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름은 제리 이다.원래 본명인지 아니면 직업상 만든 이름인지는 알 수 없다.그를 만난 것은 이번 가을 초입에 다녀온 여름휴가 때이다.그는 신들의 섬 '발리'의 관광가이드이다.닷새동안 제리의 발이었고 또한 입이었다.

제리는 37살이다.원래 불어 가이드였었다.하지만 몇년전에 한 친구가 한국인들이 많이 올거라고 방향을 바꾸라고 말해주었단다.그래서 단기코스로 한국어학원을 다녔다고 한다.그의 한국어는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공항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너무 유창한 한국어에 잠시 놀라기도 했었다.하지만 중간에 더 만났던 몇명의 현지 가이드중에는 억양까지 한국인과 유사한 사람도 있었다.어쨋거나 그의 한국어는 훌륭했고 철학적 이야기만 꺼내지 않는다면 충분히 이야기가 될 수준이었다.

나는 가끔 차 안에서 또는 그와 걷는 기회가 있으면 그에 대해 물어보았다.행여 여행객의 호기심으로 비춰지지 않기 위해 최대한 신경쓰면서  말이다.

제리는 천주교 신자이다.할아버지가 개종을 했다고 한다.제리의 말에 의하면 인도네시아의 자바섬은 대부분이 이슬람교를 믿는다고 한다.반면 그가 살고 있는 발리섬은 힌두교가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한다.그런데 제리는 그 둘다 아닌 카톨릭이었다. 마지막 날에 약간 시간이 남았다.그래서 원래 계획에 없었던 곳을 다녀왔다. 시내에 있는 카톨릭 성당이었다.지나가다가 우연히 봤는데 그가 보고 싶냐고 물었다.현재 그가 다니는 성당이라고 했다.

 이건 그 성당안에서 찍은 스테인드 글라스 사진이다.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아기예수 같다.부모가 입고 있는 옷이 인도네시아 스타일이다.카톨릭은 현지 문화와 관습을 부정하기 보다는 수용하는 입장이다 보니 이런 그림이 나왔을 것이다.

제리는 이곳에서 성가대로 활동을 한다고 했다.그가 교황을 설명할 때 '카톨릭 싸장님' 이라고 해서 한참을 웃었다.주교라는 단어는 아직 모르고 있었고 또한 영어로 주교를 어떻게 말하는지도 잘 몰랐던것 같다.제리는 그래서 '카톨릭 싸장님 밑에 있는 다음 매니저가 여기 신부입니다' 라고 말했다.이야기를 종합해본 결과 이성당이 우리말로 하면 '주교좌 성당'이란 것 같았다.그에게 한국말로 알려주었다.그가 삐둘빼둘 한글로 종이에 적었다.

제리와 걸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그는 두 아이의 아빠이다. 그 성당 가까운 카톨릭 고등학교를 나왔고 전문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했다.그리고 호텔에서 일하다가 영어,불어,한국어 가이드로 일하고 있었다.그의 집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변두리이다.대개 발리섬 주민이 그렇듯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아침이면 30분거리에 있는 초등학교에 아이를 오토바이에 싣고 데려다 준다.제리가 가이드 일 때문에 늦게 들어가는 날에는 부인이 대신 아이를 데려온다.그는 한국관광객이 많이 들어오는 주말부터 약 4일을 일하고 3일정도는 그냥 집에서 쉰다고 한다.그의 벌이 대부분은 여행사의 팩키지에서 나누어 갖는 팁이다. 그곳의 물가수준이 어느정도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그다지 많은 돈은 아닐 것이다.

제리도 한국부모들과 똑같이 아이들 양육에 관심이 많았다.그에게 아이들이 어떻게 컷으면 좋게냐고 물었다.그는 그냥 지들이 원하는데로 하는데 까지 지원해야지 라고 답했다.아직 아이들이 어리니까 구체적인 생각은 안해본 것 같다. 하지만 공부에 재능이 있으면 끝까지 기회를 주고 싶다고 했다.우리 부모들이 하는 생각과 똑같다.

여행다니는 동안 늘 신경쓰였던 것은 식사때였다.제리는 우리를 레스토랑에 내려주고 식사때면 보이질 않았다.식사를 마치고 나올때마다 식사는 했냐고 물어보면 먹었단다.우리를 안내한 식당에서 준것 같기도 하고 뭘 싸온 것 같기도 한데 아직 어떻게 해결했는지 알 수가 없다.

제리에게 나와 같은 한국인 관광객은 어떻게 보일까 생각했다.그냥 자기나라에와서 돈쓰고 가는 외국인 정도였을 것이다.호텔 안의 삶은 외국인들을 위한 것이고 호텔 밖은 현지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다.제리는 그 극단의 공간을 왔다 갔다 한다.호텔의 화려함 뒤에 가려있는 자신과 자기 섬 사람들에 대해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제리는 발리섬의 민중이다.나는 발리섬에서 돈 쓰는 외국인일 뿐이다.

