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과 천황
카리야 테츠 지음, 슈가 사토 그림, 김원식 옮김 / 길찾기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왜 일본인들을 만나서 '천황제'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을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가 한번도 일본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왜 그랬을까? 서로의 언어에 서툴다는 것이 한가지 변명이 될 듯 하다.일본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또 영어를 하더라도 생활영어 수준이니 거창한 담론에 대해 물어보기 저어했을 것이다.또한 사교의 성격상 그런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도 조금 가렸을 듯 하다.그렇지만 위의 이유는 결과론적 해답찾기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진짜 이유는 우리 의식 속에는 '왕의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왕은 우리에게 현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의식 속 어디에도 왕을 위한 공간은 없다.한국에서 왕은 TV 드라마속에서 신하들이니 내전의 비들과 아옹다옹하고 있는 것이지 실제 있는 존재는 아니다.그렇다보니 일본의 정체 속에 '천황'이라는 존재가 있음에도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우리는 뉴스를 보면서 일본 내각의 우경화 움직임에 분노를 한다.어제는 총리가 오늘은 관방장관이 내일은 참의원이... 결국 생각은 자민당 우파와 일본 우익들에 대한 적개심 정도에서 멈추곤 한다.

만화책인 <일본인과 천황>은 두가지 면에서 생각의 꼬리를 조금 더 길게 만드는데 도움을 준다.첫번째는 일본 우경화의 중심에 '천황제'가 자리잡고 있다는 교과서적이지만 대개는 간과했던 생각이다.두번째는 만화에 등장하는 도토대학 축구부의 분열 속에 보여지는 천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군사주의와 국가주의의 결합이다.축구부의 모습은 불행히도 한국 사회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일상적 조직의 모습이기도 하다.그런 의미에서 '천황'은 일본인의 무의식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뱀처럼 살아있는 동시에 식민지적 근대를 경험한 한국인의 의식에도 숨어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저자인 가리야 데쓰는 일본인들 다수가 믿고 있고 일본 우익이 지키고자 하는 일본 천황제가 '만들어진 신화' 일뿐이라고  비판한다.일본 천황을 신성화 한다거나 일본이 신의 나라라거나 하는 것은 순수하게 신화일뿐이다.그럼에도 일본인들은 천황을 살아 있는 신으로 국체와 동일시 해왔다.저자는 이것이 근대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로 생각한다.일본의 근대화라함은 메이지 유신을 뜻하는데 실제 일본 천황의 지위가 지금과 같은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이 모두 그 덕분이다.그리고 이 정점이 바로 쇼와 천황의 대동아 전쟁이었다.일본에서 천황은 애초부터 신적인 존재는 아니었다.역사적으로 천황이 집권을 한 시기도 있었으나 이는 상당히 짧은 시기였다.천황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일본 역사의 중심이 된 것은 지배 엘리트들의 역할이 크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저자는 과거 일본 사회를 분석하는 방식으로 '천황-신하-백성'이라는 도식을 이용한다.일본의 봉건제에서 실제 헤게모니는 신하라고 하는 막부나 번주들이 가지고 있었다.이들에게 천황은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즉 자신들은 천황의 신하라는 위치에 두고 실권을 유지하면서 천황을 대신하여 나라를 통치한다는 논리로 헤게모니를 장악한 것이다.저자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실제로 일본을 지배한 것은 재계와 군부였다고 말한다.물론 이것이 천황의 전쟁 책임론에 대한 탈출 도구로 이용되는 것은 아니다.저자는 이런 우려에 대해 천황이 직접적으로 전쟁책임이 있다는 점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천황의 전쟁책임론이 희석된 것은 모두들 잘 알고 있다시피 전후 일본복구를 맡았던 맥아더 사령부에 있다.맥아더는 천황을 탈권력화하면서 인간화하는 작업을 추진했다.법적으로는 일본 헌법 1조에 해당하는 '상징천황제'의 규정을 만들기도 한다.저자는 '상징천황제'가 미군정에 의해 1주일 사이에 만들어진 졸속적인것이라고 말한다.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과거 천황제의 악습을 그대로 세대 전승하여 일본을 활력없게 만드는 규정이라고 보고 폐기를 주장한다.저자는 '히노마루-기미가요'가 실제 일본을 상징하지도 천황을 상징하지도 않는다고 역사를 통해 지적한다.정작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징을 통해 근대 천황제 복귀를 꿈꾸는 세력들의 불온함이다.그들은 과거에 메이지 유신과 이후 군국주의 일본이 그러했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일본 천황제의 강조를 통해 사회 지배력을 강화하려하고 있는 것 뿐이다.

<일본인과 천황>에서 주인공인 도토대학 축구부의 주장 스미카와는 히노마루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면서 축구부에서 쫓겨나게 된다.도토대학의 선배들은 기강의 해이를 내세우며 폭력으로 군기를 잡고 스미카와는 이에 맞선다.선배들의 의식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상명하복이며 절대복종이다.또한 축구부의 천황이라고 할만한 기타카미 선배에 대한 숭배와 그의 충복으로서의 정체성이다.저자는 도토대학 내부 문제를 보여주면서 일본사회 조직문화에 '천황의 군대 내의 권위주의'가 내재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한다.이는 한국 조직문화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다.

