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아이 - 제12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48
이은용 지음, 이고은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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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누구일까? 며칠전에 읽은 <나는 다른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에서도 나왔지만 대한민국에서 제일 강한 사람은 바로 '엄마'이다. 엄마에 의해 강한 '승자'로 만들어지는 아이들,하지만 요즘은 그런 강한 엄마에 대항하여 자신의 꿈의 날개를 펴보지도 못하고 접는 안타까운 생명들 또한 가끔 우리의 가슴을 울리기도 한다. 나 또한 사춘기 두 딸을 키우고 있기에 누구보다 그런 시기를 거쳤고 딸들과 함께 몸부림의 세월을 거쳐왔고 지금도 그 긴 터널을 건너고 있다. 난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가는 것을 제일 싫어하지만 내가 아는 '치맛바람'을 휘날리는 엄마들은 주위에서도 많이 볼 수 있고 지금도 손에 꼽으라면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알고 있기도 하고 그렇다고 그들의 자녀들이 모두 잘되었다고,일명 일류대에 들어갔다고 볼 수는 없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처한 교육현실이 엄마가 나서지 않으면 낙오자로 아이의 성공을 위해서는 '알파맘' 이 되어 발로 뛰어야만이 하다는 공식과 같은 교육열이 있다.

 

'열세번째 아이' 13이란 숫자는 아이의 사춘기가 시작되는 나이로 읽었다. 요즘의 아이들은 사춘기를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을 하니 고학년부터 힘들게 한다. 그런가하면 4학년 성적이 평생을 좌우하듯 학원들이 선전을 하고 있으니 남이 하는 것을 따라가지 않으면 뒤쳐질것만 같아 나 또한 시류에 편승을 해야지 살아 남을 듯한 불안감에 따라가기 바쁘기도 하지만 아이들 또한 부대끼며 불안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음은 개인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점점 아이들은 엄마가 만드는 '로봇'처럼 기계화가 되어가고 감정을 잃어가 급기야 부모를 상해하는 패륜을 저지르기도 하는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도 자신의 죄를 느끼지 못하는 불쌍한 아이들이 있다. 비단 개인의 죄라고 인정해야 하나 아니면 사회적인 책임도 있다고 봐야하나.

 

'새로운 것이라면 뭐든 주고 싶은 게 엄마 마음이야.'

대한민국 엄마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자기 자식에게는 무얼 해줘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아니 자식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는 정말 강인한 사람들이 바로 엄마들이다. 그런 엄마가 여기 또 있다. 기계처럼 아니 찍어내는 로봇처럼 완벽한 아이를 원하여 '맞춤형 아이'를 선택하는 그녀, 자신의 아버지가 로봇에 관한 일을 했지만 승자가 아니면 이름을 알릴 수가 없다. 그녀는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듯 하여 로봇에 관한 일을 한다. 하기에 자신의 아이는 누구보다 완벽함을 원했던 그녀의 아이는 바로 '열세번째 아이'인 맞춤형 아이였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누구일까? DNA조작으로 인해 모든것을 우월한 인자만 조합하여 만들어낸 아이,그런 아이는 모든 부분에서는 뛰어나겠지만 감정은 메말라 버렸다. 아니 감정을 가지고 태어나긴 한 것일까 의문이 든다.그런 시우의 친구나 함께 하는 것들은 모두가 '로봇'이다. 칩만 빼버리면 생명이 사라져 버리는 로봇,가지고 놀다가 맘에 들지 않으면 칩을 빼버리고 수거장에 그냥 버리면 그만이다. 학교에서조차 성적순으로,아니 개인평가로 진로가 결정나니 자신조차 감정조절이며 그외 많은 부분을 남보다 월등하기 위하여 조절을 잘 해야 한다.

