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일곱 개의 고양이 눈
최제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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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훈 작가의 책은 처음이다. 첫 만남이었는데 느낌이 좋다.미스테리와 추리소설을 좋아하는데 그의 소설은 독특하다. 요즘 젊은 작가들중 스토리텔링이 대단한 작가들이 많은데 그중에 한사람 천명관 작가의 <고래>를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다. 이야기가 끝이 없을것처럼 이어질것만 같다. 그렇다고 계속 되는 이야기도 아닌 것이 무언가 교집합을 가진 이야기들이 숙주에게서 새로운 것으로 파생되어 새로운 이야기로 재탄생되어 정말 숨은그림찾기나 퍼줄맞추기처럼 독특한 재미를 준다. 어딘가에서 나왔더라 하고 지난 이야기를 곱씹어 보게 하는 재미도 있고 끝이 날것만 같은 아니 처음과 끝이 다시 하나로 연결되어 서로의 이야기들이 하나의 완전한 고리로 연결된 '환' 아니 끝이 없는 '파이' 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소설중에도 나오는 '단 한편의 완벽한 미스테리 소설'...'단 한편의 완벽한 미스테리소설.....그게 어떤 건데?' '그게 바로...... 그 소설의 핵심 미스터리야.' 라는 말처럼 작가는 '단 한편의 완벽한 미스테리 소설' 을 정말 끝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교묘하게 연결시켜 놓았다. 잠깐 한눈을 팔다보면 삼천포로 빠질듯 위험하기도 하고 더욱 집중해서 읽어야만할 것 같은 적재적소의 '교집합' 들이 이야기마다 숨어 있어 그 또한 찾는 재미가 있다.

여러개의 단편소설들이 하나의 장편소설이 되는 소설들이 꽤 있다.하나의 주제를 향해 나아가는 단편적장편소설도 있는가 하면 이렇게 단편이 연결되어 장편이 되는 소설 한강의 <채식주의자>도 단편이 연결되어 장편이 되었는데 이 소설은 그와는 또 다른 재미를 준다. 무언가 씨실과 날실이 교묘히 배배꼬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문양의 한벌의 멋진 옷이 완성되듯 소설은 계속적으로 숙주의 몸에서 숙주를 갏아먹면서도 새로운 놀라운 개체를 만들어 낸다. 그렇다고 그것이 앞의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는 것도 아니면서 새로운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를 탄생시키고 그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의 발판이 되면서 다른 이야기를 탄생시킨다. 정말 미스터리이다. 그렇다고 결론이 딱불어지게  '이것이다'  하고 제시하는 것이 아닌 독자의 몫으로 남겨 놓았다. 독자가 어떻게 결론을 내리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또 달라질 수 있는 정말 수없이 많은 이야기로 파생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이야기다.

죽음이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고 우리 또한 그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영원한 숙제이다. 그렇지만 어느 예능프로의 말처럼 '나만 아니면 돼' 라고 외치면 그 죽음이란 울타리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연쇄살인범과 평범한 우리의 차이는 생각을 간발의 실천으로 옮기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문제처럼 늘상 죽음은 우리 옆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살인범은 아니지만 인터넷 동호회 '실버해머' 에서 살인에 대하여 연쇄살인범보다 더 이론적으로 죽음과 살인에 대하여 능통한 사람들, 그들이 단지 경험하거나 체험하지 못한 것은 실제상황에 접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 6인을 산장에 모이게 하는 '악마' 라는 사람,갇힌 밀실인 산장에서 벌어지는 그들이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것을 실제상황에서 경험하게 되는데 꿈을 통한 살인 그리고 현실에서 보게 되는 시체를 보게 된다. 그들은 닉네임으로 활동했기에 그들이 오프라인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밝혀지지 <여섯번째의 꿈>에서는 밝혀지지 않는데 <복수의 공식>외 이야기들에서 밝혀진다. 

'그들과 우리를 구분 짓는 양심이라는 게 생각만큼 단단한 벽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방아쇠를 당기는 건 한순간이니까요.' 살인자와 그렇지 않은 평범한 보통의 사람은 정말 양심이라는 그 얇은 벽 하나 차이로 어쩌면 세상은 달라질지 모른다. 정당방위가 되었든 자신이 살기 위하여 저지른 어쩔 수 없는 살인이라 해도. '죽음' 이란 무엇일까. 멀리하려 해도 결코 우리의 삶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물음표에서 계속적으로 만나는 사람들과의 인연속에서 또 다른 물줄기가 파생되듯 또 다른 이야기로 접어 들면서 다른 이의 삶을 통해 다시금 환상처럼 마주하게 되는 죽음의 이면, 그렇다고 그 속에서 누가 범인이고 어떤 사건이 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연결고리를 통해 많고 많은 사람들이 연결되고 모두의 삶이 한번쯤 교집합이 될 수 있는 그런 상화에서 죽음 또한 떼어 놓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환상적인 미스테리 소설.

