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를 실수로 지웠다가 다시 넣었더니 썸네일 이미지로 다른 책이 뜬다.)


  이상하고 '후진' 생각과 실천들에 대하여 그것이 왜 이상한지를 설명하여 납득시켜 주어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동시에 그런 차별적 인식은 우리 안에 너무 깊이, 켜켜이 뿌리박혀 있어서 끝없이 성찰하고 정정해 나가지 않으면 어느새 차별과 권력을 실천하는 것이 된다. [예컨대, 어제 링크한  "조나단, 한현민, 라비 '흑형'이란 말에 상처 받는 이유", BBC News 코리아 (2019. 9. 4.) https://www.youtube.com/watch?v=QnTPdBMLzOo 영상을 보면, 한국에서 백인들에게는 "혹시 어디서 공부하시냐?"라고 묻지만, 흑인이나 동남아시아 사람들한테는 "혹시 어디서 일해요? 어느 공장?"이라고 묻는다는 장면이 있다. 유쾌하고 발랄하게 우리 내면의 그릇된 코드를 성찰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좋은 영상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위와 같은 장면은 은연중에 노동에 대한 비하와 혐오를 내포한 것일 수 있다. 예컨대, 같은 영상을 블루 칼라 노동자나 그 자식들에게 보여준다면 그 또한 상처를 주는 일이 되지 않을까?] 페미니즘은 차별과 권력의 코드를 파헤치고 드러내는 최일선에 있는 사유로서, 우리의 일상을 하나하나 바꿔 나가는 가장 실천적 투쟁이 된다.


  재작년 말에 양성평등 강연을 준비하면서 참고할 목적으로 절반을 읽다가 이번에 마저 읽었다(https://blog.aladin.co.kr/SilentPaul/10557605). 최근 들었던 강연에서 참 인상 깊었던 대목 중 하나가, 한국 사람들 다수는 백주 대낮의 언론사 인터뷰나 설문조사에서 자신의 차별적 인식과 혐오 발언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고스란히 발화한다는 것이었다(자기 얼굴이 노출되는데도). [역시 어제도 링크한 세계가치조사 http://www.worldvaluessurvey.org/WVSContents.jsp를 보면, '다음 사람들을 이웃으로 맞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나라별로 집계하고 있다. 질문한 항목은 약물중독자(Drug addicts), 다른 인종의 사람(People of a different race), AIDS 환자(People who have AIDS), 이민자/이주노동자(Immigrants/foreign workers), 동성애자(Homosexuals), 종교가 다른 사람(People of a different religion), 폭음자(Heavy drinkers), 비혼 동거 커플(Unmarried couples living together),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People who speak a different language), 전투적 소수자(Militant minority), 전과자(People with a criminal record),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사람(Emotionally unstable people), 무슬림(Muslims), 유대인(Jews), 전도사(Evangelists), 출신국에서 오지 않은 사람(People not from country of origin, 맥락을 정확히 모르겠다), 정치적 극단주의자(Political Extremists)이다(이들 범주 하나하나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위와 같이 범주화하는 것이 적확한지, 심지어 정의할 수나 있는 것인지 대하여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대중 인식 지형을 파악하기 위한 조사이므로 그러한 질문은 잠시 접어두자). 우리는 다른 인종과 이민자/이주노동자, 성적 소수자, AIDS 환자 등 타인에 대한 배타성이 전반적으로 아주 높다(특히 AIDS 환자에 대한 차별적 인식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인데, 이는 과학적이지도 않고 보건의료 관점에서도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서양에서 AIDS는 더 이상 치명적이거나 전파되는 질병이 아니게 되었음에도, 한국에서 AIDS 환자는 병이 아니라 자살로 죽는다는 서글픈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더 큰 문제는 우리가 흔히 인종차별, 소수자 차별이 우리보다 심하다고 생각하는 나라들에서도 그런 인식을 우리처럼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 나라들에서 그런 말을 공적인 자리에서 서슴없이 하면 질 떨어지는 수준 낮은 사람으로 여겨지고 친구를 잃게 된다. 나아가 직장을 잃을 수 있고 법적으로 처벌받는 일도 생긴다. 지금 미국에서 각종 총기로 무장하고 거리에 나와서 "COVID-19에 관한 언론 보도는 모조리 '가짜 뉴스'이고 트럼프 대통령을 낙선시키고 우리 경제활동과 자유를 억압하려는 민주당의 '음모'"라는 식의 말을 대놓고 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적어도 낮에는)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보수든 리버럴이든, 또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외국에서는 그 비슷한 취급을 받는 언행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뱉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좌파 정당은 좀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때때로 시류에 타협하는 모습이 보이고, 특히 남성 중에 차별적 태도를 곧잘 드러내는 사람들이 없지 않은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국뽕 마케팅'은 주의 깊게 자제, 경계할 필요가 있다. 당장 중국의 자화자찬이 엄청난 백래시를 맞고 있지 않은가. 트뤼도 총리가 여러 면에서 오락가락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다음 연설은 우리가 곱새겨 볼 만하다. 캐나다 정부에서 LGBTQ 커뮤니티에 대한 차별 관행을 역사적, 공식적으로 사과한 연설이다. "Full Speech: Justin Trudeau offers formal apology to LGBTQ community for government discrimination," Global News (2017. 11. 29.) https://www.youtube.com/watch?v=xi23IL3b6cs]


  예비군 훈련과 민방위 훈련의 차이, 술집에서 '이모'라는 호칭, 아침드라마의 사회학과 같이 평소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일상에 대한 지적이 흥미롭다. 아무튼 대한민국 남성들이여, 우리 자신이 잠재적 가해자요, 차별주의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직면하자("남성들이여, 우리가 악어임을 받아들이자" https://blog.aladin.co.kr/SilentPaul/10398432). 그래야 우리도 더 행복해진다.


