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두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머리가 여럿인 존재를 말한다.이 개념은 '정치학'에 이용되기도 한다.그렇지만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신화에 바탕을 둔 서양회화에서이다.'다두체'는 각기 다른 존재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한 사물의 시간에 따른 변신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또한 사물 내의 다층적인 속성을 상징하기도 한다.'다두체'는 주로 시간에 따른 인생의 변화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그러니까 스핑크스의 수수께기를 한 그림내에 모아 놓으면 '다두체'가 된다.'다두체'의 그림들을 보면 주로 인생의 시기들을 표현한 것들이 많다.

나는 사실 '나 답다'는 것의 정의를 포기한지 오래다.내가 총체적으로 나를 파악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않는다.물론 상대적으로 타인들에 비해 내가 나의 다양한 모습을 잘 수집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하지만 그것이 '나의 정체성'에 대해 내가 유일한 형태의 조형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나는 마치 고철 수리상처럼 나의 편린들을 소유하고 모아내고 있으며 가끔 그것들로 고철 예술품을 만들어보려고 시도한다.그러나 내가 올려세우는 높이만큼 아래에서 무너지는 조각들이 발생한다.결국 나는 무너지는 것들과 새로워지는 것들 사이의 부단한 움직임 속에 있다.그러므로 현재로서 나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그 흐름의 도상 위에 올려놓을 수 밖에 없다.

가끔씩 사람들은 나의 예상치 못했던 행동에 의아해한다.이건 당연한 일이다.인간은 언제나 예측가능성을 위해 타인을 몇 몇 단어로 몇 몇 그림으로 구상화해놓은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이 편의주의적 발상은 또한 폭력적인 양상을 띠기도 하는 인간 존재의 한계이다.특히 폭력적인 양상이 두드러질 경우는 타인의 예측가능성과 본인의 예측 불가능성을 동일한 잣대 위에 올려놓치 않을 때이다. 타자는 자신이 예상한 주름을 따라야하지만 자기는 그 주름을 계속 창조한다고 믿는 경우이다.

나는 인간이 아주 복잡한 구조물이라고 생각한다.이 구조물에는 선/악,진리/거짓,도덕/위반,폭력/순종,이기/이타 가 유화물감 섞어 놓은 듯 혼합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물론 어떤 행동을 함에 있어 추구해야하는 바를 설정하고 또 그런 지향을 갖도록 발걸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들은 있을 것이다.그렇지만 그 발걸음이 그렇게 사뿐사뿐하지도 또 그렇게 명쾌하지도 않다.마치 하교길의 초등학생처럼 인간은 자기 내부의 다면성을 늘 기웃기웃거린다.

내가 영화나 문학을 접하면 희열을 느낄때는 그런 '다두체'의 인간들을 만날때이다.아니면 작가가 내가 어렴풋이 그리고 있었던 '다두체'의 한 면을 형상화해서 사실처럼 보여주고 있을때이다.그러면 나는 내심 '나의 악마적이고 세속적인 속성의 바닥에 대해' 그것이 나만의 것은 아니었구나 하면서 위로를 받는다. 이런 작품들 속에서 나는 '가장 큰 친구이자 가장 큰 적'을 만나며 짜릿해한다.

 나는 영화를 보다 잘 울기도 하고 -와이프보다 내가 더 잘 운다-지나가는 걸인에게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하기도 한다.그렇지만 나는 또 아주 잔인하다.가끔 나는 나의 잔인함이 위악적인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만 꼭 그런 것은 아닌 듯 하다.또라이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나는 <아메리카사이코>의 주인공이 자기보다 좋은 명함을 들고 거들먹 거리는 친구를 죽이는 장면을 충분히 이해했다.또한 살인후에 스스로 놀라는 것에도 공감한다.물론 처리방법은 당연히 토막이다.토막은 살인자가 자기를 지킬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기도 하니까...이걸 도덕적으로 옳으니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니..라고 한다면 아직도 '인간'에 대해 너무 관대한 것이다.