'일곱 개의 고양이 눈' 세마리의 고양이가 있다면 당연히 눈이 여섯개가 되어야 할 텐데 <여섯번째의 꿈>처럼 일곱명이 되어야 할텐데 '악마' 라는 주선자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검은망토의 악마' 가 나타나 살인을 하게 되고 여섯명이면서 일곱명처럼 된 '여섯번째의 꿈' 과 마찬가지로 세마리가 일곱개의 눈이 된것이라 한다면 '비현실성' 혹은 '환상' 이라 말할 수 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여섯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고 아직 닥쳐오지 않는 미래의 '죽음' 을 넣는다면 일곱이 된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해 본다. 소설의 결말이나 평은 각기 다를 수 있고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리 다른 해석을 할 수 있지만 모든 이야기들을 통해 그는 '죽음' 이라는 것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 이야기처럼 알고 있지만 실은 늘 우리곁에 달라 붙어 있는 죽음이 어떤 상황을 만나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또 다른 모습으로 보일 수 있는 환상. 

처음엔 밀실추리소설인줄 알고 약간은 허무함을 느꼈지만 두번째 이야기에서 완전히 매료되어 읽게 되었다. '아 이런 작가도 있구나' '이런 미스터리도 있을 수 있구나' '단 한편의 완벽한 미스터리' 를 위해 작가는 얼마나 많은 자유발상을 했을까? 생각의 가지를 계속 쳐나가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들, 그 속엔 우리가 모르지만 의연중에 교집합이 있을 수 있고 모르고 지나지만 타인과도 교집합이 있을 수 있는 삶속에서 죽음 또한 나는 느끼지 못하지만 내가 그에게 영향을 미쳐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것. 불교의 인연과 윤회처럼 계속적인 이야기 속에서 인연 또한 무시할 수 없음이, 남에게 빚은 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가져 보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살인이 직접적인 영향의 살인만이 있는 것이 아닌 번역가라면 작품속에서 할 수도 있고 쌍둥이라면 의연중에 동생을 혹은 형을 죽기를 바라는 상대로 생각하고 살수도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 자신의 마음에 달려 있다. 표면화 시키지 않을 뿐이지 늘 죽음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양심의 벽이 무너지는 순간에 살인자가 될 수도 있는 환상적 현실의 이야기들, '모든 건 연결되어 있어.' '내가 환영 속을 헤매고 있는 거라면, 사라져야 할 건 현실이다. 현실이 별건가, 내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곳일 뿐.' '완성되는 순간 사라지고, 사라지는 순간 다시 시작되는 영원한 이야기, 무한대로 뻗어나가지만 결코 반복되지 않는 파이처럼.' 그리곤 ' 자, 이야기를 계속해봐,잠이 들지 않도록.' 잠이 들면 이야기도 끝이 나고 죽음과 맞닿을듯 하다. 그렇다면 끝이 없는 숙주의 몸에서 새로 탄생한 '맵시벌' 이야기처럼 계속되어야 한다. 손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흡인력과 강한 집중력 그리고 무언가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환상속을 걷는 듯한 돌고 도는 이야기들 속에서 결말없이 파생되는 이야기들 속을 배회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 소설로 그의 다른 작품을 찾아 읽어보고 싶게 만들며 그를 눈여겨 보게 하는 작품이 되었다. 원주율의 파이처럼 한동안 무언가 알 수 없는 끝없는 이야기속을 배회했지만 답이 없어 허무한 느낌, 하지만 무언가 확실하게 단단히 발목을 잡는 매력덩어리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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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과 동백 그리고 꽃들






 
꽃대가 제법 나왔고 꽃이 활짝 핀 녀석도 있다.





 
군자란 꽃





 
동백


말발도리 꽃대가 나오고 있다. 올해 처음이다...여양이 부족한듯..

 
한번 뜯어 물김치를 담은 미나리가 다시 자랐다. 브론페시아에서는 새 순이 많이 돋아 나오고..

 
목베고니아와 시클라멘..끊임없이 피고 있다


일요일에 새식구가 꽃치자

 


오늘 새식구가 된 '아젤리아' 두녀석...


베란다 화단에 하루만 나가지 않아도 녀석들은 다른 모습으로 치장을 하고 있다.
군자란이 제법 꽃대도 쑥쑥 올라고 활짝 핀 녀석도 있어
안방베란다가 화사해졌다. 아젤리아와 동백이 있어 화려한데 동백은 이제 서서히 지고 있고
아젤리아는 늘 피고 지고 피고 지고...화려함이 계속인데
거기에 군자란이 하나 둘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니 더욱 화사해지고 있다.

