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 윤대녕 산문집
윤대녕 지음 / 푸르메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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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에서 아홉이란 숫자는 참 애매하다. 무언가 꽉 차는 듯한 완성이 되는듯 하면서도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숫자처럼 한 살 한 살 더해가다보면 아홉이란 숫자에서 한참 헤매이게 된다. 스물아홉이 삼십대를 위한 준비처럼 머뭇머뭇하게 했다면 서른아홉 또한 마흔을 준비하는, 아니 이제 중년이란 나이로 접어든다는 생각에 괜히 우울하고 무언가를 더 늦기전에 시작하기 위하여 마음만 분주했던 나이였다. 그렇다면 마흔아홉이란 숫자는 그 감이 또 다를듯 하다. 쉰이라는 인생의 중턱에 서서 또 다른 고개를 넘어가는 기분은 작가가 글 속에서도 나타냈듯이 어느 작가는 절필선언을 하고 오지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 작가의 책을 읽으며 나이란 것이 참 묘한 감정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느꼈다. 나 또한 그런 힘든 고개를 한 두번 넘기도 했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책은 작가의 나이 마흔 아홉, 쉰으로 향하는 고개를 넘기 위한 '뒤돌아 봄' 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하다. 작가의 책들은 많이 가지고 있지만 아직 읽지를 못했다. 그저 눈구경으로 만족하며 기회를 잡지 못했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다른 책을 읽지 않은 것이 어쩜 다행이라 생각을 했다. 작가들의 에세이를 읽으면 소설과 소설사이에서 놓쳤던 '틈' 을 읽는 듯 하여 너무 좋다. 사소하면서도 그들이 글쓰기를 위하여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는지 그 마음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고 그들 또한 평범한 이웃집 누구처럼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나면 그의 작품에 다가가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그런면에서 이 책 속의 그의 이야기들은 ' 인간적인 윤대녕고 작가로서의 윤대녕' 을 함께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거기에 부록처럼 그의 '독서일기' 를 들여다볼 수 있으니 별미인듯 하다.

그의 고향은 내가 잘 아는 곳이라 정말 이웃의 이야기를 읽는 기분이었다. 그의 어머니의 고향 또한 내 어머니의 고향과 같다. 삽다리. 그래서일까 그의 이야기들은 가까우면서도 어쩌면 내 이야기일 수도 있고 잊고 있던 유년의 첫사랑을 만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핏속에 흐르는 역마살 때문일까 작가로 들어서기 위한 준비의 길처럼 그가 앓는 몸살이 읽어보지 못한 작품들과 빨리 만나 어떻게 작품으로 해소가 되었는지 느끼고 싶어졌다. 지금까지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였다면 이제부터는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되고 싶은 그, '이제부터는 한 그루 나무처럼 살고 싶다. 자기 자리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세월이 가져다주는 변화를 조용히 받아 들이며 가끔은 누군가 찾아와 기대고 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싶다. 겉모습은 어쩔 수 없이 변하더라도 속마음은 변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한 그루 나무처럼 말이다.' 지금까지의 방황은 어쩌면 한 그루 나무가 뿌리를 내리기 위한 자리를 보러 다닌듯 하다. 자신이 뿌리를 내릴 튼튼하고 흔들림이 없는 자리를 잡아 그곳에서 한 그루 나무로 뿌리를 내리기 위한 긴 터널을 지나 온 그의 지난날을 뒤돌아 본 시간속에는 누구보다 두드러진 여인들이 있다. 어머니와 아내.

어머니는 달성 서徐씨이며 이름은 외자로 란蘭이다.나의 필명이 서란인데 이 무슨 우연일까.그부분을 읽다가 깜짝 놀랬다. 그는 어머니의 두부 두루치기에서 잊지 못하는 어머니만의 맛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어머니가 만드는 두부 두루치기는 두부를 통째로 냄비에 물을 부어 따로 익힌 다음, 크게크게 썰어 접시에 올려놓고 나중에 양념장을 끼얹는다. 그리고 약간 덜 익힌 대파를 역시 크게크게 썰어 함께 올려놓으면 두부의 흰색과 대파의 파란색이 그대로 남아 있어 매우 깔끔하고 맛깔스러워 보인다. 또 고추장 대신 청양고추와 고춧가루를 많이 써서 탁한 느낌이 없고 맵되 입 안에 남는 뒷맛이 개운하다.' 그에게 어머니는 두부 두루치기처럼 잊지 못하는 맛과 색깔로 남아 있다. '특별하지 않기에 나는 오히려 어머니를 더욱 가슴 깊이 사모하고 있다. 그 평범한 속에 삶의 온갖 섭리가 깃들어 있는것이다.' 남과 달라서가 아닌 평범했기에 더 오롯이 가슴에 남아 있는 어머니, 역마살과 같은 여러번의 이사와 아들의 방황에도 늘 흔들림이 없으셨던 분, 그런 어머니를 기억하며 어머니를 추억하며 쓴 '달력과 어머니' 에서도 어머니의 성격이 들어나 있지만 어머니의 정 또한 듬뿍 담겨 있다. 그런 어머니의 품이 있었기에 그가 지금으로 성장하지 않았을까.

