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 우파는 부도덕하고 좌파는 무능하다??
조지프 히스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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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경제학이 참 우스꽝 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여지껏 20년대의  미국 경제공황은 정답을 찾지 못했다. 또한 지금의 미국발 경제위기는 어떤가? 보이는 손이니 보이지 않는 손이니 하는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스꽝 스럽기까지하다. 그런것들이 존재하기나 한단 말인가? 분명 아담스는 '그 손'을 신의 영역으로 설정해 놓았지만 후대 사람들은 무엇이나 있는 것처럼 떠들어 댔다. 아담스가 들으면 몹시 기분나쁠 것이다.  

경제라는 자체가 욕망의 덩어리가 아니던가? 복지라는 것도 알고보면 서로의 욕망을 배분하는 효과를 가져 오는 것임에도 서로를 위한 보이지 않는 차별이 엄연히 존재한다. 부자들은 굳이 의료보험이 필요없고-돈이 많으니, 정말 가난한 사람들은 한달에 몇만원씩 낼 돈이 없기에 의료보험에서 제외된다. 차별이 아닌가. 이건 분명히 가진자들의 놀음인 것이다. 진정한 복지가 이루어 지기위해서는 극빈자에게는 돈을 받아서는 안되고 부자들에게서 많이 뜯어 내야한다. 이것이야 말로 좌파주의 극치다.  

만약 이렇게 경제를 이끌면 어떻게 될까? 공산주의 몰락은 바로 여기서부터이다. 모든 것을 평준화(?? 멋지다 이말)시킨 것이 화근인 것이다. 나의 소유가 없으니 굳이 '내다 더' 일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치명적 오류다. 경제에서 좌파는 완전히 틀렸다. 경제학은 우파에서 논의될 일이지 좌파의 것이 아니다. 좌파는 경제학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공동체만 존재할 뿐이다. 그 공동체는 억지로 강요된 것이기에 문제이지만... 

자유방임의 경제학은 인간의 자존심을 극대화 시킨 것이다. 그러나 곧 그것은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수정 자본주의는 어떤가? 국가가 어느정도 개입해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이것 또한 우스꽝 스럽다. 국가는 진정으로 경제를 살리고 죽이는 능력이 존재하기나 할까? 이것이 문제다.  

 

조지프 히스의 [자본주의는 부도덕하고 좌파는 무능하다]는  명언은 경제학의 근본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욕망을 따라가고 좌파는 지맘대로 경제학이니 무능하고... 정말 이 시대에 무엇이 진정한 경제학이란 말인가?  

 답은 바로 이것이다. [착하게 살자] 사기치지 말자. 속이지 말자. 양심대로 살자. 그리고 용기있게 행동하자. 욕심부리지 말자. 이게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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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 2009-06-19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은 바로 이것이다. [착하게 살자] 사기치지 말자. 속이지 말자. 양심대로 살자. 그리고 용기있게 행동하자. 욕심부리지 말자. 이게 정답이다 ------ 그렇군요 .. 간단하네요

낭만인생 2009-06-19 15:26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 전 아직 경제학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역사적 측면에서 다만 그렇다고 말할 뿐이죠.

ks0792 2009-06-19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경제학의 답은 아닌 것 같군요.

낭만인생 2009-06-19 15:2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정확하네요. 저는 경제학을 잘 모릅니다. 다만 경제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인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기계적인 어떠한 이론에 불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지적능력이 현저히 미치지 못하기는 하지만, 저의 소원은 그런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경제학보다는 공동체론을 더 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엘륄을 뒤 따라 가며....


엘륄의 가장 깊이 있게 다가왔던 책은 도시의 의미이다. 그 책에서 가장 강열하게 다가왔던 주제는 도시의 의미를 통하여 나타내고자 했던, 뿌리 잃은 이들을 위한 뿌리 내림을 돕는 공동체의 역할이다. 역사 속에서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의 방랑자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려 했던 엘륄의 도전은 저주 받은 도시에서 찾아야 하는 인간의 의미는 아닐까? 하여튼 이러한 묘한 연결고리들은 나 혼자만의 푸념이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마지막 구원의 걸림돌은 정통신앙이다” 혁명적으로 다가왔던 그 짧은 문장은 가슴 깊이 사무치도록 나를 괴롭혔다. 인간의 구원은 교리나, 논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잊어버리는 망각의 헌신을 통해서이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마25장에는 아주 이상한 비유가 나온다. 예수님께서 종말의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의인들을 향하여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 말을 들은 의인들은 깜짝 놀라서 이렇게 외친다.

37 '주님, 저희가 언제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또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 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가 뵈었습니까?'

