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중의 고전이고, 경제학에서는 상식에 가까운 기초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우리의 법 체계도, 경제활동도 여전히 화폐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번번이 가치를 보정한다는 것이 귀찮은 일이기도 하고, 대부분의 경우 착각으로 인해 그런 과정의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책 156쪽). 아무튼 화폐가치가 늘 변동함으로 인하여 초래되는 사회적 불공정, 사회 불만, 사회적 비효율성이 막대하고(책 132쪽), 합법의 외양을 띤 강탈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책 108쪽). [책에서는 "social injustice"를 "사회적 불공평不公平"으로 옮겼으나, injustice는 '불공정不公正'으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just에 "平"의 의미를 넘는 결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justice도 '정의正義'라 하지, '공평'이라고 하지는 않지 않는가. 번역에 관하여 후술.]


  사람들을 미몽에서 깨우기 위한 글이라, 비유와 예시가 풍부하고 쉽게 읽힌다. 8장 211쪽 이하의 '요약' 부에 책 내용 전체가 명제 식으로 요약되어 있다.


  다만...


  번역되지 않았다면 읽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기에 우선 감사한 일이나, 의구심이 드는 대목들이 있어 몇 군데 원문을 찾아보았고, 번역에 대한 신뢰가 다소 떨어졌다(먼저 확실히 밝혀두자면, 필자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고, 이 책의 옮긴이와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번역 경력이 일천하다). 참고로, 1928년에 나온 책이라 저작권이 만료되었기 때문에 웹상에서 원문 PDF 파일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https://babel.hathitrust.org/cgi/pt?id=mdp.39015020847706&view=1up&seq=7 등.


  예컨대, 8장 첫 문단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We have seen that credit control, even international credit control, is already in process of development. Such control must, in its details at least, be exercised by central banks, not by governments; these may only lay down general rules.

  But there is much more than this that governments may and should do in order that we may at least possess a reliable monetary standard. []


  역자는 아래와 같이 옮기시고는 다음 문단까지를 한 문단으로 처리하셨다(둘째 문단 뒷부분은 생략).

  신용 관리, 심지어 국제적 신용 관리가 이미 발달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신용 관리는 세부사항만이라도 정부가 아니라 중앙은행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정부의 역할은 전반적인 규약을 마련하는 선에서 끝나야 한다. 그러나 신뢰할 만한 화폐 본위를 갖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그것보다 훨씬 더 많다. []


  우선 중앙은행이 하는 통화정책으로서 "credit control"은 "신용 통제"로 옮기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다. "신용 관리"라 하면, 개인이나 기업 관점에서 대출 등에 관한 '신용 등급'을 관리하고, 은행 등 금융기관에서 신용조회, 조사, 평가, 채권추심, 부실채권 처리 등을 통하여 '신용 위험'을 관리한다는 의미의 credit management의 뜻을 강하게 내포하게 된다(단적으로, 신용정보협회에서 시행하는 '신용관리사' 시험은 중앙은행 업무나 통화정책과는 무관하다 http://www.cica.or.kr/ 참조).

  "credit control"을 신용 통제가 아니라 신용 관리로 옮겼기 때문에 그것이 "[must] be excercised" 된다는 것도 "이루어[져야 한다]"로 두루뭉술하게 처리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신용 통제 정책이) "수행", "시행", "집행", "실시"[되어야 한다] 등으로 번역되었어야 의미가 분명하다. 법적인 용어는 아니지만,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수행"으로 쓰는 경우가 왕왕 있고, 이 문단에서도 어감상 가장 가깝지 않나 싶다.

