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연히 회사 자료실에 가서 이번주 한겨레 21일 봤다.맨 마지막에 나오는 칼럼에 눈이 갔다.최근에 박근해 한나라당 전 대표를 볼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물론 나는 그녀를 보러 가지 않았다.다른 사람들처럼 그녀에게 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한겨레 21>의 칼럼은 한겨레고정 칼럼리스트 권김현영 동덕여대 강사의 글이었다.

권김현영은 지난 11월 10일 한겨레 신문 <야! 한국사회 '차라리 박근혜는 어떨까?>라는 글에 대한 반박 칼럼이었다.'차라리 박근혜'를 쓰신 분은 알라딘에서 유명한 분이다.(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170701.html )

논쟁의 핵심은 결국 '여성정치인'의 정치력 확보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이다.선거 때 마다 여성계 내부에서도 논란이 되곤 하는 주제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여성 정치 세력화가 미비한 나라에서 일단 여성 정치인들이 많아지는 것,또는 대통령이 되는 것이 선이다.>라는 것과 <여성의 정치 세력화를 산술적으로만 볼 수 없다,여성 정치인의 정치적 소신이나 이념에 따라야지 무조건 여자라고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이분법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선거때가 되면 여성 정치인들은 각종 여성 단체의 지지를 받기 위해 애쓴다.경상도 말로 하면 '우리(여성)이 남이가?' 라는 정서로 지지를 호소하는 것이다.하지만 일부 여성회에서는 후자의 논리를 따르기 때문에 지지 선언을 하지 않는다.그 여성단체 내에서도 물론 논쟁이 인다.

권김현영은 칼럼에서 '차라리 박근혜는 어떨까?'를 위험한 농담이라고 일축한다.그녀는 박근혜가 독일 보수파 방문을 통해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고 말한다.독일 보수파가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국가주의 등을 박정희 대통령의 애국애족주의와 브랜딩하는 것같다라고 지적한다.참고로 최근 언론은 박근혜의 정치적 스타일을 '유훈정치'라는 말로 비꼬고 있다.(비꼬는건 나쁜 거지만, 그녀는 정말 아버지 이야기를 언론에서 많이 한다.TV에서 여러번 봤을 정도다.) 권김현영은  몰개성적인 애국애족의  신념을 박근혜의 유일한 정치이념으로 파악한다.그녀는 애국애족이 이 시대에서는 누가/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야 하는 가라는 부분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특히 권김현영은 11/10일자 칼럼과 관련해서는 여성정치인을 단순히 SEX 의 차원에서-즉 유전자적 차원-으로만 구분하고 있다고 비판한다.어차피 (난 이말이 참 싫은데..즐겨쓰는 분들이 많다) 다음번 정권은 한나라당에게 넘어간다.그렇다면 압축되는 대권후보들은 다 보수주의자들이다.그렇다면 그나마 여성이 낫지 않겠나.그래야 여성정치세력화에 도움이라도 된다.이게 11/10 칼럼의 성결정론적 내용이다.성결정론의 관점으로만 보자면,당연히 여성 정치인은 한 편이고 그 타자는 남성정치인이 된다.이 논리를 좀 더 비약하면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과 한나라당 송영선 의원은 같은 카테고리에 들어간다.(도저히 결함이 안되는 상황인데 '성결정론'으로 파악하면 논리적으로는 맞다.둘다 같은 화장실을 쓰기 때문에) 권김현영은 '여성이니까 밀어줘야 된다'는 식의 주장은 '여성이기 때문에 안됀다'는 논리와 '인식론'적으로는 같은 지평에 있다고 반박 칼럼을 끝맺는다.인터넷으로 원문을 보려면 금요일까지 기다려야 한다. <한겨레 21 >인터넷 판은 금요일에 나온다.

조심스럽긴 하다.아는 분이 쓴 글이고 그 글이 논쟁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어쩌나? 나는 권김현영의 주장이 100% 옳다고 생각한다.한가지 더 보태자면...'정치'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한 번 해보게된다. 사람마다 정치에 대해서는 한마디씩 할 말이 있다.정치 담론의 과잉인데...아쉽게도 대개의 장삼이사들이 하는 정치 행위란게 지독히도 편협하고 소극적이다. 일반인들이 하는 정치 행위라는 것은 거의 '선거참여'가 대부분이다.그런데 불행히도 선거는 '객관식'이다. 4년마다 1-5번 까지 중에 하나 고르면서 TV로 결과 보고 나면 정치행위는 다 마친것이다.국민의 권리를 소중히 다했다고 믿으면서 들로 산으로 놀러가면 끝이다.그런데 나는 정치는 '주관식'이라고 생각한다.오늘 민노총 총파업,전교조 연가투쟁,전농 FTA반대 투쟁등도 다 '주관식정치 행위'다.물론 세상에는 언제나 정치를 객관식으로만 해온 사람들도 많다.객관식에 익숙해져 있으면 과거 일부 의원님들 처럼 '어차피 사표 되니까....우리를 찍어주세요.' 라는 말에 혹하기 쉽다. 내 친구 중에 하나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정치주관식론'을 편다.그는 평소에도 일상 생활에서 정치적 활동을 한다.그렇지만 그는 투표하러 가지 않는다.이유는 '대의제'가 가지고 있는 기만적 성격에 대해 분노하고 그의 신념을 표시하기 위해서이다.나는 그가 여러번 들어 봤을 의도적인 질문을 했다.'너처럼 진보정치에 뜻이 있는 사람이 투표하지 않으면...' (나는 사실 마음 속으로는 그의 신념을 이미 존중하고 있었다.단 테이블의 대화는 이어져야 하기에 하는 어쩌면 뻔한 질문이었다) 사실 이런 질문은 '어차피 안돼니까 우리 찍어'하는 것과 같은 지평이다.나는 그가 잠자기 위해서 또는 연애하기 바빠서 투표하지 않는 것임을 알기에 그의 신념을 100% 존중한다.그는 그런 방식으로 또다른 길들을 알리고 고민해보게끔 하는 것이다.어쨋거나 그에게 정치는 '100% 주관식'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객관식'의 논리는 편안하고 접근하기 쉽다.그럴싸 해보이기도 한다.바로 그 지점을 잘 살펴봐야 한다.늘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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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6-11-22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지난 주말에 그 문제 가지고 친구놈과 서로 투덜댔는데, 여기서 다시 보게 되네요. ㅎㅎ 정황 이해하는 측면에서 '오죽했으면...'이라고 말 해 주는 것 까지가, 매우 구차한 박근혜 지지에 대한 제 생각입니다. =)

