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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역사 강의
백승욱 지음 / 그린비 / 2006년 11월
평점 :
'코스 요리'라는 게 있다.다들 한번쯤은 '코스요리'를 경험해보셨을 것이다.한식은 물론이고 중식,일식,서양식..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제법 큰 음식점에는 코스요리가 있다.대개 보급형과 고급형으로 나뉘어진다.. A코스,B코스,C코스 하는 식으로 보긴 편하지만 번호 매기 듯 멋대가리 없이 구분한 곳도 있고 나름대로 고풍스런 이름을 붙여 멋을 낸 곳도 있다.
태어나서 '코스 요리'라는 걸 처음 먹어봤던 때가 기억난다.음식이 하나씩 하나씩 나오는게 참 신기했다.학교 후문 식당에서처럼 쫘악 펼쳐 놓고 먹는데 익숙한 나에게는 음식의 맛보다 감칠 맛나는 기대감이 더욱 컸다.기대감의 하이라이트는 종업원이 테이블에 접시를 내려놓을 때 이다.늘 뻔한 질문..종업원도 수 천번은 했을 대답이 오고 간다. "이게 뭐에요? 뭐로 만든거에요?"
백승욱의 <자본주의 역사강의>는 정성들여 마련된 코스요리이다.에프타이저를 시작으로 모두 9개의 전체 요리가 준비되어 있다.그리고 맛집의 포인트,깔금한 후식도 마련되어 있다.고객에게는 이 요리집이 어떤 음식을 다루는지가 중요하다.일식인지 중식인지 알아야 여자친구를 데리고 갈 것 아닌가? 어떤 음식점은 이름만 봐서는 알 수 없는 경우도 많다.그래서 들어갔다 나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
<자본주의 역사 강의>는 세계체계론을 주메뉴로 한다.이 책의 제목이 설명하는 '역사적 자본주의'가 이 집의 종목이다.요리 종목이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면 주방장들의 프로필도 한번 눈여겨 볼만하다.주방장들의 경력이 화려하면 일단 요리의 맛은 기본 이상은 한다.(실제 경험적으로도 그렇다.) <자본주의 역사 강의>에 등장하는 주방장들....페르낭 브로델,칼 폴라니,임마뉴엘 월러스틴,지오반니 아리기,비버리 실버....학계에서 별 다섯개짜리 호텔 주방장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다.이 중에 저자인 백승욱이 세계체계론 설명을 위해 가장 많이 시선을 주는 사람은 월러스틴과 아리기이다.이 집의 메인 요리 중에 메인 요리는 이 두 사람의 세계체계 분석을 주 내용으로 한다.두 명의 훌륭한 주방장인데 요리 하는 스타일이 많이 다르다.저자는 친절한 종업원답게 각 요리의 구성과 첨가물을 설명하고 이어서 서로의 장단점 그리고 상호보완적인 측면을 이야기한다.브로델과 폴리니,그리고 실버는 세계체계 분석의 토대로서 또는 세계체계론이 담지하지못하고 있는 노동의 실질적 포섭문제 등에 대해 보완하고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방대한 분량의 세계체계론 내용을 전부 설명하기란 내 능력 밖이다.종업원의 친절한 설명에 밑줄을 그어가며 각 주방장들의 요리마다 따로 정리를 해놓았지만 그 분량 또한 만만치 않다.(한 강의당 바람구두님 리뷰 길이만큼 된다.때로는 넘을 때도 있다.에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11개의 장이니 분량이 '대략 난감'이다..) 세계체계 분석은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출발한다.자본의 세계성에 대해 마르크스만큼 압축적으로 설명한 사람도 드물다.그렇지만 마르크스의 이론은 자본주의가 실제로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변해왔는지 설명하는데 한계를 갖는다.마르크스의 이론 자체가 보편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세계체계론은 마르크스의 '역사 없는 역사성'을 극복하여 상대적 역사성을 회복하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또한 마르크스의 자본논의에는 세계체계론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인 '국가'라는 개념이 미비하게 다루어진다.세계체계론은 이 두가지, '역사와 국가'의 공백이라는데에 문제의식을 제기하며 출발한다.
