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혜영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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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린 소년이 살인을 저질렀을까 하지 않았을까? 아니 그 고백을 듣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라는 난제를 안겨 주고 흔들어 놓았던 <고백>의 저자가 이번에는 불이 나던 그날, 어머니와 딸이 위험에 처했다면 누구를 구해야 하나? 라고 질문을 한다. 어머니를 구하고 자식을 다시 낳아야 하나 어머니보다 더 창창한 자식을 구해야 하나? 정말 난제다. 소설은 소녀가 다세대 주책에서 뛰어 내려 의식이 없다. 자살일까 타살일까? 그의 엄마는 분명 그녀를 '금지옥엽' 으로 소중하게 키웠다고 했다.금지옥엽에 담긴 의미는 무엇이지.겉으로 아무 문제 없던 소녀는 왜 자살을 선택해야 했을까?

 

'엄마의 고백' 과 '딸의 회상' 으로 이어지는 소설은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소녀를 두고 엄마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부터 시작된다.아니 신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듯 시작을 한다. 자신이 엄마와 아니 부모아 각별하게 사랑을 받으며 자랐던 이야기며 그런 자신이 남편을 만나게 된 계기도 엄마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자신보다 엄마가 그를 더 밑바탕까지 들여다 봄으로 해서 그와 결혼하게 된다. 자신의 그림은 밝은 색이었지만 어둔 색으로 그림을 그렸던 다도코로,하지만 엄마의 힘이 있어 그들은 결혼하게 되었고 장남이지만 시댁과는 결배로 마을에서 벗어난 산꼭대기 위에 집에서 그들만의 '아름다운 집'에서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며 살 수 있었다. 홀로 남겨진 친정엄마와 각별한 사이를 유지하고 외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은 딸까지 그렇게 그들에게 행복한 날들만 계속될 줄 알았는데 어느 날 태풍이 몰아치던 날 밤에 모든 것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자신의 엄마와 어린 딸이 토사에 밀려 무너진 장농 밑에 깔려 생사를 넘나드는 상황에서 급박하게 누구가를 먼저 구해야 했던 그 시간,집안에 불까지 나서 더욱 상황은 위급해졌던 것. 그 순간 친정엄마는 자신이 죽음을 택하고 소년딸을 구하게 한다.

 

"너를 낳아서 엄마는 진심으로 행복했단다,고마워. 너의 사랑을 이번에는 저 아이에게 쏟아부어 금지옥엽으로 소중하게 길러주려무나."

 

모든 것을 잃고 시댁의 '저택' 에 들어가 살아야 했지만 시댁은 결코 '며느리'의 아픔은 뒷전이고 자신들에게 유용하게 쓸 일꾼처럼 부려 먹기만 하는 가운데 딸과 엄마의 관계는 소원하게 된다. 자신과 엄마의 사이는 정말 각별해서 친정에서는 자신이 소중한 존재로 여겨지며 칭찬을 받으며 살았는데 결혼을 하는 것과 동시에 그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듯 그녀의 존재는 바닥에 떨어져 칭찬을 받기 보다는 늘 욕을 먹고 못한다는 소리에 집안 일로 농사일로 거기에 시누이들의 모멸찬 안하무인까지 견디어내야 했는데 남편이란 존재는 그녀의 편도 아니고 늘 모든 일에 뒷전이듯 묵묵부답이다.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남편의 존재란 정말 힘들면서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고부간의 갈등의 구조가 달라진다. 나 또한 이런 경우를 경험했고 늘 지금도 그런 시간을 견뎌내고 있고 모든 며느리들이 겪고 느끼는 일이겠지만 남편이라는 기어가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모두의 가정이 깨질 수도 있다. 자신의 친정 엄마가 보여준 '모성'을 그대로 물려 받아 자신 또한 딸에게 그런 모성으로 대하지만 딸과 자신과의 관계는 어느 순간부터 금이 가 있다. 왜?