특히 한국은 일본과 달리 국민의무병제도가 있다.이미 많은 학자들이 '한국은 군대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한국 사회와 군사문화는 이미 찰떡처럼 융화되어 있다.군대에서 어느 정도 규율과 제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그렇지만 세상의 모든 군대들이 한국 군대처럼 강압적이고 폭력적이지는 않다.군대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가치에 그다지 저항하지 않고 저항하기도 힘든 10대후반-20대초반의 아이들에게 교육기관으로서 작용한다.군대에서 배우고 몸에 익혔던 상명하복의 정신은 그대로 사회에서도 적용된다.합리화가 이루어진 조직이라고 할지라도 사석이나 비공식적 자리에서는 분명 군사주의적 문화가 존재할 것이다.이 문화에서는 위로 올라갈 수 록 무한 자유가 보장된다.그러다 보니 '억울하면 성공하거나, 억울하면 군대 빨리와야'되는 것이다.이 말은 현재의 권위주의적 상태는 자연적인 것이므로 잘못된 것이거나 인위적인 것은 없다는 투이다.그래서 나오는 말이 '고참이 까라면 까는 것이다' 여기에서 '까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다수를 위하는 것인가,양심에 바른 것인가를 묻는 다면 돌아오는 답은 군대였으면 '이 빠진 새끼가 어디서 말대답이야'이고 회사에서 라면 "아주 잘난척을 하는군" 이다.그 정도 차이가 있다.때리지 않으니 다행이라고....그러나 사실 살펴보면 직장 내의 폭력이 생각보다 많다.이는 언어적 폭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리적 폭력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천황'이 없다.그러나 일본의 천황제가 근대국가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에 주의한다면 우리에게도 천황은 아니지만 이와 유사하게 작용한 장치들이 있었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한국은 식민지적 근대화의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우리가 원하지 않았지만 일본 군국주의는 우리의식의 저류에 자신들이 씨앗을 뿌려놓았다.해방 이후 우리 역사는 불행히도 일본과의 절연과정을 거치지 못했다.친일파들은 친미파로 변신하여 다시 권력의 상층부를 차지했다.또 미워하면서 배운다고 그들이 심어놓은 근대성의 밝은 면을 일본의 우월함으로 치환시키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우리에게는 '천황'은 없었지만 '반공'이나 '친미'라는  실제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소리 없는 '천황'이 있었다.근대국가의 형성을 위해 소환된 '국민'은 막강한 이름으로 '개인'을 부정했다.애국심의 이름으로 일치단결이 요구되었고 다수의 발전을 위해 권위주의와 폭력은 조직내부에서 잊혀졌다.식민지적 근대화와 반공,그리고 적자생존의 시장법칙은 한국을 정글로 만들어 놓은 보이지 않는 '천황'이 되어 있다.실제 우리 사회가 많이 깨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아직도 보이지 않는 '천황'의 깃발 아래 사람들을 세우고자 하는 세력들이 여전히 준동한다.또한 이들에 부하뇌동하거나 부분적으로 또는 비판적 수용이라는 이름으로 보이지 않는 '천황'의 세력 구도 속에서 자족하려는 사람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다.(유감스럽게도 내 책상 중심으로 4분의 3이 그렇다.) 설마 그렇게 많으려고 물을 수 있다.이런 질문을 주변에 던져보자.

 "제국주의가 나쁜 거야 ? 아니면 우리가 제국주의가 되서 혜택받는 나라가 되지 못한게 나쁜거야?".....질문을 할때 '제국주의'란 말은 알지도 못하면서 양심상 거부해야한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기때문에 '강한 나라' 뭐 이런 단어로 물어보면 훨씬 적확한 대답을 얻을 수 있다.여러 대답이 나오겠지만 가장 어리석고 무식하고 상종하기 싫은 자들이 하는 답변이 이런 거다.'우리가 강대국이 되면 다른 나라처럼 그렇게 하지는 않지...우리는 백의민족이고 한번도 다른 나라를 침략한적 없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니까"

<일본인과 천황>의 책제목 처럼 '천황'문제가 우리랑 무슨 상관이 있겠냐 싶어 관심 목록에서 빠질 수도 있는 책이다.그렇지만 이 만화는 우리를 성찰할 수 있게 하며 또한 우리와도 밀접하게 관련있는 이웃나라 사람들의 의식 세계의 한 단면을 읽을 수도 있는 유용한 책이다.

이 책을 소개해준 사람은 '바람구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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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11-26 23:42   좋아요 0 | URL
3분의 1쯤 보다가 당장 내일로 닥친 그놈의 연구수업 때문에 잠시 밀쳐둔 책이군요. 예전에 일본사 공부하다가 일본의 천황제와 천황에 대한 의식이 도저히 이해가 안가서 헤맷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 책이 있었으면 좀 쉽게 이해할 수있었을걸 싶더라구요. ㅎㅎ
근데 앞부분 읽으면서 생각되는건 결국 근대 자본주의의 제국주의화나 팽창에서는 굳이 천황제가 아니더라도 이런 기제는 어디든 만들어냈던 거고 그게 일본에서는 천황제라는 기제를 선택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던데요. 만약 천황제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 비슷한 다른 수단과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겠죠? 요즘 우리나라가 강한나라 신드롬에 빠져있는 것도 결국 같은 맥락일거고.... 천황제의 역사적 맥락을 찾아내고 비판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우경화의 문제가 해결되어지는 것은 아닐테고, 옆나라나 이나라나 갑갑한 시대입니다.

