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향기,천리향이 피었네

 

 

밖의 날씨는 추워진 듯 한데 집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좋다.

모처럼 베란다의 초록이들 물도 주고 눈데이트도 하려고 안방베란다로 향하는데

으음~~ 달콤한 향기..뭐지.. 이 향기..

바부 바부..천리향이 피려고 하고 있던 것을 까먹었다.

한참 둘러보다 <<아,,,,,,천리향.....>> 하고 가보니

벌써 몇 송이 피어 달콤한 향이 은은하게 퍼지고 있다.기특한 것..

 

 

 

 

 

며칠 거실 코앞에서 '프리지어'향에 단련되다보니

달콤한 천리향을 잊어 버리고 말았나보다.

창을 통과하여 들어 온 햇살도 좋고 천리향 꽃향기도 날리고 동백 몽오리는 단단해지고

군자란은 하나 둘 꽃대가 보이고 아마릴리스도 바보같이 비리비리 작은 꽃대가 나오기도 하고

창가에 제라늄은 활짝 피니 겨울인가 봄인가 갸우뚱...

오늘 날 추운데...

 

2013.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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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 카니발 율리아 뒤랑 시리즈
안드레아스 프란츠 & 다니엘 홀베 지음, 이지혜 옮김 / 예문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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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추리소설은 넬레 노이하우스의 '타우누스 시리즈'로 재미를 들여 더욱 관심이 가던 차였다.이 작품은 연재로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작가가 '율리아 뒤랑' 이라는 여형사 시리즈물로 쓴 작품이며 그의 미완성의 유작이 되어 더욱 관심이 갔지만 이 작가가 없었다면 '넬레 노이하우스도 없었다'라는 문구가 더 자극을 했던 것 같다. 내가 먼저 만난 작가는 '넬레 노이하우스'였고 '안드레아스 프란츠'라는 작가는 처음이었고 이 작품은 그가 끝까지 완성을 한 것이 아니라 '다니엘 홀베'라는 작가가 마무리를 한 작품이라 그 끝이 어떻게 되었을까도 관심이었다. 작가의 첫 작품부터 읽었다면 좀더 작품속의 인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겠지만 마지막 작품이니 그저 상상하는 수 밖에.

 

세 명의 여대생이 광란의 파티를 연 후에 독일에서 유학중이던 캐나다 여학생 '제니퍼 메이슨'이 살해되었다. 그리고 파티의 다른 참석자들 또한 이상한 행동과 충격 약물에 중독되어 있다.파티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젊은 여성은 피에 젖은 시트 위에 괴이하리만치 편안한 자세로 널브러져 있었다. 마치 죽음의 순간을 구원으로 받아 들이기라도 한 듯.' 성폭행을 당한후에 살해된 여성들은 대부분 '태아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제니퍼는 '구원'을 받은 얼굴과 포즈 또한 태아자세가 아니다. 죽음 직전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함께 파티에 참여한 친구들이 발작적인 행동을 하는 것일까?

 

살인사건 현장에는 의문점이 많이 있고 파티에 참여한 사람들의 알리바이를 추적하는 가운데 대부분 술과 마약에 다량 노출되어 있지만 딱 한 명 '알렉산더 베르트람'이라는 인물만 파티에서 일찍 나갔고 술을 마지시 않았으며 정확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다. 이럴 때는 이런 사람이 제일 의심스러운 것이다. 완벽한 사람,함께 어울렸는데 왜 그만 술과 마약을 하지 않았고 알리바이가 완벽할까? 그는 놓아준다.아니 군인출신 아버지를 두고 부유한 집안의 외동아들인 알렉산더에게서 구린 구석이 아무것도 없이 완벽하여 그를 용의자 선상에서 제외를 한다. 과연 그럴까? 이제부터 겉과 속이 다른 알렉산더의 이중생활이 드러난다. 모범적인 외동아들인 듯 하지만 그의 생활은 비밀에 쌓여 있고 그만이 알고 있는 집안의 '비밀 방'이 있다. 왜 비밀방이 필요했을까.