아무래도 논의를 월러스틴 주방장과 아리기 주방장으로 좁혀야 될 듯하다.나머지 주방장들의 요리도 너무 맛있긴 하지만....세계체계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월러스틴 주방장.이 동네 대표요리사이다.그의 세계체계 분석은 근대비판으로 부터 시작한다.그가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에서 말하고자 한 바가 요소론적 근대화에 대한 문제제기였다.요소론적 근대화라는 것은 근대적 요소를 많이 가진 나라가 근대국가라는 의미이다.그런 취지에서 후발 근대국가는 앞선 근대국가를 따라가게 된다.예를 들면 유럽은 한국보다 더 근대적인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근대적이다.월러스틴은 이런 근대론이 가지고 있는 서구 유럽중심주의를 전복한다.
그의 유명한 세계체계론은 몇 가지 틀이 있다. 월러스틴은 브로델이나 아리기와 달리 자본주의의 출발을 농민의 내부분화에서 찾는다.반면 브로델과 아리기는 상업자본주의에 기원을 둔다.월러스틴은 자본주의 장기지속이 국가간 체계를 통해 형성되었다고 말한다.그리고 이 국가간 체계는 중심과 주변의 분할 원리를 축으로 한다.일명 기축적 분업이다.자본주의는 처음부터 국가에 의해 지탱되면서 독점 또는 준독점을 향한 강한 지향성을 갖는다.브로델도 지적했듯이 자본주의의 시장이 경제의 독립성만 가지고 존재한 적은 거의 없었다.중심과 주변 분할을 작동하는 것으로 인종주의,성차별주의 등이 언급된다.그리고 정치이데올로기로서 가장 촛점을 맞추는 것이 '자유주의'이다.역사적으로 보면 '선거권과 교육''복지모델''민족동일서'등이 자유주의가 제시하는 포섭모델로 작용한다.또한 월러스틴은 공간적 분할에만 그치지 않고 계급분할에도 촛점을 맞춘다.계급동일성이 신화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부각시킨다.
월러스틴의 논의에 대해 같은 동네 주방장 아리기의 비판은 새로운 메뉴의 기대감을 갖게 한다.아리기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기원론과 이행논쟁에서 월러스틴의 농업자본주의론이나 영주의 산업자본변신론등에 대해 부정적이다.아리기는 국가간 헤게모니 경쟁이 어떻게 자본주의 동학을 발생시키고 역사를 만드는지를 설명한다.아리기는 의도적으로 그의 대표저서<장기20세기>에서 계급문제를 배제하고 있다.이 문제는 아리기의 후반작업과 비버리 실버,또는 그 이전에 폴라니적 테마를 통해 연구된다.아리기의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체계적 축적순환'과 '국가간 체계'이다.헤게모니 국가가 된다는 것은 어떤 독특한 축적구조를 가지고 있기때문이고 축적구조는 긴 시간에 걸쳐 완성되며 또 순환된다는 것이다.월러스틴이 세계경제를 기축적 분업으로 본 것에 비해 아리기는 세계적인 축적구조로 본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이러한 축적 구조의 형성을 위해서는 국가간 체계의 매개가 가장 중요하다.국가간 체계는 헤게모니의 우열은 있지만 완전히 일방적인 제국주의 형태와는 차이가 있다.또한 국가간 체계는 체계의 카오스를 예방하는 성격을 갖는다.이는 다른 말로 하면 국가간 체계가 요동치면 세계체계 역시 흔들린다는 것이다.미국이 모든 것을 쥐고 흔드는 것은 맞지만 흔들다보면 국가간 체계에 바탕을 둔 현재 체계 자체도 무너지는 모순적 상황에 들어간다.(미국의 힘이 강력하지만 미국이 모든것을 다 움직인다는 친미주의나 미국이 모든 악의 축이다라는 일방적 혐미주의는 동시에 극복되어야한다..)
새로운 축적 체계는 새로운 조직혁명에 근거를 두고 있다.아리기는 세계헤게모니의 역사를 4시기로 구분하는데-15세기 제노바,16세기 네덜란드,19세기 영국 그리고 20세기 미국 헤게모니-각 시기별로 보면 도시국가의 유연성.보호비용의 내부화(네덜란드 해군력),생산비용의 내부화(기계와 노동의 포섭),거래비용의 내부화(법인기업)라는 특징을 갖는다.아리기는 세계적 축적이 상승국면화 하강국면을 갖는다고 보는데 실물적 팽창과 그 이후 등장하는 금융적 팽창,그리고 금융팽창기에 일시적으로 등장하는 호시절인 벨에포크가 그것이다.이 순환이 끝나게 되면 다른 축적체계로 헤게모니가 이동한다는 것이다.20세기 미국 헤게모니에 이를 대비하면 미국의 금융화는 1970년대 이후 시작되었다.벨에포크이후에는 체계의 카오스가 발생하여 헤게모니가 이전된다.아리기는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새로운 축적구조가 동아시아-특히 중국-으로 이전되는 양상게 관심을 갖는다.이러한 순환과 헤게모니 교체는 상당히 긴 시간동안 이루어지기 때문에 동아시아가 새로운 헤게모니 축적 모델을 이루어낼 지는 아직 이론이 많다.