가끔 발리섬의 아름다운 해안과 안락한 리조트에 누워 이곳에 내가 아니라 이곳 사람들이 누워있어야 하는것 아닌가 생각했다.물론 그들도 어디선가 휴가를 즐기고 하겠지만 우리같은 외국관광객들이 있는 화려한 리조트나 호텔은 아니었을 것이다.해안 절경마다 외국자본이 만든 휘황찬란한 호텔과 리조트가 자리잡고 있다.조금 누런 사람은 일본인아니면 한국인,조금 하얀사람은 유럽인,그리고 조금 까만 사람은 서빙하는 발리사람들이다.

제리를 비롯한 그곳의 민중들을 동정하진 않는다. 그들이 불행할 거라고 생각치도 않는다.그들도 우리와 같이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 것 뿐이다.자본주의 주변부의 떡고물을 챙겨먹고 조금 살만한 한국에 살면서 그곳에서  관광객으로 조금 더 겸손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발리는 아름다운 섬이고 또한 식민지로 오랜 제국주의의 지배하에 있었던 곳이다.파란 하늘과 눈을 틔워주는 인도양,형형색색 만발한 꽃,바다에서 불어오는 미풍 그 모든 것이 내겐 단지 눈안에 담긴 영상일 뿐이다.그것도 외국자본이 발리민중들은 분리한채 독점해버린 곳에서 바라본 풍경들이다.하지만 그 모든 것의 진짜 주인은 오토바이에 온가족을 싣고 다니는 발리민중들의 것 아니겠는가....수많은 제리들이 그런 호텔에서 자기것을 누릴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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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9-24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톰과 제리에서 제리가 연상되는군요.
그나저나 아픈건 다 나으신 것 같구^^

2005-09-26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의 그림자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인류 최초의 거장 조각가인 다이달로스는 크레타의 왕 미노스의 요구로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미궁을 만들었다.그 안에는 부정한 아들인 반인반수 미노타우루스가 갇혔다. 인신공양의 신화는 영웅 테세우스의 등장으로 막을 내린다.테세우스는 실뭉치의 지혜를 빌어 다시 바깥으로 빠져나온다. 이후 미궁에 갖힌 사람은 미로를 만들었던 다이달로스였다.아이러니이자 순환하는 역사의 또 한가지 모습이다.다이달로스는 인간의 의지로 탈출한다.그의 재능은 그에게 인류 최초로 하늘을 나는 기회를 주지만 결국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한다. 태양에 너무 가까이 가버린 아들, 이카루스의 죽음이다.

<바람의 그림자>의 구조는 다이달로스의 미궁과 같다.소설의 형식은 소실점을 향해 달려간다.파편적인 기억의 몽타주가 책장을 넘기며 강렬하게 충돌한다. 불빛 하나에 몸을 의존한 테세우스처럼 벽을 더듬으며 미노타우루스에게 다가간다.가끔 발뒤꿈치를 따라오며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실꾸러미의 존재도 잊곤한다.때는 1940년대.바르셀로나의 이국적 풍경들이 미로를 둘러싼 벽화들 처럼 소설의 벽들을 장식한다. 책 표지의 사진처럼 소년 다니엘과 그의 아버지는 '잊혀진 책들의 도시'로 향한다.수십년이 흐른 후 아버지 다니엘은 똑같은 모습으로 그의 아들을 데리고 그곳을 향한다.테세우스가 미궁 앞에 묶어 놓았던 실의 첫묶음이 다시 돌아오는 길의 최종목적지가 된 것처럼 말이다.

이 소설의 형식과 내용,그리고 인물은 반복적인 순환의 관계성을 갖는다.<바람의 그림자>는 책의 저자 사폰의 작품이자 다니엘이 '잊혀진 책들의 도시'에서 운명적으로 조우한 소설속 훌리안 카락스의 작품이다.훌리안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주인공 다니엘은 또한 훌리안 카락스의 또다른 이름이다.훌리안은 또한 다니엘의 가족이기도 하다.소설 속 인물들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즉 시간과 공간의 배치를 달리하지만 인물들이 대칭적으로 마주하고 있다.마주선 사람들 사이를 흐르는 것은 시간이고 바르셀로나라는 낭만적인 도시이다.또한 스페인내전을 둘러싼 어수선한 시대의 분위기와 변하지 않는 사랑의 이야기가 대칭구조를 채우고 있다. 신비한 인물인 훌리안은 다니엘과 대를 이룬다.페렐로페는 배아,훌리안의 믿음직한 친구 미켈은 페르민... 훌리안의 손에서 다니엘에게 그리고 다시 훌리안에게 돌아간 몽블랑 만년필까지도 소설이 두개의 기둥을 가진 한 구조물임을 알게 한다.