그가 글 속에 담아낸 아내 또한 그의 흔들림 없는 버팀목이 되어 주기엔 충분하다. 한달여동안 글쓰기를 마치고 돌아오면 구수한 된장찌개를 끓여 어제 나갔다 돌아온듯 냉이향이 진한 된장찌개로 맞이해 주는 작가의 아내, 자신은 글쓰기를 위하여 자신의 숨겨진 장소를 찾아 여행을 하지만 아내는 여행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또한 속을 잘못 드려다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말과 자신의 등단 때 사용했던 낡은 타자기를 버리지 못하고 서재에 보관하기도 하고 십여년을 쓴 낡은 노트북을 간직하자고 하는 아내, 떠나고 싶을 때 훌쩍 떠나 글을 쓰거나 혹은 글쓰기 위한 준비를 하고 돌아오면 늘 따듯한 보금자리와 함께 자신을 변함없이 기다려주는 아내가 있기에 그의 글쓰기 방랑은 이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가 말했듯이 어머니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고 '기다림' 의 시간이 있었기에 오늘날 그가 있지만 그 기다림의 시간이 무엇보다도 더 힘겹다는 것을 아는 그가 이젠 어쩌면 기다림을 종식시키지는 않을까.

'새삼스럽게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에 대해서. 한 순간 한 순간이 마치 축복처럼 다가왔다가 새벽의 그림자처럼 흔적 없이 사라져감을 생각해본다.' '나는 대용량 쓰레기봉툴르 가져와 종이상자 안에 있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 버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내가 가난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은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또한 '비밀이 없는 것은 재산이 없는 것처럼 가난하다' 고 하지 않았던가.'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실천하게 된 마흔아홉, 지금까지는 추억이나 그외 자신의 모든 것을 쌓아 두기만 하였는데 비우고 다시 새로운 것으로 채우기 위하여 그동안 꼭꼭 담아 두었던 추억을 버리는 것을 읽으며 나 또한 버리지 못하고 쟁여두기를 좋아하는데 쓰레기통을 잘 비울줄 알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 같아 내 나이 몇 년 후에 한번 추억을 비우듯 버릴것들을 정리해 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봤다. '오늘 버려진 것들이 앞으로 나를 만들어갈 것이다.' 라는 그의 인용문처럼 삶은 가끔 비우는 철학이 있어야 발전한다는 것을 느껴본다. 

작가의 에세이는 그 삶은 송두리째 들여다 보는 것 같아 거리감이 좁혀져 좋다. 소설로만 접하다 보면 무언가 딱딱하고 겉모습으로 굳어지는데 단단한 것을 이런 류의 책을 읽다보면 그를 말랑말랑하게 해 준다. 좀더 작가 속으로 비집고 들어갈 틈을 마련하게 된다. 뒤돌아보면 삶에서 극적이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으랴. 기쁘건 슬프건 모두가 극적인 순간들이고 그런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 가 존재하는 것 아닌가. 처음 마음이 흔들렸던 첫사랑의 여인도 자신의 터전이 되었던 어머니도 늘 기다림의 끝에 있는 아내도 모두가 삶의 순간들이며 자신의 삶을 지탱해준 고마운 존재들이다. 그 속엔 우연히 만난 친구도 있고 지인도 있고 모든 인연들과 순간들이 모여 지금을 이루고 있다는 행복한 뒤돌아봄이 공감이 간다.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 소설도 좋지만 작가의 에세이가 느낌과 틈을 접할 수 있어 더 좋다. 어쩌면 그가 지금까지 숨겨 놓았던 순수한 부분을 훔쳐 본듯 하여 뿌듯하다. 그의 인간적인 면을 들여다 보았으니 이젠 그의 소설들을 접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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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장미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3
캐서린 패터슨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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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양쪽에는 공동주택들이 얼굴을 찌푸린 거인들처럼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흐릿하게 서 있었다.어쨌든 바람막이는 됐다. 건물 사이의 좁은 틈에는 쓰레기가 엄청나게 쌓여 있었고, 악취가 하늘을 찔렀다.' 공동주택과 쓰레기더미, 소녀 로사는 허름하고 냄새나면서 그녀의 가족 뿐만이 아니라 모자라는 집세를 위해 다른 가족과 함께 가족처럼 살고 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와 언니인 애나가 나이를 속여 방직공장에 다니고 있지만 그들의 삶은 햇빛이 안드는 골방처럼 늘 어둡다. 먹을 거리가 부족한 그들에게 방직공장의 파업은 생을 포기하는 일과 같다. 한편 쓰레기더미속에서 잠을 자야하는 아버지가 있으나 술주정뱅이에 소년의 월급봉토나 노리는 아버지이며 부족하면 소년에게 매질을 가하는 아버지 보다는 냄새나고 춥지만 쓰레기더미나 교회등 밖에서 잠을 청하는 것이 편한 소년 제이크가 있다. 소년 또한 공장에 다녔지만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파업을 하여 부족하기도 하고 아버지의 술값으로 들어가던 돈 마져 끊겨 그는 빵가게며 교회등을 돌며 몰래 잠을 청하기도 하고 도둑질을 하기도 한다. 그런 소년이 쓰레기더미 속에서 잠을 청하려 하는데 소녀가 '낡은 구두' 를 찾으러 왔다. 둘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름도 모르면서.