  '규약規約'이라는 말은 협의에 의한 '약속約束'으로서 규칙을 의미하나, 본문의 "general rules"에서 rules는 (중앙은행과 구체적 역할은 다르더라도) credit 'control'을 위한 것이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lay down"하는 것이므로 "규정"으로 번역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경우 "general rules"도 "전반적인 규약"이 아니라 "일반규정"이 된다. 이 글의 맥락과 용법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rule"은 법학에서는 "principle" 또는 "standard"에 대비하여[예컨대, '규정 중심 규제' 대 '원칙 중심 규제';  Louis Kaplow, Rules Versus Standards: An Economic Analysis, 42 Duke Law Journal 557-629 (1992) 등 참조], 또 경제학에서는 "discretion"에 대비하여('준칙주의' 대 '재량주의') 쓰이는 특수한 질을 갖는 용어이기 때문에, 보조를 맞추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general"과 함께 쓰이기까지 했으므로, 흔히 쓰이는 "일반규정"으로 번역함에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렇게 되면 정부가 각론을 정하거나 집행하지는 않고 원칙만 세워 (이를테면 법령으로) 성문화하여 둔다는 의미가 된다.

  사소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위 인용문에서 세 번 등장하는 may도 번역문에는 그 의미가 완전히 빠져 있다. "정부는 고작 일반규정을 마련할 수 있을 뿐이다. (문단 나눔) 그러나 우리가 신뢰할 만한 화폐 본위를 가질 수라도 있기 위해서 정부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은 훨씬 많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번역 문제를 더 다루지는 않는다. 뜻만 얼추 통하면 되지 않냐고 할 수도 있지만, 학술서적이기 때문에 미묘한 말맛의 차이가 큰 오해를 낳을 수 있다.


  부글북스는 고전 번역의 틈새를 잘 찾아나가고 있다. 스스로도 여러 권 가지고 있고, 특히 애덤 스미스의 『정의에 대하여』나 케인즈의 『평화의 경제적 결과』가 출간된 것을 반갑게 생각하고 있었다(아직 읽지는 못했다). 대부분을 같은 역자가 번역하셨기에 찾아보니, 부글북스의 대표로 나온다. 당신께서 직접 출판기획 및 번역 업무를 함께 하시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분량이 길지 않다고는 하여도 평이한 내용도 아닌 책들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 거의 한 달에 한 권꼴로 - 번역해내고 계신 셈인데, 아무래도 완성도를 더 높여 내시려면 한계비용이 매우 클 것으로 보인다. 목록을 정리하고 나니 '이 책도?' 싶고 더 엄청나서 경외심이 느껴지는데, 이런 분 번역에 관하여 왈가왈부하는 게 맞나 싶을 정도다. 개역판이 나온 책들이 여럿 있는 것으로 봐서 책을 내신 뒤에 어떤 식으로든 번역을 다시 점검하시기도 하는 것 같다. 아무튼 우리 지식사회와 공론장에 기여하시는 바가 매우 큰 분이심에는 틀림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폭력과 정의 - 문학으로 읽는 법, 법으로 바라본 문학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안경환.김성곤 지음 / 비채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뒤로 갈수록 재미있는 글이 많이 나온다. 내용이 궁금해지는 책, 영화가 여럿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문주의의 승리라 이름할 수 있을 웅혼한 서사. 인문학자가 아니라면 이런 책을 도저히 생산해낼 수 없을 것 같다. 562쪽부터 647쪽까지에 걸친 미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발표지면은 책이 나오기까지 지은이가 인고한 세월을 응축하고 있는 것같아 자못 경이롭다. 책은 3·1운동이 어떻게 우리 "존재의 기초"이자, "불회귀적 사건"인지를 설득력 있고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책 543 ~ 544쪽). 우리 헌법이 왜 첫머리에 '3·1운동'을 등장시킬 수밖에 없었는지 이 책을 읽고서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작년 6월경 책의 80% 정도를 읽고 덮어두었다가 오늘 남은 부분을 마저 읽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전율이 돋았고, 마음에서 우러난 박수가 나왔다(당시에 남겨 둔 리뷰는 https://blog.aladin.co.kr/SilentPaul/10923232).


  우리도 Project Gutenberg (http://www.gutenberg.org/)와 같이 여러 1차 자료와 문헌들을 디지털 아카이빙하는 작업에 더 투자하면 좋겠다. 20세기 이전 자료들이 대부분 한문으로 남아있는 탓에 우리 자신에 대한 연구에 진입장벽이 존재하지만, 중국, 대만, 일본과 협력하여 발전된 한자인식(OCR) 기술을 나누었으면 좋겠다(현재까지의 데이터베이스 구축 현황은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http://archive.history.go.kr/ 참조). 여러 언어간 번역 자료를 부지런히 디지털화하여 번역기의 정확도를 높여나갔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이런 연구가 더 많이 쏟아지고 또 외국에도 소개되면 좋겠다. 자료 더미에 묻힌 원석을 발굴하여 빛나는 보석으로 꿰는 작업이 많아지면 좋겠다.