 

첫번째 맞춤아인 김선박사는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겨우 이십이 넘은 나이에. 부모들은 그런 아이로 만드고자 맞춤형아이를 만들어 그들을 지키는 그림자와 같은 '로봇'들을 늘 따라 다니게 한다. 그러나 그 로봇들은 단순형에서 점점 감정형으로 바뀌고 있어 그야말로 로봇이 인간화가 되어 그들은 자신들도 인간처럼 생명을 가지고 싶고 그렇게 추억을 되새김질 하며 살고 싶다.자신들이 로봇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런 로봇들이 점점 반란을 준비하고 있는가 하면 맞춤형아이들 또한 자신의 근본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게 되고 잘나간다고 생각했던 김선마져 자살을 하게 되고 시우 또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의문을 갖게 되기도 하면서 엄마가 자신을 감시하라고 만든 로봇인 레오가 점점 인간화 되어가는 것에 대하여 대립한다. 인간은 로봇화 로봇은 점점 인간화 되어간다면 그 사회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것인가?

 

'부모가 원하는 대로 아이를 만드는 세상,열세번째 아이'

부모가 원하는 대로 만들었다고 그 아이에게 감정이 없을까? 아이는 하나의 인격체이다. 감정을 가지고 자신 스스로 생각하고 꿈도 가지고 있다. 아이의 감정까지 부모가 통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엄마들은 아이의 감정까지 모든것을 엄마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한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가만히 있을가? 스트레스를 받고 감정을 역으로 드려내는 아이들,아니 그런 열세번째 아이는 엄마의 선택에 반격을 가하듯 자신의 근본이 궁금해졌고 자신을 따라 다니는 인공지능 로봇인 레오와 그외 로봇들에게 점점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신만 보이던 세상에서 자신외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앞으로 달려갈줄만 알았던 그가 갑자기 멈추어서듯 한 것이다. 그리고 로봇들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인간은 로봇을 통제할 수 있을까,맞춤형 아이들은 부모가 원하는 대로 완벽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누구도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만들 수는 없어.내가 그런 존재도 될 수 없고. 나는 신도 아니고 그 아이들의 아버지도 아니니까...' 부모가 아이의 인생을 대신 만들어내듯 모든 것을 해줄수는 없다. 아이들에게는 그들만의 인생이 있는 것이고 부모에겐 부모의 인생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하나나 둘만 낳아 키우는 세상이다보니 아이에게 모든 것을 바라고 아이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치듯 하는 이들이 많다. 자식에게 자신의 미래를 걸고 있다가 아이가 어느 순간 '삐딱이'가 되고 나면 자신의 인생을 도둑맞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보기도 했지만 나 또한 녀석들이 말을 듣지 않고 제고집대로 나가고자 하여 갈림길에서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그런 기분을 느꼈다.부모도 로봇도 아이의 그림자가 되어 따라 다닐 수는 없다. 그것도 어느 순간까지이지 평생 그렇게 한다면 온전한 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온실속의 화초처럼 늘 '엄마'를 찾게 되는 것은 아닐지.들에 핀 들꽃이 강한 법이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내 놓기 보다는 어깨가 필요할 땐 힘이 되어 주기는 할지언정 완벽한 아이로 키우기 위하여 부모의 모든 것을 온전하게 다 할애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부모의 잣대에 의해 미래를 결정하기 보다는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면서 때론 실패도 맛보기도 하면서 위기를 기회로 삼는다면 더 든든한 사회에 필요한 재목으로 커나가지 않을까 한다. 소설의 내용은 현시대를 그리고 있는것 같아 씁쓸하면서도 '난 그렇게 되지 말아야지' 하는 뉘우침을 가지게 한다. 완벽함이란 있을 수 없다. 감정을 빼앗긴 아이들이 감정을 되찾을 수 있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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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 때문에

 

 

 

 

오늘도 결국에는 뒷산에 가지 못했다,봄바람 때문에.

아침이면 늘 먼저 생각하는 것은 '오늘은 꼭 꼭 뒷산에 가야지..' 하면서

딸들방 베란다 창에 매달려 뒷산을 본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있는가 보노라면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 산을 향하거나 오르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아침엔 날이 좋은 듯 하여,한가지 일만 끝내면 산에 가야지...

했는데 날이 흐려지면서 점점 봄바람이 거세어지는지 문틈으로 봄바람 소리가 장난이 아니다.

그러다 결국에는 주저앉게 되었다....

 

어제도 감기약 기운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정말 약하게 지은 약이라 하는데

먹기만 하면 난 병든 닭처럼 잠을 떨쳐낼 수도 없고 약기운에 아무것도 못하고 까라진다.