아쉽게도 다니엘이 찾은 훌리안카락스의 <바람의 그림자>가 어떤 내용인지 소설 끝까지 봐도 알 수는 없다.하지만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는 두 남자의 사랑이야기이다. 형식은 훌리안의 흔적을 뒤적이는 취리소설의 형태를 띤다. 조각 조각난 인터뷰들을 재구성하며 훌리안의 모습을 그려나가는 재미가 소설 전반부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가끔 누가 누구더라 하면서 앞장을 뒤적이는 경우도 있지만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들이 살아있어서 이내 적응한다.소설 속에서 가장 매력적이며 모범적인 인물은 다니엘의 아버지이다.책을 읽으며 조금은 평면적이지만 현자와도 같은 아버지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사람들의 생각은 비슷하다고 책의 역자 역시 후기에서 자신 역시 다니엘 아버지의 단정한 모습이 강하게 남아있다고 말한다. 반대로 악역을 맡은 이는 푸메로 경위이다.그는 마치 고문경찰 이근안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소설 전반부 부터 악의 축으로 모습을 천천히 드러낸다. 다니엘의 훌리안의 흔적에 대한 추적은 결국 푸메로의 어린 시절까지 닿아있다.소설속 갈등의 원인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고 이후 소설은 고속기어로 변환되어 속도를 높여간다.조금 아쉬움이 있다면 푸메로 경위라는 캐릭터 역시 악의 축으로 전형화되어 있다는 것이다.조금만 더 인물의 내적인 악에 대해 집요함을 보여주었다면 푸메로라는 캐릭터가 훨씬 공포스럽고 입체화 되었을것이다.

이 소설이 추리소설의 형태를 띠며 갖는 한계가 주요 인물들의 서술에 대해 관찰자 또는 전달받은 형태로 서술 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훌리안의 세계,페넬로페와의 사랑,푸메로의 악마적 내면,미켈의 자학적 헌신 등등 과거 속 인물들의 이야기가 이들의 주변 인물의 입을 통해 그려진다.이러한 관찰자의 시선은 늘 그들이 가진 내면의 고통과 감정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닿기 어려운 벽을 만든다. 이 인물들의 캐릭터는 현재 인물들 이상으로 중요하며 매혹적이다.하지만 작가는 추리구조를 지키기 위해 이를 양보할 수 밖에 없었나 보다.그나마 현재 인물들-특히 페르민-의 경우에는 촌철살인의 문장과 현학적 대사등을 통해 인물들이 천연색의 옷을 입고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소설의 구조상 줄거리와 관련된 많은 말을 할 수 없다. 누리아의 마지막 편지로 모든 사실들과 단절된 사건이 통합되어 지기 전까지 소설은 조금씩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더 많은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 가능성을 높인다.소설은 빠르게 읽힌다.후반부로 갈 수록 탄력을 받는다. 스토리 역시 영화화 하기 좋은 내용이고 또 어디선가 한번쯤 본 듯한 영화같기도 하다. 미궁은 조각조각 모습을 보이다 결국엔 전모를 드러낸다. 뒤에 오는 자는 앞선자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테세우스가 이미 미궁을 탈출하는 법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휴가가는 동안 읽기 위해 골랐는데 좋은 선택이었다.휴가 갈 때 읽으면 좋다.너무 머리를 쓰지 않아도 너무 감정이입되지 않아도 너무 인생의 불가해성과 깊이의 모호함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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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09-22 15:00   좋아요 0 | URL
관찰자의 시선은 늘 그들이 가진 내면의 고통과 감정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닿기 어려운 벽을 만든다.--> 전 언제쯤 이런 멋드러진 서평을 쓸 수 있을까요.
 

 BEST

 락음악 듣는 애들 한테 가장 사랑받는 포지션은 당연 기타리스트이다.대개 그들이 그룹의 음악적 지배권을 잡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무엇보다도 화려한 기타 애드립 뿌려주는 날에는 백말이 필요없다.

말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3대>를 좋아했다.3대 기타리스트,3대 보컬리시트...등등.

에릭 클립튼. 기타의 신,불멸의 슬로우핸드...

고등학교때는 그가 왜 기타의 신인지 알 수 없었다.물론 빠른 손가락을 가진 기타리스트들이 최고라고 생각치는 않았다.하지만 에릭 클립튼은 그다지 개성이 강해보이지 않았다.지미 페이지는 내가 제일 좋아했던 레드제플린에 묻어가니까 그렇다고 치자.제프벡의 상상력과 그의 톤은 에릭 클립튼의 밋밋함에 비해 눈에 확들어왔다.특히 음반의 신선함은 내게 제프를 에릭보다 앞에 두게 만들었다.

