 시킨 것은 [소기샤브샤브+삼겹살구이]=15000원이다.

원래는 그냥 [소기샤브샤브=12000]을 먹으려고 했는데 그러면 [무한리필바]를 이용하지 못한단다.

먹다보면 야채를 리필해야 하는데 다 장사속인줄 알면서도 메뉴를 바꾸어 소고기+삼겹살로 시켜

무한리필을 해 보기로 했다. 난 지난번에 언니와 함께 울집 근처 [꽃마름]에 가서 샤브샤브와

함께 쌈채소샐러드바 무한리필읆 거어 보았기에 이곳과 비교를 하게 되었다. 이곳은 고기와 채소

가 무한리필은 되어 좋은데 샐러드소스가 없으니 샐러드를 해 먹을 수가 없어서 그게 흠이었다.

소스가 있었다면 많이 나온 채소를 샐러드로 해 먹으면 맛있을텐데.그런데 요 팬이 참 요상하게

생겼다.그러니까 바닥에는 삼겹살을 굽고 가운데 그릇엔 육사가 들어가 [샤브샤브]를 해 먹는 그릇이다.

 

 

 

 

육수에 숙주 단호박을 넣어 샤브샤브를 한 후에 월남쌈을 레몬을 넣은 물에 적셔 월남쌈을 싸먹던가

아니면 쌈채소에 쌈을 싸서 먹으면 맛있다. 월남쌈 보다는 나와 옆지기는 쌈채소가 더 좋아서 쌈채소

를 다 먹고 한접시 더 가져다 먹었다. 갖가지 쌈채소가 싱싱하니 맛있다. 잘 익은 소고기 샤브샤브와

채썰은 채소와 새싹채소를 올려 놓고 3가지 소스중에 월남쌈 쌈장이 제일 맛있는 듯 하여 그 소스에

고기를 찍어 싸 먹었는데 맛있다.그리고 옆지기가 이슬이 한 잔 하자고 해서 건배,우리의 건강을 위

하여 "당나발~~~" 옆지기는 오늘도 주님이 잘 들어간다.어제 그렇게 혼나고 말이다.

 

 

 

 

삼겹살과 샤브샤브를 다 먹었다면 샤브샤브를 해 먹던 국물에 자주색 국수를 넣고 끓인다.

이때 숙주와 단호박을 더 넣어주면 맛있다. 난 김치를 쫑쫑 찢어 넣었고 청양고추 썰어 놓은 것을

넣어 주었다.김치를 넣어서 더 칼칼하니 맛있다.해장국수 같다. 옆지기가 맛있단다. 단호박을

계속 넣어 먹었더니 그것이 푹 물러 으깨졌는지 단맛이 나면서 진뜩하니 맛있다.국물이 칼칼하면서도

담백하니 맛있다. 옆지기는 고기를 더 가져다 여유롭게 먹었다. 먹는 것 앞에서는 욕심을 버려야

하는데 늘 그게 안되는 옆지기,오늘도 주님과 다른 먹거리가 풍부하게 흡입을 해 주셨다.

 

 

 

처음에 채썬 야채들이 있어 '소스' 를 가져다 샐러드를 해 먹는 줄 알고 무언가 종지 그릇에

담겨진 것이 있어 물어보았다. 이게 뭐냐고? '달걀'이란다. 엥 웬 달걀 푼 것.. 했는데 이렇게

샤브샤브를 다 먹은 후에 샤브 국물에 국수도 넣어 먹고 남은 국물에 다시 밥한그릇을 넣고

달걀국물을 넣고 죽을 끓여 먹으라고 준것이었다. 나중에 주어도 될텐데 처음에 다 데코레이션을

해주니 잘못했으면 샐러드 소스인줄 알고 비빌뻔 했다. 그런데 샤브남은 국물에 밥 한그릇 넣고

달걀물을 넣어 주었더니 담백하고 맛있는 죽으로 거듭났다.여기에도 김치를 쫑쫑 찢어 넣고

채썬 야채가 남았길래 비트 당근 양배추 깻잎을 넣었다.그랬더니 더 맛있다. 그렇게 옆지기와

난 한 톨 남기지 않고 싹 싹 긇어 먹었다.요게 제일 맛났던 것 같다. 요즘에 울동네에 이런 샤브집이

많이 생기고 있다. 고기만 너무 먹는 것 보다 야채를 듬뿍 먹어가며 담백하게 즐길 수 있는 샤브가

좋은 듯 하다.거기에 야채가 무한리필이 되는 메뉴를 선택하여 먹는다면 알맞게 즐길 수 있다.