어제는 일요일에 마트에서 사온 '꽃치자' 를 심었도 오늘은 마트에서 
다시 '아젤리아' 두개를 사와 지난 겨울에 빈 화분에 심었다. 
잘 큰다고 해도 가끔 하나씩 화분이 비게 되면 왠지 보기에 쓸쓸하여 꽃을 사다 심게 된다.
예전에는 관엽이 좋았는데 이젠 화사한 꽃이 좋다. 집안이 살아나는 듯 하고 보기 좋아
마트 한구석에서 '나좀 업어가 주세요~~' 하며 손짓하는 아젤리아 작은 화분을 3,900원에 두개 샀다.
오자마자 바로 화분에 옮겨심고 보니 봄이 한껏 더 다가온듯 좋다.
꽃을 사들고 오는데 엘리베이터에서 중간층 아줌마를 만났다.
-꽃이 피었네. 이쁘다. 우리집은 꽃이 잘 안데.. 사다 놓으면 다 죽어..
-왜요, 아파트가 남향이라 꽃이 잘되는데.. 저희집은 지금 얼마나 많이 피었는지 몰라요.
이녀석들도 이뻐서 사왔어요.. 했더니만 아줌마 또한 그렇게 가꾸고 싶은데 잘 안된단다.
아줌마 울집 화단을 보면 놀라시겠다.

올핸 <<말발도리>>에서 꽃대가 나왔다. 처음이다. 몇 년전에 야생화 전시회에서 사왔는데
화분에 영양분이 없는지 비리비리 하더니만 지난 겨울엔 잎을 다 떨구어 더 보기 흉했다.
그러디니 새순이 가냘프게 나오고 잎이 어느정도 큰 듯 하다 했는데 살펴보니
꽃몽오리가 보인다. 뭔가 좋은 일이 있을것만 같다. 안피던 꽃이 피면 기분이 좋다.
아젤리아가 많이 나오는것을 보니 봄이다. 아버지 산소에도 사월엔 몇 개 사다 심어야 할 듯 하다.
봄이 오고 녀석들이 하나 둘 꽃을 피워주고 또한 녀석들에게 싱그런 에너지를 얻다 보니
녀석들을 한바퀴 둘러보고 나면 기분이 저절로 좋아진다.
겨울동안 빈화분이 된 바이올렛 몇 개의 화분에도 다시 잎꽂이를 해 본다.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해 몇 번 실패를 하였지만 다시 살아날때까지 잎꽂이를 해본다.
그러다보면 어느 녀석 힘찬 날개짓을 하듯 새순이 돋아난다.
그렇게 삶은 이어지고 다시 계절은 찾아 온다.


201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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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꽃대, 그 실체와 초록이들






이제 서서히 하나씩 피기도 하고 점점 하루가 다르게 꽃대가 올라오고 있다.
내 눈에 들어온 군자란 꽃대는 33개, 작년엔 25인가 그정도 나온듯 한데
올해는 더 많은 꽃대가 나오고 있다는 것은 분갈이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화분에서 몇 개의 새끼가 번져 나오고 그 새끼마다 꽃대가 나오고 있으니
그야말로 화분이 쪼개지지 않는것이 다행이다.

어제와 오늘은 또 다르다.어제보다 조금 더 올라오고 더 피고..
그렇게 조금씩 하루가 다르게 군자란 꽃대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잎과 잎사이를 뒤적이며 헤쳐보지 않아도 '쑥쑥... 나 여기있어요..' 하고 나오는 녀석들,
정말 귀엽고 이쁘다. 어떤 꽃이 될지 내심 기대도 되고..

우리집에 있는 군자란은 두 종류다. 잎이 조금 넓은 것은 꽃이 오므라진 모양이고
잎이 약간 좁은 듯 한것은 꽃잎이 바깥쪽으로 활짝 벌어져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활짝 벌어져 있는 모양이니 잎이 조금 좁은 듯 한 것이다.
그런데 함께 피고 나면 두 녀석들 모두다 이쁘다.
어느것이 더 낫네 하고 말하기가 번거로울 정도로 꽃이 피고 나면 화사하고 화려해서 모두 이쁘다.







 
오모라진 꽃과 벌어진 꽃

 

 

 


녀석들 때문에 난 봄이 기다려진다.
화려한 나의 화단이 기다려져 하루에도 몇 번씩 베라단 화단을 들락거린다.
보고 있음으로 해서 정말 좋은 녀석들, 거짓이 없다.
늘 같은 모습으로 날 맞아준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듯 보답을 한다.
그렇게 녀석들이 내게 주는 봄은 늘 화려하고 특별하다.










화려하다. 봄꽃들이 유난히 화려한듯 하다. 겨울을 이겨내고 
자신의 실체를 밝혀야 하기에 더욱 화려한듯 하다.
향기는 없지만 그 색감만으로도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존재감,
그렇게 녀석들은 질투를 불러 일으킬만큼 화사하고 화려하다.




넉줄고사리


실외기 베란다의 더덕 화분에 있는 돈나물

 
기린초와 친정엄마가 텃밭에서 해서 보내주신 대파... 식구가 없으니 그것도 남는다.




