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대찌개에 개성왕만두를 넣어 만두전골로

 

 

전날 우동사리를 넣어해 해 먹은 부대찌개를 [만두전골]로 하룻밤만에 변신을 시켰다.

반 정도 남은 찌개에 재료를 더 넣고 끓이며 [개성왕만두]와 [감자만두]를 넣어 [만두전골]로

탈바꿈을 시켰다. 딸들이 만두를 좋아하고 올라가기 전에 한번 먹으려고 생각했다가 부대찌개도

좋아하고 만두도 좋아해서 접목,정말 맛있다.개성왕만두와 감자만두는 만두피가 풀어지지도 않고

감자만두는 얼마나 쫄깃하고 맛있는지 옆지기도 막내도 정말 잘 먹는다.

 

 

*준비물/어묵,햄,미니프랑크,콩나물,양파,청양고추,개성왕만두,감자만두,부추 그외

 

*시작/

1.천연조미료에 편다시마를 넣고 끓이며 신김치에 콩나물 어묵 햄 미니프랑크등

갖은 재료를 썰어서 넣언준다.

2.어느 정도 끓었을 때 만두를 넣고 끓여 주고 먹기 전에 부추를 넣고 끓여 준다.

(부대찌개에 만두를 넣고 다시 끓였으니 어떻게 보면 재활용찌개다ㅋㅋ)

 

 

[개성왕만두세트] 를 한번 이벤트로 받아서 먹어 보았는데 정말 맛있다.

특히나 식구들이 [감자만두]를 좋아해서 더 먹고 싶다고 자꾸 찾길래 [동원몰]에서 시켰다.

바로 아이스팩을 넣어 배송이 되고 오자마자 [찐만두]로 일부 거듭나 주시고 나머지는 냉동실에

봉지 봉지 넣어 두었다가 [만두전골]에 넣었다. 왕만두는 한봉지에 9개가 들어 있고 감자만두는

왕만두보다 작기에 넉넉하게 들어 있다. 300g이 붙어 있어 여유롭게 먹을 수 있다.이거 한번

 먹으면 중독성이 강한 만두다. 한번 더 시켜야 하지 않을까 고민중이다. 만두전골을 식구들이

또 찾는다.

 

 

고기만두와 김치만두는 왕만두라 몇 개만 넣어도 푸짐하고 식구들이 하나씩 나누어 먹을 수 있다.

감자만두는 좀 넉넉하게 넣어 주었다. 특히나 감자만두를 좋아해서 두개씩 먹을 수 있게 아니 더

먹을 수 있게 여유롭게 넣어 주었더니 막내가 특히나 맛있게 잘 먹는다. 밥보다 만두전골을 먹다보면

배가 부르니 밥대신 먹을 수도 있다.

 

 

 

 

왕만두와 감자만두 하나씩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 간만에 막내 반찬을 해주느라 한통에 4000천원

하는 배추를 하서 배추김치를 담았더니 식구들이 맛있다고 잘 먹는다.얼갈이김치만 담다가 배추

김치를 보니 더 맛있다며 만두전골과 맛있게 먹는다.날은 덥고 이런 일은 혼자서 하기에 짜증도

나지만 식구들이 맛있게 먹어주면 힘든 것도 모두 눈녹듯 한다.비싼 배추김치에 맛난 만두를 가득

넣고 끓인 만두전골로 풍성한 식탁,이열치열의 식탁이었다.

 

2013.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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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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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겉표지와 저자에 대한 찬사 때문에 구매를 해 놓았지만 그냥 꽂아 놓기만 했다.그러다 우연하게 책장 앞을 지나다 빼들게 되었다. 결혼생활 이십여년이 넘어가다보니 내가 살아가는 하루하루도 롤로코스트를 타는 듯한 날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가며 아니 도마위에 올려가며 칼질을 하는 맛도 참 재밌고 내 삶을 돌아보게 하기도 하고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생각을 가져보게도 한다. 인간이 '욕망' 때문에 좌절하기도 하고 참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변화하기도 한다.살면서 욕망을 억제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힘든 일기도 하지만 결혼을 했다면 함께 하는 사람과의 약속을 위하여 믿음을 져버리지 않기 위하여 '욕망'을 분명 억제해야 한다. 하지만 '사랑은 움직이는거야' 라는 어느 광고의 카피처럼 처음 약속한 사람과의 믿음이 영원하리라던 생각과는 다르게 현실은 사랑을 움직이게 만든다.그렇다고 모두가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움직이지 않고 죽는 그날까지 한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욕망'에 움직이는 위기의 사람들 이야기다.

