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아파트 생활이 20년이 넘었다.중간 중간 개인주택도 살았고...700만원 단칸방도 월30만원 장기여관방도 살았다. 그럼에도 중심 거주공간은 아파트라는 생각이 든다.중학교 때 처음 아파트로 이사하고 얼마나 좋았는지...춥지도 않고 따뜻한물 잘나오고 천장에 쥐도 없고(나중에 알았다.아파트 위층에는 사람쥐가 산다는 걸) .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아파트와 내가 어린 시절 살았던 화단이 아름다웠던 개인주택을 비교하면서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게 있다는 걸 알았다.결론을 말하자면 아파트에는 '집'이 없다.좀 쉬운표현으로 하면 '아파트는 집이아니다'라고 할 수 있겠다.나는 지금도 '집'에 살지 못하며 '집' 을 꿈꾸기만 한다.

어제 TV에서 '살림의 여왕' 이효재 씨의 집을 보았다. 작은 한옥의 아름다운 마당이 있는 집이었다.나는 이효재씨를 만난적이 없지만 친근하게 느꼇다.내가 좋아하는 형님이 그녀의 부군 임동창 선생과 막역하기 때문이다. 서울에 자주갈 기회가 있었다면 아마 나도 그 모임에 꼽사리 할 수 있었을 텐데....생각난 김에 오랜만에 형에게 전화도 한통했다.

나는 이명박 전 시장처럼 고래등같은 한옥집은 생각도 않는다. 내 생각과 내 손길을 먹은 작은 한옥집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청도 한옥학교에 다녀야 할까.....

경향신문 1면에 실린 기사다.

 

“한국은 이상한 아파트공화국” 佛 줄레조 교수

입력: 2007년 01월 31일 18:26:29
 
“땅은 좁고 사람은 많기 때문이죠.”

“한국에는 아파트가 왜 이렇게 많죠”라는 물음에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대답한다. 보통 한국인이라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공리(公理)다. 과연 그럴까.
줄레조교수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도시가옥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무심한 국민이라고 했다. 한강 원효대교 남단에서 바라본 서울 이촌동 지구 아파트 단지. /남호진기자

1993년 한국을 찾은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40·마른 라 발레대 교수)는 ‘아파트의 나라’ 한국에 충격을 받았다. 프랑스에서는 빈민주택의 통칭인 아파트가 한국에선 어떻게 부의 상징일까. 어떻게 ‘주택이 유행인 나라’가 생겨났을까. 유럽에서 실패한 ‘공동주택’에 대한 세계적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이상이 한국에서 실현된 것일까. 그는 서울의 아파트를 연구, 박사논문을 쓴 데 이어 최근의 연구성과를 담아 ‘아파트 공화국’(후마니타스)을 출간했다.

줄레조가 우선 문제삼는 것은 ‘인구밀도와 아파트의 상관관계’에 대한 통념이다.

좁은 땅에 인구밀도가 높은 네덜란드, 벨기에에서는 도시 집중화가 대규모 아파트 건설로 이어지지 않았다. 90년대 이후 서울 강북의 아파트 증가는 인구밀도 상승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서울 신공덕동은 오히려 아파트가 들어선 이후 인구밀도가 낮아졌다.

줄레조는 “대규모 아파트 건설이 더 많은 가구를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니다”라며 “통행로, 소방로를 효율적으로 구상하고, 수도나 전기의 조직망을 개선한 3, 4층 건물로의 재개발은 왜 대안이 될 수 없느냐”고 반문한다.

줄레조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숱한 면박을 들으며 면접조사한 한국인들에게서 공통점을 발견했다. 아파트를 선호하는 이유로 ‘깨끗함’을 든다는 것. 여기서 ‘깨끗함’은 ‘더러움’의 반대가 아니다. ‘오래돼 값어치가 떨어졌다’의 반대말로, ‘최신의’ ‘새롭다’의 의미라는 것을 한참 뒤에 이해했다.

그는 여기서 ‘새 것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를 읽는다. 와우아파트 때만 해도 대다수 시민이 혐오한 아파트가 70년대 갑자기 ‘첨단주택’으로 탈바꿈하고, 신도시·뉴타운에서 보듯 ‘신’ ‘뉴’라는 접두사가 무한 반복됐다. 줄레조는 냉대받던 아파트가 명품으로 자리잡은 이유를 권위주의 산업화 이래 정부, 재벌, 중산층의 ‘3각 특혜동맹’에서 찾는다.