  국문학, 국어학, 국사학은 앞으로 어떻게 미래를 개척하여야 할까. 국어국문학의 소멸을 걱정하는 시대에 우리 정신의 근간이라는 당위적 언설만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국영수"의 앞자리를 아직 '국어'가 차지하고는 있지만, 그렇게 '국어'의 특권적 지위를 보장한 것이 도리어 혁신을 가로막아 도태를 초래한 것은 아닐까. 중고등학교 교과목으로서 '국어'는 미래세대에게 우리 말과 글의 비전을 충분히 제시하고 있는가. 아무리 가장 높은 비중을 둔들 2, 30대에 이르러 꾸준히 한국문학을 읽는 인구가 얼마나 될까. 우리말을 아름답게 살려 쓰려는 고민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문광호, "국어국문학, 미래 한국의 救命艇 될 수 있을까?", 교수신문 (2018. 10. 8.)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42793 등 참조.

  작가가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이고, 문학이 시대정신을 구현하며, 문예지가 첨단 논쟁의 무대가 되었던 시절도 있었다. 실기 위주의 문예창작학과로 변신을 꾀하기도 했지만, 문학도, 작가도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말과 글 자체가 20세기에 비하여 심각하게 쪼그라들어 있다. 이는 곧 사고의 단순화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우리말을 보존하는 노력에 동참한다는 차원에서 학술지에 우리 어휘를 살려 투고한 적이 있었는데, 가독성이 오히려 떨어진다고 수정을 권고받은 일도 있었다. 그만큼 우리 언어생활의 거대한 빙산이 급속히 녹아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김호기,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20) 창작과비평 대 문학과지성", 경향신문 (2015. 8. 1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8182207085&code=210100; 신효령, "[기자수첩]문학의 위기, 만화·영화는 멀쩡하건만···", 뉴시스 (2018. 10. 18.) https://newsis.com/view/?id=NISX20181017_0000444984 등 참조.

  [유수의 영어 언론과 잡지들은 영어 어휘를 풍부하게 구사하기 위하여 무진 애를 많이 쓴다. 아름다우면서도 위트 넘치는 문장들이 전 세계 독자들로 하여금 기꺼이 지갑을 열어 컨텐츠를 사보게 만든다. 우리도 순우리말 어휘, 옛말을 포함한 거대한 유의어 사전을 만들면 어떨까. 비슷한 단어들을 적절히 교차하여 구사하고, 또 전달하려는 뜻에 따라 그 단어들간 미묘한 차이를 가려쓰려는 노력이 많아지면 언어 세계의 지구 온난화를 늦출 수 있지 않을까. 영어로 글을 쓸 때 자주 참고하는 유의어 사전 사이트인데, https://www.thesaurus.com/을 써보면, 요즘은 잘 쓰지 않는 자질구레한 단어들까지, 비록 연결선의 강약은 다를지라도, 어휘의 그물망을 정말 촘촘하게 연결해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Merriam-Webster 사전을 보아도, 우리의 "표준국어대사전"과는 그 폭과 깊이에서 차원이 다르다. 예컨대 "love" 같은 말을 찾아보면, 이것이 라틴어나 고대 영어, 고대 상류 독일어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12세기 전부터 어떤 뜻으로 쓰였는지가 나온다. 최신 용례와 풍부한 유의어, 반의어 목록이 제공됨은 물론이다. https://www.merriam-webster.com/. 한글이 최고야 하면서 국뽕에 취해 있기에는, 우리말이 표현할 수 있는 생각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반백 년 전까지만도 우리말, 우리글을 지키는 것 자체가 과제였지만, 국립국어원(https://www.korean.go.kr/)에서 지금 벌이는 말뭉치 구축 사업 등 여러 사업에 더하여 어휘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보존하는 일에 조금 더 관심을 가져주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민간 활용이라는 측면을 더 신경써주면 좋겠다. 지금 웹상의 사전 시스템으로는, 예컨대, 처음부터 "다홈"과 같은 말을 모르면 이를 찾아 쓸 도리가 없다. '도리어', '오히려', '차라리', '그래도' 같은 말들을 찾았을 때 이들을 연결해서 보여주어야 비슷한 뜻을 가진 말들을 교환하여 쓸 수 있다. 언어 순수주의가 역설적으로 우리 언어를 빈약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하여야 한다. 언어는 자꾸 이어 버릇하여야 풍부해진다. 유연석, "국립국어원, 중단됐던 '국가 말뭉치 구축사업' 10년 만에 재개", 노컷뉴스 (2018. 12. 6.) https://www.nocutnews.co.kr/news/5072089 참조.]