부겐베리아는 지금 나오기 시작이다. 얼마나 더 나오려는지 모르겠지만 
녀석들이 피고 나면 정말 화려하다 그리고 지저분하다. 언제나 꽃 진 자리는 
지저분하고 안쓰럽다. 화려함은 어디로 사라지고 말라비틀어진 겁껍데기만 나뒹구는 듯 하다.

오전에 날이 좋아 한바퀴 안방 베란다부터 거실 베란다 그리고 딸들방 실외기 베란다까지
한바퀴 돌고 나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햇살이 좋은 날은 녀석과의 데이트가 정말 즐겁다.
내가 해주는만큼 그만큼만 내게 보답을 하는 녀석들,
녀석들이 있어 봄이 더욱 싱그럽고 화사해서 좋다.
그리고 한껏 기다려진다.
내일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녀석들...
사랑스럽다. 그대들..


201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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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모메 식당 디 아더스 The Others 7
무레 요코 지음, 권남희 옮김 / 푸른숲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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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모메 식당은 몇 년전에 영화로 먼저 재밌게 보았기에 선택을 하게 되었다. 눈으로 드립커피와 시나몬롤 오니기리(삼각김밥)을 맛보았다면 지지직 보글보글 하는 소리까지 맛있어 귀 기울이게 하는 영화였다. 정갈하면서 욕심내지 않고 자신의 꿈을 소박하게 이루어 나가는 그런 여자들의 사랑방 같은 영화라고나 할까. 원작은 사치에 미도리 마사코가 왜 일본이 아닌 낯선 ’핀란드’ 에서 모이게 되었는지 그 지난날을 모두 이야기 해주고 있다. 자신의 평범하거나 일상적인 삶에서 무언가 정말 절실하게 돌파구가 필요했던 그녀들, 목적이 있거나 목적이 없거나 그곳에 가면 치유가 될 것만 같은 생각에 음식냄새에 이끌리듯 ’카모메 식당’ 에 이끌리는 여인들이 커피 한 잔에 시나몬롤을 앞에 두고 맘껏 수다를 떨 수 있는 동네사랑방 같은 그 곳, 그곳이 바로 카모에 식당인 것이다.

무술인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어머니가 살아 계실때는 무술을 배우고 또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자연적으로 집안 살림을 맡아 하면서 무술이 아닌 요리에 더 뜻을 두게 된 사치에는 점점 요리에 빠져들게 되고 자신만의 요리세계를 펼칠 수 있는 그런 가게를 갖고 싶어한다. 하지만 일본에서 그런 가게를 한다는 것은 아버지의 간섭이 있을것 같아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보다가 아버지의 제자중에 핀란드에 살던 사람을 생각해 내고는 그곳에서 가게를 할 수 있는지 도움을 요청한다. 가게를 하자면 많은 돈도 필요했는데  뽑기에 행운이 늘 따랐던 그녀가 복권을 사게 되고 어마어마한 금액이 당첨된다. 이제 모든것은 다 준비가 된 것이다.핀란드로 떠나기만 하면 된다. 한편 아버지는 무뚝뚝한듯 해도 운동회나 소풍에는 꼭 사치에게게 손수 싸주셨던 아버지,떠나기 전날 말씀 드렸더니만 떠나는 날 아침에 손수 상을 차려주시는 따듯함을 보여주신다.별어려움없이 핀란드에 도착하여 아담한 가게를 열지만 손님은 늘 아무도 없다. 그래도 날마다 깨끗이 그릇을 닦고 시장을 보고 음식을 만든다. 그런 어느 날 첫 손님이 들어오는데 그는 일본 에니매이션 마니아이다. 겨우 더듬거리며 말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일본어실력이지만 그는 사치에에게 ’독수리 오형제’ 노래를 알고 싶어한다. 하지만 사치에의 입안에서 맴도는 노래는 모두가 기억이 안나고 다음에 알려주겠다고 해도 그 손님은 날마다 찾아온다.유일한 손님이 별볼일없는 대학생이었던 것이다.그는 곧 자신의 지정석까지 생겨나게 된다.