 

먼저 <어젯밤>부터 읽어보았다. 말기암 환자인 아내 마리트, 남편과 아내는 더이상 고통에 힘들어하지 않기 위하여 안락사에 동의를 한다.자궁부터 시작된 암은 그녀를 모두 집어 삼켰다. 안락사 그 마지막 순간에 둘만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가깝다 할 수 있는 수잔나가 함께 하기로 한다. 아내는 어느 날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고 '그순간'을 맞기 위하여 방에 들어가 준비를 한다. 월터는 수잔나에게 함께 해달라고 하지만 그녀는 못 보겠다며 나간다. 월터는 냉장고에 있던 주사기,아내를 평안의 세계로 이끌 약을 들고 이층으로 올라가 그녀의 팔에 마지막 이승의 선물을 주입시킨다. 그리곤 밖으로 나오는데 수잔나가 가지 않고 차에 있다. 아내를 죽였다는 생각에 혼자 있고 싶지 않은 월터는 수잔나에게 아내하게 분출하지 못했던 욕망을 쏱아내듯 둘은 밤을 보낸다. 이층에는 분명 아내가 주검으로 있는데 말이다. 오늘의 아침은 어제보다 더 평온한듯 하다. 어제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러나 이층계단에서 발자국소리가 난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내,그렇다면 그들의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는 것인가.자신과 수잔나의 어젯밤은 또 무엇이란 말인지.

 

위와 같은 상황이라면 수잔나는 월터의 맘을 받아 들여야 할까? 수잔나가 욕망에 눈이 먼 여자였다면 마리트가 숨을 쉬고 있어도 월터의 품을 찾았을 것이다. 월터는 그동안 아내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생생하고 탱탱하고 팔팔한 생을 수잔나에게 느끼지만 수잔나는 마리트가 아직 살아 있고 그날 아침을 잊을 수가 없어 월터를 받아 들일 수가 없다. 어젯밤 그들의 삶은 그렇게 엇갈려 버렸다. 마리트는 이승에서의 고통을 끊으려 했고 월터의 아내의 죽음과 함께 다른 욕망과 이으려 했다. 그것이 미수에 그치게 됨으로 그들의 삶은 다시 엇갈려 시작되지만 분명 어제와는 다르게 시작된다.하지만 정원의 자작나무는 어제보다 더 반듯하게 서 있다.삶이 자신들이 생각하는대로 이어진다면 이런 '욕망'이 탄생할까? 어젯밤과 오늘은 너무도 다르다. 그런 이야기들이 현실에서 우리를 울리고 웃게 만든다.

 

이십여년을 살아 오면서 타인의 삶에서 내 모습을 읽기도 한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넘쳐나는 것은 내게도 그런 일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기도 하지만 어제 바뀌지 않은 사람이 오늘 하루 아침에 바뀔 수는 없다. 조금씩 조금씩 한가지 한가지 아주 느린 걸음이라도 바꾸어 나가다보면 아니 고쳐 나가다 보면 서운하지만 작은 변화에도 뿌듯한 기쁨을 느낄 때가 있다. 내가 상대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을 때에는 상대도 내 행동이 분명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하지만 우린 상대가 내게 맞춰져 변화하기만 바란다.내가 변화하기 보다는 남이 변하기만 바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결혼생활 처음 시작에는 서로의 목소리를 키우느라 내 단점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상대의 단점으로 인해 내 단점을 보게 되면서 나도 변해야 둘이 하나가 되는 생활이 평탄하리는 것을 느끼며 변해간다. 모두가 변해간다. 젊은 시절에 가졌던 욕망 또한 한사람에 정착하면서 서서히 상대에게 맞추어진다고 할까 그 모양이 변해가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욕망의 불꽃이 아직 사그러지지 않고 남아 다른 곳에서 '반짝'이는 이야기들의 모음은 나처럼 이만큼 살아 온 사람들과 모여 앉아 속시원한 수다라도 나누어야 할 것터럼 위험하면서도 재밌다.