  책 이야기로 돌아와서, 워낙 밀도가 높은 대작이라 선뜻 요약하기가 힘들지만 오늘 읽은 부분에서 몇 가지만 아래에 밑줄긋기 식으로 갈무리해 본다(제3부 제4장 이하에서 제4부 제2장 '이중어' 편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 당대의 잔다르크들을 복권시킨 제3부 제4장 '여성' 편은 감동적이었고, 이광수와 그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심훈, 또 제3의 길로서 엄상섭에 대한 서술도 흥미로웠다. 조소앙이 베르그송을 만나고 와서는 "쥐뿔도 모르는 놈!"이라고 내뱉었다는 일화도 나온다[책 442쪽, 「베르그송과 조소앙」, 『동아일보』(1936. 3. 18.), 이철호, 「한국 근대소설과 '의식의 흐름', 『상허학보』 36, 2012. 10.에서 재인용].


  권보드래 교수님도 정말 부지런히 쓰고 계신다. 공저가 많으신데, 이 다음에는 어떤 작품을 들고 나오실지 기대가 많이 된다.


박원경은 19세 소녀로 "천황폐하께 불경이요 (...) 부모님께도 불효" 운운하며 설득하는 심문관에게 "내 앞에 천황폐하가 어디 있"냐고 반박하면서 "우리 부모님 생각은 (...) 칭찬해주실 테니까 나는 효녀"라고 당당히 진술했다는데, 그 소문이 당시 황해도에 파다했다고 한다. - P397

"나는 3·1 운동 없으면 오늘은 없다." - 함석헌,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함석헌 저작집 6』, 한길사, 2009, 164쪽. - P431

엄상섭의 시각마따나 3·1 운동은 종착점보다 출발점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볼 때 적극적 의의를 갖는다. 3·1 운동은 개인적·민족적 층위에서 공히 불회귀적 사건인 동시, 실패냐 성공이냐의 질문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종류의 사건이다. 그것을 부정한다면 ‘나‘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존재의 기초이자 폭발적 성장의 계기인 것이다. 3·1 운동을 통해 조선인은 비로소 집단적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서의 정체성을, 즉 저항하는 존재로서의 자존을 형성할 수 있었다. 조직망도 통신망도 저발달한 상태에서 사실상 전국 모든 지역에서 일어난 이 놀라운 운동은 지금까지도 부동(不動)의 민족적 알리바이다. ‘우리‘는 단연 일제에 반대했던 것이다. 비록 힘이 모자라 짓밟혔을지언정 그것은 식민지시기 내내, 그리고도 오래 더 살아남은 기억이었다. ‘3·1 운동이 없었다면 민족으로서의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 P543