 

겉은 평범하고 모든게 흠잡을데 없는 청년이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소설은 '스너프 동영상'이라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갖게 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의 주축으로 끌고 나간다. 인간을 두 번 죽이는 것과 같은 잔인한 동영상,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게 마련인 세상, 알렉산더는 공급자가 되어 직접 사냥에 나서듯이 물색하고 촬영하고 마약과 술을 먹여 강간 살인까지 저지르며 참혹함을 담고 있아 수요자들에게 전한다. 그의 밤 생활은 상상 그 이상의 모습이지만 낮의 모습은 평범한 아들이고 모범적인 아들이다. 그 모습이 언제가지 유지될까.아니 자신의 먹이감으로 살해당한 이들이 과연 구원을 받은 것일까? <천국의 계단>으로 향하는 문에 향한 것은 누구일까.

 

그런가하면 이 사건을 맡은 뒤랑은 그 또한 납치범에게 납치되어 자신이 현장에서 만나는 참혹한 상황을 직접 겪었던 장본인이다. 아직 현장에서 뛰어도 될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을까 할 정도로 심한 충격에 빠졌던 뒤랑이 이 사건을 진두지취한다. 연쇄살인사건은 혼자서 푸는 것이 아니라 팀의 일원들이 모두 하나처럼 움직여주면서,그의 상대 프랑크가 제일 큰 공을 세우며 그와 티격태격하며 사건을 이끌어 나간다. 그녀 또한 연쇄살인사건을 맡으며 점점 자신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제니퍼의 살인사건은 그것으로 끝나나 했지만 몇 년 뒤이어 일어난 사건들로 인해 동일범,아니 '스너프 동영상' 으로 인해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이었음이 밝혀지며 반전을 가져온다. 추리소설의 반전은 읽는 독자도 물론 작가가 바뀌었으니 '그가 살아 있었다면?' 하고 생각을 하게 만든다. 꼭 이런 반전을 넣어야 했을까? 범인으로 등장한 '알렉산더'의 자신이 죽인 연쇄살인사건의 그들처럼 그 또한 죽음은 죽음을 불러오듯 그도 복수의 표적이 되어 '죽음'으로 마무리 되기도 하는 무거움이 흐르지만 '스너프 동영상'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볼 기회를 준다.

 

사람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 겉으로 평범했던 알렉산더,하지만 아버지의 강박관념 때문에 그는 이중생활을 하게 되었는지 모른다.그의 잔인함은 어디에서 나왔던 것일까? 밖으로 보여지는 것에서는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던 가정이 일순간 '알렉산더'라는 아들, '괴물'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읽으면서 소름끼친다. 이런 괴물은 더이상 나오지 말아야 하고 그런 피해여성들 또한 생기지 말아야 한다고 몇 번이고 생각을 하지만 우리의 현실 또한 늘 불안정한 사건속의 연속이다. 죽음은 죽음을 불러오고 복수는 복수를 불러오는 악순환,그 연결고리가 끊어져야 한다. 인간은 존엄한 것이기에. 음주,마약,성,살인 현대사회가 영원히 근절시키길 수 없는 문제들이 대두되어 무거운 감도 있었으나 저자의 갑작스런 죽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빛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진다.저자의 전작들은 어떤 맛인지 한번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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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호세 무뇨스 그림 / 책세상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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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까뮈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고 '이방인' 출간 7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내가 이방인을 읽은 것은 학창시절에 물론 읽었고 그 후에 나이가 들고 다시 이방인을 구입하여 읽어 보았다. 하지만 이 책은 특별하다.70주년과 100주년을 기념한 <특별판>으로 그래픽노블으 거장 호세 무뇨스의 흑백으로 탄생한 새로운 '이방인'이 함께 접목 되어서인가보다.어느 화가의 화보집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도 하며 까뮈의 <이방인>을 색다르게 좀더 내용에 집중하며 읽게 만든 듯 하다.호세 무툐스의 '뫼르소'는 '까뮈'를 닮은 듯도 하고. 어찌되었든 그림과 함께 읽는 특별한 맛의 '이방인'은 좀더 머리에 속속 들어오며 '뫼르소'를 그 법정에서 구해내야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게 했다.그가 왜 부조리와 싸우지 않고 자신의 죽음을 순수히 받아 들인 것인가. 어느 구석에도 자신은 없다. 실존하면서 실존하지 않는 인물처럼 뫼로소는 그렇게 죽음앞에 서게 된다.