알라딘의 역시 '다두체'의 한 모습일뿐이다.또한 이것은 은폐가 아주 용이하다.사람이 일 대 일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는 실제 버벌 커뮤니케이션보다 논-버벌 커뮤니케이션의 비중이 크다.그 사람의 분위기,말하는 태도,눈빛,몸짓 등등 이런 것이 메시지의 내용에 부가하여 그 사람을 나타내는데 큰 영향을 준다.이것은 단지 이미지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이미지로 설명할 수 없는 몸에 배인 어떠한 것이다.그러나 '알라딘'은 그런 면에서 완전히 탈신체화된 공간이다.이곳은 문자만이 살아 있다.물론 그 문자들을 통해 그 사람의 면면을 읽는다.특히 댓글이라는 비공식적이고 웃어넘길 수 있는 편린들 속에서 그의 성격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그렇지만 이것은 모니터에 대고 이야기하는 모니터 속 얼굴의 하나일 뿐이다.실제의 나를 '증식'시키고 '변모'시키기에 알라딘은 아주 편한 공간이다.내가 나를 이렇게 보기때문에 나는 알라딘에서 사람들도 그렇게 본다.

물론 유년시절 원만한 교유관계와 충분한 정서함양으로 인해 '선후가 분명'하고 '앞뒤가 수미상관'하고 '외부와 내부가 일관'된 그런 '안정적 정체성'과 '인격'의 소유자들도 분명 알라딘에 있다.가끔은 그런 '안정성'이 부럽기도 하다.그렇지만 나는 아니다.그리고 나는 그런 사람들과 연애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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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10-10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자만이 살아 있는 공간이고, 이런저런 삐걱거림이 있어 바디랭귀지가 필요한 때일수록 더욱 더 '글'만 보이지만, 다른 블로그에 비해, 알라딘에 은둔하며, 이런저런 사적인 얘기를 드러내는 사람들, 그 이야기들을 구경(?)하는 사람들 덕분에, 바디랭귀지 못지 않은 속내를 알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you are what you write라는 말도 있잖아요.

조선인 2007-10-10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알라딘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전 바보인 거군요.

글샘 2007-10-10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악한 뱀 대가리들로 상징된 다두체는 사실, 우리 인생의 진실에 더 가깝지요.
힘을 가진 정의의 용사에 비하자면...
사실 힘을 가진 정의의 용사가 개코도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만 사는 건 아니니깐...
맨날 술마시고, 담배피우고, 여자들 뒤꽁무니 쫓아 다니고... 근데 이게 사는 거니깐...
누가 그러데요. 감옥에 가면 좋은 건 다 시킨다. 공부도 할 수 있고, 종교 활동도 할 수 있고... 감옥이 답답한 건 거기 가면, 나쁜 짓을 (술, 담배, 여자 등등) 못해서 미치는 거라고...
알라딘에서 보여주는 얼굴들은 모두 다르겠지요.
누구는 공감받기 위하여, 누구는 글을 쓰기 위하여, 저같이 책읽은 소감을 모으기 위해 주절대는 대가리도 있는 셈이구요.
안정성...으로만 이뤄진 사람은 없겠죠. 우리가 그의 대가리 하나만 봤을 뿐이겠죠. ^^
햇살이 따갑지만 구름이 이쁜 가을입니다.

마늘빵 2007-10-10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제가 바람구두님 글에 단 댓글로 시작된 페이퍼인가요. ^^
저도 댓글 달고나서 드팀전님 다운게 뭘까, 란 의문이 들었습니다.
댓글을 달아놓고도 참 엉뚱하게 달았다고 생각했다는...

2007-10-11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렇게 즐겁게 써도 되는 건가요.테리 이글턴 선생님!!

책 날개를 펼치면 책은 샛빨갛고 표지의 <롱스보전투>의 그림은 매력적입니다.책의 검은 부분부터가 책 날개 껍데기입니다.벗기려고 하다가 귀찮지만 그냥 두고 있습니다.

이 책은 테러를 그냥 폭탄들고 뛰어 들거나 비행기 몰고 돌진하는 차원에서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테리 이글턴은 인문학적 의미에서 -정확히 말하면 형이상학(이 말은 자주 관념의 장난질 정도로 오해를 받는데 그렇지 않습니다.)-테러를 위치시킵니다.

