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름신이 내린 적은 없다.지름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대신 야금 야금 질러준다.그런데 돌아보면 결과는 같다.인터넷으로 음반주문하기 시작하면서 눈에 띄는 것들은 일단 보관함으로 들어간다.하지만 오래 머물지 않고 내손안에 들어와 있다.5월에 내 가족이 된 음반들..6월도 이미 중순 이미 달리기시작했는데..브레이크 한번 걸어야된다.ㅉㅉ 근데 문제는 음반나왔을때 안 사면 얼마나 기다려야 얻을 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이다.수급이 용이하지 않다보니....눈에 띄면 가급적 그때 그때 구해야 얻을 수 있다는...경험적 가치.브레이크의 수퍼에고와 악셀리이터의 현실이 인지부조화를 일으킨다.잔인한 6월...



베를린의 수장인 사이먼 래틀이 친정오케스트라를 데리고 녹음한 말러의 천인교향곡이다.교향곡 사상 최대라 할 만큼 와이드한 규모의 곡이라 실연이 주는 감동이 대단하다고 한다.아직 실연은 커녕 영상물도 보지 못했다만 음악만 듣고 있어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만하다.사이멀 래틀의 말러는 2번,5번,10번 연주를 가지고 있는데 호불이 좀 나뉜다.2번 연주는 그 호쾌함과 폭발력으로 강한 인상을 주었다.5,10번음 그냥 보통의 호연정도 였다.이 8번 연주는 그나마 2번의 번뜩임을 보여준다.솔티의 천인교향곡이 약간 구세대적 연주를 대표한다면 그 얼터너티브로 추천할 만하다.



라파엘 쿠벨릭의 말러 7번 교향곡 실황 녹음이다.이미 DG에서 전집이 나와있지만 이 연주는 그것과는 다른 연주이다.라파엘 쿠벨릭의 말러는 중용적이다.그래서 그런지 아직까지 쿠벨릭의 말러에 큰 감흥을 받진 못하고 있다.이 연주 역시 그런 성향이 있다.7번이 말러 교향곡 중 신비주의적인 면이 많은 곡이어서 자칫하면 지루하거나 구조가 혼란스럽게 들릴 수 가 있다.아바도가 시카고 심포니를 데리고 연주한 말러 7번의 선명한 구조에 익숙해서인지 쿠벨릭의 연주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리히터의 바흐 영국 모음곡 실황 녹음이다.리히터처럼 바흐부터 근대 음악까지 두루 섭렵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는 극히 드물다.그나마 클라우디오 아라우가 좀 가깝긴하다만 그도 근대 음악에 좀 소홀했던 면이 다른다.레퍼토리 확장에 애쓰는 폴리니의 경우 아직 음반으로 바흐연주가 출시되지 않아서 조금 더 기다릴 필요가 있다.리히터의 바흐는 낭만주의적 바흐이다.안드라스 쉬프의 동곡 연주에 비해서는 피아노의 음색이 딱딱하다.리히터에 비해 쉬프의 연주가 너무 부드럽다.동곡을 녹음한 페라이어는 음을 풍성하게 만든반면 리히터는 건조한 울림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아쉽게도 글렌굴드의 연주는 음반으로 가지고 있지않다.아마 이것도 곧...   사족삼아 부분 녹음이긴 하지만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모음곡 녹음(DG)은 최강이다.선명하고 명징한 녹음에 자신감넘치는 바흐연주이다.


리히터의 알려진 명연이다.브람스 피아노협주곡 2번.로린 마젤의 지휘로 연주했다.브람스 1번협주곡이 오케스트라의 비중이 크다고 보면 브람스의 피아노협주곡의 진가는 이 2번에서 들어난다.루빈슈타인,아라우,길레스,박하우스의 연주가 나름대로의 매력을 다 가지고 있다.이 연주는 길레스의 힘과 노년의 박하우스의 서정 사이에 있는 듯 하다.로린마젤의 서포터 역시 교과서적이면서도 열정을 담고 있어서 리히터의 흐름을 북돋아준다.레드라인에 가격도 저렴한 상황이니 이 곡들 처음 들어보려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선택이다.

 

 이 음반은 오래도록 살까 말까 고민만했던 음반이다.곡 자체가 쉽게 감상이 되는 곡들은 아니다.리스트의 피아노음악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다.리스트가 이탈리아나 스위스 여행의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만든 곡이다.리스트의 이 곡에 대한 최고의 명연이 라자르 베르만의 이 연주이다.레퍼토리를 늘리는 차원에서 사야되나 말아야 되나 늘 고민했었다.결국에 몇년만에 구입했다.아마 이 곡에 대한 다른 음반은 더 구매할 일이 없을 듯하다.전체를 한번 정도 들었다.베르만의 강약조절은 뛰어나다.곡들은 그다지 재미없지만 말이다.

 

바로크 첼로의 왕자 피터 비스펠페이의 비발디 첼로협주곡 음반이다.순서대로 정리되어 잇는 다른 음반에 비해 구성이 좀 헷갈리게 되어있다.그리고 첼로를 위한 곡이 아닌 것도 편곡형태로 들어있는 듯하다.쉬프의 연주로 들었던 비발디 연주가 낭만성을 배가시키기 위해 안정적인 템포를 취해 루즈함을 준 반면 비스펠페이는 낭만성을 잃지 않으며 원전연주의 특징인 공격적 템포를 놓치치 않는다.하지만 비스펠페이는 원전 연주팀중에서도 좀 보수적인 편이어서 감상에 거슬린 정도의 공격성을 띄지는 않는다.여름철에 들으면 아주 시원해 질 만한 연주이다.