  곧 『민원을 제기합니다!』라는 신간을 내실 모양이다.




  그리고 다음 책들이 인용되어 있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쓴 리베카 솔닛의 책이 상당히 많이 번역되어 나와있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어둠 속의 희망』과 『걷기의 인문학』은 각각, 2006년 창비, 2003년 민음사에서 나왔다가, 2017년 창비와 반비에서 다시 나온 것이다.




추가) 가톨릭 교회에서 여성 사제를 허용할 때까지 신도들이 미사 참여를 보이콧하는 건 어떨까... 지은이처럼 그 때문에 이미 떠난 이들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미사 전례에서 가부장제적 어휘들이 불편하다. 여성 사제 불허 방침이 영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한상봉, "여성사제, 여전히 남은 숙제", 가톨릭 일꾼 (2018. 12. 3.) http://www.catholicworker.kr/news/articleView.html?idxno=2463; "여성의 역할 존중하지만 여성 사제는 허용 안 돼", 가톨릭평화신문 (2016. 11. 13.)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659584&path=201611; 조광태, "여성+기혼 사제의 등장?…가톨릭 전통, 천년의 빗장 열릴까", UPI 뉴스 (2019. 10. 2.) https://www.upinews.kr/newsView/upi201910020062; 이미령, "가톨릭 구하려면 여성 사제 허용하라", 한국일보 (2019. 10. 23.)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10231500342581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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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미로운 글들을 많이 담고 있다. 2002년에 나온 책으로, 인용된 문헌들은 훨씬 더 오래된 연구들이라, 이 책만 봐서는 최근 20~30년 사이에 눈부시게 발달한 방법론을 전혀 챙길 수 없다(책에 따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은데, 1995년에 정민사에서 같은 책이 나왔던 것으로도 보인다). 현실의 법제도 운용에 곧바로 젹용될 수 있는 실용적 연구들임에도, '실증자료에 입각한 과학적 정책 수립'과는 거리가 먼 우리 문화에서는 '법심리학'이라는 분야 자체가 제대로 크지 못한 채 딴 나라 이야기로 머물러 있다.


[어느 나라나 다소간 그런 경향을 가지고는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정책 결정의 방향을 좌우하는 것은 '진영'이고, 그 진영에 의한 '프레임 선점'이다. 한 번 프레임과 방향이 서고나면 그와 배치되는 어떤 증거도, 전문가들의 우려와 이견도, 덮고 넘어가기 일쑤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http://likms.assembly.go.kr/bill/main.do에서 법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들여다보면, 별다른 근거도 없이 당론에 따라 대충 감으로 만들어지는 법이 얼마나 많은지를 여실히 볼 수 있다. 우리가 깔보는 여러 선진국들은 법을 그 정도로까지 허술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아무리 트럼프 같은 대통령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더라도, 대중의 관심을 끄는 상징적, 이데올로기적 정책 일부를 제외하고는(오늘날 정치는 거대한 비즈니스이고, 정당도 이익집단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와 같은 정책들은 국가의 예산과 자원, 인사권을 둘러싸고 벌이는 경쟁-선거-에서 대중을 낚기 위한 擬似쟁점(pseudo-issue)이고 미끼들이다), 효과와 부작용에 관한 경제학적 분석, 비용 편익 분석을 당연히 거치고, 다양한 입장과 각도에서 작성된 심도 깊은 논문·보고서가 여러 기관과 단체에서 제출되며(근거를 바탕으로 결론을 내는 게 아니라 정해진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근거를 만드는 경향이 최근 더 뚜렷해진 '정당 산하 연구소'들과는 다르다. 또한 국회의원들이 어떤 자료를 참고하여 법을 만드는지를 알기 어려운 우리와 달리, 입법자료가 온라인에 충분히 공개되어 여러 방식으로 검증받는다), 다른 입장에 선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공청회가 개최된다(누구라도 쉽게 온, 오프라인으로 볼 수 있다). 그 자리에서 의원들은 입장을 열어둔 채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실질상 대다수 법들에서 대통령이나 정당은 문제되지 않는다. 어쩌면 분야별 전문가 풀을 최대한 활용·존중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대통령이 누가 되든 큰 틀에서 나라가 굴러가는 데는 대차가 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다만, 이번 팬데믹 국면에서 미국은, 대통령의 개인적 성향이 여러 약점을 극대화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대재앙을 초래하고 있다). 연방제 국가의 경우, 신기술이나 여타 새로운 사회적 현상과 관련한 정책을 수립함에 있어서, 복수의 주(state)가 저마다 일자리 유치 등 다양한 동기에서 다른 버전의 정책을 내놓고, 연방 차원에서는 이들의 정책실험 결과를 본 뒤에 최선의 것을 연방법으로 최종 낙점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미국은 이론상 50 개 이상의 법이 실험될 수 있다). 아무튼 우리 유권자들도 미디어로 보이는 이미지만 볼 것이 아니라 대표자들이 어떤 역량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따져 그들의 '유인구조'에 건설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안목을 키울 필요가 있다. 의안정보시스템에 공개된 회의록(특히 소위원회)을 찬찬히 보면, 겉으로는 멀쩡하게 잘 포장되어 있는 정치인들마저 실제로는 얼마나 전문성이 떨어지고 책임 없이 아무 말이나 늘어놓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 우리가 이들에게, 언론에 나갈 '한 방'에만 집중하면 되는 유인구조 이상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도 당내 정치, 이미지 관리나 신경쓰고 정쟁에 골몰할 뿐 공부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료와 근거를 따지지 않는 이런 문화를 바꾸려면, '링크'를 허용하지 않는 포털의 기사 제공방식에도 문제를 제기하여야 한다. 우리 이상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에서 주요 언론이 자료를 인용할 때 그 근거를 링크로 달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독자는 기사를 직접 검증할 수 있고, 필요한 경우 스스로 더 조사할 수도 있다. 따라서 링크 여부는 민주적 언론 환경의 징표이다. 그런데 우리는 각 언론사가 아니라 포털의 큐레이팅을 통해 뉴스를 접해왔고(네이버는 다음카카오와 달리 기사 선별 정책을 바꾸었지만 여전히 독점적 플랫폼으로서 지위를 버리지 않고 있다), 그 상황에서는 '클릭장사'에 가장 큰 유인이 놓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언론사들이 굳이 더 노력해서 양질의 기사를 생산하려 하지 않는다(다른 나라들에 비해 기사 길이가 짧고 독보적 기자 몇 명을 제외하고는 수준도 얕다. 언론이 대중교육의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장기적으로 이는 크게 우려스럽다). 시장이 작다는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자료를 꼼꼼히 링크로 달아 신뢰성 높고 차별화된 기사를 내는 언론들이, 더 많은 독자, 혹은 절대 독자 수로는 아니라도 기꺼이 구독료를 낼 수 있는 독자를 많이 확보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안타깝게도 충분히 개선되지 못한 지금의 기사들마저 독자를 유튜브에 빼앗기고 있다).]


