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 김상봉 철학이야기
김상봉 지음 / 한길사 / 200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김상봉의 '정치적 올바름'이 좋다.그의 '정치적 올바름'은 책 서문에 띄우는 인삿말부터 확인할 수 있다.'사랑하는 소녀에게 바치는 감사의 편지'에서 이 책의 심연을 흐르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사회적 부채감'을 고백한다.

나 어릴 때 남들처럼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어보는 것이 꿈이던 소녀가 있었다.내가 학교의 책상 앞에 앉아 있었을 때 그 소녀는 전태일과 평화시장 미싱 앞에 앉아 있었다.

저자가 말하는 '부채감'이란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 바탕을 둔 것이다.하지만 그 '부채감'은 조금 더 보편성을 띈다.저자는 여러번에 걸쳐 '내 존재를 지탱하는 것은 타인의 눈물이다' 라는 말을 한다.저자가 '그리스 비극'을 이해하고 사유하는 방식 또한 이런 존재 규정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

비극이 수행하는 것은 삶을 규정하는 다양한 대립상들을 드러내 보이고 하나의 대립항으로부터 다른 대립항으로 건너가게 함으로써 삶의 전체상을 우리 스스로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일입니다.그렇게 삶을 전체로서 볼 수 있을 때 각자는 고립된 자기 세계에서 벗어나 만남의 자리에 설 수도 있습니다.

르네 지라르는 인류의 문화적 기원이 '희생양'에 대한 '만장일치의 폭력'위에 이루어진다고 말한다.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폭력'을 '희생양'의 정수리에 꼽고 있는 '전체'가 스스로 스스로의 행위에 대해 인지하지 못해야만 한다는 것이다.만약 이것에 눈을 뜨게 되면 윤리의식이 발생하게되어 이 시스템은 붕괴된다는 주장이다.이런 생각에 동의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그렇다면 질곡의 우리 역사에 기대어서 잠시 생각해보자.

나는 '아무런 부채감도 없다.그들은 그들만의 싸움을 한 것 뿐이다'라고 말한다면'의식의 척박성'을 드러내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존재가 타인의 눈물' 위에 서 있다는 말에서 저자가 그리스 비극을 읽으며 주목하는 것은 '타인'과 '눈물'이다.

비극은 슬픔의 자기반성이라고 한다.인간은 슬픔과 고통 통해 깊어지고 정신과 교통할 수 있다.하지만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슬픔이 있다.사랑하는 사람에게 차여서 슬플 수도 있고 명품 핸드백을 가지고 다니지 못해서 슬플 수 도 있다.시험 성적이 오르지 않아서 슬플 수 있고 하루 종일 돌깨는 9살 짜리 아이를 보고도 슬플 수 있다.어떤 슬픔과 고통이 인간 정신의 깊이를 만들어 줄 것인가? 먼저 좌절된 욕망이 주는 슬픔은 슬픔이 아니다.또한 자기를 투사하는 형식의 자기 연민 역시 온전한 슬픔이 아니다.그리스 비극시인들은 인간이 어찌 할 수 없는 존재론적 슬픔과 고통을 보여준다.이를 통해 고통의 의미를 묻고 고통에 대해 반성한다.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타인'을 이해하는 초석이 된다는 것이다.저자는 슬픔에의 참여를 통해 참된 만남을 이룬다라고 말한다.즉 타인의 고통을 같이 나눔으로써 나와 네가 서로 이행한다는 것이다.초기 그리스 서사시는 슬픔과 고통이라는 한계상황을 뛰어넘는 정신의 숭고를 보여준다. 반면 비극은 고통을 둘러싼 대립을 전시함과 대립을 건너가게 함으로써 비극적 상황을 통해 '만남과 나눔'의 시민적 이상을 심는다.