 

미하일 플레트네프의 러시아내셔널 심포니와 길샤함의 만남이다.레퍼토리가 현대 바이올린 협주곡의 명곡 반열에 들어선 글라주노프의 곡이다.글라주노프는 림스키코르샤코프로부터 관현악을 배운 후기 낭만주의성향의 작곡가이다.즉 드뷔시로 부터 이어지는 현대음악 계열과 달리 차이코프스키를 중심으로한 러시아 낭만파의 전통을 잇고 있다.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으면 마치 영화음악을 듣는듯 선율과 분위기의 낭만성이 곡 전면에 두드러진다.길샤함의 연주가 늘 그러하듯 바이올린의 유려함도 하이페츠의 연주와 달리 낭만성으로 증폭시킨다.카발레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역시 글라주노프만큼이나 낭만적이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프라이빗 컬렉션 1집이다.그가 45년부터 50년까지 녹음했던 곡들인데 그간 미발표곡들을 중심으로 컴필레이션 되어있다.당연히 모노녹음이다.하지만 감상에는 전혀 문제가 될것이 없을 정도다.바흐,클라멘티,쇼팽,리스트등의 곡이 들어있다.생각컨데 미켈란젤리와 더불어 음의 색깔을 다루는데 호로비츠만큼 뛰어난 사람은 없을 것이다.한 음 한 음 사이에 호로비츠만의 색이 들어간다.독특한 뉘앙스를 가진 연주자이다.레퍼토리측면에서 리히터에 분명히 뒤지지만 인기는 그와 막상막하인데 그 이유가 바로 그가 피아노라는 악기를 다루는 태도에 있다.리히터가 마치 제단에 들어선 사람처럼 연주한다면 호로비츠는 피아노와 함께 즐긴다.그 즐기는 내공의 힘이 듣는 사람들에게 전해져서 음과 음사이의 또 음 하나 하나의 이름을 만들어낸다.드문 피아니스트이다.

 슈베르트 후기 피아노 소나타 음반이다.브렌델과 페라이어의 음반에 이어 폴리니의 연주도 구하고 말았다.브렌델의 연주는 누가들어도 이지적이다.페라이어는 달콤하면서도 울림이 크다.특히 960번 연주는 페라이어연주를 가장 즐겨듣는다.폴리니는 정이 가지 않게 연주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다.슈베르트를 베토벤 처럼 연주하는 것 같다.베토벤 후기 소나타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말이다.약음에서 폴리니의 선명함은 다른 연주자들의 페달링이 붕괴시켜놓은 음들을 복원시킨다.그의 연주를 통해 늘 들어나는 명징함은 이 음반에서도 변함이 없다.브렌델,페라이어,폴리니의 후기소나타가 있으니 더이상 이 레퍼토리로의 추가는 불필요할 듯 하다.단 하나 있다면 클라우디오 아라우의 유화같은 연주이다.아라우의 슈베르트는 진짜 유니크하며 대신할 수 없는 소리이다.하지만 현재 전집형태이어서 절판이라서 구하기는 어려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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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5-06-15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스르틀 듣고 있으면 몸과 마음이 꽤나 피곤해 지더군요. 뭐랄까. 대단하다는 느낌은 들지만 좀 정신사나워서-_- 즐겨 듣는 곡이라고는 '라 캄파넬라'나 '스페인 광시곡'정도입니다. 아. 리스트의 베토벤 교향곡 편곡은 감탄할 만 하더군요. '어둠의 통로-_-'에서 레슬리 하워드의 연주를 구해 간혹 듣고 있습니다.

리히테르의 브람스 2번. 라인스도르프와의 협연을 듣고 글자 그대로 경악했던 지난 가을이 생각나네요. 이거 좀 해도 너무한다싶을 정도로 밀더니 저 음반에서는 이양반도 생각이 달라지고 나이를 먹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훨씬 듣기 편했습니다. 커플링된 슈만 소나타는 긴장감이 흘러넘쳐서 좋았구요. 그나저나. 불안감. 에 동감 한 표요. =)

마태우스 2005-06-22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대단하십니다. 멋진 문화인 드팀전님...

마태우스 2005-06-22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유시민 리뷰 말이죠, 한수 지도받으려고 쓴 건데, 님께서 해주셨군요. 구구절절 옳은 말씀 감사합니다. 능동적에 대한 님의 견해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최악과 차악 중에서 골라야 하는 건 사실 능동은 아니겠죠. 물론 그 과정에서 당선가능성이라는 변수가 고려되구요. 늘 말하지만 우리나라의 진보를 위해서 대선에서만큼은 결선투표제가 도입되었으면 합니다.
 

나는 가끔 엉뚱한 장소에서 엉뚱한 단어에 집착할때가 있다.예전에는 나의 천재성의 한 단면이 아닌가 걱정한 적도 있었다.또 돌아서면서 나의 황당함에 스스로 '진짜 웃긴넘이네' 라고 조소할때도 있었다.오늘 아침은 일찍 출근을 해야하는 날이다.졸린 눈으로 침대를 벗어나면 일단 소파로 향한다.소파에 누워서 TV채널을 이러저리 돌리며 잠을 깨려 노력한다.그다음은 화장실.....

화장실에서 칫솔질을 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났다.

"옛날에 학교에서 달마다 또는 분기마다 돈백원씩 걷던게 있었는데...그거 뭐라 하더라?"

왜 그 타이밍에 그런 생각이 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나에게 묻지마시길...

최근에 사용하기 시작한 전동칫솔의 윙윙 소리를 귀로 들으며 머릿속에서 그 단어를 계속 더듬었다.

'아....답답...그게 뭐더라....아....씨....진짜....돈 걷었는데....평화의댐 건설한다고 그럴때는 훨씬 많이 걷었구...평소에도 코묻은돈 걷었는데...'

전동칫솔의 오프버튼을 누르면서...그 답이 떠올랐다.

" 방.위.성.금 "  (오-예스)

졸린 눈을 깜박거리고 있는 와이프에게 뭐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말했다.

"자기....방위성금이라고 알아?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지?"

