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부산 문화회관까지 가는 길은 험난하다.출발 시간이 가까와지자 셀프-네비게이션이 바쁘게 움직였다.가는 길은 몇 가지가 있었다. 예전 경험에 비추어봤을때 산복도로(산이 많은 부산에서 이 말을 처음 들었다)로 가는 쪽으로 핸들이 움직였다.그러나...퇴근 시간의 통행량은 며느리도 모를 일이다.이면도로의 단점은 한번 막히면 와인병에 걸려버린 코르크마개처럼 빼도 박도 못한다는 것이다.결국 앞차의 후미등에 화풀이를 해가면 따라가는 것 밖에 방법이 없었다.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이제 미동도 하지 않는 정체가 시작되었다.이때는 결국 빠른 판단밖에 길이 없다.모르는 길이었지만 주택가로 들어갔다.시장통을 따라서 큰 길로 나왔다.으..도대체 여기가 어디지...이정표를 보니 반대방향으로 주행하고 있었다.안그래도 바쁜 와중에 내 이럴 줄 알았다.그 길은 유턴도 없다.이쯤 되면 마지막 방법이 나올 수 밖에 없다.그래...불법유턴이다.보행자 신호가 걸린 틈에 단 한숨의 주저함도 없이 핸들을 왼쪽으로 ....

조바심내며 찾아간 공연장.

시작시간이 되었는데도 썰렁했다.중강당이었는데도 1층 좌석에 빈자리가 많았다.객석 중간 중간에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만 대략 눈인사정도만 나누었다.또 오래전에 봐서 '저 이가 나를 기억할까?' 를 서로 재어야하는 경우는 과감하게 쌩깠다.공연을 앞두고 이례적으로 공연기획자가 공연소개를 했다.특별공연을 먼저 한다는 것.모음곡이기 때문에 짧은 소품마다 박수치지 말아달라는 것.기획자는 이런 말도 했다.

"며칠전 서울 공연에서는 대공연장 전체가 매진되었는데 아무래도 부산의 문화라는게.."

알렉산드로 타로는 들리는 말에 의하면 유럽에서 '타로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는 피아노계의 기대주이다.낙소스레이블을 거쳐 하모니아 문디의 대표연주자로 자리잡고 있다.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성장하고-아니 이미 세계적일지도 모르는-젊은 연주자다.어제 공연은 1층 자유석 3만원 짜리 공연이었다.프랑스 문화원 주최였기에 문화원을 통해서 사면 50% 할인받을 수 있었다.1만 5천원에 요즘 한참 잘나가는 알렉산드르 타로의 공연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은 꽤나 매력적인 조건이었다.그런데 공연장은 약간 썰렁했다.

원론적으로 지역의 문화수준과 문화소비층의 열악함을 보여준다.자본(경제자본을 포함하여..)의 축적자체가 이루어지지 못했다.최소한 문화소비라는 구별짓기 행위를 통해서 차이 기호를 전유할 필요가 있을 만큼도 토대가 형성되지 않았다.가시적이고 즉각적 반응을 불러오는 상품의 기호적 소비만으로도 지역에서는 충분히 '과시'와 '차이'를 표현할 수 있다.

또 한가지 기획사의 무성의함도 한 몪을 했다.프랑스 문화축제의 일환으로 초대받아 거저 먹는 행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사실 나도 우연히 신문쪼가리에서 기사를 봐서갔지 그게 아니었으면 왔다갔는지도 모를 뻔 했다.공연 포스터는 물론이고 공연에 대한 아무런 홍보도 없었다.조악한 포스터만 공연장 밖에 수십장 붙어 있을 뿐이었다.기획사 측에서는 세계적인 연주자를 몰라주는 대중의 수준을 탓하기 전에 제대로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했는지 부터 되짚어봐야 한다.그가 세계적 연주자라면 그의 부산 공연을 기획한 공연측은 너무나도 -낙후된 의미로-지역적이었다.

공연은 크게 두 부분을 나누어졌다.1부는 쿠프랭,2부는 라벨이었다.앙코르는 쇼팽의 곡이었다.타로는 검은색 옷을 입고 나왔다.가벼운 실크남방부터 양말까지 모두 검은색이었다.팔다리가 아주 길었고 얼굴은 작았다.누가 보더라도 미국인이라고 하지는 않을 외모와 분위기였다.약간 붉은 빛 머리와 하얀 얼굴이 모대 조명에 의해 더 선명했다.앨범 자켓등에서 본 사진 보다 훨씬 좋은 인상이었으며 다치기 쉬운 감성과 신경질적 발적이 공존하는 얼굴이었다.그러나 생각보다는 훨씬 겸손하고 젊어보였다.