드팀전 2006-11-22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전후 상황을 아니까 "오죽했으면--" 그래서 박근혜씨를 지지한다는 이야기인지? 아님..전후 상황을 아니까 '오죽했으면"하고 인정에 칼럼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다는 건지? 독해력이 떨어졌나 봅니다.
저는 박근혜를 지지하던 이명박을 지지하던.. 그건 관심없습니다.
저런 류의 논리가 어떻게 활용되는지에는 대신 무척 관심이 무척 많습니다.대중매체의 영향력을 생각해볼때 우리땅 어느 술자리에선 그 칼럼의 논지가 자신의 주장의 근거가 되어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할 겁니다."야..오늘 한겨레 칼럼에서 봤는데...모대학 교수가 쓴거야....여자니까 박근혜를 ...근거있지않냐?"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떤 정치적 의견을 갖는지는 관여할 바가 아니지요.단 제 상식은 아니라는 정도는 말해도 괜찮겠지요.(그건 저의 정치적 견해 표명이니까)

mannerist 2006-11-23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겁니다. '오죽하면 여자란 이유 하나만으로 박근혜따위를 지지할 생각을 할까'까지만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자질에 상관없이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치적 행위의 주체의 여성스러움을 동일시하는건 대책없는 낙관일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그말대로라면 치마만 두른다면 히틀러도 찍어주겠네'로 받아치다 쫌 험악한 말이 오고갔습니다만. ㅎㅎ
 

몇 년전에 가끔 하던 바보 같은 짓 중에 하나가 '옥상 난간 걷기'였다.회사 옥상은 5층이다.그 앞에는 허리 높이의 바리케이트가 있다.그리고 난간이 하나 있다.난간의 폭은 내 손바닥으로 한뼘과 2/3 정도....노트북의 가로길이보다 조금 넓다.나는 가끔 그 난간 위를 걸었다.앞뒤로 약 10미터의 거리를 왔다 갔다 했다.떨어지면 죽거나 아니면 중상이 확실했다.그런데 바람 부는 겨울날 몹시 답답한 마음을 달래는데는 최고의 놀이(?)였다.난간에 올라서는 순간,심장이 1/3은 오그라 붙는다.가슴이 꽉 옥져여 옴을 느끼면서 심장 펌프질 소리가 청진기 댄 것 처럼 생생하게 들린다.한 발 짝 옮겨 놓는것이 가장 큰 관건이다.그렇게 한 두 발짝 앞으로 나아가면 조금 씩 보폭이 커지게 된다.그리고 옥상의 가로축과 세로축이 만나는 지점에서는 새롭게 집중해야 한다.그 코너를 도는게 '옥상 난간 걷기'의 핵심이며 최고 난이도를 선보이는 곳이다.보폭은 줄여야하고 잠시 잊었던 심장 소리가 다시 쿵쿵 거리며 들려 온다.조심 조심 최대한 집중하면서 우회전하면 세로축으로 접어들수 있다.다시 조심조심 보폭을 넓힌다.

사실 '자살 미수'같은 이 짓을 하면서 내 딴에 안전에 대한 과학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것은 아니다.옥상 난간의 폭은 회사 복도 바닥에 있는 타일의 폭과 동일했다.복도는 대개 직사각형 타일이 몇 장 씩 이어 붙여져 있다.나는 '옥상 난간 걷기'를 행하기전 복도의 넓이를 재어봤다.그리고 1줄로 된 직사각형 타일의 금을 밟지 않으며 걸어봤다.대략 두뼘 모자라는 폭이기 때문에 금을 밟을 이유가 전혀 없다.그런데 '옥상 난간'은  같은 폭이지만 두려웠다.

젊은 시절의 치기 어림은 그게 웃겼다.똑같은 폭인데 맨 땅에서는 금 하나 안밟고 중심도 잃지않으며 걸으면서 밑에 아무것도 없다고 그 폭을 걷지 못한다는게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몇 번을 확인해 봤지만 그 폭은 똑같았다.

겨울이어서 공기도 답답하고 마음도 답답했던 어느날,나는 처음으로 그 난간에 올라 걸었다.같은 폭이라는 생각을 되뇌였다.약간 정신 나간 짓이긴 했다.그래도 나는 내가 그 똑같은 폭을 똑같은 느낌으로 대할 수 있기를 바랬다.그리고 마음 속의 심란함도 그와 같은 것이기를 바랬다.

옥상 걷기를 마칠 때도 주의를 해야 한다.잘못 뛰면 잘 걸어놓고 바리케이드에 걸려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왜 그런거 있지 않은가? 무거운 이삿짐 잘 날라 놓고 동전 주우려다 허리 삐뜻해서 병원신세 짓는거. 옥상 난간이라는 비일상적 공간을 걷고 나면 심장이 묶여 있던 피를 한꺼번에 쏱는 듯 가슴 속에 뭔가 확 밀려온다.그다지 좋은 느낌이라고 할 수는 없다.오히려 옥상 난간 위에서 보다 심장이 더 벌컥거린다.