  돌아와서, 책의 13장 중 12장이 직, 간접적으로 형사법 이슈를 다루는 논문인데, 우리는 실증에는 관심이 없고 규범만 따지느라 범죄학, 범죄심리학, 행형학과 같은 인접학문의 성과들이 법에 충분히 녹아들지 못한 채 따로 놀고 있어 씁쓸할 따름이다. 원자료(raw data)가 충분히 공개되지 않다 보니, 사회과학자들도 우리 사회의 문제는 충분히 분석하지 못하고 나날이 격차를 벌리는 외국 연구만 부럽게 바라보며 손을 빨고 있어야 하는 형편이다.


  어쨌든 법심리학은 우리나라에서 불모의 상태로 남아있는데, 그나마 Wrightsman's Psychology and the Legal System 제8판이 감사하게도 올해 3월 번역되어 나왔다. 제8판은 2013년에 나온 것인데, 미국에서는 한글 번역본이 나오기 2년 전인 2018년 3월 이미 제9판이 나왔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우리 현실이다. 이 책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최신의 지식은 어쨌든 대개 영어로 생산되고, 영어로 직접 읽지 않는 한 최소한 5~10년씩 번번이 뒤처질 수밖에 없다(연구자 풀이 두텁지 못하여 쏟아지는 최신 지식을 모두 소화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는, 국내에서 유명한 대중 강연자 내지 지식소매상의 강연이나 대중서 몇 권을 접하고선 그것이 전부이고 최고라 생각하는 우물 안 개구리가 너무 많다. COVID-19에 대한 상대적 성공만으로 자만하기에는 아직 우리가 이룬 것이 턱없이 적다. 겸손하게 내실을 다져야 한다.


[해외체류 경험이 전반적으로 많아지면서 다행히 예전보다는 우리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게 된 것 같고, 고생 중인 2030세대는 윗세대에 비하여 편협한 자기중심성이 덜한 것 같기도 하다. 어찌되었든 이들 세대는 이전 세대가 누렸던 기회를 누릴 수 없을 것이고, 당분간 계속 힘들 것이다. 그러나 '단군 이래 최대 스펙'이라 불리는 이들 능력자들이 주역이 될 15~20년 후에는 지금 응축한 실력이 분명 빛을 볼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한편 또 그럴 수 있으려면, 타인과 소수자에 대한 배타성부터 뼈를 깎는 노력으로 고쳐야 한다. 우리 사회의 소수자 혐오와 차별적 인식은 '세계가치조사' 등 여러 조사에서 최상위에 랭크되어 있다. 부끄럽고 '저질스러운' 모습이다. "조나단, 한현민, 라비 '흑형'이란 말에 상처 받는 이유", BBC News 코리아 (2019. 9. 4.) https://www.youtube.com/watch?v=QnTPdBMLzOo; 세계가치조사 http://www.worldvaluessurvey.org/WVSContents.jsp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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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한국사회에서 있었던 여러 젠더 이슈들을 "인식"할 적절한 언어를 찾지 못해 답답하던 차였는데, 생각의 도구들을 많이 충전할 수 있었다. 완벽한 답까지는 아니어도 무엇을, 어떻게 질문하여야 하는지, 또 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좋은 안내를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다. 재미도 있다.

  실린 글 다섯 개와, '들어가는 글' 모두 챙겨 둘 만한 생각꼭지를 담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는 제주지검장 사건을 '퀴어 범죄학(Queer Criminology)' 관점에서 다룬 루인 님의 글이 가장 흥미로웠다. 퀴어 범죄학은 생소한 분야였는데, 1990년대 중후반 등장하여 2010년대 들어서부터 활발해졌다고 한다. 찾아볼 필요를 느꼈다. 다만, 루인 님의 글에서, 잘 차려진 질문들 위에(이를테면, '공적 공간'과 '공공성' 내지 '공연성' 개념이 관찰자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우발적으로 구성되는 개념임과 동시에, 관찰자가 어떤 존재냐에 따라 달리 규정된다는 점에 대한 지적. 예컨대, "제주지검장의 행위를 목격한 사람이 '덩치 좋은' 성인 '남성'이었다면 어땠을까?" 책 83~86쪽), 결론부에 해당할 87쪽 이하 "'괴물'을 보호하라" 부분은 논지가 충분히 서술되지 않았다고 느꼈다("쾌락을 생산하는 음란 행위와 성행위를 범죄로 판결하는 현행법, 혹은 사회 규범이 정말로 보호하는 것은 성/폭력을 재생산하는 바로 그 자신 아닌가? 지배 규범의 윤리에 따라 괴물로 추방된 존재인 나는 나와 같은 괴물을 '보호'하기 위해 '괴물'을 보호하는 사회에 질문하고 싶다. 괴물을 보호하라. 그런데 누가 괴물이고 무엇을 보호하는가." 책 90쪽).