드팀전 2007-11-27 09:17   좋아요 0 | URL
그런 말이 있다고 들었는데요....모든 근대는 근대국가를 상정한다.자본주의가 제국주의화되는 것은 필연이라고 말한 것은 레닌이었을겁니다.자본주의의 가장 궁극적 형태라고 하는데 역사적으로 제국주의 시대가 외형을 바꾼 상황에서는 제국주의가 근대 자본주의의 시초라고 보는 문제의식이 더 많은 생각거리를 줄 듯 합니다.특히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나라이거나 또는 근대화가 외세에 의해 이루어진 나라에서는 '근대국가'의 특징으로 표현되는 '부국강병'에 더 목숨을 거는 것이 일반적입니다.그래서 대개 후발국들이 민족주의를 성장론과 결합시키는 방식을 택하게 되더군요.이 둘의 결합 속에서 처벌받아야하는 반민족행태마저 묻혀가기도 하고...성장지상주의에 매몰되기도 합니다.우리 역사에서 그런 예는 많이 찾아집니다.
저자 역시 천황제가 우경화의 가장 근원적 문제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천황제가 우경화 세력들의 디딤돌로 적재적소에서 이용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겠지요.

글샘 2007-11-27 15:17   좋아요 0 | URL
축구!란 욕을 아세요?
운동 종목 이름으로 '야, 이 바보 축구 온달아!'하고 부르는 종목은 이 운동밖에 없을 듯 싶네요.
그만큼 축구가 '개인을 잃게 하는 구속'이며 '맹목'이어설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월드컵 할 때요. 2002년에... 13일날 두 소녀가 죽었는데... 다들 축구가 된 그 때...
한국에서 '천황'보다 더욱 '단결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것은 '눈치'아닐까요?
사람들을 다 태음인처럼 만들어버리는, 모난 돌이 정맞는다는 눈치보는 사람들...
최근까지 노예와도 같은 양반 상놈 의식이 있었고, 아직도 '신분'이 욕설이 되는 거니까요. 거기다가 남녀 차별이 더 심해서, 상년은 더 큰 욕 같은...
어쩌다 보니,.. 욕설의 사회학이 되었습니다 그려...

드팀전 2007-11-27 22:55   좋아요 0 | URL
저도 축구보기를 좋아하지만 지나치게 열광하는 모습에는 심사가 뒤틀립니다.^^ 그런데 더 근본적으로 묻기 시작하고 직접 대비시키기 시작하면 아무도 빠져 나갈 수 없습니다...무사안일한 저의 오늘이었는데 제가 모르는 곳에서는 가난때문에 목숨을 끊고자한 소년 노동자가 있을 수도 있지요.마음이 불편하지요.그 때마다 철퇴를 내리칠 수도 없고...축구에 대한 열광의 반만큼만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합니다만 '합니다만'하는 바람만으로는 언제나 허공에 빈 주먹 휘두르기인 셈입니다.그래도 알면서 가끔 휘두르긴 합니다...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1
소포클레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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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공사장 인부들이 옹기 종기 모여있다.수명이 다한 나뭇가지를 드럼통에 담아 놓고 차가운 입김을 데운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붉은 가을이었다.그러나 오늘 아침은 동장군의 척후병에게 일격을 당했다.TV 속에서 사람들이 종종 걸음을 치며 출근길을 서두른다.까치들 같다.삶을 위한 종종걸음이 안타깝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숭고하기도 하다.누군가 그랬다.비오는 날 우산 속으로 숨어드는 사람들을 보면 인간이 뭐 별거 있다 싶어 가여워진다고..차가운 날씨에 코트 속으로 자라처럼 목을 움추린 어느 집 가장의 출근길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운명을 믿지 않았다.젊은 날에는 더 그랬다.내가 무언가 하면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지금도 그 생각에 큰 변화는 없단다.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어서 인지 내 삶을 돌아볼 나이가 되서 그런 것인지 요즘은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란 것이 있다라는 생각이 든다.아무리 피해가려 해도 피할 수 없는 것.물론 자잘한 것들은 인간의 노력으로 어떻게 바꿀 수 있다지만 큰 그림까지는 손 대지 못하는 것 아닐까 하는"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삶과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삶을 생각했다.그리고 나 역시 '운명' 이란 것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지 고민했다.'운명'에 대해서 아마 아버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길을 택할 것이다.단지 차이가 있다면 조금 더 젊은 지금의 내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한 숟가락 더 힘을 싣고 있다는 정도 일 것이다.그렇다고 내가 무슨 '숙명론자'이거나 하지는 않는다.'숙명론'이란 것이 결국은 세계에 대한 패배의식으로 작용하는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인간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그의 의지에 따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아적인 환상일 뿐이다.중요한 것은 '운명'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 비극이 했던 것럼 '운명에 대한 태도'를 떠올려 보는 것이다.

우리들의 운명은 행복한 길도 놓아 줄 것이다.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자락을 부여잡고 있는 것은 언제나 '슬픔에 대한 운명'이다.정호승 시인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 라고 노래한 것은 시인과 우리의 삶이 '슬픔의 도상'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한다는 자기성찰이다.여기서 말하는 '슬픔'은 '부족'에서 오는 '슬픔'이 아니다.철학자 김상봉은 그리스 비극이 이야기하는 '존재론적 슬픔'과 대비하여 그런 슬픔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그림자'라고 말한다.만약 그것이 슬픔의 정체라면 그런 슬픔을 문학의 이름으로 퍼뜨리는 것이 얼마나 혐오스러운 일인지 개탄하고 있다.