 그리스시대의 문학은 크게 서사시,서정시,비극으로 나뉜다.서사시는 영웅의 시대이며 총체성의 시대였다.반면 서정시의 시대는 순수한 내면의 정신세계를 반성하는 주체성의 시대이다.비극은 이런 총체성과 주체성을 공공시민이라는 이상하에 수렴하려는 장르였다

그리스 비극은 이미 자기를 주체로 자각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총체성을 실현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입니다.그리고 이것은 아직도 서정시의 시대,분열과 소외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타산지석이 되는 것입니다.그리스 비극의 미덕은 총체성을 추구하되 그것을 위하여 주체성을 희생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김상봉 교수는 비극이 공연예술이라는 형식에서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소통을 목표로하는 예술이었다고 파악했다.즉 고립된 주체를 공동체 속의 시민으로 도야하기 위한 예술이었다는 것이다. 김상봉 교수는 근대 서구 주체 철학의 한계를 말하며 '주체'와 '타인'의 만남, 그리고 소통에 대한 -즉 '서로 주체성'에 대한 담론을 넌지시 꺼낸다.그가 처음에 말한 '부채감'과 그리스 비극을 통해 이해된 인간의 자기반성과 타자에 대한 이해는 '서로 주체성'이라는 바다에서 만나게 된다.저자는 그리스 비극이 만남 자체를 목적으로 갖는 것이지 공공시민적 총체성이라는 고정된 사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이것이 책 초반부터 지속적으로 나오는 '하나이면서 모두' -김상봉 교수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서로주체성'-의 성격이다.

비극의 힘은 자기 자신의 고통에 관한 연민과 공포의 정념들을 자기 중심적인 구심운동으로부터 해방시켜 그것을 타인의 고통 아니 더 나아가 우리 모두가 같이 겪을 수 밖에 없는 보편적 고통에 대한 연민과 공감으로 이행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의 유려한 흐름과 장면마다 담겨 있는 이야기들을 지나치게 한가지 주제로만 환원시켜서 말한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책 자체는 상당히 잘 쓰여졌고 또한 친절하다.톱니바퀴가 다음 톱니를 기다리듯이 그리스 비극을 매개로 우리가 해야만 하는 철학적 문제들을 한단계 한단계 진척시켜나간다.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은 거기에 있다.그러나 몇 가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부분도 있다.먼저 저자가 '타인의 눈물' '부채감'을 그리스에 적용하면서 그리스적 생산양식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물론 저자도 아주 짧게 이야기하기는 한다.'그리스의 노예제와 외국인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정도이다.고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는 왈가왈부하는 듯 하다.김상봉 교수는 아르놀트 하우저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의 그리스적 생산양식문제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접근을 몇 마디 말로 부정하고 지나간다.물론 하우저가 그리스 비극을 단순히 정치적 예술의 한 형식으로 접근한 것에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그것은 자칫 모든 예술을 정치/비정치로 나눌 수 있는 위험이 있다.저자 역시 그리스 문화라는 것이 '시민'중심의 문화라는 것을 인정한다.그런데 그 '시민'의 성격과 그 '시민'이 물적 토대를 외면함으로써 스스로 그 문화를 만드는데 기여한 이름없는 '타인'들의 존재를 외면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본다.또한 귀족과 시민의 구분 자체에 대해 그다지 성실하게 접근하지 않는다.김상봉 교수의 그리스 문화 주체로서의 시민에 대한 분석 결여는 당연히 '시민'을 탈역사화 시켜버린다.전체적으로 보면 그리스의 시민은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서구 문화사의 영원한 이상향인 '민주주의' 폴리스를  이룩한 현인들처럼 그려져 버린다.르네 지라르 역시 그리스 역사가 노예와 이방인이라는 희생양 위에 만들어져 있다고 말하며 숨겨진 희생양을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참고 삼아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하우저의 주장을 인용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많은 인간 중의 일부가 자율적인,다시 말해서 '무익'하고 '비생산적'인 형식을 창조하기 위해 다른 의무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은 그 사회가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잉여노동력과 여가시간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를 오리엔트의 전제정치와 비교해보면 민주제라고 불러도 좋겠지만 근대 민주국가에 비하면 오히려 귀족제의 아성이라는 인상을 준다....기껏해야 혈통위주의 귀족에 대신하여 재산에 의한 귀족이 등장한 것,씨족 단위로 구성돼 있던 귀족국가가 금리생활자가 지배하는 화폐경제 중심의 국가로 이행한 것이 지나지 않았다.게다가 아테네는 제죽주의적 기반 위에 서 있었음으로 전쟁 정책을 수행하고 있었고 자유시민과 자본가들은 여기서 나오는 이익을 노예나 전쟁이익을 분배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희생시켜 자기들 수중에 넣고 있었다.