내게 에릭은 시간과 함께 익어간 기타리스트이다.그이 시간이 아니라 나의 시간쪽에서 말이다.가장 훌륭한 기교는 무기교라고 했던가.에릭 클립튼의 플레잉은 화려한 락기타리스트들 처럼 현학적이지 않다.잉위맘스틴이나 반핼런,제이슨 베커,조새트리아니 등을 보라.그들은 기타를 가지고 논다.별별 짓을 다하면서 별별 소리를 다 만들어낸다.하지만 에릭 클립튼은 무덤덤하다.그래서 얼핏 들으면 그냥 하나보다 하는 정도다.하지만 중국영화를 봐도 진짜 고수는 오도방정을 떨지 않는다.별거 아닌 것 같은 그의 플레잉에는 오랜 시간 익어 탈색된 나무빛 단청을 연상케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는 한동안 팝음악으로 많이 경도되었다.각종 영화음악도 만들고 어덜트컨템퍼러리류의 팝음악으로 많은 음반도 팔았다.거장의 변신이 딱 마음에 든 것은 아니지만 잠시 쉬려는 몸짓으로 이해했다.그리고 최근에 다시 돌아왔다.그의 음악의 원전이 되었던 블루스 선배들을 기리는 음반들이 쏟아진다.BB킹과의 공동음반에 이어 로버트 존슨의 새로운 해석이 이어졌다.최근에 나온 역시 이 도정위에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에릭 클립튼의 음반 5장을 뽑는다.워낙 긴 음악생활이어서 수많은 명반중 골라내기가 쉽지 않다. 지극히 개인적인 콜렉션이다.하지만 동감하시는 분들도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좋은 음악에 대한 공감은 다들 비슷하기 때문이다.

 



3대기타리스트들이 다 몸담아서 유명해진 그룹 야드버즈가 있다.야드버즈를 탈퇴한 이후 에릭 클립튼이 6개월정도 활동했던 그룹이 존메이올의 블루스 브레이커스다. 존 메이올 역시 화이트 블루스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장 중에 거장이다.이 음반에서 에릭 크립튼의 기타는 전통 시카고 블루스기타리스트들의 소박하면서 찌르는 스타일을 그래도 보여준다.거친 듯 하지만 힘이 있다.all my love,hideway 같은 곡들은 어디서 들어본 듯 친근하며 double crossing time,rambling on mind같은 곡은 컴컴한 바에서 맥주한전 얹고 들으면 딱이다.

 


블루스 브레이커스를 나온후 진저베이커,잭브루스와 함께 만든 그룹이 <크림>이다.이팀도 한 2년 활동한다.이 음반은 이다. 두장인데 한장은 스튜디오 앨범이고 한장은 라이브다.트리오 연주로 락의 전형을 보여준다.이런 음반들을 들으면 왠지 고지식하게 들리지만 '락의 순수성'뭐이런 단어들이 떠오른다.white room이란 곡도 좋고 영국 포크가 들리는 passing the time이란 곡도 좋다.16분이 넘는 라이브 toad는 멤버들의 연주 실력과 조화를 맛볼수 있다.에릭 클립튼의 기타는 존메이올과 함께 할 때보다 훨씬 다양한 맛을 낸다.

 



만약 에릭 클립튼의 음반중 단 한장을 고르라면 나는 단연코 이 음반을 고를 것이다.<데릭앤더 도미노스>의 유일한 스튜디오 음반이다.이 음반에는 또 하나의 명기타리스트가 있어 빛을 더한다.내가 좋아하는 듀언 올맨이다.두명인이 연주하는 트윈기타는 락 역사에 돌이킬 수 없는 명장면을 연출했을 것이다.크림에 비해 미국적 스타일이 많이 가미되었다.컨츄리풍의 곡들도 있다.이 음반의 가장 유명한 히트곡은 layla이다. 조지해리슨의 와이프를 꼬시기 위해...어쩌구 하는 말은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수백번도 더들어서 지겹다.이 곡을 틀면 할 이야기가 그것 밖에 없나보다.에릭 클립튼의 리드 기타와 듀언올맨의 슬라이드 기타가 서로 매기고 받는다.언제들어도 모든 곡들이 귀에 쏙쏙 꼽힌다. 에릭 크립튼은 아직 건재한데 듀언은 왜 그리 세상을 빨리 떠낫을까.ㅠㅠ

 


이제야 에릭 클립튼의 솔로앨범이다.아마 <461해변가>가 음반 프로듀서인지 녹음실인지 주소라고 했다.배철수의 음악 캠프에서 수시로 해대난 말이다.이 음반은 리메이크 곡들이 많은데 밥말리,엘모어제임스,로버트존스등의 곡들을 새롭게 만들었다.그룹활동때에 비해 팝적인 요소가 훨씬 많이 보인다.향후 줄타기의 전형이 되는 음반이다.고등학교 시절 심야라디오에서 moterless child의 기타 리프를 듣고 설레였다. 강하게 팍팍치치 않으면서도 뭔가 여운을 남기는 예쁜 사운드였다.대개 평론가들에 에릭클립튼의 최고 명반으로 꼽는 듯하다.대중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고 마약에 쩔었던 그의 재기작이기도 해서 더욱 의미가 있다고 보는 듯 하다.