그런데 왜 이런짓을 햇을까? ..... 폭이 같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그냥 젊은 날에 뭔가 답답했었나보다.세상 사람들의 시각으로 보면 그닥 젊은 나이도 아니었을 수 있다.30살 넘었을 때니까...

오늘 우연히 회사 옥상 난간에 섰다.난간 걷기를 할 때처럼 겨울 바람이 가슴 속을 뚫고 지나가는 느낌에서 였다.그렇지만 난간 걷기를 하지는 않았다.

무서워 보였다.그걸 어떻게 했나 싶다.....역시 가진게 늘어날 수록 몸과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맞는 말이다.

여전히 복도의 폭과 난간의 폭은 같다.나의 실험은 이제 다른 형태를 띄어야 함을 생각하며 옥상 난간 위를 걷던 몇 년전의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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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春) 2006-11-20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간이 사방으로 둘러 있나 보군요. 아~ 읽고만 있는데도 발가락이 순간적으로 오무려져요. 그래도 님처럼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클리오 2006-11-20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읽기만 해도 오싹해집니다. 아무래도 전, 몰랐던 고소공포증이 있나봅니다.

드팀전 2006-11-20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성년자 절대 따라하지 마세요.^^ 떨어지면 죽거나 중상 확실합니다
 
청중의 탄생 - 청중의 자리에서 본 클래식 신화의 탄생과 해체
와타나베 히로시 지음, 윤대석 옮김 / 강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음악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어렵다.예술의 장르 중에서 가장 형이상학과 가까운 것이 음악이다. 미학자들 중에는 음악을 가장 순수한 형태의 예술 장르라고 일컫는 사람들도 있다.음악은 기호들의 내적 관계이며 그 음표들의 연관이 음악의 형식이 된다.이러한 일렬의 기호들의 관계가 인간에서 정서적 경험을 불러 일으킨다.또한 그 음들이 축적된 인간정신의 한 부분을 표현하는 것이다.음악 자체를 언어로 표현해내는 것은 어려울지 모르지만 음악을 둘러싼 사회상을 살펴보는 것은 그것보다 수월할 지 모른다.