그와 기분 좋게 한 잔도 했고 시간도 늦어 그냥 집으로 걸어 오는데 땀이 줄줄 흘러 내리던 것이

밖에 나오니 급 식어버려서 춥다. 오돌오돌 떨면서 웃옷의 모자까지 뒤집어 쓰고 집까지 걸어 왔더니

먹은 것도 마신 것도 모두 소화가 되었다. 옆지기는 괜찮다며 나중에 후배와 한번 더 먹어야겠다고.

그리고 다른 곳 쌈채소샤브샤브도 가봐야겠다고 한다.고기를 많이 먹지 않고 야채를 부담되지 않게

먹고 싶을 때는 이런 무한리필 샤브집도 괜찮은 듯 하다.

 

2013.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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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넘어 함박눈
다나베 세이코 지음, 서혜영 옮김 / 포레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나이가 들어가면서 "눈"에 대한 감상도 다 제각각인듯 하다. 어린시절 눈에 대한 감상은 그저 눈만 오면 밖에 나가 놀기를 원했고 손발이 꽁꽁 어는줄도 모르고 얼음지치고 연을 날리고 눈싸움을 하고 미끄러움을 타고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눈속에서 놀이세상에 빠져 살았던 어린시절,그러나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어 가면서 눈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변해가고 있다.그만큼 세상의 때를 타서인지 눈이 오면 즐겁다가고 교통대란에 빠질것이 우려되기도 하고 채소값이 폭등하겠다는 식탁경제를 걱정하게 되고 질척질척하는 것이 싫어 나가는 것을 삼가하는가 하면 난방비 걱정을 한다. 현실을 너무 직접적으로 생각을 하지 감성적인 것은 점점 도망가 버리는 것이 눈을 바라보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래도 난 아직 눈이 오면 밖에 나가 눈구경을 하고 싶다.마음은 소녀라고 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중년,찬바람이 뼈 속으로 밀려 들어와 시리기에 그것도 잠깐이다.그렇다면 서른 넘어 내리는 함박눈은 어떤 느낌일까? 커플이라면 함박눈을 바라보는 것은 따사로움이겠지만 만약에 "솔로" 그야말로 "모태솔로" 라면.

 

다나베 세이코는 '여성의 감성'을 참 잘 포착하여 그려내는 소설가다. <조제와 물고기와 호랑이들>이란 일본영화를 보고 반하여 그녀의 소설들을 찾아 읽게 되었다.몇 권 읽지 않아지만 우리가 몰래 숨기고 싶은,혹은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아주 작고 미묘한 그런 틈새와 같은 감성들을 소설로 잘 표현한다.물론 우리와 일본이라는 나라의 문화가 달라 조금은 이질감도 느껴지지만 여성이라면 충분히 공감하며 무릎을 치며 읽을만한 그런 소설들을 많이 쓰는데 이 책에는 단편,주로 서른 넘은 솔로여성들이 느끼는 사랑에 대한 감정에 대하여 정말 공감백배의 표현을 잘해 놓았다. 서른이라는 나이는 대부분의 친구들이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었거나 결혼을 하지 않은 친구들은 솔로 아니면 결혼을 위하여 적절한 사람을 찾는 단계이다. 나에게 '서른'이란 나이는 연년생 두딸들을 키우느라 어떻게 지나갔는지,내 정체성을 잃어버린 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눈깜짝 하고 일어나 세상을 보니 갑자기 마흔이 넘어 있는 나 자신이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여자들이 나이를 먹으면 더욱 공황장애나 빈둥지증후군을 앓는 듯 하다.

 

서른 넘은 여성들의 수다가 있는 달콤한 것이 아니라 조금 쌉싸름한 그런 '사랑,연애,이별,인생' 모든 것이 함축적으로 들어간 수다식탁과 같다. <지금 몇시에요?> 길 가는 잘생기고 맘에 드는 남성에게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지금, 몇 시에요?" 하고 물어보는 여자,여기 그런 여자가 있다. 그녀는 그렇게 해서라도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고 그 속에서 자신의 '누군가'를 찾고 싶다. 운 좋게 자신의 물음에 대답해 주면서 정말 맘에 드는 남자를 만났더면 좋겠지만 대부분은 그에 응하지 않거나 대답을 해주고 응해 주어도 자신에겐 어울리지 않는 남자들 뿐이다. 왜 그녀가 거리로 나가 '지금, 몇 시에요?' 를 물으며 다녀야 하나? 그렇게 사랑과 결혼이 그녀에게 절실한 것일까? 그녀의 상상속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그녀는 우선 '자존감'을 잃었다고 볼 수 있다.서른이라는 나이가 그렇기도 하지만 팔팔하고 매끄러운 이십대하고는 서른이라는 나이는 분명히 다르다.탱탱함도 싱그러움도 없다. 두루뭉술한 허리라인이 말해주듯 이제 그녀도 나이를 먹고 있고 나잇살이라는 것이 붙고 있다. 그런 그녀를 그녀 자체로 좋아하고 사랑해줄 사람은 어디를 보고 외쳐도 보이지 않는다.그런 그녀에게 그녀의 자존감을 일으켜 세워주는 남자가 앞에 있다.따라가야할까?