70년대 ‘주택건설 200만호!’ ‘주택건설 180일작전!’ 등 구호를 내건 정부는 훈장 수여와 각종 혜택으로 대기업 건설사의 참여를 독려했고, 중산층을 아파트로 결집시켰다. 대기업은 정부의 든든한 파트너가, 손쉽게 집 장만하고 돈까지 번 중산층은 확실한 표밭이 됐다. 아파트는 상품, 재테크 수단으로 변모했고 한국인들은 “도시가옥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무심한’ 국민”이 됐다. 여기에 부의 분배나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한 ‘국민주택’의 개념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그는 ‘아파트의 현대성’에서도 한국인들의 모순된 인식을 읽는다. 한국인들은 ‘현대적’이라고 하는 아파트에서 살면서 한옥을 트집잡는 이유로 든 신을 신고 벗는 것, 상을 옮기는 일을 여전히 수행한다는 것이다. 현대성 신화는 “현실로서의 아파트가 아니라 한국인들이 ‘현대적 주택’에 대해 만들어 낸 ‘이미지’가 인기를 끈 결과”인 셈이다.

아파트 문화를 성찰한 변변한 연구조차 없는 한국 현실에서 한 이방인의 주도면밀한 관찰은 “미학적 기준에 반하는 도시경관” “지리학에 반하는 도시” 한국사회를 비춰주는 ‘거울’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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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2-01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 타이틀만 잠깐 봤는데, 그게 책이었군요!..

드팀전 2007-02-01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제가 오늘은 로쟈님보다 빨랐습니다.우하핳..이 승리감 3초만 만끽하겠습니다.^^ 아파트나 주거공간과 관련된 인문사회학 책들도 소개해주세요.
 

오늘 아침 재미있는 기사 두 개를 읽었다.

<민노당 창당 7년…약속했던 희망을 왜 못주나>

민주노동당이 30일 창당 7주년을 맞았다. ‘다른 정치’를 약속하며 국회에 진입한 지는 3년이 됐다. 9명의 의원과 7만3000명의 당원을 자랑하는 유일 진보정당이란 자랑스러운 이름을 얻었다. 민주화 20년이 가져다 준 소중한 결실의 하나이다.

그러나 민노당이 한국의 진보세력을 정치적으로 대변하며 한국사회의 진보적 발전 전망을 제시하고, 진보적 의제를 실천하는 진보정당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2004년 총선 직후 21.9%까지 치솟던 당 지지율은 4%대까지 추락했다. 이는 민노당이 떠받들어야 할 수많은 빈민과 서민, 가난한 노동자들이 민노당에서 희망을 찾지 못한 결과이다. 왜 그들은 민노당을 자기의 정당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가.

이후는 짧게 정리하자.민노당 지지율 하락의 원인

1.민노총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현재 당원 중 민주노총 조합원이 40%이다.민주노동당=민주노총 이라는 인식이 확대되고 있다.최근 불거진 노동계의 비리사건,폭력사태등 노동계의 문제는 당의 지지로 하락으로 이어졌다.

2.서민당이 서민고통에 무능.부유세,토지공개념 도입 등 공약을 제시했으나 보수정당과 차별화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결국 서민들에게 대안세력으로 인식을 심어주지 못했다.

3.대중과 괴리된 대북 태도 개선이 없다.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북한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하면 민주노동당과 조선노동당이 중첩되면서 국민들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이부분은 좀 민주노동당이 이미지정치에 피해자로서 좀 억울한 부분이 있다.하지만 대중의 정치의식이 왜곡되어 있다면 그걸 인정한 상태에서 밑그림을 그릴 필요도 있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문제이다.

또 다른 기사..

<反한나라·非우리당 ‘새 진보’ 결집 시동>
 

진보개혁진영의 ‘제3세력’으로 주목받는 ‘창조한국 미래구상’(미래구상)이 30일 발기인 대회를 열고 12월 대선을 향한 시동을 걸었다. 미래구상은 시민사회 중심의 대안과 콘텐츠를 생산하는 ‘시민정치세력화’를 이뤄내겠다고 천명했다. ‘반(反) 한나라당’의 기치를 들고 나섰지만, 열린우리당·민주노동당과도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민주화세력의 위기를 극복할 대안이 되겠다는 목표다

과녁은 ‘한나라당 집권 저지’=‘미래구상’의 목표는 선명하다. 유의미한 시민·사회세력을 형성,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겠다는 것이다. 반 한나라당 전선 결집을 통한 대선 승리가 이들의 1차 목표다. 한나라당 등 보수 성향 대선주자들이 앞서나가고, 뉴라이트가 세(勢)를 넓히는 정치·사회적 ‘보수 회귀’ 흐름에 맞서 진보적 시민사회가 저항선을 치고 나선 셈이다

두 기사를 배치하다보니 <경향신문>이 <창조한국 미래구상>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그러나 그런 혐의는 조금 더 두고봐야 할 듯하다.

