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
로버트 O. 팩스턴 지음, 손명희 옮김 / 교양인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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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푸르트뱅글러의 베토벤CD를  플레이어에 올려놓는다.베를린 필을 지휘한 1943년 전시녹음이다.열악한 음질을 보상하는 주술적 마력이 있는 연주다.눈을 감고 당시의 시대상황과 연주회장의 모습을 그려본다.세상은 묵시록적 예언처럼 지옥의 한장면을 옮겨놓았다. 전쟁터의 살육,민간인들에 대한 폭격,홀로코스트의 굴뚝에서 새어나오는 인간의 냄새를 담고 있는 연기. 가스실의 비명과 절망감.....유대인들이 가스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연주회장을 때리고 있는 베토벤 소리가 겹쳐진다..연주회장에는 기득권층들이 앉아있다.대부분은 나치독일의 동조자,아니면 관망자들이다.포디엄 위에선 지휘자 푸르트뱅글러처럼.그날도 그의 휘날리는 손짓에 따라 강렬한 음이 창조되 듯이 지도자를 외치는 공포스런 집단의 구령소리에 인류의 가장 혐오스러운 작품이 만드어지고 있었다. 

팩스턴의 <파시즘>은 500페이지쯤 되는 두꺼운 책이다.내 경우 이런 두꺼운 책을 처음 잡으면 마치 먼길을 나서는 사람 처럼 비장해진다.마치 여행가기전 신발 끈을 다시 동여매 듯 쉬이 지치지 않기 위해 마음가짐을 새로 잡는다.하지만 노련한 안내인 팩스턴을 따라 파시즘으로 여행하는 길은 결코 어렵거나 지루하지 않다.누구든 몇 장의 책장만 넘기면 오히려 처음에 단단히 먹었던 마음이 머쓱해진다.그리고 남은 파시즘 여행에 근거를 알수 없는 자신감이 생기는 것을 느끼게 된다. 팩스턴이 이 책에서 밝히고자 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그것은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라는 단 하나의 짧은 질문으로 요약된다. 이것 저것 주변 학문을 끌고 들어와서 파시즘을 설명하지도 않는다.20세기 초반 유럽을 휩쓸었던 그 광기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파시즘"이란 단 하나의 목표를 두고 정공법 택한다.나처럼 앎이 깊지 않은 사람들에겐 이러한 직구위주의 단순한 구질이 책에서 말하고자하는 바를 이해하는데 훨씬 도움이 된다.이 노련한 투수는 직구 위주로 승부하는 대신에 만 상대타자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또 함께하고 이다.정통파 투수 팩스턴은 그 첫 투구로 파시즘의 시조가 되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즘 탄생부터 분석을 시작한다.

저자는 우선 파시즘의 탄생,정치제도 안에 뿌리내리기,권력장악,권력행사,파시즘의 급진화나 정상화 라는 다섯가지의 연대기적 구분을 통해 파시즘의 정체를 파악하자고 권한다. '파시즘 따라잡기' 를 위해 저자는 책전반에 걸쳐 독자들이 가진 몇가지 오해에 대한 정정을 요구한다.그가 강조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지만 대표적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저자는 우선 대중들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파시즘 이미지,즉 파시즘 지도자에게로 집중되어온 "이미지로서의 파시즘" 과의 작별을 요구한다.지도자 중심 시각은 파시즘 논쟁에서 '의도주의'(즉 지도자의 의도에 의한 정치력행사)로 볼 수 있다.그 반대는 '구조조의'(파시스트정당 구성원들의 공통집약된 정치력 행사)라는 것이다.반인들은 영화의 이미지때문인지 파시즘을 일탈적인 지도자의 과대망상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이는 파시즘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과 유동성에 대해 외면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저자는 파시즘이 고정된 하나의 정형화된 정치체계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파시즘 내부에서도 수많은 정치적 갈등과 다양한 정치스펙트럼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인식해야한다.각 국가별로 파시즘이 발현단계에서 유사하고 그들의 문화적 장치가 유사하다.하지만 내부로 눈을 들여다보면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전쟁에 대한태도,기존 보수,귀족층과의 관계성 등에서 천차만별이다.저자는 파시스트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 대중의 동의와 보수세력의 옹호가 있었다는 것을 여러차레 강조한다. '일상적 파시즘'에서는 '대중동의'라는 것이 무슨 대단한 발견인 양 행세하지만 이미 파시즘이란 요소 안에 대중동의는 기본적인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동물원에 동물이 기본 요소인것 처럼 파시즘에서 대중동의는 필수적이다.동물원에서 동물을 봤다고 호들갑 떨수는 없는 것이다.물론 이런 비유는 또 이런 공격을 가져올수 있다. 결국 동물원보다 동물이 핵심아니냐는 말로 말이다.즉 '파시즘이라 정치양상보다 그 안에서 동의를 해준 구성원들의 문제다'라고 주장 할 수도 있다.그렇다면 스스로 '모든게 다 사람의 일이지'라고 해버리는 것과 같다.미리 결론을 언급하자면 <일상적 파시즘>의 문제제기는 의미있으나 결코 <고전적 파시즘>과 용어의 혼동을 유발하는 '파시즘'이란 말을 사용해야 하나에 의문이 생긴다.