학교에 다니는 로사는 담임선생님이 아끼는 최고의 제자이다. 하지만 그녀는 역사책 하나로 공부를 한다. 다른 과목의 책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 역사책도 과분하다. 다른 친구들은 역사책조차 없이 학교에 온다. 낡은 옷 한벌에 교과서도 없이 학교에 오는 아이들에 비해 선생님은 가난이란 것을 모르는듯 그녀의 옷차림은 그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고 비싸보인다. 밖에서 파업이 일어나 모두가 파업과 폭동에 관심이 모이지만 그녀는 그 모두가 관심밖처럼 보이고 그런 행동은 사회주의자들이나 하는 것처럼 집에 돌아가면 부모나 그외 식구들에게 파업에 가담하지 말라고 당부를 한다. 그러니 로사의 눈에도 엄마와 언니인 애나의 파업에 가담하고 그에 관한 이야기들을 주변 사람들과 모여서 이야기 하는 것이 불안하다. 그러지 않아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자신들이 먹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비참하게 줄어 들었고 어린 동생인 리치는 빵한조각 겨우 얻어 먹을뿐 우유는 구경조차 하지 못하고 자라 빼빼 말랐다. 그래도 자신은 우유를 먹고 자랐는데. 담임선생님 또한 가족이란 의당 남자가 밖에서 돈을 벌어와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다른 학생뿐만이 아니라 로사에게도 아버지가 밖에서 돈을 버는 것으로 생각을 하지 그녀의 가정사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모른다. '우드 씨가 뭐라 했는지 너도 알잖니. 공장에서 54시간 일하는 사람들한테 56시간 임금을 줄 수는 없어. 로사의 가슴속에서 뭔가가 딱딱해졌다. 하지만 그 사람은 집이 다섯 채나 있잖아요.' 노동자와 부를 지나고 있는 사람들의 차이가 너무 현격하게 들어난다. 노동자들은 공장주가 건립한 공동주택에서 그들이 벌어 들인 돈을 모두 집세를 내며서 겨우 나머지 알량한 돈으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임금삭감이라니, 로사는 지금 겨우 먹는 빵조차 잃을까봐 엄마와 언니를 말린다. '저 , 결심했어요. 엄마랑 애나 언니가 파업을 계속하면 저도 파업할 거에요.' 

만약에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엄마와 언니가 이렇게 거리로 내 몰리게 되었을까.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고 노래를 잘하는 엄마가 이런 삶을 살고 있었을까? '엄마가 부르던 노래가 아니라 영어로 된 다른 노래였다. 로사의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가사를 아는 걸까?' 파업에 끼여들지 않으려 했지만 엄마와 그외 주변사람들이 영어를 잘하고 글씨를 잘 쓰는 로사에게 피켓에 글씨를 부탁한다.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정말 어떤 말이 자신들의 지금 심정을 가장 정확하고도 적절하게 표현하는 말이 될지 고심을 하다가 그들은 생각을 해 낸다. '우리가 원하는 건..... 단지 우리의 배를 채워줄 빵만은 아닌 것 같아요 우리에게는 빵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죠. 우리는 우리의 가슴과 영혼을 위한 양식도 원해요. 우리가 원하는 건 - 그걸 뭐라고 해야 하나, 우리가 원하는 건, 그 뭐냐 - 푸치니의 음악 같은 거예요.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것들도 어느 정도 필요해요. 우리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위해서 말이죠.... 우리는 장미도 원해요......'  그들이 원하는 것은 '빵과 장미' 먹을것과 그 이외의 것이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기계처럼 노동만 하는 그런 동물적이 아닌 이탈리아인다운 낭만을 가미한 삶을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법은 누구 편도 들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게 말이 되나? 눈뭉치르 던졌다고 사람을 감옥에 가두다니.' 노동자와 그들을 제압하려는 세력들과 부딪치게 되고 그런 가운데 아이들은 안전한 곳으로 보내기로 결정을 한다. 뉴욕으로 가려던 로사는 시골스럽고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모여 산다는 버몬트 베러로 갈 곳을 바꾸었는데 뜻하지 않게 아버지가 죽은 것을 발견한 제이크와 함께 가게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무서움에 떠는 소년, 버몬트에 서류도 없이 몰래 왔지만 로사는 자신의 오빠라며 위기때마다 그를 잘 감싸준다. 그들이 가서 잠시 살게 된 가정은 노부부의 집으로 무척 부유하다. 그들이 상상도 못했을만큼, 하지만 그들에겐 아픔이 한가지 있다. 아들을 가슴에 묻었던 것.

노부부에게서 따듯한 집과 사랑과 먹을 것을 제공받지만 로사의 맘은 늘 로렌스에 있는 엄마와 그외 식구들에게 머무르고 제이크는 자신의 존재가 탄로날까봐 늘 노심초사 하며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모색한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노부부는 자신의 아들과 딸처럼 따듯하게 소년과 소녀를 먹이고 입히고 교육을 시킨다. 공부엔 영 관심이 없는 제이크는 제르바티씨를 따라 그의 석수공장에서 일을 하지만 언제 자신의 정체가 들어날까 걱정하다가 어느날 그곳을 빠져 나갈 기차표를 구하기 위한 돈을 훔치려다 제르바티씨에게 들켜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게 된다. 그런 자신을 경찰에게 넘기지 않고 예전처럼 대해 주는 그, 한편 로사는 다행히 파업이 잘 해결되어 엄마와 언니가 집으로 돌아가게 되어 그녀 또한 로렌스의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가방 가득 가족의 옷가지와 그녀의 옷으로 채워 주는 제르바티 부인의 정에 눈물을 쏟는 그녀, 그런 로사에게 제이크는 제르바티씨에게 자신의 모든 진실을 말했든 그녀에게도 털어놔 용서를 구한다. 로사가 집으로 돌아간 후 노부부는 제이크를 아들처럼 대한다. '어째서 얘한테 장갑도 안 사준 거요? 쟤 손이 얼마나 빨간지 좀 봐요.... 내가 이미 샀소..' 그의 따듯한 마음이 전해지는 장면을 읽으며 눈물이 흘러 내렸다. 죽은 아들을 가슴에 묻은 그는 '죽은 사람들이 잊혀지는게 싫다.' 라는 말처럼 제이크의 아버지의 비석도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죽어 있는 돌에서 새로운 생명인 장미 백한 수선화 등을 누구보다 뛰어나게 새생명을 만들어내는 예술가인 동시에 가슴이 정말 누구보다 따듯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빵이 넘치고 돌에서 장미가 자라는 새로운 삶, 그것을 향해 달리는 기분은 정말 야릇하고도 황홀했다.' 어쩌면 제르바티부인은 그들에게 먹을것인 빵을 만들어주었고 제르바티는 돌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장미' 를 피워냈던 것이다. 