 

 

선박회사 일하는 뫼로소는 피곤한 가운데 어머니의 부고를 받았다. 셀레스트네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겨우 차를 타고 어머니가 계시던 양로원에 가는 길에 길에도 차 안에서 몹시 지친듯 잠에 빠져 들었었다.그런 그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남의 일처럼 받아 들여졌고 그는 어머니의 시신도 보지 않고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않은채 장례를 치르고 만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한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고 해도 어떻게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까지 보지 않을수 있단 말인가.양로원에서 사귄 어머니의 애인인 페레스 영감은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도 그 먼길을 와 애도했건만 그는 남의 일처럼 담담하고 방관자의 입장이 된다. 그리곤 그의 집에 돌아와 뜨거운 태양이 시위라도 하듯 바닷가를 나가게 되고 그곳에서 전에 함께 일하던 마리를 만나게 되고 둘은 정사를 나누게 된다. 그의 어머니의 장례를 어제 치뤘다는 믿겨지지 않을만큼 그는 무감각하다.

 

 

그가 어머니를 보내 드리고 그 빈자리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이웃에 사는 살리마노 영감은 악연처럼 그렇게 구박하던 개를 잃어 버리고 개의 빈자리가 컸던지 울부짖는다. 그런가하면 이웃에 사는 레몽은 그에게 함께 살던 여자문제를 그에게 털어 놓으며 그와 친구가 되자고 한다. 레몽의 정부였던 여자를 떼어 놓기 위하여 뫼르소에게 편지를 부탁하고 그는 혼쾌히 편지를 써 준다. 그들의 작전은 바로 이어졌고 레몽은 그녀를 마구 때리다 경찰이 들이닥치고 뫼르소는 증인으로 경찰에 불려가게 된다. 분명 그는 이웃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를 표시하며 일을 해주었는가 하면 회사에서는 착실하다는 것을 인정 받아 파리발령을 제의 받기도 했다. 그런 그가 왜 '살인'을 해야 했을까. 어머니의 죽음부터 이어진 일련의 일들이 그를 어느 죽음의 그물 안으로 몰아 넣듯 그동안 그가 보여주었던 일들이 그에게는 마이너스르 작용을 한다. 왜 어머니의 시신을 한번도 보지 않았을까? 눈물 한 방울이라도 흘렸다면..아니 그 다음날에 마리와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다면 폐륜으로 낙인이 찍히지 않았을까.

 

 

'레몽이 권총을 주었을 때, 그 위로 햇빛이 번쩍 반사되어 미끄러졌다.'

어머니의 죽음과 아랍인을 바닷가에서 권총으로 쏴 죽게 만든 그 순간까지 죽음은 이어지고 있고 마지막 그의 죽음까지 무척이나 무겁게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인데 소설 속은 온통 뜨거운 햇빛과 파란 하늘 그리고 바다가 펼쳐진다. 음산함이 펼쳐지는 가운데 죽음이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눈 돌릴만한 큰 사건이 없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가운데 일어난 살인사건, 한 발을 쏘아 죽었다는 것을 알았으면서 배에 네 발을 '탕탕탕탕' 꽂아 넣는다.운명 교향곡의 네 번의 쾅쾅쾅쾅처럼 그는 네 발을 처음 한 발과 시간차를 두어 쏜다.왜 그랬을까? 아랍인이 칼을 빼 들었고 그가 권총을 한 발 쏘았다면 정당방위가 될 수도 있었을텐데 네 발을 연이어 쏘았으니 이것은 명백한 살인이다. 그렇다고 그가 아랍인을 죽일만한 명명백백한 이유도 없다. 그저 레몽의 정부를 혼내 주었다는 이유로 그와는 우연히 만나게 된 사람들이었는데.