<창조한국 미래구상>은 일종의 '시민사회 중심의 새로운 민주주의구성론'처럼 보인다.신문 기사에서도 후에 지적하는데 이것이 결국 기존 정치권에 수혈하는 형태가 될 가능성도 높다.또한 기치로 내걸고 있는 '반한나당 비열린우리당' '한나라당의 집권은 막자'는 논리는 이번 대선에 진보를 자처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이 내걸 간판을 선점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결국 '보수회귀'는 막자는 '공포의 정치'가 또 한번 작동한다.열린 우리당 지지자 이탈세력중 한나라당에 넙죽 업드리기에게는 자기양심이 거부하거나 열린우리당은 밉고 민노당은 불편한 열우당 지지자들은 또 이쪽을 기웃거릴 가능성도 있다.개인의 선택이니까 뭐라 할 수 없다.차라리 지지할 정당이 없다면 뭘 고를까 고민하는 시간에 '대의제'에 대한 고민을 한 번 더 해보고 이번 한번만은는 상징적인 의미로 차라리 '기권'하는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오해를 막기 위해 밝힌다...기권은 정치적 고민의 철학적 결과물이어야한다.별로 생각도 없으면서 마지못해 찍을 바에야 차라리 '투표거부'라는 방식도 정치적 소신의 표현이다.안따깝지만 이 생각의 밑바닥에는 대선에서 '보수야당'의 후보가 당선될것이라는 판단이 깔려있다는 점을 밝힌다.)

<황해문화>에서 김정훈교수는 민주화 세력의 한계에 대해 그들이 '적대적 의존관계'에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수구기득권 세력이 그동안 하나도 변하지 않았듯이 그의 상대역인 진보세력 역시 그 의존고리에 의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점을 말한다.이는 민주노동당에도 그래도 적용할 수 있을 법하다.민주노동당 역시 어느정도 '보수정당'의 반사이익에 의해 이익을 보고 있다는 점을 자성해야만 한다.김정훈 교수는 스웨덴이나 독일의 진보정당,노동자당들의 예를 들어 '정책 대안' '정책 개발'을 위한 씽크 탱크의 중요성을 말한다.결국 급변하는 자본주의 질서와 대중들의 정치사회의식 변화에 '긍정적인 방식'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반사이익만 얻는 시대는 지났다는 점은 민주노동당의 지지율 하락이 반증하고 있다.

김정훈 교수는 민주화 세대가 대중 교육과 재생산 과정에 소홀했다고 지적했다.현재 진보정당이나 시민사회단체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30,40대들이다.20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공급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조선일보가 30,40대 고립론을 펼쳤던 것도 이런 정세파악에 근거한다.즉 20대의 보수와 50,60대의 보수가 만나면 386 좌파세력을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20대의 정치의식에 대해 20대를 떠난지 오래되서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그러나 간혹 만나는 또는 간접경험을 통해 얻는 정치의식은 과거 세대에 비해 치열하지 못하다는 것은 알 수 있다.아니 좀 못되게 이야기하면 '정치의식이 없다' 가 정답이다.경제난과 대규모 청년실업은 젊은이들을 '자기 생존의 경제법칙'에 종속되게 만들었다.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그들의 정치 무관심에 돌을 던질 수 만은 없다.또 그나마 정치적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그 토대가 연약하기 그지 없다.내가 관심이 가는 쪽은 후자이다.그들은 반공이데올로기로 부터 조금 더 자유로왔다.또 청년들의 기본적 저항의식이 내재화되어 있다.이것이 가끔은 정치적 움직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미군 장갑차 사건등에 대한 촛불 시위같은 것들이다.그러나 20대의 정치의식은 성긴 그물같다.꾹꾹 눌러담을 근기가 필요하다.성긴 진보의식은 감상적이며 즉자적 저항일 뿐이다.또한 쉽게 기존 체제의 공격에 포섭당한다.이런 20대는 아주 쉽게 3,40대가 되며 아주 쉽게 자신이 욕하던 기득권이 되어 같은 말을 내뱉는다.

나는 20대의 정치의식 부재가 사실 현장성의 부족이라고 생각한다.(내 개인적 편견이다) 일을 하다보면 간혹 똑똑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사회현상에도 남달리 관심이 많고 또 나름대로 독서량도 있다.생각도 바른 듯 보인다.그런데 문제는 그들에게 진보는 늘 책이고 분석이고 논리적 싸움일 뿐이다.(물론 학자들에게는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과  이론공급을 위해서 이 버려도 될 것들이 필요하다.이런 것들을 많이 아는 것은 또한 의식을 촘촘히 하는 과정이기도 한다.)그러나 이 버려도 될  3가지 외에 다른 것은?.... 다른 것은?