초반부를 읽고 있는데..굉장히 흥미진진합니다.최초의 테러리스트 지도자는 '디오니소스'라는데요 ^^ 술과 쾌락,정열의 신이자 탐욕스럽고 폭력적이며 차이를 부정하는 획일성의 신.다름 아닌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제 철지난 논의 지만 <디워>와 관련해서 인용할 수 있는 내용이 '디오니스소'에게서 나옵니다.그대로 인용하지요.

"디오니소스 신도들의 도취적 행위는 숨 막히는 이성적 구석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보일수도 있겠지만 그와 동시에 유사 파시스트적 숭배에 취한 일종의 중독 상태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그들은 분명 활력 넘치는 집단적,디오니소스적 민주주의를 보여주고 있지만,위계에 대한 그들의 거부는 무리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난 사람을 용인하지 않는 가차 없는 비관용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기때문이다.현대의 대중문화추종자들과 마찬가지로 디오니소스 숭배자들 역시 자신을 비판하는 자들을 민중의 무매개적 지혜에서 멀어진 엘리트주의자로서 배격할 것이다.디오니소스 그 자신은 뻔뻔스러운 대중영합주의자로서 본능과 풍속에 호소하며 불경스러운 지적 비판에 일갈을 날린다.그에게서 익히 알려진 직관의 독재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에우리피테스의 희곡 <바쿠스>에등장하는 지도자 펜테우스는 디오니소스의 만찬을 상식 밖의 폭력으로 대응합니다.그는 주신의 머리를 베고 성소를 부숴버리려 합니다.

리비도의 반란을 직면한 이성은 난폭해진다.하나의 과잉(아나키)이 또 다른 과잉(독재)를 낳은 것이다.디오니소스 숭배자들에 대한 펜테우스의 대응은 웨이코 종교집단에 대한 FBI의 반응을 연상시킨다.

흥미진진 하지 않으신가요? ^^

이 책을 아마 로쟈님 페이퍼에서 알게 된 듯 한데...탱쓰투를 안한듯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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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7-10-06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땡스투해놓고 보관함에 넣을께요. :)
 
푸코 - 시공 로고스 총서 5 시공 로고스 총서 5
J. G. 메르키오르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1998년 8월
평점 :
절판


먼저 리뷰의 제목은 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부터 말씀드려야겠군요.수많은 푸코 연구자와 푸코매니아들이 발끈하셔서 제게 달려든다면 참으로 곤란하기 때문입니다.천규석 선생이 '유목주의'는 야만이라고 했다고 이정우 철학박사께서 '무식한 노인네.당신이 들뢰즈를 알아?' 라고 했던 전공자의 예리함을 받아낼 자신은 없습니다.저 말은 이 책의 마지막 구절에서 저자 메르키오르가 한 말입니다.(외부필자가 쓴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드팀일보-)

푸코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이 가는 사람입니다.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제가 문제적 인간들을 좋아하기 때문이지요.물론 이런 호기심과 친교는 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실제 문제적 인간들과 친구가 되는 것은 상당한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베토벤을 무척 좋아하지만 제가 베토벤 시대에 살았다면 그 괴팍한 영감과 친구가 되었을까요? 아닐겁니다. 아마 파파 하이든처럼 무난한 사람과 더 가까왔을 듯 합니다.그래도 문제적 인간을 매도하는 편에 설 만큼 인류애가 각박하지는 않기때문에 문제적 인간들에 대한 호기심도 마르지가 않습니다.