비극은 일반대중을 위해 공연되었다는 점에서는 민주적이지만 그 내용에서는 소재가 된 영웅전설이나 영웅적 비극적 생활감정이라는 점에서는 귀족적이었다 ...기원전 4.5세기의 주요한 철학자나 시인은 소피스트나 에우리피테스를 예외로 하면 모두가 귀족제와 반동측에 서 있었다.판타로스,아이스킬로스.헤라클레이토스,파르메니데스...등등은 스스로가 귀족이었고 시민계층 출신의 소포클레스와 플라톤도 철저히 귀족주의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김상봉 교수는 니체를 완전히 작살낸다.니체를 고통마저도 즐기라고 말한 허무주의자의 원흉정도로 취급한다.니체가 말한 명랑성을 그리스적 명랑성의 건강함을 잃고 고통도 두려워하지 않는 무감각으로 취급한다. 니체가 고립된 주체의 자기반성을 주로 이야기하기때문에 작살나는 것이다.김상봉교수는 니체의 권력의지를 자기 자신의 생명력으로 강해진 초인의 의지정도로 설명한다.그러면서 내가 극복할 수 없는 고통이 나를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묻고 있다.김상봉 교수가 나보다 니체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그런데 이 책에서는 과감한 생략과 자기목적형 전술로 인해 니체를 의도적으로 훼손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니체의 강함은 오히려 김상봉 교수가  몇 장 앞에서 '자기연민의 약함으로부터 탈출'을 요구하는 것과 유사한 측면이 있지 않을까 싶다.또한 니체가 고통을 긍정하라고 한 것이 단순히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그처럼 '고통을 그냥 받아라'라고 이해하고 비판을 한다면 지나친 단순화는 아닐까 싶다.

니체는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스스로도 형이상학의 틀거리로 들어가버렸다.김상봉 교수는 니체를 비판하면서 당위를 당위로 말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확잘라 말한다.그런데 이 문제는 '서로주체성'문제에도 똑같은 형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이건 어쩌면 윤리학이 스스로 윤리학을 설명할 수 없는 한계와도 유사한 딜레마일지도 모른다.우선 이런 의문들이 떠오른다.그가 설정하고 있는 '주체'의 문제다.쉽게 말해서 그가 상정하는 '주체'가 어떻게 구성되어지고 어떻게 '소통불능'상태에 들어서는 지 하는 문제다.여기서 '주체'가 훼손되는 방식을 고민하지 않거나 이를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한다면 '소통'을 해야한다는 '당위'만 남게된다.어떤 글에서 '모든 소통은 단절이다'라고 했을때 그것은 소통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을 이루려는 '주체'의 조각난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르페브르의 <현대 세계의 일상성>에서 그는 현재의 역사적 단계를 욕구와 일상성이 프로그램화되고 집단으로 매개되는 상태라고 말했다.특히 이 문제는 일상성의 매뉴얼이라고 할 만한 중산층에게 눈을 돌리게 만든다.르페브르는 현대 세계의 일상성이 '반복'을 통해서 '죽음의 공포'를 잊게 한다고 말한다.김상봉 교수가 이 책에서 근원적 고통의 기원으로 말하는 것이 '죽음'이다.현대는 이 죽음을 잊게 한다.어떻게? '반복'이 그 답이다.르페브르는 삶의 비극성이 전면적으로 망각될 수 있는 것이 이 반복성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비극성의 망각이 제도로서 일상성이 거둔 큰 성과라고 지적한다.이것은 두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우선 하나는 세계의 비극성을 이해해야만 주체와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또 다른 하나는 자족적 공동체나 도시국가를 벗어난 현대에서 주체들의 현존은 '비극성의 망각'위에 수립되어 있다는 것이다.이렇게 '비극성'을 망각한 주체들 사이에 '소통'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리스 인들이 원형극장에 모여있다면 현대인들은 TV 앞에 모여있다.그것도 개별화된 방식으로 말이다.(역설적이게도 결국 예술의 역할이 현대에 있어서 다시금 중요해지는 것도 이때문일 것이다.) 현대인들에겐 슬픔을 이해하는 방식 역시 이미지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수잔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포토저널리즘이 타인의 고통을 이중적으로 소비시켜 버린다고 지적했던 바가 그것이다.현대의 주체들은 타인의 고통을 보며 아파한다.그렇지만 이것은 작은 연민과 자기가 그 고통에 빠지지 않았다는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이미지가 된 고통은 그렇게 실제계를 떠나 버린다.주체는 여러가지 형태로 파편화되고 부관참시된 시체처럼 훼손되었다.물론 이것을 어떻게 복원시키것인 가가 바로 김상봉 교수의 문제의식이다.그러나 이것은 뫼비우스의 띠같다.철학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고 총체성을 찾기 위해 소통하자는 것이 당위론적으로 맞는 말이다.그렇지만 이것이 유토피아 없는 세상에서 유토피아를 위한 염원에서 나온 것이라면 또한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이 조각난 세계와 분열된 주체들을 어떻게 소통시킬 수 있을 것인가? 심란한 주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7-11-01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7-11-01 16:0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그건 정말 몰랐는걸요.고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글을 쓸 수 있을까??? 가 뭐가 의문점일까요??
 