 

그리고 답이 없을 듯한 시댁이라는 '저택'에서의 인간구조가 정말 '엄마'의 삶을 흔들어 놓는다. 남편은 모든 일에 방관하고 있을까? 아버지에게 폭력을 받은 피해자라면 아버지의 죽음 후에는 달려져야 하는데 그 후로 똑같은 방관자라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딸은 엄마와의 관계는 소원하지만 엄마의 대변인처럼 시댁과 맞써는 방패가 되어 늘 엄마 앞에서 방패막이가 되어 주지만 엄마에게는 낯설고 손끝하나 터치할 수 없는 존재로 거듭난다.왜? 그둘의 관계가 왜 점점 벼랑끝으로 치달리고 있는가. 시어머니는 역시나 기운을 잃으면 어쩔 숭 없이 며느리에게 의지하는 것은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같은가보다. 남편 없고 딸들 힘 없고 거기에 아들까지 자신의 편을 들지 않으니 언덕이 될 수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며느리,그런 며느리를 재산 노리고 있다고 욕이나 하는 못된 인간들.하지만 세상사 인간사는 선이 이기도 진실은 언젠가 그 빛을 보게 되어 있다. 그 빛이 너무 늦게 빛나서,어른들이 힘이 없고 돈이 없으면 꼭 나타난다는 것이 문제지만 말이다.

 

눈앞에 있는 아빠는 꿈의 집에 있던 아빠와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꿈의 집이 타버린 것은 할머니의 이별뿐 아니라 아빠와의 이별을 의미하기도 했다.

 

좀더 일찍 '엄마와 딸' 이 대화로 풀었다면 '아내와 남편'이 그렇게 대화로 지난 시간을 가슴에 담아 두지 않고 풀어냈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소녀가 자살을 선택하는 순간이 왔을까? 너무도 큰 진실과 부딪혀 이겨낼 힘을,아니 자신의 엄마를 대할 의지를 잃어버린 소녀가 너무도 가엽다.그녀가 알아버린 진실의 무게가 너무 무겁고 힘겹고 버겁다. 지금껏 진실을 가슴에 묻고 자신을 '금지옥엽'으로 소중하게 키워 준 엄마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그것이 결코 '죽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늘 '과거'의 '아름다운 집' 만 그리며 헤어나지 못하는 남편이 과거 속에서 살아가듯 한다면 그 또한 가정이 온전치 못할 것이다. 모든 삶의 멍에를 지고 묵묵히 자신의 길인 며느리이며 아내이며 엄마의 길에서 '모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며 딸을 지킨 엄마의 힘.그래서 모성일까? 자신의 어머니가 죽음으로 물려주려 했던 힘이 그녀에게 오롯이 담겨 자신의 딸을 지키고 싶었지만 너무고 큰 시댁이라는 저택의 난관에 부딪히며 나약해져 가는 순진한 그녀,정말 순진해서 아무것도 몰랐을까.

 

엄마와 딸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라 한다.나 또한 그런 시간을 지금 걷고 있음을 느끼며 하루 하루 살아 가고 있고 나 또한 엄마의 딸이며 두 딸의 엄마다. 내가 겪었던 일들과 비슷한 일들이 겹치기도 하고 며느리들이 혹은 아내들이 겪었을 지금도 겪고 있을 삶이 투영되서일까 더 재밌게 가슴의 울분을 끓어 올리며 읽었다. 타인에게 악을 행하면 꼭 벌을 받게 되어 있다.그것이 자신에게 혹은 자식에게 일어날 수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늘 승승장구하는 날들만 있을 줄 알고 안하무인 겪으로 '며느리'를 마구 마구 부려먹는 이들이 종종 있다.그런 이들은 아니 그런 가문의 남편들은 꼭 읽어보았으면 한다. 철옹성도 언젠가는 무너지듯 인간사 백년만년 사는 것이 아닌데 타인에게 악함을 행하기 보다 선행을 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하는데 이기적인 인간들이 너무 많다.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이 '모성' 이듯 아름다운 어머니에서 어머니로 그리고 딸에게 이어지는 모성의 힘은 대단하다. 모두에게 칭찬 받을 만한 모성이 되지만 아름답지 못한 모성을 가진 어머니의 딸은 그 자식에게도 악행을 일삼는다. 자식이 무얼 보고 배우겠는가.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 했거늘 누굴 탓하겠는가. 자신이 만약에 어머니를 구하고 자식을 죽게 했다면 이런 일련의 일들이 일어났을까? 그녀의 삶은 주변의 삶은 변했을까? 어떤 이야기보다 어떤 선택보다 전율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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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의 인생을 만들다
요시모토 바나나, 윌리엄 레이넨 지음, 황소연 옮김 / 21세기북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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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를 좋아해서 책을 몇 권 가지고 있는데 읽지 않고도 그녀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는 작가 또 요시모토 바나나다.그렇다고 무척 저자를 잘 아는 것도 아닌데 왜 친근하면서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책을 읽지 않았는데.낯설지 않음에서일까? 암튼 다른 책보다 이런 더 욕심이 난다.물론 소설도 좋고 에세이도 좋지만 이른 글은 챙겨 보는 것이 저자와 더 가까워지는 길이라 생각을 한다.그것도 요시모토 바나나와 세계적인 영혼 치료사인 '윌리엄 레이네'이 서로 주고 받은 '편지글'이라 더 친근하면서도 다정다감함이 느껴져서 읽고 싶은 책이었다.