쿠프랭의 연주는 그가 최근에 하모니아 문디에서 발매했던 '틱 톡 촉'음반에서 십여곡을 다시 발췌해서 들려주었다.공연장 가면서 그 음반을 듣다가 가서 그랬는지 음반과의 자꾸 비교하게 된다.라이브의 특성 상 조금더 다이나믹하고 조금더 서정적인 면이 부각되는 것은 당연지사다.개인적으로 하모니아 문디의 녹음에 대해서는 평가가 오락가락한다.처음에 하모니아 문디의 녹음을 들었을때 악기 소리의 정확한 캐치와 악기간 밸런스,소리결의 선명함에 귀가 번쩍했다.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날 수록 하모니아문디 녹음을 듣다보면 좀 거북스럽다.여전히 선명함과 깨끗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그런데 왠지 포름알데히드 냄새가 난다.마치 진공상태의 실험실에서 소리를 빼낸 것 같다.그래서 이게 과연 좋은 소리인가 자꾸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그러다보니 오히려 조금 투박하더라도 '내츄럴'에 비중을 두는 도이치그라모폰이나 과거 RCA리빙스테레오,데카 녹음들이 편안하다.  타로의 녹음 역시 그런 선상에 있었다.분명 맑고 깨끗한 녹음이었다.그런데 거기에는 '공기'가 없다.

물론 여기에는 '음반'과 '공연'은 완전히 다른 음악이다.그런면에서 '음반'을 통조림에 비유한 첼리비다케같은 지휘자의 말도 공감이 간다.어제 타로 공연은 하모니아 문디의 진공녹음 대신 연극으로 치면 제4의 벽을 뚫고 나와 공기라는 노이즈를 거쳐 전달된 내츄럴한 소리여서 좋았다.쿠프랭의 곡들은 아직 좀 생경한 감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절대음악의 형식미가 여전히 어려워서인지 반응이 뜨뜨미지근 했다.오히려 2부의 라벨에서 공연장의 분위기가 더 흥미진진해졌다.타로는 희고 얇은 손가락으로 프랑스적인 에스프리를 부산 무대에서 뿜어내었다.내 뒤쪽에 앉아 있던 예전에 알던 한 피아니스트는-그는 프랑스에서 공부한 연주자며 어제보니 학교에 출강하는 듯 했다- 유난히 큰 박수를 보냈다.프랑스 적자의 해석에 대한 긍적적 평가에 대한 박수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봤다.개인적으로도 타로가 라벨에서 보여준 절제되어 있는 품위와 모던한 감성에 좋은 인상을 받았다.프랑스식 정서에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적절한 균형감이라고 해야할까...

공연 끝나고 글샘님과 사모님을 뵈었다. 무대 앞 쪽에 계셨던 듯 하다.나는 어제 무대 중앙의 좌측 상단부에 있었다.공식은 없지만 대개 피아노 공연의 경우 무대 중앙에서 좌측 상단이 명당자리로 알려져있다.무대 전체를 볼 수도 있고 또 소리를 위해서도 적당한 거리이다.그리고 무대 좌측이어야 피아니스트의 손을 볼 수 있다.너무 좌측이면 등만 보이기도 한다.어제 나는 혼자여서 무난히 입구쪽 자리에 앉아서 공연을 즐겼다.

글샘님은 문화회관의 멋진 야경속으로 사모님과 데이트를 하러 가시고 나는 부랴부랴 운전석에 앉았다.9시 45분...예찬이가 잘 시간이었다.돌아가는 길은 광안대로의 야경 속에서 조금전에 연주했던 타로의 쿠프랭음반을 들으며 갔다.바닷가 야경을 즐기면 좀 천천히 운전했으면 더 좋았을텐데..미안한 마음에 악세레이터를 세게 밟았다.좀 돌아가긴해도 우리집 앞을 경유하여 광안대로를 통해 문화회관으로 가는 것이 오히려 막히는 시간에는 가장 빠른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다음번에는 그렇게 한번.....