예수님의 의도는 명확하다. 의인의 조건,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구원의 조건은 자신이 구원 받을 만한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구원을 선포했을 때 놀라는 것이다. 그들은 철저히 자기의 희생적 삶을 잊어버리며 살아갔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 기억되는 것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다음으로 나오는 저주받은 자들 역시 의인들과 동일한 질문을 한다. 우리가 언제 주님을 입히지 않았고, 먹이지 않았고, 찾아뵙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질문이다. 그들 역시 의인들처럼 놀라 경악하고 있다. 어떤 철학자는 그랬지, 사람들이 심판대 앞에서 놀라는 이유는 자신이 모르는 상급이 있기 때문이며, 자신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답변을 듣기 때문이라고.

칼빈주의가 자랑하는 ‘하나님의 주권사상’ 때문에 얼마나 고민했던가? 그것 때문에 수많은 이단들(?)이 죽어갔고, 바로 그것 때문에 세상에서 소유한 것들이 하나님의 선물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되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아니었던가? 내가 너무 칼빈을 오도하는 것일까? 그도 사회적 약자로 살았던 사람인데. 칼빈의 정치사상은 그야말로 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너무나 매혹적인 이론이었다.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신자는 그것들을 관리하는 청지기적 소명을 받은 자들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바르게 사용만 한다면 얼마든지 좋은 것들이다. 정말이지 이처럼 좋은 이론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저 위대한 칼빈주의 후계자인 아브라함 카이퍼의 “이 세계에 하나님의 땅이 아닌 곳은 단 한 평도 없다”는 유명한 말은 철저한 칼빈주의자인 나에게 얼마나 가슴 설레게 했던가!

그러나 엘륄을 접하면서, 그 말은 곧 나에게 수치가 되었다. 병들고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목마르고, 헐벗고, 고통당하셨던 주님의 모습은 도무지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초대교회 교인들이 카타콤에서 칙칙한 모습으로 서 계시는 익명의 주님을 그리다가 얼마 후 시대가 변하여 천상의 주인이요, 우주적 주권자인 그리스도를 그리는 성화의 변천을 보는 듯하다. 천박하기 그지없던 주님이 만유의 그리스도로 그려지자 그들의 신앙은 아름답고 화려해지고, 세련되고 교양적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이 두려워하게 했던 그들의 시퍼런 신앙은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하는 권력으로 다시 태어났다.

나는 분명 엘륄파는 아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벌써 따라가고 있다. 어색한 동행이다. 십자가를 지고 저주받은 골짜기로 나아가셨던 주님의 Via dorosa를 따라 가야지. 아직도 도시 밖에서 떠돌아다니는 가인의 저주받은 백성을 찾아 가 봐야지.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지. 그리고 잊혀지고 또 잊혀져 망각의 삶을 살아 가련다. 그것은 나팔이 아닌 침묵, 그것은 거리가 아닌 골방.  

자크엘룰의 책들은 비범한 통찰력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책은 아무래도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자유의 투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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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블로거 - 블로그로 먹고사는 법
대런 로우즈.크리스 개럿 지음, 우성섭 옮김 / e비즈북스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단지 사고 싶다. 더도 덜도 아니다. 그러나 꼭 사야되나 싶은 책이다. 나의 삶에 꼭 필요한 것인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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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비즈북스 2010-10-20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e비즈북스 출판사입니다. ^^
사고 싶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네요.
꼭 사지 않아도 도서관에서 구하실 수 있으면 한번 읽어보세요.
나름 시사하는 바가 많은 책입니다.
두 저자의 생생한 체험담이 흥미롭기도 하고,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도 많습니다.

앞으로 또 좋은 기회에 저희 책으로 만나뵐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십대 - 꿈을 심는 십대 1
김태원 지음 / 보금자리 / 2001년 10월
평점 :
품절


일관성의 결여.. 조금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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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강에서 바벨론 물가까지 - 구약역사서의 문예적-신학적 서론
김지찬 지음 / 생명의말씀사 / 1999년 3월
구판절판


그런데 다행히도 최근에 문예적 접근과 정경적 해석법이 발전되면서 구약 역사서 본문을 그 자체로 생동감 있게 이해할 수 잇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구역 역사서는 케케묵은 남의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모습을 반영하는 드라마틱한 스토리로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3쪽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은, 이 이야기를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 읽고 해석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제로 구약 역사서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이야기로 읽어야 하며, 또 그렇게 느끼도록 설교하고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16쪽

자신의 과거 역사를 잃어버리는 "기억 상실증" 환자들은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다고 한다. "공동 기억을 통해서 공동체는 형성된다. 공동체 기억 속에는 과거에 대한 기억와 해석이 들어있다"-21쪽

역사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에 기초해 있으면서도 미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포, 즉 설교라 할 수 있다.-34쪽

만일 사사기가 잘 엮어진 통일된 이야기라고 한다면 우리는 사사기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게 읽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미 창출 메카니즘"을 알아야 한다. 한 스토리의 의미란 스토리 전체로서 전달되는 것이다.-149쪽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가나안 땅 한 귀퉁이에 소수 집단으로 전락한 여백의 공동체였다.-2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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