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실비 제르맹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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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 가까와지면 즐겁다. 회사 안나와도 된다는 것 때문이다.그 다음은  신문의 책소개 섹션을 접할 수 있는 날이어서 좋다.거의 모든 신문이 주말이 되면 '책'에 지면을 할애한다..주 5일제가 시행되면서 어떤 신문은 금요일에 책 섹션을 만들고 어떤 신문은 여전히 토요일을 지킨다.회사에 들어오는 주요 신문의 '책 섹션'란은 전부 내가 가져온다. 신문의 책관련 면은 대동 소이하다.어떨 때는 1면에 소개되는 책이 전부 같은 경우도 있다.특히 조중동은 정치,경제면의 색깔이 비슷하듯  소개되는 책들도 비슷하다.한겨레는 언제부터인가 조금 다른 형식의 책 섹션을 만들어서 맘에 든다.단순히 책 소개가 아니라  책을 핑계로 인문사회학적인 주제들을 이야기한다.즐거운 신문읽기다.좀 지루할 때도 있지만.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는 어느 신문의 책 섹션을 읽다가 기억해 두었던 책이다.실비 제르맹이라는 소설가는 낯설었고 번역가는 친숙했다.내가 아는 어떤 분은 번역가에 대한 신뢰만으로도 책을 구입한다고 한다.이 책의 번역가 김화영 교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일게다.신문 책 소개에서 만난 글은 이 책 첫 장에 나오는 문장이다.정말 숨을 멎게 만드는 문장이다.이 책에 딸린 수많은 알라딘 페이퍼들도 이 글을 인용했다.

그 여자가 책 속으로 들어왔다. 그 여자는 떠돌이가 빈집으로, 버려진 정원으로 들어서듯 책의 페이지 속으로 들어왔다. 그 여자가 들어왔다, 문득. 그러나 그녀가 책의 주위를 배회한 지는 벌써 여러 해가 된다. 그녀는 책을 살짝 건드리곤 했다. 하지만 책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직 쓰여지지 않은 페이지들을 들춰보았고, 심지어 어떤 날은 낱말들을 기다리고 있는 백지상태의 페이지들을 소리나지 않게 스르륵 넘겨보기까지 했다. 그녀의 발자국마다 잉크 맛이 솟아났다.

이 첫 문장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내 손에 들어와야만 했다.신비로우며 감각적이었다.실비 제르맹의 뛰어난 문장력은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전체를 관통한다.그녀의 문장은 우선 색채적인 감각이 탁월하다.프라하 도시와 내면의 감정을 색채를 통해 묘사하는 방식이 아주 매력적이다.프랑스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보는 듯 하며 또 드뷔기의 음악을 듣는 듯 하다.하지만 그녀의 색채와 문장의 매력에 혹해서 이 책에 뛰어들면 곧 읽기가 아주 피곤해질 수도 있다. 그녀가 가진 뛰어난 문장력과 몰입을 요하는 묘사력은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다.

이 책은 프랑스의 작가 아멜리아 노통의 책처럼 쉽게 읽히지도 줄거리가 쉽게 정리되지도 않는다.주인공은 누구인지 알 수 도 없다.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가 전도연이라는 페이퍼-프라하의 연인을 인용한-는 나를 즐겁게 했다.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있는 여자가 그 정도의 미모와 애교있는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었다면 이 책을 읽으며 한결 마음 편했을 것이다.작가는 프라하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가 누구인지를 양파껍질 까내듯 서서히 알려준다.책 후반부에 가서야 그녀의 존재에 대해 어렴풋이 알 게된다. 책 속으로 들어간 그녀,발자국 마다 잉크 맛을 내는 그녀.커다란 키에 한쪽 다리를 저는 그녀.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알 수 조차 없는 그녀...... 그녀에 대해 쓰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작가는 책 후반부에 나같이 하나 쯤 잡은 감으로 쩔쩔매는 독자를 위해 그녀에 대한 프로필을 날려준다.