요즘은 방위성금 걷진 않을거다.그런데 내가 초등학교 다닐때는 거의 매달 한번씩 코묻은 돈을 걷었다.반장이었던 나는 방위성금 징수원이었다.초등학교 저학년때는 100원정도 였던 것같다.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때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백원은 넘었을 거다.방위성금 걷는 요령은 철저히 중앙집중력 권력구조를 빼다 박았다.초등학교의 교실 구석 안에도 군사문화의 위계구조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기때문이다.대개 책상 두줄이 한분단이었고 대여섯분단이 한 학급을 구성했던 것 같다.각 분단은 분단장이 있었고 그 아래 줄의 마지막에 앉은 두명의 줄반장이 있었다.방위성금은 대개 뒤에 있는 줄반장이 앞으로 나오면서 걷는다.그리고나서 그 줄이 속한 분단장에게 전달한다.분단장은 자기 분단에 안낸 사람 명단을 적어서 반장인 나에게 주었다.

나는 분단별 집계를 정리하고 안낸 사람 명단을 선생님께 건넨다.선생님은 가끔 조례종례 시간에 우리반 방위성금 모집이  다른 반보다 저조하다고 채근했다.대개 1주일 안에 방위성금모집은 끝났다.하지만 그때까지도 내지 않는 친구들도 있었다.대개 좀 집도 어렵고 성적도 떨어지는 친구들이었다.칠판에 그들의 이름을 적는 것은 늘 내몫이었다.   

"방위성금 안낸 사람------김@@ ,박@@,정@@ "

두가지 웃긴 생각이 든다.도대체 코묻은 돈으로 탱크사고 비행기 사려고 했을까? 이미 세금 충분히 내고 잇는 우리부모들에게 아이들을 통해서 준조세를 걷어낸 정권은 참으로 치사하다.하기사 요즘 팬클럽 까지 생기셨다는 전두환 kang-agi는 서울이 물에 잠긴다고 단군이래 최대의 뻥을 쳐서 애들 엉엉울며 돈내게 만들엇다.평화의 댐 건설할때는 방위성금의 단위 규모가 훨씬 커졌다. 직장인들도 월급에서 떼고 방송국마다 성금모금 방송을 하며 애국심 경쟁을 했다.학교에서 내었는데 동네 반상회에서 또 내고...직장에서 냈는데 동창회 모임에서 또 내고...하여간 .... 그래도 서울이 물에 잠기는건 막아야하니까...... 당시에 이를 잘 이용해서 베니스같은 세계적 수상도시로 만들자고 나오는 사람은 없었나 모르겠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군사문화적 위계질서는 방위성금 모집하듯 아직도 우리사회에 만연하다.그게 효율적 조직상이라고 말하는 조직이론옹호자들도 있을지 모르겠다.개방적 조직이 늘고는 있지만 아직도 전통적 구조는 계단이다.이것은 일상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중앙집중형 군사주의적 위계는  우리몸 속에 반도체칩을 하나 꼽아놓았다.삼성이 만드는 세계 일류의 반도체보다 성능이 훨씬 좋다. 나이에 따라 서열화되고 또 직위에 따라 서열화된다.쓰는 용어 자체에서도 권위주의의 속성은 그대로 반영된다.

어떤 사람은 그게 한국 문화라고 한다.그게 싫으면 한국을 떠나야 한다고...

나는 한국을 떠나야 하나?  이민가도 먹고 살게 없다.먹고 살려면 손으로 하는 기술을 하나쯤 배워야되는데...그래서 농담삼아 어느 선배에게 "목공 좀 배울까?"  그랬다.그 선배왈 "야....목공배우면 배곪는다.차라리 서예를 배워서 학원을 해라.."  

"...." ..."   음.....혹한다. 그래 서예를 배워가지구 양넘들한테 그럴싸하게 젠이다 뭐다 그러면서 팔아먹을까?

뉴욕가서 서예 학원하면 망할까?  지금도 이미 많을꺼야?.... 아직 한국뜨긴 시기상조다.무기한보류!!

에.....또 ...방위성금이 그냥 뜬금없이 나왔듯 서예학원도 같은 생각이다.두서없어..미안하당.허무...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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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6-02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예학원보다는 태권도 도장이 좋지 않을까요?^^
방위성금말고, 국군아저씨들에게도 일년에 두차례씩 무언가를 보냈죠.
근데, 궁금해요. 우리들이 모았던 세수비누, 치약, 칫솔, 타월등이 무사히 가긴 갔을까요?
 
미국의 정치 문명
권용립 지음 / 삼인 / 2003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에게 미국은 골칫덩어리다.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이웃집 성질 나쁜 반장아저씨같다.과거에는 먹고 살려고 아부도 좀 하고 큰 형님 대접도 해줬다.일부 세력들은 그 와중에 반장아저씨네 편에 딱 붙어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했다.또 여론조작을 통해 미국은 자유와 민주의 수호천사라고 떠벌여주었다.마치 조선시대 명나라를 상국으로 섬기듯이 겉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반장아저씨 미국을 대한민국의 상국으로 모셔놨다.그래서 그런지 대한민국에는 한국민임에도 스스로 미국의 에이전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정계,재계,종교계,인터넷계에 만연한다.대통령이 비슷한 말 한번 했다가  욕을 바가지 바가지로 먹었다.미국은 그들에게 우상이다.그렇기때문에 더 골치아픈게 미국이다.

예전에 잘가던 술집 주인할아버지는 "X도 미국놈 X는 약이다"라고 늘상 말했다.한국전쟁 당시 초코렛얻어먹던 습성 때문인가.그 아저씨가 그런 말을 내뱉고 있을때 거리에서 성조기는 '훨..훨 ...' 불 타고 있었다.'양키 고우 홈' '반미반제' ....그렇기때문에 더 골치아픈게 미국이다.

