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구 하룻밤의 지식여행 12
지아우딘 사르다르 지음, 이영아 옮김 / 김영사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나는 '하룻밤000' '한권으로 읽는 000'을 거의 읽지 않는 편이다.그런데 지아우딘 사르다르의 <하룻밤의 지식여행 -문화연구>를 덥썩 골랐다.세가지 이유가 있다.첫째, 요즘 너무 바빠서 책볼 시간이 거의 없다.오직 화장실만이 나의 해방구이다.두꺼운 책을 들고 화장실에 앉아 있어본사람은 안다.팔이 얼마나 아픈지...결국 얇은 책이나 재생지로 된 책이 가장 좋다.두번째 이유는 올해 소비사회에 관심을 갖고 책을 몇 권 읽다가 결국 옛날에 관심을 가졌던 문화연구까지 생각이 뻗쳐버렸던것.그리고 세번째는 두번째의 연결 선상에서 비슷한 주제에 가지고 대학원 공부까지 한 바람구두님이 이 책을 읽고 서평까지 쓰셨다는 것. 대략 이런 세가지 이유가 섞여서 거의 몇 십년만에 '하루만에 읽는' 책을 손에 들었다.

이 책은 특정장소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전 까지만 읽는 책이었다,그래서 이 책에서 한정하듯이 '하룻밤'에 읽을 수는 없었다.말처럼 '하룻밤'에 읽을 수 있었다면 나는 다음날 병원에 가서 관장을 했어야 할 지도 모른다.(하룻밤에 읽지 못하게 한 나의 건강한 장운동을 위해 건배!!)

사르다르의 <문화연구>는 결코 쉬운 내용이 아니다.아무런 사전 지식없이 고등학교때 압축판 소설 보는 마음으로 달려들었다가는 '하룻밤'에 나가떨어질 수도 있다.책은 얇고 만화도 많지만 다루고 있는 내용은 문화연구의 개념부터 반세계화 분석까지 그 스펙트럼이 광활하다.그러므로 사회과학적 용어들과 사회과학적 상상력에 대해 전혀 준비가 안되어 있는 상태라면 문화연구에 대한 힘든 워밍업이 될 수도 있다.

사르다르의 <문화연구>를 통해 나는 그동안 내가 가진 '문화연구'의 범위가 '협의의 개념'이었다는 것을 알았다.이것은 '문화연구'가 가진 '경계선넘기' ,다른 학문과의 '이종결합' '잡종성' 등에 기인한다.그렇기 때문에 나는 개별적 학문으로 받아들인 '탈식민지론' '페미니즘' 오리엔탈리즘'이 광의의 '문화연구' 개념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생각치 않았다. 문화연구가 가진 '유목적' 인 성격은 사회과학,인문학,예술,심리학,철학,정치학 ..등등의 주제와 방법론을 빌려와서 제것으로 만들었다.그래서 현대의 문화연구는 거의 모든 것의 학문이자 비판자입장에서는 아무런 학문도 아닌 것 '비학문'이 되어버렸다.