푸코라는 사람은 스타일부터 외계인 같습니다.잘생긴 외모지만 헤어스타일 덕분에 문어별에서 온 외계특사처럼 보입니다.저희 집 아기도 푸코의 사진을 보면 '어 어 어'(아빠의 매끄러운 번역에 의하면 '어..어느 별에서 왔어요? 정도 됩니다.) 라고 관심을 보입니다.푸코의 학문적 영역도 기발합니다.첫번째 나온 책이 <광기의 역사>. 즉 미친년놈들이 학문의 대상이 된거지요.조금 뒤에는 또 의학에 무슨 조예가 있으서셔 <임상의학의 탄생>을 쓰십니다.후기로 오면 프랑스에서 크라샹만큼 많이 팔렸다는 <감시와 처벌>이 나오지요.이건 큰집 이야기입니다.이랬던 사람이 죽기 얼마전부터는 입에 담기도 민망한 섹스에 대해 뒤적입니다.철학자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는데 얼추 역사학자이기도 했습니다.본인은 '현재의 역사가'라고 스스로를 불렀습니다. 

메르키오르의 <푸코>는 이 문제적 인간이 벌인 학문적 결과물들을 비판적으로 읽고 있는 책입니다.책은 머리 속으로 따가가기 편리하게 연대기적으로 구성되었습니다.즉 푸코의 첫번째 책 <광기의 역사>부터 출간 순서에 따라 푸코의 철학과 그에 대한 비판을 이어갑니다.먼저 푸코가 남긴 각각의 텍스트에서 푸코가 집중하고 있는 주제,그리고 그 의미들을 설명합니다.이어서 비판이 이어집니다.이 비판에는 저자가 구성한 것도 있고 다른 푸코 연구자들의 비판을 인용한 것들도 있습니다.마지막 장에서는 총체적으로 푸코의 철학이 가진 기여와 딜레마를 정리합니다.하버마스의 비판을 인용하여 푸코철학이 가진 철학의 죽음을 도출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통해 '자유주의적 무정부주의자''강단허무주의자'로 그의 철학에 레테르를 붙입니다.  

메르키오르는 푸코가 남긴 굵직한 책들은 거의 다루고 있습니다. (인터뷰나 강의록 등은 부분적으로 인용됩니다) 분량으로 보면 가장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텍스트는 <말과 사물>,<감시와 처벌>입니다.심세광 교수의 강의를 잠깐 도강해봤는데 <말과 사물>은 대우학술총서 이후에 국내 번역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푸코는 이 책을 '보르헤스의 단편소설'을 읽다가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분류법에 대한 이국적 적용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지요.<말과 사물>은 좀 어려운 책인 듯 합니다.별로 읽고 싶지는 않더군요.(푸코의 책이 어렵지 않은게 어디있겠습니까만은..) <말과 사물>의 주제는 경험을 정돈하는데 부과되는 근본적인 코드에 대한 것입니다.그 유명한 '에피스테메'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이것은 어떤 사유의 기초가 되면서 특정 시대의 지식의 모든 흐름밑에 있는 하부구조를 말합니다.<말과 사물>에서 푸코는 역사적으로 네 개의 에피스테메를 설정합니다.17세기 중반까지 전고전시대,18세기말까지 고전시대,그리고 근대,1950년 대 이후 현대 입니다.푸코는 이 시기에 에피스테메가 어떻게 변이하는지 그리고 담론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지요.먼저 르네상스 시대에는 말과 사물이 분리되지 않는 유사성의 시대라고 합니다.이후 고전시대에 들어오면 유추의 시대가 가고 분석의 시대가 들어서게 됩니다.표상이라는 개념이 출현하지요.푸코는 쉬운 예로 <돈키호테>를 들면서 소설 속에서 정체성과 차별에 바탕을 둔 이성이 기호와 유사성을 핵심으로 한 르네상스 지식을 매도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에피스테메의 변이는 중심되는 담론의 변화도 이끌어냅니다.예를 들어 고전시대 부의 분석이 에피스테메의 변이로 인해 정치경제학으로 학문의 바톤을 넘기게 됩니다.(그러나 이후 푸코는 '에피스테메'개념을 뒤로하고 '담론'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어쨋거나 여차 저차해서 결코 쉽지 않은 주제들인 것 만은 사실입니다.)