 

 

뫼르소의 단조로운 일상은 감옥에 가서도 이어진다. 도무지 자신이 갇혀 있는 것에 대하여 별 생각이 없는 듯한 그,자신이 저지른 살인에 대하여 반론을 하던가 분노를 하던가 자신 안에 숨죽이고 있는 '진실'을 끄집어 내야 하는데 그는 방관하고 있다. 법정 어디에서도 감옥 어디에서도 그는 없다. 그저 '사형'은 당연히 자신의 것인양 남의 일인것처럼 법정에서 방관하는 뫼르소, 그들이 말하는 어머니의 장례부터 하여 이어진 일들에 대하여 좀더 자신을 드러내고 확실하게 말을 했다면 어떻게 변했을까? 그 사회가 그의 진실을 받아 들이지 않을 것을 알면서 미리 포기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사회는 진실한 한사람의 시민을 죽였다는 것인가. 다수가 한사람을 죽이는 일은 간단하지만 개인이 다수를 이기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처럼 힘든 일이다.하지만 뫼르소는 자신의 변호하거나 분노하지도 않았다는 것,남의 일처럼 달관하여 방관만 했다는,이방인과 같은 시선으로 삶과 죽음을 그렇게 받아 들였다는 것이 분노하게 만든다.

 

 

뫼르소와 함께 했던 이들은 그가 살인과는 무관한 삶을 살아 온 진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만 개개인이 법과 싸우기에는 너무 힘이 작다. 아니 그들의 힘은 법 앞에서 무참히 짖밟히듯 무너지고 만다. 한마디 제대로 말을 해 보지 못하고 거짓의 손을 들어야만 하는 소수의 힘은 뫼르소를 '죽음'으로 이끌고 가게 만든다. 진실을 위해 단두대에 머리를 맡긴 뫼르소, 현실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고립당한 채 그가 형장으로 걸어가며 간직한 진실은 누구를 위한 진실인가? '호세 무뇨스'의 흑백의 그림이 주는 무거움과 흡인력 때문에 더욱 작품에 빠져 들며 읽었던 특별판 <이방인>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책이며 소장해야할 책인듯 하다. 태양, 모든 것을 소생하게 하기도 하지만 죽게도 만드는,진실도 단숨에 뒤엎어 죽음으로 치닫게 만드는 태양의 힘을 강렬히 느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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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코틀러의 굿워크 전략 - 세상과 소비자의 마음을 얻고, 함께 성장하라!
필립 코틀러 외 지음, 김정혜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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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이윤을 추구하면서 사회에 기여하는 착한 소비를 부추기는 착한 기업 탐스 슈즈를 읽고 참 공감을 많이 했는데.. 굿 워크 전략..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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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권은 밤에게 작가정신 소설락 小說樂 3
이신조 지음 / 작가정신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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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1초씩,1분씩 흐르지 않는다.아니,밤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흐르는 것은 낮의 시간이다. 밤의 시간은 웅덩이처럼 고인다.이슬처럼 맺힌다. 안개처럼 퍼진다.' 나는 낮 시간보다 모두가 잠든 밤 시간을 무척 좋아한다. 위의 글을 읽으며 정말 정지한 듯 멈추고 말았다. 내가 느낀 혼자 있던 그 밤의 느낌이 너무도 잘 담겨 있다. 난 식구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 혼자 깨어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그 시간엔 '영혼'이 깨어나는 것처럼 너무도 좋다. 조용한 침묵과도 같은 시간에 나 혼자 밤을 차지하고 있는 듯 고요하고 정지한 듯한 시간, 그 시간은 정말 내 곁에서 웅덩이처럼 고인다. 밤은 나와 하나가 된다. 몽롱하게 밤의 늪에 빠져드는 시간,비로소 나로 깨어나는 시간처럼 아늑하다.

 

스물 두 살,한참 멋부리고 자신을 알아갈 시간에 그녀는 <아침부동산>이라는 계부의 중개인사무소에서 일을 한다.그녀는 미혼모에게서 태어나 생부의 이름도 얼굴도 모르고 외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살았다. 그녀의 엄마는 그녀를 낳아 놓기만 했지 엄마로서 책임을 지지 않았다. 아니 호적상 엄마의 동생으로 살아오다 계부가 생기도 시골에서 서울로 옮겨오며 그녀도 성씨를 바꾸어야 했다. 잠시의 안정도 그녀에게 호사였을까 다시 엄마의 죽음으로 시골로 내려와 할머니와 할게 되고 할머니가 중병에 걸리셔서 병간호에 할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완전한 자신의 뿌리를 잃었다.혼자 남겨진 그녀 시골을 떠나지 못하고,아니 왜 떠나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곳에서 작은 회사에 다녀보기도 했지만 그녀에게 위안이 된 곳은 아무곳도 없었다.그러다 계부가 나타나고 '아침부동산'에서 일하게 되면서 세상을 알게 되고 배우게 된다.