.파시 즘은 어느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회정서적 상황에서 발생한 과격한 정치현상이었다.특정한 시기라는 것은 1차 세계대전과 세계 대공화에 영향을 받은 20세기 초 유럽을 말한다.특정한 사회,정서적 요이니란것은 두려움에 근거를 둔다.사회주의의 세력확정에 대한 보수층과 중간계급의 두려움,전후 정치경제문제에 대한 자유주의의 무력함 등이 그것이다. 이 특정한 정치현상은 또 모순적이게도 당시 유럽에서 보편적으로 발생하였다.저자는 국가사회주의나 국가생디칼리즘이 유럽 각 국에서 탄생했던 과정을 설명한다.저마다 다른 상황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개 공통된 파시즘의 정서를 이들은 공유햇다.집단우월주의,배제적폭력,사회진화론,강한 카리스마에 대한 동경,자신의 집단이 희생자가 되었다는 믿음등이다.성공한 파시스트정당들은 새롭게 떠오르는 대중정치의 시대를 간파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동원하는 포퓰리즘을 택한다. 유럽에 만연한 파시즘적 공통 정서에도 불구하고 어떤 국가는 파시즘이 정치전면으로 부각되지 못했다.저자가 파시즘의 기원만을  가지고 파시즘 일반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초기 파시즘의 형태는 당시 어디에나 있었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왜 이탈리아와 독일을 중심으로 파시즘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까? 세계공황과 기존 정치체제의 무능함에 대한 반동이 가장 먼저 지적된다.자유주의 체제의 허약함을 비집고 들어온 파시즘정당들은 대중의 욕구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며 권력의 중심에 다가서게 된다.무솔리니의 경우 사회주의 정권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농촌지역을 거점으로 세력을 넓혀간다.물론 여기에는 자경단 형태의  폭력단체가 중심이된다. 지역의 파시스트 우두머리들을 통합해내며 무솔리니는 전국구로 자리를 잡게된다.우선 좌파를 적으로 상정하고 기존보수세력과 종교세력의 힘을 이용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파시스트 지도자들이 사용한 연극적인 제스처나 웅변등 대중선동의 능력 역시 중요하게 작용한다.

권력을 장악하는 단계에서 파시즘은 다른 세력들의 도움을 절실히 요구하게 된다.무솔리니나 히틀러 모두 직접적인 쿠테타로 정권을 쟁취하지 않는다.기존 보수세력에 대한 정치적 압박과 대규모 집회를 통한 압력을 통해 기존 체제에서 권력중심부로 옮겨가게 된다.당시 보수세력들은 풋내기 대중선동가들의 정치능력에 대해 경시했기 때문에 그들이 권력 핵심에 오더라도 자신들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을 수 있다고 믿었다.하지만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동형조직"이라는 파시스트정당의 독특한 이중 정치구조를 통해서 자신들의 영역을 정상영역 안으로 확장해간다.동형조직이란 것은 당과 정부기구가 2원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흔히 영화에 많이 등장하는 나치친위대같은 것은 경찰조직이며 정부기구가 아니라 당조직이다.나중에는 나치가 유일당이 되므로 그 권한은 더욱 막강해진다.물론 파시즘의 대명사인 이탈리아와 독일도 같은 행태를 보인것은 아니다.또 파시즘 지도자들은 권력을 장악하고 난후 당내 급진파들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권력의 정상화단계에 이르게 된다.

