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어둠이 울타리 밑에
제비꽃 하나 더 만들어
매달아 놓았네
제비꽃 밑에 제비꽃의 그늘도
하나 붙여 놓았네

...................................................................

이 시를 보다가 앞으로는 꽃만 보지말고 꽃그늘도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일찍 투표를 하고 일하러 나왔다.투표를 6번 했는데...도장의 방향에는 일관성이 있었다.다만 내가 지지하는 정당에서 후보를 내지 않았던 경우는 좀 고민되었다.투표하는 도장 생김이 꽃무늬 도장 같다는 생각이 든다.민주주의가 활짝 만개했으면 좋겠다만....

오늘은 밤 늦게 까지 일해야 한다.아마 자정을 넘기지 않을까....남들 노는데 이게 뭐람.하지만 더 작은영세 업체에 다니는 노동자들은 오늘도 일하는 사람도 많다.물론 내가 영세 업체 파견 노동자인건 아니다.(지난 번에도 한번 이야기했지만 노동계급 안에서 보면 난 노동귀족에 가깝다.) 투표일에 다 쉬는 건 아니다.법정 공휴일이니 쉬는 건 쉬자.하지만 공휴일에도 쉬는 사람 바라보면 어쩔 수 없이 푸념하는 영세업체 노동자들도 한번은 생각하자.

제비꽃의 그늘을 생각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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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옛집에 갔지요
푸르디푸른 하늘 아래
머위 이파리 만한 생을 펼쳐들고
제대하는 군인처럼 갔지요
어머니는 파 속 같은 그늘에서
아직 빨래를 개시며
야야 돈 아껴 쓰거라 하셨는데
나는 말벌처럼 윙윙거리며
술이 점점 맛있다고 했지요
반갑다고 온 몸을 흔드는
나무들의 손을 잡고
젊어서는 바빠 못 오고
이제는 너무 멀어서 못 온다니까
아무리 멀어도 자기는 봄만 되면 온다고
원추리 꽃이 소년처럼 웃었지요

--------------------------------------------------------------------

이 시의 마지막 문장이 좋다. '아무리 멀어도 자기는 봄만 되면 온다고 원추리 꽃이 소년처럼 웃었지요'  10년이상을 살던 집을 떠나던 날이 생각난다.그 집은 시골에서 올라오신 아버지가 결혼 후 처음으로 자기명패를 단 집이었다.당신 집이 처음 생긴 아버지는 며칠 밤을 잠 못이루었단다.붉은 지붕에 까만 대문집이었다.요맘때가 되면 붉은 장미 덩쿨이 담장을 넘었다.처음에는 한 두 송만 월담을 했다.그러나 햇살이 따가와지면 마구 흔들다 터져버리는 사이다 거품처럼 붉은 꽃이 낭창 낭창 담을 넘었다.붉은 파도를 막을 길은 없었다.우리 집 뒤편에 있던 쪽방살이 공장 누이들이 가끔은 집  대문안 까지 들어와서 꽃을 탐하였다.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으며 누이들도 뭐라 할 만큼 담 안을 넘보지는 않았다.흰 목련이 진 후 잠시 외롭던 파란 하늘이 빨간 장미를 만나 다시 즐거웠다.화단에는 장미외에도 지금은 이름도 기억 나지 않는 화초들이 많았다.목련나무가 두 그루,홍매화 한 그루,마구 엉켜있던 장미나무,붓꽃,다알리아,채송화....... 겨우내 항아리를 앉고 있던 김장독 구멍 두 개,팔 힘이 무척 셋던 땅강아지들...

10여년을 햇볕 예쁜 그 집에서 살았다.그리고 아파트란게 들어서면서 우리도  이사를 가게 된다.미리 보고 온 새 아파트는 신문명의 도래였다.물도 펑펑 잘나오고 내가 그리 싫어하던 쥐도 없었다.또 난청지역이라 못봤던 MBC방송도 잘나왔다.어서 짐을 사써 떠났으면... 하루 하루를 기다렸다.

