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하느님
권정생 지음 / 녹색평론사 / 1996년 12월
평점 :
절판


새로운 리뷰공간을 하나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타이틀은 <화장실에서 본 책들>이 좋을 듯 하다.아이와 와이프에게서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화장실이다.요즘은 그것도 매번 그렇지는 않다.뽈뽈뽈 기어다니는 아이가 화장실 반투명 유리창에 와서 드륵 드륵 긁어댄다.중요한 볼 일에 지장이 생긴다.

이 책을 화장실에서 펼치고 있을 때 권정생 선생은 돌아가셨다.훌륭하신 분을 화장실에 모시고 와서 한 켠에서 망자에 대한 모독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그러나 이내 권정생 선생의 글을 읽는 데 가장 좋은 곳이 화장실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주 당당하고 힘차게 읽어 내려갔다.(보던일도 잘 볼 수 있고 당당함은 역시 좋다.)권정생 선생이 아픈 몸을 부여잡고 쓴 불후의 명작 <강아지똥>을 생각해보면 나의 화장실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다만 한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나의 응가를 똥개가 먹는게 아니라 정화조가 먹는다는 것이다.권선생님이 걱정했던 파리 하수도처럼 말이다.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그 맨홀들에 소중한 나의 응가들이 투척된다.그렇다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바로 똥개다.(아 그 많던 똥개는 어디로 갔을까? where all the 똥개s have gone? 영어 쓸라니까 안된다.흐롱) 산책로에서 만나는 강아지들은 전부 인간화의 탈을 쓴 강아지이다.두렵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예쁘지도 않다.살이 피둥 피동 올라서 숨 쉬기도 힘들어보이는 시추부터 탱크탑을 입은 푸들까지..그러고 보니 다들 외국종이다.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권정생 선생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현재 한국 기독교와 예수쟁이들을 꼬집는다.한마디로 정리하면 오강남 선생의 말처럼 '너희들이 믿는 그런 예수는 없다'라고 할 수 있다.권정생 선생이 믿는 예수는 세상의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자,남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자,약한 사람들을 보듬는 자로서 예수이다.그런 예수는 매주 주변 교통을 지옥으로 만드는 대형교회에 있지 않다.또 교회 신축에 쓰라고 수 천만원을 희사하는 부자 교인들 사이에 있지 않다.남보다 우리 아들이 잘 돼기만을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 속에 있지 않다.나와 내 가족만 잘먹고 잘살게 해달라는 곳에,입으로만 이웃이라고 외치는 장소에 예수를 갖다 놓은 것이 진짜 신성모독이다.이문재 시인은 '삶의 모델로서 예수를 존경할 뿐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나와 비슷한 생각이다.자신의 삶에 있어서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도 그 의미의 본 뜻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기독교 목사입네 기독교 신자입네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퍼주기'란 말이 있다.배고파서 국경넘다가 죽어자빠지고 일부는 몸팔아서 자식 끼니를 때우는 북녘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물론 정치적으로 복잡한 그물망이 얽혀있다.하지만 그것 때문에 한국의 기독교계가 이런 논리에 쉽게 동조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한국의 기독교는 국가주의,팽창주의,보수주의의 기게가 되어 있다.

(교회안에서) 목사: 예수께서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신도들:아멘

(교회밖에서 조중동을 보다가) 목사,신도들 : 북한 정권때문이군.일단 어떻게 쓰일지 모르는데 퍼주면 안돼지.북한놈들은 하여간 믿을 수가 없어.

가끔 채널 돌리다 기독교TV에서 목사들이 침튀기며 강의하는 것을 본다.어찌나 유치한지.저걸 듣고 감동먹는게 이해가 안된다.그런데 목사님 말씀이라며 주워섬긴다.고개까지 끄덕이며..

'이승엽 선수가 잘하는 것..박지성 선수가 잘하는 것...우리 교회가 들불처럼 한반도에 퍼지는 것..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아끼시고 선택하셔서....'

이걸 들으러 교회에 가야 한다면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시간에 귀를 썩여서 죄송한 일일뿐이다.

권정생 선생은 자연과 하나되는 인간 삶의 복원을 꿈꾼다.그 중심에는 농사일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다.농업이야 말로 하늘과 땅,그리고 인간 이렇게 삼자가 관계 맺는 공간이다.그러나 인간 세상이 산업화되면서 농업은 저기 뒤켠으로 밀린다.농부의 마음이 뒤로 밀려 간다는 것은 자연과 함께 숨쉬는 인간이 인간성으로 부터 소외된다는 뜻이다.(못되게 이야기하면..권정생 선생을 좋아한다며 농업 생존권을 앗아가는 한미FTA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있다면- 권정생 선생과 대치되는 길 위에 있는 사람이다.) 권정생 선생은 문득 문득 전근대시대의 농경사회를 그리워한다.이것은 분명 현실 지평에서 퇴행적이다.역사적으로 우리 사회가 아무리 문제가 많더라도 인정 많았던 농경사회문화로 돌아갈 수는 없다.그저 한 개인과 개인의 삶에 작은 변화를 이끌고 또 이런 작은 변화들을 도모하는 길에서 정신적인 구심점으로 작용할 수는 있을 것이다.과거를 돌아보며 현재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일깨우려는 의도로 읽으면 될 듯 하다.