그런데  언제 또 공연을 보러 갈 수 있을지....공연은 오케스트라를 봐야 진짜 좋은데 ㅠㅠ

타로가 연주하는 쇼팽 왈츠

타로가 연주하는 쿠프랭의 뮤제트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조선인 2007-10-18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님의 페이퍼 제목을 보자마자 글샘님도 어제 그 공연 가셨는데, 라고 생각했더랬어요. 만나시는 사이군요. 하긴 부산 오프가 있었으니까. 부럽부럽.

글샘 2007-10-19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로가 30대 초반 정도인 줄 알았는데...
68년 생이라네요. 흐미~~~
전포동 산복도로는 저도 한밤중에나 한번씩 가는 길입니다. 출퇴근시간엔 가시면 안 되는 길이죠. ^^ 강변로와 광안대로가 시간상 가장 빠른 접속로일겁니다.
그나저나 예찬이가 빨리 자라야 할텐데...
저도 애 잘 보는데, 언제 한번 봐 줄까요??? ㅋㅋ

몽당연필 2007-10-19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애기 잘 보신다구요? 그 말이 왜일케 반가울까요? ㅋㅋ
 

어제는 아침에 완전히 X밟았다.

금요일 본업과 직접 관련도 없는 일을 떠맡게 되었다.그것도 밀양까지 가서 말이다.이번주는 좀 편안하게 가나 싶었는데 역시...

오후 5시에 관련 회의가 있어서 들어갔더니 내가 들었던 것 보다 훨씬 큰 일에 긴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었다.ㅜㅜ 어영부영 널널하게 토요일을 맞아 보려던 꿈은 멀리 멀리 날아갔다.다른 사람들은 기존 업무만 보면 되는데 덤치고 짜증나고 귀찮은 덤이다.

괜히 자기 업무만 보고 나몰라 하는 다른 사람들의 분위기가 얄미웠다.

어차피 X 밟은 건 나니까 받아들이고 분위기 쇄신할 필요가 있었다.퇴근후에 아기와 함께 바닷가에 나가서 커피 한잔 마셨다.바나나 머핀도 함께.아기는 예쁜 옷을 입고 방글 거렸고 주변 사람들이 아기가 예쁘다고 칭찬해주었다.그래서 X 밟은 꿀꿀함은 날려버렸다.(그래도 조금 남는다.아이 귀찮아..밀양까지 갔다가 집에 들어오면 밤 10시는 넘겠다ㅜㅜ)

오늘 아침은 그래도 좀 설렌다.왜냐하면 진짜 오랜만에 공연을 보러간다.프랑스의 피아니스트 알렉산드로 타로의 공연이다.서울 공연만 있는줄 알았는데 우연히 신문에서 부산 공연 소식을 보고 예매했다.전화 번호를 잊어버려서 프랑스 문화원에 했더니 문화원이름으로 예매를 하면 50%할ㄹ인된다고 했다.이런게 전화위복인데....밀양 X밟은 건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사실 이 공연을 보려고 지난주 부터 와이프에게 귀염을 떨었다.주말에 와이프가 일을 했는데 그때도 정말 성심성의껏 아기를 돌봤다.일요일에는 다른 가족과 함께 경남수목원까지 놀러도 다녀왔다.좀 힘들었지만 재미있었다.어쨋거나 와이프가 흔쾌히 보내주어서 오늘 단독으로 공연보러간다.우하하하핳 .....

좀 미안하기도 하다.혼자 아기랑 낑낑거리고 있을 걸 생각하면 마음에 걸린다.아기는 한참 후에나 공연장에 데려올 수 있기때문에 어쩔 수 없다.대신 또 주말에 성질 죽이고 잘 놀아주어야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늘빵 2007-10-17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귀염을 떠신다니...

글샘 2007-10-17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오늘은 '조증'모드군요. ㅎㅎㅎ
저도 진작 알았으면 보러가고 싶구만... 오늘 등산 계획이 있어서리...
 