 

영혼 치료사하면 낯선데 언젠가 티비에서 동물들 영혼과 교감하며 치료를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보고는 나도 반려견을 키우고 있어 동물과 교감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사람은 아프면 말을 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표현을 할 수 있지만 동물들은 죽음이 닥쳐야 알 수 있다.그렇게 하여 치와와 두마리를 키우고 있었는데 11년이 되던 해에 치와와 숫놈을 심장마비로 갑자기 잃게 되었다. 그 전까지 아픈 기색하나 없이 옆에서 잘 먹고 잘 놀고 방금 전까지 함께 씩씩하게 놀던 녀석에게 갑자기 죽음이 찾아 왔다. 삽시간에 닥친 일이라 더욱 난감했고 녀석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내 머리와 심장이 따라가지 않아 한동안 너무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얼마전에 친정 아버지를 보내 드리고 무척 힘든 시간을 견디어 내고 있던 터라 녀석의 죽음은 또한 큰 아픔으로 날 일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남겨진 한마리가 건강했던 것도 아니고 녀석도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일을 두서번 겪었던 터라 더 고통을 이겨내기엔 내가 지탱할 힘이 없었다. 동물과 교감할 수 있었다면 그들의 아픔을 읽었을텐데.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어떻게 반응할지는 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만족시켜야 하는 사람은 딱 한 명, 바로 나 자신뿐입니다.자신의 생각대로 상대방이나 상대방의 생각을 바꾸려 하지 말고,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현대는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이 다양하게 있고 블로그나 SNS등 요즘은 대부분 한두가지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넘쳐나는 아마츄어들의 글 홍수 속에서 과연 얼마나 타인의 이야기에 '진정으로' 귀 기울이며 살까? 건성 건성 댓글을 남기고 추천을 누르고 공감을 하는 표현의 자유에 가려 '진심'은 얼마나 가려지고 있을까? 그런면에서 이메일이나 편지로 글을 나눈다는 것은 그만큼 더 자신을 드러내 놓고 솔직하고 진실되게 표현할 듯 하다.아니 그런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두사람의 이야기가 읽는 것만으로 힐링의 시간이 된다. 꾸미거나 포장이 되지 않은 '요시모토 바나나'를 만나고 그런 그의 질문에 인생의 선배로 다른 관점에서 그녀를 보거나 인생을 혹은 그외의 이야기를 나누는 글들은 어렵지 않고 읽어 나가는 것으로 자신이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듯 하다. 인생은 타인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동물을 사랑한다는 건 쓰다듬거나 마구마구 귀여워해주는 게 아니라 동물을 돌보는 인간이 행복감을 느끼고 동물 자체를 사랑해서 그저 담담하게 보살피며 함께 지내는 일상이 존재하는, 그런 게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잣대로 모두를 평가하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의 잣대에 휘둘려 늘 휘청거리는 사람도 있다. 왜 상대의 의견이나 취향을 존중해주지 않고 바꾸기만 바라는 것인지,그런 일이 내게도 있었다. 그것도 무척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일을 당하고 나니 정말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내가 하는 말은 늘 핑계가 변명이 되고 내 일상은 남에게 생색을 내기 위한 것으로 비춰져 상대방과 사이에 틈을 만들어 놓았다. 왜 나를 인정하듯 타인을 인정하지 않을까? 내가 아프면 타인도 아픔을 느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인지. 무조건적으로 고통을 유발하는 행동을 해 놓고 그 모든 것을 상대에게 뒤집어 씌우는 이기적인 이들도 많다. '우리의 영혼이 구하는 것들, 우주의 흐름에 맡기고 우주의 에너지와 함께 하는 삶, 사랑하다는 것은 생명을 품어 기른다는 것,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영성 그리고 치유, 지금 이 순간을 느끼는 행복' 삶은 이 순간 행복을 느끼기 위해 아니 행복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의 행복은 인정하면서 타인의 행복은 인정하지 않지 않는 이기심도 비일비재하다.