어제 TV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CNN의 래리킹 라이브를 봤다.친숙한 얼굴이 모니터에 비쳐서이다.주인공은 에릭 클립튼.래리킹에서 붙인 제목이 대략 위의 제목과 같았다.중독,비극 그리고 살아남기.....잠시 생각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약중독.....아기의 추락사...아마 에릭 클립튼의 개인사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들이다.간간히 '레일라'가 흘러나오면서 그 유명한(?) '패티 보이드'의 화면도 비쳤다.

래리킹 라이브에 클립튼이 초대된 것은 최근 그의 자서전이 출간되어서 이다.그와 동시에 같은 표지의 앨범도 출시되었다.

아마존의 리뷰에는 클립튼이 인생의 비극들을 겪으며 더 강해졌다라고 쓰고 있다.

어제 TV를 보는데 와이프가 연주가 같지 않고 학자같다고 했다.학자가 더 대단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어제 그의 얼굴에서는 고요함이 느껴졌다.지적인 고요함이다.그런데 그것은 유리병 속의 매끄러움과는 다르다.인생의 무대가 가진 굴곡과 부침 많고 거친 락음악계를 헤쳐나온 자의 고요함이다.

'대교약졸'이라고 한다.에릭 클립튼이 처음부터 화려함을 도모한 아티스트는 아니었다.하지만 그는 20대부터 유명했고 그 명성이 지금까지도 이어진다.그러나 그의 플레이는 이제 그런 불꽃놀이와 불꽃놀이에 플레쉬를 터트리는 함성으로부터 무심한 듯 하다.

여전히 수많은 테크니션이 자웅을 겨루는 그 음악세계에서 에릭 클립튼은 '대교약졸'이 무었인지 6줄의 현위에서 보여준다.

 <tears in heaven>...에릭 크립튼의 최고의 명곡은 절대 아니다.그렇지만 사랑하는 아기를 잃은 아버지가 이제는 다른 곳에 가 있을 아가에게 보내는 지상에서 보내는 선물이다.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이중섭의 일화가 생각이 난다.

이중섭 역시 사랑하는 자식을 먼저 보냈다.그 때부터 이중섭은 아기 그림을 많이 그렸다고 한다.아기 발인을 앞두고 중섭이 슬픔과 술에 취해 있었다.인사불성이던 그가 또 술을 먹고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그림 그렸다고 한다.껌종이 담배종이에 그렸을 것이다...'우리 아가가 하늘나라가는데 동무하라고 동무들을 그려야 한다.'고 중섭을 중얼거렸단다.

