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삶을 만드는 것은 끊임없이 마셔대거나 흥청거리는 것도 아니고,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도 아니고, 잘 차려진 식탁에서 생선이나 다른 고급 음식을 즐기는 것도 아니다. 맑은 정신의 이성적 추론, 모든 선택과 회피의 동기를 탐구하는 것, 그리고 정신을 대단히 혼란스럽게 만들게 마련인 단순한 의견에 불과한 것들을 멀리하는 것이 행복한 삶을 만든다.

- Epicurus, "Letter to Menoeceus"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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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과 채찍 - 목표로 유인하는 강력한 행동전략
이언 에어즈 지음, 이종호.김인수 옮김, 최정규 감수 / 리더스북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번역도 썩 마음에 들지 않는데, 책 원문의 미주번호는 왜 임의로 뺀 것인가. 번호가 붙어있어야 본문을 읽다가도 저자가 단 주석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필요하면 그때그때 미주를 확인할 게 아닌가.

미주에 본문의 번역 문장을 그대로 쓰지도 않고 적당히 본문 내용의 키워드로만 주석 위치를 표시해버리면(심지어 그 키워드가 본문과 주석에 다르게 번역된 곳도 있다), 그 주석이 어디에 붙은 것인지를 독자더러 재주껏 알아서 일일이 다시 찾아보란 말인가. 전 세계에 통용 중인 (주석)‘번호‘라는 가장 간명하고 경제적인 매칭 방법을 도대체 왜 삭제하나. 본인 확인할 때 주민등록번호 대신에 ‘나는 몇 년 몇 월 며칠에, 지금은 없어진 어느 동에서 태어나, 몇 번째로 출생신고한 남성인데, 내 번호 한 번 찾아보세요‘라고 하면 그게 듣는 사람한테 친절한 설명방식이 되나?! 너무 이상해서 설마 지은이 본인이 그렇게 했나 싶어 영어 원서를 찾아보니 멀쩡하게 미주번호가 붙어있다(경제학자에 로스쿨 교수가 그랬을 리 없지;;;). 웅진씽크빅, 리더스북에는 편집 과정에서 이런 문제제기를 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단 말인가.

지적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지만, 번역서가 나온 2011년은 카너먼(Daniel Kahneman)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고 근 10년이 다 된 시점인데 Khnemal은 실수라 치더라도, ˝캐쉬맨˝이 웬 말인가! (책 370쪽)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건 ‘바른번역‘이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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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짤막하고, 술술 잘 읽히는 편이다. 책 초반부를 읽을 때 별 다섯 개를 매기고 시작하였는데, 한국사회에 대한 분석 부분이 지금 읽기에는 그리 와닿지 않고(소개된 연구들이 2012년 초판 1쇄 발행 당시로 보더라도 왠지 최신의 것들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친절하게 소개하여 비교해볼 수 있게 해주시는 게 어딘가!), 뒤로 갈수록 해설서로서는 문장이 불친절해지는 것 같아 별 네 개로 마무리한다. 하지만 부르디외, 또 『구별짓기』에 관한 좋은 안내서임이 분명하고, 한국 학계에서 부르디외의 편향적 수용에 대한 홍성민 교수님의 비판에도 십분 공감한다. 아울러, 교수님 말씀처럼 한국판 『구별짓기』를 위하여, 부르디외에 대한 진지한 재전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2019. 8. 20. 발행된 6쇄까지 나와 있는 것 같은데, 그것도 대단한 일인 것 같다.