 

가질 것 다 가진 50대의 남자가 정부가 가져가 파티에 하고 나온 귀걸이 하나로 장인에게 들켜 아내와 헤어지게 생겼다. 왜? 모파상의 목걸이도 아니고 '귀걸이' 가 이렇게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키며 그의 오랜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니. 그 귀걸이는 다름아니라 장인이 아내에게 선물했던 것인데 정부의 손에 들어가면서 다른 장소도 아닌 장인이 나오는 자리에 정부가 하고 나왔다니.그 이후 장인은 아내에게 남편과의 모든 것을 끊어 놓듯 한다. 배신감,믿었던 사람에게서 믿음을 져버리는 일을 한 사위에게 장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정말 뻔하지만 그것을 받아 들일 수 없다고 발버둥친다. 이 위기의 남자를 어떻게 할까? 지금까지 소문이 무성했던 남자이기에 '귀고리' 사건은 그를 한번에 시궁창에 빠져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누가 뭐라고해도 본인은 아니라고 부정해도 이미 화살은 시위가 당겨졌다.

 

욕망으로 인해 위기에 선 남자와 그리고 여자들은 타인의 삶을 보면서 그동안 억눌려 왔던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고 자신의 본심을 찾기도 한다.한 집안에 사는 이와 미묘한 감정이라는 것을 알아 차리고 끝을 알리는 아내이야기나 <스타의 눈> 이란 단편의 주인공은 모든 것을 가졌기에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다.그녀가 거머쥔 부가 결코 땀과 노력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고 사랑이 아닌 돈에 이끌린 결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녀에게는 분명 사랑이었다. 사랑과 욕망 정열은 과하면 문제가 되기도 하고 남의 것이 더 욕심이 나기도 한다. 욕망에 눈이 먼 순간에는 모든 것이 다 내것처럼 보이지만 욕망은 결코 현실이 아닌 그 너머의 것이기에 현재를 잃게 만든다. 현재 자신의 것에 만족하고 감정을 억제 했더라면.

 

제임스 설터라는 저자의 책을 처음 읽어서인지 모두가 칭송하는 그의 소설이 내겐 '?' 였는데 <어젯밤>을 읽고나니 이런 반전이 하면서 삶은 어쩌면 이런 반전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살다보면 '반전'이 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어제와 다른 내일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지만 늘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늘 똑같은 날이야라고 할 수 있는 날들의 연속이지만 분명 어제와 오늘은 똑같지 않고 그 속에서 우린 나이 들어 가고 있고 변화하여 가고 있다. 어제는 '미안해'라는 소리를 못하던 사람이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고나니 먼저 '미안해'를 하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타인이 변하길 바라면 세상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내가 변하면서 타인도 조금 바뀌길 바래야 좀더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속에서 욕망의 끈을 붙잡고 있으면 힘들다.놓아 버릴 수 있는 것은 놓고 사는 것이 행복이다.이루지 못할 욕망에 목 매다보면 자신을 올아매는 올가미로 자신의 목을 조이는 경우가 된다.그런 사례를 주위에서도 간간이 보게 된다. 욕망이 자신의 발목을 잡게 하지 말고 놓아 버려라. 마음 편하게 말이다. 간결한 문장으로 이어지는 대화체가 들어 있어 쉽게 쉽게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삶이란 정답이 없지만 내 길이 아니라면 가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욕망으로 점철된 길이라면 반드시 더 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그 길 끝에서 내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당혹함과 마주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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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5 - 고국원왕, 백성의 왕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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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불 미천왕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4,5권은 을불의 맏아들 사유,고국원왕의 이야기가 펼쳐진다.4권을 읽고는 얼른 이 책을 들었다. 시간차를 두고 읽으면 내용을 잊어버려 재미가 떨어지기에 4권을 놓자마자 읽었더니 '곡국원왕'의 이야기가 바로 이어져 사유의 맏아들 '구부'인 '소수림왕'의 이야기를 얼른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을불 미천왕은 소금장수에서 왕이 되어 낙랑을 점령하고 무가 누구보다 뛰어난 왕이었다. 그런 그의 두 아들 사유와 무 중에 그를 빼어 닮은 것은 '무' 이고 모두가 무가 왕이 될 것이라 내다보았지만 을불은 사유를 왕으로 삼는다. 왜 일까? 사유가 백성의 아픔을 달래고 어루만지는 것을 보고 무예가 뛰어난 무보다는 사유의 편을 들어 주었다.그 덕분에 재략가인 아내 아영과 사이가 벌어지기도 했고 사유 또한 아영의 사랑을 받지못하고 편애 속에서 왕이 되고 아내마져 무와 아영이 점찍은 여자였기에 그는 아내하고도 거리감이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하고 어머니 아영을 사랑하고 동생 무와 아버지 을불을 사랑했지만 백성에게도 아내에게도 어머니에게도 외면을 당하듯 한 삶이었다.

