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가 너무 많은 시간을 여의고 나서 그때 온전한 허심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지나간 시간 위로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세차게 몰아쳐서 눈을 뜰 수 없고 온몸을 안으로 안으로 웅크리며 신음과 고통만을 삭이고 있는 그동안이 자네가 비로소 돌이 되고 있음이네

 

 자네가 돌이 되고 돌 속으로 스며서 벙어리가 된 시간을 한 뭉치 녹여 본다면 자네 마음속 고요 한 뭉치는 동굴 속의 까마득한 금이 되어 시간의 누런 여물을 되씹고 있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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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춘 시인을 알게 된 건 신경림의 책을 통해서다. 출판업에 있으며 틈틈이 시를 쓴 시인이다.60이 다되어가는 나이에 첫 시집을 낸 시인.그의 시가 뿜어내는 압축미는 대단히 선명하다.<돌의 시간>에서 표현은 조금 다르다.하지만 영겁의 시간을 압축하는 정서는 그대로인 듯 하다.많이 알려진 <봄 파르티잔>.이나< 죽편> 같은 시들을 보면 시인의 시선과 담백한 마음이 한꺼번에 느껴진다.오늘은 몇 년전에 읽고 좋아했던 <돌의 시간>이 문득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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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지나갔고...5월 회사에 택배가 도착했다.

 야테르베리 라는 스웨덴작곡가다.1974년에 죽었으니 현대 음악가인가..그러나 현대 음악이라 쫄 필요는 없다.그의 음악은 후기낭만주의에 다가 북유렵적 정서가 가미된 형태이므로...교향곡 3번은 서해바다를--걔네들 서해겟지만-묘사했고 6번은 슈베르트 서거 100주년 작곡대회에서 1등상 받은거란다.교향곡 3번의 바다 묘사는 장엄하면서도 고요하다.2악장의 태풍 묘사는...죽음이다.스피커 터지는 줄 알았네.

 

 알라 파블로바...여자다.러시아 출신인데 불가리아에서도 좀 살고 지금은 뉴욕에서 산다.여기 작품들은 2000년대 작품들이니 가장 현대적 음악이다.그러나 다시한번 현대 음악이라고 쫄지말자.왼쪽CD 는 교향곡 1번 '러시아와의 작별' 이란 부제가 있다.요건 좀 조성인 왔다 갔다하니까 어렵다.교향곡 3번은 따뜻하고 온화하다.듣기 좋다는 뜻.옆에 푸른 재킷의 CD는 모음곡 중심이다.이거는 듣기 편하다.비유하자면 거쉰 정도의 분위기.드라마 음악처럼 재즈처럼 들으면된다.


닐센의 CD 그의 협주곡을 모아 놓은 것이다.한장에 바이올린,클라리넷,플루트 협주곡이 들어있다.바이올린 협주곡만 고전적인 3악장이고 나머지는 단악장,두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다.바이올린 협주곡만 들었는데..일단 연주가 좀 아쉽다.빈약한 낙소스의 오케스트레이션.다른 연주 음반을 찾아야 될 듯...옆은 바리오소 망고레의 기타작품집..2집먼저 듣고 1집을 샀다.유명한 '성당'이 들어있다.언제나 훌륭한...남미 기타 시리즈

그러고 보니 오늘 도착한 CD들은 다 현대 음악이다.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중반까지 살았던 작곡가들.요즘 이 맘때 작곡가들의 음악을 많이 듣는 것 같다.그래도 무조음악 같은 것은 아직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다분히 후기 낭만주의의 행로 위에 놓여 있는 작곡가들이다.바흐 베토벤이 물론 이들 음악보다 훨씬 좋다.그래도 요즘 이들 음악을 찾아듣는 이유는...레퍼토리의 확장과 호기심.

이외에도 4월달에는 이런 음반을 들었다.질렀다를 좀 예쁘게 말했다.