이중섭의 그림과 클립튼의 노래는 거대한 슬픔이 예술로 바뀌는 장면이고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언제가 모두 중섭의 그림 <길 떠나는 가족>처럼 행복하게 만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he boxer>

I am just a poor boy,
Though my story is seldom told
I have squandered my resistance
For a pocketful of mumbles,
Such are promises, all lies, and jest
Still, a man hears what he wants to hear
And disregards the rest Mm
 

제 얘기를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네요.
뭐, 전 그냥 불품없는 소년일 뿐이랍니다.
한 웅큼의 말들, 마치 약속처럼 들렸지만
모두 거짓과 농담일 뿐이었던 그런 말들 때문에
인생을 낭비해 버린.
아직도, 사람들은 원하는 것만 듣고
다른 것들은 모두 외면하더군요...

When I left my home and my family,
I was no more than a boy
In the company of strangers,
In the quiet of a railway station
Running scared, laying low,
Seeking out the poorer quarters
Where the ragged people go
Looking for the places,
Only they would know

 

집과 가족들을 떠나왔을 때
전 어린 아이에 불과했답니다.
낯선 사람들로 가득찬 기차역은 너무도 적막했고
저는 두려웠어요. 몸을 움크리고
걸인들이나 있을 법한 누추한 곳을 찾아 다녔답니다.
정말, 그런 사람들이나 알 법한 곳들을 찾아 다녔어요...

Asking only workman's wages
I come looking for a job,
But I get no offers,
Just a 'come on'
From the whores on 7th Avenue.
I do declare there were times
When I was so lonesome
I took some comfort there. Ooo, la, la
Lie-la-lie

 

형편없는 보수라도 상관없었지요.
전 일자리를 찾아다녔어요.
하지만, 어디에서도 구할 수가 없었답니다.
7번가의 창녀들만이 이리 오라 손짓하더군요.
정말이지 때때로 저는 너무도 외로워 견딜 수가 없었기에
그 곳에서 스스로를 위로받곤 했습니다...


Then I'm laying out my winter clothes
And wishing I was gone, going home
Where the New York City winters
Aren't bleeding me
Leading me, going home

 
겨울 옷가지들을 챙기고 있어요.
떠나고 싶어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더 이상 뉴욕의 겨울 때문에 아파하지 않아도 되는 곳.
절 이끌어주세요. 집으로 보내주세요.

In the clearing stands a boxer
And a fighter by his trade
And he carries the reminders
Of every glove that laid him down
Or cut him till he cried out
In his anger and his shame

I am leaving, I am leaving
But the fighter still remains Mm
Lie-la-lie
Lie-la-lie

링 한복판에 권투선수가 서 있습니다.
싸움으로 근근히 하루를 먹고 사는 그에게는
그를 때려눕히고 상처입혔던
글러브의 상처들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답니다.
'그만해주세요. 이제 그만 하고 싶어요.'
그는 분노와 부끄러움이 뒤섞인 울음을 터뜨리지만,
아직도 그 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어요...

..................................................
오늘 왜 이렇게 이 노래가 자꾸 귀에 맴돌까? 이 곡은 실화를 바탕에 두고 만든 곡이다.쿠바의 권투선수 배네 패럿이 주인공이다.그는 우리 나라의 김득구 선수처럼 링 위에서 죽었다.

그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갔기를..그곳에서 편안하기를.그리고 오늘도 세상 어느 곳에서 외로운 복서가 되어 집을 그리는 사람들에게도...평화가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marr 2007-10-29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그냥 들을 때는 몰랐는데, 가사를 음미하고 보니 마틴 스코시즈의 "성난 황소"가 생각나는군요. 감옥에서 벽을 쿵쿵 치면서 괴로워하는 raging bull.

드팀전 2007-10-29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처음뵙는 것 같아요. 그 영화의 첫장면은 아주 유명해서 아직도 그게 제일 먼저 기억나요.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때문에 더 오래 기억되겠지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그런데 marr은 어떻게 읽어요. "마...ㄹ" 이렇게^^

marr 2007-10-30 01:29   좋아요 0 | URL
그냥 아무 뜻없는 알파벳 조합일 뿐입니다.
안녕하세요.
글이 좋아 종종 찾는데도 제가 인사가 늦었습니다.
 
HOW TO READ 니체 How To Read 시리즈
키스 안셀 피어슨 지음, 서정은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내 가슴 속의 죽은 우표들, 날카로운 유리로 된 우표들은 내 가슴에 상처를 내고 곪게 한다.