내가 협의의 문화연구 개념만을 문화연구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내 전공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학과 커리큘럼에는 대중문화론,대중매체 비평론,미디어 분석론,현대문화론 등등이 매학기 들어 있다.학과의 학문적 역사가 짧아서 사실 여기저기서 많이 퍼온다.어쨋거나 그런 연유로 스튜어트 홀에서 시작해서 부르디외 정도까지 해당되는 전통적의미의 '문화연구'에 무척 관심이 많았다.한 때 연애도 안되고 회사도 지겹고 했을 때는 '문화연구'나 '미학' 공부 하러 유학갈까도 심각하게 생각했다.불어나 독어는 ABC도 모르니까 포기하고 '뉴욕 대학' 에 홈페이지를 들락인적도 있었다.(그때 갔으면 결혼도 못했을 테고 인생도 달라졌을 게다.) 대학에서 배운 '문화연구'는 주로 '문화연구의 방법론' 과 '텍스트 분석' 이었다.딱잘라 말하자면 '대중문화연구'라는'문화현상과 문화상품'에 대한 철학과 분석, 논쟁들이 주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알튀세르와 그람시에 대해서도 알게 된 것이 그 때 였는데 이 책에서는 딱 절반까지만 그런 전통적인 의미의 '문화연구' 개념이 나온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무었으로 채워지고 있을까? '탈식민론' '페미니즘' '과학과 문화' '오리엔탈리즘' '소수자 문화' '퀴어이론'등에 대한 이야기도 '문화연구'의 주제 안에 들어와 있다.언급되는 학자들을 보는게 오히려 쉬울 수 있다.가야트리 스피박,에드워드 사이드,토마스 쿤,아이즈드 아마드,호미 바바,도나 헤러웨이,벨 훅스 등등.... 사실 이런한 '잡종성'은 문화연구의 장점이기도 하면서 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저자 역시 문화연구의 애매한 성격때문에 거의 모든 것이 '문화연구'로 정당화 될 수 있다고 말한다.학문의 한 분야로서의 문화연구는 그 윤곽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해있다고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연구' 가 공부되어야하고 생존해야하는 정당성은 어디에 있을까? ... 저자는 '권력'에 있다고 말하는 듯 하다.문화연구는 학문으로서도 부대끼고 이데올로기로도 종교도 작용하지 못한다.그리고 어떤 의미를 부여해주거나 행동의 지침서도 되지 못한다.그렇지만 '문화연구'는 우리가 '문화 권력'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이에 저항하는 방법과 수단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미가 있다.설령 문화연구가 너무 추상적이고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적 장을 펼치고 있다는 비난을 받을때라도 말이다.

철학은 의심이라고 말한다.정말 좋은 말이다.의심해보는건 어떨가? 내가 오늘 본 TV 프로그램에, 내가 어제 먹은 맥주에, 내가 오늘 입은 옷에, 내가 어제 한 말에, 내가 지난주에 정당하게 번 돈이라는 것에,내가 한달전에 아파서 병원에 간 것에,내가 앉아서 컴퓨터 자판을 누르는 것에.... 어떤 권력이 어떤 형식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문화연구는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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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5-20 13:11   좋아요 0 | URL
저도 읽었던 책인데, 제 읽어본 이 시리즈의 책들 가운데서는 번역이 가장 안 좋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저자인 사르다르는 수준급이지만...

드팀전 2007-05-20 22:06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시리즈는 처음이었습니다.이런 책의 장점은 대략적인 족보를 한번 훓어보는 즐거움인 반면 압축과 단순화를 하다보니 전후 맥락을 모르면 오히려 더 난해해지는 경우가 있더군요.번역은 어땟는지 기억이 나지 않네요.번역이 어색했어도 '음 원래 이렇게 꼬인 내용인가보네' 하면서 넘어갔으리라 생각됩니다.^^
다음번 화장실에는 푸코를 데리고 갈까요..^^
 

하일 '녹색' 히틀러? [한겨레 고명섭 기자 2003-11-15]


“대다수의 생태운동가들은 자신들을 사회적으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태운동이면 어떤 것이든 다 진보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에코파시즘>은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지은이 재닛 빌과 피터 스토든마이어는 저명한 좌익 생태이론가 머리 북친이 세운 ‘사회생태학연구소’에서 활동하는 생태운동가다.

지은이들은 “생태계를 구하려는 모든 노력을 적극 지지한다”고 미리 밝힌다. 그러나 “우리는 왼쪽도 아니고 오른쪽도 아니며 다만 앞쪽(생태지향)일 뿐이다”라는 생태주의 슬로건은 정치적 반동의 수렁으로 떨어질 수 있는 대단히 위험한 주장이라고 말한다. 지은이들은 생태사상의 발원지인 독일의 사례를 들어 그 역사와 현재를 살펴봄으로써 생태주의와 극우정치의 결합인 에코파시즘(생태파시즘)의 발흥에 둔감한 이들에게 경적을 울린다.

