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발 단속에 대한 기억은 너무나도 많다.하지만 가장 선명한 기억은 중3 졸업을 일주일 앞두고 전격감행된 전광석화같은 단속이 으뜸이다. 중3때 담임은 진짜 악명 높았던 s선생이었다.1년전, 학년이 바뀌면서 이제 같은반이 된 10반 친구들이 쪼르르 줄 서 있었다.각 반의 담임을 발표하는 중대한 조회였다.s선생이 3학년을 맡는다는 소문이 돌아서 3학년 전체가 다 긴장하고 있었다.그리고 1반부터 한명씩 새로운 담임의 이름이 불리워졌다.기다려도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 s선생의 이름. 결국 9반까지 그의 이름은 호명되지 않았다.3학년반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우리 반이 가장 심란했다.결국 10반은 s선생에게 떨어졌다.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들렸고 반대편에선 환희의 목소리가 들렸다.그렇게 중3이 시작되었다.

내가 학교를 다닌 지역은 비평준화 지역이었다.s는 애들을 거의 잡아가며 공부를 시켰다.요즘이야 일반적이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여름방학 자율학습을 우리반만 했다.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방학땐 우리반 밖에 없었다.행여 자율학습에 결석했다하면 다음날 거의 죽음이었다.가중처벌인 셈이다.좀 논다는 녀석 하나는 며칠 결석을 하다가 2학기가 시작되어서도 나오지 못했다.공포가 그의 등교길을 잡아끌었을 터.결국 개학 보름후에 엄마를 대동해서 왔다.s 선생은 엄마앞에서는 네네...해놓고 엄마가 가시자 마자.애를 개패듯 팼다.오죽했으면 애가 맞다가 도망갔을까.도망간 녀석 잡아오란 고함소리에 뒤쫓아간 우리는 그 녀석의 다리통이 피범벅되어 있는 것을 알았다.

두발 이야기하다 s선생이야기가 길어졌다.s선생은 고등학교 입시가 끝나고 애들을 풀어주었다.나름대로 무서울때 무섭고 풀어줄때 풀어주는 스타일이었던 셈이다.그래서 우린 다들 머리를 조금씩 기르기 시작했다.시험도 끝나고 학교도 별 할일 없던 시기였다. 어느날 1년 내내 우리반과 라이벌관계를 유지했던 국사선생이 수업에 들어왔다.그러며 하는 말. " 야...너희만은 이제 졸업 얼마 안남았다고 머리 너무긴거 아니야? "....그때 어느 녀석이 불쑥 나서며 말했다." 뭐 담임도 뭐라하지 않는데.....왜..." ...허걱...이 말이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 지 당시 아무녀석도 알지 못했다. 그 국사선생은 분기탱천해서 수업을 끝내고 교무실로 올라갔다.쉬는 시간이 끝나고 담임인s선생이 차가운 얼굴로 들어왔다.그때까진 다 들 뭔일인가 싶었다.

s선생은 말했다."내가 너희들을 그렇게 봐 줬는데..너희들이 담임을 팔아...이 나쁜놈들...반장.가서 내자리에서 바리깡 가져와." ...   "아.....이럴 수가"  원래 좀 얄밉게 말하는 국사선생이 교무실가서 실실 쪼개며 담임을 긁었던 것이다. "10반 애들은 졸업이라고 이제 개판이네.뭐..담임이 다 봐준다니까 나야 할말없지만.그래도 싸가지 없는 놈들.. 왈라왈가......" 

번개 맞듯 시작된 두발단속은 중앙선 넘어 달려오는 자동차같았다. 다들 기준보다 머리가 길었으니 누구하나 그 벼락을 피해갈 수 없었다. s선생은 딱 머리 중앙부 부터 뒷머리끝까지 고속도로를 내었다.보통 10-15센티,좀더 머리가 긴 녀석들은 구렛나루 위쪽까지 농락당했다.어떻게든 조금 깍여 볼려고 머리를 뒤로 빼는 녀석들이 부지기수였다.하지만 그래봐야  머리통 한대 더 맞고 괴씸죄 가중 처벌 5센티 들어갈 뿐이었다.나는 담담해 당했다.