오전에 전날 신청한 '현금적립금' 이 이체가 되지 않아서 큰소리를 내며 전화를 할까 하다가

조용하게 조용하게 조신하게 했다. 막말은 입끝까지 나왔지만 참았다.

그리곤 연락을 준다더니 한참동안 연락이 없더니만 오후가 기울어갈 무렵에 전화가 왔다.

컴이 연결이 되었으면 로긴을 해 보라는... 얼른 넷북을 열고 로긴을 했는데

그 페이지는 이상하게 늦게 열린다. 첫페이지에 이것저것 많아서일까..

오전에도 몇 번 해 보았지만 현금적립금은 '0'이었는데 다시 로긴해서 검색해 보니 들어왔다.

-들어왔네요..얼마.... 감사해요...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라도 옮겨준 것이 어디인가? 이상하게 우리나라는 이런것은

정말 조목조목 따지고 들어야 '고객의 권리'내지 '소비자의 권리'를 찾아 먹을 수 있다는 것.

그냥 있었다면 사만여원이나 하는 돈을 그냥 날릴뻔 했다.

위약금은 말하기도 전에 챙겨가면서 진정 소비자의 몫인 부분은 공지도 없고 연락도 없으니...

맘 상했지만 그래도 '인내' 인내 인내...

 

어젯밤엔 큰딸이 늦은 시간에 문자,'엄마 집이 그리워...집에 가고 싶어.'

집이 뭐가 좋다고 '먹을 것도 하나도 없고 좋을것 하나도 없어..잘지내' 했지만 녀석은 자신의 처지가

고달픈지 집이 그립다며 에효....자신이 선택한 길이건만 힘든가보다.혼자 이겨낸다는 것이

막내둥이는 감감무소식인데 큰딸은 늘 전화로든 말로든 문자로든 자신을 표현하기도 하고

막말로 엄마에게 대들기도 잘한다. 반면에 막내녀석은 가끔 제 마음을 열어 보이기에

걱정이 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믿게 되기도 하는데 저도 무척 힘든데 엄마가 알아주지 않는것

같아 힘들고 짜증이 나는지 집에 오면 늘 눈물....

나 또한 올해는 조금만 피곤하면 감기, 이벤에도 일주일여 목감기와 기침으로 감기 속에서

겨우 탈피하다시피 해서일까 나 이외의 누군가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도 미안해서 전화를 해보니 받지 않는 녀석,잘 지내고 있겠지...

올해 우린 모두 '인내'가 필요하다. 혼자라는 것도 힘들다는 것도 모두 이겨내야 한다.

그래야 마지막 그 순간에 웃을 수 있다. 모두 다 함께...

 

201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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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교향악 펭귄클래식 39
앙드레 지드 지음, 김중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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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지드의 <전원 교향악> 이 작품을 언제 읽고 다시 읽게 된 것인지. 중학교 때에도 고등학교 때에도 난 유독 '고전'과 '세계문학'에 빠져 도서실 한 귀퉁이에서 두껍고도 세로줄 쓰기의 책들을 탐독하는데 시간가는 줄 몰랐다. 집에서도 늘 끼고 있는 책들이 고전과 장단편문학,하지만 그때 읽고는 다시 집어들 여유가 없었는지 그때 읽은 것으로 만족을 한 것인지 도통 기회가 없었는데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그때 읽었던 책들을. 이 작품은 영화로도 보았던 기억이 있고 사춘기시절 무척이나 가슴졸이며 안타까움에 결말이 꼭 그래야했을까? 하며 혼자 한탄하던 작품인 듯 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장애와 비장애'의 차이는 무엇이고 '보인다는 것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지. 그리고 '육체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사랑' 의 그 미묘한 차이를 이 작품에서 다시금 느껴본다.

 

'나는 길 잃은 양을 데리고 온 거요.'