파시즘의 절정은 전쟁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대외전쟁을 통해 파시스트들은 국민의 의도적 통합을 이루어낸다. 파시즘의 정서가 반개인주의 반 자유주의의 정서였기때문에 전쟁은 무었보다 좋은 통합의 문화적기제인 셈이다.그리고 전쟁 후반기로 들어서면서 추방,격리 시켰던 유대인들에 대한 대량학살이 이루어진다.대량학살 역시 동부전선을 중심으로 행하여지는데 대개가 현지의 친위대나 군인들에 의해 자행된다.히틀러가 이를 직접 지시한 명령서는 어디서도 발견된 적이 없으나 비선에서 이를 동의했다는 것은 자명해보니다.총살에 의한 대량학살은 가스실이란 도구를  창안해내며 정정을 향해 치닫는다. 파시스트들은 애초부터 비정상적 영역에 대한 배제에 익숙해있었다.외국인이나 유태인들에 대한 혐오가 그것이다.아리안족의 우수성이란 이름하게 모인 인종적 민족주의도 그 예이다. 바로 나치 우생학이란 희안한 생물학도 그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파시스트들의 반인륜적이고 배타적인 폭력성은 결국 자신들을 인류 역사의 최악의 가해자로 낙인찍게된다.결국 타인을 향했던 폭력의 칼날은 자신을 향하게 되고 자기파멸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저자는 결론에서 고전적 파시즘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린다.그리고 무분별하게 남용되는 파시즘이란 용어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한다.지금도 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일상적 파시즘>이란 것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저자의 시각에서 본다면 일상적 파시즘은 파시즘의 전제조건에 해당한다.집단주의,군사주의문화,가부장제,인종차별주의등이 그에 해당한다.이것은 반세기 전도 그렇고 현재도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라면 어느곳에서나 존재하는 요소이다.또 한가지 지적되는 것이 파시즘에 대한 '대중합의'의 문제이다.우선 파시스트 정권은 적의 개념을 명확히했다.좌파와 유대인,그리고 일부 파시스트 급진파들이다.일반인들의 경우 파시스트 폭력에 스스로 무관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여기에 패전국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의식을 자민족주의의 이름으로  수렴할때 비판적 시각을 결여한 일반인들의 경우 파시스트들의 선동에 쉽게 동의를 보낼수 있을 것이다.전쟁이란 특수한 상황을 불러일으켜 국민여론을 강력하게 모으기 전까지 파시스트정당의 독일내 지지는 40% 대였다고 한다.결코 작은 수는 아니다.하지만 전폭적 지지와는 거리가 있다.파시즘 정당이 정권을 잡은후 자유주의의 비판적 영역은 제도적으로 봉쇄당한다.요즘 처럼 정보네트워크가 원활하지 못한 상황에서 대중조작과 통제의 헤게모니는 전적으로 파시스트들에게 있었다.대부분 독재국가에서 그러하듯이 이후 지지율은 올라갔을 것이라 유추해도 별 문제가 없다.그리고 만약 파시스트 정당이 정상화를 이루어내고 장기집권 체제로 들어갔다면 내부적인 비판과 체제전복의 여론도 있었을 것이다.그러기에 파시스트 정당은 자멸이란 형식으로 단명하고 말았지만 말이다.이러한 요소를 무시하고 대중성이 갖는 몰개성성,중우함을 파시즘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하는 것은 왠지 모난 구석이 생긴다.저자 역시 이것을 파시즘이라고 명명하지 않는다.더 중요한 것은 1차적 요소들이 정치적 영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 없는가의 문제라고 본다.자유민주주의의 선두라고 하는 프랑스,미국등지에서도 이러한 파시즘의 1차요인들은 있었다.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파시스트국가라고 하지 않는다.그리고 파시스트 국가가 되지도 않았다.물론 일상적 파시즘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치적 파시즘의 해결만으로 파시스트적 속성의 문제가 전부해결되지 않는다라고 본다.즉 상부구조의 해결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자칫 도덕주의로 환원될 가능성이 있지만 나름대로 일리도 있는 말이다. 사실 그렇게 본다면 일상적파시즘은오히려 대중의 문화와 심리학에 관련된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물론 문화와 심리라는 것도 사회정치적 한계에 직접적 영향을 받긴한다. 앞으로도 많은 논의가 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만약 일상적파시즘의 상상력과 사회응용력에 매력을 느껴 파시즘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다.파시즘에 대한 이해의 폭이 훨씬 넓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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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달 2005-04-15 13:20   좋아요 0 | URL
'파시즘이란 정치양상보다 그 안에서 동의를 해준 구성원들의 문제다' 고개가 끄덕여집니다...리뷰 잘 봤습니다^^

드팀전 2005-04-16 09:39   좋아요 0 | URL
시아님>고맙습니다.유명한 그림이네요.
부용님><일상적파시즘>에서 주장하는 이야기인데..이 책의 저자는 그부분에 대해 길게 설명하지는 않습니다.개인적으로 '대중동의'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편입니다.무시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지만 말이죠.어쨋거나 탱큐...
 