그러나 동시에, 이광수 같은 인생과 대화하는 과정이 없다면 독립운동가들의 존엄마저 박약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그렇다고 이광수를 망각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이광수를 몰아내는 대신 그와 대결하고 싶다. 그는 아직 내게 맞설수록 새로운 대상이다. 그러므로 적대와 분할이 기승스러워지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3·1 운동의 봉기 대중처럼, 대결할지언정 누구도 추방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어 본다. 죄를 묻고 벌을 정해야겠지만 궁극에는 모든 존재를 품는 그런 질서를. - P5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한을 다룬 책이 쏟아지고 있다. 알라딘의 [국내도서 > 사회과학 > 통일/북한관계] 분류하에만도 2020. 5. 22. 현재 2,106개의 상품이 등록되어 있고(90년대 이전 책 중에 등록되지 않은 상품도 많을 것이고, 다른 여러 카테고리에 흩어져 있는 책도 있다), 매월 단행본이 10권 꼴로는 꾸준히 등록되는 것 같다. 이전과 다른 것은, 이데올로기적 경쟁 대상 내지 당위적 실천의 지향으로서 북한과 통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북한의 실상 자체(인권 문제를 포함하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노력이 늘어났다는 점이다(경쟁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북한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세력이야말로 북한 없이는 죽고 못 살고, 북한을 여전히 진지하게 경쟁상대로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 북한이탈주민을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게 된 영향도 있을 것이다. 통일부 집계에 따르면, 2000년대에는 연간 입국 인원이 2,000명~3,000명에 이르렀으나, 최근 들어서는 연 1,000명대로 줄어있다. 김정은 집권 후 국경통제가 늘어난 영향도 있을 테고, 이 책에 나오는 것처럼 개인의 경제활동과 재산 사유화를 어느 정도 용인하면서 살 만하게 된 사람들이 늘어서일 수도 있다. 이탈주민 다수가 중국에서 잠복기를 가진 뒤에 남한으로 온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분간 입국자는 더 줄어들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2019년 말까지 북한이탈주민 3만 3천여 명이 남한에 와서 살고 있다. 인구가 늘면서 북한이탈주민 사이에 사기(詐欺), 동업 실패 등 분쟁도 늘고 있다. [통일부 > 주요 사업 > 북한이탈주민정책 > 현황 > 최근현황] https://www.unikorea.go.kr/unikorea/business/NKDefectorsPolicy/status/lately/

  


  최근 전 세계적으로 '난민 문제'가 이슈가 되다 보니,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남한에도 북한 주민이 3만 명 넘게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깜짝 놀라며 난민 지위를 부여받는 것인지부터 묻는다. 우리 헌법상 북한도 대한민국 영토이고, 따라서 북한 주민도 특수한 지위를 인정받기 때문에, 법률(「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정원 조사를 거쳐 보호 여부를 결정한 뒤 하나원에서 사회적응교육을 받고, 직업훈련과 생계급여도 받는다는 이야기를 해주면 무척 신기해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비하여 외국에서는 훨씬 더 남한과 북한을 아예 별개 나라로 생각하는 것이다. 남북이 각자 공식적으로는 통일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대한민국 헌법 제4조, 통일부 존재 등). 하나원 도서관이 정서적(+ 사상적?) 연착륙을 돕기 위하여 책을 사려깊게 갖추어 두고 있다는 이야기나, 중국 어딘가에 숨어 살다가 입국하는 경우가 많아 글말은 몰라도 입말로서 중국어는 익숙해져 입국한 탈북 젊은이들이 대학에서 중국어, 중국 관련 전공을 많이 선택하고, 호기롭게 경제학, 경영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가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는다.[통일부 > 주요 사업 > 북한이탈주민정책 > 현황 > 입국 및 정착과정] https://www.unikorea.go.kr/unikorea/business/NKDefectorsPolicy/status/entry/; 위키피디아 하나원 페이지(영문) https://en.wikipedia.org/wiki/Hanawon 참조.