소설을 읽고나니 언젠가 영화로 본 듯 한 기억이 났다. 너무도 오래전에 본 것이라 가물가물 했는데 소년이 도둑질을 한 후 던컨과 함께 조각품을 보러 갔던 장면이 생각이 났다. 1900년 초, 지금보다도 노동자들은 얼마나 많이 자신들의 노동력을 고용주들에게 착취를 당하며 살았을까? 생존권 보장도 안되는 열악한 환경에서 고용주들의 배만 불려주며 자신들은 쓰레기더미를 헤매고 다니듯 너무도 비참한 삶을 산 그들은 잡초와 같이 밟으면 밟을수록 강인해져 모두가 함께 모여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나갔다. 그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이나 그들의 아이들을 맡아 보살펴주었던 사람들, 어찌보면 남의 일이 아닌 우리의 현실일 수도 있는데 그런 속에서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가 씨실과 날실처럼 알맞게 얽혀 교육을 받아야할 청소년들이 교육보다는 나이를 속이며 삶의 현장에서 노예처럼 노동력 착취를 당하고 파업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파업에 뛰어 들면서 현실과 맞부딫히는 이야기는 청소년들에게도 도움이 되겠지만 누가 읽어도 가슴 따듯한 소설이었다. 인간이 빵을 먹어 배만 부르면 사는 것이 아닌 그 이상적인것, 장미의 향과 같은 인간의 따듯한 정과 서로가 서로를 감싸는 연대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장미의 향기보다 더 진한 것을 선물 받은듯 하다. 엄마를 잃고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사는 제이크가 끊임없이 죽음으로부터 도망쳐야 했던 불안한 삶을 제르바티가 그에게 보금자리가 되어 주었듯 음이 있으면 양이 있듯 아직은 따듯한 사람이 더 많고 혼자가 아닌 뜻이 통하는 사람과 뭉치면 세상은 더 살맛이 나는 곳이된다. 자신의 외모에만 치중했던 선생님이 반아이들 모두에게 도시락을 제공하고 파업으로 먹을것이 없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주고 그들의 머리가 되어 준 사람이며 그들의 아이들을 잠시지만 자신이 아이들처럼 맡어서 보살펴준 그들이 있어 가슴을 따듯하게 해 주는 스프처럼 읽고나면 가슴이 훈훈해지며 가족의 소중함을 더 느끼게 해 주는 소설이다. 사춘기 딸들에게도 권해 읽어보게 해 장미의 향기를 느끼게 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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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새롭게, 지선아 사랑해
이지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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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선물입니다.' 
사고를 당하여 한번 크게 병원신세를 가져본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얼마나 감사하고 덤으로 사는 삶인지를 알게 된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면 지난날보다 더 감사하고 고마워하며 알차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선씨 그녀, 의사도 포기한 삶이었지만 스스로 이겨 고치에서 벗어나 화려한 날개짓을 하고 있는것 같아 참으로 가슴 따듯해지고 감동적이면서 눈물을 머금고 읽어 나가다 너무 목이 메어 중간에 책을 덮고 말았다. 나 또한 큰 사고를 07년엔 산행사고로 간신히 빗겨간 생과사의 길에서 행운적으로 생의 길을 선택받게 되었고 09년엔 교통사고로 아차 하는 순간, 죽음이 눈 앞에 왔지만 정말 운명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병원신세를 오래도록 지며 내게 주어진 삶은 '이제부터는 덤이야, 감사하며 살아야 된다는 것을 느꼈어.' 라며 남편이나 그외 친구들에게도 많이 하던 말들이 생각나고 병원에서 혼자서 고통과 싸웠던 시간들이 생각나 계속 읽고 있을 수가 없었다. 옆에 간병인으로 남편이나 가족들이 있다고 해도 환자의 고통을 모두 느낄 수는 없는 것이다. 그 고통은 정말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다. 그런면에서 그녀가 10여년 동안 감수했을 고통과 통증 그리고 사고전과 사고후의 변화에 긍정적이면서 선물처럼 받아 들이며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듯 하여 너무도 감사했다.