저자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미국에 대한 두가지 극단적 시각에 제동을 건다.둘다 지극히 감정적이고 일면적인 요소가 있다.친미 세력들의 빅보스에 대한 과도한 충성은 더이상 말할 가치도 없는 일이라 언급을 하지 않겠다.미국에 대한 비판적 세력의 대미인식이 지나치게 레토닉 중심이었다는 것은 자기비판을 해봐야한다.거리에서 선전선동의 구호로 반미를 외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거리에서 길게 설명해가면서 이야기할 것인가.짧고 굵게 운율에 맞춰서...거리에서야 그렇다.그런데 반미의 의식 역시 그렇게 짧고 굵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이간다.시대를 뛰어넘어 21세기에도 미국에 대한 반대의식은 감정수준이 주류를 이룬다.신문에서 인용한 몇가지 논리에 감정을 확 싣어서 광화문에도 가고 인터넷 도배질도 한다.

"이라크 침공은 무조건 석유때문이다.부시는 한반도에 불리하다 미국 민주당 캐리가 대통령이 되야한다." 이런 단순논리는 생각하기 싫어하는 게으름에 대한 멋진 변명 역할을 한다.저자는 책 말미에서 미국의 대외적책이 결코 바뀐적이 없다고 말한다.오히려 미국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기때문에 일희일비하는 대미이중성이 발생한다고 본다.미국은 독립전쟁이후 줄곧 같은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 작은 차이에 환호하고 실망하고 기대한다는 것은 피상적 대미인식이 가져다주는 또다른 의식적 의존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을 미국의 시각에서 파악하길 권하다.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와 역사에 대한 집단무의식으로 볼 수도 있다.저자는 우선 미국이 예외주의적 사관을 가지고 있다고 밝힌다.미국이 인류사의 보편적인 단계를 거치지 않았기때문에 정치,역사에 있어서 특별하다는 것이다.그 예로 미국은 봉건제가 없었으며 역사적으로 단일한,합의된 이념에 따라 움직여왔다는 것,또 계급갈등이나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없었다는 점들을 들고 있다. 이 예외주의는 미국을 합의된 정치이념으로 움직이는 '합의주의 신화'라는 강박증을 만들어낸다.

이 합의주의 신화에 바탕이 되는 것이 '자유주의합의이론''공화주의 합의이론'이다.쉽게 말해 건국초기부터 미국 역사를 이끌어온 중추 사상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른 구분이다.자유주의 합의이론에서는 로크의 사상에 기반을 둔 개인의 사적자유,공화주의 합의이론에서는 고대공화,마키아벨리로 이어지는 공민의식을 중심에 둔다.여기에 저자는 미국의 지배적 정신인 프로테스탄티즘,그중에서도 캘빈주의를 더한다.이 세가지가 저자가 말하는 '보수적 아메리카즘'의 구성요인이된다.저자는 '보수적 아메리카즘'을 독자적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즉 '미국의 보수주의''미국적 보수주의'와는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명시한다.앞서 말한 두 용어는 '자유주의'의 상대개념으로 하위가치를 지닌 반면 '보수적 아메리카즘'은 자유주의,공화주의,캘빈주의가 상호협력하여 융화되면서 발생하는 미국 정치의 내적 보수성을 밝히는 개념인 것이다.

저자는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정치문명에 있어서 중요한 시점으로 보는 건국 초기와 연방헌법 제정시기에 촛점을 맞추어 미국의 정치문명을 조망한다.첫번째 자유주의는 영국의 로크에 힘입은 바 크다.혁명기에는 정치적 자유주의가 중시 되었으나 19세기를 넘어서면서 아담스미스의 경제적 자유방임주의가 더해진다.하지만 이 자유주의에도 가장 중요한 덕목이있었는데 그것은 도덕주의이다.이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개입축소를 지향하지만 궁극적으로 덕성의 역할 역시 중요한 것으로 본것이다.이러한 점은 공민주의적 입장을 가진 공화주의와의 결합가능성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미국 공화주의의 전통은 기본적으로 식민모국 영국의 타락한 정치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비롯된다.미국 정치의 근원적 회귀성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공화주의자들은 미국에서 고대 공화주의의재현을 꿈꾼다.반평등적인 평등주의 하에서 대통령(왕)/상원(귀족)/하원(대중)의 권력분립을 추구한다.또 공민적 실천을 위해 재산권-특히 토지과 무기소유 보장을 연방헌법에 담는다.인적구성면에서 보면 연방파-코트(상업세력)-자유주의를 한축으로 하고 반연방파-컨츄리-공화주의를 한 축으로 한다.하지만 이 두가지 근본이념이 갈등만을 한 것은 아니다.포칵의 말을 인용하면 '마케아벨리적 긴장'이라고 하는 덕성과 상업,덕성과 타락,사익과 공익의 대치 속에서 인식의 절충을 이루어낸다.공화주의적 틀내에서 자유주의의 사익추구나 상업이데올로기를 용인하고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가지 미국 정치이념의 기본 토대가 되는 것이 캘빈주의이다.캘빈주의 역시 공화주의적 불평등성에 정서적 가치를 제공해준다.또한 자유주의의 사익 추구를 선으로 규정함으로서 이 양자간의 조화를 가능케해준다.캘빈주의는 특히 미국인들이 가진 우월주의와 소명의식을 설명하는데 적합하다.미국은 기본적으로 '반대를 통한 정체성'확보를 특징으로 한다.캘빈주의는 반프로테스탄트,반이민을 넘어서 반미국적인 것들에 대해 부정하는 정서적 토양을 만들어준다.캘빈주의에 바탕을 둔 천년왕국론이나 소명론은 미국을 예외적인 국가로 인정케하고 미국의 대외팽창 및 대내팽창의 도덕적 안전핀 역할을 해준다.거기에 미국의 강박적인 도덕주의 역시 과격한 배타주의 성향을 보이며 미국의 우월성을 입증하는데 한몫을 한다.미국의 부시가 툭하면 종교적 용어를 사용하며 미국을 선으로 기타 반미국가를 악의 축으로 보는 것은 미국인들이 가진 캘빈주의의 선악관의 투영이다.