언젠가 어느 잡지에서 문화적 차원에서 스포츠와 자신의 상관관계에 대해 쓴 에세이를 읽었다.글쓴이가 나와 비슷한 세대여서 여러가지로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초등학교때 프로야구가 시작되었다.내가 동네 야구에 입문한지 1년 지난 시점이었다.나는 독산동 OB베어스 공장을 찾아가서 어린이 회원이 되었다.당시 우리 집에서 독산동까지 가려면 보스를 두 번 갈아타야했다.어린이 회원 가입을 위해 조퇴도 다.내가 하도 조르니까 엄마가 어떻게 학교에 이야기를 해 놓으셨던 듯 하다.나의 우상은 21번 박철순이였다.긴 팔과 긴 다리에 프로야구가 생기고 처음 보는 눈 밑 반사반지 검정칠...하여간 그해 OB는 우승을 했고 다음해에 한 반 남자에들중 절반 쯤은 OB베어스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초등학교 때 나는 거의 매일 야구를 하다가 집에 늦게 들어갔다.그러다가 교련복을 입고 산으로 들어가는 불량 학생들을 간첩으로 생각하고 경찰에 신고한 적도 있었다.^^ 우리팀은 '보라매'였고 나는 투수를 했다.초등학교 동네 야구팀은 주로 학급 별로 팀의 이합집산이 있었다.즉 반이 바뀌면 그 반을 중심으로 새로운 팀이 만들어지곤 했다.그러나 우리팀 '보라매'는 4년 가까이 연합팀으로 유지되었다.당시로서는 아주 드문 경우였고 우리팀 밖에 그런 경우가 없었다.물론 선생들이 주도하여 각 반 별로 야구시합을 할 때는 우리팀 선수들은 각 반 별로 뛰었다.그러나 졸업할 때가지 '보라매'팀은 유지되었다.나의 지랄 같은 카리스마가 큰 압력으로 작용했다.탈퇴하면 '배신자' 취급을 했기대문이다.

중학교에 올라가서 야구는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일단 사람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대신 이제 농구에 꼽혔다.당시 국내 농구는  '삼성과 현대'의 양강 체제였다.이 두 팀은 국가 대표를 양분했다.이충희,박수교의 현대와 김현준,신동찬의 삼성...감독은 방열과 김인건 이었다.모든 면에서 용호상박의 팀이었다.나는 멋진 페이더웨이를 보여준의 현대의 충희를 좋아했다.내 여동생은 오빠 덕에 농구를 봤고 오히려 삼성을 더 좋아했다.지금은 고인이 된-뱅크슛이 멋있었던-전자슈터 김현준을 좋아했다.나는 거의 매일 농구를 했다.점심 시간에 하고 방과 후에 하고...중학교 1학년 때는 우리반에 씨름선수 출신이 있어서 그 친구들과 놀다가 씨름도 좀 했다.중 2 때 학교 체육대회에서 우리반 대표로 단체전에 갔다.2학년 씨름 단체전 우승을 하기도 했다.중 2 때 그 반은 공부는 매일 꼴지였는데 운동은 잘했다.물론 우리 학년 중에서 가장 깡패(?)와 날라리가 많았던 반이었다.학기 초에는 폭력이 일상이었다.나도 제일 센 놈하고 붙지 못했지만(그 녀석은 중학교 2학년때 학교 짱이었다.)그의 '따가리'들 하고는 진짜 자주 싸웠다.좀 과장하면 어떤 달은 매주 토요일 쌈질을 해야했다.다행히 '학교짱'은 자기 따가리라고 1:1 싸움에서 편들어주지는 않았다.그냥 지들끼리 관전하거나 훈수를 두었다.가끔 어느쪽에서든 책상이나 쇠로 만든 쓰레받기 같은 것들이 손에 들려지면 그걸 제지하는 정도로 개입했다.

중학교때부터의 농구사랑은 고등학교 때까지도 이어졌다.매일 체육시간에 하고 쉬는 시간에 하고자율학습 시간에 했다.오죽했으면 체육선생님은 '야..너는 오늘 체육시간에 농구하지 말고 축구해'라고 했겠나.하여간 그렇게 해대는데 잘하지 않을 수가 없다.대학교 때도 나는 우리 학번 대표로 선후배들과 한 학년 전체 식권내기 게임에 자주 참가했다.(회사 와서도 회사체육대회를 하면 농구대표로 나가는데 ..여긴 워낙 무대뽀여서 좀 피한다.) 90년대 농구붐에 불질을 한 것은 NBA의 마이클 조단이다.아...정말 위대한 20세기의 대머리다.(한국에는 가장 추악한 20세기 대머리도 산다) 마이클 조단은 위대한 선수다.그의 플레이는 아름답다.농구를 즐기면서 이기는 경기를 한다.조단 은퇴 이후 그랜트 힐,앨런 아이버슨,빈스카터,코비 브라이언트..최근에는 르브론 제임스 등이 포스트 조단으로 등장햇지만 NBA의 침체를 살려내진 못하는 듯 하다.그들 모두 훌륭한 선수들이지만 마이클 조단은 그 보다 한 수 위다.그에게는 '무게감'이 있다.기술적으로야 다른 선수들도 조단만큼 할 수 있다.그러나 경기를 장악하고 팀원에게 신뢰를 주는 그 무게감은 아직 포스트조던 후예들이 갖추지 못한 것이다.