 

 

이 음반은 80년대 라이브 녹음으로 두장 짜리다.아마 부도칸에서 녹음한 걸로 기억한다.(아닌가?) 앞장에는 히트한 팝적인 노래들이 들어있고 다음장에는 좀 긴 블루스 곡드이 포진한다. 새로울 것이 없는 음반이긴 하다.오히려 에릭클립튼의 레인보우콘서트를 최고의 라이브 음반으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하지만 늦은 밤 원숙함이 가져다 주는 알찬 소리를 듣고 싶다면 이 음반이 훨씬 낫다. 모든 곡들이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준다. 개인적으로는 두번째 CD를 더 자주 듣는 편이다.고르고 보니 솔로앨범이 너무 없다 싶다.아무래도 개인적으로 블루스락을 좋아하기 때문인거 같다.그렇다보니 에릭클립튼의 젊은시절 음반이 많아졌다.

평론가들은 에릭 클립튼의 가장 큰 장점을 완벽하고 변화무쌍한 피킹에 있다고 한다.곡마다 무리수를 쓰지 않고 흐름에 완벽하게 조응하는 피킹과 블루스의 근간을 잊지 않는 그의 겸손함이 최고의 음악을 만드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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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도 끝났다.이제 가을하늘은 점점 푸른 빛을 띨 것이다.푸른 하늘 빛을 가르는데는 현악의 어울림이 최고다.하늘을 가르는 하얀 선율은 땅으로 내려와 산과 들을 붉게 물들일 것 같다.

실내악은 클래식의 가장 내밀한 과육이다.들으면 들을 수록 깊은 농염함이 묻어난다.특히 가을에는 더욱 구에 잘 들린다. 가장 유명한 실내악곡들이다.안들어보셨다면 이 가을이 끝나기 전에 들어보시길.

맑은 가을날이 좋겠다.가을햇살이 베란다를 스며들면 좋겠다.해야될 집안일은 잊어버리는게 좋겠다.CD를 얹고 마루에 앉아서 햇살이 들어오는 모양새만 바라보면 좋겠다.선율을 따라가면 좋겠다.그냥 다른 생각은 잠시 잊었으면 좋겠다.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서유럽 최고의 사중주단이라는 평판을 듣고 있는 알반베르크 사중주단의 연주다.지난 7월에 비올라연주자 토마스 카쿠스카가 세상을 떠나고 새로운 멤버로 대체되었다.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는 베토벤의 9번교향곡,후기 피아노소나타와 함께 말년 베토벤 음악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베토벤 후기 현악4중주를 느껴보지 못하고 베토벤을 좋아한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특히 15번 작품 132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다. '병에서 회복된 자가 신에게 바치는 감사의 노래'라는 부제가 널리 알려져있다. 가을이면 ...베토벤의 진수를 느끼려면 반드시 들어야한다.


흔히들 슈베르트의 <백조의 노래>라고 한다.현악 4중주에 저음역을 풍부하기ㅔ 하기 위해 첼로를 하나 더 보탰다.슈베르트 현악 5중주 D 956 이다.에머슨 사중주단과 로스트로포비치가 함께 연주했다.그는 멜로스 사중주단과도 함께 이 곡을 녹음했었다.평단에서는 멜로스 사중주단과의 연주를 더 높이 쳐주는 경향이 있다.내가 가지고 있는 이 음반도 결코 꿀리진 않을 것 같다.로스트로포비치의 덕택인지 저음부의 굵은 선율이 곡을 묵직하게 만든다.성과 속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슈베르트 최고의 명곡이다.슈베르트 가곡이나 미완성교향곡에만 만족하셨던 분이라면 반드시 들어라.젊은 천재 작곡가의 순수가 세속 저편을 지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의 유작앨범이다.러시아 최강의 보로딘 콰르텟이 함께했다.커플링도 최강이다.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그리고 슈만의 <피아노 오중주>앨범 자켓만 봐도 가을이 물씬 느껴진다.이 음반에서는 당연히 뒤의 커플링곡 슈만의 <피아노 오중주>에 귀를 기울여야한다.리히터의 연주는 시간을 잊게 해줄 만큼 명료하다.거기에 러시아 진골들이 펼치는 가을의 우수는 이 음반이 아주 오래된역사를 가진 음반인양 느끼게 한다.라이센스로도 나왔었는데 지금은 앨범자켓이 바뀌어서 나오고 있다.