한편 토미에게 독수리오형제 노래를 가르쳐주겠다고 한 후 우연하게 시내를 둘러보다가 책방에 가게 된 그녀는 그곳에서 일본인 여자를 만나게 되고 그녀에게 첫만남에 ’독수리 오형제’ 주제곡을 묻게 되고 그녀가 노래 전부를 알려 주면서 그들은 대화를 하게 된다. 미도리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미도리 역시나 지금까지 부모의 뜻 한번 거스르지 않고 부모가 정해주는 학교에서부터 직장까지 그렇게 달려왔지만 부모님이 가시고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산을 남동생에게 빼앗기듯 하고 직장도 문을 닫고 나니 갈곳이 없다.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자신의 인생에 필요함을 느끼고 세계지도를 펼치고 짚은 곳이 ’핀란드’ 그래서 무작정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사치에의 권유에 함께 하게 된 그녀들 지금까지 자신의 속에 잠재되어 있던 새로운 능력을 보게 되고 함께 카모메 식당을 꾸려가게 된다. 손님은 하나 둘 늘어가게 되고 일본식 삼각김밥이아닌 핀란드식 삼각김밥을 만들어 보게 되고 시나몬롤도 만들어보게 되고 미도리가 가게에서 일하게 되면서 하나가 아닌 둘이 되어 더욱 새로움으로 한 둘 바뀌고 나니 손님이 점점 늘어가게 된다. 밖에서 늘 맘을 보듯 가게안을 들여다보던 핀란드 할머니들까지 손님이 되어 시나몬롤에 홍차를 마시게 되고 그야말로 동네 사랑방 같은 가게가 되어 간다.그러다 공항에서 가방을 잃어버린 마사코가 합류하게 된다. 이곳은 그러니까 한가지씩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맛있는 음식과 수다로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곳이다. 남편이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게 된 핀란드 리사 아줌마까지 이곳에서 진정한 마음의 치유를 얻어가 밝은 삶은 되찾게 되고 전직 도둑이었던 마티 아저씨의 친구는 호시탐탐 카모메 식당을 노리다 어느날 그곳에 도둑이 들지만 사치에가 누군가 무술을 하는 아버지에게 배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주는 사치에와 한팀이 된 미도리의 힘으로 도둑을 잡게 되고 그들은 유명인사가 되어 식당은 더욱 북적북적, 하지만 역시나 그때까지도 오니기리는 인기가 없다. 오니기리는 사치에게는 일본과 고향의 맛 아버지를 느끼게 해주는 음식인데 이상하게 생긴 음식을 핀란드인들은 꺼렸던 것이다.

 그런 어느 날 리사 아줌마가 오니기리를 먹게 되고 그 맛에 빠지게 된다.’언제나 네가 만들어서 네가 먹지 않냐, 오니기리는 남이 만들어준 게 제일 맛있는 법이다.’ 라고 하시던 아버지, 그랬다. 자신이 손수 만들어 제일 맛있는 맛을 남들에게 선물하듯 하고 싶었지만 그것을 몰라주었던 핀란드인들, 하지만 이젠 그녀의 맛에 서서히 빠져 들고 있는 것이다. 핀란드에 와서 치유를 받기를 원했던 사람들, ’ 자연에 둘러싸여 있다고 모두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요, 어디에 살든 어디에 있든 그 사람 하기 나름이니까요. 그사람이 어떻게 하는가가 문제죠. 반듯한 사람은 어디서도 반듯하고, 엉망인 사람은 어딜 가도 엉망이에요. 분명 그럴 거에요.’ 사치에의 말처럼 일본이 아니어도 자신이 똑바르면 핀란드에서도 행복을 얻을 수 있고 치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없는 사람이 건성으로 만든 것과 마음이 있는 사람이 정성을 담아 만든 것은 맛이 다르답니다.’ 정성을 다하고 억지로가 아닌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하는 음식만들기이기 때문에 맛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음식에도 마음이 들어가야 맛이 난다는 이야기인데 정성과 주인장의 마음이 깃들어져 있고 남다른 솜씨까지 가진 사차에가 만든 음식이니 맛있지 않을수가 없다. 그러니 핀란드인들이라도 카모메 식당에서 ’맛있다’ 를 연발하며 음식을 먹게 되었다는, 카모메 식당(갈매기 식당)은 주인장부터 마음을 열어 놓고 모두를 대하니 그곳을 들어오는 사람들 또한 마음을 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분명 그곳은 사치에에게도 미도리에게도 마사코에게도 낯선 곳이다. 인연이 하나도 없던 그곳에서 그들은 ’음식’ 이라는 하나의 주제에 마음을 열고 하나가 된다. 맛있는 음식을 함께 모여 앉아 먹게 되다보면 자연히 마음에 쌓인 것들을 풀언 놓게 된다. 요란한 음식점이 아닌 그곳은 동네사랑방 같은 곳이었고 맛있는 음식이 있고 늘 사람냄새가 나는 곳이었으니 당연히 사람이 모이게 된 것이고 그곳에 들어오는 자, 마음의 병을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에서는 전식당 주인이 커피내리는 기계를 가지러 왔다가 ’환상의 커피’ 를 내리는 법을 알려준다. ’코피 루악’ 에 대하여 말해주며 좀더 따듯한 그야말로 냄새가 진한 음식영화로 발전하는데 원작은 사람냄새와 치유에 비중을 두었는지 전식당주인이 아닌 전직도둑이었던 마티아저씨가 등장하고 도둑이 등장한다. 환상의 커피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영화를 먼저 보아서인지 무언가 따듯함이 그 뒤에 숨겨져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 맛있는 소리와 함께 맛있는 냄새가 가득한 그곳에서 소리까지 맛있는 오니기리와 시나몬롤을 맛봐야 할 것만 같다. 물론 세아줌마들과 함께 홍차를 앞에 두고 앉아 진한 수다를 나누면서 말이다. 어찌보면 별 내용이 없을것 같지만 담백하면서도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을것만 같은 오니기리처럼 겉모양과는 다른 한입 베어물면 속에 숨은 정말 알짜배기의 맛이 입안에 감돌것만 같은 그런 따듯함이 숨겨져 있는 치유의 소설이다. 그것이 음식과 만나 더욱 따듯함을 연출해 낸다. 사치스럽지 않게.산다는것 또한 요란하거나 사치스럽지 않아도 가득찬 수레의 묵직함처럼 가만히 있어도 빛이나는 그런 향기로운 사람은 결코 많은 것으로 치장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을 즐기는 것 뿐이다.타인의 의지로 가는 그런 삶이 아닌 자신이 잘할 수 있고 자신이 그 일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면 카모메 식당에서 서빙을 해도 좋고 설거지를 해도 좋은 것이다. 겉치레가 아닌 내면을 보여준 소설로 그런 곳을 갖고 싶게도 하고 그런 곳에서 친구들과 모여 한번 삶을 풀어헤치며 진한 수다를 나누고 싶게 만든다. 그곳에선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수다가 넘쳐날 것만 같다 맛있는 음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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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이 자라날 때 문학동네 청소년 4
방미진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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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이 사춘기이다보니 청소년문학이나 그외 그 나이에 비슷한 글과 소설은 읽어보려 노력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많이 읽는 편도 아니고 글을 읽는다고 딸들을 더 이해하고 소통하는 것은 아니다.나 또한 사춘기를 지나왔지만 무슨 계급장이라도 단것처럼 하는 녀석들의 사춘기를 좀더 이해보려 할 뿐이지 나 또한 그 시기를 거쳐왔기에 한발 물러나 보려 해도 두녀석이 함께 내게 맞붙으면 정말 혈압이 팍팍 올라고 급기야 마찰과 냉전의 시간을 갖게 된다. 이젠 큰 녀석은 조금 그 터널을 피해간듯 하여 여유를 찾아 보는데 작은 녀석이 또한 터널의 한가운데 있는지 눈만 마주쳐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아 정말 힘들다. 그러다 만나게 된 책, 하지만 우리집 책장에서 오래도록 잠자고 있었는데 큰딸이 ’엄마 내나이의 성장소설 없어’ 하길래 권해 준 책인데 녀석이 먼저 읽고는 ’엄마도 빨리 읽어봐, 몽환적으로 우리를 잘 표현해 놓았네’ 하길래 알았다고 답하고는 뒤돌아서 잊어버리고 말았다. 