그날 방과후 전부 학교앞 이발소로 달려갔다.우리반 애들이 길게 줄을 서있었다.이발사 아저씨 왈 "요즘은 이렇게까지 단속하는사람은 없는데...좀 심했네." 그러면서도 갑자기 밀려든 코묻은 돈에 즐거워하는 표정이었다. 바리깡에 밀려본 사람은 안다.바리깡에 맞으면 바리깡에 짤린 머리 높이에 맞추어 다른 머리카락의 높이가 결정된다. 앞머리가 1센티도 안넘을 정도로 머리가 정리되어 버렸다.

영원히 남을 중학교 졸업식 사진,사진 속 우리 10반 아이들은 전부 교도소 동기들 처럼 되어 버렸다.무슨 바보들 마냥 히죽거리고는 있지만 졸업식때도 심란했다.요즘 처럼 모자들을 많이 쓰고 다니지 않아서 전부 밤톨 까놓은 머리를 하고 있다.

요즘 고등학생들이 두발자유화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일부에서는 학생답게 라는 말을 하며 어느정도 단속의 필요성에 대해 말한다.아마 알라딘에도 이 의견에 동의하는 분들도 많으실 거다. 사실 이 동의에는 논리가 좀 부족하다.그저 아이들이 아이들 답게 라는 것 외에 무슨 논리가 있을까..학생들이 난해하게 하고 다니면 일부 어른들은 불편해 한다.하지만 눈이 그 불편함을 감수하기 싫어서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신체의 자유에 대해 억누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는지 모르겟다.두발 단속은 진짜 전근대주의적인 일제의 잔재이다.학생들의 개성은 억압하고 오로지 통제에만 목적을 맞춘 발상이다.그럼에도 그게 너무 오래 지속되다보니 그것이 학생답게라는 온화한 표현으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그리고 나는 그게 옳다고 강력하게 믿는다. 두발단속은 당장 중단되어야한다.그럼 학생들 머리는 어떻게 하냐구...  어느 정도 기준을 둬서 하자구.....내 듣기에 다 똥이나 변이나다. 그냥 지들 맘대로 하게 내버려둬라.염색을 하던 지지고 볶던.....    올드보이 선생님들 답답하실 거다.애새끼들 머리가 지맘대로 부루스를 쳐대니 저걸 어떻게 하고 싶어 미치시겠지....하지만 참으시라 충고한다. 그게 역사가 흘러가는 거대한 흐름이다.막힌 것은 뚫리고 끊긴 것은 이어지고 네모난 것은 둥그러지고 멈추어선 것은 움직이는....이 자유의 거대한 흐름을  내 시절엔 하지 않았다고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잠깐은 그럴수 잇을 것이다. 사투리로..우짜둔둥 막아서 지금 두발단속을 옹호하는 현역선생들이 눈에 흙들어가기 전 까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그때까지라도 한번 막아보시던지...... 다음날 다 염색에 지랄발광 폭탄머리로 조문갈터이다.

헌법 권리 유린하는 두발 단속 즉각 철폐하라!!  철폐하라!!

## 권리가 유린당해도 묵묵히 당하고 그런지 알고 살았던 선배학생의 한 사람으로서 지금 우리학생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귀여운 것들.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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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5-05-12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고 입학 당시 귀밑 1센치였습니다.
다행히 2학년 때 완화되어 귀밑3센치.
졸업한 해 더 완화되어 뒷머리가 칼라를 덮지 않으면 된다로 바뀌어 목 긴 애들만 유리해지고.
지금요? 파마나 염색 불가가 유일한 단속기준이라고 하더군요. 얼마나 부럽던지.

물만두 2005-05-12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중학교때 잘려 봤는데 엄청 기분 나쁘더군요 ㅠ.ㅠ 그거에 비하면...

깍두기 2005-05-12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여운 것들, 투쟁!! 이라고 말씀하시는 드팀전님이 굉장히 귀여워 보입니다.(실례^^)

mannerist 2005-05-13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둥이 범생 중/고딩시절을 스물 넘어서야 후회하기 시작했다죠. 요즘 애들, 너무 귀여워요. 그런 녀석들에게 이십대 초반에 입에 풀칠 좀 하겠다고 못한 짓거리 한 걸 생각하면... 과외 다니면서 거리낌없이 숙제 안해온 애들 때리면서 그랬거든요. "꼬와? 맞았다고 엄마한테 가서 말해! 그딴거 무서우면 과외선생 안해!" 음음... 평생 반성해도 모자랄듯요. 어쨌든 귀여운 것들. 투쟁! 에 한 표입니다.