사람의 향기
송기원 지음 / 창비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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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동네에 바보 한명씩은 꼭 있었다. 지금은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 못한다.푸코의 예리한 지적처럼 '비정상'이 관리되었기 때문이다.이제 그들은 무슨 무슨 재활원,말썽많은 기도원 등등에서 산다. 정부에서는 '장애인과 함께 사는 사회'라는 프로파간다로 질러대지만 실제 상황은 유리벽을 만들고 그들이 그 안에서만 있기를 바란다.'아무 죄도 없다'는 대명사로 불리워지는 '평범한 보통사람'들 역시 공범자이다.행여 장애인을 위한 건물이 자신의 주거공간 인근으로 온다고 하면 데모에 데짜도 싫어하던 이들도 빨간 두건둘러 맨다. "사람사는 동네에 혐오시설 왠말이냐" "혐오시설 결사반대 생존권을 보장하라"  ...결국 집값떨어진다는 것이다. 거기에 어떤 사람은 이런 말로 TV인터뷰도 하더라. " 아이들이 오고가면서 그런걸 보면 교육적으로 좋겠어요.당신 자식이라면 그렇게 내두겠어요." 

근대프로젝트의 구획화가 완성되기 전에는 소위 말하는 정상과 비정상은 함께 살았다. 내가 어렸을 때도 마을에 바보 형이 하나 살고 있었다. 이름은 국이었다.아마 이름의 마지막 자일게다.나이는 나보도 10살정도 많았을 것이다.사실 바보는 나이가 중요치 않다.그 바보 국이는 내 친구의 형이었는데 어린시절 항상 데리고 놀았다. 늘 같은 츄리닝에 빡빡머리,그리고 코밑을 지저분하게 흘러내리는 콧물,머리에 가끔씩 땜방자국이 있었다.수술 자국이라고도 했던 것 같구 어리버리 하다 어디 부딪혀서 그런거라고도 했다.어찌되었거나 내 어린시절 기억엔 그 국이 형과 함께 놀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 바보 국이 형이 살아있다면 아마 40대 중반이 되었을테데.....

송기원의 소설<사람의 향기>는 내게 잊혀졌던 바보 국이를 떠오르게 했다.그의 단편 바보 유생이는 거의 직접적으로 바보 국이를 연상시켰다. 송기원의 소설은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어디까지가 논픽션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내 추측에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거의 전부 논픽션인거 같다.픽션부분은 성장한 후 우연히 고향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들 쪽에 몰려있을 성 싶다.실제로 만났을 수도 있지만 대개는 작가의 만나보고 싶다는 바람이 창작력의 구름을 만나 형상화된 듯 하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작가를 중심으로 그의 가족 또는 그의 동네 지인들이 주연과 조연을 맡고 있다.소설의 배치상 맨 마지막에 놓인 <양순이 누님>은이 소설의 중심축이다. 작가의 가족사가 중심이 된 이 이야기들이 가지를 치면서 연작 소설<사람의 향기>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작가의 누님의 다난한 삶과 그의 화해를 다룬 <양순이누님>에서 양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따로 작가의 시각에서 본 양부 이야기는 <사촌아버지>라는 단편에서 다루어진다. 맨처음 나온 소설 <끝순이 누님>에서 양순이 누님의 시집 가는 이야기가 나온다.소설 마지막 <양순이누님>에서는 양순이누님의 어처구니 없어보이는 결혼이야기도 여러장면에 걸쳐 나온다. 소설 속 사람들의 수많은 숨겨진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뿌리가 되었던 유년시절과 고향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소설 속에 송기원은 대운이란 이름의 작가로 나온다. 그의 삶의 다사다난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참 복잡하고 어려운 가족사다.이런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가 싶다. 작가는 고인이된 이문구선생과 친했다고 한다.둘 다 요즘에는 보기 힘든 어려운 유년기를 보낸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문구 선생이 뼈대있는 양반집 출신인 반면 송기원 선생은 저자거리 장돌뱅이의 사생아였다. 이문구 선생의 가족이 역사적 비극에 의해 참담한 가족를 겪게 되는 반면 송기원 선생은 조금더 가족사 내부의 문제에 기인하다.아마 이 두분의 글 속에서 가난하고 없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따뜻함이 느껴지는 것은 그들이 겪었던 유년기의 기억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두분은 아픈 그 기억들을 속으로 화해하고 승화하는 방법을 깨치셨기 때문일 것이다. 난 이런 분들의 글에 대해서 뭐라 논평할 자격이 없다. 내가 문학평론가라면 학문적 척도에서 뭐라 비평할 수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그런 만한 위치도 아니고 그럴 학식도 내겐 없다.그냥 한 사람의 삶의 한 부분을 읽었다. 그것에 어떤 평을 달 수 있을까?  좋은 작품 많이 써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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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5-04-05 00:27   좋아요 0 | URL
아....국민학교 때, 같은 학년에 바보라 불리는 여자애가 있었어요.
한 학년 아래인 그애 동생은 참 공부도 잘하고 똑 소리났었는데,
그 동생이 바보라 불리던 아이를 무시하고 창피해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게 어린 마음에...참 보기 안 좋았었거든요.
드팀전님의 글을 읽으니 그 친구가 생각나네요. 지금쯤 어데에 어떻게 살고 있을까...