  분단 체제가 장기화되면서 교류 단절 상태가 오래 지속될 줄 알았더니, 연결, 저장매체의 발달로 남북이 서로의 실상을 간접적으로나마 꽤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책 2장의 "한국 대중가요에 푹 빠진 평양 시민", "한국 드라마를 실시간으로 시청하는 평양 시민"에서 보는 것처럼, 상당히 많은 북한(평양) 주민들이 남한 컨텐츠를 소비하고 또 동경하는 것 같다(북한이탈주민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분도 지인 소개로 북한에서 남한 드라마를 숨어서 보기 시작했다고 했다). 유학 나가있는 당 간부 자제들은 웹하드, 토렌트 사이트에 가입하여 남한 영화, 드라마, 대중가요를 '불법 다운로드'하여 즐긴다(10년도 더 전에 들은 일이다). 유튜브에서 중국인 등 외국인 관광객이 북한을 여행하고 업로드한 영상을 쉽게 만날 수 있고, 심지어 북한 쪽에서 운영하는 계정들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책이나 영상을 보면 적어도 평양만큼은 전혀 아무 것도 없는 상태까지는 아님을 알 수 있다(생각보다 준수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미국에서도, 그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더라도, 특히 트럼프의 카운터 파트너로서 '김정은'에 대한 관심이 늘어있다. 서점에서도 북한 관련서를 여럿 발견할 수 있었다. 국제 학술대회를 가보면 북한의 '장마당'이나 웬만큼 자율권을 갖는 '회사'들에 관한 이야기가 오간다(책 1장 "시장경제의 펌프, 장마당" 등 참조).


  요컨대, 북한은 '자본주의'라고까지는 못해도 '시장경제'를, 어쩔 수 없이, 부분적으로라도 도입하고 있고, 2009년 화폐개혁 실패 후 시장에 대한 통제력은 더욱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대외교역 없이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있다(국제사회의 경제제재가 상당히 고통스러울 것이다).


  이 분야 전문가는 아니지만, 조심스럽게 변화가 임박하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다. 1년? 3년? 아무리 늦어도 10년 내에는 올 것이 오리라고 보고 있다. 그 때까지 저 체제가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독일, 베트남 등 모델이 거론되고 북한의 지하자원에 관하여 많은 기대를 거는 것 같지만, 이 책 328쪽 이하에 나오는 것처럼 과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통일로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도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북한도 늙고 있다[책에 인용된 KDI 보고서는 김두얼, 남재현, 김석진, 김영훈, 이상준, 송준혁, "남북한 경제통합 연구: 북한경제의 장기발전전략" https://www.kdi.re.kr/research/subjects_view.jsp?pub_no=13282인 것으로 보인다. 여담이지만, 최근 김정은의 신변을 둘러싸고 벌어진 해프닝으로 주성하 기자가 그런대로 믿을 만한 정보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된 것이었다. 다만, 이 책은 주로 기억에 의존하여 쓴 것인지 디테일에서 빈구석이 보이고(날짜가 궁금한데 책에서 찾을 수 없다거나), 책 특성상 일일이 출처를 들 수 없는 면이 있는 것도 같지만 위와 같은 문헌을 제대로 표시하지 않은 것은 아쉽다. 그래도 지은이가 머리말에서 희망한 것처럼 "북한을 이해하는 데 대표적인 입문서"가 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발상을 전환하여 북한을 '에스토니아' 모델로 발전시키는 것은 어떨까. IT 기술이 격차를 빠르게 좁히는 묘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최근 미국 정부 발표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 2년간 암호화폐 거래소 해킹 등으로 수십억 달러를 빼돌렸다고 한다. 정상적 경제활동이 막혀있다 보니 이런 식으로 외화를 버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모르긴 몰라도 상당한 기술자 풀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Danny Nelson, "미국 정부, '북한 암호화폐 범죄' 목록 공개", Coindesk Korea (2020. 4. 16.) https://www.coindeskkorea.com/news/articleView.html?idxno=70735; Ian Allison, "북한, 암호화폐 이용한 거래로 경제 제재 회피" Coindesk Korea (2020. 4. 9.) https://www.coindeskkorea.com/news/articleView.html?idxno=70685; Sebastian Sinclair, "North Korean Hackers Ramp Up Efforts to Steal Crypto Amid Coronavirus Pandemic," Coindesk (May 11, 2020)].