저자는 미국의 대외관을 끝으로 책을 정리한다.미국 대외관의 근본은 사회진화론과 캘빈주의적 선악관이다.현재 미국이 다자주의라든가 고립,개입주의라든가 외교적 수사를 사용하여 미국 외교의 방향을 밝히는데 이것은 전부 옮바른 인식을 방해하는 수사조각으로 본다.미국은 근본적으로 세계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확산한다는 의미에서 팽창주의를 펼쳐왔다는 것이다.즉 부시가 되었던 클린턴이 되었던 미국 외교원칙은 '팽창'이란 원칙은 불변이었다고 본다.욕먹는 부시 경우 이러한 것을 위장하는데 훨씬 미숙한 방법을 쓰고 있다는 차이뿐이다.

이 책의 저자는 말미에서 자신의 주장이 환원주의틀 속에 있을 수 있다는 자기비판을 했다.기본적으로 합의주의의 융합을 통해 문제에 접근했기때문이다.개별 합의주의가 가진 환원론의 성격을 융합시켜놓았더라도 결국 합의주의 패러다임의 환원적 성격은 벗을 수가 없을 것이다.하지만 이 책에서 모든 미국의 정치 외교의 핵심원리를 찾으려 했다면 그것 자체도 모순일 수 있다.이미 저자는 책 서두에 이 책의 방법론적 접근에 대해 밝혔고 그 안에서 충실했다고 본다.이런한 내재적 접근을 통해 미국을 움직이는 근원을 파악하고 그것이 개별 사안에서 또 미국의 대외관계에서 어떻게 작용했는지 아는 것은 독자가 연구해야할 몫이다.서점에 가보면 헌팅턴부터 촘스키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미국관련 서적이 즐비할테니 말이다.

% 이 책은 지금 잠시 잠수하고 계신 바람구두님의 강력추천 덕에 읽었습니다.땡큐!! ..그나저나 언제복귀하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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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황홀 - 윤광준의 오디오이야기
윤광준 지음 / 효형출판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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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 방에 처음 오디오란게 생긴 건 중학교2학년때 이다.거의 1년을 '오디오 오디오' 타령을 했다.부모님들은 늘 그렇듯이 얄팍한 조건을 -당신들은 동기유발이라 믿겠지만-달면서 오디오를 부상으로 내거셨다.조건이란건 누구가 알다시피 시험 성적이다.결과가 좋았는지 아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해 여름이 가기 전에 내방엔 나만의 오디오가 생겼다.당시에 우리 반에서 자기방에 오디오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정말 귀했다.(잘사는 동네가 아니어서 그럴 수 도 있겠지만..) 한 30만원 돈 되는 인켈 오디오였다.내 방 한쪽 면을 거의 장악하다시피했다.그 당시 오디오는 기술발전의 혜택을 덜 누려서 그런지 성능에 비해 좀 비대했다. 동가격대의 요즘 나오는 것들에 비하면 훨씬 많은 면적을 차지했다. 작은 내 방은 새로 들어온 오디오의 존재 하나로 꽉찬 느낌을 주었다. 그날 이후 주구장창 음악을 듣고 음반을 사모으기 시작했다.아마 내가 처음 산 LP음반이 'WHAM','들국화 1집' 이었던 것 같다.

좋은 소리는 한번 들으면 그 감흥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예전에 가끔 시내 나가서 오디오 전시장에서 흘러나오는 좋은 소리를 듣곤 한 적이 있다. 이게 '후천 개벽'하는 소리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쿵쾅거린다.그리고 저걸 집에서도 듣고 싶다는 욕심이 마구마구 생긴다.하지만 가격대를 알아보곤 맘을 접는다.눈으로는 아쉬움을 귀로는 감동의 여운을 남긴채 샵을 나가야만 했다.그러면서 다짐만 한다. '다음에 이사가면...다음에....'  결국 나에게는 하이앤드는 공간과 가격이라는 벽때문에 늘 미루어온 욕심이다.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면 매니아라는 중독성 명사에 대한 나의 회피때문이다.무슨 이유 때문인지 나는 매니아가 좋게 들리지 않는다.사람들은 매니아를 한 분야에 자신의 열정을 토해내는 아름다운 사람들로 묘사한다.저자 역시 오디오 매니아로서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 애정을 느끼고 스스로도 프라이드를 느끼고 있는 듯 하다.물론 매니아들에 대한 곱지 않는 시선도 있다. 대게 매니아들이 열광하는 대상에 대한 의구심때문인 듯 하다.그 기준은 무색무취한 일반인의 시각이다.그런 시각으로 보면 어른이 다돼서 인형옷이나 입고 다니고 징그러운 거미를 집에서 키우고 세상의 온갖 나이키운동화를 모으고 하는 것들이 정상의 영역에서 벗어나 보인다.

내가 매니아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매니아들이 갖는 자기영역의 구획화와 자기 전문성에 대한 스스로의 맹신때문이다.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하지만 매니아임을 자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 분야말고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 허다하다.자신이 취미든 전공이든 얻게된 지식이 다른 모든 것과 유기적 소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결국 한우물만 열심히 파서 우물안에 개구리가 되어버리는 것을 쉽사리 발견할 수 있다. 또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대한 겸손은 밥먹듯 잊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예를 들어 인라인 동호회라고 치자.거기에는 자주참가하는 주도세력이 있고 또 가끔 참가하는 사람도 있다.또 이제 갓 시작을 한사람도 있을 것이다.갓 시작한 사람이 들어오면 얼마나 시끄러운지 아는가? 관심과 애정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의 경험과 지식에 대한 설이 대부분이다.이럴때 이렇게 해라 저럴땐 저렇게 해라....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또 어떤 잘난 이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마치 자신이 갑자기 아이가 되어버린 듯 하다.경험과 지식이 스스로를 너무 당당하게 만들어버린다.매니아들은 그러한 함정에 늘 노출되어 있다.