일본에 포스트 모던 열풍이 불었던 1980년대 중반 <청중의 탄생>이 소개되었다.책은 음악 수용자들의 변용을 중심으로 살펴본 음악 사회사라고 할 수 있다.거칠게 말하자면 저자는 음악 수용사를 세 단계로 구분한다.전 근대,근대,그리고 탈근대이다.와타나베 히로시는 각 시대 구분에 조응하는 예를 찾는다.먼저 전근대와 근대로의 전환기로 19세기의 예를 든다.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클래식 음악의 수용형태가 결정된 시기이다.다음으로 기술 혁신의 시대인 1920년대 미국.이 시기는 19세기 안착된 음악계가 기술 문명의 변화에 맞추어 변화를 시도하던 시기이다.마지막으로 1980년대 일본의 음악계가 탈근대화한 수용자들의 예로 제시된다.저자는 책의 서문과 증보판 후기를 통해 이러한 시대 구분과 지역적 특수성을 무시한 배열이 인위적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독자의 이해를 구한다.구 대륙과 신 대륙의 사회경제적 발전 단계,구성원들의 계급적 성취단계,각 국가별 독자적 문화 수용의 부분이 무시된 부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에 대한 저자의 사전 양해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친 비교는 클래식 음악 수용자가 클래식 음악계의 판도를 어떻게 바꾸어 왔는지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이 책이 음악팬들이나 예술 애호가들에게 유의미하게 읽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클래식 음악 공연장을 생각해보자.대개 몇 가지 이미지가 떠오른다.높은 지붕,스팟 조명,조심스러운 기침소리,눈을 감고 곡에 심취한 음악팬.....와타나베 히로시는 이러한 클래식 청취의 스테레오타입화가 19세기 부르주아 계층의 등장과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바흐나 하이든,모차르트 시대는 음악회가 지금처럼 '진지한 감상의 공간'이 아니라 '사교의 장'이었다.당시 음악 소비자는 명확하다.곡을 의뢰하고 음악가의 패트런이 되어준 귀족층과 그의 친구들이다.음악가들은 도자기나 장식품을 만드는 도공처럼 음악을 작곡하고 그들을 위해 공연했다.거기에는 현재 너무나도 당연히 되는 '작품의 통일성'이라는 개념은 희박했다.저자는 그 예로 모차르트의 공연 팜플랫을 든다.공연 목록을 보면 교향곡이 한번에 연주되지 않는다.1악장이 연주되고 다른 타펠뮤직(식탁음악)들이 들어간다.그리고 공연 마지막쯤되서 다른 악장이 연주된다.음악 수용 태도는 '사교의 장'에 걸맞게 시끌벅적하다.물론 그 중에는 진지한 관객들도 있었을 것이고 그들을 위한 차분한 음악회도 있었을 것이다.영화 <아마데우스>에서도 이러한 두 종류의 공연장 모습이 연출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이러한 음악계의 풍토는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오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고착되게 된다.우선 음악 소비층의 변화가 그 원인이다.특수제작을 요구하던 귀족층에서 일반상품을 구매하는 부르조아지가 음악계의 중심 세력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흔히들 베토벤을 작가 내부적 자율성에 의해 창작하는 예술가의 첫번째 세대로 기억한다.이러한 사회적 변화와 관련있다.또 다른 하나는 음악계내의 '예술로서 음악'에 대한 정착 노력이다.18세기 미의 원리로 가장 중요시되었던 것은 '감성'과 '정신'의 종합이었다.예술가들은 예술이 감성과 정신이라는 모순된 영역의 조정자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불행하게도 음악은 다른 장르에 비해 '정신성'이 낮은 것으로 평가 받았다.음악은 '감각'의 영역이지 고도의 정신성을 담보한 장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18세기의 음악 소비형태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판단은 자연스럽다.그저 귀족들의 식사 시간 배경음악이 어떻게 정신성을 갖춘 '예술'로 대접받을 수 있겠는가.저자는 슈폰호이어의 주장을 인용하여 '음악'의 예술로의 편입을 위한 인정투쟁을 설명한다.슈폰호이어는 미학이 음악에 부여한 좋지 못한 평가를 불식하고 자기정당화를 도모하기 위한 전술로서 음악미학이 이러한 요구에 맞지 않는 음악을 '저급'이라고 떨쳐버리는 방식을 취했다고 본다.즉 산만한 청취,식탁음악,감각성에만의 의존등을 배제하므로써 음악이 예술로 편입되는 방식이다.이제 음악은 '진지한 음악' '정신성 있는 예술'로 바뀌었다.연주회에서 떠들거나 개를 데리고 오는 짓은 무식한 비교육층이 하는 짓이 되었다.세이퍼는 이를 '진지한 청취'라고 말한다.19세기에 정착된 이러한 '진지한 청취'는 현재까지 클래식 공연의 가장 규범적인 청취방식으로,전통으로 자리잡았다.19세기의 진지한 음악가와 음악팬들은 굳히기 작업이 필요했다.그들은 리스트류의 비르투오조에 대해 비판하며 고전 작곡가들을 신화화 해나가기 시작한다.즉 연주자의 비르투오시티는 감각적인 열광일 뿐이며 진짜 음악은 바흐,베토벤등 정신적 영역을 담보하고 있는 거장들에게 있다는 것이다.'신에 헌신하는 바흐' '불굴의 인간의지 베토벤' '가난하지만 청순한 모차르트' 등의 이미지들이 19세기에 만들어진다.이 이미지 역시 이후 역사적 검증과 논쟁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유효하다.결론적으로 '저급음악의 배제,진지한 청취,고전 거장들에 대한 신화화,연주회 윤리의 확립' 등을 통해 비로소 '근대적 청중'이 만들어진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 19세기에 안착된 근대적 청중의 모습에 동요가 일어난다.근본적인 원인은 '기술문명'의 발전과 자본주의 광고의 '이미지화'작업 때문이다.저자는 음악관련 기술 발전의 예로 '자동피아노'를 든다.자동 피아노는 피아노롤에 펀칭을 해서 연주자 없이 피아노를 재생하는 장치이다.요즘도 아이들 장난감으로 이와 유사한 것들이 있다.손잡이를 돌리면 펀칭된 골을 따라서 예쁜 멜로디가 나오고 그 위에 인형이 빙글빙글 도는 형태인....이 책에 등장하는 자동피아노는 실제 연주자들의 연주를 피아노 롤로 저장하는 것들도 있다.고도프스키,모이세비치 같은 연주자들도 이 자동 피아노에 녹음하기도 했다.저자는 자동피아노의 발달로 청취 형태의 변화가 공연장에서 일반 가정으로 바뀌어 가는 점에 주목한다.물론 1920년대의 상업주의 광고가 만들어준 '풍요로운 가정'이미지도 주요했다.이 시점에서 기업의 상업주의와 클래식 음악계가 손을 잡게된다.음악을 둘러싼 정치,경제학적 변화는 당연히 수용방식의 변화를 이끌어낸다.우선 예술 체험의 일회성이 사라지면서 -즉 아우라의 상실-공연 공간과 일상이 뒤섞이게 된다.이 현상을 현재로 끌어올리면 거장의 연주를 CD라는 복제기술을 이용해서 아침에 이닦으면서도 들을 수 있게 된 것을 말한다.여기에 '음악의 정신성'에 대한 반격이 시작된다.음악의 정신성은 다른말로 하면 음악이 가진 정신적 영역에 대한 표현성이다.이 '표현성'에 대한 공격은 현대의 '미니멀음악''환경음악'과 같은 종류의 음악을 만들어낸다.이 책에서는 1920년대 전위음악가들이 시도하던 '표현성'에 대한 소거를 에릭 사티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이는 19세기에 음악전문가들에게 강제로 배제된 '음악의 감각성''음악의 사회성'에 대한 복원으로 볼 수도 있다.