사람은 무엇을 알고 믿느냐 보다 어떻게 그걸 따랐느냐에 따라 후대에 평가를 받는다.여기에도 물론 제기할 수 있는 문제는 많다.하지만 권정생 선생은 낮은 자로서 낮은 곳에서 낮은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그가 서있는 땅이 옳바랐고 그가 믿었던 하늘이 옳바랐고 그가 옳바랐다면 다른 차이쯤이야 어찌되던 상관이 없다.

대단한 사회적 명성을 누린 것도 아니고 돈과 명예가 높았던 것도 아니다.그럼에도 그 분이 돌아가신 후 그의 누옥에는 조문객이 이어진단다.그 분의 마음이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전수되었으면 한다.

강아지똥 처럼 사신 권정생 선생.. 지금쯤 민들레 홀씨가 되어 천지간을 여행 다니실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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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니제티 : 사랑의 묘약 (한글자막)
도니제티 (Gaetano Donizetti) 외 / 워너뮤직 (wea)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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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묘약>은 상투적인 동화다.시골 청년 네모리노는 동네 킹카 아디나를 짝사랑한다.그는 순박하면 건실한 젊은이이다.고전적으로 이런 청년들은 대개 내세울게 별로 없다.반면 아디나는 청순하며 예쁘고 또 적당히 약았다.가련한 네모리노...애정의 권력 관계가 이런 식으로 형성되면 영화<음란서생>에서 후궁을 빼앗긴 왕의 말처럼 '더 사랑하는게 늘 약자'이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시골 청년 네모리노는 아기 손에 들려서 질질질 끌려다니는 아빠가 사준 곰돌이 마냥 아디나에게 끌려 다닌다.아디나..요 영악한 것은 치마를 팔랑 거리며 한번씩 웃어준다.가증스런것.^^

 1막에서 아디나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신화를 동네 여편네들에게 읽어준다.그 둘을 불멸의 사랑에 빠지게 만든 '사랑의 묘약'에 대한 이야기이다.아디나의 곁을 졸졸 따라다니는 네모리노의 귀는 당나귀 귀가 되었다.'복선'이라고 하기에 '사랑의 묘약'은 너무 직접적이다.귀가 쫑긋해있는 그에게 극을 갈등으로 이끌 제3의 사나이가 등장한다.군대 인사계처럼 생긴 벨코레 상사.그가 아디나에게 꼽힌 것이다.

네모리노의 사랑을 아디나도 안다.그러나 그 가증스런것은 네모리노에게 '넌 좋은 사람이지만 아니야'라고 말한다.짝사랑 한 두번 해본 사람들은 대한민국 헌법 1조같은 이야기를 여러번 들어봤을 것이다.대사를 좀 바꾸고 싶을 만큼 진부하다.하지만 오늘도 대학가 어느 술집에선 당신을 닮은 어떤 순진한 청년이 저 소릴 듣고 소주 1병을 더 시키고 있을 것이다.친구들에게 전화질 해대면서 울다가 웃다가 자학하다가 잊어버리겠다고 악을 쓰다가..오만 쌩쇼를 다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제4의 인물이 또 등장한다.떠돌이 약장사 둘카마라.마음급한 네모리노는 그에게 누구나 한 잔 마시면 사랑하게 되는 '묘약'을 구한다고 말한다.당연히 있지...뱀 한번 고아먹으면 요강이 터지는 약장사에게 그건 완전히 약방의 빨간약 수준이다.둘카마라는 순진한 네모리노에게 사기를 친다.포도주를 한병 주면서 구하기 어려운 약이라고 한다.

네모리노 와인 한 병에 적당히 풀린다.어차피 약발 받으면 아디나는 자기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그러면서 아디나에게 좀 튕긴다.아디나는 저게 쥐약 먹었나 하면서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지만 '어 거참 자꾸 돌아보게된다' 이거다.아디나는 약간 자존심이 상해서 느끼한 벨코레상사에게 결혼하겠다고 선언해버린다.네모리노는 약발 받으려면 하루 더 있어야 되는데 발등에 불떨어졌다.결국 한 병 더 사려하지만 돈은 없고...현역입대 해야 별로 받을게 없으니 모병입대 싸인한다.벨코레가 음흉하게 웃으며 모병지원서를 받아든다.라이벌 하나 군대 보내는 거다.

그런데...거참 나에게는 이런 행운도 없지만 네모리노에게는 있다.돌아가신 삼촌이 엄청난 유산을 남겼다는 것이다.네모리노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른다.하지만 민심의 행방에 민감한 것인지 돈의 흐름에 민감한 것인지 동네 처자들이 먼저 사실을 안다.네모리노가 나타나자..언니들 동방신기 따라다니는 팬클럽처럼 그의 뒤를 따라다닌다.콧대 높은 아디나도 이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도 네모리노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대충 줄거리 여기까지 해도 충분할 듯 하다.큰 갈등도 없이 네모리노의 <남 몰래 흘리는 눈물> 한 방 후에 서로의 마음 확인하고 해피엔딩 된다.

쓰다보니 줄거리가 길어졌다.

미스터 빈 처럼 생긴 롤란도 빌라존과 요리보고 조리봐도 예쁜 안나 네크렙코는 오페라계에서 현재 최고의 주가를 올리는 커플이다.로베르토 알라냐와 안젤라 게오르규 이후 최고의 커플이다.실제 결혼할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칼라스-스테파노,서덜랜드-파바로티 등의 맥을 잇는 커플이라 기대가 크다.

