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은 내 서재지수란에 '마이리뷰 31편'을 원래대로 복원하라!!

만약 내가 뭘 잘못해서 그런거면 그렇다고 답변을 하라!!

둘 다 안하면.....절대 램프를 닦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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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10-23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어제 잠시 비공개로 돌렸다가 다시 공개로 돌린 카테고리가 있으신건 아닌가요? 보통 다시 복귀되는데 하루 걸리구요. 0편으로는 심심하면 한번씩 오류나던데, 31편은 독특하네요.

드팀전 2007-10-23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호....그래서였군.thanks
알라딘은 답변할 필요 없으니 그냥 있어도된다!!

마노아 2007-10-23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큭, 드팀전님... 귀여워요..ㅠ.ㅠ

마늘빵 2007-10-23 18:15   좋아요 0 | URL
나도 그 말 하고 싶었는데 ㅋㅋㅋㅋ 드팀전님 땡깡쟁이.
 

아욱...아욱..

이러다가 '슈퍼 울트라 초사이언'이 되겠다.

...나는 왜 점점 더 까칠해지지...도대체 더 까칠해지지 않는 당신들은 뭐야?..

당신들이 더 인격적이어서? 아니면 당신들이 절정에서 한 발 벗어나 있어서? 아니면 당신들과(내가) 공모하고 있는 세계니까? 당신들도 고민은 하고 있으니까?

아욱 .... 아욱...

...내가 세계의 조각들을 조금씩 끌어안음으로 나는 점점 더 까칠해진다.제길할...

광기의 반대말은 정상이 아니라며...그건 사로잡히고 길들여진 정신이라는데...

아따..나 진짜 정신분열하겠네.....

어디 시골이라도 가서 세상에 문을 닫고 음악이나 듣고 그림이나 보고-(아 나,진짜 이런거 잘할 수 있다.누구보다) 연예인 기사에 키득거리고 ..동네에서 공부한 사람 대접받고...각 종 고전을 두루 섭렵하여 난척하며 살아보면 분열증은 없어지려나...

오매..진짜 분열하겠네.

쉬어야 된다.쉬어야 돼.

말랑 말랑 알라딘도 요즘은 스트레스가 된다.낙엽도 바스러지는 이 계절에 말이다.

아...이 극단에 대한 갈증.차라리 피가 튀고 살이 베는 날카로움이 그립다.

도대체 너희들은 왜 너무 맑은 태양을 보고도 살해의 충동을 느끼지 않는거냐?

안 그래? 그냥 좋아? 마냥 즐겁거나, 마냥 그냥 저냥 살만해?

아우 띠바...점잖고 인격적이고 마냥 친절한 것들...

아욱 ..아욱...가을 탄다.하드보일드하게...

초강력 슈퍼 울트라...뾰로롱 사이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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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7-10-23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드팀전님 가을 타시는구나 +.+
저도 올해엔 가을타보려고 했는데... 기후변화 때문에 가을이 없어진 것 같아서...
 

ㅋㅋㅋ

갑자기 서재지수의 마이 리뷰갯수가 왜 31편으로 나올까?

더 많을텐데...

기계란 이래서 믿을 수가 없어.

흔히 말하는 '과학'이란 것이-대개는 자연과학과 동일하게 쓰이는데-예측가능성을 위해 이것 저것 변수정리하고 늘 똑같은 답이 나오는 함수에 돌리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라.삶이라는 유동적이고 일회적인 상황을 어떻게 일반함수에 집어 넣어서 돌리겠다는 것이지.과학의 이름 바깥에 있는 수많은 현상들은 과감히 '비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배제하는 방법말고 어떻게 설명해줄거지.

"선무당이 사람잡는다" 라는 말이 얼마나 체험에 바탕을 둔 진실에 가까운 말인지 새삼 느끼는 가을이야.

19세기에 만연했던 기계적 과학관에 여전히 머리를 박고 있거나...15세기에 상인자본에나 가능했던-그것도 신화적 형태로 미화된-시장만능주의를 21세기에도 '시장주의'라는 이름을 신봉하는 자들이나....국민윤리에 대한 반감으로 더 매력적이되어 버린 세속화된 유물론과 속류 맑스를 부여잡고 있거나...종교의 이념과 종교의 역사를 혼동하여 후자를 우상화해버린 종교인들이거나...

<대학>의 핵심은 '본'과 '말'을 명명백백하게 하자는게 아니었나 싶어.누구나 '선무당'에서 벗어나지 못할지 모르지만 본인이 '선무당'임에 대해 '겸손'하지 않으면 영원히 '선무당'인지도 모르고 '선무당'짓만 할지도 몰라.소크라테스가 그런거잖아."선무당,너 꼬라지를 알란말이야"

어...나는 언제까지 이 '선무당'짓을 할 것인지..

알라딘...마이리뷰 숫자는 어떻게 고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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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와 그 골수 독자들은 참 웃긴다.