 

"싸움은 적을 인정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하는 법, 너는 상대할 수 없는 적을 두고 주제넘은 호기를 부렸으니 이미 패한 것과 같다. 패장의 책임을 물어 그 목을 치리라."

 

고국원왕시대 주변국의 정세는 그야말로 힘겨루기에서 고구려에 뒤지지 않는 세력들이 포진해 있었다.모용부에는 모용황이 아버지 모용외와는 다른 방법으로 힘을 키우고 고구려를 집어 삼키기 위하여 늘 위협적인 존재였고 백제 또한 고구려를 넘보는 위로 아래로 주변국의 힘겨루기 속에서 저돌적인 무보다 백성을 아끼고 '피'가 아닌 '평화'로 백성을 아끼며 한사람이라도 희생자를 덜 내기 위하여 자신이나 그외 위세력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서슴치않고 하던 가장 나약하고 비참하고 위기의 시기라 할 수 있는 고국원왕시대,하지만 저자는 사유의 맏아들 구부를 통해 진정 백성이 원하고 백성을 위한 왕은 어떤 왕인지 그의 화두와 같은 이야기로 주변국 왕들을 많나 하는 물음 속에서 어느 방법도 정답이 아니지만 자신의 아버지 사유의 정치가 가장 백성을 위한 방법이 아닐까 하고 묻듯이 이야기를 한다.'죽은 농부와 그 옆에서 삐쩍 말라가고 있는 소'로 비유되는 '왕과 백성의 관계' 사유의 어린 아들 구부는 어린 나이지만 주변국을 돌며 실세들을 만나 그들의 '통치법'을 듣는다. 채찍으로 불심으로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 사유는 그만의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나라를 지켜 나가고 있지만 진정한 통치자란 무엇인지.

 

"전쟁은 서로 번갈아 따귀를 때리는 일과 비슷해요. 어느 한쪽이 맞고 그만두어야 끝나는 거지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때린 뒤 그만두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맞고 끝내려는 거에요.즉 사람들은 거짓으로 전쟁을 끝내려 하고,아버지는 참으로 전쟁을 끝내려 하시는 거예요."

 

사유의 통치법이 더 이상하게 보였던 것은 재략가 아영이 있고 무예가 뛰어난 동생 고무가 있었으며 고구려는 무예가 뛰어난 힘이 넘치는 나라였는데 사유는 그야말로 그런 모든 것들과 반대되는,왕이 무릎을 꿇거나 항복을 일삼고 성의 문을 열어 내어주기도 한다. 백성이 다치지 않고 피를 흘리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다면 그는 무슨 방법으로든 자신의 목소리를 키운다. 하지만 신하와 많은 이들은 그의 방법이 잘못 되었다고,고구려가 힘을 잃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사유와는 상의도 없이 재략가 아영이 나서기도 하며 아영은 아들 무와 결탁하여 주변국을 한 입에 삼킬 수 있는 방법으로 모용부를 위기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다된 밥에 사유는 재를 뿌리기도 한다. 정말 고구려의 왕인가 싶을 정도로 그의 통치법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정도다. 절호의 찬스에 모용황을 죽였다면 고구려의 힘은 어디까지 뻗어 나갔을까? 아님 사유가 왕이 되지 않고 무가 왕이 되었다면 고구려는 또 어떻게 되었을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면서도 무는 사유의 동생으로 사유가 가지지 못한 '힘'을 사유 앞에서 잘 발휘하여 굳건하게 고구려의 힘이 되어준 듯 하다.

 

"천만에! 학자가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는 건 틀린 생각이오. 장군은 보이게 죽이고 학자는 보이지 않게 죽일 뿐, 둘 다 죽여야 할 자는 죽이는 법이오."

 

아내 정효마져 사유를 이해 못하고 그를 따르지 못했다면 사유를 옳바르게 이해한 단 한사람은 그의 아들 '구부'이다.어린 나이에 넓은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지고 주변국을 돌면서 정세까지 익히고 그야말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든든하게 고구려를 지킬 왕의 재목으로 우뚝 서는 듯 하다. 41년이라는 사유의 재위기간동안 크고 작은 싸움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백성들 입장에서는 큰 피해를 입지 않고 그야말로 진정한 왕이 었음을 말해주듯 백제인들이 고구려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고구려인이 다 되어 고구려왕을 추앙하듯 하는 대목에서 사유가 싸움을 회피했지만 백성에게는 진정한 왕이지 않았을까 하는 저자의 생각을 강하게 어필한다.역사는 해석하기 나름이고 어떤 시각으로 어떻게 보는냐에 따라서 달라진다.사유가 주변국과 싸움을 회피하고 성을 쌓는 일에 주력한 것은 어쩌면 '현재' 보다는 '미래'를 내다보며 더 큰 안목으로 정치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싸움이란 어느 한 쪽에서 포기를 해야만 끝이 난다.그러기 전에는 싸우고 있는 순간에는 모두가 피해자다.사유는 그런면에서 백성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정착하여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으며 태평하게 살 수 있도록 '피 흘리지 않는 싸움'을 원했던 고국원왕은 해석자에 따라 비겁하고 비참한 왕이라 표현할 수 있겠지만 다르게 해석하면 제일 지략이 뛰어난 왕으로 진정 백성을 사랑한 왕으로 재해석 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에서는 보여주고 있다.