 

인간이 육체를 갖고 살아가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가시밭길을 걸어가며 고통을 경험하기 위함입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편지는 그가 작가로의 삶보다는 일상적인 그를 더 많이 만나게 되는 것 같다. 작가로의 삶도 힘든 길이겠지만 삶면서 부딪히는 일들을 담담하게 글로 나눔으로 그 또한 평범한 여자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담아 두기 보다는 꺼내어 보임으로 해서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이제 앙금을 완전히 거두어내듯 너울을 하나 하나 이겨내며 망망대해로 나아감이 함께 인생의 바다를 노 저어 가고 있음을 따뜻함을 전해주는 일러스트와 함게 하다보면 순항의 돛을 편 듯 하다.가시밭길이 없다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 가시밭길을 헤쳐 나간 경험은 또 다른 일을 만났을 때 더 큰 시련에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을 안겨주듯 이겨내는 힘을 준다. 요즘 내게도 누군가가 건네주는 '위안' 한마디가 필요한데 잔잔한 위안을 얻은 듯 하다. 내가 등을 돌리지 않고 상대가 등을 돌렸으니 돌아 오리라 생각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니 작은 것에도 감정의 가시가 엉켜 풀어진다는 것이 힘들다. 그래도 이 모든 시간들이 더 단단한 내일을 위한 시간이라 믿는다. 내 아픔을 보듬을 줄 안다면 타인의 아픔을 토닥여 줄줄도 알아야 한다.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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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쑤운 도토리묵 야채무침

 

 

찬바람이 불고 도토리묵을 처음 쑤었다. 식구들이 모여야 해먹어도 맛있지 혼자서 먹기엔 그렇다.

큰딸 생일을 미리 축하해 주기 위하여 내려오라 했더니 녀석이 온다고 해서 막내도 오라해 함께

하려니 반찬이 마땅하지 않아 도토리묵을 쑤었다. 한 컵을 쑤면 죽그릇에 반 정도 담아 두개 정도

나와 두서너번 먹을 수 있고 늘 한 컵씩만 쑤고 있다.

 

 

*준비물/도토리묵,오이,청양고추,양파,당근, 다진마늘 그외 양념

 

*시작/

1.도토리가루 한 컵에 물 다섯 컵을 넣고 약간의 굵은 소금과 기름 한두방울 넣고 한방향으로

저어 도토리묵을 쑤어 준다.

2.쑤어서 굳힌 도토리묵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주고 오이 당근 양파 청양고추등을 썰고

그에 갖은 양념을 넣어 먼저 무쳐 준다.

3.야채무침에 썰어 놓은 도토리묵을 넣고 살살 한번 더 무쳐준다. 통깨 검은깨 등을 뿌려 주면 끝.

 

간장양념하여 한번 먹고

 

 

 

간장양념을 해서 끼얹어 먹는 것도 좋아하지만 갖은 야채를 넣고 무쳐 주어도 잘 먹는다. 도토리묵은

다이어트 식품으로 좋고 중금속 해독에도 좋으니 가끔 먹어주면 좋다. 직접 묵가루를 사다가 해 먹게

되면 묵을 쑤는 재미도 느낄 수 있고 그 때 그 때 필요할 때마다 반찬으로도 유용하다. 난 산행가면

그곳 주민들에게서 도토리묵가루를 사가지고 온다.그렇게 하면 두고두고 해 먹고 참 좋다.도토리가루를

한 컵만 쑤어도 두어번 먹을 양이 나오기 때문에 많이 할 필요가 없다. 한 번해서 간장양념장을 해서

한 번 먹고 야채와 이렇게 해서 먹으면 훌륭한 반찬이 된다. 요즘 오이가 비싸긴 하지만 막내가 오이를

좋아해서 마트에서 몇 개 사왔다. 끝물이라 그런가 얼마 없다. 딸들은 파프리카를 좋아하진 않지만

파프리카를 넣어 주어야 더 맛있다.