드팀전 2005-04-05 14:57   좋아요 0 | URL
제가 어린 시절 생각하다 또 떠올랐던 사람이 "독침 할아버지"입니다. 매일 담벼락에서 해바라기 하신 할아버지셨는데 마고자를 입고 말이죠.아이들 사이에서 그 할아버지가 독침을 놓는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그래서 그 앞을 지나갈 때면 늘 조심조심 두려움에 떨었지요.어떨때는 해바라기 하는 할아버지를 놀리고 돌아오는 내기를 하기도 했었습니다.뭐 서로의 용기를 자랑하기 위한 동네아이들의 장난이죠.할아버지 근처에 뭐 하나 던져놓고 누가 가서 주워오나...뭐 이런 거였어요.앞으로 나아가다가도 할아버지가 꿈틀하면 걸음아 날살려가 도망갔었는데...
제가 어려서 처음 본 꽃상여길이 그 독침 할아버지의 상여길 이었습니다.영화에서 본 상여길과 거의 똑같습니다.바로 상여꾼들 바로 밑에서 논길을 따라 동네 아이들과 따라 갔던 기억이 납니다.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신기했어요....
참 오래전 일인데 ....

2005-04-19 1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흔히 말하는 클래식 음악은 유럽의 음악이다.당연히 유럽의 선수층(?)이 두텁다. 그나마 미국은 유럽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의 반동으로 또 2차대전후 유럽음악인들의 망명으로 선수층을 나름대로 형성했다.망명선수들이 나름대로 유명한 오케스트라도 만들고 했지만 역시 헤게모니는 유럽리그 것이다.축구로 비유하면 프리미어,세리아에이와 미국리그 차이정도일 것이다. 나름대로 좋은 음대를 가지고 있어도 역사와 전통이 한번에 바뀌는게 아닌 듯 하다. 결국 유럽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클래식에서 주변국이 된다.물론 주변국에서도 훌륭한 연주자들이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우리나라만 해도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여럿이다.

남미 역시 클래식 주변국으로 훌륭한 연주자들을 많이 배출했다.피아니스트들의 활약이 대단하다.남미 피아니스트의 대부라고 할만한 클라우디오 아라우, 다니엘 바렌보임,마르타 아르헤리치 등등. 그중 한 명이 브루노 레오나르도 겔버 이다. 아르헤리치와 거의 동년배임에도 세계적 명성은 조금 떨어지는 듯하다.특히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아르헤리치와 음반 숫자 비교만 해도 대번에 알수 있다.아르헤리치가 DG,EMI등 메이저에서 다양한 레퍼토리에 다수의 음반을 내고 있다.겔버는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디스코그라피가 빈약하다.하지만 남미출신 피아니스트를 꼽을때 반드시 들어가는 인물인데 너무 소홀히 대접받지 않나싶다.

이 음반이 최근에 나온 겔버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 음반이다.
마이클 잭슨의 눈처럼 생긴 앨번 자킷인 인상적인데 겔버의 눈인 듯하다.라이브녹음인데 여기저기 딱지붙은게 몇몇 음악지나 음반사에서 추천을 받았다는 뜻이다.

겔버는 아르헤리치처럼 힘으로 밀어부치는 연주를 들려주진 않는다.그렇다고 그의 연주가 힘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감각적인 톤에 부담스럽지 않는 타건을 보여준다. 특히 인상적인 것이 그의 피아노 음색이다. 라흐마니노프의 낭만적인 정서를 그대로 살려주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아르헤리치의 명반과 비교해 볼때 가장 눈이 띠는 점이 바로 그점이다.

이 곡이 많이 알려진건 영화<샤인>의 덕이다.데이빗 헬프갓이 악마의 곡이다 뭐다 이래서 이곡 연주에대한 신비감을 심어놓았다.하지만 인간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히말라야 봉우리투의 평가는 과장이다. 이미 이곡에 대한 명연이 많이 있었다. 헬프갓은 자신의 수준에서 보는 완벽성에 대한 추구땜에 갑갑증에 걸린것이지 라흐마니노프 땜은 아니다.어쨋건 이곡에 관한한 최고의 명연중 하나로 손꼽는 연주가 아르헤리치-샤이의 녹음이다. 1악장의 밀어붙이기는 호로비츠,반클라이번 등을 뛰어넘는다. 그래서 처음 들으면 감동을 먹는다. 대개 그렇지 않던가?  어떤 새로운 음악을 들었을때 연주자의 기능적 출중함은 가장먼저 눈에들어온다.

