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등꽃 나무 아래/김명인

오늘은 급식이 끝났다고, 밥이 모자라서 
대신 컵라면을 나눠주겠다고, 
어느새 수북하게 쌓이는 
벌건 수프 국물 번진 스티로폼 그릇 수만큼 
너저분한 궁기는 이 골목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니라 
부르면 금방 엎어질 자세로 
덕지덕지 그을음을 껴입고 
목을 길게 빼고 늘어선 앞 건물도 허기져 있네 
나는, 우리네 삶의 자취가 저렇게 굶주림의 기록임을 
새삼스럽게 배운다, 빈자여, 
등나무꽃 그늘 아래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며 
우리가 무엇을 이 지상에서 
배불리 먹었다 하고 잠깐 등나무 둥치에 기대서서 
먹을 내일을 걱정하고, 먹는 것이 
슬퍼지게 하는가 
등꽃 서러움은 풍성한 꽃송이 그 화려함만큼이나 
덧없이 지고 있는 꽃 그늘뿐이어서 
다시 꽃 필 내년을 기약하지만 
우리가 등나무 아랫길 사람으로 어느 후생이 
윤회를 이끌지라도 무료급식소 앞 이승, 
저렇게 줄지어 늘어선 행렬에 끼고 보면 
다음 생의 세상 
있고 싶지 않아라, 다음 생은 
차라리 등꽃 보라나 되어 화라락 지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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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선생의 2000년 현대 문학상 수상작품이었다.

김명인 선생의 시를 좋아해서 몇 권의 시집을 샀다.조금 관념적인 면도 있지만 그것도 매력이다.

그의 시에는 불교적인 향이 많이 난다.최근의 문태준 시인의 것과는 다른 느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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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독 /이문재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 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 위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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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시집을 꺼내 보다가 이문재의 <노독>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마흔해도 걸어오지 않았건만 ...발걸음이 무거운가.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때문인가? 아니면 나서 지도 못하면거 그리워하기만 한 죄 때문인가?

시가 눈에 밟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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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쿠와 우키요에, 그리고 에도 시절 - Art 020
마쓰오 바쇼 외 지음, 가츠시카 호쿠사이 외 그림, 김향 옮기고 엮음 / 다빈치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그 날 아침은 시가 한 편 쓰고 싶었다.흐린 날이었으며 또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그 당시 하이쿠 몇 편 읽었던 듯 하다.그 중 몇개는  오래 기억하기로 마음 먹었을 것이다.아주 평범한 날 아침에 서푼짜리 시심을 돌게 한 것은 어느 죽음과의 대면이다.회사를 10분정도 앞둔 길이었다.길 바닥에 누런 물체 하나를 발견하고 흠짓 놀랐다.팔뚝 만한 크기의 누런 강아지가 길 한복판에 누워있었다.그리 오래전에 치인 것 같지는 않았으며 또 숨진 것이 분명해 보였다.평소에 길바닥에 누워 버린 동물의 시신을 보면 곧 바로 눈길을 돌린다.대게 그런 유해들은 곤죽이 되어 있기 마련이고 죽음의 경건함을 느끼기 전에 시각적 혐오의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하지만 그날 그 강아지의 모습은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속도를 줄이지는 못했지만 평소와 달리 그 강아지를 계속 눈에 담으며 지나갔다.내가 강아지를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또는 공공의 이익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었다면 내려서 후속 조치를 했겠지.하지만 나는 둘 다 아니다.그저 한 강아지의 죽음을 그날 따라 조금 오래 더 생각한 사람일 뿐이었다.그 때 읽던 책에 메모를 남겨 두었다.목격한 죽음을 하이쿠 처럼 여운을 주는 글로  남기고 싶었다.하지만 능력미달... 그냥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써 놓았을 뿐이다.

 비오는 차도 위에 쓰러져 죽은 어느 개를 추모함....2003년 7월 8일

 장 그르니에의 수필에 나온는 어떤 글 같다는 생각을 당시에도 했을 것이다.

하이쿠는  짧아서 좋다.또 정형화 되어 있어서 좋다.근대 시문학은 자유시의 발달을 토대로 한다.정형시는 문학에서 전근대의 상징처럼 비추어진다.그래서 요즘 시인들은 대개 자유시를 쓴다.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데 정형시는 형식 상의 한계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하지만 읽는 독자 입장에서 한시나 하이쿠와 같은 정형시를 읽다 보면 근대 자유시에서 느낄 수 없는 무한한 해방감을 갖게 된다. 하이쿠는 짧지만 강하고 긴 여운을 남긴다.하이쿠 시인들은 자연과 삶을 관통하는 혜안을 17자에 담았다.정형시가 주는 압축미는 독자에게 시를 해석할 수 있는 공간을 넓혀준다. 시를 읽고 상상할 수 있는 몫을 독자의 삶에 대한 깊이에 떠넘겨준다.특히 하이쿠의 회화적 인상은 읽은 이의 마음 우물 속에서 잠자고 있던 일련의 감정을 한 순간에 끌어올려준다.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벚꽃 아래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은  -이사-