이사 하던 날.짐 차 뒷 칸에 앉아서 작아져가던 옛 집을 보았다.갑자기 눈물이 고였다.내가 배신자 같았다.주변에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어서 그 집은 더욱 누추해보였다.붉은 지붕도 색이 바래고 이미 집 담장 한축은 쓰러졌다.침묵하는 절름발이 거인처럼 옛 집이 어린 나를 배웅하고 있었다.그의 눈빛이 쓸쓸했고 그의 거대한 덩치가 외로왔다.눈가가 슬슬 빨개지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그 집과 인사를 나누었다.논 가운데 옹기종기 모여 있던 집들.그 사이 벙어리 거인처럼 웅크리고 나를 보내던 그 집의 모습은 나이가 들어도 잊혀지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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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6-01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국 시인과는 사소한 안면이 있는데, 덕분에 기억을 되살리게 됐습니다. 시도 좋네요.^^

드팀전 2006-06-01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가끔 로쟈님의 서재에 가보곤 합니다만...흐...내 수준을 넘어서 그냥 기웃하고 옵니다.ㅜㅜ
 
검은 피부, 하얀 가면 -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시대의 책읽기
프란츠 파농 지음, 이석호 옮김 / 인간사랑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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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러고 보니 살면서 흑인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거의 없다.해외 업무를 하는 것도 아니고 또 따로 영어 학원을 다니는 것도 아니니 기회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물론 대학 때 영어 학원을 다닌 적도 있다.하지만 흑인 선생은 0%였다.그 상황은 영어 조기 교육의 광풍이 불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왜 영어학원에는 흑인이 없을까?  학원장들은 학부모들의 핑계를 대면서 이렇게 말한다.학부모들이 흑인 선생을 좋아하지 않는다고.그렇다면 학부모와 학원장들이 좋아하는 영어 선생은 어떤 사람일까? 대개가 미국출신 금발의 백인 미혼 여선생이다.외국인 학원 선생 중에는 특A급이 바로 이들이다.영어 선생을 뽑는 것인지 헐리우드 영화배우를 뽑는 기준인지 알 수가 없다.

한국인은 백인들의 기준으로 보면 분명히 유색인종이다.하지만 우리의 내면 세계는 유색인종임을 거부한다.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백인의 것에 가깝다.근대화 과정에서 백인은 문명의 상징이었다.또한 자유와 해방의 상징이었다.백인들의 이 이미지는 미국이 한국에 대해 가진 정치,경제,사회의 독보적 영향력으로 인해 세대를 걸쳐 내면화되어왔다.미국 자본주의의 풍요로움과 미국에 대한 열등감은 그들에 대해 동일시하는 감정으로 이어진다.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우리는 미국의 중심이라는 WASP에 대한 우호적 감정을 구축했다.이에 반해 흑인은 그 대척점에 있었다.지금 당장이라도 흑인에 대해 떠오르는 단어들을 생각해보면 대개 부정적인 용어들임을 알 수 있다.그나마 몇 몇 운동선수들과 뮤지션 덕에 조금 단어의 수준이 격상되었을 뿐이다.

프란츠 파농은 흑인을 비존재의 영역에 있다고 말한다.그들에게는 단 하나만의 운명이 존재한다.그것은 백인이 되는 것이다.파농은 흑인들이 흑인존재를 인식하지 조차 못하는 상황을 심리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하지만 그는 먼저 이것이 이중적 과정의 결과라고 생각한다.먼저 경제적 절차의 소산이고 다음은 열등감의 육화 때문이다.흑인들의 열등감은 우선 언어적 태도의 변화에서 감지된다.언어는 한 문화의 총체를 나타내는 상징이다.식민지에서 프랑스로 건너간 흑인들은 우선 프랑스어 발음에 대해 열등감을 갖는다. 'R자를 들어마시는 앙띨레스 촌닭'이라는 말은 흑인들이 갖고 있는 발음 컴플렉스를 고스란히 보여준다.불행하게도 영어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발음상의 컴플렉스도 이와 유사하다. "L 과 R의 불분명한 구분,P와 F의 혼재,th발음의 곤란함"  영어발음에 대한 한국인의 컴플렉스는 항상 일본인의 발음을 걸고 넘어진다."일본놈들의 '마꾸도나루도 (맥도널드)'" 이를 통해 영어 발음의 컴플렉스를 위장한다.하지만 영어민이 보기엔 '맥도날드'나 '마꾸도나루도' 나 오십보 백보일 터이다. 파농은 웨스터만의 글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흑인들의 열등컴플렉스는 그것에 맞서 싸워야 할 흑인 지식인 계층 내부에서 오히려 보다 심각한 형태로 현상되고 있다......이런 과정을 통해 그들 자신을 유럽인 혹은 유럽인들이 이룩해낸 성과물들과 거의 맞먹는 존재로 상승시키는 착각을 감행한다."