이 책은 저자가 오디오에 관심이 있는 예비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쓴 듯하다.그렇다면 나는 적절한 수혜자인 셈이다.이 책을 보는 동안 좋은 기기들에 마음을 빼앗겼고 또 거기서 나오는 소리를 스스로 상상하며 즐거웠다.기계적인 이야기만 장황하게 늘어 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길수 있다.여기에 등장하는 오디오기기들은 디자인적으로도 아주 훌륭하다.그래서 많진 않지만 사진보는 즐거움도 크다.린의 턴테이블,탄노이 킹덤,골드문트 아폴로그,소누스 파베르의 과르네리오마주 스피커등등. 그냥 내부 기기들을 모두 빼버리고 장식용으로 설치해 놓아도 인테리어의 수준을 높여줄 만한 탐나는 디자인들이다.저자는 좋은 오디오가 기술적 발전 하나만 가지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오디오라는 것은 인간의 예술적감각,인문학적 감성들과 직접적 소통이 이루어진다.제작사가 이러한 점에 대한 소신있는 철학을 가지고 있지 못한 한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없다.이점때문에 하이앤드오디오가 일반 가전제품과 다른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한마디로 장인정신이 없다면 오디오도 없는 셈이라는 것이다.그런 의미라면 오디오기기들은 제품이라기 보다는 작품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 같다.

장인의 기가 배어있는 작품이 하이앤드의 세계이다 보니 역시 가격은 어마어마하다.저자가 이 책에 소개한 기기들,보기에 아름답고 좋아보여 하나 살까 생각하는 분들은 인터넷 한번 뒤져보시면 생각이 좀 바뀔 것이다.강남의 부자들이 선호했다는 탄노이같은 경우 대략 프론트스피커만 2천만원 수준이다.예쁘장하게 생긴 윌슨베니쉬의 서클턴테이블은 4백만원대이다.(모양진짜 예쁘다)골드문트의 풀에필로그는 2억원대의 가격이다.물론 한 브렌드에서도 가격대비 천차만별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조금 한다 하면 집전세값은 거져날릴 정도의 가격이니 취미치고는 상당히 돈이 많이 들아가는 취미이다.내가 오디오계에 아직 발을 못붙이고 있는 것도 더 좋은 소리를 찾아헤매다 거지될까봐서이다.저자는 말한다.진짜 오디오파일중 넉넉한 사람들은 없다고 다들 적금깨고 부인몰래 카드 할부하고... 나름대로 좋은소리에 대한 집념처럼 들리기는 하는데.... 카드 할부에 적대적인 나는 그런게 영맘에 들지 않는다.없으면 없는 선에서 멈출지 알아야하는데 소리 욕심에 삶이 부대끼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따지고 보면 그러한 소리 욕심의 대부분은 르네지라르가 예기한 '타인의 욕망''매개된 욕망'일수 있을 텐데 말이다.그러한 욕망은 절대 채워질 수 없는 것이라고 그도 말하지 않았던가.

마지막으로 진짜 맘에 안드는 얄팍함에 대해 지적하자.

저자는 오디오와 음악을 통해 삶을 배웠다고 한다.이러한 표현은 사실 매니아들의 상투적 표현방식이다.정말 그랬을 것이다.독재반대투쟁에 사람들이 실려갈때도 저자는 고개를 파묻고 음반만 돌려다고 스스로 부끄러워한다.세상모든 사람이 다 돌들고 병들고 할 필요는 없다.그냥 부끄럽다 하면 아무도 뭐라 안한다.그런데 저자는 그 부끄러움을 음악에 돌렸다. '나는 숨죽여 흐느끼며 존바에즈의 '우리승리하리라' 밥딜런의 '블로잉인더 윈드'를 들었다,나는 위대한 아티스트들로부터 자유와 희망,절망과 고독을 하나씩 배워갔다.' 이게 무슨 풀뜯어먹는 백해무익한 변명이란 말인가.내가 답답한부분은 자신의 비겁함에 대한 사후 피난처로 음악을 끌고 들어가는 태도때문이다.흔히들 예술가들이나 예술가인 척 하는 사람들인 정치적 변동기에 자주 취하는 방식이다.아닌가? "세상이 혼란할때 음악과 미술의 한차원 높은 세계에 계시다 세상이 안정되면 그때 나는 다른세계에 잠시 가있어서 ...잘 모르고...좀 미안하기도 하구...그러네. 이거 아닌가?"  내가 무슨 극렬행동가는 아니다.단 매니아들이 -특히 예술적 매니아-이 예술을 등에 없고 둘러내는 변명에 자다가 뺨맞는 예술이 불쌍해서 그런 소리한번 해본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예술을 등에 없은 저자의 얇팍한 상상력은 이런 형태의 글을 남긴다.좋은 CD플레이어가 들어왔다는 가게주인의 이야기에 오디오가게로 가면서 하는 말이다.

"오디오숍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착잡하다.아니 즐겁다.조금 후면 성공한 뉴욕의 여피족들이 사용한다는 '와디아'CD플레이어가 내 것이 된다.영화에서 보았던, 마천루의 야경이 창 밖에 비치는 푸른 색조의 세련되 거실에 놓여 있던 바로 그 기종이다.갑자기 내가 그들과 같은 반열에 올라선 기분이 든다."

좋으셨을 것 같다.그 훌륭하신 뉴욕의 여피님들과 어렵사리 같은 반열에 오르셨으니.!!  생각은 저정도 수준의 경박함이나 오디오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아는 저자다. 나는 매니아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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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07-19 18:05   좋아요 0 | URL
아, 드팀전님... 제가 어찌 당신의 손을 들어드리지 않을 수 있으리오....