                                                                     마누엘 푸익 <거미여인의 키스> 중에서

<HOW TO READ>시리즈 중 두 권을 샀다.이런 류의 책은 '지도'다.흔히들 '입문서'라고 많이 한다.그런데 나는 '입문서'라는 말에 약간의 떫은 맛을 느낀다.소림사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어디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일까 ? '입문'이라는 말은 일주문 앞에 서 있는 중 공부하려는 행자를 떠올리게 한다.왠지 그 문에 발을 담그면 죽비를 들고선 장년의 스님들이 늘어서 있을 것 같다.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일단 들어 왔지.푸후후...중 되는게 쉬운지 아나 본데..그럼 한 번 죽어봐.당장 짐 내려놓고 빗자루 안 들어.이게 벌써 빠져가지고.."

'입문서'라는 말은 은근히 '지식 권력의 위계'가 작동하는 말이다.즉 '이 바닥에 신고하려면 겁없이 깝치지 말고 네 정도면 이 수준에서 해'라는 식이다.'어디 함부로 덥썩 달려들려고..겁대가리 없이.' '입문서'의 효용에 대해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세상사의 모든 일이 그렇듯이 걷지도 못하면서 뛸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런면에서 이런 류의 '입문서'는 필요하고 또 효과적이다.그저 '입문서'라는 단어를 생각해보다가 그 의미속에 '위계'적 요소가 강하지는 않을까 현실에 빗대어 생각해 봤다.'입문'이라는 말이 '초보','미숙함','무지'와 연관되는 이미지가 강하다보니 대개 사람들은 '입문서'를 들고 다니는 것 보다는 두꺼운 저작을 들고 다니는 것을 선호한다.니체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니체의 가장 유명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고등학교 필수도서 목록에도 들어있다.나는 솔직히 아주 명민한-이건 공부를 잘하는이란 뜻과는 관계가 없다-몇 명의 고등학생외에는 전혀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리라이팅 시리즈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저자 고병권도 서문에서 그런 말을 한다. '사람들이 대개 중고등학교 때 니체의 책 한 권 쯤은 읽는다...그러나 정작 나는 대학원들어와서야 니체를 처음 접했다'

중고등학교 필수도서 목록을 선정하는 무대포 정신때문인지 아니면 '입문서'에 대한 이미지 때문인지 아직도 사람들은 니체를 읽기 위해 <차라투스트라>로 곧바로 다이빙한다.그리고는 1분간 숨을 참다가 익사한다.

<HOW TO READ 니체>의 경우 밤눈으로 찾아가본 적이 있는 길을 다시 찾아가는데 필요한 정도의 지도책이다.과거에 니체의 집을 기웃 기웃 거렸던 사람이라면 평이한 지도를 따라 '그래 여기에 이런 건물 있었지'라고 하면서 따라갈 만하다.저자인 키스 안셀 피어슨은 니체의 철학적 연대기를 세 단계로 나눈다.(일반화된 방식이다) <비극의 탄생>으로 시작되는 '예술가의 형이상학'문제,그리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으로 부터 발전하는 중기 니체 철학,저자는 '긍정의 시대''자유정신의 시대'라고 말한다.그리고 이후 '거부의 시대'로 전화해가는 후기 니체다.우리들이 가장 많이 읽는 <차라투스트라>는 사실 니체 저작 중 대표작도 아니고 니체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부분일 수 밖에 없다.저자는 <비극의 탄생>부터 시작해서 시기별 니체 철학의 주요 개념들과 철학적 투쟁 대상.그리고 그가 만들고 싶었던 세계에 대해 중요 저작의 특정 대목을 중심으로 설명한다.예를 들어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한 설명으로 그는 <즐거운 학문>의 한 아포리즘을 이용해서 개념풀이에 들어간다.