 

나도 한때는 결벽증에 강박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그렇지만 그것도 세월이 지나다 보니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먼지가 쌓이면 쌓이는대로 살게 되었다.그런데 여기 그런 여성이 있다. 생각해보니 자신이 너무 깔끔을 떨어 그나마 편하게 지내고 어쩌면 결혼까지 가지 않았을까? 하는 남자와 헤어지게 되었다.그리고 독신인 친구와 함께 살고 있지만 그녀는 무척이나 지저분하다. 그것을 못마땅해 하며 자신의 입맛에 맞게 깔끔을 떠는 그녀의 눈에 룸메이트의 남친이 놓고 간 특대 팬티를 보게 된다. 아니 그렇다면 속옷도 입지 않고 갔다는 말인가? 특대 팬티를 보며 그녀의 어린시절 아버지를 떠올렸지만 그것은 그녀의 상상에 불과했던 것,룸메이트의 친구가 온 다는 날 그녀들은 방은 그야말로 변신에 변신을 꽤하여 다른 세상처럼 변하였고 그녀도 말끔하게 단장을 하고 남자를 기다렸지만 남자는 달라진 방의 풍경에 실망을 하고 그녀 또한 룸메이트의 남친에게 실망을 하게 된다. 어쩌면 친구의 남친은 지전분한 방을 보고 여자를 더 좋아했는지 모른다. 너무 틈이 하나도 없이 깔끔한 방은 인간미가 없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문제는 누구에게 있을까?

 

서른이 넘은 여자,그녀에겐 이도저도 아닌 남자 산페이가 있다. 그녀는 아직 노처녀이기에 목욕탕에서 부부가 나누는 야릇한 정서나 임산부 아내와 함께 하는 살뜰한 남자들의 그런 감정을 왠지 털이 쭈뼛 서는 듯도 하고 살떨리기만 하다. 온전히 내것으로 받아 들여지지 않는 노처녀,그는 자신이 무심코 던져 놓았던 전화번호부에 있는 남자들을 만나 보지만 역시나 그들 역시나 솔로인 자신들의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고양이 때문에 싫기는 하지만 늘 자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산페이의 집으로 향한다. 결혼을 하자고 해도 '응' 어떤 질문에도 무심하게 대답하는 산페이,그는 그의 일에 빠져 있지만 그의 일에도 충실하고 그녀의 약속은 성실하게 지킨다. 하지만 먼저 결혼을 하자던가 그 외의 일은 나서주질 않는다.아직 이남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런 그녀에게 산페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이다.연애하는 동안에는 여자들은 물론 남자들도 그렇겠지만 '이사람일까? 아님 저사람일까?' 하고 자신만의 저울에 올려 놓고 사람의 무게를 달아본다.그리고 자신에게 어울릴것 같은 사람에게 기울기 마련이다.맘을 정하기까지는 내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 단계를 서른이 넘은 노처녀의 마음을 잘 표현해 놓았다. 남보다 특출난 직장도 사람도 아니지만 뭔가 그에게 안겨 있으면 편안하고 따사롭다.과연 내사람일까?

 

사람은 먹는 것,맛의 기억으로 산다고 할 수도 있을 듯 하다. 어린시절 엄마가 해주시던 그 맛을 잊지 못하여 평생 그 맛을 찾아 헤매는 사람도 있고 자신이 몹시 힘들었을 때 누군가 차려준 따뜻한 밥상을 잊지 못하는 경우,음식에 대한 기억은 오래도록 잊지 못하는 것 같다. <깜짝우동> 요즘은 가격은 높이고 양은 줄이는 다양한 방법들이 현재도 눈속임의 상술이 여기저기 일어나고 있다. 깜짝우동이야 말로 그릇은 넓은데 깊이가 얇다. 양이 얼마 안되는 것이다.그렇지만 이 우동 맛있다.그 우동을 누구와 어떻게 해서 먹게 되었느냐에 따라 맛은 또 천차만별 달라지게 되어 있다. 모태솔로로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 서른 넘은 노처녀가 결혼할 뻔한 순간에 엄마가 혹이 되어 파혼을 하게 되고 그것을 빌미로 둘은 얼굴만 보면 다툰다.엄마와 딸은 애증의 관계,그것이 잘 표현되어 있다.우리집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런 그녀가 어느날 자신이 결혼하기 위해서는 아니 엄마가 결혼을 하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질까? 하고 엄마에게 결혼하라고 했더니 엄마가 가출을 했다.갑자기 엄마가 없는 공백의 공간이 어색하고 낯설다.그런 그녀가 엄마를 찾아 나서다 우연하게 한 남성을 만나게 되고 그와 '깜짝우동'을 먹게 되면서 둘은 호감을 갖게 된다.그리고 엄마는 아무일 없다는 듯이 돌아오고.그렇다면 연애상대를 만난 것이 엄마 때문일까? 깜짝우동 때문일까? 왜 그녀는 늘 엄마탓을 하며 살았을까? 자신이 결혼상대를 고르지 못하고 늘 망설이는 것은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을 못하고 늘 엄마탓을 했는데 그것을 엄마가 없는 순간에 깨닫게 되는,우리는 늘 누군가 옆에 있을 때는 존재감을 모르다 없으며 그제야 그 존재감과 내 현실을 보게 된다. 엄마의 부재로 인해 자신이 현실을 보게 된 그녀가 이성친구를 만난 것 또한 유머러스하지만 그 과정이 어쩐지 쌉싸름하다.