나자레스음반은  탱고 음악이다.랙타임이 많이 들어간 탱고음악.이것 말고도 나자레스 음반을 아마존에서도 하나 주문했는데 레퍼토리가 조금 겹치는 부분이 있다.그 다음 음반은 노르웨이 바이올린 작품집 이다.이 음반은 올레 불이라는 노르웨이 음악사에 있어서 빠져서는 인물의 음악이 중심이된다.바이올린 선이 조금 얇아서 안타깝지만 북구의 서정과 또 민속적 정서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좋은 음반이다. 세번째 음반은 로드리고 피아노 협주곡 음반이다.아랑훼즈 협주곡으로 많이 알려진 그의 피아노 협주곡 음반이다.그가 피아노 협주곡이 있을 줄이야.아랑훼즈 협주곡 처럼 낭만적인 아다지오를 들려준다.네번째 음반은 2바이올린 1기타 음반이다.텔레만과 코렐리 등의 음악이 들어있다.바이올린과 기타가 잘 어울린다는 것은 파가니니를 들어봐도 알 수 있다.그런데 이 음반은 조금 지루한 느낌을 준다.곡들의 악상이 서로 비슷해서인가.

아놀드벡스의 피아노 작품집이다.낭만적인 음반이다.드뷔시적인 느낌이 아주 강하다.회화적 느낌이 강하지만 드뷔시보다는 격이 조금 떨어진 느낌이다.피아노를 맡은 와스의 연주는 아주 훌륭하다.

야곱 클라인 음반은 한동안 품절이다가 최근 풀렸다.바로크첼로,비올,클라비생의 트리오 소나타 형식이다.분위기 있고 연주도 훌륭하다.

 

 

 

 

 

 

 

 

음반 자킷이 예쁘니까 큰 사이즈 그대로...세실 샤미나데 라는 여자 작곡가의 피아노 작품집니다.이 작품집은 석장이 나왔다.그중 처음 나온 1,2집이다.작은 피아노 소품들인데 소위 말하는 19세기 말 살롱풍의 음악이다.풀랑의 음악을 듣는 것 같기도 하지만 풀랑보다는 훨씬 대중적이고 귀엽다.곡들이 대개 3-4분 내외로 짧지만 낭만적이고 아름답다.

그외에도 율리우스 베르그의 바흐 무반주 모음곡을 한장 풍월당 실장에게서 얻었다.율리우스 베르그의 자필 싸인이 있는 WEGO의 음반이다.인터넷에 이미지가 없다.앨범 자킷이 일본 서화 비스무리한게 괜찮다.율리우스 베르그가 이 음반에서는 바로크 체로로 무반주 모음곡을 연주한다.녹음이 좀 멀리서 잡힌 듯 한 느낌을 준다.화려하거나 뽐내지 않는 고답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음반이다.쉽게 구할 수 없는 음반에 싸인까지 있으니 풍월당 실장에게 고마와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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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05-01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걍 그거 복사하삼? 안돼나요...ㅎㅎ 요즘 조금 시간과 정신이 없어요.조만간에 다른 분위기로 하나 또 만들어볼께요.언제가 될라나....
 
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3
빌헬름 라이히 지음, 황선길 옮김 / 그린비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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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메이데이'-노동절이다.매일 일하는 노동자는 푹 쉬어야 되는데 회사에 나왔다.그닥 억울한 생각은 들지 않는다.공휴일에 일해 본 회사원은 알 것이다.조용한 회사는 일하기 꽤 괜찮다.위에서 지랄 거리는 아저씨들도 없고 ,지랄 거리지 않아도 있는 것 자체로 부담되는 또 다른 아저씨들도 없고...즐거운 메이데이!!