<오이디푸스왕,안티고네>를 제대로 읽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물론 줄거리 자체를 이야기하라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이 책을 보지 않고도 이미 줄거리들은 전부 알려져 있다.또 운문형태가 아닌 소설 형식으로 이 이야기들은 많이 보급되어 있다.아동판,청소년판 등등 해서 어린 아이들도 이 책을 읽는다.요즘은 그리스 신화의 인기때문에 아마 만화판도 나와 있지 않을까 싶다.결국 이 진부하지만 위대한 텍스트에서 무엇을 공감하고 끌어 낼 수 있는가 이 책 읽기의 요체이다.그 작업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피아노 음악 이야기를 잠깐 하면 좋을 듯 하다.

모차르트...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무척 아름답다.체르니 상급반 정도되면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들을 칠 수 있다.음표도 많지 않고 엄청난 기교를 요구하지도 않는다.동네 피아노 학원 담너머로도 들을 수 있는 곡이다.그런데 실제 연주가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모차르트야말로 연주하기 힘들다고 말한다.쉽지만 그것은 천상의 소리를 닮아 있기때문이다.어느 유명한 음악가가 말했다는 '질주하는 슬픔'을 잡아낸다는 것이 보통의 내공가지고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이 말년이 되어 모차르트에 돌아가는 것은- 물론 그들의 늙은 몸이 고난도의 기교를 요구하는 낭만파 음악에 적당하지 않기도 하겠으나-그런 이유가 있기때문이다.그리스 비극을 읽는다는것은 모차르트를 듣는 것과 비슷하다.모차르트의 느린 악장같다.땅이 꺼지는 슬픔이지만 무너질 수 도 없는 그런 운명이 있다.

나는 <오이디푸스왕.안티고네>을 읽고 계속 마음이 먹먹하다.비극의 주인공들이 겪은 슬픔은 다른형태로 변주되어 우리들의 삶에도 눈물을 뿌리고 있다.자신의 완고함으로 자식을 읽은 크레온의 아픔은 유괴되어 살해당한 아들의 영결식장에서 '내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너희들이..."라고 마지막 헤어짐을 허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절규와 닮아 있다.살아 있는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처참하게 무너지는 오이디푸스의 슬픔은 어떠한가.'눈물없이 볼 수 없는'이라는 통속적인 표현이 왜 통속적일 수 밖에 없는지 확인시켜주는 운명의 짖궂음 아닌가.

물론 아이스퀼로스와 소포클레스의 비극에 단지 운명과 인간의 존재론적 고민에 대해서만 말하지는 않는다.이들의 비극에는 공동체의 윤리와 개인의 윤리사이의 갈등,또 논쟁을 뜻하는 비극의 안틸로기아적인 주제들이 등장한다.그리스 비극의 사회적 의미와 질문들은 사실 지금 현재에도 적용할 수 있다.안티고네의 결정에 대해 지금의 우리들은 어떤 답을 줄 수 있을 것인가?

베트남에서 군인들은 민간인들을 대량학살했다.약탈,방화,강간 등등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섬멸작전을 수행했다.대개는 명령에 의한 것이어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변명을 댓다.그러나 같은 공간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다.명령이라도 인간의 존중을 파괴하는 명령은 거부할 수 있다는 저항권의 개념을 알고 잇었던 사람들이다.아니 그건 이후에 알았다 하더라도 인간성이 우선한다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사람들이다.물론 그들의 목소리는 작고 또 잊혀졌다.

크레온의 결정은 국가의 명령이고 안티고네의 저항은 인간성에 바탕을 둔 양심의 소리이다.당신은 언제나 당신의 양심의 소리륻 들을 수 있는가? 당신은 조직과 다수의 명령보다 당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가? 그리스 비극은 묻고 있다.아주 많은 것들을...가슴은 여전히 먹먹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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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7-11-19 16:57   좋아요 0 | URL
비극은 너무 슬퍼요. 바보같은 소리 같지만, 비극 앞에 '운명'이란 말이 붙으면 정말 너무 슬프고 화나지 않나요.
그래도 안티고네의 목소리 같은 것이 있으니 희망이 있다...라고 할수 있을까요?

드팀전 2007-11-19 18:21   좋아요 0 | URL
슬퍼도 어쩔 것입니까..오는 것은 오게 마련이던데.인간이 할 수 있는것이 슬픔에 대한 자세밖에 없을때도 있지 않습니까..그게 비극이네요.
 


^^ 아..배고파. 퇴근길에 크림 치즈 케익을 사 갈까.느끼해서 많이 먹진 못해도 한 두 조각은 가뿐히 먹어 줄 수 있을 거야.얼 그레이와 함께 먹으면 좋을 지도 몰라.손에 묻는게 조금 싫긴 하지만 그 달콤한 녀석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느낌이라니...아기 손에 잡은 눈송이가 그렇게 녹을거야.

..^^ 정말 알라딘은 크림 치즈 케익같아.달콤하고 사르르 녹지.^^

 

그런데 여기에 차갑게 얼린 얼음 송곳을 꽂고 싶어.따뜻하고 좋은 날들이 부끄러워지게 말이지.부드러운 말과 적당한 매너와 몇마디 거둘 줄 아는 지식만 있으면 대접받을 수 있는 이 세계가 불타버리길 바래.하지만 내가 뭐하러 그 일을 자청하겠어.매일 매일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불행 앞에서 내 아픔도 추스리지 못하고 있는 내가....