한참 세상에 관심이 제일 많은 시기에 우리 아이들은 교실의 ’하얀 벽’ 에 갇혀 그 파릇파릇한 시간들을 모두 낭비하며 그야말로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오도록 열심히 책만 쳐다본다. 그렇다고 모두 꿈을 이루는 것도 아니면서 어쩔 수 없는 그 울타리 안에서 수행의 시간을 갖지만 불만은 불만대로 쌓여 늘 만나는 엄마에게 털어 놓는 이야기가 선생과 학교에 대한 불만이다. 그리고 더불어 우리나라 교육정책에 대한 불만, 그렇다고 어쩌겠는가 교실밖으로 뛰쳐나가 돈을 벌며 세상에 삿대질 할것도 아니고 할 수 있는 것이 공부이니 지금이라도 열심히 해야 나중에 후회를 하지 않지. 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발등의 불은 보이지 않는 법이다. 등하불명이라고 등잔 밑이 더 어두운 것이다. 자신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필요성에 의해 공부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현교육정책에서.

하얀 벽, 여자들은 이상하게 화장실을 갈때 손잡고 가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점심을 먹을때 함께 하는 친구가 따로 있고 손잡고 운동장을 통과하여 집에 함께 가는 친구가 따로 있다.그런데 어느 날 부터인가 자신이 친구들에게 따를 당하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옆에 짝꿍이라도 친해져야 하는데 그녀의 존재는 있는듯 없는듯 이상하게 그녀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다. 짝꿍으로 존재했는지조차 가물가물 하다. 그런 가운데 어느 날부터인가 하얀 벽에서 소리가 나는 듯 하고 그 벽이 나를 통해 교실을 보고 있는 듯한 섬짓한 생각이 든다.하얀 벽이 살아 있는 것만 같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낄까 하여 물어 보았지만 다른이들의 귀엔 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담임이 벽에 못을 박다가 심하게 다치게 되는 사고가 일어난다. 망치도 맞은 손가락은 심하게 다치고 피가 나서 벽에 선명한 자국을 남겼지만 벽은 그 붉은 피를 먹어 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벽은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지 못하도록 방어를 했던 것이다. 그 사고이후 자신이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고 짝꿍 또한 사고이후 존재가 희미해져 버렸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녀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다.그녀가 존재했던가. 안했던가.교실의 햐얀 벽을 통하여 여자아이들 사이에 당연히 존재할 수 있는 '벽' 에 대하여 거리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알게 모르게 금이 가 있는 친구와 친구사이의 벽,그 시기엔 정말 확실하게 금을 그어 놓은 것처럼 그 금을 따라 친구관계가 성립되고 생활을 함께 이루어 나간다. 벽이란 무엇일까. 마음과 마음을 나누면 없앨 수 있는 벽인데 사춘기라는 이성이 성장하고 자립하는 시기에 서로에 대한 벽을 쌓고 그 벽 위로 겨우 친구를 바라보려 한다. 벽을 허물기란 정말 힘들다. 또한 현 교육현실이 그렇게 만들기도 한다. 적이 아닌듯 하면서도 친구이면서 적인 친구, 그런 친구 사이에 벽을 쌓지 않고는 자신이 발전하고 전진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그런 현실을 공포화 하여 잘 표현하였다.