빌헬름 라이히의<파시즘의 대중심리>를 읽는데 보름이 걸렸다.'공사'가 '다망'하다 보니.(그렇다면 건축주는 쪽박차는 건가? 에이 썰렁) 서울 출장가는 KTX에서도 보고 피케팅 한다고 죽치고 앉아 있던 스티로폼 위에서도 보고(그 피케팅은 대개 버티기였으므로)....그나마 반쯤 넘기고 나니까 끝이 보여서 탄력 받았다.먼저 이 책은 나같은 일반인에게 약간 두려움을 준다.이거 또 개풀 뜯어 먹는 소리를 해대지 않을까 하는..내지는 이 책 다 보고 나서도 기억남는 것은 단 한줄의 문장 정도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같은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본 이유는 '파시즘'에 대한 개인적 호기심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역사적 파시즘 역시 관심의 대상이었고 또 일상적 파시즘에서 말하는 '대중동의'라는 부분도 늘 연구해보고 싶은 대상이었기 때문이다.또한 공부는 석박사만 하는게 아니라는 생각에 나같은 회사원도 책을 볼 수 있다는 쥐뿔 자존심에 읽었다...언젠가 이야기 했던 적도 있는 경험인데 .어떤 박사님이랑 이야기하다가 내가 문득 뭣도 모르고 '푸코'...'부르디외' 뭐 이런 이야길 꺼냈더니 이거 완전 사람보는 눈이 달라졌다.그런 용어들은 자기들의 전문영역인데 하찮은 일반인이 그런 단어를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쓰니까 놀랐겠지.그런데 그깟 단어 몇 개에 사람보는 눈이 달라지다니...광고에서 그렌져 타고 다니는 오래전 애인을 보고 '당신 잘사셨네요' 라고 카피 날리는 것과 똑같은 수준에서 유치했다.많이 배우신 박사님들도 유치하다.(휴..알라딘의 박사님들 계실테니 저의 편견을 용서해주삼.) 어쨋거나 평민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 가끔은 졸면서 가끔은 넘어가면서 라이히의 책을 다 읽었다.라이히의  개념과 용어가 낯선 부분은 있었다.성경제학이니 오르곤이니 하는 것들은 대충 무슨 개념인 듯 하다라고 그려지긴 하지만 내 판단이 옳은지는 모르겠다.그러나 평민의 자긍심(무식에 힙입은)으로 이런것들은 대충 또 무시할 수도 있다.그렇게 '그냥 이런 거겠지'라고 생각하고 읽다보면 그다지 어렵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수도 있다.(거참 내가 쓰고도 너무 말어렵게 한다...하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평민의 도망갈 구멍 만드는 어법이라니)

라이히의 이 책에서 파시즘을 '대중의 비합리적 성격구조'의 표현이라고 밝힌다.아마 일상적 파시즘 논의에서 라이히가 중요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부분이 이 문장에 담겨있을 것이다.라이히는 본인이 직접 서문에서 프로이트와 맑스의 변증법적 변화를 도모한다라고 밝힌다.특히 맑스의 경우 대중심리학의 지식이 없었으므로-이것은 일반 사회학 전체에 통용된다-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대립만을 제시할 분 그들이 성격차원에서 계급구분이 없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한다.라이히는 우선 파시즘의 이해를 위해 이러한 통속적인 맑스주의 개념을 종식시킬 것을 권한다.즉 경제 결정론과 계급론적으로 파시즘에 접근하면 파시즘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쉽게 말하면 노동자들이 억압받다보면 이거 한번 뒤집어 없자 하고 불끈 일어나야 돼는데...파시즘의 도래를 보니까 그게 영 아니었다는 것이다.이거 불끈하고 일어서기는 커녕 '하이 히틀러' 하면서 손을 번쩍 드는데 이 상황을 맑스의 계급투쟁론가지고는 설명이 안된다는 것이다.조금 더 시대를 거슬러 80년대 우리상황과 대치시켜도 비슷해진다.변혁세력 중 일부는 '민중'에 대한 거의 종교적인 믿음을 가졌다.즉 '민중'은 위대하고 '민중'은 무오류적이라는 식의 발상이다.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그렇지 못한 경험들이 발생한다.이때 그 일부..감상적 민중주의자들은 쉽게 도망갔다."그게 다..지배권력의 이데올로기 조작으로 인해 민중이 각성하지 못했기 때문이야..끝." ...라이히는 당시 사회민주주의 세력들 역시 이와 비슷하게 너무 쉽게 대중의 권위주의적이고 비합리적인 속성을 간과했다고 말한다.그 틈새를 가장 잘 파악하고 정치적 선전을 통해 대중의 속성을 활용한 것이 바로 파시즘이라는 것이다.

결국 라이히는 대중에 대한 -물론 이것이 변혁세력이 말하는 민중과는 다른 개념일지라도-객관적인 응시를 주장한다.대중은 결코 선이 아니라는 것이다.비합리적이며 책임감이없다.또한 신비주의에 자신을 의탁시켜며 권위주의에 호응한다.물론 라이히가 대중을 이렇게만 파악하면 더이상 인류역사 발전을 기대할 수 없었을게다.그는 대중이 원래 자유를 본원적으로 생각하며 또한 억압을 걷어내고 긍정적 변혁 주체가 될 수 있음도 밝히고 있다.라이히의 대중에 대한 시각은 그러므로 부정적이라는 것보다는 입체적인 객관화에 중심을 두었다고 할 것이다.