그냥 너희들은 크림 치즈케익을 먹어...그리고 오늘 본 공연의 여흥을 방해하는, 길을 점령한 욕심쟁이들에게 눈을 흘기며 막혀버린 도로와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몰지각함을 비난해.

너희들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치즈케잌에 눈물방울이 묻어 있는 것을 느끼지 못하겠지.하지만 그 케익 속에 수천년의 억울함과 가난,차별과 분노에 삭아버린 파열된 내장이 이제 네 목구멍을 넘어가고 있어.....크림 치즈 케익 맛있게 먹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적을 적이라 부를 수 있는 시절이 아름다운 시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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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11-12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이 글엔 반전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제 느낌이 맞았군요. 섬뜩했습니다.

드팀전 2007-11-14 09:30   좋아요 0 | URL
푸ㅡㅡㅡ우 ...섬뜩하긴요.현실이 더 섬뜩하지요.^^

2007-11-13 15: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7-11-14 09:39   좋아요 0 | URL
일부러 찾아읽으실 필요까지요...이런 거 쓰면 늘 무슨일 있는지 걱정해주시데요.그런데 특별히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아니면 이제 늘 그 무슨일에 익숙해져 있는 건지도 모르겠구요.
딱히 무슨일이냐고 하신다면...우리들이 조금 더 날 서 있는 삶을 살아야하지 않을까하는 정도입니다.
좌파정권때문에 사회가 20년 후퇴했다는 이들과 함께 베토벤을 듣고 있다는게 괴롭기 때문입니다.죽은 박정희의 사진과 더불어 살아야하면서도 그 껄끄러움에 대해 미학적으로 포장하는 사람들과 함께 바흐를 들어야한다는게 괴롭습니다.그래서 요즘은 욕설이 난무하는 랩을 듣고 있다는^^ yo (원래부터 듣기야했지만.)

2007-11-14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3 1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7-11-14 09:40   좋아요 0 | URL
네...크림치즈가 처음만나는 목구멍을 위하여..추천은 별스럽게스리..^^

글샘 2007-11-14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을 적이라 부를 수 있는 시절... 결코 좋은 시절 아니었죠.
저는 제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시기가 있다면... 가난했던 어린 시절보다 대학생이던 4년을 지우고 싶습니다. 그 고민들로 지금의 내가 만들어지긴했지만... 지금의 나는 '괴물'이죠. ^^ 대통령이란 넘을 찢어죽이자...는 구호를 외치던 시기란 얼마나 불행한지요.
2번이 대통령을 두 번이나 한 건, 한국 사회에서 대단한 경험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시행착오로 끝나가고 있지만 말입니다.
이명박이나 이회창같은 대통령도 한 번 겪어보는 것도 <10년 후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6년 후퇴한 경찰의 <원천 봉쇄>나, 30년 지나도 여전히 노동자의 분신이 일어나는...
그렇지만... 김수영이 '희미한 첫사랑의 그림자'에서 이야기했던 '빛바램'은 어느 시대에나 일어나는 것 아닐까요?
크림치즈케익을 먹으며, 더이상 혁명을 이야기하지 않는... 기성 세대가 되어버린 운동권.
대학생들도 이젠 더이상 '운동'에 관심이 없다곤 하지만... 분명 20년 전의 교실에 비해선, 말할 자유도 있고, 언로가 꽉 막혀 있지 않은 만큼의 발전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억지로 긍정하려고 하고 있기도 하지만...^^
전교조가 지금 욕을 가득 먹고 있긴 하지만, 18년 전, 1500명이 모가지 당하던 그 때는 정말 행복하지 못했지요. 결코 그렇게 말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드팀전 2007-11-15 09:17   좋아요 0 | URL
맞는 말입니다.역사적으로 그것이 분명 더 더 행복한 시대는 아닙니다.그런데 이제 모든 것이 '크림 치즈'가 된 시대가 되었습니다.달고 감미롭습니다.그 결과물들이 비만과 그에 의한 당뇨합병증으로 나오려면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 시대는 살짝만 눈을 뜨고 있어도 '시대적 고민'을 만날 수 있는 시대이기도했습니다.하지만 이제는 '성난 눈을 부릅뜨고'도 '고민'과의 조우가 쉽지 않습니다.이유는 '크림치즈케잌'이라는 신화로 모든게 덮여버렸기때문입니다.
글샘님의 역사적 평가에 동의하지만 '과거에 대한 좋은 평가'가 현재의 안분지족을 만드는 '크림치즈'라면 그것 역시 녹여야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조금씩 진보하고 글샘님과 그 시대의 고민이 그런 진보를 이끌어왔다고 믿습니다.현재의 결과는 또 다른 미래의 거름이 되아야하기때문에 이제 그 '자유로와진 학교'가 '크림치즈'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다음 단계는 또 어떠해야하는지 고민하고 움직여야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하루 휴가입니다.아기가 너무 아파서..어제는 2시부터 5시까지 깨어서 징징거리더군요.

2007-11-18 0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밤바 2007-11-18 0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거 많이 먹으니까 살찌던뎅~ㅎ
 
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신은 죽었다.' 라고 100여년 전 사람 니체는 말했다.