드팀전 2005-05-14 0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른아침입니다.지금시각 6:11분...이곳은 진주랍니다.출장와서 바로 일하러가야되거든요.요즘은 여관에도 인터넷이 있군요.좋은세상이네...
조선인님>근데 그게 학교마다 좀 다른가봐요.어떤데는 그것보다 더 심하게 단속을 하더라구요.
물만두>전 그담부턴 알아서 기기시작했답니다.고등학교때는 무사했죠.지금 뉴스나오는데 두발단속이 위헌인지 아닌지 국가인권위에서 토론회를 했다는 이야기네요.
깍두기님>ㅆㅆ 실례까지야.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귀연넘들 투쟁이라구...
매너님>요즘 울산생활은 잘되십니까.최근에 님이 좋아하시는 리히터의 바흐영국모음곡 사서 듣고 있습니다.바흐부터 베토벤,쇼팽,프로코피에프까지...요즘은 이런피아니스트 찾기힘든데..대단하죠.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게오르그 짐멜 지음, 윤미애 외 옮김 / 새물결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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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멜은 아웃사이더이다.그가 사회학계에서 받는 대접을 봐도 그렇고 그가 연구한 분야를 봐도 그러하다.사회학계의 이단아, 게오르그 짐멜의 이름이 20세기를 넘어서면서 복원된 것은 유명한 <돈의 철학>이라는 책 때문이다.그는 돈을 연구함으로써 일상의 소소한 영역이 어떻게 삶을 구성하는지 총체적으로 알고자 했다.짐멜은 화폐를 인간의 삶이 산출한 삶 이상의 것으로 파악한다.화폐를 통해 인간은 훨씬 넓은 자유를 맛보게 된다고 말한다.이외에도 짐멜이 다룬 주제는 유행,여행,식사,편지,장신구등 비사회학적인 것들이다.물론 현재는 이러한 주제들인 문화연구란 이름으로 사회학적,미학적 범주에 포함되어 제법 깊이 있는 연구성과물드이 나오고 있다.하지만 20세기 초반에 시도는 당시로서는 너무나 획기적인 기획이었을 것이다.같은해에 나온 프로이트의 <꿈의기원>과 짐멜의 <돈의 철학>은 이후 심리학과 사회학 양 영역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원지가 된다.물론 결과적으로 프로이트의 책이 가져다준 충격에 짐멜은 자리잡을 곳을 찾지 못하고 한참 뒤에나 관심을 갖게 되자만 말이다.어쨋거나 짐멜과 비교할 때 베버와 맑스로 이어지는 사회학의 전통은 사회의 큰 틀을 제단하는 작업이었다.반면 짐멜은 상대적으로 등한시되어온 일상의 영역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일상의 영역이 재발견됨고 동시에 짐멜의 복원이루어지는 것도 바로 이때문이다.짐멜의 일상성에 대한  선구적 접근이 미시사를 중심으로 현대성을 성찰하는데 그 사상적 기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대도시의 삶에 대한 분석을 잠깐 살펴보자.짐멜은 대도시에 사는 개인들에게 전형적인 심리적 기반은 신경과민으로 본다.이는 외적 내적 자극들이 급속도로 그리고 끊이없이 바뀌는 데서 기인한다.대도시의 삶은 화폐경제와 이성의 지배와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양자는 사람과 물건을 취급함에 있어 순수한 객관성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화폐가 현상의 개별성에 관심이 없듯이 이성적 관계 역시 객관적으로 평가가능한 관계에만 촛점을 맞출 뿐이다.짐멜은 대도시의 삶이 만들어낸 정신적 현상을 '둔감함'과 '속내감추기'라고 말한다.둔감함은 사물의 차이에 대해 관심을 갖지않고 사물 자체를 공허하게 받아들인다.속내감추기 역시 무수한 관계에 대한 내적반응을 피하기 위한 독특한 정서적 양식이다.반면 대도시는 화페 교역의 중심이며 자유의 상징이다.결국 이를 바탕으로 대도시인들은 질적 특수화를 추진한다.개인주의에 대한 선망이다.객관적인 문화보다는 주관적인 문화에 대한 동경이 대도시인들에게 자리잡는다.이러한 짐멜의 분석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더욱 빛을 발한다.물론 미디어의 등장이 문화의 평준화에 일정정도 기여햇던 것은 사실이다.하지만 공간이 만들어내는 문화적 특수성과 질적 개인주의의 발현에 대한 지적은 옮바르다.대도시의 문화는 점차 질적 개인주의의 강화로 치닫는다.미디어와 활발한 외국문화와의 교류가 큰 몫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도시인들은 자신을 평등화속에서 부각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갖고 있다.색다른 유행,새다른 음악,색다른 음식....이 모든 것들이 대도시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것은 자본의 축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또 이에 대한 요구가 강한 대도시인들의 개인화성향 때문이기도 하다.