파시즘의 발호에 가장 중심에는 당시 독일 소시민계층이있었다.파시스트세력 역시 노동자계층보다 소시민계층에 우선적인 정치작업을 펼친다.계몽된 이성의 승리 표상이던 이 시민계층이 도대체 왜 얼토당토않은 파시스트의 중심축이 되었는가? 또한 소시민층에 이어 역사발전의 중심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왜 한줌 파시스트 정치꾼들의 손을 들어주었는가? 라이히는 파시즘에 손을 들어준 동시대인들의 마음 속에는 어떤 악마가 숨어있었는지 탐구한다.이 부분이 <파시즘의 대중심리>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내용이며 라이히의 파시즘에 대한 접근법의 핵심이다.책에서도 가장 많은 부분이 할애돼어 있다.상세하게 설명할 능력도 없고 이해도도 떨어지기에 그저 평민수준의 이해로 설명할 수 밖에 없다.파시즘의 대중심리의 가장 핵심에는 가족이데올로기,그리고 유아기때부터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의 억압,기독교 원리에서 나오는 신비주의적 가치 등이 있다.

권위주의적 사회는 권위주의적 가족의 도움을 받게된다.이것은 개개인의 성격구조 형성에 지대하다.이를 통해 가족-국가-문명이 형성된다.라이히는 이렇게 말한다.

권위주의적 국가는 자신의 대리인인 아버지를 모든 가족에 두고 있으며 이를 통해 가족이 국가의 가장 가치있는 권력도구가 된다.소시민적 영향력 아래에서 여성은 성적 반항 위에 체념하는 태도를 발전시킨다.아들은 권위에 복종하는 태도와 병행하여 이후 모든 권위에 대해-아버지를 통해 습득된- 동일시,내면화 한다.

가족 내의 아버지에 대한 동일시는 결국 지도자에 대한 동일시로 발전하게 된다.사회문제에 있어서 지도자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대중은 정치적 결정에 있어서 내적인 모순에서 오는 갈등을 해소한다.그리고 책임감의 부채로 부터 탈출할 수 있다.

또한 라이히가 강조하고 있는 성적 억압 역시 가족 내에서 이루어진다.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알 수 있듯이 가부장제와 이에 바탕이 되는 가부장 권위주의는 가모장제가 사적 축적을 통해 붕괴되면서 발생한 것이다.정착을 통한 사적 축적은 일부다처의 형식을 띠게 되고 그전에 있던모계 사회의 '성적 자유'는 억압된다.'성적 자유'는 권위에 의해 박탈되고 상품화되어 권위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토대가 된다.요즘도  볼 수 있는 공익 캠페인을 생각해보면 아주 쉽다. '가족보호=성적 순수성=안전한 사회'로 이어진다.이러한 도식은 이런 반대로도 적용된다.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보호=성적 억압=도덕주의의 강화.' 파시즘 역시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기대고 있기때문에 도덕주의적인 태도를 취한다.이것은 파시스트들의 볼세비즘의 성적 해방에 대한 왜곡된 선전을 소시민들의 도덕적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

성의 억압을 위해 파시스트들이 가장 관심을 가진 연령층은 역시 '어린이와 청소년들'이다.성의 억압을 위해 또 함께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기독교의 도덕주의'이다.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성에 대한 죄의식에 바탕을 두고 존립하는 종교이다.(기독교인들은 싫어하시겠지만..) 인간은 기본적으로 죄책감 없는 긴장완화를 추구한다.가부장적 종교는 이의 완화를 위해 종교적 제의를 이용하여-파시스트들 역시 유사하게 종교적 감흥을 일으키는 대형집회를 조직한다-무력감에 빠진 인간을 조종하게된다.성의 억압은 종교적으로는 마조히즘적인 무력감으로 탈출하고 또 반대로 인종주의,순혈주의,민족의 우수성등의 조작에 의해 사디즘적 공격성으로 표출된다.