귀머거리 노파의 임종을 지키러 갔던 목사는 노파의 죽음 후에 홀로 남겨진 눈이 보이지 않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제르트뤼드'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 그가 거두지 않으면 거둘 사람이 없다는,목사이기 때문에 여러마리의 길 잃는 양 중에서 자신은 한마리의 양을 데리고 왔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집에는 다섯명의 아이와 아내 아멜리가 있다.아멜리는 갓난아기 때문에도 힘들어 했는데 자신이 데려 온 장애아 때문에 일이 더 늘어나 푸념을 늘어 놓았지만 그는 아내의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제르트뤼드를 교육시키는데 온 정성을 쏟아 붓는다. 남자들은 어느 집이나 여자들이 하는 일에는 관심이 덜하다.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그리고 예감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모른다. 아내는 장애아를 보는 순간에 직감이 좋지 않아 반대를 한 것인데 목사인 남편의 만류를 그녀를 돌보게 되었다.

 

다기망양이라고 했다. 길이 여러 갈래여서 양을 잃고 있다는 것을,자신은 장애아인 제르트뤼드에게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 마르탱은 목사에게 그녀를 교육하면서 '일기' 같은 쓰길 바랬다. 그녀는 아직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깨끗한 도화지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순수한 영혼이니 모든 것을 잘 받아 들일거라는,그녀의 잠자고 있는 세상을 열어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귀머거리 할머니와 함께 했기 때문에 그녀가 말을 못한 것인지 워낙에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던 듯,하지만 그녀는 세상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목사가 들려주는 그대로 세상을 상상하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순수한 영혼에 목사는 세상의 더러운 '죄'와 같은 것을 들려주고 싶지 않아 함께 숲길을 걷거나 음악을 들려주면서 그녀의 또 다른 세상을 열어 나갔다. 함께 음악회에 갔다가 들은 '전원 교향곡' 그곳은 물론 베토벤이 귀가 들리지 않은 시기에 만든 곡이라 알고 있지만 듣을 수 있는 사람보다 더 아름답게 곡을 만들었다. 그녀는 그 곡을 들어가며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운지 묻는다.과연 그럴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상상속에 갇힌 세상,목사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의 상상만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그녀에게 때를 입히고 싶지 않았던 목사,하지만 세상은 결코 아름다운 것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눈이 보이는 사람들은 자기가 누리는 행복을 모른단다... 그렇지만 볼 수 없는 저는 듣는 행복은 알아요.'

 

'나이를 먹었다고 항상 아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

서서히 자신만의 세상에서 나와 또 다른 세상을 만나는 그녀 앞에 목사와는 다른 젊은 남자인 목사 아들 자크가 나타나고 몰라보게 변한 그녀에게 반한 자크는 그녀와 결혼할 것을 다짐한다.하지만 신앙과 아버지 앞에서 뜻을 굽히는 자크, 그때까지도 자신이 제르트뤼드를 사랑하고 있음을 몰랐는데 아내의 수수께끼 같은 말이 자꾸만 그를 붙잡는다.그랬다. 아내는 그녀에게 향하는 목사의 '진심'을 보았던 것이다. 누가 장애이고 누가 장애자가 아닌지. 아내는 볼 수 있었던 목사의 사랑을 목사인 자신은 눈이 보이지 않는 제르트뤼드처럼 눈을 뜨고도 못보는 그야말로 자신의 사랑에 장애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아니 그는 자신의 사랑을 주님의 사랑으로 밀어 부치려 했다. 종교적 사랑이지 자신의 육체적 사랑이 아니라고 절대적으로 부정을 했던 것이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했다. 자신의 진심을 자신에게도 제르트뤼드에게도 속일 수가 없었는데 친구 마르탱은 그녀의 눈을 검사 한 후에 그녀가 수술을 받으면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그녀는 수술을 받게 된다.

 