요즘은 '하는'스포츠를 거의 하지 못한다.대신 보는 스포츠나  모니터 앞에서 하는 스포츠만 가끔 즐긴다.NBA가 떠난 자리에 유럽축구가 들어왔다.박지성 덕분에 프리미어리그의 시청자들도 많이 늘었다.나 역시 수준 높은 경기력에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가끔 TV 모니터 앞에서 축구를 본다.프리미어 리그를 자주 볼 수 밖에 없지만...내가 좋아하는 팀은 외계인이 있는 '바르셀로나'이다.호나우징요의 플레이는 정말 창의적이다.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다.바람의 다리를 가진 메시와 아스날에서 넘어간 앙리와 손발을 맞추고 있다.앙리가 바르셀로나에 적응했는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다.챔스 리그 리옹과의 경기를 하이라이트로 봤는데...주워먹기 한 골 넣었다.

어쨋거나...마이클 조단이 경기장에서 뛰는 것을 다시 볼 수 없겠지만...붉은 유니폼에 23번을 단 그의 지난 화면만 봐도 즐겁다...나이키를 먹여살려준 조단.거기서 만든 광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호인 2007-10-12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억의 영상을 보니 정말 불세출이란 말이 적절했다고 생각됩니다.

비로그인 2007-10-14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포츠 신문에서 이충희의 라이벌로 김현준을 꼽을 때마다 답답했는데 여기 신동찬을 기억하는 분이 계시군요. 저도 현대를 응원했지만 이충희 킬러에다가 결정적일 때마다 한방씩 터뜨리는 신동찬이 뛰는 동안은 사실 현대가 삼성에게 조금 밀렸지요. 신동찬이 은퇴하고 현대에 이원우가 가세한 다음에야 대등하거나 살짝 우위의 경기를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앞으로 조단과 같은 독보적인 선수는 나오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세대의 경향이 그런지 요즘 선수들은 힘과 기술에서는 예전 선수들 보다 나을 수 있어도 기본기와 성실성, 승부근성에서 예전 선수들을 따라가지 못 하더군요.
 

오늘은 정말 착한 것들-그중 90%이상은 '착하다'는 걸 자기에게 덧씌우지 못해 안달난것들-을 전부 갈아 엎고 싶은데...빵야 빵야.

이 위험한 생각을 극단적으로 실행하면 인류 역사에 길이 남는 악마가 될 터인데...

그래서 상상으로만 ...그 착한 것들을 다 모은다.

하나 하나 모아서 믹서기에 넣는다.도망가는 놈들을 양 손가락으로 꼭 잡아서 떨어뜨린다.믹서기 주둥이에서 바둥 거리는 놈들은 손 끝으로 톡톡쳐서 떨어뜨린다.

아주 거대한 믹서기가 필요하겠다.

믹서기의 버튼을 켠다.윙 윙 윙..투두둑 투두둑

믹서기 벽으로 피가 튀고 내장이 털털 거리겠지.

잠깐 공포와 쾌락을 느끼고

무심하게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듣겠다.

시계태엽장치 오렌지의 알렉스처럼..

언젠가 내가 또 저 믹서기에 들어갈 지 모른다고 몸서리를 치면서 또는 지금 저 고통은 나의 것이 아니라고 위안하면서....

위선과 위악은 모두 '허위'의 자식들이다.

착하고 점잖고 인격적이라고..지랄하시고 계시네.

내가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던 게 언제쯤 일인지 기억도 안나는데...그 때 영화를 만들면 그런 걸 한번 해보고 싶었다.

"울긋불긋하고 아름다운 네가 사실 칼날 위에 서있는 것이고 또 비루함 위에 서 있는 것이라고"

<오 수정>에서 정보석이 이은주 꼬셔서 모텔데리고 가서 처음 하는게 뭔지 아나?

천정에 몰래 카메라 있는 지 확인 하는 거다.나도 수 없이 했다.