파농은 언어문제에 있어서 백인들의 태도에 대해 언급한다. 흑인들에게 말을 건내는 백인들은 하나 같이 흑인들을 아이 대하듯 한다.이죽거리고,속삭이고,달래고,어르고,속이고.어떤 특정 백인만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다....."이런 방식으로 흑인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스스로의 수준을 하향조종해 가면서 백인들은 안도감을 느낀다.이것이 그들이 흑인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서 현실을 재확인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우리보다 더 피부색이 짙은 사람을 대할 때 우리는 백인들의 태도를 취한다.현재도 백인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 역시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파농의 이야기는 결혼과 성의 문제로 넘어간다.파농은 <나는 마르티니크의 여자입니다>라는 책의 몰자아적 태도를 비난하며 흑인들이 가진 맹목적 백인화의 욕구를 비판한다.파농은 결론적으로 흑인에게 탈출구가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백인의 관심을 끌기 위한 흑인의 집착,백인의 힘에 대한 동경,보호막을 확보하기 위한 흑인의 집념,이것이 흑인의 자아 그 존재와 소유를 결정하는 구성성분이라고 결론짓는다.백인이 된다는 것은 흑인에게 진,선,미를 소유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파농의 탈식민화 논의의 칼날은 정체성을 상실한 흑인만을 겨누지는 않는다.열등감의 노예가 된 흑인이나 우월감의 노예가 된 백인이나 모두 신경증의 증후를 드러내고 있는 존재이다.<흑인과 정신병리>의 장에서 파농은 백인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흑인공포증에 대해 설명한다.그 근원에는 흑인들의 자기보다 우월한 성적능력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고 파농은 주장한다.외국에서 만든 포르노가 쉬운 예가 되겠다.이것 저것 다양한 판타지가 나오지만 꼭 빠지지 않는 것이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의 매저키스트적 관계이다.또는 거대한 흑인남성과 왜소한 아시아 여성의 관계....흑인 여성과 백인 남성은 본 적이 거의 없다.많이 안봐서 그런지 몰라도....백인에게 흑인의 중심은 성이다.특히 생식기이다.사실 이것은 허위의식일 뿐이다.하지만 백인들은 흑인을 동물=자연의 단계로 파악한다.그 자유분방함과 신체적 강건함등은 백인들에게 흑인들에 대한 성적 열등감을 불러일으킨다.흑인의 성적 잠재력에 대한 상상이 공포로 치환되는 것이다.이 공포는 흑인을 더럽고 사악한 존재라는 이미지로 투사된다.백인들은 이제 흑인이라는 좋은 투사 대상을 찾게 되었다.그들은 그들의 문명화 과정 속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욕망들을 흑인에게로 전부 투사해버린다.음험함,어둠,죄,사악함,그림자,깊은 심연....사실 그 안에는 가장 비도덕적인 충동과 부끄러운 백인들의 욕망이 들어있음에도 말이다.흑인 공포증에서 시작된 백인들의 신경증은 결국 집단적 카타르시스를 흑인들의 대상으로 배출함으로서 해소되고 있는 것이다.

프란츠 파농은 책 서두에서 흑백간의 악순환을 풀 고리를 찾고자 한다고 밝혔다.그 고리는 백인의 우월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흑인정체성과 흑인 역사의 위대성을 밝혀내는 것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파농은 현재와 미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저항담론으로 과거의 역사,문화를 강조하는 것은 결국 흑백의 악순환을 지속시키는 담론의 반복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파농이 정치적으로 흑백이 조화롭게 사는 방법에 대해 제시하지는 않는다.그건 그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그는 백인의 머리로 세상을 사는 흑인들에게 소박하지만 의미있는 말을 던진다.

"내가 아는 한가지는 이것이다.타자에게 인간의 행동을 요구할 권리가 내게는 있다는 것말이다.그것 뿐이다.한가지 의무도 있다.나의 자유를 포기하는 선택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무말이다.....