 

2013.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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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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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아직 어려운 작가가 '무라카미 하루키'다.그렇다고 그의 작품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다. <상실의 시대>와 <1Q84>를 2권까지 읽고 며칠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을 읽었다. 저자들의 소설도 좋지만 에세이나 단편집 잡문집 등을 읽다보면 저자와 더 가깝고 친밀해지는 느낌이 들어 좋아하는데 이 책을 읽기 전에 <잡문집>을 읽은 것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잡문집을 읽다보니 그가 '음악'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았다.그의 소설에 보면 음악과 관련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다양한 음악이 이야기에 삽입이 되어 그 음악을 찾아 듣고 싶게 유도를 한다. 이 책에도 [순례의 해] 및 다른 다양한 음악들이 적절하게 나온다. 그가 소설을 쓰기 전에 음악을 너무 좋아하고 하루종일 듣고 싶어서 7년이란 시간동안 앨범가게를 했다고 하더니 정말 다양한 음악이 소설속 인물에 맞추어 이야기를 더 흥미롭게 한다.

 

"우리는 앞으로 널 만나고 싶지 않아. 말도 하기 싫어." 라는 절교 선언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그의 소설 <노르웨이 숲>도 그렇지만 일본과 '핀란드'는 어떤 관계인지 영화와 소설 <카모메 식당>에서도 보면 갑자기 세여자는 '핀란드'로 향하는데 이 소설에서도 일본이 아닌 곳,핀란드로 떠난 등장인물이 있다. 그녀가 택한 핀란드에서의 삶은 그야말로 그의 삶을 다시 바꾸어 놓듯 치유의 삶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고향에서 그냥 있었던 인물인 시라는 자신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죽음'에 이른다. 색채가 없다는 것은 주인공 ' 다자키' 의 이름을 한 자로 쓰면 색을 나타내는 말이 들어가지 않는다.하지만 그와 함게 고등학교 때 함께 그룹을 지어 어울렸던 네 명의 친구인 '시라(흰색),구로(검정색),아카마쓰(붉은색),오우미(청색)' 는 각각 이름에 색이 들어간다. 그들은 색채가 있는 친구들이라고 하고 다자키는 색채가 없다고 스스로 자신을 구별짓는다. 정말 그럴까? 그들 다섯명은 정말 좋은 시간을 보냈다.봉사활동도 하고 나름 알차고 서로 잘 맞는 친구들이라 생각했는데 다자키만 대학을 도쿄로 가고 다른 친구들은 나고야에 있는 대학을 가면서 대학 2학년에 그는 친구들에게 '절교' 선언을 듣게 된다. 더이상 다자키가 그 그룹에서 어울릴 수 없는 것,왜? 그는 이유도 묻지 않고 혼자 우주 속에 떨어진 물체처럼 방황을 하고 죽음에 이른다. 왜 친구들이 갑자기 그를 그룹에서 혼자 떨어져 나가게 했을까?

 

"기억을 어딘가에 잘 감추었다 해도, 깊은 곳에 잘 가라앉혔다 해도,거기서 비롯한 역사를 지울 수는 없어."

 