메르키오르는 <말과 사물>에 대한 비판에서 먼저 에피스테메의 불연속성과 단일체적 견해 대해 비판합니다.푸코는 에피스테메에 절대적 단절을 주장했고 특정 시대에 모든 지식의 가능성을 규정하는 에피스테메는 단 한가지로 보았기때문입니다.총체성 부문에서는 <지식의 고고학>에서 푸코가 부정합니다만 저자는 이걸 단순히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어쨋거나 메르키오르는 과학사의 연속성과 세계의 수학화를 예로 들면서 푸코의 단절론과 지엽적인 담론선택을 비판합니다.또한 메르키오르는 <말과 사물>이외의 책 <광기의 역사><임상의학의 탄생><감시와 처벌>등에서도 푸코의 자료선택과 해석의 임의성,왜곡에 대해 지적합니다.그는 이 책들에서 푸코가 천착했던 주제들에 대한 역사학적 연구들을 토대로 푸코가 자료를 목적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부분을 지적합니다.푸코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저자는 역사학적으로 푸코의 역사적 객관성이 형편없다고 평가합니다.물론 다양한 의견이 있다는 전제를 두기는 합니다. "푸코 역사의 객관성은 전반적으로 보아 역사의 여신 클리오에게 일급의 칭찬을 퍼부었던 세기에 이루어졌던 일급의 역사 연구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쪽에 무게를 싣습니다.

저자는 푸코가 계몽주의와 근대이성에 대한 뿌리깊은 부정에서 인식의 출발점을 잡고 있다고 봅니다.또한 구조주의 영향하에서(푸코 자신은 부인했지만) 주체 문제에 대해 등한시 했다는 것입니다.물론 <성의 역사>에서 푸코는 권력/지식 망에 완벽하게 포위된 개인이 어떻게 자기 통제화를 통해 주체화 해나가느냐에 관심을 갖습니다.저자는 그동안 푸코가 작업해왔던 방식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한다고 봅니다.(그런데 푸코 입장에서 보면 권력에 포위되지 않는 개인의 존재방식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나아가야했던 방향일 수 밖에 없어보입니다.)메르키오르는 엘리아스같은 문화사가들이 서구의 진보와 자기통제의 확대를 동일시하는 태도로 이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었던 점을 이야기합니다.하지만 푸코의 경우 근대화 과정의 '문명'에 적극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있기때문에 <성의 역사>에서 언급하는 역사적 이야기(그리스의 성이야기)와 주체를 지배도구로 삼는 권력이라는 주제와 일치시킬 수 없다고 봅니다.

메르키오르의 비판은 주로 푸코의 초기,중기 사상-고고학,계보학-에 집중되어 있다는 인상이 강합니다.푸코 스스로도 <성의 역사1>이후 약 8년간의 침잠에 들어갑니다.그리고 이후 <성의 역사2>에서 부터 주체의 재문제화를 꺼내들기 시작합니다.이를 푸코의 자기부정이라고 보는 견해는 푸코에 대한 또하나의 목적론적 비판이 아닐까합니다.실제로 푸코 후기 사상이며 푸코의 이론적 탈출구라고 할 수 있는 '주체화'에 대한 부문은 이 책에서 너무 간단하게 처리되는 경향이 있습니다.그리고 푸코가 주체화를 이야기했다고 그것이 과거 자신의 학문과의 단절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오히려 자기비판적 문제제기와 돌파라고 보여집니다.푸코가 주체화를 이야기하지만 결코 권력문제와의 결별을 말하지도 않았습니다.푸코는 주체가 통제된 복속상태를 말하기도 하지만 스스로의 자각을 통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주체의 모습도 상정합니다.이는 푸코를 구조주의의 한 흐름으로 파악하는 입장에서 이 부분을 외면한다면 푸코에 대한 왜곡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저자는 푸코에게서 바쿠닌류의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를 읽어냅니다.그런데 이것 역시 푸코의 실천방식에 대한 극단적 해석은 아닐까 합니다.푸코는 권력의 격자망에 사로잡힌 개인은 '복속하기'에 대한 투쟁의 양상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 보는 듯 합니다.푸코는 권력을 억압으로만 파악하지 않기 때문에 착취라는 지배형식에 대한 투쟁만으로는 해방적 가치를 획득하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책의 결론에 와서 메르키오르는 푸코의 사상에 대해 몇 몇 단어로 정리합니다.푸코는 뱅상 데콩브가 말한 (폴 리쾨르가 먼저한 건 지 누가 먼저 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의심의 3인방-마르크스,니체,프로이트의 후예라는 것입니다.그러나 이들보다 더 급진적인 후배로 기억될 듯합니다.왜냐하면 마르크스나 니체는 계몽주의에 대해 푸코처럼 쌍심지를 들고 반대하지 않았기때문입니다.또한 권력 문제에 있어 비마르크스주의적 경향을 보입니다.푸코는 권력을 억압만이 아니라 생산하는 권력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기 때문입니다.저자는 푸코가 니체의 우산 아래 있지만 대안없는 문화적 비관주의에 경도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지요. "푸코의 사상은 단정적인 니테의 에토스와 도덕에 대한 근대적인 망설임의 중간지점에 세워진 집이다.저자는 68혁명과 푸코와의 관계를 슬쩍 언급하면서 푸코를 가장 의심스러운 '반문화' 게이머로 언급합니다. " 그 게임은 근대사의 의미를 다시 말들어 내는 것이었다.그렇게 하여 근대적 이성, 자유주의적 문화의 주된 원천이며, 또 패러다임인 계몽사상에 반역하는 아주 잘못된 편견에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하버마스의 비판을 인용하여 푸코에서 연상되는 '보편적 이성의 포기'가 '철학의 종말'을 유도할 뿐이라고 말합니다.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푸코가 활약하던 당시 프랑스 철학 시장 내에서 푸코의 위치를 말하면서 푸코의 사상이 가진 '무정부주의적 '시장성에 대해 언급합니다.결론적으로 저자는 푸코를 부정주의와 비합리주의를 대표하는 비유토피아적 신무정부주의자로 정리합니다.