 

"두려움이란 내일을 생각할 때에만 있는 법."

 

그의 통치를 백성과 신하 그리고 어머니 아영이나 동생 무나 아들들 모두 호응을 해주었다면,그의 편이 되어주었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고 생각해 보게 한다. 어머니 아영은 누구보다 큰그림을 그리는 재략가였기에 사유의 방법을 당연히 맘에 안들었을 것이다. 장효는 워낙에 무로 마음이 향하고 있었으니 사유의 편이 되어 줄 수 없었다. 그렇게 보면 정말 불쌍하고 외롭고 고독한 왕이지 않았나한다. 살아가면서 내 편이 있다는 것은 정말 큰 힘을 얻는데 다른 것도 아닌 나라를 통치하며 모두가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가운데서 그 혼자 옳다고 하는 일은 얼마나 고독하고 힘든 싸움이었을까? 자신과의 싸움과도 같은 시간들이었을 듯 하지만 백성에게는 정말 편한 왕,백성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싸움이 없이 자신이 생업에 임하며 사는 것일 것이다.뚝하면 전장에 불려 나가 싸우고 목숨까지 잃는 일을 좋아하지 않을텐데 그런면에서 보면 그의 해석은 구부의 평가처럼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

 

"본디 한번 홍수를 겪은 땅이 더욱 비옥해지는 법입니다. 도리어 콩만 심던 밭에 팥을 심어볼 기회이기도 하니 굳이 안타까운 일만도 아닙니다."

 

역사를 바탕으로 한다지만 어디까지나 소설이다. 좀더 재밌고 흥미있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 내고 있어 편하게 읽으면서 역사를 다시 보고 다시 생각하게 된다.국사 시간에 배운 것은 '뼈대' 였다면 소설을 읽으며 살을 붙여 나가고 한마리 물고기를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대충 이런 모양이라는 것을 형상화 할 수 있다는 것이다.역사는 과거다.과거를 통하여 현재를 볼 수 있는 거울로 삼 듯이 잘못된 것은 바로 잡고 고정관념처럼 박혀 있던 편협된 생각을 수정할 수도 있다. 이 책에서 가장 큰 소득은 '고국원왕' ,가장 비참했던 왕이라고 알고 있지만 백성들은 그를 누구보다 믿고 따랐다는 것.을불이 마지막 순간까지 싸움터에서 장열에게 죽어갔다면 사유는 백성을 생각하며 백성을 걱정하며 죽어간다. 그런 아버지의 뜻이 구부,소수림왕에게선 어떤 정치로 연결될지.잠들어 있는 역사를 깨우듯 저자의 손 끝에서 펼쳐지는 고구려의 역사가 재밌다.험준한 산을 오르내리며 살기 위하여 삶을 후대에 이어주기 위하여 성을 지켜내기 위하여 치열하게 싸웠던 그 시간들이 밤잠을 빼앗아간다.그리고 고국원왕이란 인물을 다시 그려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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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안토니오 알타리바, 킴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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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라고 해서 가볍게 보았는데 결코 가볍게 읽거나 볼 책이 아니다. 2010년 스페인만화대상 수상작인 이 작품은 '아버지의 자살'로 인해 아들이 그의 아버지가 되듯 화자가 되어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하듯 그의 삶을 이야기 한다. 날고 싶었으나 이카루스처럼 너무 태양 가까이 다가가서 날개가 녹아 내렸던 것일까? 자유를 얻지 못하고 죽음으로 인해 비로소 자유를 얻게 되는 한사람의 결코 자유롭지 못했던 질곡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에필로그를 읽다보니 정말 갑갑하면서 씁쓸하다. 양로원 측에서 아버지의 자살이 날짜가 지났다고 한달 이용료를 내라고 한 것은 정말 인간적이지 못한 일이 아닌가. 스페인 내전과 2차 세계대전등 역사와 함께 역사의 소용돌에 휩쓸려 정말 열심히 살아 보려했고 누구보다 잘 살아보려 했는지만 역사는 그를 놓아 주지 않고 마지막 자살이라는 죽음의 선택후에 비로소 이승의 자유를 선택받을 수 있었던 저자 아버지의 삶은 소설보다는 '만화' 로 풀어내기가 더 알맞았다고 저자는 말한다.그 또한 만화를 좋아했고 책으로 나오니까지 고난의 시간이 있었지만 결과는 좋았다. 책으로 나오며 아버지의 삶은 비로소 자유롭게 놓여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역사의 정당한 대가를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집안에서 미운 오리 새끼 같았던 나는 나무 자동차를 만들어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순간에 그치고 말았다. 농사를 짓지 않기 위하여 도회지로 나가면 자유를 얻을 줄 알았는데 시골과는 다른 도회지는 그만의 삶과 법칙이 있듯 그는 도회지에서도 선택받지 못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나무자동차가 아닌 실제 자동차를 운전하며 삶에 변화가 찾아 오게 되었지만 그것이 큰 돈을 가져다 주거나 명예를 가져다 준 것은 아니다. 스페인 내전에 휩쓸리며 많은 죽음과 죽음을 피하며 구사일생으로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삶을 원망보다는 질곡의 삶 속에서도 '살아가는 방법'을 길을 찾으려 노력하며 편파적인 방법 보다는 자신의 노력으로 살아가려 했지만 뒷거래를 하며 부를 거머쥐고 살아가는 사람들과도 부딪히게 되고 2차 세계대전과 프랑코 정권에 삶은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점점 핍팍해져 가듯 그는 자유와는 거리가 먼 삶처럼 메말라 가는 삶을 살아간다.결혼을 하고 아이를 얻었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역동기를 살아 온 그 속에서 '아나키스트'로의 삶은 고치를 벗어나지 못한 번데기처럼 변태를 거치지 못한 삶처럼 날개를 펴지 못한다.