"너는 이 삶을 다시 한 번,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    <즐거운 학문>

이 개념에서 니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한바는 "삶의 긍정'이다. 내세나 천국과 대비되는 '영원회귀'(어떤 학자는 영원반복이란 말을 쓴다.)는 형이상학이 만들어놓은 도망갈 구멍을 원천차단시킨다.구원이니 천국이니 하는 것은 전부 개풀뜯어 먹는 소리다.그걸 찾아보려고 어디부터 시작되었느니 그것의 끝은 어디니 하는 형이상학과 종교적 짓거리는 이제 종말처리장으로 들어가야된다는 것이다.신의 죽음을 선언한 니체는 이제 신 없는 시대에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해 나가야하는지 말한다. "너 스스로를 사랑하고 너 스스로를 창조하라"는 것이 핵심이다.(자기계발서에 나오는 이야기 같군 ^^) 쉽게 말하자.

스팅의 노래 <English man in Newyork>이란 노래가 있다.거기 가사 중에 보면

'I'm a alain I'm a legal alain .. be yourself no matter what they say"  하는 부분이 있다.니체의 개념을 적용하면-성공할경우-그 에일리언은 위버멘쉬가 된다. 열나게 짖는 그들은 모두 중력의 영의 은유이다.그리고 니체는 이런 작업이 춤추듯 명랑한것이라고 말한다.그러나 절대로 절대로 오해해서는 안되는 것이 니체가 말하는게 '소아론적 자아찾기'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저자는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에서 니체가 성급한 사상가와 상투적 작가를 비판하는 내용을 싣고 있다.이 말은 니체가 '너 자신이 되라'라고 한 것을 '소아적 자아찾가'수준으로 해석하는 것이 완전 본말전도하고 있는 것이라는 예로도 적절할 듯 하다.

세계를 실재보다 더 쉽고 편한 것으로 믿도록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우리는 이들의 명랑함이 지닌 천박함을 폭로해야만 한다.우리에게 필요한 명랑성은 가장 깊이 사유할 수 있는 자들과 가장 생생한 현실을 사랑할 수 있는 자들로부터 온 것이어야만 한다.(거의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주변에 하도 자아찾기에 목매인 20대 여성들이 많아서,주로 자아를 일본소설이나 명품짝퉁이나 영화나공연 보기에서 찾는다-노파심 삼아쓴다.)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는 영어로 하면 'over man' 즉 '넘어선 자'이다.습관,제도,상투적 관념,금욕주의적 도덕,허무주의적 형이상학 등등 넘어야 할 것은 지천으로 깔렸다.세계에는 중력의 작용점 만큼이나 많은 넘어야할 무언가가 있다.이걸 춤추면서 넘는다는 것...

"내 형제들이여,그대들의 가슴을 펴라.활짝,더 활짝! 그리고 다리도 잊지마라. 너희들의 다리도 올려라.그대들 훌륭한 무용가여....무용가 차라투스트라,날개짓으로 아는 체 하는 경쾌한 차라투스트라,온갖 새들에게 눈짓을 하며 날 준비를 마치고 각오하는 자,행복하고 마음이 가벼운자,웃고 있는 예언자 차라투스트라..."  .......................  <비극의 탄생>서문

니체에 대한 책과 연구서는 니체가 올라섰다던 6천피트 산맥보다 더 많다.그런데 '니체'를 '학문'하는 것과 '니체'의 말귀를 알아 듯는 것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오히려 니체를 학문하는 사람들은 니체를 체험하는 것과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부류중에 하나 일 것이다.<이 사람을 보라>에서 니체는 너무 많은 책을 읽지 말고,책만 들척이다 사유능력을 잃지 말고,도서관에 짱박히지 말고,가급적 엉덩이를 의자바닥에 붙이고 있지말고,나가서 놀라고 한다.나가서 상쾌한 공기를 맡으며 떠오르는 생각외에는 믿지 말라고 한다.그러므로 니체를 학문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니체를 체험할 수는 없다.(물론 니체 역시 그의 언어가 표현해낸것에 스스로를 일치시킬 수도 없었다.)그들은 그저 니체를 학문해서 밥벌이하거나 여흥삼거나 전문가가 될 뿐이다.