 

자신의 뿌리를 잃어버려서인지 그녀는 밤에 쉽게 잠들지 못한다. 그런 밤에는 그녀만의 의식처럼 매물로 나온 빈집에 들어가 그녀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람들이 떠난 집을 청소하고 그녀만의 하루 잠자리로 설정을 한다.집이란 무엇일까? 밤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까? 별거 아닌 시간이지만 자신의 뿌리를 가져보지 못한 그녀에게 집이란 위안이지만 늘 겉돌기만 한다. 그런가 하면 숙며을 취해야 하는 시간에 야행성 올삐미처럼 편의점을 순례하고 빈집을 순례한다.자신만의 자신 안에 안주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그녀, 그녀에게 어느 날 찾아온 신입생 남학생, 그의 뒤를 한번 캐보기로 한다. 그는 누구인가? 맘에 들어하는 방이 있지만 다른 곳에 안주했다는 그가 편의점 야간알바를 하고 있다. 서로 사무적인 대화만 하다가 점점 의식하지 않게 되고 타성에 빠질 무렵,그가 다닌다는 전문대에 갔다가 투박하고 겨울 한 철을 함께한 검은 외투와 투박한 부추가 맘에 걸린다. 밤과 집에 안주하지 못하여 패스트푸드로 일관하던 삶이 그녀를 비대하게 만들었다. 처음엔 클 것만 같던 검은 외투가 이젠 버겁게 느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쌍둥이 할머니들이 장독대집에 안주하게 되고 그녀들의 집에 들어가게 되면서 그곳에 있는 '나이트룸'에서 그동안 잊고 있던 자신과 만나게 된다. 뿌리 없이 지금까지 흘러가듯 살아 온 자신,나이트룸에서는 온전하게 밤을 맞이할 수 있다. 나이트룸에서 위안을 얻던 그녀,그집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신입생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고 난 다음날 나이트룸은 사라지고 말았다. 양재쌍둥이할머니도 떠나고 그 집은 헐리고 빌라가 신축되고 그녀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게 된다. 삶은 그렇게 흘러가 그녀도 이젠 밤마다 빈집을 찾기 보다는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패스트푸드가 아닌 자신이 만든 음익을 먹으며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하루하루를 만들어 나간다.

 

그녀가 뿌리를 잃어 간 그 시간에 밤과 낮의 균형이 깨진 듯 낮시간의 그녀보다 밤시간의 그녀는 '도둑고양이'처럼 민첩하게 밤과 어둠에 적응하여 잘 돌아다닌다. 하지만 낮은 무료하고 낮잠이 쏟아지고 집주인이 있는 집을 타인에게 중개를 하며 스물 둘의 그녀가 한물간 아줌마처럼 술술 능숙하게 고객을 대하고 있다. 낮의 시간은 고치안게 갇힌 나비와 같다고 보면 밤의 시간은 고치를 벗어나 훨훨 날아 다니는 것과 같은 그녀, '낮은 비둘기의 시간이고 밤은 고양이의 시간이다.' 밤은 빛나는 고양이의 눈처럼 빛을 발혀야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온전한 가정과 온전한 부모를 가져보지 못한 그녀가 이제 세상을 바로 보고 자신을 바로 보고 그 세상안에 자신의 뿌리를 내리려 하고 있다. 어머니의 자궁과 같이 아늑하고 포근한 밤의 시간을 누리지 못한 그녀가 이제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밤 시간에 적응해 가고 있다. 그 자궁 안에서 비로소 자신에게 맞는 낮 시간을 갖게 되기까지 지금까지의 밤의 시간은 산고의 시간이었다고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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