난 네가 되고, 쌍둥이인 여자 아이들 주영과 지영, 하지만 주영은 교통사고로 인하여 엄마와 아빠와 함께 그자리에서 죽었다. 함께 타고 가던 차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쌍둥이중에 지영만 살아 남았다. 늘 언니인 주영을 부러워했던 지영은 순간에 자신이 주영이 되고자 한다. 아니 자신이 주영이라도 단정하고 주영이가 된다. 그렇다면 모두가 그렇게 속아 넘어갈까. 지영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부모님과 함께 쌍둥이 언니가 죽었지만 자신은 할머니와 삼촌과 살면서 어려움없이 위기를 넘기게 된다. 자신이 넘겨야 하는 것은 지영이면서 주영이가 되는 것이다. 철저하게 집에서부터 자신은 주영이라는 것을 못 박아 두고 학교에 가서도 주영의 자리에 앉아 주영의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며 주영이가 된다. 성적 또한 주영이처럼 올리기 위하여 밤을 새워 공부한다. 자신은 철두철미하게 주영이가 되었다고 여기는 순간, 주영의 친구들은 그가 지영이라고 한다. 그렇다며 지영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자신이 주영이라고 다시 못 박아 주어 주영이가 되지만 그순간 없어져야 하는 지영이가 안쓰럽고 미안하다. 더 많이 사랑해주지 못한 자신, 더 많이 아껴주지 못한 자신은 이제 사라져야만 한다. 내가 선택한 선택 때문에.가끔 그 시기엔 나와 똑같은 일란성 쌍둥이가 있더라면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숙제도 그렇고 모든 것을 쉽게 할 수 있고 눈속임으로 모두를 속여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세상에는 단 하나의 '나 자신' 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해주고 아껴주지 않으면 누가 해줄 것인가. 남이 아닌 나로 살아갈때가 행복인 것이다.

붉은 곰팡이, 그런 반지하 집에서 잠깐 살았던 적이 있다. 이십대 잠깐 힘든 시기에 반지하에서 살게 되었는데 곰팡이는 없었지만 화장실이 다른 공간보다 높았다. 화장실에 올라가려면 한번 힘을 주고 올라가야 했다. 늘 그곳에서는 빨리 벗어나야지 했던 생각이 든다. 그래서 더 실감나게 읽었다. 아버지의 미적거리는 성격 때문에 반지하 방으로 밀려나게 된 가족들, 그곳에선 엄마마져 삶의 의지를 잃었다. 그리고 그곳엔 쥐도 함께 살고 그들의 삶처럼 벽지에 곰팡이가 날마다 닦아내도 다시 피어난다. 생명력이 없는듯 하면서 늘 새롭게 태어나 그들의 삶을 위협하는 곰팡이, 그런 집이라 먼저 살던 사람들은 그들이 나타나자마자 도망치듯 이사를 한것이었다. 그들 또한 막다른 골목까지 내몰렸지만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이젠 유일한 희망이 되고 있다. 곰팡이는 집 벽에만 피는 것이 아니라 한참 차이는 어린 동생의 몸에서도 피어나고 그들의 삶 속에서도 피어난다. 곰팡이와 함께 곰팡이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에게 곰팡이를 없앨 태양을 바라보며 사는 희망적인 삶이 찾아오긴 할까. 늘 머뭇머뭇 하던 아빠, 하지만 아빠의 성격이 그런것이 아니라 아빠가 무척이나 무서움을 타고 있다는 것을 딸은 느낀다. 그에 비해 엄마는 현실적이지만 집과 함께 엄마의 삶은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이 집을 벗어나야만 엄마도 희망을 찾고 동생의 몸에서도 곰팡이가 사라지고 아빠도 희망을 찾아 활기를 되찾을 것만 같다.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야 한다. 처음 그 집에 들어올때 뿔뿔이 흩어지듯 자신만 찾던 그들이 그 집의 곰팡이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모두 하나가 된다.마침내 희망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언제 다시 내몰려 곰팡이가 핀 곳으로 돌아올지 모르지만 그집의 곰팡에서 겨우 벗어났다는 것만 해도 희망적이다. 