다리를 쩔뚝거리고 가슴은 울고 있는 거인여자는 프라하의 돌들에서 태어났다.시간과 도시 전체가 결혼하여 태어났다..... 그 여자는 돌과 나무,쇠붙이와 물,그리고 도시 주민들의 무수한 몸들에서 태어났다.....그 여자는 도시의 기억-어두운 쪽의 기억이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기억,역사가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 고통을 잊어버린 남자 여자들의 기억이다.그녀는 일체의 영광이 배제된 기억,글로 쓰지도 않고 그림으로 그리지도 않고 노래하지도 않으며 신화와 전설의 빛나는 금빛으로 장식하지도 않은 기억이다.....그 여자는 도시와 한 몸이고 도시의 비물질적인 심장이기 때문이다.

그 여자가 그려지는가?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는 프라하라는 도시와 함께 살아온 시간이며 역사이다.또한 그 인간의 역사가 갖고 있는 슬픔,고통,사랑,좌절이다.그녀가 울고 다니는 것은 그 수많은 죽음과 소외,빈곤,폭력에 대한 연민이다.그녀는 원래 무덤가를 지키는 조각상이기때문이다.김화영 교수는 번역의 말에서 번역할 수 없었던 원제에 대해 설명했다.< La Pleurante des rues de Prague>...직역하면 프라하거리의 우는 여자 라는 뜻이 맞다고 한다.그런데 La Pleurante ...가 무었이냐? 그냥 우는 여자가 아니라 흔히 무덤앞에 조각하여 세우는 '상복차림의 눈물을 흘리는 여인상' 이라는 것이다.(아마도 내 기억이 맞다면 필립헤르베헤가 연주한 포레의 레퀴엠CD 자켓이 바로 La Pleurante 와 유사한 것일게다.) 

그녀의 울음은 수많은 죽음을 위해서이다.이제는 잊혀지고 버려진 죽음이다. 그 공간안에서 이루어졌던 수많은 죽음의 역사 앞에 그녀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는 것이다.

친절한 작가와 번역가 덕분에 그녀가 우는 이유 그리고 그녀의 존재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그녀는 늘 그 자리에 있었던 존재이다.같은 공간 속에서 오래도록 인간의 이야기를 지켜봐오며 가슴 아파한 존재이다.요즘도 가끔 시골을 지나다가 오래된 장승이나 마을 어귀를 지키고 있는 큰 나무를 보면 잠시 상념에 젖는다. 장승이 또는 나무가 보아온 것들, 살아 온 시간들을 그려본다.할아버지의 할아버지..그 할아버지가 어린 아이일 때 부터 그것들은 마을에 있었을 것이다.그가 옆집 갑순이를 떠나보내며 가슴앓이를 토해내는 것도 보았을 것이고 또 장가를 들어 그의 아들이 태어나는 것도 보았을 것이다.또 상여를 타고 그 나무 앞으로 지나가는 것도 보았을 것이다.그 아들의 아들이 전쟁터에서 절름발이가 되어 돌아오는 것도 보았을 것이고 그가 시름시름 앓다가 또 산에 뭍히는 것도 보았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보면 마을 앞의 장승이나 나무가 살아있다는 생각이 든다.그리고 100년 정도의 인생이라는 시간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초월적인 시간이 그 장승과 나무에 깃들어 있다는 생각을 한다.프라하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는 초월하는 시간이며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거대한 무릎안으로 껴앉은 여성성의 시간이다.쩔뚝이는 그녀가 노을을 배경으로 주저앉아 도시를 무릎 안으로 껴앉는 장면은 참으로 거대한 상상이다.

책 말미에 가면 그녀는 사라진다.하지만 그녀는 사라진게 아닐 수도 있다.가시계와 비가시계 사이에서 절며 걸어가는 그녀였기에 세상 어느 곳에나 깃들어 있을 수 있다.작은 꽃잎 속에도 날아가는 나비의 무늬 속에도 철근 콘크리트 기둥 속에고 그녀는 살아서 두 세계를 잇고 있다.실비 제르맹은 그녀를 범신론적인 존재로 만들면서 인간의 역사와 시간을 신의 영역과 연결하고 있다.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는 100페이지를 조금 넘는 짧은 소설이다.실비 제르맹의 천재성은 이 짧은 소설 안에 역사와 시간,신과 인간,고통과 연민이라는 다소 거창한 주제를 담아내고 있다는데 있다.얇은 책이지만 깊은 사유가 바탕이 된 소설이다.만만치 않으니 많이 팔리지는 않겠다.

