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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개정판
피천득 지음 / 샘터사 / 200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금아琴兒 피천득,그를 만난것은 중학교 국어교과서인가 '인연'과 '서영이와 난영' 이를 통한 너무도 맑고 깨끗하면서도 딸에 대한 각별한 사랑이 담긴 '부정'을 생각케 해주었던 수필들이다.그의 수필이란 수필에서도 잘 나타나있듯이 그가 글을 쓰는 마음,자세,깊고 오묘한 맛이 잘 들어나 있다
수필..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수필은 난이요,학이요,청초한 몸맴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수필은 청춘의 글이 아니요,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니아요,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17p
수필은 독이다. 소설가나 극작가는 때로 여러 가지 성격을 가져 보아야 한다.셰익스피어는 햄릿도 되고 폴로니아스 노릇도 한다.그러나 수필가 램은 언제나 찰스 램이면 되는 것이다.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다.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에게 친밀감을 주며,친구에게 받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 -18p
수필은 솔직한 글이며 친구에게 받은 편지와도 같은 글이라고 했다. 마음을 탁 터 놓고 누군가에게 자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가듯이 그저 내마음이 가는 대로 솔직하게 쓴 글, 그의 수필들을 읽고 있으면 앞에서 언급한 것들이 거짓이 아님이 분명히 들어난다.
어릴적 읽었던 글이 다시 읽고 싶어 그의 수필집 '인연'을 사들고 가만히 보니 옛날 생각도 난다.중학교 국어시간에 서영이와 난영이란 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열정적으로 하셨던 국어선생님도 생각이 나고 '인연'이란 글에 나오는 '아사코'라는 일본 여인 이름도 생각이 나고 풋풋하던 내 사춘기적 생각도 함께 묻어나서 더욱 좋았다.그시절엔 한국단편소설이나 세계문학집등 책에 빠져 정말 날이 새는지도 모르고 책을 읽었던,책이 정말 좋았던 시절이었는데 어느새 살면서 삶에 때가 묻은것인지 너무 책을 멀리하며 살아왔다. 솔직함을 잃어버린 시간들인지도 모른다. 살면서 얼마나 처세를 잘 하고 살려고 책방에 들러 가끔 떠들어보는 책들은 처세술에 관한 책들이 많았던것 같다.순수함을 잃어버린 어린왕자처럼 길을 잃고 헤매인것 같다.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나름 참으로 많은 생각을 가져다 주었다.
봄.. 나는 음악을 들을 때, 그림이나 조각을 들여다볼 때, 잃어버린 젊음을 안개 속에 잠깐 만나는 일이 있다. 문학을 업으로 하는 나의 기쁨의 하나는,글을 통하여 먼발치라도 젊음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무엇보다도 젊음을 다시 가져 보게 하는 것은 봄이다.
-28p
오월...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믈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여 있는 비취 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어느덧 짙어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진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 34,35p
그는 오월에 태어나서인지 오월과 봄 그리고 신록에 대한 예찬이 많다.그런 의미에서 그의 글들이 더욱 깨끗하고 백자 항아리를 보고 있는 것처럼 맑음이,청자 항아리를 보고 있는 것처럼 고귀함이 묻어나는지도 모르겠다.그의 수필을 대하고 있노라면 한폭의 그림이 그려지기도 한다. 읽은 문장을 다시 소리내어 읽어 보고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다시 음미해 보아도 넘 좋은 어감,읽는 사람의 마음이 깨끗해지는 숲 속에 있는듯한 느낌이다.
여성의 미.. 여성의 미는 생생한 생명력에서 온다. 맑고 시원한 눈, 낭랑한 음성,처녀다운 또는 처녀 같은 가벼운 걸음걸이,민활한 일솜씨,생에 대한 희망과 환희,건강한 여인이 발산하는,특히 젊은 여인이 풍기는 싱싱한 맛, 애정을 가지고 있는 얼굴에 나타나는 윤기,분석할 수 없는 생의 약동,이런 것들이 여성의 미를 구성한다. - 43p
요즘 우리 여성의 미의 기준은 외모,특히나 s라인이나 44사이즈를 강조하는 요즘 세대들이 읽으면 어디 하나 미인이란 구석이 없을듯 한데 글 만으로도 힘과 생동감이 넘치며 금방이라도 맑고 쾌활한 미인의 웃음소리가 파란 하늘에 울려 퍼질 듯 하다.다이어트로 인하여 생생한 생명력보다는 어딘가 모르게 생명력이 죽어 있는 듯한 그러면서 성형지상주위처럼 너도나도 비슷한 외모와 옷 모양새,싱싱한 맛이 없는 윤기 없는 얼굴, 하지만 글만으로도 생동감이 넘친다.글 속의 그녀가 금방이라도 맑게 세수를 하고 뛰쳐 나올것만 같다.
금반지.. 나에게는 세 가지 기쁨이 있다.첫째는 천하의 영재에게 학문을 이야기하는 기쁨이요,둘째는 젊은이들과 늘 같이 즐김으로써 늙지 않는 기쁨이요,셋째는 거짓말을 많이 아니하고도 살아 나갈 수 있는 기쁨이다.이런 행복한 생활을 해 오기에는 내조의 공이 큰 바 있다. -87p
표현이 부족한 남자라 하더라도 이렇게 몇 줄로 아내를 감동시킬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리요.작가는 아내에게 특별히 잘 해주며 일생을 살지는 안했지만 예전에 반지를 두 번 산 일이 있는데 그 반지들을 팔아 생활에 보탬을 하며 반지가 줄어가며 나중엔 금반지에서 은반지로 바뀌어 반짇고리에서 굴러다니는 것을 보고는 10년 근속 기념품으로 받은 금반지를 아내가 결혼반지 삼아 끼고 다녔으면 하는 바램을 표현했다.그의 수필들 속에는 많이 가져서 부자가 아닌 마음이 부자라서 부자이며 행복이 묻어나는 글들이 내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초대... 내 책들이 집에서 나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책,영감을 주는 책,의분을 느끼게 하는 책,그저 재미있는 책,스피노자의 전기는 나를 승화되는 경지로 초대합니다. 그리고 음악이 있습니다.위버는 나보고도 무도회에 오라고 합니다. 스트라우스는 나를 비엔나 숲 속으로 데리고 갑니다.한밤중 총총한 별들은 저 아득한 성좌星座 그리로 나를 초대합니다. - 249p
문득 '초대'란 그의 수필을 읽으며 그가 나를 작가의 수필세계로 초대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마음을 비우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상태로 그의 백자와 청자 같은 맑은 수필속에 몸을 담가 나 또한 백자 비슷하고 청자 비슷한 몸으로 재탄생 된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의 수필을 읽고 있는 순간만이라도 깨끗해졌으니 혼탁함에 물들어 금방 맑아지지는 않겠지만 그의 수필은 잠시 혼몽함에 빠져 있던 내게 신선한 유약이 되었다. 유년의 기억속에 머문,때 묻지 않은 시절에 정말 감동적으로 읽은 것들을 다시 읽어보는 맛도 괜찮은듯 하다. 그의 수필집 '인연'을 만난것은 올해 나의 행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