  빠른 사회 동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법문화의 통합이라고 생각한다. 책 전반에 나오는 것처럼 북한 사회는 현재 '뇌물의 연쇄'로 돌아가고 있고, 공동체를 위해 규범을 지킨다는 의식이나 공감대가 거의 없는 상태인 것으로 보인다(위반자들을 아무리 사형시킨다 한들, 법이 먼저 공정하고 또 일관되게 집행되지 않는 한 규범력은 결코 높아지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평양의 법률시장 개방이 임박했다는 소식은 주목할 만하다. 북한사회에 법치주의와 법문화부터 뿌리 내리게 해야 한다. 강한, "(단독) 북한, 사실상 법률시장 개방… 법적 인프라 구축 본격화", 법률신문 (2020. 5. 18.) https://m.lawtimes.co.kr/Content/Article?serial=161567; 강한, "(단독) 한국 로펌, 평양 진출 추진", 법률신문 (2020. 5. 18.) https://m.lawtimes.co.kr/Content/Article?serial=161551 등 참조.


  전 세계가 방역하느라 정신이 없는 시기이지만, 그런 때일수록 더 철저하게 대비하고 움직여야 한다. 어쩌면 많은 나라가 여력이 없는 지금이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 국제적 협력, 특히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의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인심을 쌓아두어야 한다. 중국경제가 어려움을 겪는 시기가 위기이자 결정적 기회가 될 가능성이 있다. 한국 채권에 외국인 투자자가 모이고 있는 것은 호재다. 결국 통일자금은 그렇게 마련해야 한다. 이미 많은 기관들이 나름의 분석과 행동전략을 마련해두고 있지만, 불현듯 닥칠 제재완화와 교류증대의 상황에 먼저 발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각자 처한 위치에서 만반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덧) 133쪽에서 137쪽까지에 나오는 '대동강맥주' 이야기, 특히 1번부터 7번까지 맥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정말 매혹적이다. 현지에서 먹는 맛이 궁금하다!


  주성하 기자는 위 책 이후에도 책을 한 권 더 내셨다.




  북한의 경제와 일상...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묵향 2020-08-04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 글에서 통일부의 ˝북한이탈주민 입국인원 현황˝은 입국자만 집계한 것이어서, 실상을 정확히 보여주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불과 며칠 전에 성범죄 수사 중 재입북한 탈북민에 관한 기사가 언론을 뒤덮기도 하였지만, 끝내 남한에 정착하지 않고(또는 못하고) 제3국으로 가는 인구도 함께 고려에 넣어야 할 것이다. 이에 관하여는 주성하 기자의 다음 영상을 참조. https://youtu.be/vm2Qz8Zx7Uo

오늘 ˝좋아요˝가 달려서 보니 글에 잘못된 내용이 있음을 깨닫고, 원문을 수정하지는 않고 댓글로 남겨 둔다.
 



  알라딘 리뷰를 보고 중고서점에서 사고는 책장에 꽂아둔 채 잊고 있던 것을 아이가 찾아냈다.

  나온 지 10년도 더 지나 '첨단'기술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스타인웨이 피아노'라든가 '깁슨 전기 기타' 같이 꼭 최신일 필요는 없는 기계들을, 내부가 어떤 부품들로 이루어졌는지를 찬찬히 보이며 원리를 설명하고 있어서 대단히 유익하다. 『도구와 기계의 원리』에 비하면 첨단기술을 더 많이 다루었다고 볼 여지도 있고...

  아내는 처음에 아이가 이 책을 꺼내달라고 했을 때 '누드백과'라는 제목만 보고 짐짓 긴장하였다고 하는데, 아이와 함께 책을 보고 나서 '이런 좋은 책이 있었으면 왜 진작 보여주지 않았냐'고까지 하였다. 아이가 즐겁게 보고 있다.

  거듭 느끼지만 DK는 정말 좋은 출판사다. 다만, 한국 출판사인 을파소에서, 번역 제목을 굳이 저렇게 지을 필요는 없었을 것 같다. 제목이 달랐다면 책도 더 많이 팔리지 않았을까. 원제는 『Cool Stuff Exploded』이다. 글쓴이 Chris Woodford는 어린이 과학책을 여럿 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데이비드 맥컬레이 David Macaulay의 『도구와 기계의 원리』도 다시 나왔다. 역시 DK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다. 한국 출판사는 달라도 DK 출판사에서 낸 유사한 책들이 여럿 있다. David Macaulay는 사실 더 많은 책을 냈는데, 모두 소개되지는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