10권의 책보다 한번의 시위 참여가 더 배울 것이 많다는 선배의 꼬드김은 언제나 사실이었다.시위를 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사람을 통해 배우고 사람을 통해 두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인 '현장성'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그 과정은 지난하고 실망스럽고 때론 짜증난다.사람들 때문에 정치적 옮바름도 싫어질 때도 있다.그런데 이게 의식을 튼튼하게 만들고 이론의 틈새를 메꾸고 몸을 바르게 하는 것 아닌가 싶다.흔히 말하는 강철을 단단하게 하는 '풀무질'은 그런게 아닌가? 이런 두드리는 과정이 없으면 현재의 진보는 진보도 아니다..아무런 행동도 없으면서-스스로도 돌아보자- '미제' '반자본' '진보'를 '논리'로 두드려봐야 아무 소용없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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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1-31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침에 저 기사 인터넷으로 보고 황망해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
민노당뿐만 아니라 전교조도 마찬가지죠. 열심히들 살아왔지만 전교조 죽이기의 악플 앞에서 대안 세력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망스럽고 짜증나는 현실과, 논리로 두들겨도 소용없는 세상은 개인을 달팽이집 속으로 쏙, 들어가고 싶게 만듭니다.
홍세화 씨 말대로 '못된 선배' 만나서 운동을 알았는데, 이제 '못된 후배' 때문에 달팽이집으로 숨지도 못하게 생겼군요. ㅋㅋ
글이 서늘해서 좋습니다.^^

드팀전 2007-01-31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황망하지는 않았습니다.민주노동당 역시 진보세력 위기에 일조했으니까 환골탈태를 위한 자성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로보트 태권브이도 돌아오니까...비판을 통해 성장해야겠지요.

바라 2007-01-31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확실히 차악이나마 택하려는 '공포의 정치' 앞에서 과연 어떤 걸 할 수 있을지는 참 많은 고민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예전에 04년도 초인가 쯤에 한창 탄핵이랑 파병으로 나라가 시끄러울 때 국민발의, 국민소환제 이런 운동도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이번엔 어떨런지...
 

옛날의 당(黨)에는 군자도 있고 소인도 있었다. 그 때에는 소인과 군자를 구분하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지금의 당에는 군자도, 소인도 없다. 오직 자기 편이면 등용하고 남의 편이면 등용하길 꺼릴 뿐이다. 이들의 마음씀이 군자답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사람의 성품은 모두 다르지 않으니, 마치 미인을 좋아하고 악취를 싫어하는 것과 같다. 시비를 가리는데 있어서도 옳은 것은 누구나 다 옳다고 여기고, 그른 것은 누구나 그른다고 여긴다. 그런데 지금은 이쪽, 저쪽으로 나뉘어 서로 원수처럼 여기고 있으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사(私)가 공(公)을 이기고, 공이 멸하고 사가 굳게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폐단이 심해지면 처음에는 그러려니 생각하다가, 마침내 그것을 세상 사는 도리라고 여겨 누구나 굳게 믿게 된다. 이런 곳에서 명예와 이익을 좇는 행위가 본래의 선량한 마음을 좀먹는 것은 물론이다.

-서당(西堂) 이덕수(李德壽:1673∼1744)의 ‘붕당론’(문집 ‘서당사재’에서)

경향신문 <옛 글의 숨결>에서 옮겨봤다...사가 공을 누르게 된 결과가 낳는 사회적 의미가 의미심장하여 다시 한번 읽어본다.

"사가 공을 이기고 공이 멸하고 사가 굳게 자리잡았기 때문이다.이러한 폐단이 심해지면 처음에는 그러려니 생각하다가,마침내 그것을 세상사는 도리라고 여겨 누구나 굳게 믿게 된다"

해방 이후 한국 역사가 현재 우리 사회 개개인에게 미치고 있는 영향을 예견한 글이 아닌가 싶다.일상에서 만나는 가장 큰 벽은 반성하지 않는 이성에서 나오는 '(이 글에 나오는)세상사는 도리에 대한 강한 믿음'이다.군사문화가 만들어 놓은 위계적 조직문화가 그것이며 개인을 인정하지 못하고 집단으로 호명하는 것이 그것이다.연대보다는 작은 틈새라도 먼저 치고 나가 사적 이익을 취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믿는 마음이 그것이다. '그러면 너만 바보 된다'가 그것이고 '그런다고 누가 널 알아 줄지 아냐'가 그것이다.또한 '그래봐야 소용없다.'와 '네 살 길 찾는데 신경쓰는게 낫다'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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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1-31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연 해방 이후에만 그럴까요? 모든 인간의 삶이 그랬던 것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식민 정책에 '이이제이'만 한 것이 없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삶치고 혼란기 아닌 시대는 없는 셈이죠. 그래서 공자에 썰에 대하여 노자는 그렇게 냉소적이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투지 말라고 하면서요...