보르헤스 2006-06-10 16:03   좋아요 0 | URL
역시 드팀전님! 기대를 져버리시지 않는군요.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하더군요. 오디오란 음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던가요? 그의 오디오 찬양엔 음악의 자리는 없더군요. 음향만이 있을 뿐이지. 하이엔드 오디오에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에 이르는 돈을 쓰느니 차라리 연주회나 음악회에 한번이라도 더 가는게 나을듯 합니다. 그가 그렇게나 추구하려는 진정한 소리를 듣기 위해서라면 말이죠 ^^
 
장자 현암사 동양고전
오강남 옮기고 해설 / 현암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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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혼자 길을 걷다보면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있었다.이름하여 '도인'들....  연인이나 친구들 처럼 우루루 몰려다니는 사람들에겐 잘 접근하지 않는다.좀 어수룩해보이거나 생각이 많이 보이면 슬그머니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  ...   "도에 관심있으세요?"...  대개는 무시하면 피할 수 있었다.하지만 가끔 은근과 끈기가 힘인 사람들이 있다.이런 사람들은 몇 십미터를 졸졸 따라다닌다.언젠가 그런 사람을 한 번 만났다. 어떻게 떨칠까 고민하다 내가 꺼낸 말..."저 맑시스트거든요.아시죠..빨갱이?"  .... 그 영업사원인지 도인인지는 벙찐 표정으로  가만히 서있었다. 나 역시 '이거 효과가 생각보다 대단한데..'라고 느끼며 내 잔머리의 영특함을 스스로 대견해 했다.그리고 내린 결론 "역시 대한민국에서는 호환마마,불법 포르노 보다 더 무서운건 빨갱이구나.. 도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군."

나는 옛글을 좋아하는 편이다.노자의 도덕경이란 걸 처음 읽었던 것이 대학교 1학년때였다.사실 뭐 잘 알고 본 것은 아니다.그후에도 논어니 맹자,채근담같은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가끔 한시도 뒤적이면서 앞뒤로 오고가며 해석도 해봤다.나름대로 재미있었다.일단 옛 글은 압축적인 멋이 있다.또 나름대로 사리에도 맞는 말들이고...거기에 속물적인 정서도 하나 작용했다.어디가서 그런데 나온 글 하나 외워서 이야기하면 좌중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그걸써먹는 나도 유치하지만 또 거기에 "와...." 하는 인간들도 다 똑같다.

요즘도 마음이 혼란스럽고 세상사로 인해 감정이 울렁울렁 대면 옛글을 하나 찾아 읽곤한다.주로 법구경이나 숫파니파타를 본다.이 책 <장자> 역시 앞으로 그 목록에 들어갈 것 같다. <장자>의 내용이 선불교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는지 아니면 진리가 서로 닿아서 그런지 내가 알고 있는 몇몇 불교의 가르침과 상당히 유사했다. 우선 <장자>의 첫구절은 동물이야기로 시작한다.그 유명한 물고기 곤과 새 붕에 대한 이야기이다.노자 도덕경의 첫 구절 만큼이나 유명하고 또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이야기이다.세상사의 모든 것이 변하고 또 모든 것이 하나라는 말로만 이해된다만 정말 아는지는 알 수 없다. <장자>는 물고기와 새의 변화로 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우화와 풍자,반어를 통해 현실의 한 차원을 뛰어 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우리가 이것 밖에 없다고 믿는 그 모든 것이 '우물 속 세상'이므로 마음을 수련하여 대양으로 나아가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선 해야하는 것은 "자신을 잊어라"는 것이다.<장자>제 2편 남곽에 사는 자기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이것이다. 본문에는 "지금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라고 하고 있다.여기서 자신이라는 것은 실존적 존재로서의 나뿐만이 아니라 나의 실존을 구성하는 기타 모든 환경까지 포함되는 듯하다.즉 나와 나를 만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면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것이다. 도는 버리는 것이라는 말 역시 같은 의미일게다.서양 철학에서 근대의 자아론이  탈자아론으로 변증법적 발전을 꿰하는데 <장자>에서는 이미 그것을 오래전에 말하고 있다. 하이데거나 니체,가깝게는 들뢰즈 이런 사람들의 말 속에 가끔 씩 선불교와 노장의 사상이 묻어나는것도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세상은 아직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 속에 서있는 듯하다.광고에서도 자주 들려지는 말들은 자아정체에 대한 확실한 각인이다.흔히들 하는 '나는 나고 나는 세상의 중심이고' ...뭐 결국 소비주체로 당당히 서서 열심히 사서 쓰란 이야기인데도 괜히 그럴싸해보인다.특히 에고가 강한 젊은층에게 이런 메시지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장자>는 "내가 과연 나일까"하는 비판적 넘어섬을 또 넘어서라고 한다.불교에서 말하는 '백척간두 진일보'의 마음일 것이다.자아에 대한 비판적 사유 역시 결국 '나'라는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일 뿐 진정한 넘어섬은 '오상아'-즉 나를 잃어버림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세상이 하나이고 모든 것이 한뿌리에서 나옴을 깨닫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분별심'을 없애는 것이다.<장자>에서는 마음 굶기기-즉 심재-를 통해서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을 깨라고 일갈한다.비교종교학자 답게 역자는 성경의 말씀을 인용한다."마음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이 가난한 것이나 마음을 굶기는 것이나 같은 말일 게다.여기서 말하는 이분법이란 것이 '너는 여당 나는 야당'하는 것이 아니다.남과 여,기쁨과 슬픔,삶과 죽음 ....등등등 세상을 구성하는 여러요인들의 흐름을 분별하여 보는 것을 삼가하라는 뜻이다.선악미추 생사 고락이 모두 평등한 가치가 된다.선불교에서 역시 인간의식과 감각의 위계를 없애라라고 말한다.어디서 주워들은 말 중에 "양단" 이란 말이 있다.양쪽을 모두 자르라..라는 그런 말이다.여기서 양쪽이란 것이 바로 이분법적인 사고를 뜻한다.<장자>의 유명한 우화중 하나는 장자의 아내 장례식 대목이다.장례식에서 북치고 장구친 장자이야기이다.삶과 죽음을 같은 가치  equal value로 본다면 사실 아무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굳이 논리적으로도 어긋남이 없다.몇년전 책이 소개되어 큰 감동을 주었던 스코트 니어링의 죽음을 생각해보면 장자의 가르침과 다를 바가 없다.