이 책에 따르면, 생태주의는 그 기원에서부터 불길한 씨앗을 품고 있었다. ‘현대적인 생태학적 사유의 최초의 예’인 19세기 독일 학자 에른스트 모리츠 아른트와 그의 제자 빌헬름 하인리히 릴은 숲과 흙을 수탈하는 근대화를 비난하면서, 자연과 인간은 통일체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들의 환경주의는 ‘외국인 혐오적 민족주의’의 자장 안에 있었다. 생태주의가 동트는 순간부터 ‘대지에 대한 사랑’과 ‘호전적인 인종주의’가 치명적으로 연계돼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뒤를 이어 ‘생태학’(에콜로지)이란 말을 창안한 동물학자 에른스트 헤켈은 생태주의적 전망을 순수독일주의적 전체주의와 결합시켰다. ‘환경적 순수성’과 ‘인종적 순수성’을 결합시킨 그는 “인종주의와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대표적인 이데올로그”가 됐다.

더 극단적인 예는 히틀러의 민족사회주의(나치) 운동에서 등장했다. 반근대주의·자연신비주의·독일민족주의가 뒤엉킨 1920년대의 청년운동 ‘반데르푀겔’은 일종의 ‘우익 히피’였는데, 나치는 이들의 열정을 고스란히 빨아들였다. 발터 다레, 알빈 자이페르트 등 나치의 이론가들은 생태적 건강을 인종적 건강과 결합시켰다. 이들은 아리안족의 순수한 피를 지키기 위해 유대인을 박멸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 자연환경을 파괴의 위협에서 보호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나치는 세계 최초로 유기농법을 도입하고 당대에 가장 ‘진보적인’ 환경보호 법령을 만들었다. “이들에게 생태이념이야말로 인종적 원기 회복의 본질적 요소였다.”

나치의 에코파시즘은 오늘날 다시 살아나 각종 극우정치운동에서 생태주의적 인종주의로 횡행하고 있다. 이를테면 루돌프 바로는 독일인을 민족적 수렁에서 끌어내 생태적 구원으로 이끌 ‘녹색 아돌프(히틀러)’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런 흐름은 미국에서도 보이는데, 생태주의 운동가이자 악명높은 백인 우월주의자 톰 메츠거는 자연훼손으로 삶의 터전을 위협받게 된 동물들과, 유색인들에게 포위된 백인들은 같은 처지라고 주장한다. 생태주의적 상상력이 인종주의적 상상력과 하나가 된 것이다.

지은이들의 결론은 명확하다. 환경이라는 주제는 좌로부터도 우로부터도 동원될 수 있으며, 생태주의는 그 자체로 어떤 정치도 규정하지 않는다. 원론상 가장 훌륭한 정치적 실천도 범죄적인 만행에 악용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자연’ 개념은 사회적으로 생산된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생태신비주의는 극히 위험하다. 반동적 생태주의의 수렁에서 벗어나려면 환경파괴의 원인을 특정한 사회적 관계, 다시 말해 인간과 자연을 동시에 수탈하고 착취하는 폭력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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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주의' 자체도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회에서 '에코파시즘'을 논하는 것 자체도 무의미해 보인다.그만큼 한국 사회는 근대 개발 프로젝트에서 헤어나오질 못한다.

생태주의적 삶에 대한 동경도 많고, 또 동양식 생태주의가 갖고 있는 범신론적 관념에 끌리기 때문에 여러모로 좋아한다.하지만 잠시 생각을 멈추자.둘러보니 '생태주의'(넓게는 환경주의)가 달팽이 집으로 이용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경험을 많이 하게된다.근본적으로 '생태주의적 삶'은 자연을 착취 대상으로 보는 그리고 실제로 그래왔던 자본주의와 결합하기 어려운 사상이다.논리적으로 그렇다.(이건 논리적으로 그러니까 그런가보다 해도 좋다.) 내 생각에 생태주의자는 친자본주의자가 될 수가 없다.만약 저 책에서 말하는 것 처럼 제대로된 생태주의자라면....그런데 생태주의 맛만 즐기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스스로 생태적인 삶을 동경하면서 또한 자본주의적 삶을 끝없이 향유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에 있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삶의 방식은 아주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적 방식과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상은 자연과 생태로 가있는 경우 말이다.