 

그런 속에서 결혼생활 또한 원할하지 못했다. 점점 믿음이 강해지는 아내와 멀어져 가는 자신, 그리곤 그가 택할 수 있는 것은 요양원의 마지막 삶.요양원에서 또한 다양한 삶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나마 정 붙이고 살던 요양원 친구들이 하나 둘 스러져 가고 자신 또한 언젠가 맞이할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하고는 그는 마지막을 스스로 선택하기로 한다.역사에 휘둘렸지만 어느 것에 물들지 않고 아니키스트로 꿋꿋하게 살아 온 삶이지만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다.그런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며 생의 기록을 남겨 놓은 아버지, 그리곤 훨훨 마지막 순간에 날개를 펴고 날아 오른다. 아내와 아들과의 삶이 좀더 따뜻하고 안정적이었다면 그의 삶은 어떻게 변화하였을까? 우리 아버지의 세대도 한국전쟁등 어려운 시기를 거쳤다.우리와 비슷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뿌리를 튼튼하게 내리고 싶었지만 역사는 그를 받아 들여주지 않은 것처럼 그를 부유하게 만든다. 그런 질곡의 삶의 마지막 또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이라 아쉽고 쓸쓸한데 1일이 아닌 4일에 죽었다고 해서 한달 이용료를 내야 한다고 큰 문제로 발전했다는 것이 정말 씁쓸하다.스페인 역사와 함께 휩쓸려 흘러간 한사람의 인생도 쓸쓸한데 그의 마지막 자유마져 법 앞에서 박탈당한것처럼 씁쓸함을 안겨준다니. 그 모든 안타까움을 호소하듯 아버지의 삶은 다시금 만화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우리였지만 처지는 근본적으로 나아진 게 없었다... 난 여전히 갈구했지만 세상은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흔히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한다.주인공 역시나 처음부터 '아나키스트'가 되려고 한 것은 아니다.소용돌이의 역사 속을 부유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무정부주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공화국시대,스폐인 내전,2차 세계 대전,프랑코 공화국... 어려운 시기를 하나면 거친 것도 아니고 끝도 없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험난한 역사 속에 것처럼 그의 인생은 급류에 휩쓸려 가며 어쩔 수 없이 아나키스트로 만들어 간다. 현실과 타협을 했더라면 다른 이들처럼 뒷거래로 돈을 벌 수도 있었는데 그런 삶을 포기했고 다른 이들의 불편한 삶을 보면서 더욱 움츠러 드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시대를 거쳐왔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삶을 고스란히 보아오고 함께 견디어내야 했던 그에게 주어진 역사는 무엇일까? 그는 아버지가 남기고 간 역사와 싸우고 있다. 운명이란 단순하게 논의할 수 없겠지만 아버지의 인생은 역사와 어우러지지 못하였다면 아들의 인생은 아버지의 인생으로 인해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고 화해하는 법을 찾은 듯 하다.한사람의 삶이 그저 자살이라는 너무 쉬운 단어로 끝나고 말았을 것을 다시금 만화로 소생시켜 과거와 화해하게 만들면서 결코 간단하게 끝난 자살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만화속에 그려진 아버지의 삶이 우리 부모들이 걸어왔던 그 삶을 보는 듯 하여 찌릿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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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마치 - 진옥섭의 사무치다