드디어 그녀는 동면의 삶에서 깨어나게 된 것이다. 목사는 자신의 사랑을 부정하려 하면 할수록 그녀에게 향하고 그런 마음을 어쩌지도 못하는 사이 그녀가 수술을 마치고 들어서던 길에 사고가 일어났다. 그녀가 정말로 시냇가에 '물망초'를 꺾기 위하여 몸을 굽힌 것인지 아니면 자살을 하려고 그랬던 것인지 그녀는 물에 빠져 생사의 갈릴길에 서게 되었다. 비로소 드러나는 그녀의 마음, 지금까지 목사를 사랑하고 있는 것인줄 알았는데 세상을 보게 된 순간 깨닫게 된 그녀의 마음은 목사의 아들 '자크'에게 향하고 있었다는 것. 하지만 자크는 아버지와 그녀 때문에 개종을 한 후 였고 그녀는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들에,그리고 자신의 사랑의 미묘함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보고 산다는 말을 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눈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는 어떤 세상을 그렸을까? 목사가 다섯아이와 아내가 있는 남편임을 그리고 그의 곁에는 이런 모든 상황을 걱정하는 아내가 있음을 그녀가 보았던 것이다. 눈을 뜨고 처음 그녀가 보게 된 세상은 아름다움이 아닌 자신의 마음안에 있는 '죄'였던 것이다. '제가 처음 본 것은 우리의 과오,우리의 죄였어요.' 목사가 읽어주던 말씀 중에 '만일 너희가 눈이 먼 사람이라면 죄가 없으리라.' 과연 그랬을까? 눈이 보이지 않았던 그때 보지 못하던 '죄와 과오 그리고 걱정어린 아내의 얼굴'을 보면서 제라트뤼드는 자신의 길을 알고 말았던 것이다.

 

목사는 왜 아내의 조언에도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그동안 '눈이 멀어' 있었던 것일까? 눈이 먼 소녀를 치료하고 교육시켜서 개안을 시켜 놓았지만 막상 자신의 눈은 멀어 있는 아이러니한 세상,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던 제르트뤼드.목사의 옷을 걸치고 종교라는 믿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부정하려 했언 목사, 우린 어쩜 그런 진실한 사랑을 부정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 자신안에 존재하는 사랑은 눈이 멀어서 보지 못하고 눈 앞에 급급한 사랑만 좇아 가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마음까지 마음의 눈이 먼 것은 아니다. 좀더 자신의 마음에 충실했더라면,목사의 옷을 벗고 자신에게 진실했더라면 그들의 사랑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자크와 제르트뤼드의 사랑은 이루어졌을까? 자신이 사랑하고 있기에,그것을 부정하면서도 마음 안에서는 받아 들였기 때문에 아들과의 사랑을 반대해야만 했던 목사, 결국 소녀의 죽음으로 그리고 아들의 개종으로 그는 두 영혼을 잃게 되고 말았다. 눈을 뜨고 있는 그대,사랑이 보이시나요? 정신적 사랑을 갈구하면서 육체적 사랑을 좇아 가고 있는 당신, 당신의 마음의 소리를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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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른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
박에스더 지음 / 쌤앤파커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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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초 큰딸이 수술을 하게 되었다. 진작 겨울방학에 했더라면 수술시간이 날 수 있었는데 너무 늦게 결심을 했고 병원에도 늦은 감이 있게 갔다. 졸업을 하고 갔으니 이월에는 시간이 없다는 것,하지만 빨리 해야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데 마음만 급했다. 병원일정은,아니 의사의 일정은 안되는데.다른 방법이 없을까? 어쩔 수 없이 인맥을 동원하기로 했다. 대한민국에서 인맥을 동원하면 안되는 것도 되는 사회이기에 우리도 한번 힘은 없지만 작은 힘이라도 보태보기로 했다. 아는사람의 건너 아는 사람을 찾아 수술날짜를 앞당겨 줄 수 있는지 물으니 비는 시간이 없다고 하더니만 급기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 이십의 고개에 올라 선 딸이 실망을 한 듯 꼭 그래야만 하느냐며 따져 물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된다면 해야되는 상황이니 하자고 하여 했는데 우리가 동원한 인맥이 아닌 아주 가까운 곳에 더 큰 인맥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모든 것이 수월하게 돌아가고 모든 것은 무사히 끝나게 되었다. 그런 일이 끝나고 이제 성인이 된 딸은 정말 이런 사회라는 것이 싫다는 것이다. 학연 지연에 연줄이 있어야 알아주고 받아주는 사회,그리고 권위주의에 물들어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는 그런 사람들이 정말 싫다는 것이다. 알고나면 별거 아닌 사람들인데 말이다.