<무한도전>의 개그맨들보다 더 웃긴다.둘의 공통점이 있다.

1.어처구니 없는 형태로 웃긴다는 것.

2. 어거지로 웃긴다는 것.

3. 때거지로 웃긴다는 것.

4.이도 저도 안될땐 윽박지르며 웃긴다는 것.

5.그리고 바보짓이 뻔한데도 어디까지 가나 가끔 보러 간다는 것.

6.바보짓을 보다가 늘 헛웃음이 난다는 것.

7.바보짓을 꾸준히 하고 있는데도 통계상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본다는 것.

다른 점은 딱 하나 있다.

<무한도전>은 '웃음'이라도 주지만 조선일보는 '침냄새'만 준다는 것.

캬악...바닥에 떨어진 이 냄새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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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기원
르네 지라르 지음, 김진식 옮김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르네 지라르의 책을 읽어 보지 않아도 우리는 '욕망의 삼각형' 이나 '희생양' 개념에 대해 알고 있다.그 개념들은 지라르를 '이방인'취급하며 배제하고 있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무시할 수 없으리 만큼 인용되고 있다.신문이나 잡지등에서 가끔 만나는 에세이등에서도 모방'과 '희생양'개념들은 약방의 감초처럼 인용된다.내가 르네 지라르를 알게 된 것은 라캉 전문가로 알려진 권택영의 <영화와 소설 속의 욕망이론>이라는 책을 통해서다.군대를 제대하고 연애문제로 시름시름 앓고 있을 때였다. 90년대를 포효하던 문화연구의 관심은 그동안 거대담론에 소외 받았던 '몸'과 '욕망'의 문제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그런 트랜드의 한 복판에 들어갈 만큼의 수준은 아니었지만 어떤 내용인지 관심을 갖고 있다가 지라르와 라캉을 코끼리 더듬듯이 만났다.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간간이 다른 글을 읽다가 지라르의 이름을 볼 때면 그의 책들을 꼼지락거리고 싶은 욕망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늘상 순위에서 밀려났다.

<문화의 기원>을 읽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테리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때문이다.테러의 문제를 문화인류학적으로 해설하는 그 책을 읽다가 지라르의 개념들이 머리를 어지럽혔기때문이다.이글턴은 <성스러운 테러>에서 직접적으로 지라르를 언급하지는 않는다.그렇지만 이글턴이 테러와 테러리스트를 보는 관점에서 우리는 쉽게 지라르의 '짝패'나 '희생양'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물론 지라르 이전에도 '모방'과 '희생양'의 관점으로 인류문화를 설명한 학자들은 많다.그러나 지라르가 스스로도 말하 듯이 '하나의 주제에 대한 기나긴 논증'이라는 형태로 이 문제를 끝까지 밀고 가는 사람도 그 자신 밖에 없다.

<문화의 기원>은 인터뷰 형식의 책이다.이 책을 통해 지라르는 자신이 평생동안 부여잡고 있는 '모방매커니즘'과 '희생양'이라는 개념에 대해 평이하게 설명할 기회를 갖는다.지라르의 가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욕망'이 '모방'된다는 즉 '모방적 욕망'부터 시작해야된다.이 말을 딱잘라 쉽게 말하면 '나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다'라는 것이다.소아기적 주체론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내가 원하는 것이 남이 원하는 것이냐' 라고 반문할 수 있다.물론 지라르 역시 모든 욕망이 매개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또한 일방적이지도 않다고 말한다.그래도 너무나 당당하게 '내가 그걸 원해서'라고만 말할 수 있다면 '소아기'이름표를 계속 붙이고 다닐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 '모방'욕망이 경쟁과 갈등을 할 수 밖에 없게 된다는데에 있다.이 단계에서 서로의 욕망은 서로를 투사하는 '짝패'가 된다.지라르가 9.11과 관련되어서 이슬람 근본주의자와 미국의 폭력적 정권을 '짝패'로 상정하고 있는 것도 그래서이다.테리 이글턴 역시 이런 '짝패'가설을 이용한다.결국 갈등은 폭발하게 되는데 이 폭발 과정에 꼭 필요한 것이 '희생양'이다.모방 욕망으로부터 시작된 갈등은 '제의적'살해를 통해 일차적으로 해소된다.지라르는 인류의 역사의 기원에 '초석적 살해'라는 것이 있었다고 말한다.결국 인류의 기원은 핏덩이 위에 서 있는 것이다.그러나 희생제의롤 통해 찾아진 안정은 임시적인 것이다.모방은은 항구적이기 때문이다.'모방매커니즘'에서 피해자인 '희생양'은 초기 단계에서는 '악'으로 묘사되지만 '제의'라는 과정을 거치고 또한 사회안정이라는 결과를 통해서 다시 '성스러운 존재'로 자리잡는다.지라르는 신화와 인류학적 문헌등을 통해 이를 증명한다.이런 '희생양'메커니즘의 가장 중요한 비밀 중에 하나는 집단구성원들이 그들의 집단적 살해와 이런 매커니즘에 대해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지라르는 '무의식'적인 집단 정신 대신에 이를 '인지불능'이라고 말하고 있다.)이런 매커니즘은 공동체라는 집단의식을 만들고 결국 제도로서 '국가의 기원'과도 연결된다.지라르는 현재의 문명은 -다들 인정하지 않지만-'희생양'제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제의적 살해'라는 형식이 문화의 형성과 전수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그리고'제의'가 제도화 된 형태를 띠면 그것이  '종교'가 된다.지라르는 '종교'를 '문화의 기원이라고 말한다.