이제 와타나베 히로시의 이야기는 일본의 현재(1980년대)까지 오게 된다.저자는 이 시기를 포스트모던한 음악 수용자들의 도래기로 파악한다.일단 청중의 형태를 '분중'이라는 말로 정리한다.즉 '나누어진 청중'이라는 것이다.수용자의 분중화 현상으로 우선 '음악의 카탈로그화' 가 지적된다.과거 바흐,베토벤 등에 한정된 음악목록이 대폭 넓어진다.이 책에서는 베토벤의 연주 횟수와 말러 연주 횟수를 비교한다.이는 거장을 한축으로 햇던 클래식음악계의 변화로 받아들여진다.구심적인 음악 소비구조가 증식하여 원심적인 상황으로 바뀌는 것이다..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음반가게 카탈로그를 한번만 둘러 봐도 금새 알 수 있다. 바흐-베토벤 사이에 얼마나 많은 작곡가들이 있는지 쇼팽과 라흐마니노프 사이에 또 얼마나 이름도 낯선 작곡가들이 있는지.현대의 음악가와 팬들은 이렇게 사이 사이에 있는 작곡가들의 음악을 연주하고 소비한다.이 책에서 거론했던 말러는 음악팬들 사이에서는 자주 찾는 거장의 반열에 올라 있다.저자는 '카탈로그화'현상이 학자적 발상이 대중화된 것이라고 말한다.즉 '전국민의 음악학자화'라는 것이다.학문적 지식의 대중화는 사실 음악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교육 수준의 확산과 정보매체의 다양화는 일반인들에게 전문가적 안목 내지는 그와 유사해지고픈 심리는 붇돋았다.그러나 저자는 음악계에서 이러한 현상이 상업주의와 결합되며 선정적인 방향으로 흘렀다고 조심스럽게 지적한다.현대의 음악팬들은 상업주의와 결함된 '차이'를 소비하는 것이다.리프킨의 바흐 합창인원 논쟁이나 모차르트 교향곡 발견 같은 예들은 음반 판매 마케팅과 오버랩되기 때문에 그런 지적을 피할 수 없어보인다.저자는 포스트 모던 시대의 청취층의 변화 양상으로 '부닌현상'과 '9번교향곡열풍'을 들고 있다.부닌은 쇼팽콩쿠르 우승자로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인기가 높았다.일본에서는 이례적인 성공을 거두었나보다.저자가 보기에 이것은 19세기 배제된 '비르투오조'에 대한 -다른 의미에서는 '진지성'에 대응하는 '오락성'의-복원으로 바라본다.베토벤 9번 교향곡을 일반인들이 일본어로 음차하여 합창단에 참가하는 현상 역시 '대중의 저변확대'라 바라보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와타나베 히로시는 결론에서 '대중의 경박화 '를 포스트 모던 사회의 긍정적인 특징으로 설명한다.'진지함'에 갇혀 버린 음악의 한 쪽 날개를 펼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말러 음악에 현대 관객들이 열광하는 이유도 그때문이다.말러 음악의 난해함과 들쭉날쭉한 비통일성은 다양한 음의 이미지를 쫓는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것이다.사티의 음악도 마찬가지로 '전체에서 세부로의 관심'이라는 포스트 모던한 시대상에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근대 사회는 음악 예술을 일상으로부터 분리시켰다.그러나 포스트 모던한 시대에 관객들은 예술과 오락에 대해 그동안 확립되어온 틀을 무너뜨리고 있다.그들은 이것들을 다시 '일상생활'로 끌어들이고 있다.저자의 결론은 근대의 '의지''이성'에 포박된 음악을 풀어해치는 탈근대적 정신을 옹호하고 있다.

저자도 증보판 후기등에서 밝혔던이 이 책 <청중의 탄생> 첫 판이 나온 것은 20년 전이다.일본의 포스트모던 열풍도 가라앉았다.물론 한국 역시 비슷한 행보를 보인고 있다.저자는 증보판에서 책을 집필할 당시와 그 이후의 변화에 대해서도 쓰고 있다.이 책의 아킬레스건과도 같은 시대적 삼분법과 그에 대한 반성이 주를 이룬다.저자의 변화된 관점은 각 시대가 이후 시대의 맹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으로 수렴된다.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근대라는 프로젝트 역시 허구가 아닐까 의심한다.근대라는 것은 공론의 장에서만 있어왔던 것이고 모든 문화 현상이라는 것이 굳이 표현하자면 포스트모던 한 것이 아닐까 하는데 까지 생각이 이어진다.저자는 이런 말로 결론 짓는다.

진정한 '역사적 사실'따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각각의 시대마다 다르게 이해된 '사실'이 있을뿐이며 그러한 '사실'이 시대 속에서 다양하게 변화하면서 문화를 형성해왔다고 생각하는 편이 이치에 맞다.

근대의 '신화화'와 포스트 모던의 '탈신화화' 작업에 대한 저자의 절충적이며 설득력있는 조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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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6-11-20 20:38   좋아요 0 | URL
오....이 리뷰는 음악 잡지에 칼럼으로 실려야 할 것 같아요!^^

2006-11-20 2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톰 2007-01-16 16:19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
 


약 한달 보름전 예찬이 백일 파티때 찍은 사진.....이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예찬이 피부.그러나 며칠후 얼굴이 빨간 토마토가 되기 시작했다.그 유명한 아토피....ㅜㅜ  그래도 요즘은 조금 가라앉아서 이렇게 글쓴 정도로 자신감도 생기지만 아토피가 심했을 경우에는 정신없었다.아주 심한 아이들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다만 그래도 익히 알고 있는 아토피의 심각함때문에 증상보다 더 겁을 먹었던게 사실이다.

가끔 퇴근하고 들어와서 아이에게 '아토베이비'"불타는 고무마'라고 우스게 소리를 한다.안된 마음이 큰데 울적한 말을 할 수는 없고 해서 우스개소리로 그런 마음을 달랜다.병과 함께 즐겁게 지내고자 하는 얄팍한 마음도 한 조각 있다.아토피는 원래 장기간의 치료가 필요하기 때문에 일희일비해서는 안된다.그래서 좀 편안하게 마음먹고자하는데...그래도 아이얼굴 상태를 보고 약간 일희일비하긴 한다.

와이프는 자연요법을 선택했다.조산원에서 아이낳고 모유수유하고 친환경 먹거리 찾고...그리고 의사샘들에게는 욕먹겠지만....예방접종도 처음에 한 두번 하고 지금은 끊었다.전부 무턱대고 하는 일은 아니다.다 이유가 있다.하지만 그걸 이야기하는 건 아니니까 여기선 길게 말하지 말자. 어쨋거나 나는 와이프의 육아방식에 100%는 아니지만 지지하는 편이다.아토피 치료에 있어서도 '수수팥떡'사이트를 참고하며 치료해나가고 있다.그런데 부모님들과 회사 동료들이 병원에 한번 가보라고 나를 꼬셨다.스테로이드제를 쓰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까 한번 가보기나 하라는 식이었다.와이프만큼 신념이 강하지 못한 나는 살짝 넘어갔다.와이프를 꼬드겨서 '진단'만 받아보자고 하고 지난주에 아는 병원에 갔었다.의사 선생님은 영아 아토피가 맞다면서 뻔히 아는 생활수칙들 이야기해주고...일단 피부를 진정시켜야된다면서 약한 스테로이드 연고를 처방해주셨다.나는 사실 한 두번 써서 일단 가라앉히는 방향에 솔깃했다.그러나 나보다 힘이 센 와이프는 절대 반대여서 그냥 집에 왔다.오는 길에 심통이 나서 와이프의 자연요법에 대한 맹신을 좀 비꼬았다.하지만 사실 나도 그 방법이 맞다는 걸 알고 있다.괜히 심통나서 심술부린거였는데 와이프도 요즘 힘든 상황이어서 자동차 안에서 한 판 붙었다.그래봐야 내가 지는 쪽으로 해서 싸움은 오래가지 않는다.