 

 그분이 오고야 말았다.가을과 함께 다니는 남자,브람스.그의 삶이 그의 음악이 가을낙엽과 같다. 너무나 통속적인 브람스=가을이라는 도식이 싫어도 어쩔 수 없다.너무 잘 어울리는게 사실이니까.

이 음반은 동곡 최고의 명연으로 수십년간 절대반지를 빼놓지 않고 있는 앨범이다.브람스의 클라리넷 5중주.블라흐의 바셋 클라리넷이 요즘 나온 클라리넷 보다 깊은 울림을 만든다.커플링된 곡은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5중주이다.모차르트가 봄이라면 브람스는 완연한 가을이다.훨씬 비장감이 넘치며 우수에 가득차있다.웨스터민스터 로고가 박힌 이 음반을 보시면 이번 가을엔 그냥 질러도 된다.



다시 한번 브람스다.브람스의 피아노 5중주 작품34. 마우리치오 폴리니와 이탈리아 콰르텟의 연주다.루돌프 제르킨의 연주와 더불어 최고의 명반으로 알려져있다.제르킨 연주보다는 이 음반을 구하기 쉬울것이다.제르킨의 연주과 조금 오래된 녹음에 묵직한 중량감이 돋보인다면 폴리니의 연주는 정확함과 선명함이 특징이다.이탈리아 사중주단의 연주 역시 오래 익은 과일처럼 농염함을 선보인다.개인적으로 조금 가벼운 느낌이 들긴 하지만 제르킨의 연주보다 이 음반에 손이 많이 간다.가끔 폴리니의 쟁쟁거림에 반발이 생기기는 하지만 말이다.

 

브람스 마지막이다.브람스의 현악 6중주 1번.알반베르크 콰르텟에 아마데우스 앙상블이 서포트를 했다.저현부가 강력하게 보강되니 비장미가 넘쳐난다.특히 알반베르크 콰르텟이 드라마틱하게 연주하기로 유명한데 이곡의 분위기를 살리는데 딱이다.너무 비장한건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다.

브람스가 클라라를 위해 작곡한 곡으로 알려져있다.속앓이만한 남자의 가슴이 어떤지 알 수 있다.가을에 가슴 아픈 사랑을 떠올리고 싶다면 반드시 들어라.시련당해서 마구 울구 싶으면 반드시 들어라. 마음 한 구석에 구멍이 뚫려서 올가을 허한 마음으로 지낼 지라도.....난 책임질 수 없다.


 보로딘콰르텟의 60주년 기념 음반이다.오닉스 레이블이라고 새로 생긴 신생 레이블이다.녹음은 아주 훌륭하다.기념 음반이다 보니 여러곡들이 들어있다만.역시 최고는 그들의 장기였던 보로딘 현악 4중주 2번이다.연주에 대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멤버들은 최고전성기의 보로딘에 비하면 못하다 하더라도 60여년을 이어온 연륜이 모든 걸 보상한다.느린 악장은 클래식 잘 모르는  사람도 들어보면 알만한 유명한 선율이다.이 외에도 차이코프스키의 안단테칸타빌레등 유명한 곡들을 컴필레이션 해놓아서 최고다.단 한장 이 가을에 들어야 한다면 최고의 종합선물세트다.

 


샨도스 레이블에서 나온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삼중주이다.일명 '엘레지'트리오라고도 하고 '슬픔의 삼중주'라고도 한다.차이코프스키의 '어느위대한 예술가를 추억하며'와 함께 커플링이 자주되는 곡이다.곡은 선율의 아름다움을 느끼기전에 무거운 슬픔이 장악을 해버린 듯 하다.느린 진행이 조금 지루할 수 도 있다 라흐마니노프가 두들기는 피아노협주곡만 만든게 아니다.

보로딘 트리오의 연주인데 앞의 보로딘 콰르텟과는 다른팀이다.보로딘 콰르텟의 창단 멤버 두빈스키가 76년 서방망명후 만든게 보로딘 트리오이다..

 


야렌스키....? 클래식에 관심있어도 유명한 라흐마니노프에서 끝나는 분들께는 낯선 작곡가이다.하지만 둘은 비슷한 후기낭만주의자들이다.야렌스키는 차이코프스키의 전통을 많이 잇고 있는 작곡가이다.라흐마니노프는 야렌스키의 제자라고 할 수 있다.그의 피아노 트리오를 들으면 마치 차이코프스키의 선율이 어디선가 흘러 나올 듯 하다.이름은 무지 현대음악가 같지만 절대 그렇지가 않으니 알러지 일으킬 필요는 없다.