진옥섭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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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바로 윗집에 할아버지 몇 분이 계셨는데 '시조창'이라고 하나 한시조 읊조리는 것을 정말 잘하셨다. 늘 동네에 할아버지의 시조창 소리가 울리고 할아버지를 찾아 오시는 분들이 계셔서 그야말로 동네에 시조 잘 하시는 할아버지들이 많이 오시니 구경 다니는 맛도 있었다.그것이 정말 어린시절,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인듯 하다.그런데 윗집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다른 한 분도 가시고 나니 그분들을 찾아 오셨던 분들이 나중에 할아버지들이 돌아가신 줄 모르고 오셨다가 너무도 서원해 하시는 것이다. 그분들만큼 잘하시는 분들이 없고 할아버지들이 가시며 시조창이 그시대 끝나고 말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어린시절에 늘 듣고 자라서 그것이 대단한 것인줄 몰랐다. 늘 이웃 할아버지들이 시조창을 하셨으니 더욱 귀한 것인줄 몰랐다. 그런가하면 그 '소리'를 배우려는 동네분들도 없었고 할아버지들이 가시고 더이상 동네에는 시조창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하지만 늘 어린시절을 뒤돌아 보면 할아버지들의 동네를 울리던 '소리'가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그시절이 더 풍성하고 여유롭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런 풍류가 좀더 이어졌더라면 하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또 한가지 이야기는 친정아버지를 보내 드리고 친정엄마가 아버지를 보내 드린 뒷감정이 좋지 않다고 '길닦이' 그러니까 '씻김굿'이라도 해야 편할 듯 하다고 해서 아버지 살아생전,엄마도 그런것을 정말 싫어하셨는데 아버지의 영혼을 편하게 해드리는 길이라고 생각이 드셨는지 어떻게 해서 하게 되었다.나 또한 '무당'이라고 하면 매끄러운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아 '왜 하필...' 하며 식구들에게 말했지만 산사람이나 먼저 간 사람이나 모두가 편할 길이라고 하니 그냥 받아 들이고 가보기로 했다. 씻김굿을 처음 보았는데 정말 작두를 타는 것을 보고는 움찔하기도 했지만 모든 것이 끝나고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자신이 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자신에게 내려와 타는 것이라 위험이 없다고 했다.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오래도록 그 시간이 잊혀지지 않았지만 선입견을 버리고 아버지 영혼을 편하게 보내 드리는 길이었다고 받아 들이고 나니 그 모든 것들이 다르게 보여졌다.

 

어린시절에는 '무당' 이 있어 마을에 혹은 집집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어린마음에 무서움증이 발동해서 숨어서 보거나 그 시간을 피하고 싶었지만 시끄러운 소리에 멀리 피하지도 못했던 그런 기억도 있는데 무당이나 기생이나 소리꾼 춤꾼등 우리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예인'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그저 '직업'으로만 보던 예인들이 어린시절 시조창을 대를 이어주지 못하고 가신 할아버지들처럼 대를 잇지 못하고 그들의 삶이 끝남과 함께 잊혀져 가는 현실,우리의 소중한 것보다 좀더 대중화 되고 미디어화 된 것들에 더 현혹되는 시대지만 분명 우리 속에는 우리가 간직한 '풍류'가 있다. 소중하게 지금까지 지켜지는 것들도 있지만 우리가 모르고 지나는 것들이 더 많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내가 모르는 분들이 정말 많다. 겨우 공옥진 여사나 학춤 정도만 알고 있는데 잊혀지지 전에 누군가는 분명 기억하고 대물림 해야 할 일에 저자가 있는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왜 이제 왔어?' 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좀더 일찍 찾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더 많이 지켜지고 남아 있게 되었을까.