이 책 누구에서 선물할때는 사람봐서 해야한다.자칫 하면 "이게 뭔 소설이 이따위야.뭔 말을 하자는 건지..."이런 힘빠지는 소리 듣을 수도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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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05-07 18:35   좋아요 0 | URL

필립 헤르베헤의 포레 레퀴엠이다.

1893년 판 연주로 헤르베헤의 명성을 드높였던 음반이다.

그는 몇 해전에 다시 포레의 레퀴엠을 녹음했는데.일명1903년판

녹음이라고 한다.이 연주보다 대편성된 구성을 택했다.

그 음반은 나도 아직 안들어봤다.



 


하이드 2006-05-08 11:06   좋아요 0 | URL

사진 몇개 붙여봐도 되나요.
리뷰 읽다보니 엄청 땡겨버려서 찾아봤어요.

무덤 앞에서 울어주는 여자라니, 슬프네요.






드팀전 2006-05-10 15:53   좋아요 0 | URL
제대로군요...저 옷 주름 사이에 슬픔과 고통이 나온다 이건데....

kleinsusun 2006-05-21 03:00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 정말 잘 쓴다니깐....거구의 남자가 이렇게 글을 맛깔스럽게 쓰다니...ㅎㅎㅎ
저도 이 책 신문 북섹션에서 보고 찜했어요.
책 제목이 넘 맘에 들어요.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나두 가끔 서울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데...ㅎㅎㅎ
Thanks to 하고 갈께욤^^

드팀전 2006-05-21 10:25   좋아요 0 | URL
잘쓰는건 수선님이요..전 날림으로 쓰는 특징이 있어서..빨리 쓰기에 점수를 주신다면 좀 받을만하지요.ㅎㅎ 거구는 아니라니까요...내가 왜 거구야...

2006-05-23 0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동지에게 (미래의 착취자가 될 지도 모르는)                    

지금까지 나는 나의 동지들 때문에 눈물을 흘렸지,
결코 적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오늘 다시 이 총대를 적시며 흐르는 눈물은
어쩌면 내가 동지들을 위해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멀고 험한 길을 함께 걸어왔고
또 앞으로도 함께 걸어갈 것을 맹세했었다

하지만그 맹세가

나 둘씩 무너져갈 때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보다도
차라리 가슴 저미는 슬픔을 느꼈다
누군들 힘겹고 고단하지 않았겠는가
누군들 별빛 같은 그리움이 없었겠는가

그것을 우리 어찌

세월 탓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
비록 그대들이 떠나 어느 자리에 있든
이 하나만은 꼭 약속해다오


그대들이 한때 신처럼 경배했던 민중들에게
한 줌도 안되는 독재와 제국주의의 착취자처럼
거꾸로 칼끝을 겨누는 일만은 없게 해다오

그대들 스스로를 비참하게는 하지 말아다오
나는 어떠한 고통도 참고 견딜 수 있지만
그 슬픔만큼은 참을 수가 없구나

동지들이 떠나버린 이 빈 산은 너무 넓구나
밤하늘의 별들이 여전히 저렇게 반짝이고
나무들도 여전히 저렇게 제 자리에 있는데
동지들이 떠나버린 이 산은 너무 적막하구나

먼 저편에서 별빛이 나를 부른다.

....

....................................................................................

근래들어 가장 바쁜 어제였다.왔다 갔다 하면서 뉴스로 중계되는 대추리 만행을 보았다.저녘 뉴스시간에 TV를 보고.....코 끝이 찡하고 ...한숨이 나오고...답답했다.군인들 참 일도 잘하더군.주황색 체육복 입고 어찌나 빨리 철조망을 가설하는지..전경들도 참 열심히 쳐들어가고....

얼마나 순진했는가? 자신들이 모시던 몇 몇 의장님과 선배들을 여의도에 보내주면 달라져도 뭐가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던 나의 현실적(?)인 대학선배님들은....그들을 믿어보자던 마음 착한 선배님들은...지금 어디서 저 화면을 보고 있을까...

어린이 날인데 회사에 나왔지만 그것 보다 하늘은 더 답답하다....