아이 아토피 잡아보겠다고 책에 나오는 엽록유제라는 것도 만들어보고 감잎유제라는 것도 만들어보고 많은 걸 배우고 있다.뭐 그리 어려운 건 아니다.산야초 또는 친환경 채소 갈아서 올리브유랑 적정 비율 섞어서 보습제 같은 거 만들어주는 거다.퇴근하면 매일 청소다.그건 좀 힘들다.마치 회사에서 전반전 뛰고 퇴근길에 하프타임 휴식 갖고 집에 오면 후반전 뛰는 기분이다.그나마 새벽에 아이가 깰때 와이프가 도맡아서 하니 연장전은 안뛰어서 다행이다.물론 가끔 새벽에 깨기도 하지만...

이틀 전에는 한살림 조합에 다녀왔다.그동안 친환경매장에서 사먹었는데 이게 나을 성 싶다는 판단에서였다.여기는 가입하려면 직접 가서 1시간 가량 교육을 들어야 한다.내가 간 날은 8명쯤 신입회원이 와있었다.거의 아줌마들....나는 조금 쑥스러웠지만 ....익숙하기도 했다.^^ 사무국장은 '한살림'이 먹거리만을 제공하는 곳이 아님을 강조했다.이걸 계기로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들을 하나씩 줄여갔으면 한다는 논지의 이야기를 했다.

모임이 끝나고 사무국장과 개인적으로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한살림이나 생협같은 활동의 딜레마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나의 문제제기는 이런 것이었다.즉 이러한 유기농 먹거리활동들이 '이기적 웰빙'의 모습으로 자리잡지 않는가? 그렇다면 결국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식생활 패턴이 되는 것은 아니냐? (유기농이 가격이 비싸다.직거래가 되고 있음에도 생산단가가 비싸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의 변화는 별로 생각치도 않으면서 친환경 먹거리만을 쫓는 사람들이 대부분 아니냐?.....사무국장은 전적으로 동의했다.그런부분 때문에 고민이 많다고도 했다.하지만 활동하시는 분이다 보니 희망적인 비전을 가지고 계셨다.사무국장은 이런 먹거리부터 시작해서 단계적으로 사람들이 변해갈거라고 말했다.나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동의했다.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뜻한다.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메커니즘에 끼어있기때문이다.사무국장은 '적게 쓰자'라는 말로 이 모든 변화의 시작을 함축했다.적게 쓰면 적게 버리게 된다.그만큼 지구로부터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인위적인 처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또한 버리는 것이 적어지니 자연으로 돌리기도 쉽다.사무국장은 이렇게 말했다.이 상품이 자연적인것인가 아닌가를 판단하기 어려울때는 그냥..이게 잘 썩어서 없어질 것인가..만 놓고 보면 답이 나온다고....

일상은 또다른 정치투쟁의 장이다.일상에서의 진보는 어떠한 형태여야 하는지 나름대로 늘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사회에서의 정치적 진보는 오히려 쉽다.함께 하는 사람들도 많고 정보를 공유하고 나눌 곳도 많다.또한 적당히 묻어가도 괜찮을 때도 많다.일상은 조금 더 미시적이며 직접적이기에 더 많은 공력이 필요하다.그리고 몸에 인이 박히게끔 하는 지속가능한 인내력도 필요하다.그런데 일상에서의 진보를 묻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일상에서 진보...별거 아닐 수 있다....이번 주 한겨레 21의 주제는 <자동차와 이혼하기>였다....지난 가을부터 와이프랑 이야기를 했었다.와이프는 첫째 좀 위험하고 둘째 출퇴근 시간이 좀 늦어진다는 이유로 약간 연기해줄 것을 요구했다.일단   이번 겨울이 가면 나도 자전거로 출퇴근한다.서울처럼 자전거 전용도로는 없지만 다닐 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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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6-11-18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 해람 아토피 때문에 무지 고민하고 있는 중인데, 아주 심금을 울리는 페이퍼입니다.

클리오 2006-11-18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살림 조합이나 웰빙에 관한 문제제기가 제가 고민하던 것과 비슷하군요. 부르주아의 취미가 되어버린 듯한... 백일 넘어가니 아가들이 점차 본색(?)을 드러내는지, 저도 애가 아토피는 아닌데, 피부 땜에 좀 고민했어요. 점점 또렷해지긴 하는데 말이죠.. 그나저나 사모님의 소신이 대단하시네요.. 그래도 전, 어느 쪽이건 완벽하게 믿어지진 않더라구요.(의학에서 민간요법까지 모두) 그냥, 나와 주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편한 쪽으로 이래저래 오가며 삽니다.. 아이들 태열기, 발에 흙이 닿으면 나아진다는 말도 많던데, 그댁 예찬이도 더 심해지지 않고 돌 지나면 확 좋아지기를 바랍니다...