...착한 너희들이 모텔이란델 가봤겠냐.물론 가봐도. 너의 양복과 드레스에는 모텔의 흔적이 없겠지....

<생활의 발견>에서 왜 김상경이 지랄같이 유부녀 추상미 집 앞에가서 쌩쇼버티기를 하는지 아냐?

...착하고 점잖은 너희들이 화상전화 쇼는 알아도 그 쌩쇼를 알겠냐? 불륜을 응징하기에도 바쁜데

하여간 줄레 줄레 오늘은 착한 것들의 씨를 말리고 싶다.다 말리고 나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들과 다시 '착한'것들을 만들어 보고 싶다.

보들레르가 그랬다나

"우리가 기운을 북돋울 수 있도록 우리에게 네 독(毒)을 부어다오!
그토록 이 불이 우리의 머릿속을 태우고 있으니,
그게 천국이든 지옥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는 미지(未知)의 심연 깊숙이 잠기고 싶다, 새로운 것을 찾아내기 위하여! "


 허무주의와 파시즘이 그리 멀지 않다고 한 것이 보들레르에게서 구현된다.나도 그 의미와 폐악을 안다.그러나 가끔 내 안에는 죽음의 사자의 큰 낫이 문득 문득 떠오른다.

나와 '파시즘' 사이의 길은 그다지 멀지 않다.그런데 그거 아냐?

 파시즘에 동의하는 것 또한 독없는 너희들이라는 거..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07-10-11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11 2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07-10-11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 하드코어 등장!!! 이 페이퍼 보고 누구 시비거는 사람없을까요? 뭐 무서워서 안걸수도.... ㅎㅎ
이런 글로라도 맘 상했던게 조금이라도 풀릴 수 있었다면 다행이고요.
근데 믹서기에 간다는건 생각못해본 방법이군요. 전 화가나 미치겠을때 조금 다른 방법의 비슷한 상상을.... 뭔지는 다음에 제가 제대로 열받으면 보여드릴 지도 모르겠네요.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겁니다.(그게 같은 해라고 열받지 마세요.)

글샘 2007-10-12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가슴에 독(毒)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害)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 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毒) 안 차고 살아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 버리면
억만 세대(億萬世代)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虛無)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시문학파이며, 언어의 조탁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김영랑의 보기 드물게 위악적인 시입니다.

바밤바 2007-10-12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영화 감독 하고 싶어라 하고 있는데. 아마 저랑 비슷한 시기에 팀전님도 그런 꿈을 지니셨을 듯~ 왜 꿈만 꾸고 마셨데요? 궁금하네요~ 그리고 정상경이 아니고 김상경인데요.. 정상경은 제가 서예 학원 다닐 때 맨날 패악 부리던 애 이름이라서 기억에 남네요 ㅋ
 
성스러운 테러
테리 이글턴 지음, 서정은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성스러운 테러>에는 이런 부제가 붙어 있다. "서구 문명사에 스며 있는 테러의 계보학에 대한 고찰".영어판 제목은 "성스러운 테러, 테러리즘의 의미"이다.'테러리즘의 계보학'이라는 말은 출판사에서 테리 이글턴의 서문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서 쓴 제목으로 보인다.그러나 서문에서 자신의 에세이에 떨어질 비판을 의식해서 이런 말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얼토당토하지 않는 제목은 아니다.

 이 책은 테러리즘에 대한 숱한 정치적 연구들의 목록에 한 항목을 추가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다.그보다는 테러라는 개념을 좀더 고유한 맥락,즉 넓은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이라 부를 수 있는 맥락에 위치시키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이글턴은 자신과 함께 서 있는 좌파진영에게 사탄, 디오니소스,희생양 등이 담고 있는 정치학이  오늘날의 정통 마르크스 담론보다 더 급진적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고 한다.