...나 유색인으로서 바라는 것은 이것 하나뿐이다.도구가 인간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인간에 의한 인간의 노예화는 영원히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한 인종에 의한 다른 인종의 노예화는 반드시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인간,그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내가 그를 찾아내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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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2006-05-30 11:51   좋아요 0 | URL
프란츠 파농 꼭 한번 읽어두어야 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 기회에 접해봐야 겠습니다. 드팀전님 요즘 건강하시죠? ^^

드팀전 2006-05-30 12:58   좋아요 0 | URL
아..예.잘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기엔 뭔가 좀 그러하네요.어쨋거나 건강은 합니다.ㅎㅎ 약간은 의무감 같은 걸 가지고 읽었습니다.책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문체가 좀 왔다 갔다합니다.논리적 서술이다가 또 흥분된 주장이다가...거기에 잘 모르는 흑인 문학가와 사상가들이 등장합니다.번역도 예쁘다는 생각은 안들더군요.어떤 님들 처럼 원문과의 비교를 해본 건 아니지만 읽다보면 걸리곤 합니다.'네그리튀드'나 '문투' 같은 낯선 단어들도 나오는데 네이버에 검색해서 알아보기도 했습니다.이 책은 다른 번역본이 언젠가 나오주면 더 좋을 듯해요.

보르헤스 2006-05-30 17:5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언제나 번역이 문제군요 ^^

코코몽 2007-05-09 00:11   좋아요 0 | URL
정말로 저도 읽는 데 고생 좀 했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문체가 전형적인 번역투여서요...ㅎ
 
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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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 달 전 쯤 일이다.함께 일하는 동료 여직원이 점심 시간에 무언가 열심히 보고 있었다.무슨 책을 보나 하고 물어봤다. "뭐 읽어?.... "  " 아...이거요. <아내가 결혼했다>에요. 이 책보셨어요?"  .... "아니" . 그녀는 갑자기 신입사원 만난 보험아줌마 같은 표정을 하더니 "이거 정말 재밌거든요.정말 눈을 뗄 수가 없다니까요.진짜 최고예요 최고.."  퉁퉁한 그녀의 얼굴이 약간 흥분되어 벌게졌다.(그런데 어쩌나 ....다 읽고난 지금 그녀가 최고라고 하던 이 책에 별3개도 겨우 주었으니...용서하시길)

그녀의 흥분된 목소리는 마치 이렇게 이야기하는 듯 들렸다. '이사람아...도대체 뭐하는거야.이런 재미있는 책도 아직 안보고.어서 보란 말이야...매일 제목은 그럴싸 해보이지만 뜻도 모를 이상한 책들 들고 다니지 말고...뭐하니 ...진짜 죽인다니까..어이구" .... (이런걸 '자격지심'이라고 한다.)

'도대체 어디다 대고...지가 책을 보면 얼마나 본다고 ..최고니 뭐니 흥분해 가지고..난리부르스를 떨고 있어.'  ....그녀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그녀의 짧은 흥분과 자랑은 내게 그렇게만 들렸다. 사르트르가 그랬다나.'베스트셀러는 모두가 보기때문에 볼 수 밖에 없는 책이라고'..그에 반해 나의 '자격지심'은 내게 이런 명령을 내린 셈이다. "대중의 취향에 반하라.그래야 상대적으로 네 독서의 품위를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르니"  정말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녀의 알은 체가 이 책에 정나미를 떨어뜨린 것은 사실이다.

그 작은 에피소드 후에 이 책은 바다 건너 대마도 땅 모래밭에 묻혔다.그러다 몇 주가 지났다.그날은 회사 자료실에 들렀다.매일 허접한 책들만 들여오는 자료실.언제나 대여 1순위는 해리포터,김진명류 소설..... 최근에는 어떤 책들이 들어와 있나 쭈욱 살펴봤다. <아내가 결혼했다>가 1억 당첨금을 받았다며 당당히 서고에 꽂혀 있었다.마치 자기의 몸값이 1억인양 당당하게 말이다. <아내가 결혼했다>에 대한 그녀의 흥분된 목소리가 갑자기 환청으로 들려오는 듯 했다.고개를 돌리고 무시하며 지나갔다.에이..그런데 미운 것에도 호기심은 생기는 법.결국 다시 방향을 돌려  이 책을 집었다. '도대체...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난리야'  몇 장을 넘겼다.그 몇 장의 책장 넘김이 결국 이 책을 다 보게 만든 이유다.소설의 이야기...주인공들의 캐릭터...  몇 장 넘기는 동안 그걸 어떻게 살펴볼 수 있겠는가.나의 시선을 잡은 것은  FC바로셀로나의 이야기였다.FC바르셀로나의 구단 모토...'클럽,그 이상이 되자'.....   다른 장을 마구 넘겼다.지네딘 지단의 이야기,유로 2004의 그리스 우승 이야기,90년대 맨체스터의 아이콘 칸토나 이야기...등등 