락음악 듣던 시절에도 그랬다. 잉위 맘스 틴,반헤일런의 현란한 테크닉이 마치 기타 연주의 최고인지 알고 떠들어대던 적이 있다. 그런데 락이란 걸 한참 듣다보니 왜 당시 고수들이 제프벡,지미헨드릭스,듀언올맨,비비킹 등을 높이 평가했는지 알게 되었다.

아르헤리치 이야기하다 딴데로 갔다.그녀의 연주에 대해 아무런 호불이 없다.하지만 내귀엔 그녀의 연주는 너무 딱딱하다.즉 경직되어 들린다는 것이다.그녀의 힘은 감탄의 대상이지만 그것만이 음악을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한 측면에서 겔버는 또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한편으론 라두루푸,머레이페라이어의 서정성을 보여주면서도 그들에게 2% 아쉬운 힘을 충분히 품고있다. 이 음반에서도 1악장의 장쾌함 후에 나오는 2악장의 느린 연주에서 겔버의 진가가 나온다. 아르헤리치의 연주가 1악장에서 압도적힘이 2악장으로 넘어오며 정체성의 혼란에 빠진 듯 들린다면 겔버의 연주는 처음부터의 기조를 유지한다. 라흐마니노프 3번의  좋은 음반이 새롭게 추가되었다. 그가 연주한 브람스 피아노협주곡 1,2번도 최고의 명연중 하나라고 하는데 언젠가 꼭 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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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5-04-05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2년 전 겨울이네요. 아르헤리치의 라흐 3번을 1fm명연주 명음반을 통해 처음 들었던게요. 그냥 온 몸이 빨려들어갔던 기억, 이후 어느 늦봄 공대 계단을 걸어내려오다 이어폰 너머에 걸리는 "그녀"의 소리에 호흡곤란 비슷한 걸 느꼈던게.

근데. 경직되어 들린다. 는 건 매너는 잘 모르겠어요. 도입부는 부드럽고 달콤하게 시작하다가 첫 주제 종료 후부터 몰아치기 시작하고, 중간중간 이완하는 부분도 참 마음에 들거든요. 2악장의 이완. 이 정체성 혼란. 으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처음 해 봤고. 어느 정도 동감합니다. 그래도 볼로도스나 최근 호평을 받고 있는 스테판 허프의 (다소의 어폐와 과장을 실어)기계적인 일관된 연주 보다는 저 엇박자. 가 매너에겐 더 즐겁더군요.

지난주 야근을 마친 후 텅 빈 사무실에서 아르헤리치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의 2악장 로망스. 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베토벤스러운 1악장의 기세를 모두 빼고 여리게, 마음에 스며들듯한 피아노소리에 울컥. 했더랬죠. 지나면 지날수록 "그녀"의 힘 보다는 완급조절과 여린 소리에 마음이 쏠려갑니다.

드팀전 2005-04-05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매너님이 불끈 하실 줄 알았어요.^^ 아르헤리치 역시 세계적인 연주가인데 그녀의 연주가 결코 수준이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저 역시 처음 구입한 연주가 그녀의 연주였어요.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녀의 팬이 되긴 쉽지 않더군요.제 개인적인 피아노 소리에 대한 취향인데... 거기엔 호불은 있을 지언정 우위가 있을 수는 없겠지요.그런 식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아르헤리치의 건반 누르는 소리가 제겐 딱딱하게 들립니다.피아니스트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음색이 그렇다는거죠.너무 쟁쟁거리게 들려요.제가 요즘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들은 좀 부드러운 사람들이랍니다.어유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어찌되었거나 이 피아니스트 브루너 레오나르도 겔버 라는 사람.그의 능력에 비해 국내에서 과소평가 받고 있으니 한번쯤 어떤 사람인가 관심을 가져 봐도 될 만한 사람입니다.전 요즘 디누 리파티의 음반에 계속 관심이 가는데 있는 건 계속 있고 구하려는건 계속 없네요.

mannerist 2005-04-05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불끈. 한 적 없어요. 좀더 넓고 깊게 듣다 보면 그렇게 느낄 날 올련지도 모르죠. 그정돈걸요 뭐.