  정희진 님의 글은 책 제목을 이루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나도 전략적 차원에서 간혹 '양성평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양성평등은 여성주의의 덫이다. 여성주의의 목적 중 하나는 사회 정의로서 성차별을 철폐(완화)하는 것이지, 남녀 평등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역사도 역사지만, 집단과 집단이 평등해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책 49쪽)]. 한국 사회의 근대성 지향에 기댄 양성평등 담론을 성찰하고 비판한다는 취지는 공감하였으나,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 다음과 같이, 조금 허탈하게(?) 끝맺고 계신다. "현재 한국 사회가 여성의 노동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성차별이 극심한 사회에서 남성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역할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모색을 제안해야 한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사회 정의의 문제이자, 남성 개인의 양심의 문제이다. 젠더 문제에 관한 한 남성에게는 '양심의 자유'보다 '양심의 의무'가 더 중요하다. 나는 수천 년 동안 이어진 여성 문제에 대한 '외면의 정치'가 인간 본성으로 굳어질까 두렵다. 사회는 '여성 문제'를 부담이나 갈등으로만 여기지 말고, 여성주의에서 대안적 삶의 지혜를 찾아야 한다." (책 56쪽). 이전에 쓰셨던 다른 글들과 차이를 느끼지 못했고, 인용 표시가 충실하지도 필연적이지도 않다. 

  권김현영 님의 글은 '미성년자 의제강간죄'를 다루고 있다. 최근 의제강간 기준연령이 만 13세에서 만 16세로 상향되었는데, 그것만으로 충분한 조치는 되지 못할 것이다. 여성 청소년과 남성 청소년이 달리 처하는 성별화된 조건과, 청소년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권리에 대한 분석과 논의가 함께 따라야 한다. 메갈리아 미러링과 한국 개신교의 '동성애 혐오'를 다룬 류진희, 한채윤 님의 글도 생각해 볼만한 주제를 다뤘다. 다른 도란스 기획 총서들도 제목이 눈길을 끈다. 모두 읽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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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생 때 이해도 못하면서 읽고 그저 "권리를 위한 투쟁"이라는 표현만 남아 어쨌든 멋있다고 여겼던 기억이 난다(범우사 판으로 읽었다, 아래와 같이 표지도 멋졌다). 당시에는 사적 분쟁에서 내 이익과 권리를 찾기 위한 (이기적) 행동을 '투쟁'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까지 격상시키는 것이 다소 억지스럽다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이번에 읽은 번역본에도, 자주 등장하는 私法을 한자로 병기하여 司法에 관한 서술이 아님을 그때그때 분명히 표시해주셨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20년만에 다시 읽으니 무척 새롭다. 크게 감동했고, 깊이 공감했고, 또 좋은 이정표가 될 것 같다.





[심재우 선생님께서 번역하셨던 것을 다시 번역하신 제자 윤재왕 교수님께서도, 학부 1학년 1학기 여름방학 때 처음 읽었다가 대학원 시절 원문으로 힘겹게 읽고, 유학생활 중에 다시 읽어 비로소 제대로 예링을 만나게 되셨다는 이야기를 '옮긴이 서문'에 쓰고 계신다. 『마르부르크 강령』과 이 책을 다시 옮기시게 됨에, 2012년 심재우 선생님의 팔순을 맞아 차병직 변호사께서 하신 제안이 계기가 되었다는 일화가 나오는데, 감사하고 다행한 일이다. 『마르부르크 강령』도 재작년에 읽고 대단히 큰 감동을 받았는데, 읽자마자 리뷰를 쓰지 않았더니 결국 못 쓴 채로 있다. https://blog.aladin.co.kr/SilentPaul/10205020 작년에는 심재우 선생님의 스승이신 베르너 마이호퍼의 『법치국가와 인간의 존엄』도 손제자로서 다시 번역해 내셨다.]





  내 권리와 이익이 공격받았을 때 이를 수호하기 위해 투쟁에 나서는 법감정이야말로 공적 영역에서도 불의에 항거하는 투쟁의 원동력이 된다. 도덕은 이익과 동떨어져 천상에 존재하는 신성한 보물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이익을 공정하게 배분하고 지켜주기 위해 역사적으로 가다듬어져 온 것이다. 예링은 말한다. "국가법과 국제법을 위해 투쟁하는 자는 다름 아닌 사법[인용자 주: 私法, 이하 같다]을 위해 투쟁하는 자이다. 사법적 관계 속에서 습득한 성격이 국가법이나 국제법과 관련해서도 그대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한 국가의 사법 영역에서 씨를 뿌려 싹튼 대로 국가법과 국제법의 영역에서 수확을 걷게 된다. 삶의 극히 사소한 관계에 해당하는 사법 영역의 낮은 곳에서 한 방울 한 방울 힘이 형성되고 모아져 국가가 필요로 하는 정신적 힘이 축적되고, 이 축적된 힘은 다시 훨씬 더 거대한 국가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 따라서 한 국민에 대한 정치적 교육이 이루어지는 진정한 학교는 국가법이 아니라 사법(私法)이다. 그리하여 한 국민이 필요한 경우 자신들의 정치적 권리와 국제법상의 지위를 어떤 식으로 방어할 것인지를 알고 싶은 사람은 각 개인이 사법의 영역에서 자신의 권리를 어떻게 주장하는지를 관찰하면 된다." (책 101쪽).