푸코는 이래저래 문제적 인간이 맞는 것 같습니다.<푸코>에서 메르키오르는 흥미진진하게 책을 이끌어갑니다.이 책이 입문서로 옳은지 아니면 비판서로서 옳은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하지만 균형감을 가지고 푸코에 입문하려는 사람에게 좋은 나침반이 될 듯 합니다.이 책에서 나온 푸코 비판으로 인해 푸코를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입문서 수준의 분량에서 푸코 철학의 비판과 반비판을 전부 거론하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푸코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저마다 다를 것이고 또 푸코를 받아들인 다는 것이 전면적 수용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지난 번에 보았던 <치즈와 구더기>의 주인공 메노키오가 생각이 나는군요.그가 읽었던 책이 그의 반카톨릭적 종교관을 그대로 만들지는 않았습니다.16세기 방앗간 주인이 그랫던 것 처럼 푸코를 읽는 사람들 역시 때로는 과감한 단순화,때로는 이종결합,때로는 혼성에 의해서 '자신의 푸코'를 엮어내기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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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10-03 12:10   좋아요 0 | URL
역사의 여신 클리오에게 일급의 칭찬을 퍼부었던 세기에 이루어졌던 일급의 역사 연구...가 결국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푸코를 욕할 수만도 없겠지요. 그넘의 역사 연구와 민족 연구가 결국 살상의 논리로 무장하게 된 걸 보면... 푸코는 살상쟁이는 아니니까요.
저도 푸코에 관심은 있으면서도... 가까이 하기엔 쪼매 먼 사람이란 생각을 늘 합니다.
멋진 리뷰를 잘 읽고 갑니다.
겨울 방학쯤 함 읽어봐야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드팀전 2007-10-03 12:24   좋아요 0 | URL
저 역시 푸코에게 낚시밥만 던지고 있는 입장이지요.조금 더 낚시밥은 던져보고 그냥 돌아갈지 말지 생각해 볼 작정입니다.^^

로쟈 2007-10-03 12:32   좋아요 0 | URL
푸코 연구자들이 이 책을 싫어하는 이유를 알 거 같습니다.^^

기인 2007-10-03 21:52   좋아요 0 | URL
오 드팀일보 잘 봤습니다 :) 저도 요즘 '감시와 처벌' 개역판을 주문했는데, 방에 있던 판과 얼마나 달라졌을지 비교해보려고 합니다. 많이 '개역'되었으면 좋을텐데.. 신판(2003판)에 대해서는 마지막부를 제외하고는 좋다고 하더라고요. ㅎㅎ