이 책을 읽게 만든 건 1억원 수장작이란 후광도 아니고 흥분된 직장동료의 목소리도 아니었다.그것은 단지 '축구'때문이었다.

축구가 도래하기까지 좀 심심했다.마이클 조던이 빠진 NBA는 앙꼬 빠진 단팥빵이었다.차세대 조던들의 승부도 물론 잠시 볼만은 했다.앨런 아이버슨,코비 브라이언트,빈스 카터,포지션은 다르지만 팀 던컨,케빈 가넷...그리고 가장 최근에 르브론 제임스까지...하지만 그 누구도 조던이 가진  아우라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NBA가 지겨워 질 즈음 눈을 돌린 것이 유럽축구였다.때마침 PS의 '위닝'시리즈가 인기가 있던 터라 게임과 축구가 시너지 효과를 냈다.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내가 관심이 가는 것은 결국 소설의 이야기보다 축구 이야기였다.인터넷에도 나와있는 이야기들이지만 지면으로 만나면 또 다른 재미가 있다.거기에 소설 속 상황을 축구와 비유하며 인생을 축구의 축소판으로 만드는 작가의 재기어림이 좋았다. 아내의 도발적 실험에 대해 결국 끌려가는 주인공.이혼서류는 만들지만 결국 접수하진 못한다.그리고 이어지는 라이언 긱스의 발언 "축구는 상호비방과 모욕으로 가득한 잔인한 경기이며 나는 분명히 그 주범 중 하나일 거예요"  주인공은 자신의 인생에 갑자기 들이닥친 불청객을 부정선수라고 비유한다.그러면서 하는말...'이게 축구였다면 진작 부정선수 개입으로 인한 몰수 게임이 선언되었을 것이다.부정선수로 인한 몰수 게임의 공식 스코어는 3대 0." ...

... 1986년 월드컵 마라도나가 세계 최고의 선수로 등극하는 해이다. 어느 방송 해설자의 말이 이어진다. "축구란 혼자서 하는게 아니라 11명이 하는 겁니다.우리는 지금 축구의 개념을 깬 최초의 선수를 보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말도 이어진다.'결혼이란  두 사람이 하는 것이고 그 둘의 가족이 얽히는 것이다.나는 결혼의 개념을 깬 최초의 여자와 같이 살고 있다.그리하여 사는게 참 힘들다.'...심각한 상황에서 매 장 끝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축구비유는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즐겁게 만드는 요소이다.