드팀전 2007-01-31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요.언제나 그래왔습니다....제가 이 글을 쓴 것은 붕당의 폐해라는 구체적 상황에 대한 이덕수의 인식을 소중히 여겨서입니다.또한 해방 이후라고 말한 것도 '구체성'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그런 거랍니다.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
마하트마 K. 간디 지음, 김태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라는 작게 만들고 백성의 수는 줄이며 필요한 물건은 십여가지로만 한다......이웃나라가 서로 바라보이고 닭과 개 짖는 소리가 들려도 사람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오가지 않는다."   

  노자 도덕경 중 80장 <소국과민> 중에서

간디의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를 읽으며 노자 도덕경의 한 구절이 떠오르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다.이 책은  <녹색평론>사가 표방하는 '인문학적  생태주의'의 고향과도 같은 책이다.<녹색평론>의 생태주의는 주류 환경운동의 철학과 다르다.거칠게 말하자면 주류 환경운동이 산업사회라는 토대를 인정한 상태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면 <녹색평론>의 생태주의는 산업사회에 대한 안티테제를 철학의 기반으로 한다.즉 산업주의에 대한 부정적 성찰이 생태주의의 출발점이다.<녹색평론>의 생태주의를 견인하는 철학은 노장사상,간디의 비폭력 자치주의,아나키즘적 공동체주의,북미 인디언들의 자연주의 등이다.

간디의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는 단적으로 현재 <녹색평론>식 생태주의의  성찰의 계보적 근원에 속한다.간디는 단순한 인도 독립의 아버지가 아니다.그의 적은 조국 인도를 강점하고 있는 제국주의였다.그러나 근원적인 적은 더 깊은 곳에 있었다.그의 진정한 적은 제국주의를 움직이는 '산업사회'였다.자본주의적 산업사회는 반자연성과 반생명성을 특징으로 한다.간디의 이상주의는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생명을 착취하고 인간을 속박하는 현 시스템의 전복을 목표로 한다.간디는 이러한 정치적 이상주의의 맹아를 '마을'이라는 전통사회의 작은 공동체에서 찾고 있다.인도의 70만 마을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거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간디의 마을 공동체론은 누가보더라고 이상주의적이다.간디가 살아있던 시점에도 그는 이런 비판에 직면했다.이에 대한 간디의 답변은 소박하지만 인간 간디의 한계를 직시한다면 수긍이 간다.그는 말한다.

"나는 그 일이 인도를 이상적인 나라로 만드는 것 만큼 어렵다는 것을 안다.그러나 만일 누가 하나의 이상적인 마을을 만들 수 있다면,그는 온 나라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어쩌면 온 세계를 위한 모범을 제공한 것이 될 것이다.구도자는 이 이상의 것을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답변 또한 이상주의의 외피를 벗진 못했다.그러나 나는 이 문제에 대한 간디의 소박한 진정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거시 기획'을 가지고 '미시 기획'을 비판하는 것 역시 '미시 기획'을 가지고 '거시 기획'이 가능하다고 믿는 관념성 만큼이나 폭력적이기 때문이다.<간디의 물레>에서 김종철 교수 역시 자신의 작업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치 않는다고 했다.타이타닉형 산업주의 시스템에서 생태주의가 구성원들의 자성과 새로운 대안을 고민할 수 있다는 길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한다.(생태주의에 대한 나의 입장은 이 도상에 있다.)

간디의 마을 공동체를 움직이는 정신은 '비폭력 자급자족'이다.간디의 물레는 자치와 자립,비폭력 사상의 상징이다.물레에 대한 간디의 강한 믿음은 책 곳곳이 등장한다.

실잣는 물레는 상업적 전쟁의 상징이 아니라 상업적 평화의 상징이다....실잣는 물레를 건전한 마을 생활을 일으켜 세우는 기초로 만들것이다.나는 물레 바퀴를 모든 활동의 중심으로 만들 것이다...비폭력을 이상으로 추구하려면 물레를 그 진정한 형상이며 상징으로 인정하고 늘 보이는 곳에 두어야 한다.나는 비폭력을 생각할 때마다 물레의 모습이 떠오른다.

실잣는 물레는 미국을 위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가?그것이 핵폭탄에 맞서는 무기가 될 수 있는가?