짐멜의 이야기는 식사쪽으로 이어진다.밥은 밥이지 거기 또 무슨 사회학이냐 하시 분도 있지만 재미있는 분석이 많다.우선 식사가 같이 이루어지는 행위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혼자 먹으면 성질나빠진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시피 식사는 공동행위이다.이는 원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공동 식사의 신화는 같은 것을 먹고 마심으로서 공동의 피와 살을 만든다는 원시적인 표상으로 읽힌다.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것은 식사라는 것이 자기 접시 위의 것만 먹는 이기적 배타행위라는 것이 은폐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식탁공동체에 대한 금지조항들이 역사적으로 등장한다.계급을 구분하고 이방인을 제외시키며 내적 확실성을 다지는 효과를 거둔다.또 공동 식사는 시간의 규칙성,식사 방법의 표준화,개인적 욕구의 자제등의 요소를 부과한다.결국 식사의 미학화는 유기체적 삶의 낮은 단계에 위치하는 매우 보편적인 욕구충족의 행동을 양식화시킨다.이는 매개된 사회하를 통해서 먹는 것의 단순한 자연주의가 극복되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식사가 뭐이리 복잡할 까 생각할 수 도 있다.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의 식사 형태가 거의 같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한 사회는 한 가지 형태의 식사양식을 가지고 있다.우리나라는 대개(딴지거는 분들은 매일 포크를 쓰시겟으나) 밥숟가락 하나와 젓가락 한짝이 중심이된다.짐멜도 직적 해듯이 접시들은 대개 좌우대칭 형태를 유지하고 색채는 가급적 단순화한다.그냥 무심하게 이루어지는 식사 행위에도 오랜시간에 걸친 표준화작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책에는 이것 외에도 얼굴의 미학적 의미,장신구가 가진 심리학적 요소,스타일의 문제,사회적 신의가 가진 관계성의 문제,비밀이나 감사의 사회학적 접근,우리 오감이 가진 특수성등이 사회학적 시각으로 다루어진다.최근에는 문화연구에서 조금더 실제감있게 다루는 주제들이다.오히려 최근의 연구가 짐멜의 형이상학적 글쓰기에 비해 훨씬 쉽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짐멜이 이 책을 풀어가는 방식은 형식논리에 근거를 두고 대상의 특수성보다는 보편성에 촛점을 맞춘다.그리고 그 대상이 사회와 맺는 관계를 형이상학적으로 접근하다.결코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그리고 르페브르처럼 일상이 자본주의라는 큰 틀 속에서 식민화되어버린 관계성을 밝히지도 못한다.이 책은 개별 영역에 대한 작은 산문형식이기에 더욱 그렇다.하지만 일상의 영역이 철학의 대상이 되는 시점에서 그 출발점을 알린 위대한 아웃사이더의 글을 보고 싶은 분이라면 한번쯤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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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5-05-08 15:43   좋아요 0 | URL
재미있겠는데요. 식사에 대한 고찰.
우리나라 드라마엔 정말 밥먹는 장면 많이 나오쟎아요.
여기에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드팀전 2005-05-10 10:15   좋아요 0 | URL
TT 글쎄요.제 생각에...근대화이후 해체된 가족에 대한 이미지를 반영하는 듯 합니다.생각해보면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는 식사 시간외에는 없습니다.그것도 장성한 자녀가 있는 경우 한두명은 이러저런 이유로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지요.하지만 식사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그나마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곳인 듯합니다.드라마 작가가 이를 알고 의도적으로 그랬든 아니면 상투적으로 그랬던간에 그의 의식 한 구석에 그것이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영화관에서 보려다 놓쳤다.영화 <여자 정혜>. 며칠전에 퇴근후 집에 들어갔더니 와이프가 빌려놓았다.평일에는 비디오를 잘 보는 편이 아닌데 이 영화는 보고 싶었다.