삶의 방식과의 불일치가 단순히 인간이 못나서 라고 말해버리면 그만이다.나도 일단 그렇게 하자.그 다음에 하나 더 생각해봤다.삶의 방식과의 불일치에도 전혀 인지부조화를 일으키지 않는 '생태주의'가 가진 이념형의 한계성같은 것은 없을까.생태주의에 계급문제는 어디에 있을까?

세속적인 의미에서 생태주의하면 어디에서도 욕먹지 않는다.그래서 달팽이 집같을 때가 있다.언제고 좌우를 묻는 질문에도(이건 은유다.누가 좌우를 묻고 답하겠는가?)  달팽이 집은 안락하다.

.........내가 앞에 쓴 것 처럼 생태주의를 삐딱하게 바라본다는 건 아니다.그냥 성찰적 질문 좀 해본다고 '반생태주의자'가 되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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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 뻥튀기 광고는 정말 잘 만들었다.단연 요즘 광고 중 최고다.신문판과 TV판을 다봤다.

두가지를 광고 컨셉으로 삼은 듯 하다.

1.광고 속 대상자에 대한 보편적인 인류애: 아프리카란 대륙은 미개/원시/자연/순수의 기호다.또한 빈곤/기아이기도 하다.광고의 대상자가 순수하고 또한 기아를 떠올리게 한다면 기여는 더 큰 빛을 발하고 보편적 인간애는 더 쉬운 공감을 끌어낸다...(사족이지만 우리들이 아는 아프리카는 아프리카가 아니다.근대국가들은 다 개별 국가의 명칭을 갖는다.미국,영국,한국...그런데 대략 유럽 밑에 있고 원숭이 두개 골 처럼 생긴 땅 덩어리 모여 있는 국가들은 그냥 다 '아프리카'다. 그래서 '아프리카'라는 말은 그 용어 자체로 문화정치적이다.)

2.광고를 보는 대상자들의 복고적 정서: 지나간 것은 따뜻하다.꼭 그런건 아니지만 미디어는 대개 그런 도식을 만들어 낸다.광고에 등장하는 뻥튀기는 그래서 따뜻하고 아름답다.유년시절 동네 공터에서 장터에서 '뻥이요' 하면서 터지는 뻥튀기의 구수한 냄새를 떠올리게 한다.

이 둘이 단출하지만 세련된 사진을 만나면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포스코의 뻥튀기 광고는 여름이 다가오는 시점과 어울리며 분명 좋은 반응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좋은 광고야 말로 문화정치적이라는 것을 잊지는 말았으면...좋겠는데...

(광고를 옮기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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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6 1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한계급론
토르스타인 베블런 지음, 김성균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유한부인'이란 말을 처음 들었던 것이 언제쯤이었을까?

 옛날 일을 뒤적이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다.그 프로그램에서 언젠가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을 주제로 다루었다.프로그램의 내용은 소설<자유부인>이 반영한 한국 전쟁 이후의 성 모랄의 변화와 소설로 촉발된 사회적 풍조에 대해 논쟁이 중심이었다.물론 당시 소설 <자유부인>은 퇴폐풍조를 양산한다고 철퇴를 맞았다.내가 '유한'이란 말을 처음 들었던게 그 프로그램에서였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유한계급'이라는 말은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 않는다.'유한'이라는 한자어가 낯설기도하지만 일단 '계급' 이라는 말이 주는 '붉은 기운'에 대한 거부감이 더 큰 것으로 추측된다.또한 '유한계급'이란 말이 시간을 건너며 의미가 희석된 부분도 한 몫 할 것이다.