나는 그것이 미국과 전세계를 위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고 느낀다.나는 인도와 세계를 구하는 길이 물레에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간디는 기본적으로 농촌 공동체의 전통사회를 반산업주의의 한 형태로 염두에 둔다.이 공동체의 경제적 토대는 수공예이다.대표적으로 물레가 그 상징이다.실 잣는 작업을 통해 개인과 마을은 경제적 자립이 가능하다.또한 기계가 말살하고 있는 노동의 가치에 대해서도 복원한다.간디가 고립된 자치만을 염두에 두지는 않는다.그러나 과도한 잉여가치를 생산하여 이윤을 남기는 것에 긍정적이지도 않다.그렇게 된다면 산업사회의 방향과 무엇이 다르겠는가.간디의 기본철학은 인간이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음식,최소한의 의복,최소한의 재산만을 허한다.더 많은 풍요로움과 소비를 위해 인간과 세계를 피폐화 시키는 산업사회 철학에 대척점에 서있다.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에서 인상적인 것은 간디의 철학과 실천이 무척이나 구체적이라는 것이다.간디는 공동체 마을을 구성하는 방식,자연치료에 대한 임상 경험,마을 교육에 대한 방식,마을 일꾼들의 선발에 대한 기준,지주들의 재산에 대한 처분 방식등에 대해 말한다.이상주의적 철학을 현실에서 어떻게 재현해 낼 것인가가 간디의 가장 치열한 고민이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간디의 철학은 이상적이나 결코 관념적이지 않다.내게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이것이다.자신의 물적 토대가 가져다 주는 한가로움을 관념을 통해 풀어내는 현대 도시인들이 가장 본받아야 할 부분이 이 지점이 아닌가 싶다.간디는 '몸'과 '노동'의 중요성에 대해 수십번을 강조한다.지적 노동이라는 것 역시 육체 노동의 하위 개념이라고 그는 말한다.지적 노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결국 진정한 노동은 자기의 손과 발을 이용하는 것이고 그 존엄성에 대해 깨닫는 것이다.

간디의 정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지 간디가 가진 반자본주의적 정신,반산업적 정신,공동체 정신을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다.간디의 정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노동의 신성함' '몸의 생명성' '실천의 진정성''이웃에 대한 희생'을 받아 들인다는 것이다.

간디는 말한다.

"당신 자신에서부터 시작하고 당신이 제일 하기 쉬운일을 처음에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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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1-29 19:58   좋아요 0 | URL
노동의 신성함, 몸의 생명성, 실천의 진정성, 희생심... 생각할 수 있는 과제와
좋은 책 소개, 고맙습니다.^^ 물레 앞에 앉아 실을 잣는 간디 사진을 떠올립니다.
실천의 진정성!

달팽이 2007-01-29 21:05   좋아요 0 | URL
"나 자신에서부터 시작하고 내가 제일 하기 쉬운 일을 처음에 하라"라고 들립니다.
책꽃이에 꽃혀 있는데...손짓합니다. 들어달라고..

드팀전 2007-01-30 09:23   좋아요 0 | URL
배혜경님>결국 손발이 중심이다..그런 말이지요.누군가 그랬다더군요.세상에서 가장 먼길이 머리부터 가슴까지의 길이라고...그런데 그건 잘못된 표현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세상에서 가장 먼길은 머리부터 손까지의 길이지요.
달팽이님>간디의 이야기가 그거죠...^^ 재미있군요.저는 애써 '서술어'(동사는 영문법이랍니다.^^생각해보니 그렇네요.^^)에 밑줄을 그었는데 님은 애써 '주어'에 밑줄을 그으시는군요.^^ 간디 역시 개인의 각성을 무엇보다 중요시 여깁니다.간디의 이상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결국 도덕적으로 각성하고 남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개인이 무엇보다 핵심이니까요.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사람을 바꾸는게 가장 우선이고 근본이지요.(하지만 이걸 사회적 대안으로 삼는다는 것은 너무 근본적이거나 너무 소박하거나 또는 너무 원대하거나 너무 안이한게 아닐까 싶습니다.그 꿈은 그 꿈대로 또 다른 꿈은 또 다른 꿈으로)

글샘 2007-01-30 04:42   좋아요 0 | URL
음, 읽고 싶은 책이 또 한 권, 생겼습니다. 좋은 일이지요.
이 리뷰의 백미는... 사모님,의 명언이네요. 맨 위의 말. ㅋㅋ
그래서 '백수 - 일하지 않아 하얀 손'가 욕이 되나 봅니다. 실천은 하지 않고 대가리나 키운... 박지원의 허생전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글을 아는 자들을 골라 모조리 배에 태우면서, 이 섬에 화근을 없애야지.'... 가분수는 화근일 따름입니다. 손발이 뛰어야죠. 벼는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잖아요. ^^
그리고, 드팀전님. 주어-동사는 영문법이고, 우리말에선 주어-서술어가 옳다고 봅니다.^^

드팀전 2007-01-30 09:22   좋아요 0 | URL
아...그렇군요..^^ 바로 수정합니다.
 