그렇다.카잔찬키스의 조르바다.조르바가 니체가 말한 차라투스트라이다.춤추는 조르바...상대국의 도망병과 모래사장 위에서 춤으로 서로의 역사와 아픔을 소통하는 조르바...따딴 따딴 ..부주키에 실린 테오도라키스의 테마가 귓가를 멤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최정규 교수 논문
'이타성의 진화' 규명하는 세번째 경로 가능성 제시

<※편집자주 = 이 기사의 엠바고 시간 10월 26일 오전 3시는 '사이언스'지(誌)에서 정한 것이며 제작 편의를 위해 미리 송고합니다. 신문과 방송, 인터넷 매체 및 포털사이트는 26일 오전 3시 이전에 이 기사를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엠바고 파기 시 책임은 전적으로 귀사에 있습니다.>

(대구=연합뉴스) 이덕기 기자 =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경제학자의 논문이 세계적 학술지인 '사이언스'지에 게재됐다.
경북대학교는 경제통상학부 최정규(41) 교수가 `제 1저자(First Author)'로 참여한 논문 `자기집단중심적 이타성과 전쟁의 공동진화(The Coevolution of Parochial Altruism and War)'가 사이언스 318호(Science Vol. 318)에 게재됐다고 26일 밝혔다.
수많은 행위자가 상호작용하면서 돌발적 결과를 빚어내는 `복잡 작용 시스템'으로 경제를 이해하는 이른바 `복잡계 경제학'의 메카격인 미국 산타페연구소(Santa Fe Institute)의 새뮤얼 보울스(Samuel Bowles) 교수가 교신저자(Corresponding Author)로 참여, 집필한 이 논문은 이타성이 `외부인에 대한 적대적 태도'와 결합 함으로써 `이타성의 진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게임이론적 모델을 적용시켜 함께 논의했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최 교수는 논문을 통해 인간 사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행위적 속성이지만 그동안 따로 연구돼 온 `이타성(Altruism)'과 `자기집단 중심주의(Parochialism)'가 어떻게 함께 진화할 수 있는 가를 자체 개발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인 `행위자 기반 시뮬레이션'을 통해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타성은 행위자에게는 비용 또는 손해가 수반되지만 집단에게는 편익을 주는 행위를 말하고 자기집단중심주의는 타민족, 타종교, 타인종 등 행위자가 속한 집단의 외부인에 대해 보이는 적대적 태도를 의미한다.
이 두 행위적 속성이 결합돼 자기 집단의 구성원에게는 이타적이지만 외부인에게는 적대적 태도를 보이는 `자기집단중심적 이타성(Parochial altruism)'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 지의 여부는 그동안 진화적 관점에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간주돼 왔다.
최 교수는 이 같은 의문에 대해 이타성이나 외부인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독립적으로 진화할 수 없지만 그 결합체인 `자기집단중심적 이타성'은 집단간의 적대적 경쟁을 보다 빈번하게 일어나게 만들고, 또 그 적대적 경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을 높임으로써 진화해 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결론 내렸다.
이는 사회 생물학 분야에서 이타성의 진화를 설명해온 기존의 두 가지 경로 즉, 윌리엄 해밀턴의 `친족선별 이론'과 로버트 트리버스의 `호혜성 이론'이 아닌 또다른 이론적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높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때문에 최 교수의 이론은 현재 전세계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민족간, 인종간, 종교간 갈등의 뿌리를 규명하는데도 상당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최 교수는 "민족주의나 종교적 갈등, 전쟁 등은 현재 우리 시대에 나타나는 자기집단중심적 이타성의 한 표현이며 조세 등을 통해 자신의 소득 상당부분을 공공영역에 지출해 공공의 혜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데는 동의하면서도 극심한 빈곤상태에 처해 있는 다른 나라의 국민들에게 지출되는 소득의 비중은 1%도 안된다는 것 역시 자기집단적 이타성의 예"라고 밝혔다.
서울대 경제학과 학ㆍ석사 과정을 거쳐 2003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립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산타페연구소에서 1년 5개월간 박사 후 과정(포스트 닥)을 밟은 최 교수는 2005년부터 경북대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최 교수는 경북대가 우수연구논문 저술을 독려하기 위해 사이언스와 네이처지에 논문을 게재할 경우 1인당 최고 1억원까지 지급키로 한 학술장려금 제도의 첫 수혜자가 될 전망이다.
duck@yna.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