험난하고 고난한 시간을 보내고 세월이 흘러 그로부터 1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의 여친이라 할 수 있는 연상녀인 '사라'가 그의 그런 과거를 듣게 되고는 과거의 친구들을 만나 보라고 권유를 한다. 그리곤 네 명의 친구들 주소와 간단한 근황을 조사해서 그에게 준다.과연 그는 과거의 친구들을 만나 화해를 할 수 있을까? 아니 친구들이 자신을 만나줄까? 그가 나고야의 친구들과 헤어져 힘든 시기에 겨우 돌아와 살아보겠다고 다짐하던 때에 연하의 '하이다'라는 친구를 만나게 된다. 하이다는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다자키에게 들려주는데 그 이야기 속의 소재들이 그의 과거 속 친구들과의 이야기와 연관이 있는 것처럼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이 된다. 이 부분이 하루키만의 특별한 능력인 듯 하다. <1Q84>에서 소설 속에 소설을 가지고 있었듯이 이 소설에서도 다자키의 과거와 같은 이야기가 하이다의 아버지 이야기로 되풀이되어 나온다. 그는 정말 과거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까? 아니 그들을 만나 16년전 자신을 내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스스로도 몰랐던 원래의 자신이 껍질을 깨고 바깥으로 빠져나오려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쓰쿠루는 생각했다.뭔지 모를 추악한 생물이 부화하여 온 힘을 다해 바깥 공기를 쐬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친구들에게 미리 연락을 하지 않고 찾아가는 다자키, 어색함은 잠시일뿐 그들은 과거의 이야기를 토로하며 현실의 모습을 본다. 피아노를 잘 쳤던 시라가 아픔의 상대로 그를 지목했던 것,왜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인줄 친구들도 아는데 왜 자신에게 미리 이야기를 안해 주었을까? 친구들에게 자신은 과거에 어떻게 비춰졌길래. 자신이 정말 '색채가 없는' 존재였을까? 자신의 이름처럼 자신에게는 색채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친구들을 만나서 과거 이야기를 하다보니 친구들에게 그야말로 그라는 존재는 '색채가 있다' 확실하게.친구들이 확실한 색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는데 그들의 생각과는 달랐던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타인이 나를 더 잘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친구 '시라'의 일은 아니 다자키를 내쳐야 했던 일은 친구들 모두에게 아픔의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평온하고 가지런해 보이는 인생에도 반드시 커다란 파탄의 시절이 있는 것 같거든요. 미치기 위한 시기라고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인간에게는 아마도 그런 전환기 같은 게 필요한 거겠죠.

 

색채가 없는 다자키가 과거의 친구들을 만나 과거와 조우하며 그는 색채를 찾아 낸다,자신만의 특별한 색을.그런가하면 지금도 역시나 친구들에게 다자키는 자신만의 색으로 멋지게 살고 있는 것이다. 단지 그에게 '자신감과 용기'가 없는 것이다. 그가 과거 16년 전에 친구들에게 내쳐졌을 때 그가 용기 있게 부딪혔다면 현실은 어떻게 변했을까? 지금과 똑같이 되어 있을까? 다자키의 성장통과 같던 이야기는 모두의 성장통으로 이어지며 과거와 조우하며 그들은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현실을 받아 들이며 다시금 그시절로 돌아가지는 못하지만 '친구'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을 맞게 된다. [영과후진]이라고 했다. 물은 웅덩이를 채워야 흘러간다고 했는데 아픔도 채우고 부딪혀야 이겨내고 다시금 찾아 오는 아픔을 이겨내는 힘을 얻게 된다. 그 때 그 아픔을 서로 직면하여 부딪혔다면 사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죽음으로 소멸했을까?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돌아보니 모두가 피해자였고 모두가 아픔을 간직하고 있으며 아픔을 겪어냈고 견뎌냈다. 다자키가 16년이란 세월을 소비하지 않고 더 일찍 친구들을 찾았다면 현실은 또 변했을지도 모른다. 아픔은 곪아 터져서 커다란 상채기를 남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이라도 그가 나섰다는 것이, '순례'를 떠났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아픔도 죽음도 삶의 연장선이지만 그것이 내게 닥치며 회피하려 하고 너무 크다고 하게 마련이다. 자신감을 가지고 부딪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일본 소설을 읽다보면 이름을 가지고 한자로 풀이를 해서 하는 약간은 장난스러운 말장난과 같은 '반전'을 주는데 이 소설도 약간 그런 바탕이 깔려 있다. 서로의 이름에는 한자로는 색이 들어가고 다자키에게는 없어서인지 그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을 해서일까 그는 서른여섯이라는 나이가 되어서도 여자에 사랑에 자신이 없다. 하지만 과거의 친구들을 만나며 성장통을 극복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사랑에 적극적이고 자신감을 보인다.핀란드가 이 소설에서는 '치유,힐링'의 나라로 쓰였을까하는 의문을 가져본다. 핀라드에 살고 있던 구로를 만나며 그는 과거와 따뜻하게 악수를 나누고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지금까지 십대 때 일은 가슴에 '통증'처럼 안고 있었다면 이젠 그 아픔의 웅덩이를 채우고 다시금 나아갈 수 있는 역량이 있는 물이 된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을 어렵게만 생각을 하고 뒤로 미루기 보다는 한 권 한 권 선입견을 버리고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이 작품에서 해본다.다자키와 자신감과 용기를 가졌듯이 분명 나도 가질 수 있다.다자키가 자신만의 색을 찾아 이제 빛나는 시간남 남아서 다행이다. 그런가하면 모두가 성장통을 이겨내고 그렇게 물처럼 유하게 흘러가는 것이 현실인 듯 하다.다자키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의 껍질이라는 세계를 깨뜨려야만 했다.그렇게 보면 다자키는 정말 자신있게 그러가하면 친구들도 만나면서 과거와 화해와 용서 그리고 용기를 가졌으니 그런 과거를 가지고 있다면 깨뜨려야 한다. 마음의 병을 지우고 자신만의 색을 찾을 수 있다면.그런가하면 소설은 '세상 사람들의 절반쯤은 자기 이름에 만족하지 않는다.' 라는 이 한 줄에 시작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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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즈 보르코시건 : 명예의 조각들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 1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 지음, 김창규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저자의 책은 처음이고 더군다나 SF소설에 연작이다. 우리에게는 <바라야 내전>까지 번역되어 나와 있다고 하는데 배명훈의 <청혼>도 그렇고 다른 작가의 <베타>도 읽어서인가 흥미롭다. 이 책은 '보르코시건 시리즈' 첫번째 책으로 나온 듯 하다. 무엇보다 책을 시작하기 전에는 작가의 이력부터 읽어 보는데 작가가 어린시절부터 독서량이 대단한 듯 하다. 기계공학 교수이자 SF 열혈 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시절부터 SF를 섭렵했고 방대한 독서가 이런 소설을 탄생시킨듯 하다.역시나 꿈나무는 어린 떡잎부터 알아보는 것인가. 이 작품 시리즈와 다른 작품 시리즈가 있다고 하는데 SF 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 넣어줄 작가로 기억해야 할 듯 하다.