  고등학생 때 와닿지 않았다는 내용이 이런 대목이다. 예링은 영국인을 예로 들었지만, 지금 살아있었다면 한국인을 예로 들었을 것 같다. "영국인이 집요하게 다투는 한 푼의 돈에는 영국의 정치적 발전이 깃들어 있다. 모두가 아주 사소한 일에서도 자기 권리를 용감하게 주장하는 것이 일반적 관행인 국민에게서 해당 국민이 갖고 있는 최상의 것을 강탈하려는 무모한 짓을 하려는 사람은 없다." (책 102쪽). 단돈 몇천 원 때문에라도 소송에 나서는 우리 국민의 정서가, 촛불항쟁에 나아가게 한 분노의 씨앗이고 싹이다. 그러한 국민적 법감정이 결집되어 권력을 사유화(私有化)한 전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렇기에 "국민의 법감정을 함양한다는 것은 곧 국가의 건강과 힘을 함양하는 것이다." (책 106쪽).


  예링이 지적한 맥락에서, COVID-19의 세계적 대유행에 대응하는 우리와 일본의 차이를 만든 큰 이유를 다음 표에서와 같은 소송건수 차이가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잘 아시는 것처럼 일본 인구가 우리 두 배를 넘지만 소송건수는 우리가 몇 곱절이다.


[우리 경제의 성장과 발전에서 재판제도의 효율성이 가졌던 역할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사업을 하거나 회사에서 업무를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경제활동의 흐름이 막혀 분쟁이 생겼을 때 이를 빠르고 적절하게 해결하여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재판의 역할은 생각 이상으로 중요하다. 사업에서 법적 분쟁을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때, 재판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였다면 경제가 제대로 돌아갔을 리 만무하다. 저 정도 사건량을 소화해내기 위해 3,000명 법관을 공장처럼 갈아넣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고도성장과 함께 사건도 빠르게 복잡해졌고, 처리속도가 느린 것도 아니다. 세계은행에서 매년 내는 Doing Business(사업환경평가) 보고서에서는 재판기간, 소가 대비 소송비용, 사법절차의 질적 수준 등 지표를 평가하여 'Enforcing Contracts'(법적 분쟁해결) 순위를 내고 있는데, 2011년부터는 우리나라가 싱가포르와 번갈아 1위 또는 2위를 차지하고 있다(2017년과 2018년에 1위를 차지하였으나, 2019년 다시 순위가 떨어졌다). 사업환경 종합평가에서도 190개 경제단위(국가 등) 중에서 매년 4위 또는 5위를 차지하고 있다. 역대 리포트는 https://www.doingbusiness.org/ 참조. 국제거래 사건에서, 우리나라에서 1심 재판이 끝날 때 영국에서는 같은 사건의 첫 기일 날짜가 그제서야 통보되더라는 경험담을 들은 일이 있다. 일본에서는 도쿄 지하철 독가스 테러사건 재판과 같이 형사재판이 계속되는 동안 피고인들을 수년 동안 구금해두는 일이 허다하다(확정까지 16년이 걸렸는데 그동안 교주와 간부들은 계속 미결구금된 상태로 있었다). 박인동, "너무나도 다른 한·일 형사사법 환경", 법률신문 (2012. 12. 17.) https://m.lawtimes.co.kr/Content/Opinion?serial=70332 참조. 반면 우리는, 구속 시 재판기간이 1심 6개월에, 항소심과 상고심 각각 4개월(부득이한 경우 예외적으로 6개월)로, 아무리 길어도 1년 6개월 안에는 끝나야 한다(3심을 다 거치게 되는 경우에 모두 합쳐서). 충격과 놀라움을 주는 사건들이 없지 않았고, 윤재왕 교수님께서도 '심재우 선생님의 열정에 (법)현실은 대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몹시 안타깝고 허전하다'고 쓰셨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일부 사례들에 대한 경쟁적 보도로 빚어진 관념과는 조금 다를 수 있을 것 같다. 여하간 이러나저러나 법관 수는 지금에서 최소한 두세 배는 늘리는 것이 맞다고 본다.]


[위와 같은 현상의 배경에 관하여도 여러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이누미야 요시유키, 『주연들의 나라 한국 조연들의 나라 일본』은, 양국 특성을 ‘자기관’(自己觀) 차이에서 찾았다. 한국인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 미치려 하는 주체적 자기’인 반면, 일본인은 ‘다른 사람들의 영향력을 받아들이려 하는 대상적 자기’라는 것이다. 소송으로 내 권리를 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한국과, 집단의 여러 기제가 소송을 주저앉혀 가급적 소송을 피하고자 하는 일본의 차이를 낳은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음 글도 참조 "일본과 아시아, 세계에 평화와 인권, 민주주의를 수출하는 나라가 되자" https://blog.aladin.co.kr/SilentPaul/11647958]




  예링의 이익법학, 목적법학에 관하여 천착할 필요를 느낀다. 특히 주관적 법(subjektives Recht, 권리)과 객관적 권리(objektives Recht, 법)의 구분을 그동안 가볍게 보아 넘겼는데, 재산권과 인격권, 금전배상제도, 민사벌, 형사법 등의 관점에서 주관성과 객관성의 구분을 다시 음미할 구석이 많은 것 같다[여담이나, 제목 Der Kampf ums Recht에서 Recht는 법이자 권리이다. 흥미롭게도 영어권에서는 "권리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 The Struggle for Law, 즉 "법을 위한 투쟁"으로 번역하고 있다. Recht의 번역에 관하여는 최근 칸트 번역을 놓고도 문제되었다. 이충진, "번역자의 자세에 관하여", 한겨레 (2018. 6. 28.) http://www.hani.co.kr/arti/PRINT/851019.html 참조].