사실 이 소설에서 스토리의 도발성과 축구와의 비유를 뺀다면 그다지 인상적인 것이 많지는 않다.제도권 방송의 드라마 소재가 되긴 힘들겠지만-<사랑과 전쟁>쯤은 할 수 도 있겠다-딱 60분짜리 분량의 드라마같다.재기 넘치는 문장,스피디한 사건 전개,만화적인 댓글 사용,(왜 있지 않은가? 슬램덩크를 보면 진지한 강백호가 갑자기 웃기는 강백호로 바뀌는 컷 같은 것들)...이 소설에서 빼어난 풍경의 묘사라든가 심리적 뒤트림의 표현이라든가 뭐 이런거 찾지 않는게 낫다.그러니 미니시리즈는 못되고 <사랑과 전쟁> 정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어렵지 않은 문장에 엽기적(?) 사건이 진행되어 가다보니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가독성이 뛰어나다.또한 빠르다. 눈도 떼지 못하고 단숨에 읽게 만든다.이 부분에 촛점을 맞춘다면 이 소설은- 좋은 소설인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소설이긴하다.(하지만 아무리 재미있어도 <미션 임파서블3>가 올해 아카데미에서 좋은 결과를 얻진 못할게고 올해 최고의 영화가 될 수는 없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결혼제도와 가족제도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담고 있다.일부일처제와 4인기준 가족이 영구불변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읽는 이에 따라 이 견해가 충격적이거나 혁명적인 것 처럼 보일 수도 있다.그런데 내게는 그렇게 충격적이지 않았다.물론 내가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를 실험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학문적으로 결혼이란 제도와 일부일처제의 모순등에 대해서는 수 백권의 책이 나와있다.또한 역사적으로 가족이란 것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는 유럽에 방직기 돌던 시절부터 논의되어 왔다.그러니 일부일처제의 부당함에 대한 여자주인공 인아의 항변이 그다지 새롭지 않다.여기 저기 가족제도 관련 책의 어떤 부분을  인용하는 투의 인아의 논리정연함은 작위적이기만 했다.대게 일부일처제란 제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집에 책이 많은 사람들이다.인아와 재경이 그렇듯이.그 책의 몇 장이 인아의 입을 통해 들린다.인아라는 캐릭터 자체가 전혀 입체적이지도 못하고 내면의 모습을 그려지지도 못한다.(남편의 1인칭 시점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그저 축구를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고 결혼제도에 반대하는 '자유'라는 이름을 건 마네킹같다.(대학가에 주인장이 좀 지적인 카페에 밤 늦게 가면 이런 캐릭터들은 쉽게 만날 수 있다.)

만약 주인공 덕훈이 내 친구 였다면 머리통을 한대 쥐어 박았을 듯하다.도대체 축구 팬이면 축구 팬으로 머물러야지 왜 레알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뛰어드냐는 말이다.플레이는 선수가 하는 것이지 팬이 하는 것은 아니다.12번째 선수는 그라운드에 들어가면 바로 훌리건 취급당해서 끌려나오는 것이다.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은 다른 별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게 두어야 한다.지구별 사람이 거기에 왜 개념없이 뛰어드는지....(어! 그런데 난 어느별에서 왔지?)...그러니 혼자 애가 끓는다.주인공 덕훈이 인아를 사랑하게 된 건 '축구'와 '섹스' 때문이다.축구는 결국 레알이 이기든 바르셀로나가 이기든 현실에서 아무런 상관이 없다.덕훈도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된다.결국 인아를 선택하고 지키려는 가장 근원적 이유는 '섹스'때문이다.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만족감을 주었다는 것...그것만으로도 결혼은 된다.하지만 문어가 고등어랑 섹스하고 만족도가 높았다고 함께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연애질을 하는거야 모르겠지만.여기에 시간이 지나며 제3의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그 다음부터는 '사랑'이란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작가는 열심히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재경의 등장 이후 덕훈에게 남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쟁패'이다.질투심에서 비롯된 승부근성.어떻게든 원래 내 것을 찾아오겠다는  그래서 이 승부에서 이겨야겠다는.(결국 이기지도 못한다.처음부터 이길 수 도 없었고 원래 자기의 것도 아니었다.)

이 상태가 되면 미안하지만 '사랑은 이제 끝'이다.승부만 남았다.(대게 단맛 쓴맛 못 본 남자들이 '승부'와 '사랑'을 혼동한다.그러니 스토커도 나오는거고) 주인공 덕훈에겐 사랑과 결혼에 대한 아무런 철학이 없다.반면 그것이 반사회적일 지라도 인아와 재경에게는 사랑에 대한 철학이 있다. 이런 싸움은 처음부터 하는게 아니다.내가 그의 친구였다면 싸움에 발을 들여놓치 말라고 충고했을 것이다.용납이 되지 않는 상황을 버티기며 익숙해지는게 쿨한게 아니다.돼는 것과 안돼는 것에 자기중심이 있는게 오히려 쿨한거다.접을 때 접고 펼칠때 펼치는게 병법의 기본이며 또한 축구의 기본이기도 하다.

