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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란
현기영 지음 / 창비 / 2009년 8월
평점 :
우리가 바꾸려던 세상이 도리어 우리를 바꿔버렸다...
시대의 아픔이 묻어나면서 그 시대에 대하여 작가의 할말이 너무도 많은 듯 보이는 책이다. 책 속의 시대상을 살아온 386, 나 또한 그 시기를 거쳐왔기에 공감하는 부분이 더 많은 듯 하다. '고비와 카클라마칸, 두 사막 사이에 한때 크게 번창했던 옛 왕국 누란을 삼켜버린 그 가없는 모래바다, 모든 것이 죽고 모래폭풍과 인광들만이 살아 움직이는 곳이었다.'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80년대 대학을 다닌 허무성, 잔혹한 고문속에 겁똥을 싸며 동료들을 모래폭풍에 휘말리게 한 그, 모두가 등을 돌리며 떠나가고 그마져 그에게 심한 고문을 가했던 김일강의 허수아비처럼 그가 조정하는 대로 움직이듯 그가 펼쳐 놓은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그의 판에 박힌 듯한 삶이 어느 순간 서서히 그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친다.
작가의 작품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읽어보지 않아서인지 조금 낯설게 느껴졌지만 곧 그의 독설에 휘말리듯 모래바람에 거세게 휩쓸려가듯 허무성의 삶속으로 녹아들어가 김일강의 작품이 아닌 '허무성 자신의 삶'을 살라고 나 또한 그의 곁에서 독설을 해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한다. 겁똥을 싸게 만들던 심한 고문을 하던 김일강과 술친구가 되고 그의 동지가 되듯 대학교수가 되어 그가 펼치려는 역사에 동참하려던 허무성, 김일강이라는 모래바람에 한번도 발뺌을 하지 못하던 그가 마침내 자기 자신을 보게 되고 '아니오'를 외치며 자신의 삶으로 돌아갈때 모래바람이 멎는듯 했다.
그와 함께 운동권에 몸 담았던 문정선, 그녀 역시나 실패한 삶으로 다시 허무성과 만나 가정을 이루지만 자신이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낙오자로 그의 곁을 떠날때 우리의 현실을 보고 있는 듯해옴은 무엇인지. 지금의 내 아이들에게 그 시대를 말하면 그런 시대가 있었는지 되묻는다. 역사는 역사로 존재하는것처럼 현재와 이어져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지나는 세대에게 작가 나름 파고들려 노력한 독설이 맘 아프게 전해진다.
'허무성, 우린 같은 꿈을 꾸고 있어. 우린 닮은꼴이야. 내가 널 만들었고, 네가 날 만들었어. 너의 머릿속에 내가 박혀 있는 것처럼, 나의 머릿속에 네가 박혀 있어. 누가 고문자이고 누가 피고문자이지? 우린 같은 사람이야. 샴쌍둥이, 운명적으로 한사람이야.' 피해자나 가해자나 모두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는 현실속에서 '모든 관계를 끊고 과감하게 추락을 향해 몸을 던지는 것, 구조조정을 당할 게 아니라 스스로 그 구조, 그 체제를 탈퇴하는 것이 필요했다.' 라고 하며 모든것을 버리고 자신만의 삶으로 돌아가려는 그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고문의 공포와 동료를 배신하였던 죄책감으로 정신적 육체적 트라우마에 시달렸던 허무성, 오랫동안 드리워졌던 족쇄를 벗어버리고 세석평전으로 떠나는 그의 뒷모습이 결코 절망이 절망으로 끝나지 않아 다행임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