2004년 빈에서 공연된 <사랑의 묘약>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극 중 인물들이 그대로 재연된 듯 보이는 완벽한 캐스팅과 연기력이다.특히 남자 주인공은 롤란도 빌라존은 인상적이다. 그의 가창이 '최고의 네모리노'로 꼽히던 루치아노 파바로티만큼 청자에 대한 파괴력이 있거나 카리스마가 있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그의 연기력과 극 중 인물에 대한 몰입,그리고 그의 컴플렉스가 되기도 할 희극적인 외모가 <사랑의 묘약>의 네모리노 그 자체이다.사랑의 묘약을 한 병 마시고 즐거워 추는 춤이나 박수를 이끌어내는 저글링들은 팬서비스이다.질질 끌려다니는 젊은 청년의 마음을 빌라존은 완벽하게 그려낸다.

안나넵트렙코는 일단 비디오가 되니까 다 용서해주고 싶어진다.40 넘은 배우가 총기넘치는 아디나로 분하기도 힘들뿐만 아니라 별로 똘똘해보이지 않는 뚱뚱한 언니가 이 역할을 해도 감정이입하기 어려울 것이다.넵트렙코는 영상 시대에 활용도가 아주 높은 오페라 가수가 될 듯 보인다.개인적으로 그녀의 가창이 딱 내 스타일은 아니다.수많은 디바들과 아직 비할 바는 아닌 듯 보인다.하지만 아직 젋고 가능성은 무한하다.그리고 일단 예쁘니까 .^^

조연들 역시 훌륭하다.벨코레역을 맡은 가수는 현역 최고의 리골레토라는 레오 누치이다.젊은 가수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기둥처럼 듬직하다.누치가 나오는 순간 왠지 무대가 안정된 느낌이 드는 것은 그의 연륜이 가져다 주는 후광효과일 듯 보인다.적당히 느끼한 일데바르도 디칸젤로는 요즘 맹활약하는 바리톤이다.작년에 음악계의 최대 이슈였던 '모차르트 22' 오페라 전곡 상영에서 가장 관심을 많이 받았던 '피가로의 결혼'에서 피가로 역을 맡았다.또한 '돈조반니'에서 조반니의 하인인 레포렐로 역을 맡기도 했다.전도 유망이라는 말이 그에게 가장 어울릴 듯 하다.생긴 것도 쭉쭉빵빵하고 적당히 이탈리아 기름도 흐르고...    

훌륭한 캐스팅이 맛을 살린 <사랑의 묘약>이다.젊은게 좋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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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시종 2007-06-19 23:37   좋아요 0 | URL
정말 어느 구석 하나 빈 곳이 없는 캐스팅이 이 작품을 오래 남도록 해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비야손은 일찌감치 결혼해서 아름다운 부인이 있고, 항상 공연마다 따라다닌다고 하니 결혼하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것 같아요. 우울할 때마다 한번씩 꺼내서 보는 디비디라지요. 왠지 기분을 묘하게 들뜨게 해주더라구요. 그 까탈맞은(리히테르도 음악일기에서 치를 떨었던) 빈의 관객들을 열광에 몰아넣은 두 젊은 성악가가 고마울 뿐이죠.ㅎㅎ

드팀전 2007-06-19 23:45   좋아요 0 | URL
미스터 빈에게 축배를 ^^ 전 그래도 음반으로 듣는 옛날 성악가들이 좋긴해요.
뭐랄까 ..더 다양한 개성들의 각축장 같은...

로렌초의시종 2007-06-19 23:58   좋아요 0 | URL
ㅎㅎ전 어느쪽이 더 좋다고 말을 못하겠어요~ 그래도 역시 동 시대를 같이 살면서 궤적을 직접 따라갈 수 있는 요즘 성악가들이 조금 더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래저래 옛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다보니 역시 달리 이름이 남은게 아니구나 싶더라구요. 요즘 유투브에서 이런저런 짧은 영상 보는 재미로 살거든요.^^ 얼마 전에 들었던 니콜라이 갸우로프의 La calunnia는 감동이었어요.ㅎㅎ

드팀전 2007-06-20 07:28   좋아요 0 | URL
제 회사 컴퓨터가 윈도우98쓰는 수준의 것이라서..유투브는 언감생심^^...영상적인 차원에서 요즘 가수들은 기술의 도움을 많이보지요.저도 dvd는 요즘 걸 사요.흑백화면 또는 비디오 수준의 화면을 보다가 요즘 나오는 DVD보면 눈이 시원해지잖아요.물론 음질면도 그렇고.
갸우로프는 맏형 같아요.생긴 것도 그렇고 소리도 안정감이 있고...생긴거랑 음악이라 비슷하게 가나봅니다.
 

스스로 이성적이라 믿으며...

불의에 온갖 욕설을 내뱉으며......

자폐와 오만의 늪에 빠져 있으되 그런지 모르며.....

모든 것이 거기가 거기라고 믿으며...

 ...어설프다.어설퍼...

난 너를 믿지 않는다...너는 웃길뿐이다.

너는 그저 말많고 머리만 커버린 16살 고등학생일뿐이다...