  부르디외를 잘 모르면서 그의 '상징자본'이니 '아비투스'니 하는 개념들이 다소 불명확하고, 또 한편 너무 당연한 것 아닌가 하는 막연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행동경제학을 파던 중에 칸트, 또 부르디외의 문제의식과 닿는 지점에 이르게 되어 논문과 책을 찾아 읽고 있는데... 벌써 20년이 지난 글이지만, 홍성민, "[인간과 사상] 부르디외", 사회비평 제25권 (2000)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0006959이 부르디외 사상 전반의 얼개를 잡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책 40쪽에 나오는 내용인데, 칸트의 『판단력 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은 프랑스어로는 Critique de la faculté de juger 또는 Critique du jugement로 옮긴다. 그리고 『구별짓기』의 프랑스어 부제가 다름 아닌 (La Distinction) Critique SOCIALE du jugement (강조는 인용자), 그러니까 칸트의 제목에 '사회적'을 수식어로 붙인 '판단의 사회적 비판'이다. 아무튼 한국에서는 부르디외가 주로, 미국에서 공부한 문화사회학자(소비사회학자)들을 통하여 단편적으로만 소비되었다는 것은 어렴풋이 느끼겠다.


[다만, 부르디외 식 구분에 따른 '중간계급' 내지 '프티부르주아 계급'에 속한 지식소비자 중에, '미국화로 인해 학문의 다양성이 죽고, 그것이 만악萬惡의 근원이다'라는 식의 주장을, 자신이 읽고 접한 구체적 학문적 근거에서가 아니라 어디선가 들은 남의 말을 토대로 과감하게 하시는 분들이 계신데(그 남들도 다시 거슬러 올라가면 남의 말을 토대로...), 일부 진실이 없지는 않지만, 반드시 맞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분들은 동시에 '유럽 식 대안'으로 가야한다는 입장을 막연히 갖고 계신 경우가 또한 많고, 그것은 아마도 유럽 여러 나라들이 가진 사민주의적 전통과 그 연장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온건성'을 염두에 두신 것일 게다. 그러나 각론에 들어가 꼼꼼히 따져보거나 깊이 숙고하지는 않은, 추상적 말씀이실 때가 많다는 것이 솔직한 인상이다. 그분들도 잘 아시는 것처럼 미국은 전 세계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연구자와 이론을 게걸스럽게 흡수하고 있고, 특히 유럽의 논의라면 대개는 우리보다 훨씬 정치하게 꿰고 있으며('덕 중의 덕은 양덕'이라는 말도 있지만, 대학산업이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분야 중 하나이다 보니 연구자층이 워낙에 두텁고, 드넓은 미국 전체에서 찾으면 차원이 다른 덕후도 더 많을 수밖에 없다는 느낌이다. 게다가 유럽 학자들이 우리나라보다는 결국 미국에 가서 자신의 이론을 프로모션하므로...), 그 밖에 다양한 경로로 받아들인 여러 나라의 논의가 그 자체로 미국 내에서의 다양성-혹은 제국-을 이룬다(그래서 차라리 비판을 한다면, 한국 연구자들이, 주로 미국, 그 중에서도 미국의 일부 경향만을 제한적으로 수입하였다고 비판함이 조금 더 정확한 것 같다. 그러나 인력과 자원의 한계로 미국에서 쏟아지는 논의들조차 온전히 따라가고, 소개하고, 때로는 돌아가는 판에 선수로 참여해 비판하고 한다는 것이 사실상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태다. 우리가 경쟁력을 갖출 수 있으려면, 맨날 세계 몇 위에도 못 들었냐고 욕하기 전에, 학자들이 교육과 행정, 심지어 입시에까지 들여야 하는 에너지를 잘 분배, 분산하여 누군가는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혜성같이 떠오른 싱가포르 난양공대(NTU) 같은 곳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운영방식이 우리와는 아주 많이 다르다. 우리나라에 입시정책은 있어도 대학정책은 없고, 특히 각 대학의 자율성에 맡겨 스스로 경쟁력을 쌓을 수 있게 할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다).