사고가나면 사고나기 그 전 시간으로 시계를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 한두번이 아니다. '만약에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내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정말 몇 번이고 생각해 보기도 하며 '왜 유독 내게만 이런 일이...?' 하며 자책해 보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 모든 여울을 지나 더 큰 바다로 향하는 힘을 안겨주기 위한 시험의 길인지도 모른다. 달게 받으면 고통 또한 내겐 그저 한때 내리고 마는 소나기와 같다. 하지만 그 고통을 내 전부로 여겨 그 긴 터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 삶은 햇빛이 비치지 않는 것처럼 암흑으로 변해 버리고 만다. 내 혼자만 그렇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가족의 삶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변하고 만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것은 고통과 지금 현재를 받아 들이는 환자의 마음자세가 중요한 것 같다.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면 그때부터 고통은 잘게 부서져 나가기 시작이다. 날마다 한가지씩 희망과 감사를 찾다보면 내 삶이 모두 감사이고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큰 희망이고 감사가 된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작은 일들이 환자 당사자에게는 너무도 큰 감사가 되어 삶을 더 보람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지선 그녀, 너무도 잘 고통의 터널을 벗어난 듯 하여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고 싶다. '오빠, 나 이러고 어떻게 살아. 나 죽여줘.' 진심이었을 것이다. 사고 당시 몸 전체의 반 정도가 3도 화상에 의사도 포기한 생명이었는데 그녀만이 홀로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생을 쥐었다. 사고 이전으로 똑같이 되돌릴 수 없겠지만 두 개의 얼굴, 두 개의 삶으로 나뉜듯 하겠지만 너무도 대단하게 아픔의 고치를 벗어버린듯 하여 대견하고 정말 곁에 있다면 안아 주고 싶은 그녀이다. 물론 곁에서 늘 함께 재활치료를 해 준 '오까' 도 있고 그녀를 24시간 바늘처럼 따라다녔던 엄마의 정성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그녀가 있겠지만 환자 자신이 강인한 마음을 먹지 못한다면 고통은 영원히 벗어버릴 수 없다. 내가 교통사고로 입원해 있는 동안 함께 있던 어느 젊은 아줌마 환자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 스스로 심한 천식증세도 보이며 같은 방 식구들은 물론 간호사들을 바짝 긴장하게 만들었다. 숨도 쉬지 않고 죽으려 하듯 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희망적인 말을 해주며 다독여주니 그녀 스스로 호흡을 천천히 뱉어내기 시작하고 마음의 문을 열며 살아야겠다는 희망을 다졌다. 그런 그녀가 밥도 잘 먹고 애들도 병원에서 잘 돌보며 하루빨리 병원생활을 마감해야 겠다며 다짐하던 웃는 얼굴이 생각난다. 스스로 희망을 찾지 않는다면 옆에서 아무리 희망을 찾아 주어도 본인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런면에서 스스로 파도를 이겨내며 큰 바다로 항해를 나가는 것과 같은 삶의 변화를 열심히 시도해 나가며 노력하는 그녀의 변화된 삶의 이야기는 우리에겐 '희망이고 감사' 이다. 

'사고구나... 사고가 났었구나!. 내가 다친거구나... '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의 그 기분은 놀람이나 당황스러움보다는 공포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내가 사고의 피해자이고 사고나던 순간이 계속 떠오르면서 그 공포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면 재활하는데도 진전이 없다. 공포, 눈만 감으면 떠 오르는 사고의 순간을 빨리 자신에게서 떨쳐버리는 것이 새로운 내 삶을 받아 들이고 사는데 더 도움이 된다. 교통사고이후 나 또한 한동안 차가 많이 오가는 길에 나가면 움츠러 들어 한발짝도 꼼짝할 수 없음을 느꼈다. 빨리 그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몸은 머리와 다르게 행동해서 한동안 고생을 했는데 차츰차츰 잊어가며 늘 새로운 '오늘' 과 악수하다 보니 그 또한 내 삶이 일부이며 넘고 나면 또 다른 '눈' 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보지 못하던 세상을 보여주기 위한 단계였는지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자신을 비관하고 받아 들이지 못하는 것보다는 자신을 받아 들이며 어떻게 살아갈까를 변화된 내가 가질 수 있는 새로운 눈에 적응하여 나를 새롭게 변화시킨 그녀의 이야기는 정말 대단하다. 정상인들도 하기 힘든 일을 거뜬히 소화해 내는 그녀를 누가 30여번의 성형수술 중독자라고 할 수 있을까. 좋은 말로 중독자이지 그녀의 살기 위한 몸부림은 정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따랐을 것이다. 힘든 순간은 지나고 이제 웃을 수 있는 희망만 있다고 생각을 하면 나 자신 또한 변화할 수 있다. '귀엽다' 라며 자신을 받아 들이는 행복한 그녀의 모습이 낯설거나 이상한 사람이 아닌 '이지선' 으로 우뚝 설 수 있어 나 또한 희망을 충전할 수 있는 책이라 좋았다. 정말 영화였다면 영화속 주인공으로 잠깐 분했었다면 어떻게 변했을까? 영화가 아닌 현실의 이야기라 더 마음이 아프고 따듯해지고 삶에 더 감사해야 됨으 느끼게 해 주는 그녀의 이야기에 눈가가 촉촉해졌다.