불멸의 목소리 2 - 여성 성악가편
유형종 지음 / 시공사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나는 호모섹슈얼이다.이 무슨 충격적인 커밍 아웃이란 말인가? 드디어 드팀전도 청소년기부터 숨겨왔던 성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인가? 그렇다 이 자리는 솔직히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자리다.(기자들 다 불러모아..)나는 음악적으로 분명히 호모섹슈얼이다.내 CD 장을 뒤지고 학창 시절 듣던 LP음반을 찾아봐도 여자가수 이름 찾기 힘들다.아이들이 마돈나,신디 로퍼에 열광할 때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얼굴 예쁜 올리비아 뉴튼 존도 콧방귀를 꼇다.하물며 김완선이니 하수빈이니 하는 댄스하는 인형들이야 오죽했겠는가? 나의 음악적 정체성은 분명 '남성애호증'이다.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그냥 예전 부터 여자가수보다는 남자가수들의 다이나믹함,호소력들이 마음에 들었다.특히 학창시절 나의 고향인 '락'계는 '마초'들의 천국이었다.머리는 산발을 하고 온몸에 그림도 그리고 무대 위에선 괴성과 폭력이 난무했다.한마디로 그 세계에서는 '기집애'같은 가수는 조롱거리 밖에 되지 않았다.내 고향이 음악시 락구 여서 그랬는지 그 이후 꽤 어른이 될 때까지 여자 가수들에게 그다지 열광해본 적이 없었다.물론 지금이야 예전처럼 나의 성 정체성이 편벽된 것은 아니다.그러나 결론만 성급히 말하자면  나는 여자 가수들보다 남자 가수들의 목소리를 훨씬 좋아한다.

여자 가수들에게 그다지 큰 애정을 갖고 있지 않던 내게도 정말 혹하게 하는 가수가 몇 명은 있다.'내 마음대로 뽑은 3명의 디바'라고나 할까? '빌리 홀리데이-메르세데스 소사-마리아 칼라스' 이렇게 세 여인이다. 음악 외적으로 이들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굴곡 심한 인생이 비슷할 것이다.홀리데이는 창녀 출신에 흑백차별이 심한 시대의 여성흑인이었다.칼라스는 미운 오리새끼에서 화려한 성공,세기의 스캔들과 비참한 몰락,소사는 정치적 이유로 오랜 시간 외국 망명객의 신세였다.음악적으로는 다른 장르에 있었으면서도 공통점이 있다.이들의 목소리는 예쁘지 않다는 것이다.빌리 홀리데이의 목소리는 엘라피츠제랄드의 날아갈 듯 한 스캣에 비하면 막걸리통 흔드는 소리다.마리아 칼라스는 가끔 듣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답답한 느낌을 준다.대신 이들의 강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음악적 호소력'이다.자신의 곡을 부른 가수들보다 훨씬 더 곡의 느낌을 살려주는 메르세데스 소사.Gracias a la vida를 부르는 그녀의 음성은 원곡자인 비올레타 파라보다 깊이 숙성된 맛을 준다.그녀가 불렀던 유팡키의 노래곡집들도  숲에 들어가 초록을 부풀리고온 바람처럼 풍요롭다.이 세명의 가수들 중에서 음반이라는 매체적 제약으로 인해 가장 손해보는 사람은 사실 마리아 칼라스이다.그녀가 종사했던 장르가 오페라이다 보니 그녀를 무대에서 분리해서는 가치를 제대로 알기 어렵다.물론 홀리데이나 소사 같은 경우도 무대 위의 매력이 대단했을 것이다.손바닥만한 음반은 가늠키 어려운 라이브의 가치가 그것이다.이는 굳이 위의 가수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기에 길게 논하지 않겠다.