 

요즘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사월이 지난 눈이 내리고 있다.겨울로 다시 회귀한 듯한 날에 보는 눈의 느낌은? 서른 넘어 함박눈을 혼자 맡게 되는 느낌은 어떨까? 이십대에 맞는 눈과는 그 느낌이 확연히 다를 것이다. 회사에 노처녀라 불릴 수 있는 여자 둘이 있다. 그리고 그들과 일관계로 엮인 상처한 남자가 있다. 하루는 언니겪인 노처녀가 그녀에게 할 말이 있다고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고 한다. 그리곤 자신이 장장 세 달 동안 공들여 쓴 대작과 같은 시를 보여준다.그것은 다름아닌 '이별시' 였지만 그녀는 노처녀 언니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달리 생각하게 되고 그 시에 숨겨진 의미를 찾는다. 서로의 사랑의 화살이 방향을 잘못 찾아 갔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카하타와 데쓰카 선배를 엮어주고 싶다.둘은 정말 잘 어울릴것도 같은데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그런것도 아닌가 보다. 서로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에. 왠지 알게 모르게 사랑의 씁쓸함을 맛 보는 그 순간에 '함박눈' 내린다. '서른 넘어 내리는 함박눈은 차분했다.' 팔팔한 이팔청춘이나 이십대에 함박눈이 내리는 것을 보았거나 이런 나를 빗겨간 사랑을 보았다면 몹시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하지만 서른 넘어 쓴맛 단맛 쌉쌀한맛 모두 맛 본 나이에 함박눈은 '차분함'을 가져다 준다. 세상을 보는 눈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것이다. 아 그런데 왜 내 가슴이 쓰리지.그런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이 왠지 더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이 소설에는 이렇게 연애의 아니 사랑과 결혼전의 쓴맛 단맛 모든 것을 맛본 여성들의 심리가 잘 담긴 이야기들이 비극적이지만 비극적으로 끝나지 않고 유머와 왠지 모를 무척 추운 날의 고드름 끝에 비친 햇살처럼 반짝인다.이십대처럼 열정적으로 사랑을 할 나이는 아니지만 무언가 활활 불태워 보고 싶지만 그것이 맘대로 안되는 서른이다.자신의 사랑에 불씨라도 찾을까 하고 주위를 둘러 보지만 모두 자신의 눈에는 모자라 보이기만 한다. 그렇다고 넘쳐나는 사람을 원하는 것은 아닌데 이런 사랑을 해야하나 아니면 모태솔로로 이어나가야 하는 기로에 선 서른 넘은 여성들의 맘이 비극적이면서도 웃음짓게 만든다. 아마도 한번쯤은 사랑과 연애에 이런 경험들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면 이런 미묘한 감정을 모르겠고 읽어도 그 맛을 모르겠지만 사랑과 연애의 줄다리기에서 고배를 마셔 보았거나 그런 시간을 거치면서 흘러 온 세월이 있는 이라면 재밌게 맛깔나게 읽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랑도 결혼도 영원한 숙제인듯 하다. 이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 있는 맞춤답이 없는 사랑이고 결혼이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겉모습으로 판단했으나 살아보면 그것이 아닌 내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런 나이가 서른 그 즈음이 아닐까.세상이 변하면서 점점 모태솔로들이 넘쳐나고 있다.남자도 많지만 여자들이 더 '솔로선언'을 많이 하며 나름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나도 두 딸들에게 가끔 화가 나면 '혼자 살아.너희들 능력을 펼치면서 말야.결혼 해봐야 고생만 한다.' 라고 하지만 안해도 후회 해도 후회라면 해보고 후회하라고 하고 싶다.모든 것은 때가 있다.그 때를 놓치고 하려고 하면 힘든 것이다. 세월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갈 수 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모태솔로인 서른의 여성들이 자신에게 잘 맞는 짚신짝을 발견하는 그날까지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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