이 책에서 라이히가 다루고 있는 파시시트 정체는 히틀러로 대표되는 '독일파시즘과 스탈린의 소비에트 파시즘'이다.책의 후반부는 소비에트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라이히는 소비이트 문제를 다루면서 자신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를 제시한다.소비에트가 파시즘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은 레닌이 주장한 국가없는 사회 자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국가가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는 점에 문제를 삼는다.라이히는 일종의 코뮨을 주장한다.하지만 그는 이것이 정치 체계나 이데올로기라고 말하지는 않는다.노동민주주의라는 것이 그것이.일종의 일하는 사람들간의 공동체 같은 형태,직능간 합리적 교류와 상호발전이 가능한 코뮨이다.라이히는 노동자의 개념을 맑스 시대보다 확장한다.요즘 말로 하면 화이트칼라들도 포함하는 노동자층의 자치가 노동민주주의의 형태가 된다.

라이히는 대중들의 성적인 경직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형식적인 민주주의는 가능하지만 실제적 민주주의는 힘들다고 말한다.이 성적 억압의 문제는 당 시대에 부여된 문제가 아니라 수 천년을 걸쳐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내재화되온 것이기 때문에 혁명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라이히는 현 시대 사람들은 이미 성적 억압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가능성은 있으나 근본적 변화는 어렵다고 본다.성에 대한 긍정과 성에 대한 사회적 보호가 바탕이 된 상태에서 자란 새로운 세대만이 진정한 파시즘의 위협과 결별하고 사회 자치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라이히가 말한 '대중의 비합리적 성격구조'는 파시즘의 이해에 중요한 요소이다.또한 독일의 전형적 파시즘이 없어지고 난 이후에도 유사한 권위주의 정권과 이에 대한 대중 동의를 이해하는데 이 점은 여러가지 시각을 제시해준다. 유럽은 파시즘이라는 아픈 기억을 통해 파시즘을 역사의 반동으로 파악하는 광범위 대중들의 합의가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일본 제국 주의의 피해자로서의 위치에만 익숙할뿐 우리사회에서 유사 파시즘의 발호와 이데올로그에 대해서는 그다지 고민하지 않았다.지금도 군사정권이 가진 유사파시즘적 성격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수많은 대중들이 존재한다.그리고 그들이 남겨 놓은 유사파시즘적 속성들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이것들을 이해하는데 라이히의 이 책은 여러모로 유의미하다.

하지만 몇 몇 궁금한 점들도 남아있다.(아는게 별로 없어서 학문적 질문이 되긴 어렵지만..)라이히의 논지는 기본적으로 '프로이트의 성억압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즉 유아기적 성의 억압이 무의식속에서 인간의 이후 모든 삶에 지속적으로 관여한다는 것이다.라이히에 대한 비판이라기 보다는 프로이트의 성학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비판과도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과연 '성의 억압'이라는 것이 그렇게 절대적인 것인가?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밝혀내고 유아기의 성을 찾아낸 것은 중요한 발견이지만 유아기 성의 억압 문제를 너무 과대해석한 것은 아닌가? 프로이트의 오른팔인 칼 융이 프로이트와 결별을 선언한 것도 프로이트의 성결정론에 대한 반대때문이었다.비록 칼융이 신비주의에 빠져 나치에 이용된 감은 없지 않지만..또한 들뢰즈와 가타리 역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론에 대해 '괴테 시대의 상상의 산물'이라는 둥 '의식 과잉의 백치의 상상'이라는 둥 프로이트를 꼬집고 있다.프로이트 이론에 가장 1차적 비판인 '과잉성결정론'을 라이히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성 싶다.또한 학문적으로 프로이트 이론이 가진 가장 난맥상인 '검증가능성'의 원죄 혐의 역시 라이히가 떠안을 수 밖에 없다.무의식의 성억압을 어떻게 증명할 것이며 또한 이것이 파시즘으로 연결되는 고리는 또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로버트 팩스턴은 <파시즘>이란 책에서 조금 유치하고 일차원적이기는 하지만 라이히의 주장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 파시즘의 지도자 및 그 추종자들이 성년으로 활동하던 시기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영국 등 다른나라에 비해 독일,이탈리아에서 특별히 성적 억압이 심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즉 성적 억압이라는 것은 한 국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통시적이며 공시적인 성격을 갖는 것인데 왜 다른 나라에서는 파시즘의 발호가 없거나 미약했으며 독일과 이탈리아만 국가 전체적으로 발호했는가? 독일과 이탈리아 사람들이 더 억압받아서?  성적으로 억압된 대중들의 전향적인 파시즘 지지에 대해서도 좀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다.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기본적으로 라이히가 말한 파시즘 내에서 대중들의 기계론적이고 신비주의적 생활태도에 대해서는 동의를 했다.하지만 라이히가 성의 억압이라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간 것에 비해 문화산업이라는 쪽에 혐의를 두었다.문화산업을 통해 관리되는 세계 속에서 대중들이 수동적으로 인간으로 전락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물론 대중문화의 혁명성과 대중들의 자발성에 대해 부정적인 아도르노의 입장을 고려하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지만 '성의 억압'보다는 현실성이 있어보인다.