'모든 생명에는 사명이 있다고 믿습니다. 정말 전쟁터와 같았던 중환자실에서 살아서 나오면서 제가 전우라고 부르는 그분들의 소중한 생명을 기억하며 저는 이제 숨 쉬는 동안 제게 맡겨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내리라 그렇게 다짐했습니다.' 내 피부보다 더 단단한 피부를 가지게 되어서 그런가 그녀의 마음과 다짐이 당차고 단단해졌다. 그녀는 사고이전으로 되돌아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느끼고 받아 들인 세상이 다르기에 지금의 삶에 더 감사하게 된 그녀가 정말 멋지다.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없었던 순간에도 나를 사랑해준 이들 때문에 나는 나를 감히 버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 싸움의 승리가 결국 나의 것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한참 이쁘게 꾸미고 가꾸고 자신이 삶보다는 다른 것에 더 신경쓸 나이에 그녀는 스스로 벗어나야 할 커다란 고통의 터널을 지나서인지 참으로 야무지고 누구보다 단단하게 여물어졌다. 그녀가 펼칠 앞으로의 멋진 그림이 기다려진다. '지선아, 사랑해. 힘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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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주례사 -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남녀 마음 이야기
법륜스님 지음, 김점선 그림 / 휴(休)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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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라는 것이 어디서 오느냐? 를 자세히 살표보는 거예요. 결국 외로움은 우리가 마음의 문을 닫았을 때 생겨납니다.'  법륜스님의 주례사라 하지만 주례사 보다는 남녀사이에 아니 부부간에 정말 보약같은 말씀이 담겨 있어 공감을 하며 읽었다. 이제 결혼을 결심한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결혼생활이 어느정도 지나고 한참 밋밋하다고 아니 내가 함께 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나 그외 감정들이 있다면 한번 읽어보면 좋다. 외로움 또한 마음의 문을 닫았을 때 생겨난다고 하지만 모든것은 사람사이에 감정이 교류하는 '마음' 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사랑 또한 달라진다고 본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결심한 결혼을 오래가지 못할 수도 있다고 본다. 마음을 얻지 못하고 믿음만으로도 살 수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마음을 얻지 못하면 모두를 취하지 못한 것처럼 언젠가는 금이 갈 수 있다. 

우리도 처음 결혼을 결심하고 우리 의사와는 상관없이 남자쪽에서 궁합을 보았다. 좋지 않다며 그리 좋은 표정들이 아니었지만 난 그런것을 믿지 않기에 그 궁합이 어떻게 변할지 보여주겠다며 남편과 결혼을 하고 지금은 이십여년을 바라보고 있지만 무리없이 잘 살고 있다. 그렇다면 결혼을 첫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궁합' 때문에 헤어지거나 좋지 않은 마음을 가질 필요는 없는 듯 하다. 그런 일로 헤어지는 사람들도 있는듯 한데 그게 상관이 있는 사람들에겐 필요하겠지만 서로의 마음이 중요한듯 하다. 서로 굳게 믿는다면 미래는 자신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결혼을 하기 위하여 남자나 여자에 많이 따지는 것은 인물 재력 능력등 겉모습에 치중을 많이 한다. '사랑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살아 보면 사랑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알게 될 거다.' 사랑만 있으면 모든게 가능하리라 보며 무모하게 결혼을 서두르기도 한다.그러다 보면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날 수 있다. 남들은 정말 쉽게 결혼을 한듯 한데 유독 나만은 무척이나 결혼이란 것이 어려운 관문처럼 여겨지고 결혼이란 환상이 점점 깨지게 된다. '사람들이 복 많다고 하는 일에는 반드시 과보가 따릅니다. 돈도 있고, 인물도 괜찮기 때문에 이런 남자는 이성 문제가 끊이질 않습니다.' 욕심을 낸 부분이 있다면 그에 대한 댓가를 치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전에는 왜 얼굴도 보지 않고 결혼을 해도 잘 살았을까? '시집가면 죽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죽었다 생각하고 시집을 가보니 그래도 생각보다 살 만하니까 웃고 사는 거예요. 반면 요즘은 시집가고 장가가면서 '좋은 일이 생기겠지.' 라고 기대하고 갑니다. 하지만 결혼해서 함께 살아 봐도 별볼일없으니까, 괜히 결혼했다고 후회하는 겁니다.' 너무 많은 부분을 기대했기에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거기에서 오는 틈을 메우지 못하고 헤어지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지만 결혼은 어쩌면 서로에 대한 믿음이다. 그 믿음이 깨지지 않기 위해서는 배려하고 이해하고 서로를 존중해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여자는 남자가 돈 벌어오는 기계로 남자는 여자를 돈만 아는 사람으로 취급을 하다보면 서로의 콩깍지는 금방 벗겨지고 환상이 깨지면서 서로의 단점을 장점으로 채워나가지 못하여 힘든 결혼생활을 하기도 한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선택이 주는 행복과 불행은 달라집니다. 자기의 삶을 늘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고 늘 놀이로 생각하세요. 이게 가능할 때 인생도 행복해집니다.' 서로 단점만 보여 나의 결혼생활은 남들과는 다르게 너무 불행하다고 생각한다면 앞으로는 '행복만들기' 를 하며 살면 된다. 행복과 불행은 생각하기에 달려 있다. 모든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데 너무 자신을 너무 높은 곳과 비교 하며 산다면 그사람은 영원히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밑을 보고, 나보다 못한 아래를 바라보면서 서로에게 행복한 순간이 없다면 하나씩 만들어가며 산다면 자신도 행복해 질 수 있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우리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불행한 순간들이 있다. 보여지는 겉모습만으로 모두를 평가할 수는 없다. 무척 힘들게 사는것 같지만 마음이 여유롭고 행복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들 사이엔 믿음이 강하다.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또 다른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긍정적인 마인드' 를 가진다면 인생이 무한히 행복해 질 수 있다.