아주 좋은 영화였다.감독이 독립영화출신이어서 그런지 신선함이 있었다.아이러니컬 하게도 영화의 내용은 지루하기 쉬운 일상의 모습이었지만. 영화는 온통 헨드핼드로 들고 찍었다.핸드핼드의 영상의 미덕을 보여준 가장 알려진 영화는 <라이언일병 구하기>의 상륙작전 씬이다. 역동성과 사실감이 그대로 살아있는 명장면이 아닐 수 없다.이 영화<여자 정혜>에서 쓰인 핸드핼드는 역동성하고는 거리가 멀다.영화 자체가 큰 이벤트없이 흘러가고 카메라가 쓸어담고 있는 것 역시 일상의 소소함이다.이 느슨한 일상의 모습을 그리는데 핸드핼드의 자연스러움이 한 몫을 해낸다. 그리고 정혜를 둘러싸고 있는 근원적 불안과 외로움의 시선을 핸드핼드의 흔들림이 그대로 잡아주고 있다.

특히 인상적인 컷들은 영화의 중요장면에서 잡은 정혜의 타이트한 얼굴모습이다.기계적이지 않으며 약간의 떨림이 느껴지는 카메라는 정혜의 감정을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하는데 아주 효과적이었다.대표적으로 정혜가 고모부와 마주한 자리를 잡은 얼굴 샷은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타이트한 얼굴모습을  롱테이크로 잡고 그냥 놔둔다. 화려한 화면의 변화가 없이 또 큰 음향효과 없이 배우의 미세한 심리변화와 롱테이크 하나로 갈등을 최대한 증폭시킨다.

이 영화속 등장인물은 아무도 이름을 갖고 있지 않다.주인공 정혜 역시 그 이름이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정혜씨"라고..... 또한번의 타이트한 얼굴 롱테이크가 이어진다.이 장면 역시 아주 맘에 든다.김지수를 약간 우측으로 배치하고 얼굴 전면을 보여준다. 이 샷은 정혜가  어두움의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웃는 듯 웃지 않는 배우의 표정이 잘 처리되었다.

정혜가 가진 외로움과 고독은 어린시절의 심리적 외상에 기인한다.그녀의 일상은 일상이 돼 무채색을 띤다.공간과 시간 모두가 아무런 빛을 가지고 있지 않다. 트라우마로 인한 자학도 아니고 그에 대한 반동의 퇴폐적 오버도 아니다.공기가 아무런 빛을 가지고 있지 않듯이 물이 아무런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듯이 무념한 일상의 삶을 이어간다.물론 그 무념의 뒤안에는 상처로 인한 분노,아픔,고독이 숨어있다. 그녀가 타인 또는 세상과 맺는 관계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그 벽은 결코 과격하지도 슬프지도 뒤숭숭하지도 않다.단지 절대적 단절의 힘이 숨겨져 있을 뿐이다.아무도 그녀를 호명하지 않으며 또 그녀 역시 아무도 호명하지 않는다. 자신은 물론 모든 사람이 관계성의 이름하에서 배경이 될 뿐이다.그녀는 고양이를 한마리 키우려한다.하지만 결국 자신이 그러한 관계성에 부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린다.고양이는 버려진다.

그녀는 결국 상처와의 대면을 시도한다.여린 여자 정혜의 힘이 처음으로 느껴진다. 분노의 극단적 분출까지도 염두에 둔다. 하지만.....   그래도 이미 그 과정을 통해 과거와의 단절이 이루어진다.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마치 흑백영화에 어느 한부분만 컬러로 채색되듯 그녀는 외로움이란 공통분모를 가진 이에게 불려진다.김춘수의 <꽃>이란 시의 '호명행위'가 주는 위대한 의미가 여기서는 이런 식으로 형상화된다.