라이히가 말하는 '노동민주주의'라는 것도 난망하다.'노동민주주의'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라이히가 실험실에서 흰 가운입고 있는 의사라는게 명백히 드러난다.도대체 '노동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자치는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인지 막연하고 또 이상적이다.라이히의 말에 따르면 기존 정치체계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이 신개념이 낯설게 보이는 것일 것이다.라이히가 말하는 노동민주주의의 자치 개념은 1차적으로 성적 억압이 없는 -아니 최소한 어느정도는 사라진-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다.또한 지엽적인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자치개념이다.내게는 이것이 일종의 기독교의 천국 개념처럼 보인다.라이히의 실험실에서는 이러한 코뮨이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하지만 소규모의 대안적 코뮨이 아니라면 과연 이것이 현실 속에서 가능할 것인가? 가능하다고 믿는 다면 인류 역사가 구현해 놓은-설령 빌어먹을 것이라도- 현실의 정치,경제,사회의 촘촘한 구조를 너무 쉽게 해체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아닐까?

프로이트가 위대하게 거론된 것은 그의 논지가 무오류이기때문은 아니다.그가 밝혀낸 것이 이후 수많은 학문적 연구와 사회 분석에 시초가 되었다는 것이다.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1940년대 파시즘이 한창 발호중일 때 이런 위대한 책을 써낸 것은 참으로 놀랍다.또한 그가 가진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이후 그의 사회,심리학적 접근이 후속 연구를 이끌어낸 것을 생각하면 역시 이 책은 고전의 반열에 오를만하다.

모를 때는 넘어가고 지겨울만 하면 쉬어가는 평민의 '까잇거' 근성만 있으면 <파시즘의 대중심리>을 책장 한 켠에 꽂아두고 두고 두고 펼쳐볼 수 있다.이런 책들을 학자들의 전유물에서 끄집어 내는 것이 또 평민의 역할이고 '까잇거'정신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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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2006-05-01 14:11   좋아요 0 | URL
훌륭한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언젠가 읽어야 겠다 마음먹고 보관함에서 나올줄 모르고 있던 <파시즘의 대중심리> 어서 읽어봐라 하는 좋은 리뷰이네요.
<빌헬름 라이히>도 꼭 읽고 싶은데 계속 품절로 나오네요.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드팀전 2006-05-01 18:49   좋아요 0 | URL
훌륭한 리뷰인지는 잘 모르겠구요....ㄳ 평민이 잘 알아야 뭘 얼마나 잘알겠습니까..
파시즘에 관심이 있다면 읽어보면 좋으실 듯 해요.까잇거 읽으면 되는 거죠.뭐 ㅎㅎ

글샘 2006-05-01 21:06   좋아요 0 | URL
저도 읽어보고 싶은 책이군요. 요즘 한국 정치 상황을 보면, 파시즘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휑하게 보이는 것 같지 않나요? 진정한 코뮨은 극한 상황에서나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합니다. 리뷰를 읽는 동안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는데, 뭐라고 코멘트를 달긴 달아야겠는데... 횡설수설이군요. 잘 읽고 갑니당.

드팀전 2006-05-01 23:53   좋아요 0 | URL
저도 횡설수설인데요..피차무마 .. 파시즘을 어떻게 규정하냐에 따라 다르지만..전 파시즘이란 용어를 너무 광범위 하게 쓰는데는 좀 반대합니다.그렇기때문에 파시즘의 도래같은 것은 별로...하지만 파시즘적인 속성들에 대한 각성은 있어야 겠지요.황우석같은 사건들은 전형적인 파시즘적 대중심리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또한 개인적으로 코뮌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이게 근대 국가가 현실 자체인 상황에서 가능할까..에는 무지 의심이갑니다.자칫 코뮌이 배운자들의 상상의 공동체가 될 가능성이 있어서 조심스럽습니다.뭐 소수자 운동을 통한 코뮌의 실험이야 각종 공동체를 통해 어느정도 가능하다고 봅니다만..하지만 그 외의 사람들을 어떻게 하나요..코뮌이 뭔지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들은 결국 근대성의 완성 내지는 근대의 재구성을 통해서 어떻게든 살기 나아지게 해야하지 않을까요.... 댓글로 또한 횡설수설이네요.에궁!! 안녕히 주무세요.