너는 단 한번도 남을 위해 돌을 든 적도

너는 단 한번도 철거민의 굵은 손마디를 잡고 눈물을 흘린적도 없다.

너의 논리와 너의 이성에 흙과 눈물은 없다.

너의 승리는 네 자만의 승리일뿐

단 한번도 옳바른 역사의 승리가 될 수 없다.

너는 그저 자만에 들떠 있는 16살 철부지이다.

네가 숨쉬고 있는 공기에 대해 부정해라.

...너는 아직 세상을 읽지 못하고 있으며 읽으려는 겸허한 마음도 없다.

욕하고 비꼬고 논쟁에서 이기려 하지 말고 바꾸기 위해 단 한번만이라도 네가 있는 곳에서

조용히

돌을 들어라...

그럼 너에게 철부지라는 딱지만은 떼어주마.

어리고 똑똑하다고 믿는 너야....

그리하여 너는 장래 붉은 늑대가 될 것이다.

나는 확신한다.

너는 붉은 늑대가 되어 일말이라도 남아 있던 네 청춘의 기억을 잡아먹을 것이며

늑대가 되지 못한 순한 늑대들을 핍박할 것이다.

너는 당장 너의 욕설을 멈추어라.너의 욕설과 자기모멸은

브레이크 없이 늑대가 되는 것에 액세서리를 다는 것뿐이다.

너의 지성과 너의 논리..그리고 너의 자기모멸로 감싼 너의 우월감은

너를 늑대 무리의 끝자리에 들게 할 것이다.

너를 기다린다.

나의 적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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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6-18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욕은 좀 해도 되는 것 아닐까요^^ 오늘 저는 욕하는 리뷰만 잔뜩 썼네요.
나의 적들아... 적들이 너무 많습니다.
스스로 철없음을 비관하기엔 적들이 너무 똑똑하죠. 쟤들은 나이도 많고요.
소아마비였던 그람시의 말처럼,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죠~

드팀전 2007-06-18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글쓰기가 나름 성공한 거군요..으흐흐 ^^ 으흐흐
 
팟저 - 이기주의자 요한 팟저의 몰락
베르톨트 브레히트 원작, 라삐율 편역 / 북인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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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 가장 좋은 여자 친구는 연극 배우이다.그녀는 대학을 입학하자 마자 연극동아리에 가입했다.당시 대학교 연극 동아리가 무대에 가장 자주 올리던 레퍼토리가 브레히트였다.대학을 졸업하고 그녀는 정말 연극배우가 되었다.프로연극인인 그녀의 1년 연봉은 운좋은 해에 400만원쯤 된다고 했다.부산에 내려오기 전 까지 그녀의 공연은 거의 전부 다 봤다.연극계의 사정을 알기 때문에 초대권 준다는 것을 늘 마다했다.

브레히트의 작품을 읽다가 그녀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다.전화기 뒤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아이와 함께 복지관 문화프로그램 참여하러 왔다고 한다.그 집 아이랑 우리 아이는 3달 터울이다.그녀는 안그래도 점심 먹다가 내 생각 나서 전화 한 번 하려고 했다며 내 전화를 신기해했다.이런 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다가 최근에 읽은 브레히트를 이야기하려는 순간.그녀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어 미안한데 전화 끊어야 겠어.내가 다음에 다시 할께.아이가 저리로 도망간다.잡아야돼 '

'어...그래..브레히트는 보내줄...' 

' ...뚜뚜뚜...'

그녀에게 브레히트의 미완성 작품 <팟저>를 보내야겠다.지난해 7월 나온 책이었으니 읽었으리 만무하다.아이 키운다고 정신없는 1년차 엄마이기 때문이다.

브레히트의 <팟저>(또는 이기주의자 요한 팟저의 몰락)은 퍼즐놀이다.브레히트는 <팟저>를 완성하지 않은채 남겨 두었다.우리가 만나는 이<팟저>는 편역자 라삐욜(무대미술,행위예술을 하는 한국 사람이다)이 재구성한 것이다.책은 크게 1,2부로 나뉘어져 있다.1부는 브레히트의 단편을 이리저리 묶어낸 <팟저>대본이다.2부는 좀 복잡하다.일종의 해설서에 가깝다. <팟저>생성사부터 <팟저>에 대한 작품론,그리고 브레히트의 제자이자 동독 최고의 연출가였던 하이너 뮐러의 <팟저>해설,이 책을 편저할 때 누락된 브레히트의 <팟저>관련 메모들이 들어 있다.

<팟저>는 미완성의 열린 텍스트이다.편저자가 이 책을 꾸린 이유는 브레히트의 재료를 다시 한번 손봐서 연극무대에 올릴 수 있길 하는 바람에서이다.그렇기 때문에 편저자는 76년 <팟저> 초연을 주도했던 하이너 뮐러의 작업을 첨삭하면서 라삐욜의 <팟저>를 만든다.이 텍스트를 토대로 또다른 변형이 가능하다.(브레히트가 연출가들에게 주장했듯이)

<팟저 도큐멘트(작업계획들과 메모들,구상들)>은 그렇게 일단은 중점적으로 글쓴이의 공부를 위해 만들어졌다....글쓴이인 나는 아무것도 완성할 필요가 없다.내가 나를 수업한 것으로 족하다...브레히트 <팟저 주석 c2>