'이렇게 흘러가는 삶 속에서, 괴로움이 끊이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어요. 바로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을 버리지 못하면 그사람은 늘 불행하고 괴롭고 자신이 제일 못나보인다. 하지만 자신의 양손에 쥐고 있는 욕심을 내려 놓고 마음을 비우는 순간, 나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는듯 세상이 달라 보인다. 그런 순간을 나 또한 여러번 느꼈다. 쪼들리고 있지만 부모님께 조금 보태드려야 할 때, 그 돈은 내것이 아니고 아예 없었던 돈인듯 그냥 얼른 이체 시켜 드리고 나면 한결 가볍다. 세상의 짐을 모두 벗어 버린듯 홀가분하다. 비록 쪼들리며 조금 부족하게 살아야 하지만 마음은 행복하다. 하지만 욕심을 내고 있다면 결코 보탬을 드릴 수가 없다. 내것이 아니라고 비우는 순간, 행복은 내게로 온다. '무엇을 선택하든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욕심을 부릴수록 과보는 클 수밖에 없어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얻으려고 할수록 큰 화를 불러온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상대에게 받으려는 마음부터 줄여야 합니다.' 요즘은 연세가 많으신 부모님들도 재산을 가지고 있어야 자식들에게 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자식들은 부모님에게서 유산을 조금이라도 더 물려받기 위하여 앞에서는 잘하는듯 하면서도 뒤에서는 계산을 한다. 하지만 얻으려고 하지 않고 진심에서 우러나 한다면 '현대판 고려장' 같은 이야기도 없을 것이다. 부부사이에도 마찬가지이고 물론 부모와 자식간에도 마찬가지일터 모두의 사이에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결혼하는 사람들이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고 흔히 착각하기 때문에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한 겁니다. 단지 내가 사랑할 뿐이에요.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의 몫이지, 내가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를 좋아하고 사랑하니 내가 행복할 분인 거에요.'  내가 사랑한다고 상대가 사랑해줄 것이라, 아님 사랑을 강요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무리하게 요구한다는 것은 마찰을 빗게 된다. 하지만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베푸는 사랑은 언젠가는 자신에게 사랑이 되어 다시 돌아온다. 이렇듯 이 책에는 좋은 말들이 너무도 많다. 사랑에 아니 결혼생활이나 그외 남녀사에 양념이 되고 맛을 가미할 수 있는 다양한 말씀이 김점선 화가의 이쁜 그밀과 함께 하니 더 좋다. 책장에 꽂아 놓고 생각날때마다, 아니 마음이 더러워졌다고 생각이 들 때 꺼내어 읽어 본다면 좋을 듯 하다. '인간도 이와 같이 흔적을 남기며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생선을 묶었던 새끼줄처럼 비린내가 나는 사람도 있고, 향을 쌌던 종이처럼 향내가 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나간 인생은 다 흘러가 버린 줄 알지만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쌓이게 됩니다.' 흔히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라고 하는데 아이들이 내 못난 것을 따라하기 전에 향내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욕심을 버러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며 좀더 행복을 만들어 가기 위하여 노력하며 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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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 도종환의 산에서 보내는 편지
도종환 지음 / 좋은생각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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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봉선이 앙증맞게 귀여운 봉오리를 손끝으로 가만히 건드려보다가 나도 이제는 내 빛깔을 조금 낮추기로 합니다. 강렬한 빛에서 담담한 빛깔로 옮겨가기로 합니다.' 정말 그 산방에 가고 싶어지게 만드는 책이다. 언젠가 티비에서 '집배원과 시인' 인가 하는 제목으로 작가의 일상이 나온적이 있다. 한참이나 그 속에 갇혀 눈을 떼지 못하고 보았던 적이 있는데 사람이 드문 곳에서 그가 세상소식을 접하는 것은 '집배원' 과의 소통이었다. 그 집배원 아저씨는 세상소식만 물어다주는 반가운 사람이 아닌 '정' 까지 듬뿍 나누어 주기도 하였는데 글 속에도 그 나눔의 정이 나타나있다. 자연속에서 산다는 것은 자신을 자연과 맞추어 사는 것인지 모든것들의 주인양한다는 것은 아직도 자신이 빛깔을 낮추지 못한것, 덜어내지 못한것으로 본다.

나 또한 산행을 못하는 체력이라 산을 즐긴지는 얼마되지 않는다. 처음 첫발부터 천천히 갈 수 있는 곳까지 오르며 다른 사람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는 것이 아닌 내게 전적으로 나를 중심으로 하며 리듬을 맞추어 가다보니 나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자연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내 눈 높이를 낮추어야 볼 수 있는 자연에 반하기 시작하면서 산은 그야말로 내 전부처럼 느껴져 가지 못할때는 몸살이 날 정도이고 한번 다녀오면 한마디로 저질 체력 때문에 몸살이 나는 사이클을 반복하면서도 다시금 산으로 향하는 것은 자연속에 있으면 겸허해지고 나 자신이 너무 작고 모두가 대등소이해지며 철마다 그들이 가르쳐주는 것들은 정말로 엄청났다. 초보 산행꾼에게도 산과 자연을 그렇게 다가왔으니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에게는 자연은 어떠할까. 그의 글을 읽다보면 내가 느끼고 보았던 것들이 모두 담겨 있는듯 하여 너무도 좋았다.

이 책은 가을이 깊어 지고 있는 나무숲 의자에 앉아 가을바람과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읽었다. 정말 자연속에서 자연과 벗하며 살고 자연의 이야기로 쓰여진 글들을 읽다보니 그대로 그 순간에 놓여있는것만 같은,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그 속으로 들어간듯한 이상한 감정이입에 빠져 들게 되었다. 한참 지금 산에 분홍빛 노란빛 물봉선이 피어 있는 시기라 그런지 그의 글들은 내 눈 속에 풍경이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듯 하여 산으로 달려 가고픈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는 날마다 다섯알씩 밤을 나누어 먹는 다람쥐도 친구이고 주인이 없는 집에 내려와 마당을 헤집어 놓은 산짐승도 친구가 될 수 있고 가끔 산나물을 뜯으러 오르내리는 분들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곳이며 아침이면 자명종처럼 노랫소리로 아침잠을 깨워주는 산새 또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도회지에서 가졌던 욕심이 필요할까. 두 손안에 쥐었던 것도 놓아야 비로소 자연을 자연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있는 산방, 그곳이 왠지 부럽기만 하다. 무엇이 이유가 되었건간에 누구나 마지막 소망은 '전원생활' 이 로망처럼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몸도 마음도 자연과 더불어 살찌우는 시인이 세상에서 제일 부자처럼 느껴졌다.