 

우리의 교육제도는 '성공지향적'이면서 '경쟁'을 부추기고 붕어빵 기계에서 똑같은 붕어빵을 찍어내듯 그렇게 교육을 시키고 있지만 점점 '나 너 우리'라고 배우던 교과서 속의 나 너 우리에서 탈피를 하여 '나는 나' 너는 너'를 찾아가고 있는 듯 하다. 다름을 이제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에 나가면 자신도 모르게 권위주의와 계급과 규범과 질서들에 길들여지며 '당연'하게 따라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하다가도 나 또한 세월이 가고 짬밥의 수가 늘어날수록 배가 배운대로 똑같이 밑에 사람들에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무서운 시어머니 밑에서 똑같은 시어머니가 나오듯이 배운대로 밑의 세대에게 똑같이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가끔 삶을 무료하게 만들기도 한다.그렇다고 훌쩍 대한민국을 버리고 이민을 갈수도 없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내가 나고 자란 뿌리를 쉽게 버린다는 것은 글쎄? 우리 민족처럼 '뿌리'와 '근본'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다른 곳에서 다름을 인정하며 잘살수 있을까? 물론 잘살수도 있겠지만 어느 순간에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길들여진 습관이라는 것이 무섭듯이 단번에 무얼 고치기에는,그것이 개인일 때도 힘이 든데 '우리'라는 거대한 단체의 입장에서 움직인다는 것은 더 많은 시간을 요할 것이다. 하지만 서서히 변화는 나타나고 있다. 이런 책을 어떻게 예전에는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을 했을까? 읽는 처음부터 나의 가려움을 대신 긇어주고 있는 것처럼 속시원함은 무엇인지. '전시,허세,체면, 이런 다양한 종류의 보여주기 속에서 우리는 항상 내용보다는 형식,업무보다는 의전을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헷갈린다. 뭐가 진짜고, 뭐가 우선인지를 말이다. ' 나 또한 형식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내용을 중요시하지 형식적으로 무엇을 하라고 하면 반기를 제일먼저, NO를 외치고 나선 사람중에 한 명이다. 그러니 당연히 '싸가지 없는'으로 손가락질을 당할 때도 분명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속이 비었을까? 그것은 아니다. 모두가 옳다고 하고 무조건적으로 형식적인 것을 따라갈 때 그것이 잘못되었다면 고쳐야 한다고 한소리 하고 나서는 사람이 지금까지는 그리 많지 않았으리라.아니 우린 '좋은게 좋은거'라면서 또한 그렇게 따라가는 것이 사회를 잘 버티어 나가는 덕목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난 정말 내게 맞지 않는 옷처럼 벗어버렸다. 그래도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어느 순간 나이가 들어가다보니 'NO'를 외치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나도 'YES'로 기울고 있더라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느끼게 된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승자가 되었다고 꼭 잘사는 법은 없다. 사회는,행복은 성적순이 아닌것처럼 아니 그와 반대로 행복은 성적의 거꾸로 순처럼 일등만 달리던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에 나가서는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그런 반면에 학창시절 성적이 좋지 못하던 사람들은 주변에서도 잘 살고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 내자식에게는 '승자'가 되길 강요하고 '대학'이라는 허울 좋은 간판을 따기를 부추기고 있다. 사회가 모두가 타고 달려가는 그 기차에서 벗어나면 낙오자가 될까봐 용감하게 다른 길을 선택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편승'하여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한이 있어도 보통의 사람들이 겪는 그 고통을 고스란히 겪으며 달려가길 바라고 원한다. 그래야만 할까? 딸이 이십이 되고나니 생각이 많아졌다. 꼭 다른 사람과 똑같은 길을 걷게 해야만 할까? 다른 길을 제시해 주었지만 자신만 낙오자가 되는 것 같고 도태되는 것,도피하는 것 아니냐며 싫단다. 그렇다면 꼭 모두가 걷는 길을 걸어가면서 나 또한 똑같은 붕어빵이 되어야 할까?