<팟저>는 무정형의 텍스트이기 때문에 읽을 때부터 물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불안하다.줄거리라고 할만한 것은 딱히 없다.또 내러티브를 위한 친절한 연결고리도 없다.인물들은 마치 선지자나 혁명가들처럼 불연속적인 언어를 내지른다.거기에 작품과 작가와의 관계가 책 서문에 박힌 이름처럼 딱 달라 붙어 있어야 한다고 믿는 근대 독자의 '작가=작품'의 연결이 흔들린다.이게 누구의 작품인가? 브레히트는 500여장의 메모만을 남겼다.그 메모가 작품인가? 모호해진다. 열려있기 때문이다.내가 능력만 된다면 내 나름대로 <팟저>를 구성해도 브레히트에게 쓴소리 듣지 않는다.(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팟저>의 줄거리는 간단하며 등장인물도 예닐곱명 수준이다.4명의 탈영병이 탱크 위에서 내리면서 극은 시작한다.그들은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면서-팟저는 스스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믿는다-함께 행동하기로 결정한다.그들은 무리 중 카우만의 집으로 숨어든다.이들 중 팟저만이 밖으로 나가서 음식을 구해올 수 있다.팟저는 푸줏간남자들과 다툼을 벌인다.동료들은 발각을 염려하여 행동 강령대로 외면한다.팟저는 카우만의 굶주린(?) 아내와 관계한다.그들은 그녀를 자유화(?)한다.팟저는 스스로를 없앰으로서 나머지를 없애려한다.무리는 팟저를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길지 않은 이야기다.또 코러스 기능이 수시로 등장하여 작품을 설명하고 관객의 몰입을 막는다.브레히트를 읽거나 보면서 '감동' '동화' '눈물 뚝뚝' 된다면 브레히트를 모독하는 짓일게다.<팟저>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대단하다.<팟저>에서는 전쟁과 도시,개인의 욕구와 집단의 욕구,급진주의와 반급진주의,이성과 감성,역사적 폭력과 단절,대중의 모순과 희망같은 것들을 이야기한다.20세기 역사와 철학,사회를 관통하는 주제들이 단절된 무운형태의 시적 표현들로 적시되어 있다.(피터 한트케의 인기작품 <관객모독>에서 이런 투로 한 장을 구성한 것을 본적이 있다.예를 들면."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이게 단절된 무운형식의 표현이다.왜 이런 표현을 쓰는지는 알고 나면 재밌고 낭독하면 새로움이 있다.)

작품에서 대립적 구도를 갖는 이는 팟저와 코이너이다.이둘은 <팟저>안에서 상호보완적이다.팟저가 개인주의,아나키즘,급진주의의 축을 잡고 있다면 코이너는 공동체주의,반급진주의,이성주의자로서위치한다.하이너 뮐러는 역사적 스펙트럼 위에서 코이너를 레닌으로 배치시킨다.

(코이너) 그들이 우리를 한명씩 건드리면/그 땐 우린 끝이야.우리는/더 이상 가면 안돼,여기/경계지역에서/그들이 제일 불만스러워 하고 있어 그 다음은: 공장이/있는 곳이지!

<팟저>에서 쉽게 읽히는 정서는 전쟁으로 대표되는 국가/폭력에 대한 것이다.이 전쟁을 중심배경으로 팟저 대 코이너의 대결구도가 형성된다.전쟁 또는 국가,국가 폭력에 대한 <팟저>의 표현은 시이며 프로파간다다.

고기가는 기계를 다루는/자들은 손잡이 말고는/아무것도 다루려 하지 않고/그렇게/인류의 정돈된 대중은/잘못된 목적으로 출동하고/그렇게 새로운/요령과 같은 박자 안의 욕망은 악용된다.

욕망의 구획지어짐에 대한 브레히트식 표현이다.이 욕망은 자본주의하에서 전쟁이란 이름으로 해소된다.고기 가는 기계를 다루는 자들은 전쟁을 다루는 자들이기도 하다.네그리의 <제국>에 보면 이런 뉘앙스의 글이 나온다." 우리는 조국을 지키기 위한 정의로운 전쟁에 참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실은 지하 창고의 금고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기억에 의해 쓴거라서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고기사는 기계를 다루는 자들은 적을 규정하고 그들에게 총부리를 대라고 명령한다.팟저는 다르게 말한다.

내 앞에,내가 대항해 싸웠던 상대는:내 형제다/하지만 내 뒤에 그리고 내 형제 뒤에는:우리의 적이 있다.

너희들이 아직 몇 조각 고기 살점을/이빨 사이에 혹은/너희 형제들의 이빨 사이에 가지고 있는 한/너희들은 살육을 멈추지 않는다/게다가/물은 썩는다 입안에서

 뒤/돌아들 봐라 그리고 민족들의 전쟁을/계급들의 전쟁으로/세계 전쟁을/시민전쟁으로 바꿔라,즉 흩어지지 말고/이 전쟁을 너희 나라 땅에서 해라,너희가 너희의 시민계급을 박멸하지 않기 전에,전쟁은/끝나지 않을 테니

이기주의자이며 능력을 갖춘 리더 격인 팟저.그는 급진주의적이며 다중적이다.그가 희망을 거는 인간 이후의 대중이 어떤 존재인지 의문이간다.'각성된 민중'이라는 개념처럼 들린다.팟저는 과거의 것들을 부정하는 정신이다.라삐욜이 브레히트를 니체와 마르크스의 변증법으로 본 것은 이런 의미에서 일듯 하다.팟저는 부정의 정신을 극한으로 밀고가는 전복을 원한다.(낭독하면 재미있다.)