 

이야기는 코델리아와 아랄이 만나는 이야기부터 시작이 된다. 남성중심적이고 군인중심적이라고 할 수 있는 바라야 제국주의의 아랄 보르코시건과 민주주의 적이고 남녀가 평등한 사회인 베타 개척지의 과학자이면서 군인인 코델리아 네이스미스가 우여곡절 끝에 만나 코델리아가 아랄의 포로가 되지만 자유가 주어지고 서로가 도와야 살아날 수 있어 포로이기 보다는 낙오된 행성에 두 남녀처럼 부딫히며 서로를 알아가게 된다. 하지만 아랄은 코델리아가 사는 곳에 그의 소문은 험악하다. 그런 그와 만나고 마주치고 부딪히다보니 소문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고 남녀간의 감정이 싹튼다. 적과의 동침처럼 적을 사랑하는 입장이 된 두사람, 아랄이 누군가의 계략에 빠져 있음을 알게 되고 아랄의 군인정신으로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고 베타 개척지의 코델리아는 바라야 제국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아랄의 포로가 되어 전쟁에 휘말리게 되고 바라야 제국의 시궁창 같은 정권 싸움에도 휘말리게 되는 등 온갖 이려움을 당하지만 그때마다 아랄의 힘과 지략에 코델리아의 지략이 합쳐져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더 깊숙이 바라야 제국에 대하여 알게 되면서 인간 아랄 보르코시건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가까이 가고 싶으면서도 자신의 고향을 생각하며 벽을 만들어 놓는 코델리아, 하지만 그녀가 향하고 선택한 고향은 그를 반역자 이중간첩처럼 바라야 제국에 희생양이 된 것처럼 그를 환자로 몰아가는가 하면 그녀가 지금까지 알고 겪었던 일들과는 너무 반대되는 방향으로 왜곡되게 이끌어 가는 것에 적응할 수 없어 베타 개척지를 탈출하여 바라야 제국의 아랄에게로 향한다. 그가 청혼을 해도 답을 주지 못했는데 자신의 고향에 가고 나서야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났어도 아직 바라야 제국에 앙금이 남아 있기도 하고 잘못 알고 있거나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약물에 중독되어 죽음을 선택하는 길과 같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문명이라는 건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가 쓰는 물건에 깃들어 있는 셈이네요."