드팀전 2006-11-20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아토피는 모든 부모들의 공통된 걱정거리가 된 듯합니다.저희 아이는 이제 조금씩 좋아지고 있어요.하지만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는..
구두님><대학>에 나오던가요...본과 말의 차이.본이 본이 되면 모든것이 순조로울텐데 대개의 경우 두 관계는 전복되는게 다반사죠.
클리오님>아기 사진은 잘 보고 있습니다.또렷하게 생겼더군요.우리 예찬이보다 눈이 커서 조금 질투가 납니다만...^^ ..어떤 방식을 택하느냐는 어려운 문제에요.단 자연요법을 따라가다 보면 얻게 되는 것 중 하나가 생활하는 습관이 많이 바뀐다는 것 같습니다.그동안 안해보던 방식이라 불편하긴 하지만 나름대로 재미도 있고 관습적으로 해오던 그동안의 여러가지 생활습관과 방식에 대해 고민해보기도 합니다.
달라진님>일단 한살림도 그와 유사한 방식을 취하나 봐요.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자본주의 유통에 금이 가게 만드는 움직임이라는데는 공감합니다.지난번 모임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왔지요.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 있는데 농촌에 가보면 '유기농 농민'이 주위에서 따가운 시선을 받습니다.대개의 농민들은 농약을 쓰고 있거든요.아무래도 그 바닥에서는 아직은 튀는 짓입니다.농민들 역시 농약을 쓰는게 좋지 않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기에 자격지심이 생기는 것일 수도 있구 높은 가격 형성과 최근의 인기에 불만이 있기도 하겠지요.일반적인 농민들의 주장은 정부에서 권장하는 허용치 수준에서 농약을 쓰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편입니다.저는 이부분 때문에 유기농을 욕하는 농민들이지만 돌을 던질 수가 없습니다.정부에서 권장하는 농약을 치면-환경운동가들은 농약을 쥐약으로 보지만-농약 잔류검사에서 문제가 없습니다.70년대 녹색혁명에서 정부는 농업생산량증가와 농촌경제의 발전을 위해 분명 농약이나 각종 화학비료들을 권장해왔습니다.농민들은 그래서 그게 큰 문제가 없는거라 생각하고 관습적으로 재배해왔지요.그런데 최근에 들어와서 '유기농'은 안전하고 '관습농'은 농약 및 화학비료를 사용하기에 안된다.안전한 먹거리를 위협한다..라고 하니까 갑자기 유기농을 하지 않는 농민들은 식탁 안전의 주범으로 ,최소한 무신경하며 무식한 재배자로 비춰지게 됩니다.결국 안그래도 살기 힘든 농민들은 '유기농'에 안좋은 감정이 생기게 되지요.
유통마진을 줄여서 직거래 방식이 이루어져도 유기농은 생산량이 떨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가격이 높게 형성될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대량소비를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에서 농업만 이러한 방식으로 운영되기란 전체적으로 보면 결코 쉬운일이 아니지요.물론 이상을 위해서 작은 변화에 동참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거대한 관습농업의 변화를 이끌어 낸다는 것은 거대 농업관련 자본의 압력,수입 농산물과의 역학관계,정부의 농업 기조에 대한 전면 수정 등등....우리나라를 사회민주주의 국가로 만드는 것 만큼이나 먼길입니다.쓰고 나니 좀 답답해지기도 하네요.
 

(...이건 내 개인적 글이니 읽는 분을 생각해서 예쁜 말을 쓰라는 둥 시니컬 하게 나오지 말라는 둥 말씀들 하지 마시라.이건 신문 사설이 아니거든요...신문 사설 보시고 싶으시면 신문사서보세요.)

어제 로테 퀸의 교사 비판서에 대한 리뷰를 올렸다.예쁘게 쓰진 않았다..나의 일가 중에는 선생님이 3명이나 있다.그럼에도 선생님들에 대해 부정적이다.오늘 아침에 한겨레에 실린 모 초등학교 교사의 글을 읽었다.

10년차 초등학교 선생이다.전담교과목 선생이다.대개 9시에 수업시작해서 3시에 수업끝난다.숙제점검하고 학교 업무보면 5시쯤 퇴근한다.편해보이지만 그건 뭘 모르는 소리다.

(이하 직접 인용)

초등교사는 매시간 다른 내용을 가르친다. 초등교사가 일주일에 28시간을 가르친다면 이 28시간은 모두 다른 내용으로 채워진다. 어떤 때는 영어 과목 중 회화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사회과목 중 고려사가 되기도 하며, 어떤 때는 과학 과목 중 수소발생 실험이 되기도 한다. 강의식 수업이라면 일주일에 28번의 각기 다른 강의를 하는 셈이고, 토론식 수업이라면 일주일에 각기 다른 28번의 사회를 봐야 한다. 중계초등학교의 반 평균 학생 수는 36명인데, 이런 학교에서 개별 학습에 나선다면 28시간×36명인 1008개 분량의 역할과 지도 임무가 매주 초등교사에게 주어진다.

(중략)

그렇다면 이런 현실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교사에게 있는 것일까? 어느 유능하고 성실한 집단 1만명에게 매주 28번의 서로 다른 내용의 발표거리를 준비해서 매일 5∼6시간씩 발표하라고 해 보자. 일주일만이 아니라 1년을 매주 다르게 준비하게 하자. 매일 36명분의 일정한 과제검사나 학교업무 등 여러 업무를 주어 퇴근 시간 이후에나 제대로 발표 준비를 할 수 있게 해 보자. 그 집단의 몇%나 매번 완성도 높은 발표거리를 준비하고 발표할 수 있을까?

결국 이 선생님의 결론은 주당 수업시간을 20시간으로 줄이자.수업보조자,행정전담직,기능직을 뽑아 선생님이 수업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하자.우리나라는 인력이 최대 무기라고 한다.공교육 강화를 위해서 현장 수업의 질을 높이는 것이 길이다.....