나 정말 따뜻한 나라로 이민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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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부터 이 만년필을 보려고 인터넷 사이트를 왔다 갔다했다.여기 저기 다 뒤져봐도 가격은 동일.10만원 조금 넘는 수준이다.만년필 가격 치고 그다지 비싼 건 아니다.하지만 워낙 펜들을 잘 잃어버리고 또 남의 것도 잘 가져오는 나여서.....고민된다.이거 있으면 집에서만 써야될 듯 한데.그러면 하루 50자도 쓰지 않을 것 같구.활용을 위해 들고 다니면 2주 안에 잃어버릴게 분명하다...

지금도 집에서 만년필을 하나 쓰기는 한다.주로 책 사면 앞에 서명할 때 쓰는 정도.아마 대학 입학 할때인가 어디서 얻은 파이로트 만년필이다.이것도 자주 안쓰니까 매번 쓸때마다 잉크가 말라서..

그래도 만년필로 글을 쓰는 건 기분 좋다.잉크가 묻어 나올 때 그리고 마르는 것을 바라보는 것도 기분 좋다.종이에서 볼펜 향이 나는 것보다 잉크향이 나는게 좋다.

자판이 생기고 나서 정말 종이에 글쓰는 일이 드물다.

10만원 조금 넘는 이거 하나 사는데도 이렇게 고민하다니...음반 사는데는 팍팍 쓰면서.....

다시 또 며칠 고민할 듯 하다.

어쨌거나 가격대비 디자인 예쁘지 않나요? 펜대는 우드랍니다.

혹시 이거 쓰시는 분이 알라딘에도 계시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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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6-05-03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스... 지금 쓰는 같은 회사의 GRIP샤프도 좋지만 디자인 정말 최강임다. ㅠ_ㅠ

전 실제 종이에 선을 쳐 봐야 이해가 되기 때문에 손에서 샤프 놓을 일이 없네요.
그나저나. 하루에 천원씩 모으세요. 세달이면 사겠네요. ㅎㅎ

파란여우 2006-05-03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섹쉬한 자태...매너님 말마따나 하루에 천원씩 모아서 세달만에 질르는 기분도 괜찮겠는걸요. 음, 차라리 염소를 한마리 팔아야 하나...^^;;

드팀전 2006-05-03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오랜만이에요...그죠.섹쉬하죠.천원씩..켕....언젠가 염소 보러 놀러가고 싶어요.ㅎㅎ 그전까진 염소를 사수하시오....ㅎㅎ

mannerist 2006-05-03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염소를 가서 보기만할까요.. 과연.. '사수'를 외치는 걸 보니. ㅎㅎㅎ
저랑 같이 가요. =)

stella.K 2006-05-03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에도 만년필 쓰는 사람이 있군요. 전 중학교 때 겉멋들어 쓰다가 차츰 안 썼는데...저도 갖고 싶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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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 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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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대학 동문회에 갔다.물론 이 지역에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거대한 학교 동문회가 아니라 같은과 출신의 비슷한 업계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교수들도 있고 공기업 지부장도 있고 이사급도 있었다.70년대 학번부터 80년대 학번...그리고 마지막이 90학번이었다.그 밑으로는 이 지역에 우리과 사람들을 거의 본적이 없다.자주 모이는 모임은 아니고 1년에 한두번 하는 모임이다.비슷한 업계에 있다보니 주제의 공유는 쉽다.물론 입장의 차이는 있겠지만.....1차 횟집,2차 노래방...... 노는건 또 비슷하다.일찍 도망쳤다. 나는 이렇게 여럿이 모이는 만남이 즐겁지 않다.그냥 소수로 만나면 또 다들 다를텐데..여럿이 모이면 하여간 별로다.어제 노래방은 7080콘서트였고....일찍 집으로 돌아온 나는 존재의 비애감 같을 걸 느꼈고..이유는 모른다......집에 와서 자정 가까운 시간에 푸르트뱅글러가 1954년에 지휘한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을 들었다.나의 우울한 기분을 알아주는 와이프는 옆에서 함께 음악을 들었다.뱃속의 아이는 베토벤을 좋아하는듯 가끔 발길질을 했고...술 한잔 한 나는 내 멋에 겨워 푸르트뱅글러 신이 몸에 들어온듯 혼자 지휘를 하고 흥얼거리다가....4악장의 첼로 하강에 이어지는 상승부를 따라가다 두 손을 번쩍 들고' 베토벤 만세'를 외쳤다.와이프는 나의 하는 짓을 보면서 그냥 웃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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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6-05-03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지난 주말 애인의 집에서 점심 먹고 이 음반 들으며 드팀전님과 비스무리하게 놀았더랬죠. 협주곡만 좋아하는 사람이라. ㅎㅎㅎ