드팀전 2007-10-03 21:57   좋아요 1 | URL
제가 본 건 무슨 판인가요? 5-6년전에 봤는데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나남출판사...
그나저나 그동안 별고 없으셨는지요? ^^
 

조금 전에 사랑니를 뽑았습니다.30년 이상 나의 일부였지만 볼 수 없었던 사랑니와 잠시 조우했습니다.6조각으로 나뉘어진 사랑니 사체가 은빛 트레이위에 놓여있었습니다.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사랑니.온전한 모습이 아니라 산산조각난 모습으로 만났습니다.

의사선생님은

"10여년 사랑니를 뽑았지만 제일 큰 사랑니였어요"라고 했습니다.그래서 6조각으로 분리를 했나봅니다.

제가 사랑에 많이 아파하는 동안 사랑니 역시 붉은빛 잇몸 속에서 저도 아파하며 눈물을 참았나봅니다.그래서 어금니보다 더 커버린-이제는 조각난-사랑니가 되었나 봅니다.

짧은 만남과 작별하고 약봉투를 하나 들고 회사에 들어섰습니다

이제 마취가 깨어나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 밖에 없지요.

빔벤더스의 영화 제목 <페널티킥을 맞이하는 골키퍼의 불안>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예전에 썩어버린 어금니를 뽑고 지하철 안에서 끙끙거린 적이 있는데 그 기억이 납니다.너무 아파서 '우..우' 하고 신음소리가 새어나왔습니다. 지하철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처다봤습니다.나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습니다.손으로 볼을 잡고 이를 뽑았다는 시늉을 연신 내었지요..사람들은 고개를 돌렸고 나의 증명이 어지간히 먹혔다고 생각하며 계속 끙끙 거렸습니다.

치과 쓰레기통에 버려진 내 사랑니와 내 사랑의 기억만큼 아프겠지요 ㅜㅜ

마취가 풀리기를 기다리며..ㅜㅜ 잘가 사랑니,한번 만나고 헤어진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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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09-28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큰일 치르셨네요
전 몇년전 왼쪽 사랑니를 뽑고 더이상 경험하고 싶지 않아 오른쪽 사랑니 방치중이에요
제발 썩지 말고 잘 버텨주길 바라면서 ㅠ

드팀전 2007-09-29 08:09   좋아요 0 | URL
저희 아버지는 사랑니 4개가 별 통증없이 다 나와서..다른 사람들보다 이가 4개가 많다고 합니다.이번 추석에 가서 사랑니 이야기 하다가 처음 알게 되었어요.^^

kimji 2007-09-28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어어- 얼마전에 저도 처음으로 뽑은 사랑니때문에 한동안 심난해 했던;; 의사선생님은 아주 일반적인 모범적인 사랑니여서 뽑기도 수월했다고 말했습니다만, 그래서 회복도 수월했습니다만, 그러나 힘든 며칠이었습니다;; 그 뒤로 뽑은 사랑니 옆의 이가 시큰거려요. 치과는 무섭습니다. 아무리 전면창 앞에 자리한 치과의자에 누워 있다 하더라도, 입을 벌리는 동안은 두 눈을 꾹 감고 있어야 하니까 멋진 전망도 소용없으니까요. 아무쪼록,
조속한 회복을 하시길-

드팀전 2007-09-29 08:10   좋아요 0 | URL
이를 뽑아내는 건지 부러뜨리는 건지 '두득'하는 소리에 깜짝 놀랐습니다.마취를 해놓으니 크게 아프진 않았지만..이제 아파요ㅜㅜ

글샘 2007-09-28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자식... 쓸모에 비해선, 얼마나 이름이 예쁜지요...^^
저도 제대로 올라온 사랑니 하나, 옆으로 돌아 누운 넘 하나, 위로 붙은 넘 하나 해서 셋이나 '러브 투스'를 데불고 살지만, 아직 걔들은 조용히 살고 있데요. ^^ 언제 여섯 조각 날 넘들인진 몰라도... 삐딱하게 붙어 있으니 계속 크는 것 같애요. 며칠 고생하시겠네요.
덕분에 다이어트 하쇼~~~