 

지구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주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라 행성간 전쟁도 우주선을 타고 이동하는 이야기며 지구에서는 먼 이야기인 생물체나 과학적인 이야기들이 나온다. 그렇다고 그것이 먼 미래의 이야기일까 하는 생각을 가져봤다. 아랄과 코델리아가 함께 있던 숲은 그야말로 정글이라고 할 수 있는 미생물체들이 너무도 많다. 흡혈귀와 같은 생물에서부터 아직 몇 프로도 정복하지 못한 아마존의 정글을 연상하는 것처럼 표현을 해 놓았고 바라야 제국은 우주속에 '지구'를 표현해 놓은 것처럼 베타 개척지에는 없는 자연이 있다. 그런가 하면 그곳은 아직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고 섭정을 하고 군사정권이라 할 수 있다.그런 곳에서 아랄은 그야말로 에프엠처럼 모든 것을 갖춘 인물이다. 책략가이면서 군인이고 정치를 몸서리치도록 몹시 싫어하면서도 정계에 몸을 담아야 하는 인물이다.그런 그의 첫번째 결혼을 무참히 실패였고 그로 인해 그는 치욕과 같은 소문의 남자가 되었지만 코델리아를 운명적으로 만남으로 인해 둘은 서로에게 적합한 동지이면서 인생의 반려자로 만나게 된다.

 

자신의 고향을 버리고 아랄이라는 남자를 찾아 우주를 날아 사랑을 찾아 떠난 코델리아, 그녀가 없는 삶은 죽음과 같은 세상이었는데 그녀가 나타남으로 인해 아랄의 삶은 다시 활짝 꽃이 핀다.그런가 하면 황제가 그에게 섭정을 해달라 한다. 죽어서도 그를 통치하려는 황제지만 옆에 코델리아가 있음으로 인해 자신있게 받아 들이고 자신이 함께 했던 이들을 옆에 두고 일을 하게 된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코델리아가 아니라 그녀 또한 '군인'의 신분으로 있어 보았기에 그에게는 누구보다 더 힘이 되는 조력자가 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직 그들의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는데 그들의 아이인 '마일즈' 의 탄생으로 시기를 나누어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 듯 하다. 이 이갸기의 다음 이야기인 <바라야 내전>에서는 아랄과 코델리아가 내전을 겪으며 더욱 많은 이야기가 펼쳐질 듯 하다. 드디어 그의 아들 '마일즈'가 태어나다 보다.

 

지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주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상상력을 더 자극하기도 하고 그녀가 어린시절과 약국에서 보조원으로 있는 동안 2백만권의 책을 열람했다고 하니 더욱 풍부한 이야기가 펼쳐 지리라 본다. SF에 전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함께 아랄과 코델리아의 사랑이 보태져서일까 흥미롭게 읽을 수 있고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게 만든다. 우리는 지구라는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곳과 닮은 곳을 무던히도 찾아 나서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저자는 지구와 너무도 닮은 행성이 분명히 있고 그곳에서도 지구와 같은 삶이 이어지고 있으며 과학이 발달하고 더 나은 문명을 가지고 있어도 인간의 삶은 소멸과 탄생으로 이어지며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보는 듯 하다.행성과 행성은 우주선으로 서로 왕래하고 화물도 또한 화물만 취급하는 화물선이 있어 자유롭게 연결이 되고 문명 발달로 모든 것이 컴퓨터로 제어가 되어도 '손편지' 또한 더 힘들지만 아날로그가 남아 있는 그곳으로 그려 나가려고 한 것을 보면 너무 우주적이어서 정이 매말라 버린 우주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적인 우주를 그려내려 한 듯 하다.서로 어울릴것 같지 않은 다른 행성의 두 남 녀가 만나 서로 다른 두 곳을 화합이라도 하듯 새로운 생명체인 '마일즈'를 탄생하게 되고 인공자궁에서 키운 베타 개척지와 바라야 제국의 '아이들' 있으니 그 또한 어떻게 이어져 나갈지 기대된다.이제 시작이지만 저자의 방대한 독서량이 토해내는 스토리텔링에 빠져 들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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