 지라르의 이론에는 '신화와 기독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그런데 이 둘은 '희생양'을 대하는 태도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신화에는 무수한 희생양이 등장한다.하지만 신화의 입장은 가해자 편에 선다는 것이 지라라의 주장이다.즉 신화속 희생양들은 흠결이 있고 그에 대한 운명의 처벌은 마땅한 것이었다.반면 구약에서는 우리 문명에 희생양이 존재하고 희생양이 무죄임을 언급하기 시작한다.구체적으로 지라라는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를 예로 든다.그리고 본격적으로 희생양이 무죄임을 만천하에 폭로하는 것은신약의 복음서에 와서이다.예수는 그런 의미에서 모방욕망과 만장일치적 집단 폭력의 희생양이다. 그를 통해 인류는 희생양에 대한 기나긴 '인지불능'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현재의 문명도 그 영향하에 있다.지라르에 의하면 희생양에 대한 인류의 집단적 인지불능과 매커니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큰 사건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다.거기에는 인류를 움직여온 거대한 집단적 폭력과 희생양을 무죄로 인정하는 복음서의 시각이 한 공간안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지라르는 그의 희생양메커니즘을 성경 시편을 이용하여 함축하고 있다.

"사람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된다.( 시편 118:22 ) " 이는 복음서가 증명하고 있는 희생양 메커니즘의 중요한 아포리즘으로 지라르에 의해 선택된다.중요한 것이 '버린다'라는 개념과 '머릿돌'이라는 메타포이다.

<문화의 기원>이 르네 지라르의 입문서로서 가장 좋을 것이라는 평가는 옳은 듯 보인다.내가 지라르를 더 읽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누구든 단 한권만 읽는다면 이 책이 좋을 듯하다.먼저 지라르 자신이 그의 가설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때문이다.그리고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이론이 갖는 평가와 위치들이다.(사실 지라르의 책만 읽는다면 이런 부문에 대해 알기 힘들다.) 이 책은 인터뷰를 토대로 구성되었다.질문자들은 지라르의 이론에 대한 다른 학자들의 비판을 통해서 지라르의 반비판을 끌어낸다.지라라는 사실 양쪽으로 공격을 받는 위치에 서있다.즉 학계에서는 반과학적이고 환원론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또한 기독교를 상정해 놓고 결과론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라는 비판도 받는다.또한 기독교입장에서는 신학적인 것을 과학적인 것으로 설명하려는 일종의 '신성모독'으로 치부하기도 한다.지라라는 자신의 연구가 처음부터 신학과 과학을 연결해보려는 시도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인정한다.그러면서 각 비판에 대해 또렷이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다.

지라르는 현대문명과 관련해서 분명히 '희생양'제의가 줄어들었다고 말한다.기독교의 영향으로 희생양제의가 더이상 통하지 않는 최초의 세상이 될 것이라고 낙관적인 평가를 내린다.반면 더이상 희생양제의라는 보호책이 없는 상황에서 폭력의 둑이 무너질 경우 무방비일 수 밖에 없는 묵시록적 세상도 우려한다.질문자들은 조금 더 직접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입장을 묻지만 지라르의 대답은 그닥 신통치 않은 양시론적 입장을 뿐이다.

이 지점에서 지라르가 자신의 가설을 조금더 사회적으로 확장시키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그는 '희생양'을 언급했던 많은 연구자들이 조금 더 깊이 '초석적 살해'와 '만장일치적 폭력'그리고 '희생양'의 효과에 대해 인정하고 밀고 나가지 않는 부분에 대해 지적한다.그런 차원에서 지라르의 '희생양'의 외연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접근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원론적이지만 '착취'라는 개념은 결국 그 대상을 상정할 수 밖에 없다.죽임을 당하는 희생양은 아니지만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분명 같은 말을 쓸 수 있다.(지라르의 희생양은 은유적 개념보다는 사실적 개념이다.)또한 '착취'에 대한 집단적 인지불능도 작용해야 한다.그람시의 헤게모니가 그런 차원의 해석일 것이다.야만적 자본주의 광풍 하에서 현재 사회구조로 희생양 메커니즘을 확대한다면 결국 우리 세상에는 여전히 여전히 수많은 '희생양'들이 존재한다.다만 그들을 제단 위에 올려 놓고 칼로 베는 직접적 행위만 있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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