이 책의 작가는 결혼제도와 일부일처제의 문제에 대해 알리고 싶었나 보다.하지만 내게는 주인공 덕환의 비주체적 사랑만이 보인다.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삶에 대해 자신의 사랑에 대해 자신의 결혼에 대해 아무런 철학이 없다.끌려 다니다 보니 어느덧 익숙해지는 다부일처제.그것마저도 그는 빌미를 두고 선택한다.일부일처든 다부일처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지들 좋으면 된다(그래도 책 속에서 나오는 인아의 주장은 가족제도관련 책을 그대로 인용하는 진부함을 면할 길이 없다) 문제는 사랑과 결혼에 대한 주체적 선택인가 아니면 비주체적 추종인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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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6-05-28 19:09   좋아요 0 | URL
음....축구 얘기가 나와서 월드컵 두건을 주나 보네요. 왜 뜬금 없이 책 사은품으로 월드컵 두건을 주나 했어요.ㅎㅎㅎ

비유가 압권인데요! "신입사원 만난 보험 아줌마" 음하하하. 나두 신입사원 때 많이 당했는데...중앙일보 뉴스위크도 어리부리해서 구독하고(아...돈 아까버라), 보험도 들고...ㅎㅎㅎ

전 사실 <카스테라>도 단편 몇개를 제외하면 쩜 별로였어요.그럼에도 불구하고...<아내가 결혼했다>가 읽고 싶어 지네요.^^

드팀전 2006-05-29 08:54   좋아요 0 | URL
전 두건 없는데...이 책은 서울가는 길에 역 서점에서 샀어요.올라 갈 때 절반보고 내려올 때 절반보고...ㅎㅎ 책 값이 좀 비싼듯..서점에서 사서 그렇게 느꼈나.
 

오랜만에 시간이 좀 있어서 중고음반가게를 찾았다.이곳의 클래식음반은 대개 1만원.좀 웃긴건 탑프라이스나 미드프라이스나 상관없이 그냥 1만원이라는 것이다.한번은 그 문제를 약간 어필해봤는데 별로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원래 가격이 싸면 중고가격도 같이 가야되는 거 아닌가 싶은데...하여간 그렇다.그나마 국내제작음반은 9천원이다.

어쨋거나 중고음반을 열나 뒤져서 5만 2천원 어치의 음반을 샀다.가격대비 내용풍부...

 

 

 

 

 

파올로 판돌포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비올라 디 감바 버전)이다.비올라 디 감바로 연주한 세계 초연이라는데...뭐 이런 것도 마치 원조 곱창집 같은 거라서...그나 저나 각종 음반상을 많이 받긴 했다.어쨋거나 첼로 연주에 비해 선이 예민하다.2장 짜린데 1만 5천원.음반 내지에 판돌포가 직접 쓴 첼로와 비올라 디 감바의 대화가 있다.마치 연극 대본 같다.조금 읽다가 말았는데 ...재미있는 사람이다.

월튼의 교향곡 1번.앙드레 프레빈의 연주다.월튼은 영국의 작곡가로 그다지 많이 알려진 사람은 아니다.비올라 협주곡이 가장 유명하다.그의 교향곡은 나도 이번이 처음인데 괜찮다.텔락의 녹음은 로얄필하모닉 오케스트라라는 조금 떨어지는 오케스트라도 최강의 소리처럼 들리게 해준다.

쇼스타코비치 피아노작품집.니콜라예바의 연주다.쇼스타코비치의 유명한 24개의 프렐루드가 수록되어있다.하이페리온에서는 니콜라예바와 몇 개의 동곡 녹음을 한 듯 하다.니콜라예바의 피아노는 어항같다.










존 루터의 레퀴엠.작곡가가 직접 연주한 음반이다.이외에도 자작자연음반이 몇 종되는 듯하다.이곡은 1985년 초연되었지만 빠른 시간내에 인기를 얻은 곡이다.낙소스에서 나온 티모시 브라운의 음반에 비해 수수하다.그게 매력이겠지만.

기돈 크레머가 연주하는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이다.오이스트라흐의 EMI 음반을 가장 자주 듣는다.헨릭 쉐링의 필립스 음반은 요즘 찾아보기 힘들다.이착 펄만과 메뉴힌의 연주도 가끔씩 듣는 편이다.이 음반에서 기돈 크레머는 늘 보여주던 날렵함을 보여준다.아르농쿠르의 오케스트라도 탄력있다.1악장의 카덴자는 좀 처럼 듣기 힘든 부분이다.피아노와 팀파니 바이올린의 3중협주곡 처럼 구성되었다.기돈 크레머의 소리가 요즘 좀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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