그는 '신의 사망선고'에 자필로 서명함으로써 역사에 과분한 칭송과 또 그에 상응하는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그는 '신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외로와도 슬퍼도 울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긍정성을 믿었다.하지만 그것만으로 니체는 불안했나 보다.그래서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고 백척간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는 심정으로 새로운 '초샤이언인'을 상정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니체는 틀렸다.신은 죽지 않았다.잠시 이웃 동네 김영감네 마실 다녀왔을 뿐이다.'신이 여전히 건재하다'고 말하는 유명한 종교학자가 있다.<세속도시>의 하비 콕스이다.그가 말하는 세속화되고 더 업그레이드 된 신은 누구인가? 새롭게 경배받고 있는 신.부지불식간 세계 최대의 종교의 우상이 된 신.....하비콕스는 말한다.

"시장, 곧 신으로서의 시장이 우리시대와 우리 사회에서 확보한 듯한 강력한 힘에 도전할 종교운동이나 그 밖의 운동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저는 시장이 단지 은유로서 신이라고 제시한게 아닙니다.시장이 이 세상 많은 곳에서 믿음으로 기능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현상학적으로 그동안 종교가 가장 흔하게 하던 걸 지금 시장이 하고 있습니다.시장은 이야기,은유,상징,의식,신화,가치,그리고 종교가 제공해온 의미를 제공합니다.종교로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그러니 사실은 종교들 사이의 다툼인 겁니다.이건 신들의 전투입니다."

어떤가? 당신은 '시장교의 광신도'는 아닌가?

하비 콕스의 비유를 역으로 예를 들면 <나쁜 사마리아인>의 저자 장하준 교수는 '시장교의 배덕자'이자 '적 시장교 전도사'이다.그는 세계를 뒤덮고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근본주의적 종파'에 적극적으로 도전한다.또한 전도사로서의 역할에 맞게끔 그는 학술적인 글로, 때로는 대중적인 논설을 통해 사람들이 신자유주의 복음에 현혹되지 말 것을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다.경제학자라는 딱딱한 명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는 책들은 하나 같이 미디어와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다.그는 지난 3년동안 <사다리걷어차기>,<쾌도난마 한국경제>,<국가의 역할>등 6권의 책을 통해 일관된 주장을 펼쳐왔다. 이 책 <나쁜 사마리아인> 역시 동일한 선상에 있는 '반신자유주의 삐라책'이다.

<나쁜 사마리아인>에서 장하준 교수는 시장에 대한 제도주의적 접근방식과 개발도상국의 유치산업옹호론을 대중적인 필치로 선보인다.이전에 나왔던 <국가의 역할>에서 했던 것과 거의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대신 <나쁜 사마리아인>은 동일한 내용을 부드러운 필치로 옮기고 있는 것이 장점이다.물론 좀 더 학술적인 책인 <국가의 역할>에 비해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각개전투식 비판은 뒤로 조금 물러 난다.그렇지만 신자유주의자들의 기본적인 사상과 그들의 논리가 가지고 있는 일방성,편재성등에 대한 공격날이 무뎌진 것은 아니다.

시장은 사실 전능한 신이 아니다.역사적으로도 시장이 전능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것이라는 믿음은 사실 자본주의 태동기에 몇 몇 상인집단을 중심으로 해서 만들어진 이상적인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그렇지만 이런 신화에 가까운 이데올로기가 최근 세상을 구성하는 역사적 진리인 양 거만한 그림자를 세계에 드리우고 있다.장하준 교수의 지속적인 주장 먼저 '시장이 전능하다'라는 믿음에서부터 벗어나라는 것이다.그것은 거짓말이다.먼저 그는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하에서 경제성장이 어떤 패턴으로 이루어져 왔는지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시장만능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를 강요하는 선진국가들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현재 위치에 왔는지를 그들이 현재 입 싹 닥고 있는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한마디로 하면 그들은 '닭잡아 먹고 오리발 내밀고 있는 것이다.' 선진국들은 역사적 시기에 맞추어 국가별 산업 전략을 택해왔다.세계 자본주의의 형님들이라고 자처하는 영국이나 미국 역시 역사적으로 보면 무역보호주의와 자국 산업보호를 위한 보조금,외국인 투자에 대한 제제등 국가가 시장에 개입했던 사례들이 수두룩 하다.그런데 이제 이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다른 소리를 한다.그들은 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뻔뻔한 것이다.프리드리히 리스트를 인용해서 장하준 교수가 말하는 '사다리 걷어차기'가 바로 그것이다.