쳇바퀴처럼 살려는/너희들의 건강하지 않은 욕구/나는 그게 싫다.

부당한 것은 인간적이다/더 인간적인 것은 그러나/부당함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다!

인간에게 인간은/완전히 분간할 수 없는 것이다/모든 뼈와 살을/즙으로 녹여버리는/엄청난 위를 /통과한 것과 같이/네가 진창에서는/물고기와 사과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처럼/그렇게 희뿌연 죽 속에 인간의 목숨이 놓여있다.

그리고 너희에겐 아무/문제가 되지 않는것:비가/위에서 아래로 내린다는 것/그것은 나에겐/도저희 견딜 수 없는 것이다/알파벳에서 A 다음에 B가 오고 그것 말고는/아무것도 오지 않는다는 것.너희들한테는 그게 옮지만/나에게 그것은 완전히 별볼 일 없는 것이다.

세상의 부당함을 가리키고 있는/너희 손가락은/이미 썩었다: 시꺼먼 손가락!/그리고 호소하는 너희들의 팔은 이미 어깨에서 떨어지고 있다!

이 도시 전체에/전복할 준비와/능력이 되는자가/단지 다섯뿐이라면,/곧 그들과 한 패가 되라/낡은 모든 것은 놔두고/즉시 새로운 것/즉 완전한 전복을 선택하라

그러나 팟저는 패배한다.대중의 패러독스에 의해 또는 자기 함몰에 의한 패배이다.브레히트는 이들이 대중을 떠나는 순간 그 패배가 결정되었다고 말한다.팟저의 마지막 유언..

누가 이 싸움에서 승리할 지/나는 모르겠다/그러나 늘 이기던자는 패배하고 말았다/그리고 지금부터 전 세월에 걸쳐/너희 세상엔 더 이상 어떤 승리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패배자만이/늘어날 것이다.

체제의 영원한 승전가를 예견하는 듯 하다.그러나 모순은 희망을 위한 반전이다.하이너 뮐러는 여기서 '적' 개념을 환기시킨다.완전한 세계개혁프로그램으로 완전한 적 개념이 만들어진다.착취를 살아 있는 자의 한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어떤 절대적인 적개념도 필요없다.아직 끝나지 않았다.<팟저>의 마지막 코러스...

너의 목소리를 움츠려라,연설가여/너의 이름은 칠판에서 지워질 것이다/너의 명령들은/더 이상 수행되지 않을 것이다.허락하라/새로운 이름들이 칠판에 등장하고/새로운 명령들이 지켜지는 것을/옛날 초소를 떠나라.

올해는 6월 항쟁 20주년이다.요즘은 예전 만큼 브레히트가 읽히지 않는다.할 수 없다.읽히지 않음에도 브레히트는 마르크스를 인용하여 이런 말을 후대에게 던진다.

'인류는 실현할 수 있는 것 외에는 더 이상 계획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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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6-13 15:05   좋아요 0 | URL
쳇바퀴처럼 살려는/너희들의 건강하지 않은 욕구/나는 그게 싫다.
요즘... 학교와 계급 재생산...을 읽고 있는데요... 교육의 구조가 가난한 아이들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노동자가 되도록... 그렇게 스스로를 망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정말, 저도 거기 화가 납니다.ㅜㅠ

2007-06-13 15: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7-06-13 15:45   좋아요 0 | URL
^^ 하층 계급의 아이들이 중산층 계급이 만드는 경쟁의 장에 뛰어들지 않고 또 서로 비교하지 않으며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한다는 것이겠지요.속칭 '마초문화'가 될 터인데...하층 계급의 특수한 문화 속에서 이런 '거친 문화'를 없애기는 힘들어보입니다. 생존과 존재성 자체를 희식시킬 수 있을겝니다.결국 공돌이 아이들은 스스로 '거친 노동자.마초적 사나이'로 살아남게 되지요.독이 독을 치료하듯이 이 지점에 개입할 수 있는게 어쩔수 없이 또 '교육'일 것이니 공고 선생님의 역할이 크십니다.
운동장을 매일 빼앗겨 싫어하시겠지만 공고의 4강 진출은 멋있었습니다.다른 팀의 절반 밖에 안돼는 인원.... 부산의 야구명문에 중학 선수들을 전부 빼앗겨 버린 팀... 꼴찌의 반란을 보는 듯 했습니다.힘내라 공돌이!!

글샘 2007-06-14 09:13   좋아요 0 | URL
어, 보셨군요^^ 열 여섯명의 선수로 전국대회 4강에 간 것은 신기한 일이었죠.
지금 3학년이 졸업하면 내년부턴 그나마 9명의 엔트리를 짜기도 힘든 상황이랍니다.
그 잘 한다던 투수도, 작년까진 타자였던 애였구요^^
아이들의 문화에 개입하기엔 아이들이 너무도 멀어 보입니다. 그 애들이 스스로 노동자가 되기를 부정하는 듯하거든요. 공부는 죽어도 안 하는 것들이, 대학 간다고 설치는 거 보면, 속이 뒤집어집니다.^^ 하긴, 노동자가 돼 봐야 의식도 거기 적응이 되겠죠. 아직도 노동을 천시하는 풍조가 극복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한 걸까요?
 