  110쪽 이하에 나오는 로마법 발전 3단계도 (진지하게는) 처음 접하는 것인데, 오늘날 그 의미를 새롭게 찾을 내용이 많다고 생각했다. 특히 미국에서 대세적 흐름이 된 '법경제학'과 닿을 바가 있는 것 같다.

  예링의 유명한 강연문, 「법감정의 형성에 관하여」를 발굴하여 실어주신 것도 참 좋았다. "나는 나에 대한 반론을 느긋하게 기다리고, 또한 반론이 있기를 희망한다. 새로운 견해가 너무 쉽게 성공을 거둔다면 학문에게는 나쁜 일이기 때문이다. 학문에서 승리는 어려워야 하며, 이 점은 나의 학문의 경우에도 해당한다. 물론 나의 견해가 승리하는 것을 내가 직접 겪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견해가 미래를 기약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죽을 것이고, 그 정도로 나의 새로운 견해가 진리임을 확고하게 믿고 있다. 언젠가 나의 이 견해가 확고하게 자리 잡을 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리라는 것을 나 자신 잘 알지만 언젠가 그날이 와서 나의 견해의 모든 측면을 진지하게 고려하기를 희망한다. [] 나는 법철학이 가는 길에 큰 돌 하나를 땅에 박아놓았다고 생각한다." (책 173, 174쪽). 예링의 확신을 누군가 이어나갈 수 있을까.


  라드브루흐가 예링의 주요 저작을 편집해 출간할 계획을 세웠던 것처럼(편집자 서문과 주석까지 모두 집필하여 둔 상태에서 1949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예링의 다른 저작들, 『로마법의 정신 Geist des römischen Rechts』(1852, 1854, 1865), 『로마사법에 있어서의 책임 요소 Das Schuldmoment im römischen Privatrecht』(1867), 『법에 있어서의 목적 Der Zweck im Recht』(1877, 1884), 『로마법의 발전사 Entwicklungsgeschichte des römischen Rechts』(1894) 등도, 시간이 걸리고 어려운 일이겠지만 가급적 많이 번역되어 우리나라의 출판물 목록에 자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번역이 된다면 『법에 있어서의 목적 Der Zweck im Recht』이 가장 가까운 후보가 아닐까 싶은데, 그 중 1권은 영문판이 있다. 




법이란 끝없는 노동이고, 더욱이 단순히 국가권력만의 노동이 아니라 전체 국민의 노동이다. - P32

노예제도와 농노제도의 폐지, 토지소유의 자유, 영업의 자유, 신앙의 자유 등등 법의 역사에 기록되어야 할 모든 위대한 성과들은 때로는 수백 년 동안 지속된 격렬한 투쟁을 거쳐 비로소 획득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법이 거쳐 간 이 길에는 자주 피가 난무하고 권리가 파괴되는 일이 일어났다. 왜냐하면 "법은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즉 법은 자기 자신의 과거를 청산할 때만 다시 젊어질 수 있다. [] 법이념은 영원한 생성과 변화이며, 이미 생성된 것은 새롭게 생성되는 것에 자리를 내주어야만 [한다]. [] 법은 역사 속에서 움직이는 가운데 추구하고 쟁취하고 투쟁하는 모습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힘겨운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 P39

불법에 대한 저항은 의무이다. 이 의무는 권리자 자신에 대한 의무이다. 왜냐하면 이 저항은 도덕적인 자기보존 명령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의무는 공동체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불법에 대한 저항은 공동체 내에서 법이 관철되기 위한 보편적 저항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 P52

저 낮은 곳에서는 산문에 불과했던 권리가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이 높은 곳에서는 시가 된다. 왜냐하면 권리를 위한 투쟁은 실제로는 인격이 써내려가는 시이기 때문이다. - P73

사법(私法)의 실현은 사인이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가에 달려 있다. 만일 사인들이 권리의 존재를 전혀 몰랐기 때문이든 아니면 무사안일이나 두려움 때문이든 어떤 사정으로 인해 장기간에 걸쳐 자신들의 권리를 전혀 행사하지 않으면 그와 결부된 법규도 마비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법의 법규가 갖는 현실성과 실제적 힘은 구체적 권리의 주장을 통해 그리고 그러한 주장에 비추어서만 표출되며, 구체적 권리가 한편으로는 법률로부터 생명을 얻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법률에게 생명을 불어넣는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객관적 또는 추상적 법과 주관적 또는 구체적 권리의 관계는 심장으로부터 흘러나와 다시 심장으로 돌아가는 혈액의 순환 관계이다. - P80

사법(私法) 영역에서는 각자가 자기 위치에서 법률을 방어할 사명을 갖고 있으며, 각자가 자기 영역 내에서 법률의 수호자이자 집행자이다. 각자가 가진 구체적 권리는 곧 각자의 이익을 계기로 삼아 법률을 방어하고 불법에 저항하도록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인 셈이다. - P82

인간이 감내해야 하는 어떤 불법도 설령 아무리 중대한 것일지라도-최소한 공정한 윤리적 감정을 가진 사람에게는- 신이 임명한 관헌들 스스로 법을 파괴해 저지른 범죄보다 더 큰 범죄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 언어(인용자 주: 독일어)가 매우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사법살인은 법이 저지르는 엄청난 죄악이다. 법률의 수호자이자 파수꾼이 법의 살인자로 전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환자를 독살하는 의사, 피후견인의 목을 졸라 죽이는 후견인과 똑같다. - P96