국가 개입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알레르기 반응은 유명하다.그들은 국가가 개입하면 잘 되던 밥도 죽이 된다고 주장한다.그러니 국가는 그냥 정치나 하고 경제에는 개입하지 말하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이건 '물에 빠진 사람 건져내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그것도 아니면 건져 주었더니 날강도로 변하는 것이거나.지오반니 아리기의 자본주의 축적과정을 인용해 보자. 15-16세기 헤게모니국가는 네덜란드였다.그들이 어떻게 부를 축적했을까? 아리기는 '비용의 내부화'라는 말로 설명한다.즉 원거리 해외무역을 부의 축적기반으로 삼았던 자본가들은 국가가 강한 해군력으로 이를 뒷받침해주기를 요구했다.결국 '보호비용의 내부화'를 통해 성장할 수 있었다.그렇게 멀리까지갈 필요도 없다.한국이 경제적 성장을 거둔 것은 '국가의 개입'없이는 불가능했다.한국은 중앙정부가 자본을 통제하고 유치산업 성장을 지원했다.물론 박정희의 개발 독재형 방식이 옳았던 것은 아니다.그는 경제 개발을 목표로 또다른 미래의 사회비용을 당겨썻으며 정치,사회적 부채를 많이 남겨놓았다.그러나 어쨋거나 국가의 개입이 없었다면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지금같은 정도의 성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장하준 교수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정치와 경제를 구분해 버리는  즉 '경제의 탈정치화'를 주도한다고 말한다.그는 이것은 거짓말일 뿐이며 모든 시장은 정치적 산물이라고 말한다.(지극히 당연한 말인데도 이 말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신바보주의자들이 많다.현재 대선정국을 봐도 경제와 정치가 분리된 무엇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장하준의 결론은 단순하면서도 명쾌하다.그는 '세계를 평평하게'라는 구호대신에 '경기장을 기울이자'라고 말한다.브라질 축구팀과 한국 초등학교팀이 같은 경기장에서 똑같은 조건으로 경기를 하면 결과는 뻔하다.'자신 없을때는 자신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군인정신을 가지고 '하면 한다'로 부딪혀봐야 죽어나는 것은 서민들일 뿐이다.장교수는 개별국가별로 선택적으로 유치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말한다.그는 진정한 산업발전은 제조업에서 승부가 난다는 입장이다.그렇게 하기 위해서 일단 국가는 자국 생산자들을 보호하고 외국인 투자에 대해 제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또한 기술발전을 위해 기득권자들의 이익만 보호하고 있는 지적 재산권 문제에 대해서도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따라 그에 대한 세계적 저항운동도 거세다.흔히들 반세계화운동이라고 일컽는 것이 그것이다.이 그룹 안에는 여러 다른 계파들이 존재한다.이 계파 안에는 서로 상충되는 부분들도 존재한다.그러나 신자유주의가 몰고오는 거대한 구름 앞에서 이들은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장하준 교수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노엄촘스키나 조셉 스티글리츠등 거장이 칭찬할 만큼 명료하고 적절하다.그렇지만 그의 주장 중 어떤 부분은 상당히 논쟁거리가 되기도 한다.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그의 '제도중심'접근법이다.그의 책 어느 구석을 살펴도 사람은 그다지 나오지 않는다.여기서 사람이라는 것은 '노동'이다.그의 분석에는 '노동'과 관련해서 어떠한 테제와 안티테제도 등장하지 않는다.결국 제도를 만들고 제도가 운행되어가는 시스템을 분석하고 있을 뿐 그 시스템의 뿌리이면서 또한 희생양이고 또 움직일 수도 있는 주체들과의 관계성을 무시되고 있다.그가 한국경제를 분석하면서 나왔던-이 책에는 나오지 않는다- '재벌 경영권 유지와 사회적 대타협'이라는 것 역시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그는 1920년대 스웨덴식의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경제발전과 복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고 하는 듯하다.그렇지만 이 부분에서 그는 한국형 재벌의 형성과 강고한 사회적 네트워크를 너무 쉽게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신자유주의는 재벌들에게 합리적 경영을 요구하기도 한다.그러나 결국 신자유주의의 이해관계는 재벌이라는 국내 지배블록을 통해 실현된다.재벌은 그런 측면에서 한국 사회의 가장 중심된 기득권이며 신자유주의의적 재편의 수혜자다.한국에서 재벌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전도사 아닌가? 재벌은 사회의 담론을 신자유화하는데 가장 큰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 활약하고 있다.

이런 접근은 -일반론의 오류를 범할 수 도 있지만- 박정희시대의 개발독재에 대한 나이브한  태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2차 대전 이후 선진국들이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활동한 역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역사적으로 나이브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남미와 아프리카,중동 등에 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이며 또한 경제적 개입을 '좋았던 시절'정도로 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아쉬움이다.(물론 미국의 외교사에 있어서 70년대는 윌슨의 이상주의를 실현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그러나 그것도 결국 악어가 잠시 졸릴때 뿐이었다.)그는 전후 선진국들의 선의에 대해  '냉전 역할론' 보다는 '장기적 자국이익론'에 힘을 싣는다.그래서 그가  현재 나쁜 사마리아인들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이라고는 이기적 동기라도 발휘해서 지금 잠깐 양보하고 '키워서 잡아먹어라' 라는 식의 주문밖에 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는 신자유주의의 첨병 IMF로부터도 '브레이크 좀 밟고 가라' 고 조언을 받을 정도로 신자유주의의 터보엔진을 부착하고 있다.앞으로 한국의 미래를 옅볼 수 있는 현재 대선 상황을 보면 암담하다.마치 보드카에 취한 기관사들이 귀를 막고 운전하는 폭주 기관차 3등칸에 올라탄 심정이다.기관실 밖에서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불콰해진 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뛰어 내릴 것인가 아니면 요행을 바랄 것인가?

건축가이자 미술 공예운동의 주창자였던 윌리엄 R 레서비의 글로 마친다.

 "역사를 쓰는 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이고, 철학을 쓰는 것은 부자들이다.

  .....죽은 자와 가난한 자는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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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12-14 14:32   좋아요 0 | URL
리뷰대회 수상하셨어요~ 작년의 영광을 이어가십니다. 축하해요^^

드팀전 2007-12-14 18:02   좋아요 0 | URL
저한테까지 줄 필요는 없었는데...참가상이겠지요.^^

멜기세덱 2007-12-14 14:44   좋아요 0 | URL
축하드립니다. 사실 드팀전님께 감사 드릴 게 많아요. ㅎㅎ

드팀전 2007-12-14 17:52   좋아요 0 | URL
또 축하해요...제가 도와 드린게 아무것도 없는게 감사 인사를 받으니 왠일일까요???