드팀전 2007-09-29 08:14   좋아요 0 | URL
정말 귀찮은것 빼버리지 충치만 생기고 어금니를 괴롭히는 사랑니는 우(빼버려)
철이들면 뭐해 씹지도 못하는걸 하지만 빼버리는 것도 고치는 것일까 잠못자게 괴롭히는 미운 이빨을 그래도 나는 버리진 않을테야 비록 귀찮은 사랑니지만

내몫의 아픔을 주는
내몸의 일부인 것을

동물원의 <사랑니>라는 곡의 가사에요.
이뽑고 나서 회식갔답니다.고기 냄새만 맡고 이가 아파서 앉아있기 힘들어서 도망나왔죠.

딸기 2007-09-28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옛날에 사랑니 쪼개서 뽑았는데 돌팔이 의사가 한조각 안 빼내고 놔둬서, 나중에 제가 손톱으로 빼냈어요. 황당...
그런데 6조각으로 잘랐다니... 대체 얼마나 이빨이 크셨길래!!!

드팀전 2007-09-29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이런일이..
왕이빨이었어요 ^^ 엑스레이사진부터 커보이긴 하더니...10년만에 최대라잖아요 ^^
 

길에서 잠들다

                    -김윤식

삶이 피곤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물 한 그릇을 얻지 못해서도 아니다 발굽이 다 닳은 나귀처럼 하루 저녁은 서서 잠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잠속에서 그냥 마른 풀 향기처럼 흩어져도 좋고 모닥불로 사위어도 좋기 때문이다 길 가다가 눕는 곳이 곧 마지막 쉴 집이다 옛날 청도에 가면서는 정말 그런 생각을 했다 어깨뼈 위에 이슬이 내렸다.

........................................................

오늘 일찍 출근해서 회사에서 잛게 책을 봤다.글로 사귄 친구는 아니어서 멋있게 '문우'라는 표현을 쓰긴 멋쩍지만 글때문에 알게된 친구가 보내 준 책이다.이 책에서 내게 가장 큰 인상을 남긴 글은 김윤식 시인의 <길에서 잠들다>이다.시에 과문해서인지 처음 들어보는 시인이었다.이 시 다음 장에는 나귀와 관련된<나귀야>라는 시가 있다.무거운 짐을 짊어진 허름한 나귀가 종이 앞 뒤에 다보탑처럼 새겨져 있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황지우의 '뼈아픈 후회'중에서)임에 땅바닥을 치던 나의 시간도 이렇게 변화해간다.아이때문에 잠을 설쳐서 그런지도 모르겠고 남들 다 지고 가는 삶의 무게에 엄살을 부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통속적인 비유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내 어깨를 누르는 중력은 나귀와 나의 모습을 오버랩시킨다.그럼에도 한가닥 남은 자존심이랄까 아니면 한쪽에 흐르고 있는 초원을 달리던 DNA의 슬픈 기억이랄까...  '하루 저녁은 서서 잠들고 싶은' '길 가다가 눕는 곳이 곧 마지막 쉴 집'이길 바라는 나귀의 눈빛이 자꾸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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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07-09-28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념무상, 주어진 삶을 자유롭게 살고 싶은 것은 누구나 가지는 바램이 아닐까요. 저도 그렇게 살아봤음 합니다. ㅎㅎ

비로그인 2007-09-29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뼈아픈 후회'는 어느 흐린날 나는 주점에 앉아있을거다 '에 수록된 시가 아닌가요? ^^
인식의 힘 님 서재에 댓글을 남기셨더군요. 파도타고 넘어왔습니다. ^^

드팀전은 메밀꽃필무렵에 나오는 그 드팀전 허생원이 맞나요?
이곳 서재에 잠시 들러 여기저기 둘러보고 갑니다.
드팀전님, 행복한 주말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