국가법과 국제법을 위해 투쟁하는 자는 다름 아닌 사법[인용자 주: 私法, 이하 같다]을 위해 투쟁하는 자이다. 사법적 관계 속에서 습득한 성격이 국가법이나 국제법과 관련해서도 그대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한 국가의 사법 영역에서 씨를 뿌려 싹튼 대로 국가법과 국제법의 영역에서 수확을 걷게 된다. 삶의 극히 사소한 관계에 해당하는 사법 영역의 낮은 곳에서 한 방울 한 방울 힘이 형성되고 모아져 국가가 필요로 하는 정신적 힘이 축적되고, 이 축적된 힘은 다시 훨씬 더 거대한 국가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 따라서 한 국민에 대한 정치적 교육이 이루어지는 진정한 학교는 국가법이 아니라 사법(私法)이다. 그리하여 한 국민이 필요한 경우 자신들의 정치적 권리와 국제법상의 지위를 어떤 식으로 방어할 것인지를 알고 싶은 사람은 각 개인이 사법의 영역에서 자신의 권리를 어떻게 주장하는지를 관찰하면 된다. - P101

투쟁은 법의 영원한 노동이다. ‘얼굴에 땀을 흘려서 너의 빵을 먹어야 한다!‘라는 말이 진리이듯이 ‘너는 투쟁을 통해 너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라는 말도 똑같이 진리이다. 권리가 투쟁을 벌일 태세를 포기하는 순간 권리는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권리에 대해서도 시인의 다음과 같은 말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지혜의 마지막 결론은 이것이다.
날마다 자유와 생명을 쟁취해야 하는 자만이
진정 자유와 생명을 누릴 자격이 있도다." - P130

(예링의 서문 중에서) 나는 모든 다툼에서 권리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권리의 침해가 인격에 대한 멸시까지 포함하는 경우에만 권리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할 따름이다. 나의 이론에서는 양보와 화해, 온유와 사랑, 타협과 권리 포기도 적절한 곳에서 충분히 드러나 있음을 명심하길 바란다. 나의 이론의 대상은 오로지 비겁과 나약함으로 인해 불법을 감수하는 굴욕적 상황일 뿐이다. - P27

나의 견해는 자연과 완벽하게 합치한다. 즉 자연은 인간과 동물 모두에게 이기주의를 심어주었고, 다만 인간은 정신의 힘을 통해 긴 시대를 거치면서 도덕적 세계질서를 창조해낸 것이다. [] 자기보존! 내가 말하는 자기보존에는 그저 외적 삶의 유지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자기주장도 포함된다. 이러한 자기보존 충동은 사회의 고차적 영역에서도 반복되고, 이 충동으로부터 도덕이 형성된다. [] 도덕은 개인에서 출발해서 사회로 고양되며, 그런 이후에 비로소 사회가 개인에게 ‘우리의 욕구와 우리 요구에 복종하라!‘는 요청을 제기한다.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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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다음과 같은 글을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걸어두고 가슴 뜨거웠던 적이 있었다. 이 책 98쪽에도 인용되어 있는 구절이다.


"GNP는 대기 오염과 담배 광고비를 따지고, 도로 위 부상자를 실어 나르는 구급차의 개수를 셈에 넣는다. 또 문에 다는 특수 잠금 장치의 생산량과 그것을 부수고 침입하는 범죄자들을 집어넣을 감옥의 개수와 비용도 따진다. 그리고 거기에는 삼나무 숲 파괴와 불규칙하게 확장되는 도시로 인한 자연 파괴도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GNP는 아이들의 건강, 교육의 질, 그들이 느끼는 즐거움은 측정하지 않는다. 또 GNP는 문학의 아름다움, 결혼 생활의 안정성, 공공 담론의 적절성, 정부 관리들의 성실성은 반영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의 지혜와 용기, 학습, 열정, 애국심도 반영하지 못한다. 요컨대 GNP는 우리 삶을 가치 있고 의미 있게 만들어 주는 요소만 제외하고 모든 것을 측정한다."


- 암살당하기 3개월 전인 1968년 3월, 로버트 케네디 [1963년 암살당한 대통령 케네디의 동생으로, (트럼프가 이방카와 쿠슈너를 기용한 것처럼?) 형이 임명하여 미국 법무부 장관이 되었고, 이후 뉴욕 주 상원의원을 지내다가 1968년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 후 암살됨]


언제 읽어도 멋진 문장이다. 그러나 게리 베커와 캐스 선스틴의 세례(?)를 받은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다르다. "우리 삶을 가치 있고 의미 있게 만들어 주는 요소"들이 진정으로 합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으려면, 이들에 어떻게든 가격을 충실히 매겨야 하고, 그 가격이 내가 생각하는 가치에 값할 수 있도록 차라리 '가격 산정 (방식)'을 놓고 사회적, 문화적 전장에서 싸워야 한다.


'이러저러한 것들은 도저히 값을 매길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므로, 불경스럽게 가격을 매기려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만 고수해서는, 스스로는 도덕적 우월감에 도취되어 만족스러울지 몰라도, 한정된 자원을 둘러싸고 벌이는 싸움과 협상의 장에서 그 소중한 것들을 계정에 올려보지도 못한 채 배제되기 십상이다. 정책 결정이든, 분쟁 국면에서든, 인습과 통념을 타파한다는 차원에서든,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사실은 내가 '가격을 어떻게 매길 것인가' 하는 싸움을 방기해둔 사이에) 세상 모든 것에는 가격이 매겨지고 있고, 명시적 암묵적으로 비용-편익 분석이 일어나고 있다.