근데 있는 건 계속 있고 구하려는 건 계속 없다. 하하... 맞아요. 그렇다니깐요. 그러다가 한 장 손에 들어오면 그만큼 더 기쁜건지도 몰라요. 지금 드디어 쿠벨릭의 1990년 프라하의 봄 개막 콘서트 '나의 조국' 실황녹음을 구하고 비닐 뜯었다가 도로 봉해놨답니다. 서울 돌아갈 때 들으려고 말이죠. =)
 
전체주의의 시대경험
후지따 쇼오조오 지음 / 창비 / 199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독도문제로 한일간에 감정이 날카롭다. 행여 일본에 대해 우호적 발언을 했다가는 돌맞기 딱 좋은 정서가 가득하다. 이런 마당에 삐딱선을 타며 일본학자의 책을 읽었다.그는 일본내 진보적 소수를 대표하는 학자이다.이 책에 실린 내용은 멀게는 1960년대부터 가깝게 90년대까지의 일본정치사와 사회사에 대한 저자의 독특한 시각을 담고 있다. 후지따선생이 다루고 있는 소재는 일본적인 것이다.하지만 선생의 해석범위가 닿는 곳은 일본이라는 한 국가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는 6,70년대라는 일본 상황을 토대로 현 자본주의가 직면한 위기와 문화적 정체,소비사회의 노예가 되어가는 현대인들의 무감각한 감성에 대해 보편적 가치에 기대어 비판의  칼날을 던진다. 특히 일본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여러모로 일본 사회시스템과 닮아있는 한국에서 그의 비판은 직접적으로 유효하다.

우선 책 초반에 가장 인상적인 그의 표현은 '안락에의 예속'이다. 현대인들은 불쾌감이란 단어에 극단적인 혐오를 갖는다.이를 회피하기 위해 그들은 사물과의 상호관계를 거부하고 호의적인 것들만 받아들이다.이 안락에 대한 강박증적 추구와 안락의 파괴에 대한 우려감은 사물에 대한 돌발변수제거라는 형태를 추구한다.이는 소유라는 불완전하고 일방적인 형태를 취하게 된다.또 안락을 유지하기 위한 이익보호자,즉 조직에 기대게된다.이는 결국 정신의 궁핍화를 일으키고 생활속에서 안락의 전체주의 속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다.인간이 자본이나 조직에 노예가 되었다는 명제는 이미 익숙한 것이다.후지따 선생이 그 원인으로 든것은 다분히 심리적인 요인이다.이 '안락에의 예속'은 그런 면에서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문제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물론 저자 역시 안락이란 감정 상태를 나쁜 것으로만 보지는 않는다.문제는 그 요소에 대한 추구가 일방적인 것이고 무의식적이지만 광적인 추구가 되는 상태인 것이다.

대학다닐때 친구들과 미팅에 갔었다.어느 여대 교육학과 친구들이었다.무슨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당시 쉽게 만날 수 있었던 사진전 이야기가 나왔다. 철거민들의 삶을 다룬 사진전이었다.나는 그 안의 리얼리티와 무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담고 있는 작가의 시선이 좋았다.그런데 어떤 여학생이 내 혈압을 올리는 말을 했다. " 전 그런 사진들 별로에요.그런 사진보면 왠지 우울해지고 내가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제 주변에서는 그런 사람들 본 적도 거의 없구.어쨋건 전 그런 칙칙한 사진보다 좀 밝고 예쁜 사진이 좋아요."

당시에 나는 무지 열받았다.지금 다시 생각해도 좀 답답한 감은 있다.어쨋거나 그녀의 그말...물론 단순히 어린친구의 순진한 반응일 수도 있지만... 그게 바로 "안락에의 자발적 예속"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요즘은 뭐가 달라졌을까?  절대 아니다. 정치적 이슈로 가지 않고 좀더 만만한 문화적 아이템으로 들어와도 된다.영화나 책,음악 등등등 진짜 대량소비되는 시대이다.다들 가장 좋아하는게 무었일까?  쉽고 편안하고 무언가 고민하게 하지 않고 인지부조화를 만들지 않고 가급적 해피앤딩이면 좋고... 한마디로 불편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오히려 가끔 컬트나 좀 쉽지 않은 작품을 보면 옆에서 그런다 "그런걸 왜보세요.머리만 아프게" ....문화적으로 보자면 이 또한 "안락에의 예속"이다. 이렇게 후지따 선생의 말처럼 '생활속의 안락이 전체주의화'되어 간다.