이 눈 내린 들판에서 죽는다면 나 역시 눈부처가 되리 -초수이-

장마가 시작되자 이름 없는 시냇물들도 잔뜩 긴장했다- 부손

짧은 시들이지만 시각적으로 너무 강렬하다.영화의 스틸 사진 처럼 한 편 한 편이 그려진다.올 봄에도 벚꽃 길을 걸었다.이사의 하이쿠를 생각하면 삶에 대한 강한 긍정의 마음이 떠오른다.초수이의 눈부처는 사면을 하얗게 채운 들판을 쪽문을 열고 내려다 보는 작가의 시선을 떠오르게 한다.마지막 부손의 하이쿠에서는 장마철의 비에 젖은 푸른 숲의 시각적 이미지 사이로 콸콸콸 돌아드는 시냇물의 청각적 이미지까지 겹쳐진다.<하이쿠와 유키요에,에도시절>에서도 다색판화 우키요에의 발전에 하이쿠 동호회가 있었음을 알리고 있다.하이쿠의 시각적 이미지가 그 만큼 그림과 잘 어우러진다는 것이다.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만나는 하이쿠와 우키요에의 연결이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우키요에를 감상한다는 차원에서는 의미가 분명있는 일이다.하지만 하이쿠의 이미지는 종이 위 그림 속에 그려지는 것 보다 읽는 이의 마음 속의 떠오르는 상이 훨씬 미적이고 훌륭하다. 

도둑이 남겨 두고 갔구나 창에 걸린 달  -료칸-

텅 빈 집 밤 되니 더욱 썰렁하여/ 뜰에 내린 서리나 쓸어 보려다가

서리는 쓸겠는데 달빛 쓸기 어려워/ 그대로 달빛과 어우러지게 남겨두었네 -황경인-

아래 있는 시는 물론 하이쿠는 아니다.하지만 두 시의 정서가 왠지 어울릴 듯하여 써 보았다.청빈한 삶,아무도 없는 깊은 밤,홀로 있는 적막함을 달래 주는 것은 달빛 뿐이다.

꽃구경에 날 저무니 집으로 가는 머언 벌판 길 -부손-

붉은 꽃 푸른 산 해가 지는데/교외 들판 풀빛은 끝없이 녹색

상춘객은 가는 봄 아랑곳하지 않고/정자 앞 오가며 지는 꽃잎 밟네  -구양수-

두사람의 생애,그 가운데 피아난 벚꽃이런가 -바쇼

꽃잎 하나 날려도 봄이 가는데/바람에 만점 꽃 펄펄 날리니 안타까워라

보는 이 눈앞에서 꽃 이제 다 져가니/ 술 많이 마셔서 몸 좀 상해도 저어 말지니라

강 위의 누각에 물총새 집을 짓고/궁원가 큰 무덤에 기린 석상 나뒹굴었네

세상 변하는 이치 잘 살펴 즐기며 살지니/뜬구름 같은 명리로 이 몸 묶을 게 무었이랴?   -두보-

굳이 같은 정서라고 우길 필요는 없다.하이쿠나 한시나 자연을 바라보고 인생을 넘나 들었으니 마음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하이쿠 시인들은 대개 방랑하며 가난하고 고적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그래서 그들의 시에는 '가난한 마음냄새'가 난다.시인의 가난한 마음은 작은 미물에 시각을 고정한다.작은 것들에 대한 애정은 유머러스한 표현을 통해 생의 위대함과 인간의 편협함을 비웃는다.이런 하이쿠들은 웃음을 유발하면서도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어서 마음에 든다.

다리 위의 저 거지도 아들을 위해 반딧불을 잡으려 하네-이사-

새벽에 핀 이 꽃들 나는 내가 보려고 했던 것보다 더 많이 신의 얼굴을 보았다.-바쇼-

죽은 자를 위한 염불이 잠시 멈추는 사이 귀뚜라미가 우네 -소세키-

하이쿠의 힘은 사물을 관조하는 힘이 아닌가 한다.하나의 사물은 맨눈으로 보면 그냥 있는 사물일 뿐이다.그 곳에 깊은 응시를 배제한다면.오래도록 사물을 바라보면 모든게 달라진다.매일 쓰던 걸레도 싱크대에 쟁여 있는 빈 그릇도 .... 오래 바라 보면 그 사물들이 말을 건다.그리고 세숫대야가 호수처럼 보이기도 하고 비누가 야위어 가는 것처럼도 보인다. 오래 바라보면 모든게 달라져 보인다.그건 진실인것 같다.