비록 '유한계급'이란 말이 사회학에서든 일상에서든 흔히 사용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미 '일상어'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그 말이 가진 함의가 통시적인 사회성을 확보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의미에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베블런이 말한 '유한계급적' 속성은  장롱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옥가락지처럼 자본주의의 전지구화가 확산되는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

베블런이 <유한계급론>을 쓴 시대를 이해하는 것은 이 책을 읽으며 상상력을 자극하는데 도움이 된다.시간이 허락한다면 미국사 관련 책들중 19세기 후반부분을 참고하면 재미가 있다.19세기 후반 미국은 거대한 부가 집중되기 시작하는 '자본주의 만세!' 천하였다.남북전쟁 동안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난 뒤 돈 냄새를 맡은 신흥 부르주아들이 욱일승천하던 시기였다.서부 개척과 내륙 개발을 위한 철도는 자본의 기름에 불을 끼얹는다.

 <미국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미국사>(케네스 데이비스)는 이 과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남북전쟁이 끝난 뒤 서부는 새로운 자원,소비의 시장이 된다.철도증설은 땅, 노동, 철강, 자본 네 가지 기본요소가 필요했다.땅은 연방정부, 값싼 노동력은 동부와 서부의 이민자들 ,철강은 카네기, 자본은 jp모건 부자...

요즘 자본가들은 국가를 자신의 적인척하며 '작은국가'를 이야기하지만  자본주의의 성공에 있어서 그들은 거대한 국가의 도움을 제대로 받아 왔다.

페르낭 브로델은 자본주의의 성공을 위해 몇가지 요소를 언급한다....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사회와 국가가 자본주의의 독과점을 인정해야한다.그리고 초과이윤을 수급할수 있는 해외시장이 존재해야 한다.

19세기말 미국은 이 모든 것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또한 그 때는 기업들의 미친 말발굽에 가격당한 노동자들의 비명도 어느때보다 높았던 시절이었다.

<미국 민중사>(하워드 진)는 1886년은 동시대인들에게 '거대한 노동자 봉기의 해'로 언급한다.1886년에는 1400여 회의 파업에 50만 명의 노동자가 참여했다.그리고 1893년 역사상 최대의 경제 위기가 도래했다.42개의 은행이 파산했고 1만 6000개의 사업체가 문을 닫았다.1500만명 노동자 가운데 300만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1893년 경제불항은 이윤 확보를 위해 해외팽창의 도화선 구실을 했다.미국 상품을 위한 해외시장이 국내 저소비 문제를 경감시키고 1890년대에 계급전쟁을 야기했던 경제 위기를 막을 수 있다는 사고가 팽배해졌다.자본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쌍두마차로부터 나온 자연스러운 결과였다.미국은 스페인과의 어거지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푸에르토리코,하와이,필리핀 등을 합병해나간다.

미국이라는 신세계는 구대륙의 귀족정치에 도전해서 성립된 것이다.그러나 그건 말만 잠시 바꾸어탄 것 뿐이었다.건국의 아버지로 상징되는 계몽주의 엘리트들은 그들의 부를 계속 세습해나갔다.유럽식 귀족들은 사라졌지만 의식적으로 유럽귀족을 동경하는 미국형 신귀족들이 부를 독점했으며 산업혁명에 따른 신흥부자층이 뒤섞이며 19세기 상류층을 구성하였다.

베블런은 '유한계급론'에서 이들 상류 부유층의 속성을 낱낱이 파해친다.대상에 대한 분석은 사회과학적이라기 보다는  문화인류학적,역사적,심리학적 접근이 주를 이룬다.흔히들 베블런을 미국 제도학파의 태두로 언급한다.그는 다윈으로 부터 응용한 '사회진화론'으로 사회를 분석한다.그는 사회 구조의 진화를 제도들의 자연선택과정으로 보았다.즉 지금까지 형성된 인간의 제도나 인간 성격의 진보는 가장 적합한 사고습관의 자연선택의 결과이며 적응 노력이라는 것이다.그 결과 제도들의 집합으로 구성되는 생활양식의 성격은 심리적인 측면에서 지배적인 정신적 태도 내지는 지배적 삶의 논리로 규정되며 '지배적인 성격유형'이라는 용어로 정리된다.