손톱이 자라날 때, 손톱을 길러야 할때 손톱을 무기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자기방어이다. 그보다 무서운 무기를 아직 찾아내지 못했기에 자기방어를 하기 위하여 손톱을 기르는 소녀, 자신보다 나약한 친구들의 얼굴에 손톱으로 상채기를 내며 희열을 찾는 그녀에게 손톱이란 자신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상대방이 어떤 아픔을 겪고 있는지 가늠하지 못한다. 아직은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그런 시기가 아닌 자신만 방어할 줄 아는 시기이기에 역지사지를 모른다. 친구가 자신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자신은 그 손톱으로 인해 자신감을 얻으며 생활해 나간다. 하지만 어느 날 그녀의 손톱에 얼굴에 상채기를 남기던 그녀가 전학을 가고 만다. 그녀의 먹잇감인 대상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자신의 우월을 표현할 대상이 사라지면 그 자신에게 손톱은 필요할까. 아이들은 무엇으로든 자신의 나타내려 노력한다. 그것이 남에게 상처를 줘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우월감만 내세운다. 만약 자신이 상처를 입는 나약한 상대였다면 어떠했을까. 그런것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아량이 있다면 학교폭력이나 아이들 폭력은 많이 줄어들 것이다. 무언가 자신의 힘을 남에게 나태내고 보이고 싶은 한참 힘이 솟아나는 시기, 그렇다고 남을 향해 내 손톱을 길러 세울 필요는 없다. 그건 오히려 나의 나약함을 남에게 드러내는 것과 같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것을 모른다. 한참 성숙해지려고 노력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고누다, 은어로 '꼬누다' 라는 말에서 비롯된듯 하다. 누군가를 겨냥하여 두번째 손가락으로 펴고 '둘' 이라고 외치며 진짜와 똑같은 가짜가 만들어지는 그런 능력을 가진 자, 자신이 가지고 싶은 개가 있으면 개를 향하여 두번째 손가락을 펴고 '둘' 이라고 외치기만 하면 된다. 나중에는 진짜가 가짜를 잡아 먹어 하나가 된다. 그렇게 고누다는 반에서 친구하고 싶은 여학생인 '보라2'를 만들어 방에 숨겨 놓는다. 하지만 학교에서 보라는 자신을 외면한듯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진짜 보라가 자신에게 고분고분 대해 주는가 하면 자신의 집에 가고 싶다며 따라온다. 옷장속에 보라2를 숨겨 놓았는데 말이다. 다행히 집엔 아무도 없지만 큰일이다. 진까가 가짜를 잡아 먹으면 안되는데. 그런데 집안 어디에도 보라2가 없다. 어떻게 된 일이지. 보라2를 찾아 다니는데 보라가 자신은 가짜라고 말한다. 그리고 닥친 식구들 또한 모두가 가짜라고 한다. 원세상에 모두가 가짜라니 그렇다면 이 세상에 가짜가 아닌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니 자신이 모두를 가짜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하긴 넌 아예 의심할 피요가 없었지. 넌 처음부터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거니까. 그래야 네가 한 짓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테니까 말이지.' 가짜 속에서 자신 또한 가짜가 될 수 밖에 없던 고누다, 하지만 진짜일까 가짜일까. 생각의 발상이 참 재밌는 소설이다. 남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 네개는 나를 향해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더 잘해야 한다고 한다. 남에겐 한 개지만 자신은 네 개이므로..그와 같은 상황인듯 하다. 자신이 만들어 낸 가짜들 속에서 혼자 진짜이길 원하나,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렇다면 나 또한 가짜가 되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이야기들이 음울한듯 하면서도 공포스럽고 환상적이기도 하다. 큰딸이 말했듯이 몽환적이 느낌의 소설들이지만 그 시절을 잘 표현하여 쓴 소설들은 재밌기도 하다. 나름 독특하면서도 빨리 그 속에서 벗어나야 할것만 같은, 가만히 있으면 붉은 곰팡이가 꽃처럼 스멀스멀 내 자신을 향하여 피어 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생각적인 면에서도 참 복잡한 시기를 사는 청소년, 무언가 탈출구를 생각해 내지만 자신들은 점점 늪에 빠져들듯 자신을 향하여 하얀 벽이 다가와 목을 조르듯, 자신의 삶에 닦아도 닦아도 피어는 곰팡이가 피어나는듯 뭔가 암울한 터널에 빠진듯 한 시기, 그런 힘든 자신을 위해 쌍둥이 '클론' 이라도 있더라면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오로지 그 시기를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남을 위해 손톱을 기르고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가짜가 넘쳐나는 속에서 혼자 진짜인척 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 진실로 받아 들여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그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뒤돌아보면 늘 꿈 속에서라도 다시 재현되는 그 시간이지만 한번 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오롯이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지금, 자신이 할 일이다. 그 시기를 힘들게 헤쳐 나가고 있는 그대들이여, 혼자가 아님을 옆에 누군가의 그늘이 있음을 직시하라.벽을 만들지 말고 허물어라.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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