미국 헤게모니의 붕괴와 관련해서..(혐미주의자들과 친미주의자들의 이론적 공통점은 미국이 망하지 않는다이다.) 저자는 1980년대 이후 신경제 모델을 파악하며 미국 금융축적체계의 불안정성과 취향성을 이야기한다.1995년-98년 사이 미국 주식시장의 폭발적 팽창을 미국 헤게모니의 벨에포크로 보고 있다.미국 신경제의 취약성으로 신경제의 생산축적구조가 노동시간 연장에 의지한점,IT업체가 기업 가치만 높일뿐 생산 가치와는 관련없다는 점.미국 내 가계부채,외국인 소유자산 비율의 증가들을 예로 든다.또한 전지구적인 금융체계 역시 미국이 독자적으로 해결한 능력이 없다고 본다.결국 미국은 전세계적 금융적 축적구조를 짜내면서 무장한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국가간 체계를 재편한다.그러나 이는 달러의 신뢰성문제, 미국내의 경상수지,재정수지적자 문제,과도한 전쟁비용 지불등으로 오래도록 지속될 수 없다고 본다.아리기는 특히 금융적 축적구조가 단기간 안정된다고 하더라고 국가간 체계가 불안정해지고 금융적 축적의 취약성이 커지면 지속성에 문제가 생긴다고 본다.
이 책의 전반부가 세계체계론의 전사에 해당하는 브로델과 폴라니의 이야기였다면 이 책의 후반부는 세계체계론에서 눈여겨보고 있는 동아시아의 문제이다.동아시아 발전모델의 특성,즉 일본의 다층적 분업체계,그리고 세계의 생산공장으로 부각되고 있는 중국문제 등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또한 마지막에는 19세기 영국 헤게모니가 생산비용의 내부화 작업으로 이루어낸 노동자의 실질적 포섭과 관련되어 세계체계론 논의에서 취약한 노동문제를 아리기와 실버의 논의를 빌어서 설명한다.(실버의 <노동의힘>에 대해서는 비판적 접근이 우세하다) 역사적 자본주의는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되지만 노동의 문제는 미시적 차원에서 움직이기때문이다.즉 세계체계론적인 자본주의로 모든 것을 환원시킬 수 없는 부분 중 가장 큰 것이 노동문제이다.특히 노동은 자유주의에 의해 파편화 개인화되고 20세기 포드주의와 테일러주의등에 의해 임금에 포섭되었다.아담스미스적 노사관계는 노동문제를 분배의 문제로 축소시켰고 포드주의에 바탕을 둔 작업작 교섭력 중심의 노동문제는 한계에 부딪혔다.
저자는 여기서 변증법적 시도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책 서문에서 박현채의 사회구성체 논쟁을 언급했던 것은 결국 이런 의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저자는 역사적 자본주의의 거시담론과 미시적 차원에서의 사회구성체적 대응을 통해 변화를 도모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백승욱의 <자본주의 역사강의> 여러면에서 훌륭하다.물론 이것은 딱 내 수준에서 하는 말이다.무언가 본격적인 연구를 준비하는 사람에게 이 책은 너무 나이브할 수 도 있다.우선 이 책은 강의투로 씌여져 있다.설명이 비교적 친절하다.읽는 행위 자체를 고행으로 만드는 문장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구성의 면에서도 아주 높은 점수를 줄 수 밖에 없다.다음 요리가 기다려지는 마음으로 앞에도 설명했듯이 한 강의를 읽고 나면 다음 장이 궁금해진다.각 장의 끝에는 강의 내용을 짧게 요약하고 있다.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 역시 역사성에 바탕을 둔 이론적 특성상 관념적인 담론 수준에만 머물지 않는다.우리와 직접 관련이 있는 동아시아 문제,미국 헤게모니,중국의 문제등이 요리에 올라오기 때문에 눈에 확확 들어온다.
자본주의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꼭 읽어볼 만한 친절한 세계체계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