 

많이 변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사회에 나가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아직도 학벌이 중요시되고 간판이 중요시되고 학연 지연에 체면이나 형식이 난무하는 사회이다. 나부터가 대학을 가지 않고 다른 길을 갔다고 했다면 먼저 '왜?' 하고 묻게 된다. 하지만 그럴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하면서도 그동안 몸에 겹겹이 굳어져 떨어지지 않는 굳은살처럼 되어 버린 것을 하루 아침에 떼어낼 수는 없지만 서서히 너와 내가 다름을 인정하고 형식보다는 내용을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시 하는 그런 사회로 되어 나간다면,우리 그렇게 변화할 수 있게 너와 내가 만들어야 한다. 아니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획일성을 걷어내고 서로가 다름을,차이를 인정하자고 그녀가 나섰듯이 점점 생각이 깨인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싫다고 모두가 떠날 수는 없다. 어느 사회에 가던지 '문제점'은 반듯이 있다. 내가 싫다고 떠나고 나면 그리워지기 마련이다. 다시 그 사회에 돌아가면 잘살것만 같은 그런 '오류(?)' 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자신의 자리에 돌아왔을 때 내가 과연 변해있을까? 위와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밑을 보고 옆을 보면 정말 지금보다 더 자신을 인정하며 살수 있다. 늘 승자가 되고 정상에 서는 것만 가르쳐 왔고 그렇게 배워 왔지만 이젠 아래를 보고 옆을 보며 차이를 공감하며 자신부터 변해간다면 살만한 사회이고 세상이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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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엔 봄이 가득,군자란과 제라늄

 

 

 

 

 

 

 

 

베란다엔 정말 봄이 가득이다. 밖에는 바람이 불고 겨울과 봄사이를 왔다갔다 하는데

집안,그것도 베란다는 봄이 가득이니 자꾸만 발길이 베란다로 향한다.

아침에도 차 한 잔을 들고 베란다에 가서 홀짝홀짝이며 꽃들을 바라보고

스프레이를 해주고 물을 주고... 그렇게 녀석들과 데이트를 나누는 시간이 제일 행복한 시간...

 

어제와는 또 다른 오늘을 늘 보여주는 녀석들이다.

내가 키우는 군자란은 정말 생명력이 강해서 좋다.다른 식물들도 생명력이 강한 것이 많지만

이녀석은 봄이면 어김없이 화려한 꽃을 피워주기 때문에 더 이뻐하는지 모르겠다.

이녀석들이 일제히 피어나는 요맘때가 제일 좋다.

 

 

 

 

 

화단엔 더이상 화분을 놓을 자리가 없다. 군자란으로 거진 꽉 들어차듯 했다.

화단안에 들어가지 못한 녀석들이 화단 밖에서 대기중인데 역시나 꽃대를 올리고 피기 시작이다.

올해에 3개정도의 화분을 분갈이 해야한다. 정말 급하다.

꽉찬 화분에는 몇 개의 식구들이 살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꽉 들어차서 꽃대가 시원찮게

올라오는 것들도 있다. 영양분이 부족한 것이다.

 

지난번에 새로 분갈이를 하여 새끼를 모두 떼어낸 것은 지금 잘자라고 있고

꽃대도 튼튼하게 올라오고 있다. 진작 분갈이를 했어야 하는데...

꽃대가 있어 만약에 분갈이를 한다면 조심 또 조심을 해야만 한다.

 

 

 

제라늄

 

 

제라늄도 햇살이 좋아서인지 꽃대가 하나 둘 더하고 있다.

이미 핀 것은 활짝...피기 시작하는 녀석도 있는가 하면 이제 꽃대를 올리고 있는 녀석도 있으니

한동안 제라늄이 창가를 밝게 비추일 듯..

그런가 하면 거실베란다에도 무슨 색인지 모를 제라늄에서 꽃대가 나오고 있다.

올봄엔 좀더 다른 색상의 제라늄 식구를 들이고 싶고

삽목도 더 많이 해서 늘 이쁜 제라늄 꽃을 볼 수 있게 해야할 듯 하다.

 

 

 

 

꽃이 한가지만 펴도 이쁜데 사랑초 군자란 아젤리아 제라늄...

갖가지 꽃들이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져 그야말로 베란다는 봄이다.봄이 한가득이다.

조금 있으면 카라도 올라올텐데...^^

 

이제 봄은 시작이다.

새로 시작하는 것들은 아름답다. 꿈을 안고 있기에...

 

201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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