미국의 송어낚시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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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라는 책을 처음 알았을 때 나는 영화<흐르는 강물처럼>을 떠올렸다.그 영화는 포스터가 유명했다.멀리서 유학온 친구들 하숙방 마다 하나 씩 걸려 있던 기억이난다.얕은 강물과 짙은 녹음,그리고 탱고 무희처럼 날렵하게 날아오른 낚시줄... 그리고 브래드 피트.요즘은 아내와 함께 아시아 아이들 수집하는 취미가 생긴 그이다.많이 쭈그러졌다.그러나 영화<흐르는 강물처럼>에 나올 때만해도 그는 아름다왔다.미국인의 이상형이라는 로버트 레드포드의 후계자가 될 만 했다.특히 영화 속에서 자연과 물아일체된 그의 모습은 감동적이었다.스스로 풍경이 된  동생 브래드피트의 낚시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감동먹었던 형의 나레이션이 생각난다. 브래드 피트가 예뻐서 더 예쁜 낚시 장면이었다.

영화<흐르는 강물처럼>의 여유로움을 생각하며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를 읽는다면 정확하게 10센티미터 바늘에 낚인 것이다.<미국의 송어낚시>에서 저자는 전원을 그리워 하지만 영화처럼 그림 같은 전원의 모습은 책 어느 구석에도 등장하지 않는다.오히려 기계,폭력,환경오염 등으로 인해 둥둥 떠내려가는 송어 만이 나올 뿐이다.그러니 소설 속에서 통속적인 낭만과 여유로움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제목에 속아서 낚이지 않는게 좋다.

<미국의 송어낚시>는 결코 읽기 편안하지 않다.우선 이 책의 구성은 파편적이다.2-3장 정도 분량의 짧은 연작소설이 이어진다.대략 50개의 짧은 장마다 소제목이 있다.물론 앞에 나왔던 이야기가 몇 마을 건너 또 언급되기도 한다.1000피스 직소퍼즐이 마룻 바닥에 마구 흩어진 듯 소설이 쓰여져 있다.읽다보면 어느 정도 맞추어지기는 하지만 전체의 그림을 다 맞춘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프랑스 영화사에서 '누벨바그 시대' 프랑소와 트뤼포와 같은 작가들이 실험한 ' 점프컷'과 비슷하다.남자와 여자가 뽀뽀를 하는 로맨틱한 장면이 나오려는데 갑자기 다음 장면은 광산 노동자의 일하는 씬으로 구성되는 그런 것들이다.몸에 배인 관습에 배치되는 구성이어서 난망하다.그런데 이 난감함 속에 의미가 발생한다.이 책<미국의 송어낚시>역시 이런'점프컷'들을 다닥 다닥 이어 붙여 놓은 것 같다.그래서 결론이 무었이냐 ? 줄거리 찾지 말라는 이야기다. 줄거리를 찾아내려고 하면 본인만 힘들다.작가가 처음부터 3분 라면처럼 딱 떨어지는 소설 형식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부디 소설을 읽으면 10줄 정도로 소설의 줄거리를 꼭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들도 '송어낚시' 바들에 낚이지 말길 바란다.물면 아프다.

이 책은 다양한 상징과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책을 이끌어가는 힘이 상징과 은유다.그런데 이것들이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빨간 버버리코트는 연쇄살인마의 표적'이란 식의 통속적 은유를 기대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책 제목에서 부터 '미국'이라는 특수성이 반영되듯이 즐겨 사용되는 상징과 은유들을 이해하려면 미국 문학,역사,문화 등에 익숙해야한다.그런데 미국인도 전부 다 알 것 같지는 않다.예를 들어 이 책에서 거짓된 아메리카 드림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하는 벤저민 프랭클린을 생각해보자.작가가 그를 거짓된 꿈의 환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해주지 않는 한 프랭클린은 그냥 미국 역사 태동기의 선구자쯤으로 여기고 넘어가기 쉽다.기존 체제에 불복하는 자유롤운 공간으로 제시되는 '모래상자'도 그렇다.아이가 노는 '모래상자'를 '탈주공간'으로 이해하려면 꽤나 많은 상상력이 동원되어야 한다.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는 귀찮아도 책 뒤에 나오는 역자의 친절한 설명문에 기댈 수 밖에 없다.거의 매 장 마다 앞과 뒤를 오고 가야 하기 때문에 뒤쪽 친절한 보충설명란에 책갈피를 하나 꽂아 놓고 보는게 덜 귀찮다.또한 소설의 전체적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84년 역자가 작가와 나눈 인터뷰를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브라우티건은 비교적 자세하게 자신의 문학관과 <미국의 송어낚시>가 가진 소설적 의미와 소설이 탄생하게된 배경에 대해서 쓰고 있다.