그는 '자연선택'이라는 차원에서 '유한계급'의 탄생을 설명한다.유한계급은 평화적인 미개단계에서 약탈문화단계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이것은 문화의 진화과정에서 사유재산의 발생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자연선택과정에서 우성은 남성들이다.그들은 '기술과 도구의 활용'을 통해 '호전성' 과 '용맹성'을 드러낸다.약탈적인 힘의 과시는 문화내에서 '존경의 대상'이 된다.또한 가부장제에 바탕을 둔 남성의 약탈성은 여자를 비롯한 사적 재산을 축적을 가능케 한다.베블런은 소유권 생성의 근본적인 동기를- 공인된 자기과시적 성향인-'경쟁'에 두고 있고 '부'를 소유하는 것이 세인들의 선망과 부러움을 사는 '명예'의 표시가 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베블런은 '약탈단계'에서 발생하는 '유한계급'을 진정한 의미의 '유한계급'으로 보지는 않는다.이 시기는 이론상의 기원에 해당한다고 본다.그는 약탈문화가 금력과시문화 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완전한 의미의 '유한계급'이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한다.그는 완전한 형태의 유한계급제도의 기원도 이 시점으로 잡고 있다.그렇다면 금력과시문화 단계에서 '유한계급'을 유한계급이게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일까? 베블런은 '과시적 소비'와 '과시적 여가'를 들고 있다.

먼저 중요한 것이 '과시적'이라는 말이다.단순히 부와 권력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그들은 부와 권력을 그 증거로 제시하고 공인받아야 하며 차이를 두어야한다.그렇기 때문에 금력과시가 가능한 소비재를 선호한다.그러나 이러한 '과시적 소비' 역시 하류계층에 의해 추격을 받는다.유한계급들은 한발짝 앞서가는 전략 내지는 '검소'라는 또다른 '과시적 소비'를 통해 이를 비웃는다.그리고 '금력'을 문화적으로 또는 취향의 문제로 치환해버리는 방식을 선택한다.예를 들어 고급 문화를 향유하며 그 분야의 식견을 갖는다든가 고급 건축물등을 소유하며 금력과시를 미학적으로 바꾸어버리는 것이다.

특히 '유한계급'에게 중요한 것은 '여가'이다.여가라는 것은 비생산적 노동에 종사한다는 즉 노동으로 부터 면제받는다는 의미이다.금력과시문화 단계에서 발달된 산업사회의 단계로 가면 남성들은 세습받은 귀족을 제외하면 사회 활동에 관여한다.여기서 '유한부인'라는 '대리여가'층이 발생한다.남성들의 과시적 소비와 과시적 여가는 가정 내에서 순응주의적인 '여자'를 대표선수로 내세우게된다.여자들의 고급스러운 예법,고급스러운 모임,고급스러운 태도,고급스러운 소비들은 모두 남성 유한계급의 명예를 높이기 위한 것이다.여성들은 사회에서 생산활동에서 배제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이러한 습속들을 내재화한다.또한 종교단체나 봉사활동을 통해 여가를 소비하며 남성 유한계급과 가족의 명예를 높인다.여성들의 이러한 '대리여가'와 '대리소비'는 유한계급들이 부리는 질 좋은 하인들에게 요구되는 가치와 동일선상에 있다.유한계급 아래에서 고급예법을 통해 주인의 가치를 높이는 질좋은 하인들 역시 결국은 남성 유한계급의 가치를 높이는데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영화 <남아 있는 날들>의 안소니 홉킨스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책 후반부로 가면 베블런은 유한계급이 향유하는 의복,스포츠,도박,종교,사회봉사,고등학문 등에 내재되어 있는 금력과 여가라는 낭비적인-비생산적인-특질등을 지적해낸다.특히 카톨릭의 과시적 문화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그였던 만큼 유한계급과 동격에 둘 수 있는 성직자와 종교적 의례의 과시적 속성에 대해 날카롭게 반응한다.