부르디외가 세계적 학자가 된 것도 1980년대를 전후해 미국 대학을 자주 방문하면서부터였다. 그처럼 미국 대학들은 플레이어라기보다는 플랫폼처럼 되어있다(물론 분야에 따라 당연히 편차는 있다. 넘사벽으로 미국이 압도적인 분야들이 있지만, 그래도 구대륙이 여전히 우위를 가진 분야가 없지는 않다)어떤 이론과 주장이 지구적 단위에서 학문적 토론의 식탁에 논의거리로서 오르려면, 우선은 유수 저널에 영어로 논문이 등재되어야 한다. 부러운 일이지만 최근 세계사에서 영국, 미국이 연달아 헤게모니를 쥐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그런 탑급 학회들이 미국에 근거를 둔 경우도 많고 미국 학자(전 세계에서 모여 미국에 자리 잡은 학자)들을 가장 비중 높은 구성원으로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런 학회들이 미국만의 학문을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미국의 싱크탱크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저러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미국 인구는 전 세계의 4%밖에 안 되지만, 어떻게 나머지 96% 인구 중에서 똑똑한 인재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주저앉힐까'를 고민하고 있다. 에릭 슈미트가 위원장으로 있는, '인공지능에 관한 국가안보위원회(NSCAI)' 위원 중 한 분의 말씀에 따르면, '어쨌든 인공지능 개발도 사람 싸움이고, 미국의 가장 큰 전략적 목표는 중국이든, 러시아든, 인도든, 또 세계 어느 다른 나라에서든 제일 똑똑한 사람들을 모아 미국에서 활동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중국 상류층의 최대 인생목표는 사실 (미국 등으로의) '이민'이다]. 아무튼 백악관에서 나오는 인공지능 보고서들이 이분들을 거치는데, 개중에는 미국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국적 불문 미국 영주권을 줘야한다고 주장하는 분까지 있다고 한다(이민정책을 선택적으로 운용하자는 것이다). 그만큼 미국의 의사결정그룹 다수가 다양성을 전략적 가치로까지 생각하고 있는 판인데, '미국을 거친 이론은 무조건 다양하지 않다'고 하는, 20, 30년 전쯤부터 나오던 이야기를 만연히 반복하는 것은 편견의 산물일 수 있고, 아무튼 현실과 반드시 부합하지는 않는 것 같다.]


  책으로 돌아와, 문화 확산의 매체가 책이 다룬 프랑스 1970년대와는 현격히 달라진 마당에(질 리포베츠키 Gilles Lipovetsky의 표현에 따르면, 대중소비사회에서 이제 '과소비사회'로 넘어온 마당에, 책 172쪽), 부르디외의 이론이 오늘에까지 바로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맥락에서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숨겨진 경로'를 찾아낸다"고 하는 문제의식과 방법론만은(최샛별, 2008), 한국사회를 분석하는 데도 유효한 것 같다. 오히려, 지금에 와서 성별, 세대, 직업, 지역, 경제력, 종교 등에 따른 한국적 아비투스가 너무나 복잡다단해졌기 때문에(책 43쪽에 정리된 '아비투스'의 개념적 활용 범위가 유용하다), 기존의 (계급/민족) 환원주의적 이론과는 다른 부르디외 식의 종합적 접근이 더 절실하다고 느낀다. '대중 이데올로기 지형'에 대한 실증분석이라니!! 그런 점에서 책 46쪽 이하에 나오는 부르디외의 설문지는 무척 흥미롭다(예컨대, 아래 이미지와 같은 것들). 이전까지 부르디외를 문화이론가로서만 많이 접했지, 그의 실증연구방법론에 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저작들에도 관심이 간다. 책 103쪽 이하 '중간계급' 부분도 재미있게 읽었다.






  번역은 꽤 된 편인데도, 이상하게 한국에서 부르디외가 온전히 수용되거나 여전히 먹히지(?) 않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도 든다. 『구별짓기』 (하)권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셈인지? 이렇게 모으니 동문선 출판사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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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온라인 서점에서 딱 한 권, 무려 96,000원에 팔리고 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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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구나!

대학에서는 후설을 중심으로 한 신칸트학파가 전체 학계를 주도한 편이었는데, 하이데거는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사상을 그대로 표현하는 경우에는 박사학위 논문 통과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 교수직을 얻는 것조차 불투명해질 우려가 있었다.따라서 하이데거는 자신의 생각을 대단히 우회적인 방법을 통해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이데거의『존재와 시간』만큼 난해한 책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그런데 그 이유가 반드시 학문적인 것만은 아니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하이데거의 저작이 읽기 어려운 이유는 정치적 요인과 밀접히 관련된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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