오랜만에 보는 좋은 한국 영화다.마이너 영화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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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동문선 현대신서 102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창실 옮김 / 동문선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난 글렌 굴드에 큰 애정이 없다.그의 연주가 형편없다거나 그의 스타일이 맘에 들지 않기 때문은 아니다.그에 대한 호불의 평가는 지극히 상대적 평가이다.군웅이 할거하는 피아니스트계에는 글렌 굴드 말고도 난다 긴다는 피아니스트들이 수두룩하다.카리스마와 장난스러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폭풍과 사색의 스비아토 슬라브 리히터,변덕와 신비함의 아루트르 베네데티 미켈란젤리,섬세함과 애절함의 디누 리파티,냉철함과 선명함의 마우리치오 폴리니.....등등. 글렌 굴드의 미덕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나누어 주기에 나의 애정은 너무 다극화되어 있다.글렌 굴드가 동시대 선후배 피아니스트들에 비해 내 눈밖에 있었던 이유는 그의 레퍼토리가 가진 한계성도 한 몫을 했다.글렌 굴드의 레퍼토리는 저자도 말한 가장 비파아노적인 곡들이다.바하,슈트라우스,바그너등 ...물론 그도 브람스도 연주하고 리스트도 연주하였다.하지만 아무래도 그의 주종목은 바하이다.글렌 굴드가 활약하던 시대의 피아니스트들의 레퍼토리는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요즘 피아니스트들은 레퍼토리 확장에 아무래도 좀더 신중한 듯 하다.뭐 장단점이 있겠지.어쨋든 과거 마당발 피아니스들은 -예를 들자면빌헬름 켐프,클라우디오 아라우,스비아토 슬라브 리히터- 바하부터 베토벤,쇼팽, 그리고 후기낭만주의 곡들까지 다루었다.글렌 굴드는 피아노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고전과 낭만주의 시대곡들을 혐오했다.그러니 그의 레퍼토리는 바흐에서 훌쩍 건너뛰어 베르크로 넘어온다.내공 있는 멀티플레이어들이 중원에 가득했는데 몇가지 비기로 무장한 글렌 굴드가 내게 주목받기란 어려웠다. 하지만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는 너무도 매력적이다.중원의 맹주가 될 수는 없었지만 영향력 있는 봉건영주가 되기엔 충분했다.저자가 호로비츠와 굴드를 비교해 놓은 것을 보면 재미있다.둘은 스타일면에서는 확연이 달랐지만 분명히 공통된 점이 있었다는 것이다.원래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저자는 글렌 굴드의 능력을 더 높이 평가한다.어쨋든 글렌 굴드의 비기는 다음과 같다.논레가토로 무장한 무념한 음색,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캐릭터.녹음 연주 중에 들리는 흥얼거림.강함만이 카리스마가 아니라면 글렌굴드도 나름대로 충분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연주자이다다.단 그의 카리스마는 정치인이나 장군들이 가진 카리스마라기 보다는 신비주의적 종교 지도자가 가진 그것과 비슷하다. 