어떤이들은 이러면 무슨 삶의 재미가 있을 것이냐고 반문한다.나 역시 한편으로 그말에 동의 하기도 하지만 장자가 말한바는 그런 1차원적인 것은 아니였을 것이다.세상사의 즐거움을 알고 관계의 유용함도 깨닫고 충만한 삶을 누리되 거기에 연연하여 큰 진리를 거스르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장자의 사상 중 큰 오해를 받는 것중 하나는 정치사상이다.장자의 사상이 현실은 비루한 것이니 연연해 하지말라는 것으로 파악했다.다른 말로 하면 있는 것은 있는대로....즉 가진자들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이런 무식한 말을 하신분들은 내가 대학다닐때 열심히 운동하시던 선배들이다.그들 역시 뭐 알고 말한 것은 아니였을 것이고 몇몇 책들에서 주워들은 걸 게다.20대초반의 어리숙함을 지금와서 욕해봐야 무슨 소용있겠는가.하지만 지금와서 생각해 봐도 경솔한 제단은 아니었나 싶다.장자의 사상은 다 소용없다는 허무주의는 아니다.유가의 가르침에 비해 적극성이 떨어지는 (특히 맹자)것은 사실이나 장자는 정치의 다른 차원을 지적하고 있다.큰 틀에서 사람을 다스리기 위해서 안으로의 혁명을 주창한다.장자가 제시하는 정치는 수신에 우선을 둔다.그리고 그다음으로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것을 진정한 다스림으로 본다. 이런 말이 나온다.

"명철한 왕의 다스림이란 그 공적이 천하를 덮어도 그것을 자기가 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변화시키는 힘이 만물에 미쳐도 백성들이 그에게 굳이 기대려 하지 않는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말을 기르는 일과 무엇이 다르겟습니까? 그저 말을 해치는 것을 없애는 것 그것뿐입니다."

무위의 정치이며 작은 정치이고 보이지 않는 정치이다.쉬워 보이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참 위대한 말이다.

나는 이 책을 쉽게 재미있게 읽었다.한자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도 아니니 더욱 용이했다.내용중 일부는 이미 다른 책들을 통해서도 알고 있던 것이었다.그중 일부는 이미 나의 세계관의 한장을 구성하고 잇는 것도 있다.하지만 나는 책을 읽었으나 아직  읽지 않은 것과 같다.내가 읽고 느낀것은 글이지 <장자>의 세계가 아니다.내가 만약 열심히 닦아서 무위당 장일순 선생정도쯤 된다면 그때쯤 <장자> 한번쯤 읽었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몇가지 잡념이 떠올라서 마지막에 쓴다.

내 생각에 결국<장자>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결국 "행"의 문제가 아닐까한다.장자가 실행의 문제를 딱히 지적한 바는 없다.하지만 모든 철학이나 사상의 중심은 행동이다.수많은 좋은 지혜와 세상을 꾀는 깨달음을 얻어도 자신의 손발이 그와 함께 가지 않는다면 이것을 어떻게 봐야할까? 또 한가지 생각은 이런류의 책에 감화 감동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요즘<장자>류의 책이나선불교,명상론,인도기행등의 책이 인기있다.하지만 이는 대중소비적인 '선사상''무위사상'이다. 여전히 자신의 삶은 분별과 자신의 이기로 가득차 있으면서 퇴근후에 도장에서 명상하고 마음을 비운다고 무었이 비워질 지 모른다.물론 아예 생각한번 해보지 않는 것보다야 훌륭하지만 취미가 되어버린 '도'라는 것이 과연 선인들이 찾던 그 '선'이고 '도'인지 모르겠다.그리고 가끔 만날 수 있는 어설픈 범우주적 세계관 역시 삽질한다고 생각한다.현실의 불의에 대해서는 별 말 못하고 또는 개입을 하려하지 않으며,늘 자신은 한차원 위를 바라본다는 듯 한 범우주론적 세계인들은 우습다.그런 고매한 분들에게 지상의 어설픈 시인 김수영은 "너의 중용은 비겁이다."라고 했다.스스로의 비겁을 형이상학이니 초월이니 하는 것은 고귀한 가르침으로 곡학아세 하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분들이 뭔가 알고 있다해도 실제 아는 게 없을 수도 있다.불교에서는 스님들이 화두를 앉고 몇년수행 하다보면 어떤 스님들은 큰 가르침을 깨달았다고 큰 스님을 찾아온다고 한다.이제 다 알았으니 내려가겠다고.본인들은 진짜라고 믿지만 그게 아닌가보다.몇년 절간수행도 그러한데 그까짓  책 몇권보고 마치 세상사 부질없다고 하는 위인들도 경계해야한다. 전부 키치다.키치적 작가들에 대한 키치적 만족이며 키치적 취미에 대한 키치적 낭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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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5-05-16 17:19   좋아요 0 | URL
신영복 님이 쓰신 나의 동양고전 독법 " 강의 " 읽고 있는데..동양고전은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물이 샘솟는 깊고 맑은 샘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머리 속이 시원해 지거든요. 장자도 읽고 싶었는데 ... 드팀전님 리뷰를 보니 더더욱 간절해 지네요.

분홍달 2005-05-17 08:08   좋아요 0 | URL
그 어떤 훌륭한 생각이나 사상도, 행이 따르지 못하면 공허한 일이겠죠...리뷰 잘 봤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