멜기세덱 2007-12-15 02:28   좋아요 0 | URL
사실, 제가 드팀전님 리뷰보고 읽은 거거든요....ㅎㅎㅎ
 

아무리 봐도 '부박하다'라는 말 이외에 적절한 단어가 없다.진보의 신발을 갈아 신으면서 끝없이 줄타기를 하고 있다.어떻게 보면 일종의 386 운동엘리트의 한 모습같기도 하다.

그는 언젠나 진보적인 인사입네 했다.그는 대학시절 NL계에 있었으며 그 바닥에서 나름 입지가 있었다.그래서 여의도에 있는 젊은 정치인들과 자칭 정치,문화계 진보인사들과도 친분이 깊었다.언제가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나는 이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다음 번 대선에서는 '한화갑이 대통령 하고 김근태가 부통령해야돼.그래야 나라가 제대로 갈 거야"..이런 이야기는 DJ가 집권하고 있던 당시 부통령제 이야기가 한두번 나올때 들었던 말이다.물론 당시는 민주당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또한 한화갑이 실세로 자리잡고 있었다.민주당 내에서 한화갑은 진보적인 척했다.

그런데 그 다음번 대선이 오기전에 한화갑은 무너졌다.그리고 저 변방에 있던 노무현이 불끈 일어섰다.그는 노무현이 진정한 변화의 주인이라고 믿으며 노 캠프에 들어갔다.사실 직접적으로 노캠프에 들어갔다기 보다는 노무현을 중심으로 현 집권층의 젊은 386엘리트 정치인들이 모이게 되었고 그 역시 그 흐름을 탔다.그는 노무현의 외곽조직에서 노란 띠를 흔들며 시대의 진보를 선점했다.

노무현 정권 하에서 그는 재기와 인맥을 타고 이번에는 정동영 라인에 줄은 선다.그가 정동영보다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는 김근태라인에 들어가지 않은 저간의 사정은 잘 모르겠다.어쨋거나 들리던 말에 의하면 그는 사람들에게 '정동영이 자기를 얼마나 신뢰하는지'를 떠벌이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이제 참여정부에 크게 실망을 했고 정동영을 떠나 문국현 캠프로 들어갔다고 한다.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개인적으로는 그저 줄타기일 뿐이라고 생각한다.그런데 항상 간판은 '진보'다.문국현이 진보인지 뭔지는 알 수 없으나-이미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는 지금도 스스로 진보라 믿으며 '줄타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이제 그런 간판은 내려라.

386정치 엘리트의 끝자락에서 기웃거리는 것도 의식의 척박성만을 보여준다.나는 한 개인을 멀찍이서 바라보면서 어떻게 진보가 시장판에 나온 신발이 되어 너덜너덜 팔려나가는지를 목격한다.이것이 비단 한 사람만의 일이겠는가...자기 성찰과 의식의 빈곤함은 깃발 앞에 서 있던 많은 사람들을 이와 유사하게 만들었다.나는 '부박하다'라는 말 이외에 더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하겠다.언젠가 그는 '민주노동당'이 참된 '진보'라고 자기의 그간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며 '민주노동당'을 선택할 지도 모른다.어쨋든 중요한 것은 '진보'의 간판이니까...이마에 '진보'의 간판을 붙이지 못하면 팔다리가 저리나 보다.

의식이 부박하고 실천이 부박하며 또한 영혼이 부박하다.비릿한 무용담만이 남을 씁쓸한 끝이 이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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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11-02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밀리고 밀려서 갈데가 없어진 다음이 아닌 이상 민주노동당에 그가 들어갈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씁쓸해요. 우리 주변에 너무 흔한 인간형이라....

드팀전 2007-11-02 09:07   좋아요 0 | URL
민주노동당이 진보의 최후선인것 처럼 보일 수 도 있겠어요.그런뜻은 아니었구..진보 레테르로 자신이 선인것 처럼 꾸미지요.물론 자기는 그걸 꾸민다고 생각도 하지 않아요.그건 소아적이며 정치적인 나르시즘에 지나지 않아요.강준만이 진보상업주의라고 하는 것을 말했는데...그런 경우가 참 많지요.

글샘 2007-11-02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보...
너무 인플레된 경향도 있지만, 제가 생전에 '노동당'을 볼 줄은 꿈도 못꿨거든요. 80년대엔... 진보란 그런 거 아닐까요? 철새들이 오고가도 계절은 큰 걸음으로 순환하듯...
한국 정치의 '부박함'은 혐오해야할 거라기 보다는, 참고 견뎌야 할 거 같습니다.

드팀전 2007-11-02 09:13   좋아요 0 | URL
참고 견디기엔 그들의 준동함이 좀 웃기더군요.대개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을 두부 자른 단면처럼 확실하게 선언하는데 그 선언이 수시로 바뀌지요.전 그들이 어떻게 정신분열증에 걸리지 않는지 의문이 됩니다.나름대로 답을 찾아보자면 망각과 자기합리화에 대한 면역체계가 영혼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듯 보입니다.사실 전 그들에게 '영혼'이란게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인간 정신의 고귀함같은 것은 아마 은퇴하고 나면 찾을 듯 합니다.그때도 아마 떠벌이 근성때문에 '산전수전 겪고 이제 인간정신의 위대함같은 것'을 자기가 찾아내었네 라며 사람들 만나면서 콜롬버스처럼 떠들고 다닐겝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