<미국의 송어낚시>는 마치 초현실주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이런 류의 영화가 대개 좀 난감한 면이 있는데 가끔 혹하는 마음에 보면 또 아주 신선한 재미가 있다.이 소설은 1967년에 나왔다.이 시점은 20세기 서구 역사에 있어서 가장 자유주의적 분위기가 팽배했던 시점이다.히피,마약,베트남전,인권 행진,유럽의 68혁명 등등... 소설은 그런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한다.작가 역시 사이키델릭한 짐모리슨의 음악을 들으며 마약을 한대 멋드러지게 맞고 펜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니었나 생각된다.최소한 마리화나 정도는 깊에 빨아 들였을 것이다.소설 속 상상에 마약의 중독적인 향기가 배어있다.뽕의 뒷 맛은 그래서 가끔 구질 구질,상상 초월의 설정들을 만들어 낸다.아내와 강가에서 정사를 나누다가 질러버린 정액이 부패한 송어들과 둥둥 떠다니는 작가의 상상에 구역질이 날만한 바른생활 선남선녀들도 이 책에 낚이지 않길 바란다.

정작 중요한 이 책의 주제는 무엇일까 ? 대략 느끼려고 했으나 브라우티건이 인터뷰에서 한 줄로 정리해준다.생각하기 싫으니까 그냥 인용해보자.

제 소설의 핵심적인 주제가 상실,비탄,목가,향수,탐색으로 이어지는 것도 거기에 있습니다.제 소설의 주인공들은 잃어버린 '미국'을 찾아 방황합니다.

그리고 주인공 찾기 강박증에 걸린 독자를 끝까지 괴롭히는 이 책의 주인공에 대한 것도 언급한다.

<미국의 송어낚시>는 사랑도,장소도,책도,꿈도 그리고 작가의 펜촉도 될 수 있는 무형의 것입니다.풍요를 상실한 현대의 불모지에서 부재하는 인간의 정신,꿈,미국을 탐색하는 작업은 언어의 유희나 알레고리 패러디나 농담으로 이루어집니다.현대의 악몽적인 상황하에서는 언어와 아이디어와 내용 사이에 단절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옮겨 놓고 보니 모두 여섯 줄이다..사실 이 여섯 줄이 <미국의 송어낚시>를 참고서에 싣고 싶은 출판업자가 그렇게도 찾는 문장이었을 것이다.또한 엉킨 실타래를 ?다가 절반 포기,절반 짜증에 혼합된 사람들 역시 찾고 싶었던 말일것이다.소설의 주제,작품의 구성,언어표현의 방식까지 다 적혀있다.

이 책에서는 미국의 아메리칸 드림,현대인의 상실감,자연과 공존하지 못하는 소외,죽음에의 공포,자본주의의 폐해 등이 송어낚시라는 이름으로 뒤섞인다.어떤 때는 송어낚시가 주체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읽다보면 곧 '송어낚시'가 어떤 행위나 어떤 인물이 아님을 알게된다.작가는 이 뒤죽박죽 혼합을모든 것이 떠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떠있는 물방울들이 이 녀석하고도 붙고 저 녀석하고도 붙고 또 조금 있다가 흘러서 떠내려가기도 한다.

자본주의의 속성은 비자본주의적 요소를 자본주의화하면서 성장한다고 한다.태생이 먹깨미 귀신같은 놈이다.이 유령은쌩까는 성격이 있다.자신이 쓸고 지나간 자리를 돌아보지 않는다.곶감만 빼먹고 씨는 아무렇게나 버려놓는 몰염치한 친구다.자본주의와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발전과 개발은 언제나 치워지지 않는 또한 치유되지 않는 배설물들을 남겨놓았다.그게 폐선장이고 폐차장이다.이 페선장과 폐차장에는 산업사회의 쓰레기만 가득하다.미안하게도 거기에 인간들도 갖혀있다.인간이 만든 역사에 인간이 갖힌 것이다.한자로 짧고 굵다.자승자박,자업자득...이 폐선장의 쓰레기들은 넘치고 넘쳐 강을 바다를 산을 덮는다.인간의 역사 발전만큼이나 도도한 흐름이다.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는 이런 디스토피아에서도 작은 희망을 이야기한다.송어낚시 쇼티를 외면하고 프랭클린 동상앞에서 모래상자와 노는 아이들 처럼 말이다.

천국에서도 브라우티건은 마리화나 한대 깊이 빨면서 송어낚시를 하고 있을 것 같다.씨익 웃으며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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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7-06-22 19:24   좋아요 0 | URL
아니..세상에 이렇게 멋진 리뷰를 아이 자는 틈을 이용해서 쓰셨다구요??
대단대단하십니다..아이가 일어나서 울까봐 불안해서 후다닥 쓰게 되고 그러던데요..
아빠라서 더 느긋한 걸까요?/
저도 이책 아는지기님의 소개로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 읽어보진 못하고 있는데 더 궁금해지네요..
다시한번 뽑히신것 축하드려요..^^&

프레이야 2007-06-22 21:42   좋아요 0 | URL
당선, 축하합니다!

오우아 2007-06-23 20:53   좋아요 0 | URL
역시 문향(文香)이 대단하십니다. 축하드립니다.

드팀전 2007-06-25 23:46   좋아요 0 | URL
배꽃님>매주 토요일 와이프님 맛사지 보내드리고 나면 아이랑 둘이 놉니다.느긋하진 않지요.좀 자나 싶으면 '앙앙'하고 울어버리니까요..
혜경님>구두에 찔리겠습니다 ㅋㅋ
오우아님>문향??? 그게 뭔데요@@@ 그런거 없습니다.어쨋든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