책을 모두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을 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이다.이 뱀은 각 장의 부제를 감싸고 있다.'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거대한 뱀'은 그리스 신화에서 '우로보로스'라고 한다.영원한 시간의 상징이며 생과 사의 끊없는 순환을 뜻 한다.마치 테리 이글턴의 작업이 신화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상징하는 징표처럼 읽힌다.또한 이 책의 주제인 '테러'라는 것이 문명과 끊없는 숨바꼭질을 하는 영원한 수레바퀴의 한 축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듯 하다. '폭력'과 '희생'의 순환론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테리 이글턴이 '테러'와 관련해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단어는 '양가성'이다.테러나 국가폭력 그리고 문명화 과정이라는 것은 결국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서로 닮아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문명의 문제점은 동전의 한 쪽 면이 나머지 한 쪽을 배척하고 '절대 악'으로 규정하는 것에 있다는 점이다.이런 우화를 떠올리면 되겠다. 어린 시절 TV에서 본 만화였던 것 같다.머리 둘 달린 괴물이 있었다. 처음에는 서로 유용한 점이 많아서 좋았다.먹을 것도 더 많이 얻을 수 있고 또 적들로 부터 방어도 용이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다보니 한 쪽이 나머지 한 쪽을 너무 귀찮아했다. 걸리적 거리는 것이다. 결국 잠든 사이에 한쪽 대가리가 나머지 한쪽 대가리를 물어 뜯어 죽였다. 그랬더니 자기도 곧 죽게 되었다. 테리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를 가장 우화적으로 설명하면 이것이다.(이글턴 선생님께 죄송하긴 하지만)

인류문명의 핵심에는 근본적으로 그것에 적대적인 힘들이 내재한다. 힘겹게 쟁취해낸 문명의 내부에 '테러리즘'이 함께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야만에 기초하지 않은 문명은 없다.

테러를 제대로 이용하려면 우선 그것의 양가성을 인정해야한다....문명은 자신이 테러에 기생하고 있다는 그 이유에서라도 더욱 더 자신의 타자에게 합당한 경의를 표해야만 하는 것이다.

<성스러운 테러>에서 최초의 테러리스트 지도자는 디오니소스이다. 이 매력적인 신은 포도주와 꿀의 신이지만 -디오니스소는 그래서 계절로는 가을을 상징한다-또한 탐욕스럽고 폭력적이며 획일성의 지지하는 신이기도 하다. 디오니소스의 제전을 펼치고 있는 광경을 본 테베의 왕 펜테우스는 신전을 파괴하고 학살한다. 이글턴은 펜테우스를 한계를 벗어난 이성으로 보며 국가폭력의 한 전형으로 생각한다. 이 둘에게 부족했던 것은 바로 서로를 존립케 하는 서로에 대한 '경건함'이다.이글턴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그다지 낯선 존재가 아님을 말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렇기 때문에 제한적으로 디오니소스에게 공간을 열어준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완충역할을 한다. 이글턴을 인류가 발전하기 위해 이런 종류의 도덕적 현실주의가 요청된다고 말한다. 이를 현재에 비유하면 '테러'라는 행위가 수용될 만한 사회적 공간이 없다는 비판으로 읽히는 것이다.

저자는 이제 중세에 나타나는 성스러운 테러로 들어간다. 그 핵심에는 기독교가 있다. 기독교의 핵심은 신의 사랑이다. 하지만 신의 사랑은 신의 법을 통해 구현된다. 과거 유대인들은 신을 공포의 대상으로만 파악한 것에 비해 크나큰 전환이다. 저자는 이 '법과 사랑'이라는 것도 대립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파르마코스'예수이다. 그는 비인간성에 도전하는 또다른 비인간성, 즉 인간성을 초월한 인간성으로 더욱 더 인간적이 된 상징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이글턴은 약간 방향을 바꾸어 '탈근대론'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더한다. 즉 기존의 법과 제도에 대한 무화를 주장하는 세느강변 좌파들을 싸잡아 허무주의자로 지적한다. 그리고 그의 지도 위에서는 이런 허무주의는 절대주의와도 쉽게 연결된다.(이글턴의 뒤에서 근대문명의 중요한 개념이라고 하는 헤겔식의 '절대자유'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비판을 가한다.) 이글턴은 법과 제도가 문명에서 가진 역사적 긍정성을 지지하는 토대 위에 서 있다. 특히 신체를 포함하는 물질성에 대한 그의 긍정은 그가 마르크스 문학이론가로서의 위치를 다시금 인식시킨다.  이글턴에 의하면 법의 의미를 만인에게 드러내는 것이 예수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그리고 예수의 행위는 고대 영웅 신화의 패러다임과 함께 숭고의 문제로 넘어간다. 이는 테러리스트들이 스스로 세속적으로 갖는 -결코 축복받지도 존중받지도 못하는 방식의-숭고의식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저자는 신이 사라진 시대 '예술'이 갖는 '숭고'의 의미로 미학적 견지로 문제를 옮아간다.