' '선생님, 그냥  두 글자로 된 거요.' . 나는 어묵, 튀김, 라면,김밥, 만두.. 이런 두 글자들을 떠올리다. '그래, 좋다. 사줄게.' 하고 대답을 하고 학교 근처 식당으로 몰려갔는데 문을 들어서며 큰 소리로 음식을 주문하는 미란이의 목소리, '아줌마, 우리 탕슉!' ' 정말 '빵' 터졌다. 요즘 아이들을 어찌 당하랴. 두 글자 정확하게 맞다. 삶이란 내가 예견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외도 있는 것이다. 자신이 세상에서 선생님을 했다고 하여 자연속에서도 모두가 그를 '선생님' 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아직 그런 마음을 버리지 못하였는지 새소리마져도 '선생선생선생..' 하고 지저귀는듯 듣는다. 자연속에서는 그가 꼴찌일 수 있다. 선배들에게 배워야 하고 자연에게 배워야 그 속에서 정착하고 그들의 일부가 되어 살 수 있을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그 속에 들어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상에서 내가 가졌던 지위와 부는 자연속에서 아무가치도 없다. 두발로 흙위에서 서기 까지는 내 온전한 힘과 그들과 적절히 힘의 균형을 맞추어야 하지 내가 가진 어깨의 힘이 아닌것이다. 

'상처없이 어찌 봄이 오고, 상처 없이 어찌 깊은 사랑이 움트겠는지요.'
'처음 이 산에서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는 황량하고 스산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입을 꽉 다물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봄을 맞을 때는 너무도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맞은 봄이라 진달래꽃을 보고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세 번째 봄을 맞을 때는 뒤뜰의 산벚나무를 보며 '절망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듯/ 희망도 무서워할 줄 알' 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네 번째 봄을 맞으면서는 소생의 힘에 대해 생각했고 고마워 봄 햇살에 절했습니다. 이제 또 봄을 맞으며 나는 다시 고요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무들처럼 자신의 표피를 벗어내며 더 단단해져 가는 방법을 그가 봄을 맞으며 깨달아가는 과정속에 모두 담겨 있다. 그의 글들을 읽다보면 정말 마음이 '청안' 해 진다. '그러나 돌아오면 늘 잘 왔다는 생각을 합니다. 산방에 와 있으면 마음이 다시 청안해집니다. 맑고 편안해집니다. 이 숲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나를 부른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끄러운 소음이 적당히 길들여진 사람이 적막한 숲에 적응하며 살기란 힘든 것이다. 한 두번 산행을 하거나 산에 갈때는 물론 좋다고 느낄 수 있지만 그곳에서 자연과 적응하며 자연에 순응하며 산다는 것은 여러모로 불편하고 힘든 것이다. 하지만 자연속에서 몸은 점점 자연과 닮아가고 자연과 같이 해마다 나이테를 가지듯 편안해져 가는 그의 글 속에서 문득 지금의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며 너무 많은 것을 욕심내며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글을 읽는 것만으로 내 짐을 내려 놓듯 마음이 편안해져서 좋다. 다람쥐가 밤 알 다섯개를 먹기 위하여 찾아 오는 툇마루에 앉아 그와 생강나무꽃차를 한 잔 마시며 많은 대화가 아닌 눈빛만으로도 족할 그런 시간을 나눈 듯한 마음이 맑아지는 산방 이야기는 마음이 때를 씻어 준것처럼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숲 초대장을 받고 바로 달려가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다.

'아니, 이 녀석들이 진짜, 이렇게 마당을 파 헤쳐 놓으면 어떻게 해,' 하고 잔소리를 칩니다. '누가 여기에다 똥을 싸놓았어.' 하고 주위를 둘러 보지만 아무도 손드는 녀석이 없습니다.' 자연과 내가 살아가는 길은 기생이 아닌 '공생' 이다. 가끔 마당에 와서 똥을 싸 놓아도 밭을 헤집어 놓아도 그녀석들의 터전에 내가 들어와 사는 것이기에 나의 일부를 내어주며 그들과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아야지 그들의 길을 막으며 살 수는 없는 것이다. 헛웃음만 나오는 부분을 읽다가 마당에서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생각해 보니 웃음이 그치지 않고 나왔다. 누가 손들겠는가. 내 마음을 비워야지. 마음을 비우는 방법을 그들이 알려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 창밖에는 풀풀 눈발이 날리는데 나는 배춧국 한 그릇에 이 저녁이 행복합니다. 다른 이들은 어디서 무얼 먹으며 행복을 찾고 있을까요.' 나 또한 요즘 친정엄마가 주신 시래기로 시래깃국을 끓여 먹으며 국 한사발로 행복을 느끼고 있다. 내가 족하면 세상이 다 내것이 되는 것이지 나의 행복은 남이 가치를 따져 준다고 행복도가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모든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처럼 작은 것 하나에도 늘 감사를 잊지 않는 그의 삶을 보며 나의 하루를 되돌아 보게 되었다. 나의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그리고 간접적이지만 그의 숲의 초대되어 '배춧국' 한사발 먹고 나온 듯한 개운함과 포만감이 일시에 몰려오는 행복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더 가을 숲에 가고 싶어지게 만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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