 

원래 '무無'라는 글자는 '춤춘다' 라는 뜻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없다' 는 뜻으로 이용되자 구별을 위해 '천舛'자를 붙여 오늘날 쓰고 있는 '무舞' 를 다시 만든 것이다. 무명의 춤꾼과 익명의 관객으로 만났던 1983년 6월 25일,그로부터 20년, 출연자와 연출자로 만났을 때,그분들 춤의 본령인 무無를 완성해 보여 주었다. 아! 전분들 가시면 누가 내 가슴팍 위를 보행할 것인가.

 

어쩌면 우리는 그들의 '과거'를 받아 들이지 못하고 그저 평범한 현재로 예인들의 과거를 포장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예인으로 받아 들이기 보다는 없던 시대에 천한 일을 했다고 치부하는 풍류로 보기 보다는 소리를 팔고 춤을 파는 일로 보는 색안경을 낀 시선으로 예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시대가 변해 가면서 '우리 소리,우리 춤' 보다는 빠른 음악 빠른 춤에 물들어 가면서 우리가 간직하고 있던 풍류를 잊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풍류를 잊고 살아가면서 '예인'들까지 잊어 가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우리것보다 더 쉽고 화려하고 볼거리가 다양한 문화에 젖어 노름마치  '놀다'의 놀음과 '마치다'의 마침이 결합된 말로 최고의 잽이를 뜻하는 남사당패의 은어를 잊어가고 있는 아닌가.고수중에 고수들이 한 둘 사라져 가듯 우리 삶에는 또 다른 문화가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노름마치' 이야기를 접하니 머리속이 환해진다.

 

어떻게 보면 밑바닥의 예인들을 그야말로 최고의 '노름마치'로 끌어 올려 준 이들이 있어 그들이 한평생 받은 '한'이 씻김굿 한판에 아쉽지만 더 마지막 불꽃을 불사르고 있는 듯 하다. 고수중에 고수이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초야에 묻힌 이들의 이야기가 저자의 맛깔스런 한판 마당극에 옆에서 추임새라도 넣어가며 읽어야 할 것처럼 정말 글을 읽고 있으면 신명난다. 전통을 이어간다는 것은 배부르기 보다는 모자람이고 오래도록 묵혀 있어 곰삭아 발효되어 무엇과도 잘 어울리는 특별한 맛을 글로만 만나본다는 것이 더욱 아쉽다.어릴적 소리를 옆에서 듣는 기회가 많았던 그 시간처럼 많이 접할 수 있고 그들의 삶 또한 수면위로 올라와도 남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도가 찬사를 보내는 그런 풍류로 자리잡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못내 안타까움으로 남았다. 결코 우리가 쉽게 접하거나 우리가 즐기던 것이 아니기에 조금 어려운 부분도 있다.오래전에 유행하던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와 같은 코너에서나 마주할 수 있었던 이야기고 예인들인데 그들의 삶은 문화의 질곡,삶의 질곡으로 이어져 삶이 끝나면 시대도 끝나는 그 한 많은 삶의 이야기가 저자가 풀여낸 글이 맛깔스러워 다시금 꺼내어 읽어봐야 할 책으로 한번 읽고 접기엔 아쉽다.

 

이 책을 읽으며 제일 아쉬운 말이'마지막'이다. 그분들이 가시면 전수자 없으면 대가 끊기는 것이다. 소리도 춤도 사라져 가는 것이다.누군가 기억하지 못하고 기억해주지 못한다면 오래된 유성기에서조차 나오지 않는,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아쉬움이 되고 말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라지기 전에 글로 한풀이가 되었다는 것이 뜻 깊은 일이고 전무후무한 소리꾼 춤꾼들의 농 익은 삶이 담겨진 글을 지금 만나고 있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뛴다.시대가 변하고 문화가 변하고 우리의 풍류도 변해 가고 있겠지만 소중한 '우리 것'을 글이 아닌 현실로 듣고 볼 수 있다면 더 좋은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현장에서 직접 그들의 표정과 숨소리 춤 사위 하나 하나를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진다면,이 책이 그런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잊고 있었던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한 것을 일깨워 주는 시간이기도 했고 소리꾼 춤꾼으로 질곡의 삶을 살다 가신 분들의 한의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 낸 듯 해서 아껴가며 봐야겠다. 책을 읽으며 오래전 법주사에서 보았던 '승무'가 겹쳐지고 어린시절이 생각나 과거와 현재의 모호한 그 시간 속에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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