 근본적으로 '숭고'의 개념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인식와 '무'에 대한 공포에서 시작한다. 아퀴나스같은 경우는 '신'을 '무'에 개념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 '무'는 '영원성'을 뜻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또는 추론할 수 있는 영원성은 '죽음'외에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이글턴의 책 내내 타나토노스의 욕망과 관련된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인간이 영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죽음이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적 영웅신화가 한 예를 보여준다.

운명적 패배를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그는 맞서 싸우는 그 두려운 힘과 다르지 않은 무한함이 자신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과시한다.신의 피조물에 불과한 개인을 초극한 힘만이 유한한 존재의 포기를 가능하게 해준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희생의 정치화'하는 과정을 설명한다.(지라르의 '희생양제의'도 결국은 정치적 죽음이다.그러므로 정치적이지 않은 희생은 없다)그는  리처드슨의 <클라리사>를 인용한다.(클라리사는 강간의 피해자로 죽음을 선택한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대중들 앞에 공공연하게 전시함으로써 위반당한 자신의 육체를 정치화 하고 사회의 괴물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테러'라는 문제를 다루면서 그와 한 쌍이 '국가폭력' 문제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이 책에서는 아일랜드의 극작가 데니즈 존스턴이 인용된다

"죄 없는 국가란 불가능한 개념이다"

 대부분 사회는 결국 자신의 기원에 대해 숨기려는 속성이 있다.특히 정치 권력은 세월의 망각에 힘입어 그 토대를 만든 폭력을 위장하고 짐짓 점잖은 척한다.정치권력은 또한 추상적인 개념들을 강제하며 폭력과 도덕적 이상주의를 결함시켜 자신의 폭력적 결과를 정당화한다.이런 추상적 개념에는 자유,평등,국가,민족,민주주의 이런 것들이 포함될 수 있다.

 영원히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X 를 규명하기 우해 우리 인육의 수학자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피흘르는 사람들의 팔다리로 방정식을 써 나가야 할 것인가?

게오르크 뷔휘너 <당통의 죽음>중에서

이런 국가 폭력에는 중간계급의 역할도 한 몫을 한다.이런 폭력은 숨기고 싶은 기원에만 해당하지 않는다..중간계급은 도덕적 이상을 내세우지만 여전히 경쟁,착취,침략,파괴적 개인주의라는 형식으로 폭력에 기생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대신 중간계급은 자신의 파괴적 성질을 괴물적 타자에게 뒤집어 씌운다.이글턴은 이것이 결국 '악'을 '악'으로 배제해 버림으로써 '악'을 타자화시키는 딜레마라고 말한다.

결론에서 다시 이글턴은 최초의 논의를 제확인한다.그는 테러를 결코 옹호하지 않으며 또한 테러리스트들을 그들이 칭송하듯 순교자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오히려 대개의 테러리스트들이 수시로 달라지는 정치적 사안을 위해 싸우며 자신을 빌려주는 청부 테러업자라고 말한다.그러나 문제의 직접적 원인은 그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그들 역시 그들이 저항하는 서구문명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말이다.이글턴은 자신의 에세이 중간 중간에 존재적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외면하고 있는 현재의 문명-조금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면 미국-에 대해 날선 비판을 가한다.그는 공정함과 정의,그리고 현 체제에 잘 저항할 수 있는 잘 조직된 정치적 기구를 언급한다.또한 윤리적으로는 비인간성을 끌어안고 넘어서는 인간성의 구현을 말한다.물론 이것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실천될 것인가의 문제는 테리 이글턴의 몫이 아니다.이 책 <성스러운 테러>는 사회과학 서적이 아니고 또한 테러에 대한 엄정한 역사서 역시 아니다.테러와 폭력에 대한 신화적이고 문학적인 분석이고 그런 의미에서 음미해 볼 만한 에세이다.

....책의 번역은 상당히 매끄러운 편이다.번역이라는 분야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고 또한 이글턴의 책이 번역대상으로 어떤 수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읽는데 문법적인 막힘을 별로 없다.물론 간간히 오탈자가 있기는 하다.역자는 이 책이 많이 팔려서 2쇄, 3쇄 찍으면서 다시 손볼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번역에 불만이 없었기때문에 역자에게 힘을 실어주는 마음에서 나 역시 이 책이 많이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