이 책은 기인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에 대한 전기이다.하지만 그의 외면적 삶에 대한 전기가 아니어서 독특하다.오히려 그의 예술적이고 내면적인 삶에 대한 보고서와 같다.이 책에 등장하는 글렌 굴드의 일대기나 그의 행적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모든 내용이 현재의 글렌 굴드가 만들어내는 피아노, 또는 음악이라는 소실점을 향해 모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천재들이 그렇듯이 글렌 굴드 역시 어려서부터 남달랐다.어린 글렌 굴드에게 동년배들이 관심을 갖는 유아기적 장난과 성적 호기심들은 다른 나라의 이야기였다.글렌은 항상 그 넘어있는 무언가를 응시하는 소년이었다고 한다.그의 이러한 이미지가 책 전반에 걸쳐 글렌 굴드의 아우라를 형성한다. 피아니스트이면서 피아노를 싫어한 사람,음악가이면서 음악의 뒤를 보려고 했던 사람.그의 기행 속에 가려진 글렌의 내면에 대해 저자는 진지한 애정을 가지고 쫓아간다.글렌 굴드에 대한 시류의 평가는 괴팍하고 기벽이 있는 천재피아니스이다.대외적 관계의 미숙과 결벽증적인 태도는 그를 기인이라는 유리병속에 가두어 놓는다.이는 사실 글렌 굴드가 스스로 원했던 방식이기도 하다.글렌 굴드는 대중과의 소통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다.그가 30대에 콘서트를 그만 두고 스튜디오에 박혀버린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대중들의 이미지속에 글렌 굴드가 '유리병속 피아니스트'가 된 것은 그의 무취색 피아노 음색과 더불어 그의 대중과의 단절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대중들은 대게 여기서 생각을 접고 그의 기벽만을 쫓는다.저자가 뛰어난 점은 글렌 굴드의 그러한 행동에 이유를 애정을 가지고 쫓는다는 것이다.

글렌 굴드는 수도자다.대개 피아니스트들이 수도자와 같은 정서상태를 갖는 다고 한다.물론 아르투르루빈슈타인처럼 낙천적인 스타일도 있지만 말이다.어떤 이에게 음악은 신과도 같다.그 아래 종사하는 음악가는 사제가 될 수 밖에 없.그에겐 악보와  피아노,그리고 자신의 예지력외엔 아무런 것도 없다.링위에 오른 권투선수는 외롭다고 한다.링 안에서는 자신의 예감외엔 아무런 의지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피아노 앞에 앉은 연주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글렌 굴드는 스스로를  세상으로 부터 단절시킴으로써 음악이란 신의 얼굴을 보려고 한다.그의 연주에서는 과도한 액션이나 대중을 현혹시킬 요소들이 들어 있지 않다.어떻게 보면 무미건조하고 어떻게 보면 소박하다.페달을 자제하기 때문에 울림자체도 다른 피아니스트들에 비해 큰 편이 아니다.리히터나 길레스,호로비츠의 광풍같은 연주는 대중을의 환호를 이끌기 쉽다.하지만 그 폭죽같은 연주의 장쾌함 만이 음악의 길은 아닐 것이다.장쾌함과 호방함에만 현혹되면-물론 위의 연주자들이 이런 미덕만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음악의 깊은 세밀함을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글렌 굴드는 화려함대신 자신의 유니크한 스타일로 소박함이 가진 한계를 넘어선다.

글렌 굴드가 고립과 차가움을 통한 길을 통해 신의 얼굴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최근의 연구는 바흐 건반음악의 연주에 있어 피아노는 바흐미학의 전범을 살릴 수 없다고 한다.정격연주가들은 현대쳄발로의 부박함을 없앤 개량 쳄발로와 복원한 클라브생으로 바흐 음악을 연주한다.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연주보다 피아노로 연주한 바흐음악을 더 좋아한다.한참 바흐 음악에 몰입하고 있는 페라이어나 쉬프의 낭만적인 연주도 좋다.하지만 피아노로 연주한 바흐의 최고봉은 역시 글렌 굴드이다.그가 없었다면 바흐의 건반음악이 얼마나 따분해졌을까....

이 책을 보는 동안 줄 곧 글렌 굴드의 음반을 들었다.골든베르크 변주곡,파르티타,토카타,스카를라티,하이든그리고 편집음반에 있는 브람스의 간주곡과 생소하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피아노 소나타....이 책을 놓으며 글렌 굴드에 대해 조금 더 깊은 애정이 생겼음을 느꼇다.알면 더 사랑하게 된다고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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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19 18: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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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아무도 모른다>를 봤다.지난 토요일이다.영화관에서 직원에게 물었다."이 영화 언제까지하나요?" 뜬금없이 물었던 이유가 있다.그날은 너무 화창했다.날씨가 그렇게 좋은데 컴컴한 영화관에서 보내는 것은 봄날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영화를 보느냐 산에 가느냐? 두가지 다 할 경우 아무래도 좀 피곤해질 것 같았다.그래서 영화가 좀 길게 한다면 다음에 보려고 했다. 좀 생뚱맞은 질문에 직원이 대답했다." 금새 끝날 것 같은데요.보시는 분들이 거의 없어요."  "...(고민중)..."