요즘 초등학교는 30명 중반정도가 정족수이니 많이 좋아졌다 싶다.하긴 요즘 저출산으로 점점 학생수는 줄어들 듯 하다.60 번대까지 있었던 우리 초등학교 때 비하면 좋아졌다.아무래도 한 명 한 명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주려면 숫자는 줄어들 수 록 좋을 것이다.물론 이것도 규모의 경제를 따져서 적정선이 있을 것이다.선생님들이야 이상적 가치를 이야기하며 최소 숫자를 이야기하겠지만 그건 욕심일 뿐이다.

선생님의 산술은 참으로 옯바르다.얼필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이러한 산수는 논리를 가장한 비논리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초등 산수를 가르치다 보니 초등 산수식 만을 구사한다.도대체 저런 수 놀음이 어디있담.도대체 10년간의 경험치라는 변수는 어디에도 들어있지 않다.30년 교사 생활을 하신 아버지는 수업들아가면 교과서를 놓고 하셨다.30년 하다보니 어디 어디 하면 뭐가 중요하고 이 교과서에서는 이 내용 저 교과서에는 저 내용....다 꿰고 계셨다.10년 정도 그 단원에서 나왔던 학력고사 유형도 전부 알고 잇었다.물론 딱 고등학교 학생이 알아야할 그정도 내용 수준에서 이다.더이상 나아가면 헤멨을 것이다.초등학교 선생 10년 해도 얼추 마찬가지일게다.그런 경험치는 완전 쌩까고...단순히 과목당 시간 비교하니 참 순진하다.10년이란 기간동안 아무런 노하우와 과목에 대한 지식이 쌓여 있지 않고 마치 새로운 것 접근하듯 해야 한다면 그 동안 뭐한것인가? 매일 몰아세우는 아이들이 밑빠진 독에 물붓기가 아니고 선생님들이 그런 것이라는 반증이되어버린다.이 모순을 어떻게 풀려하는가?

아이들에게 매 시간 가르치기 위해 매시간 같은 수준의 공부가 필요하다면 그게 선생인가 학생인가? 6학년 가르치던 선생이 5학년 수업 맡았기 때문에 전혀 새로운 수업이어서 동일 시간의 예습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게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까? 물론 선생님들도 좋은 수업을 위해 교과공부를 해야한다.그걸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그렇지만 저런 논리는 웃긴다.내가 고등학교 때 수학 잘 가르치는 선생이 있었다.가끔 쉬는 시간에 교무실 가면 그 양반은 앉아서 첨보는 문제집에서 수학 문제 풀고 있었다.초등학교 선생님들께서 앉아서 농담 따먹기 하지만 않아도 훌륭한 수업은 못해도 기본을 할 것 같다.또한 선생님들이 수업 연구할 시간없다는 것도 웃기다.선생들 세금 줘가며 유급휴가 주는 방학은 뭔가? 대략 1년에 석달 쯤 될 것같다.방학 때 스키타러 가는 것만 중요할까? 그렇게 양질의 수업에 목이 말라 있다면 3달이라는 시간은 충분하다. 방학 때 탱자탱자 개인적 리프레시만 하지 마시고 자기 하는 일에 좀 매달리면 그렇게 억울할까? 이런 비교는 그렇지만 일반 직장인들의 자기 계발 노력과 선생의 자기 계발 노력을 비교해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날 것이다.일반 직장인들... 안하면 밀리고 모자란 놈 소리 듣고 후배에게 치이니까 새벽에 일어나서 학원 다니고 싫은 술자리 마다 않고 나간다.가족들 먹여 살리겠다는 의지로 가족들 포기해가면서 박박 기며 일한다.(그 돈 중 일부를 세금으로 지불하여 교사님들 월급드린다.)

선생님 말씀 하신다....수업에 집중하기 위해 행정 업무처리자들 필요하다고.좋다.어차피 실업률도 떨어뜨리려면 누이 좋고 매부좋다.그런데 그 교사들 정규직인지 좀 물어보자? 과학보조교사,행정보조 선생들 정규직인가? 대개 기간제 교사,비정규직일게다.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은 철밥통 정규직 선생님의 업무를 줄여주기 위해 비정규직 고용해서 좀 쓰자는건가? 좋다.선생님들이 그들을 비정규직으로 만든거 아니다.그럼 선생님들이 그들의 권리확보를 위해 노력해 주시는가? 내가 알기론 아니다.전교조는 비정규직 교사를 받아들어주지 않았다.몇 달 전까진 그랬다.지금은 모르겠다만....행정업무도 외주 주고 몇 몇 과목은 시간제 강사쓰고 ...아이들 교육은 가정이 제일 중요하니까 집에서도 열심히 공부시켜야되고...선생님은 뭐하시려고 하나? 선생님이 무슨 야구 감독이나 금융감독원 조사원인지 아시나? 어떻게 되든 정규직 선생님들은 괜찮다.안짤린다 절대로..... (한미FTA 걱정 안해도 된다.전부 길바닥 나앉아도 그 때까지도 괜찮다. ) 이렇게 해서 선생님은 남는 시간에 아이들을 위한 수업 연구에 쓰시겠다고.....지금 안한는 사람들이 시간 많아진다고 더 할 것 같지 않은데.. 나를 설득해봐라.바보 같은 산수 집어치우고.....제길 이런식으로 가다간 정말 아이 초등학교 안보내고 홈스쿨링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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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11-14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하러 추천합니까.이런거 추천하면 안됩니다.조금 흥분해서 막쓴글에는 추천보다 그냥 '짜식 좀 흥분했군.쌓인게 있나본데' 하고 지나가면 되지요.

2006-11-14 14: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기 2006-11-14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흥분하셨군요, 쌓인 게 있으신가봐요. ^^
저도 쌓인게 많아서, 추천하고 갑니다.

kimji 2006-11-15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홈스쿨링,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추천은 안 하고 가지만, 고개 많이 끄덕이다 갑니다.

2006-11-15 0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1-15 14:0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