 봄은 산을 넘어 간지 오래. 나는 두리번 거리기만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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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집회 있어서 대표선수로 뽑혔습니다.산별 집회의 피케팅 비스무리한 것이죠.대표로 뽑힌 이유는 제가 내일 또 서울에서 일이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올라가는 김에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라는 거죠.켁...

스트로폼 바닥 위에 신문들이 많이 널려 있었습니다.평소에 안보던 동아일보에 눈길이 갔지요.이 시 때문입니다.

        그맘때에는   

                            -문태준

         하늘에 잠자리가 사라졌다
       빈손이다
       하루를 만지작만지작 하였다
       두 눈을 살며시 또 떠보았다
       빈손이로다
       완고한 비석 옆을 지나가보았다
       무른 나는 金剛이라는 말을 모른다
       그맘때가 올 것이다, 잠자리가 하늘에서 사라지듯
       그맘때에는 나도 이곳서 사르르 풀려날 것이니
       어디로 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갔을까
       후두둑 후두둑 풀잎에 내려앉던 그들은

 

오랜만에 올라왔으나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너무 뻔한 세상사는 이야기를 더이상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몇 년 만에 옛 학교 앞을 찾았습니다.요즘 학교 앞은 썰렁하네요.오늘 날씨가 그래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들 먹고 살기 바빠서 그런 건지.제가 다닐 때도 있었던 안경점이 리모델링을 했더군요.윈도우 넘어로 그 때 그 주인 아저씨가 계셨습니다.주름이 많이 깊어진게 그때는 아저씨였는데 이젠 할아버지 처럼 보이는군요.

예전에 있던 서점에 들어가서 책을 몇 권 사보려고 했습니다.요즘 인터넷으로만 사다 보니 서점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고해서...그런데 현실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책 몇 권 사면 내일 이걸 또 어떻게 들고 다닐 건가...결국 미안한 마음으로 돌아나오면서 인사는 크게 했습니다. "잘 봤습니다" 아저씨 역시 나의 헛걸음에 괘념치 않으며 큰 목소리로 "네...감사합니다."라고 했습니다.좋은 서점 입니다.옛날이나 지금이나....옛날에는 잡지 같은 것은 팔지 않았는데..씨네 21은 있더군요.

지금 이 곳이 낯서네요.혼자 있어서 그런가.왜 그런거 있지요.전부 흑백이고 저만 컬러인거 같은 느낌.외국에 나가 혼자 걸어다니면 드는 느낌....아직도 있으려나 옛날 락음악 틀어주던 가게는..있다면 맥주 한잔 하고 들어가야겠어요.

문태준의 시 중에서

"그맘때가 올 것이다, 잠자리가 하늘에서 사라지듯
 그맘때에는 나도 이곳서 사르르 풀려날 것이니" 하는 구절이 가슴에 꼽혔습니다.....

절창이라고 하나요.제겐 오늘 이 구절이 절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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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1 14: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4-21 1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6-04-23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헉 난 왜 이 페이퍼를 지금 봤지...........
 

아스트로 피아졸라...오블리비온..솔레다드....

봄날 오후에 느리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피아졸라를 듣는다. 듣지 말 걸....

 바다가 내게

                              문병란

   내 생의 고독한 정오에
   세 번째의 절망을 만났을 때
   나는 남몰래 바닷가에 갔다.

   아무도 없는 겨울의 빈 바닷가
   머리 풀고 흐느껴 우는
   안타까운 파도의 울음소리
   인간은 왜 비루하고 외로운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울려야 하고
   마침내 못 다 채운 가슴을 안고
   우리는 왜 서로 헤어져야 하는가.

   작은 몸뚱이 하나 감출 수 없는
   어느 절벽 끝에 서면
   인간은 외로운 고아,
   바다는 모로 누워
   잠들지 못하는 가슴을 안고 한밤내 운다.

   너를 울린 곡절도, 사랑의 업보도
   한데 섞어 눈물지으면
   만남의 기쁨도
   이별의 아픔도
   허허 몰아쳐 웃어 버리는 바다

   사랑은 고도에 깜박이는 등불로
   조용히 흔들리다
   조개 껍질 속에 고이는
   한 줌 노을 같은 종언인가.

   몸뚱이보다 무거운 절망을 안고
   어느 절벽 끝에 서면
   내 가슴 벽에 몰아와
   허옇게 부서져 가는 파돗소리...

   사랑하라 사랑하라
   아직은 더욱 뜨겁게 포옹하라
   바다는 내게 속삭이며
   마지막 구석까지 채우고 싶어
   출렁이며 출렁이며 밀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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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6-04-16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좀 들려주시지... 하루 왠종일 마태수난곡 들으면서 도면 쳤더니 ㅜ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