세월에 걸친 얽히고설킨 싸움의 향방에 따라 가격이 오르내리고 교환방식이 변하기는 하여도, 예나 지금이나 생명, 사랑, 우정, 희생과 헌신, 그 밖에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매겨지는 가격이 없었던 것이 결코 아니다. 누군가와 결혼을 하는 결정을 하기에 앞서서도 당연히, 누구나 본능적으로, 그로 인한 비용과 편익을 저울질해보게 되고(기회비용도 고려된다), '자유연애'가 생소하던 시절에조차 대부분 사람들이 도망치거나 목숨을 버리는 등 큰 비용이 따르는 선택을 하는 것보다 봉건적 관습과 이를 담지한 부(모)의 뜻을 따르는 것이 낫다는 계산을 한 것이었을 뿐이다('자유로운 선택'의 가격이 지금만큼 높지 않기도 하였고). 과거 경제학에서 재생산노동, 가사·돌봄노동이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였던 것도 맞지만, 그렇다고 경제학은 적폐라며 담 쌓고 실리 싸움에서 퇴각하여서는 곤란하다. 경제학자, 통계학자들 가운데서도 자신이 가진 무기로 주목받지 못하였던 것들에 빛을 비추는 연구를 하였던 사람들이 분명히 있어왔고, 사회가 성숙하고 인식의 지평이 넓어짐에 따라 이론도 얼마든지 많은 것들을 포괄하게 되었다(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연구가 전 세계에서 쏟아지는데, 그 많은 연구자들이 모조리 바보에 냉혈한이 아닌 이상 20년, 30년 전 몇 권 책에서 읽은 내용이 그 분야의 전부일 리 없지 않은가).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인 것도 맞지만, 기왕이면 주장할 바를 주류적 문법으로도 설득력 있게 번역하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을까. 다 떠나서, 지금 베이비시터, 가사도우미 시장이 역할 하나하나를 어떻게 더하고 빼는지, 또 그분들이 어떤 능력이 있고 어떤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에 따라 얼마나 세밀하게 값을 매기고 있고, (인터넷 발달과 더불어) 수요 공급을 얼마나 철저하게 반영하고 있는데, 왜 이런 노동에 가격이 없단 말인가. 맞벌이 부부 한쪽 소득이 고스란히 베이비시터에게 들어가는 판국에 언제 적 저평가 이야기인가. [그런 면에서, 출산율이 떨어져 '국가경쟁력'이 떨어진다고 호들갑 떨면서 괴이한 정책만 들고나오고, 급기야 출산을 독려한답시고 '애국심'에 호소하기까지 하는 못난이들은, 이 시대에 왜 연애, 결혼, 출산이 '손해 막급한 장사'가 되었는지에 대한 감을 전혀 잡지 못하고 있다.]


여하튼 "문화는 [...] 사회의 집단 가격 체계이[고]"(책 251쪽), "어떤 행동이 한 국가의 정치 문화 속에 깊이 뿌리 내렸다면, 그것은 그 행동이 가격에 합당한 가치를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책 246쪽). 50년대생, 60년대생, 70년대생, 80년대생, 90년대생, 21세기생의 생각 차를 보면, 최근 들어 그 '집단 가격 체계'는 더 급격히 변하고 있는 것 같다. 역사적 사명을 다한 세대는 새로운 세대의 가격 체계가 사회를 운영하는 중심원리가 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지은이가 런던에서 quantum fields and fundamental forces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기에 책이 조금 더 학술적일 것을 기대했으나, 영락없이 저널리스트의 책이다(지은이 프로필 https://nytedu.com/faculty/eduardo-porter/). 이렇게 삽화들을 모은 것도 의미가 없지 않지만, 여러 '불편한 진실 시리즈'가 다소 난삽하게 나열되어 있는 느낌이다(그런데 이 책에는 원래 문헌 인용 표시가 전혀 없는 것일까? 아무리 대중서라도 미국 출판계에서 어지간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역자와 출판사가 임의로 뺀 것일까?) 아무튼 내용을 좀 더 잘 꿰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중간중간 빼어난 통찰이 드러나기도 하는데, 이미 이러한 사고와 연구에 익숙하신 분들께는 막상 그렇게 새롭다고 여겨지는 대목은 많지 않으실 수도 있다(게리 베커가 이미 오래 전에 우리의 생각을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에). 그렇지만 여전히 대단히 도발적이고, 4장 '여성의 가격' 부분은 찬찬히 따져 검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며, 개인적으로는 7장 '문화의 가격' 부분이 좋았다.


지은이는 올해 3월 신간을 냈다. 표지가 이게 아닌데, 알라딘에는 이 빨간 책만 나온다(2020. 5. 16. 현재). 선스틴 교수의 『The Cost of Rights』도 참조. 우리나라에서야 아직은 샌델 교수의 '도덕주의'나, 주류 경제학이 시장을 만능으로 생각한다고 부당전제 한 채 이를 악마화하는 '반경제학주의'가 더 잘 팔리겠지만, 위에 쓴 것처럼 그런 도덕 우선의 가격 체계(도덕을 특권화하여 도리어 고립되는 결과를 낳는...)도 점차 궁지가 드러나면서 당분간 도전받고 정정되는 것이 불가피하지 않나 싶다. 구시대에 당대의 통념을 깨고 여성의 권리를 앞장서서 옹호했던 이들이, 정의론자, 도덕론자가 아니라 사회통계학의 기초를 마련한 수학자 콩도르세, 벤담이나 존 스튜어트 밀 같은 공리주의자였다는 것도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하다. 이전에 쓴 "박홍규 교수의 샌델 비판" 글도 참조. https://blog.aladin.co.kr/SilentPaul/10486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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