베블런은 기본적으로 유한계급문제가 사회문화적 발전에 장애가 된다고 보고 있다.과시적 소비와 과시적 여가는 사회의 중심가치가 되어서 하류계층에게도 직접적으로 주사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애어른 할 것 없이 '부자되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현재의 한국 사회를 예견한다.(요즘은 돌잡이에서도 돈 집어야 부모와 친척들의 박수소리가 가장 크다.책 잡으면 좋아하며서도 웃음이 반쯤 줄어든다) 소설가 이순원이 <압구정에는 비상구가 없다>에서 '우리의 발걸음은 매일 아침 한걸음씩 압구정으로 향한다'라고 했던 지적과 같은 말이다. 상류층을 따라하는게 도대체 뭐가 문제가 될까 하고 질문할 수 있다.베블렌은 유한계급과 보수주의장에서 멋진 표현을 선사한다.

'일체의 에너지를 일상적인 생존투쟁에 쏟아부어야 하는 절대빈곤자들은 내일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기 때문에 보수적일수 밖에 없다.동일한 맥락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에 불만을 거의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보수적일 수 밖에 없다,유한계급제도는 가능하면 하류계급의 생존수단까지 박탈하여 하류계급의 소비력과 가용 에너지를 축소시킴으로써 하류계급을 보수화시킬 뿐 아니라 새로운 사고습관을 배우고 거기에 적응하려는 하류계급의 노력마저 불가능하게 만든다.'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는 없다는 말도 동일한 선상에 있다.하류층을 비롯해 극빈층과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의식혁명을 통해서 삶을 바꾸라고 하는것은 폭력이다.오히려 자신이 하류층과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만을 상징하는 유한계급적 속성일 뿐이다.베블렌의 명문을 그렇게 이해해도 양해가 된다면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을 현시대에 그대로 적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그는 유한계급 문제를 '소비자'의 문제에만 국한했다.이 문제는 많은 학자들로부터 지적 받은 바 있다.장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에서 '생산이 소비에 작용하는 과정'을 설명했다.정작 베블런이 쉽게 지나쳐버린 부분은 상류층의 생활습관이 어떻게,왜 하류층에게 그대로 답습되는가 하는 부분이다.그저 적응과 모방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문제가 많이 있는 지점이다.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조직되고 어떤 습관들을 내재화하고 어떤 방식으로 지배적인 관념을 따르게 되는지 등등...베블런은 이 문제를 후배 학자들에게 넘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을 한동안 들고 다녔더니 후배가 지나가면 언뜻 그런 말을 한다."아니..요즘도 무슨무슨 계급' 하는게 있습니까?" 대꾸하려다가 일일이 대꾸하면 길어지기 때문에 그냥 웃고 말았다.아마 옛날에도 무슨 무슨 계급 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이 꼭 그런 말을 한다.계급이란 말이 무서운가 보다 ^^(하도 무서워해서 바꿔주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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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5-14 14:39   좋아요 0 | URL
어휴 무쟈게 깁니다. 뭔가해서 읽으려고 들어왔다가 지금 읽기엔 힘들거 같아 댓글만 달고 도망갑니다.

허선비님 2007-12-03 13:29   좋아요 0 | URL
잘 읽었습니다.
책 뒷부분 번역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읽다가 하도 답답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가 궁금해하다보니..
흘러흘러 여기까지 왓네요 ㅋㅋ
 

상이 꽉 차고 있다.축제를 준비하자!

                        ............. 안토니오네그리,마이클 하트 <제국> 한국어판 서문에서

'내츄럴 본 비관주의자'인 제게 오늘 하루 힘을 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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