피아노 트리오 1번의 느린 악장은 보로딘 현악 사중주의 느린악장만큼이나 풍부한 선율을 담고 있다. 무척 아름답다.개인적으로 올 가을 테마음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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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모유키 - 제1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조두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가을 빛에 알맞게 익은 남해의 바다는 여름철보다 더 파랗다.산녘의 단풍이 서로의 붉음을 질투한다면 바다의 단풍(?)은 푸름을 경쟁한다.나는 늘 관찰자로서만 그 바다를 바라본다.남해의 바다는 수많은 어촌사람들의 삶의 터전이다.흰 점처럼 알알이 박혀 있는 양식장의 부표들,베를 가르듯 푸른 물결을 가르며 섬과 섬 사이를 달리는 통통배,어구를 손질하는 아낙네의 모습이 그림처럼 아련하다.멀리 죽방렴도 보인다.사릿대를 얽은 죽방렴은 남해에만 있는 전통 멸치잡이 어구이다.바다 한 가운데 떠있는 작은 섬처럼 석양을 받은 죽방렴의 모습이 고즈넉하다.

거제-통영-남해....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바다가 아름답다고 일컫어지는 곳이다.하지만 지금 바다는 수백년전 붉은 피의 기억을 우리에게 전해주진 않는다.그저 아름답고 아름다울 뿐이다.혹시 모른다.바닷가를 걸으며 들을 수 있는 썰물의 소리,자갈들이 굴러가는 소리가 오래전 그들의 울음을 바다밑에서 끌어올리고 있는지도...  현실의 우리에게 수백년전의 칼소리를 기억나게 해주는 것은 남해일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승첩비들이다.이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마치 고속버스 휴게소 처럼 관광버스가 몇대 정차해 있는 곳들이 있다.대개 그곳이 이순신장군의 임진왜란 승전비가 있는 곳이다.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장군과 관련된 어떠한 흔적이라도 있는 곳이다.나는 대개 그런 곳들을 그냥 지나친다.그저 지나가면서 '아...이 곳이 노량이구나' '아...이 곳이 명량이구나' 한다.

<도모유키>를 읽었던 시점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막을 내린 때였다. 막대한 물량과 화려한 전투씬,예전 이순신 드라마에서 보지 못했던 성웅의 인간적 고뇌등이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다.제작 초기에 드라마의 역사성을 가지고 왈가왈부 말이 많았다.역사 드라마가 어쩔 수 없이 가지고 가야하는 딜레마였다.드라마를 드라마로 보지 않고 역사에 더 큰 비중을 두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어처구니 없는 왜곡이고 분개할 일이었을 것이다.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 일뿐이다.굳이 드라마를 가지고 역사성에 깊이 천착하려들면 아마 대부분의 역사드라마는 TV정치 뉴스처럼 되어 버릴 것이다.그리고 역사성을 운운하며 비판하던 사람들 역시 지루하다며 고개를 돌려버릴 것이다.

<도모유키>의 배경은 드라마의 끝부분에 닿아 있다.조선 수군의 봉쇄와 육군의 선전으로 재침입한 일본군은 순천성에 고립된다.주인공 도모유키는 고립된 일본군의 군막장 중 하나이다.그는 침략군 군인이나 또한 하나의 개인이다. 우리는 대개 어떤 사건을 인식할 때  조직이나 국가 단위로 큰 범주화 시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사실 가장 편리한 방법이다.또한 그 안에 오류가 있다 손 치더라고 범주의 광범위함이 가진 작은 예외정도로 치부해 버리면 되기 때문에 빠져나가기도 좋다.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대범주가 가진 섬세함의 부족에 대해선 끝도 없는 예가 있다. '일본놈들은 하여간 약다니까' '미국 놈들은 지들이 제일 잘난지 알지''한국놈들은 하여간 맞아야돼'' 전라도 놈들은 으뭉해서 절대 믿으면 안돼'...등등등

이러한 일상언어의 개인에 대한 부정과 몰이해는 뜻밖의 편견을 가져다 준다.내가 아는 어떤 전라도 친구는 진짜 으뭉스럽다.또 어떤 전라도 친구는 오히려 쿨하다.내가 아는 어떤 일본인은 약다기보다 예의바르고 깔끔하고 어떤 미국인은 누구보다 부시에 반대하며 미국의 반성을 촉구한다. 일상 언어가 가진 폭력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개인의 소멸'이다.특히 전쟁이란 상황에 놓여 모든게 극과 극으로 구분된 때라며 이 개인을 향한 폭력은 물리적 형태를 동반하여 의식 기반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전쟁 상황이 되면 적 아니면 아군이다.그러다 보니까 묻혀버려야하는 기억들이 있다.개인의 역사이고 그들이 가진 모든 질곡들이다.