드팀전 2006-05-03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ㅜㅜ 난 논거 아닌데...."존재론적 우울"이었다니까요.베토벤을 들으며 위안받고 탈출하는 치료과정이었는데...어쨋거나

mannerist 2006-05-03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끙;;; 뭐 눈에 뭐만 보이는 벱인가봅니다. 쿨럭;;;;;

그러고보니까. 얼마전 본 드라마 '연애시대'의 두 이혼남, 이혼녀. 감우성, 손예진이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도 저 대사가 나왔어요. 감우성이 드팀전님과 비슷한 감정에 젖어 '존재론적 우울' - 실제 이 대사를 쳤던 걸로 기억합니다 - 을 논하자, 처음에는 다독다독 위로해주던 손예진이 감우성의 가오를 참다못해 구박을 하기 시작하더군요. "에라~~~ 이 인간아, 내가 잘해줄려고 해도 잘해 줄 수가 없어요~~~ 니가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블라블라블라~~~" 뭐 그 장면 자체는 감우성을 대단히 희화하면서 상대적으로 손예진을 띄워준 장면이었고 그 분위기 반전에 키득거리긴 했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쫌 씁쓸하더군요. 그런 기분이 필연적으로 사람을 짓누를 때도 있는데 사춘기 소년의 기우로 치부하며 구박하는게. 저도 지금의 조증을 너머 울증이 올 때가 분명 있을게고... 또 비슷하게 탈출하겠죠.

어제는 집에 출장나온 회사 선배가 자고 가느라 놓쳤네요. ㅎㅎ

드팀전 2006-05-0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사춘기 우울 맞아요....근데 나는 화장터에 올라갈 때까지 그럴꺼 같아요...
그래도 동의하삼.베토벤은 위대하다.!! 매너님 혹시 "러브 오브 시베리아"인가 보셨나 모르겠네... 주인공을 괴롭히던 고집불통 중사가 새벽에 절벽 위에서 큰소리로 외칩니다."모짜르트는 위대하다."...ㅎㅎ 드팀전도 외칩니다 "베토벤은 위대하다.만세"

글샘 2006-05-03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만세... ㅍㅎㅎㅎ 좋은 아내군요.
아빠가 우울하시면 아기가 싫어합니다.ㅎㅎㅎ

mannerist 2006-05-03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그거 말러 죽을 때의 오마쥬인가요. 죽을 때 '모차르트!'외치면서 죽었다고 하던데. 저역시 미투로 외침다. "베토벤은 위대하다. 만쉐이~"

저는 제르킨/쿠벨릭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들어야겠네요. =)

드팀전 2006-05-03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영화 안 봤으면 꼭 보세요.모짜르트 음악이 영화 내내 나오거든요...연인이랑 보기도 너무 좋고..시베리아 벌판도 너무 멋지고....꼭 보세요.<러브 오브 시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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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뜬다
얕은 물에는 술잔 하나 뜨지 못한다
이 저녁 가슴엔 종이배 하나라도 뜨는가
돌아오는 길에도 시간의 물살에 쫓기는 그대는

얕은 물은 잔돌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
큰 물은 깊어서 소리가 없다
그대 오늘은 또 얼마나 소리치며 흘러갔는가
굽이 많은 이 세상의 시냇가 여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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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하나 제대로 외우고 있는게 없다.고등학교 국어시간 외운 시들도 이제는 가물가물하다.시를 외우는 것은 쉽지 않다.그래도 이상하게 정지용의 <향수>는 이래 저래 기억난다.조용남,박인수의 노래때문이다.시인들과 포크가수들이 모여서 음반작업을 한 적이 있다.지금도 그 작업은 계속된다.<나팔꽃> 이었던 것 같다.백창우도 우리 시에다가 노래를 입혀서 몇 장의 음반을 냈다.<나팔꽃>의 음반에 들어 있었던 시여서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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