<불멸의 목소리2>는 아멜리타 갈리 쿠르치로부터 프레데리카 폰 슈타데까지 20세기 활약했던 여성 성악 25명을 다루고 있다.마리아 칼라스는 이중 활약시기로는 중간쯤에 해당한다.저자가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현역에서 뛰고 있는 사람들은 가급적 배제했기 때문에 최근 가수들의 행보를 만날 수는 없다.그나마 각 장의 끝부분에 안나 네트레브코,마리아 굴레기나,체칠리아 바르톨리 등을 언급하고 이 있는 것은 다행이다.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마리아 칼라스의 음색이 언제나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사실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이 있다.시원하고 매끄럽게 뽑아주는 가수들의 소리를 듣다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조안 서덜랜드의 리릭 콜로라투라를 듣다보면 머리카락이 쭈뼛하게 선다.(그녀의 딕션은 뭉게지지만..) 젊은 시절 레나타 스코트의 <라트라비아타>음반을 듣다보면 이렇게 가벼우면서도 시원하게 노래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리아 칼라스보다 어떨 때는 훨씬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몽세라 카바예는 어떤가? 그녀의 우람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메차 보체는 황홀하다.정말 작은 새와 같은 리자 델라 카사,루치아노 폽등의 가벼운 노래를 듣다보면 마리아 칼라스의 뻑뻑함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를 컴필레이션 음반으로 만나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그녀의 진가를 알려면 음반 하나를 통째로 들어봐야 한다.실연에서는 엄청 났을 카리스마를 직접 볼 수 없는 상황이 아쉬울 뿐이나 음반 전체를 듣다보면 그녀가 각 캐릭터를 얼마나 잘 소화해내고 있는 지 알 수 있다.

마리아 칼라스말고 내가 좋아하는 가수는 단연 몽세라 카바예이다.뚱뚱한 오페라 가수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쓰리 테너 중 한 사람인 호세 카레라스와 동향이다.카바예가 끌어주지 않았다면 호세 카레라스가 세계적인 무대에서 이름을 높이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물론 그의 실력이라면 어떻게든 눈에 들었겠지만 말이다.) 몽세라 카바예의 음반 중 이 책에도 소개되어 있는 <아이다>음반은 개인적으로도 최고의 아이다 음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리카르도 무티의 음반이 나오기 전에 최고의 음반이었던 카라얀반과 비교하면 흥미롭다.카라얀-레나타 테발디-카를로스 베르곤치-줄리에타 시묘나토-코닐 맥닐/무티-몽세라 카바예-플라시도 도밍고-피오렌차 코소토-피에로 카푸칠리. 진짜 오페라계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은 총동원된 캐스팅이다.마치 매직 존슨이 이끄는 80년대 NBA 올스타팀과 마이클 조던이 이끄는 90년대 NBA 올스타팀을 보는 듯 하다.개인적으로는 몽세라 카바예-피오렌차 코소토 라인업이 훨씬 예리하다고 생각한다.(마이클 조던과 스카티 피펜 같다.)

여성 성악가들을 살펴보다가 요즘 오페라계가 '대형가수'들은 사라지고 '비디오형 가수'들의 전성시대라는 류의 기사가 문득 떠올랐다.아무래도 DVD라는 매체가 확산되다보니 산업변동에 따른 극장계의 변화가 아닌가 싶다.대형 가수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쉽지만 비디오형 가수들이 등장하는 것에 그닥 큰 불만은 없다.오페라 팬들도 뚱뚱하고 나이든 <라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보다는 안젤라 게오르규같은 예쁜 비올레타를 볼 권리(?)가 있으니까 말이다.예전 만큼 다양한 목소리들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비디오형 가수라는 오페라가수들이 실력이 유난히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아직 보수적인 클래식계가 예쁘다고 다 봐줄 정도로 마음이 넓지는 않아보인다.전방위적인 대중문화의 공세 속에서 오페라를 뒤적이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생각해본다.그리고 좀 예쁘고 잘생인 오페라가수들이 나와서 인기를 얻고 오페라에 대한 관심도 좀 높여도 되지 않을까 하고 잠시 생각해본다. 

 여자 오페라 가수중 예쁜 3인방 뽑으면 누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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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1-28 19:02   좋아요 0 | URL
예술적 불륜의 짜릿한 일탈이군요. ㅋㅋ
님의 음악 리뷰를 읽노라면 음악의 세계에 빠지는 일도 아름다운 한 세상으로 들어가는 일일 듯 합니다.^^

kleinsusun 2007-01-28 19:55   좋아요 0 | URL
음하하...예전에 <카르멘> 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아무리 노래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숨쉴 때 마다 드레스가 터질 것 같은 뚱뚱한 여자가 카르멘을 연기하는 건 내용에 넘 안 어울리지 않나... ㅋㅋ

드팀전 2007-01-28 23:22   좋아요 0 | URL
글샘님>음악이 없었다면 세상이 얼마나 팍팍했을까요...대중가요든 오페라든..
수선님>아무래도 그런 경우 극적 몰입이 떨어지긴 하겠지요.^^ 그래서 어떨때는 음반이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시각은 청각에 비해 너무 직접적이어서 상상할수 있는 공간을 열어놓지 않으니까요.

2007-01-29 0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