드팀전 2006-05-01 23:56   좋아요 0 | URL
구두님>오호라..제가 거의 몇년만에 처음 밤에 알라딘하는데..다들 이 시간에 주로 활동들 하시는구만요.밤에 보니 반갑습니다.우하하...

돌바람 2006-05-02 10:57   좋아요 0 | URL
까잇거 정신으로 조만간 책을 펼쳐야겠어요. 저도 사다만 놓고 언젠가 보겠지 그러고 있었답니다. 까잇거! (이거 비밀인데요) 저는 저 책 두부 물 뺄 때 눌러놓을 때 쓰고 있답니다. 출판사 관계자들이 보면 무식한 아주마니라고 할라나요. 까잇거 읽지요 뭐. 까잇거! 리뷰는 나중에 읽을래요^^

딸기 2006-06-08 09:45   좋아요 0 | URL
흙흙 이것도 사야하는 것인가... 유혹이로군요. 일단 땡스투 해놓고~~
 

장마 걷힌 냇가
세찬 여울물 차고 오르는
은피라미떼 보아라
산란기 맞아
얼마나 좋으면
혼인색으로 몸단장까지 하고서
좀더 맑고 푸른 상류로
발딱발딱 배 뒤집어 차고 오르는
저 날씬한 은백의 유탄에
푸른 햇발 튀는구나

오호, 흐린 세월의 늪 헤쳐
깨끗한 사랑 하나 닦아 세울
날랜 연인아 연인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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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강원도는 물고기들이 저 낳은 곳을 찾아 돌아오는 시절이다.인터넷으로 황어 한마리가 물살을 헤치며 뛰어 오르는  사진을 보았다.왠지 비장해 보였다.물론 그  다음에는 어도가 너무 높게 설치되어서 오르다가 밖으로 튕게 나가거나 지쳐 죽은 황어떼  사진이 이어졌다.요맘때 물의 수량과 어족의 생태를 고려하지 않은 어도 설치가 문제다.물고기들이 사는 길에 인간의 손길이 닿는 것 까지는 어쩔수 없이 이해한다만 좀 헤아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어려운 길을 돌아 고향을 찾은 황어떼들이 날래고 깨끗한 사랑 하나 낳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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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

해남 들 가운데를 지나다가

들판 끝에 노을이 들어

어찌할 수 없이

서서 노을 본다

노을 속의 새 본다

새는 내게로 오던 새도 아닌데

내게로 왔고

노을은

나를 떠메러 온 노을도 아닌데

나를 떠메고 그리고도 한참을 더 저문다

우리가 지금 이승을 이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저 노을 탓이다

이제는 이승을 이승이라고 부르지 말자고

중얼거리며

조금씩 조금씩 저문다

해남 들에 노을이 들어 문득

여러 날 몫의 저녁을 한꺼번에 맞는다

모두 모여서 가지런히

잦아드는 저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가슴 속까지 잡아당겨 보는 일이다

어쩌다가 이곳까지 내밀어진 생의 파란 발목들을

덮어 보는 일이다

그렇게 한번 덮어 보는 것뿐이다

내게 온 노을도 아닌데

해남 들에 뜬 노을

저 수천만 평의 무게로 내게로 와서

내 뒤의 긴 그림자까지를 떠메고

잠긴다

(잠긴다는 것은 자고로 저런 것이다)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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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미황사에서 노을을 기다렸던 적이 있다.너무 시간이 부족하여 미황사에서 바라보이는 섬들만 보다 내려왔다.해남 들녘을 달리는데 논과 산 사이로 붉은 구름과 푸른 구름이 엇갈렸다. 짧은 순간에도 하늘의 색은 수시로 변했다.해남 들녘을 걸어야만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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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6-04-28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을지는 길을 달리다 보면 굽이굽이 그 짧은 순간도 다르게 보입니다..참말로 늘 느껴요..
언제봐도 멋진 곳..시원한 곳..공기 좋은 곳..바람 휑 하니 시원한곳...인심좋은 사람들 많이 사는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