우선 가까운 산을 찾았다.날씨는 좋았는데 겨우내 빈둥거려서 그랬는지 걷기가 좀 힘들었다.산행이 산책으로 바뀌게 되었다.덕분에 영화관을 갈 여력이 생겼다.

토요일 저녁이었다.영화를 보는 사람이 20명정도 되었던 것 같다. 아무자리에 앉아도 무방....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엄마가 아이들을 버리고 떠났던 사건.<나시스가모의 버려진 4남매사건>이라고 한다.당시 일본사회가 그 사건으로 한 충격먹었던가 보다. 비정한 모정,무관심한 이웃,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어린남매에 대한 우려와 동정.....  감독은 15년전에 대략적인 시나리오를 마련했었다고 한다.그렇게 보면 비록 감독의 머릿속이지만 오랜 제작기간을 가진 작품이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주연배우들의 연기와 무관심한 카메라와 자연광이다. 남자주인공인 키타우라 아유는 이 영화로 칸느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받았다.그의 연기를 비롯해서 다른 주인공들의 연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자연스러운 무심함'이다. 어떻게 보면 연기를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그런 걸 수도 있다.전부그냥 무심하게 노는 아이들 같다.과장된 대사도 없고 과장된 몸짓도 없다.조금 복잡한 집안 환경에 어느정도 적응된 아이들이 갖는 어른스러움이 아이들 전부에게 스며들어 있다.각기 다른 캐릭터임에도 한 아이와도 같은 유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그 조숙함의 정점에 장남인 키타우라 아유가 있다.철없는 엄마를 대신해 집안을 이끄는 형이자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연기는 감독의 캐스팅의 힘이 큰 듯하다.감독은 다큐멘터리를 찍듯이 영화를 찍었고 어린 배우들에게도 다큐 대상을 다루듯 접근 한 듯 하다.조숙하지만 그래도 아이인 자연스러운 연기.차남 시게루는 영화가 끝날때까지 그 속을 알 수 없는 아이의 모습을 보여준다.어떻게 보면 아무일도 알지 못하는 아이의 모습일 수도 있다.시게루는 장난기 어린 아이이다.그런데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일까?  영화를 볼 때는 잘 몰랐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 수 록 시게루가 가진 무심함의 표현력이 인상에 남는다.아무것도 모르지만 또 무언가를 알고 있는 아이의 연기이다.

카메라 역시 관조와 개입을 적당히 섞어쓰고 있다.감독은 첨에는 비개입을 의도했었던 듯 하다.다큐적인 성격이 강한 영화여서 그랬던 게 아닌가 추측해본다.하지만 그런 바람은 곧 무너졌다고 한다.감독 말을 빌자면 '아이들이 너무 귀여워서...'였다나.어쨋거나 관조적인 느낌을 주는 카메라의 분위기는 마음에 든다.어떠한 상징이나 복선에서 카메라는 적극적으로 피사체에 다가선다.하지만 대개는 느슨하게 구도를 잡는듯 하다. 막내를 묻는 장면에서도 멀리서 롱테이크로 담담하게 담는다.아이를 묻고 돌아오는 지하철.두 아이의 모습 역시 루즈한 샷으로 그냥 바라보고 만다.아이들이 오르내리는 계단 씬은 거의 다 롱샷이다.그렇다고 큰 그림만 가지고 승부하지는 않는다.개입과 관조의 적절한 안배의 묘미가 이 영화에 있다. 조명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대부분 자연광을 쓰고 있는 듯 하다는 것이다.영화의 마지막 장면 슬프며 희망적인 뒤모습에서 화면은 피사체를 제외하곤 거의 날리는 듯 하얗다.자주 등장하는 아파트 씬에서도 빛이 참 자연스럽다.아이들의 연기를 살리는 조명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싶다.실제로 촬영할 때는 자연광으로 승부내기 쉽지 않았을 텐데.....

영화<아무도 모른다>는 영화관 직원 말처럼 곧 상영관에서 내려갈 것 같다.스토리도 알고 보면 그다지 재미있진 않다.그럼에도 괜찮은 느낌을 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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