주인공 도모유키를 통해 나는 드라마 이순신을 보며 거북선에 부딪혀 바다로 떨어지는 일본군 스턴트맨을 생각했다.실제 스턴트맨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얼굴한번 보이지 않지만 위험천만한 연기를 묵묵히해내야 하는 스턴트맨들.그들은 거기서 받은 수당으로 소주 한잔을 기울이고 또 작은 아들 자전거를 한대 사주었을 것이다.다음으로 그 스턴트맨이 연기한 수백년전 거북선에 받혀 떨어진 진짜 일본군에 대해 생각한다.주인공 도모유키처럼 여동생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는 소망을 가진 병사였을 수 도 있다.아니면 늙은 노모와 부인을 두고 끌려와서 어쨋든 살아돌아가고픈 마음 밖에 없는 병사였을 수도 있다.그보다 더 파란만장한 개인사의 질곡을 담고 있는 일본군 병사-왜놈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돌아가지 못했고 그들의 역사는 아무도 기억하거나 기록하지 않는다.성웅 이순신의 영웅적 행동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고 조선 침략 선봉장 가토기요마사와 고니시유키나가의 이름 역시 그 가문의 명예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조선 수군 돌이,봉이,먹쇠,일본 육군 도모유키,기요시,나가타 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나는 다시 한번 당파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지도자의 뛰어남이 결코 무시되어서는 않된다.하지만 나와 같은 민중은 결국 역사를 움직이는 잡초들에게 더욱 애정을 가지고 바라봐야 한다고 당파적 목소리를 높여야만 한다.박정희가 근대화에 어느정도 기여했고 그의 카리스마 역시 개발드라이브에 힘을 실었다는 것을 인정한다.하지만 나처럼 고위층에서 먼 사람은 그들의 공로보다 동일방직 여공과 YH여공과 동대문시장 피혁노조원들이 경제개발을 만들어 냈다고 믿어야 한다.그리고 그렇게 믿는다.

또한 집단 속에 묻혀버리는 개인의 삶에 대해 당파적 애정을 보낼 수 밖에 없다.대학 다닐때 많이 들었던 '더 큰 적과 싸우기 위해서 개인은 접어라' 라는 뉘앙스의 말이 비록 정치적으로 옳다고 하더라도 나의 당파성은  개인들이 가진 수많은 사연들에 대한 배려쪽으로 기울수 밖에 없다.언젠가 지리산 산청에 가서 어느 촌로와 한참을 이야기한적이 있다.그 동네는 지리산 대원사 밑자락 동네로  한국전쟁당시 아침에 국군,저녁에 빨치산 하던 곳이다.그 촌로의 일가친척,친구들이 죽고 살고 당하고 모면한 이야기들을 들으면 전부 다 소설이다.어떻게 살아서 나랑 이야기하나 싶은 정도다.그 촌로가 내가 싫어하는 '한나라당'에 투표했다고 그를 의식없는 노인네라고 할 수 있을까? 설령 그가 박정희 예찬론자라 하더라고 나는 쉽사리 그를 욕할 수 는 없었을 것이다.설령 정치적으로 그것이 옳지 않다고 믿을 지라도

도모유키는 국가와 민족을 떠난 개인이다.낭만적 개인이며 인간적인 개인이다.전쟁이란 상황에선 이런 가치가 자신의 목숨을 앞당길 수도 있다.어떤 맹목적인 개인은 그래서 위에서 시키면 명령이라고 다 한다.민간인 학살같은 것도 전쟁시 명령이었으므로 난 책임없다고 당당하다.일개 병사가 무슨 큰 죄가 있겠냐만은 개인에게 살아 있어야만 하는 인류의 양심이란 잣대에 기대어 보면 결코 당당할 수 없을 것이다.우리는 흔히들 '친일청산 식민잔재 청산'을 말한다. 비록 늦었지만 친일인사 명단도 공개돼었다.하자만 여전히 우리는 일본에 대해 '우월감'과 '피해의식'이라는 두가지 감정 상태에 혼란을 겪고 있다.매일 TV에서는 일본문화가 우리나라에서 전파되었다고 떠벌이며 민족의식을 고취한다.또 한편에선 과격한 민족주의로 '피해의식'의 발로를 애국이라 믿고 있는 세력도 많다.일본어투를 사용하지 않고 일본상품을 사용하지 않고 일본을 배워 이기는 것만이 친일청산일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일본이 우리사회에 남긴 '전체주의''집단주의'를 하나씩 걷어내는 것이 진정한 청산이 아닐까 한다.개인의 선택과 개인의 개성,역사가 말살되어 집단으로 귀속되는 한국사회의 특성 역시 그 근대적 시원은 일본 제국주의에 있다. 수많은 도모유키가 살아나야 한다.수많은 봉자,말숙이 살아나야 하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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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09-13 14:58   좋아요 0 | URL
잘 쓴 리뷰에 추천이 부족하면 화가 나요.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