저자는 일본의 국가적 무비판성에 대해 냉정하게 비판한다. 무비판의 대상이었던 천황제에 대해서도 그동안 천황제 논의의 저열함을 짚으며 메스를 들이댄다.또 일본인들의 조직에 대한 맹종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비판한다.자기비판이 가장 부족한 국민이 일본인이다 라고 까지 하면서 일본인들의 무비판능력을 공격한다.이것이 일본이 경제동물이란 칭호를 듣게되는 원인이고 패권주의라는 이름으로 존속하고 있는 이유라고 생각된다.그렇다면 이웃국가 한국은 어떠한가? 그의 말중에서 '일본'을 '한국'으로 바꾸면 그대로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닐까? 일본이 터무니없이도 독도를 우리땅이라 우긴다. 이에 대응하여 마산의회는 대마도를 우리땅이라고 한다. 뭐가 다른지 내 기준으로선 이해가 안된다.방송에선 일부 일본 진보학자들이 역사적사죄의 뜻을 비쳤다는 것을 보도한다.사람들은 '그래도 일본놈 들 중에도 괜찮은 놈들도 있네' 한다.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과연 괜찮은 한국인일 수 있을까?  인류의 위대한 이상인 보편적 가치보다 자신이 속한 가족,직장,조직,국가의 가치가-거기에 승리주의의 가치가- 우선시 된다는 점에 대해서 과연 이 책속에 나온 일본,일본인과 한국,한국인이 차이점이 생기는 것일까?

저자가 말하는 현대사회에 대한 탈출구는 그렇다면 어디에 있는가? 여기서 조금 진부하긴 하지만 저자는 "보편적 이가치,보편적 이성"이란 것을 들고 있다.러셀이 자주 인용되는 것도 이 이유에서이다.결국 사고의 괘적은 다를지라도 몰락의 방향으로 가는 현대사회를 돌려놓을 수 있는 것은 인류가 가진 보편적 가치에의 희망에 기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후지따선생의 생각인 듯하다.그렇게 하기 위해선 타자의 것,다른 것,공존할 수 없는 것과의 상호관계에 대한 생각의 전환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자이며 공산주의자이고 또 아나키즘에 기댄 저자의 도덕적 호소는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다.

사족같지만 이 책에 알라딘 리뷰는 모두 별5개이다. 주관적인 판단이라 왈가왈부 할 수는 없다.하지만 내 경우 별5을 주기 망설여졌다. 우선 만연체의 문장이 거슬렸다.저자의 글쓰기 형태인지 아님 번역가의 능력인지는 모르겠다.하지만 한 문장이 10줄이 넘어가고 중문의 형태를 띠는데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또 책의 어떤부분들은 지극히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나온 글들이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동시대에 살던 일본 학자들의 언행에 대해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렇다면 이 책이 별다섯을 받아야하는 이유는 후지따선생의 칼날같은 정신에서 나온 사회의식때문이다.하지만 본인도 인정하듯이 그의 주장은 도덕주의적 관점이 너무 많이 배어있다. 이 책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맑스주의의 대차대조표에서 후지따선생은 관점에서 좀 멀어진듯한 인상을 많이 준다.

물론 이 책에서는 보편주의의 시각하에서  한일양국의 부정적 공통점에 바탕을 둔 비판적인 시각을 많이 얻을 수 있다. 그의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하지만 참신성은 지금와서는 빛이 좀 바란듯하다.이 책이 동시대적 상황에 반응하는 책이라면 6,70년대에 나왔어야했다.너무 늦게 우리에게 소개된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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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달 2005-03-30 17:09   좋아요 0 | URL
'안락의 예속', 에릭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떠오르네요..스스로 말미암는 것이 '자유'라고 하던데...참 쉬운 일은 아니죠^^;;

딸기 2005-09-21 23:02   좋아요 0 | URL
뒤늦게 읽었지만, 서평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추천.
 



 3월에도 또 여러장의 음반을 사고야 말았다. 그래도 좀 아쉽다만 이정도에서 멈추어야 한다. 괜히 혼자서 와이프의 시선도 의식한다....그래도 아직까진 음반사는 것 가지고 심하게 뭐라 하진 않으니 고마울 따름이다.이것 저것 사와서 미안해진 내가 가끔 "이 음악은 이런게 좋은데 말이지.."하면서 너스레를 떨면 관심을 갖고 들어준다.착한 와이프^^.

 요즘은 좋은 오디오를 가지고 싶다는 욕심이 좀 생기는데...하지만 아직 실행에 옮기기엔 요원하다.그래서 인터넷으로 눈만 즐겁게 하고 있다.우선 3-4년 계획으로 돈을 모아야 할 것 같구.또 돈이 있어도 그걸 설치할 공간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이것 저것 생각해보면 좀 멀다.언젠가는 흔히 말하는 하이-앤드 오디오로 음악을 들을 수 있겠지.바이올린 소리가 식빵 결처럼 뜯어지는-왜 예전에 어떤 빵집 CF에서 닭가슴살 떨어지듯 쫄깃한 식빵 그림 있지 않았나- 소릴 듣고 싶다. 기다리는자에게 복이 온다니 기다려봐야지.

위에 음반은 카를로스 클라이버-에리히 클라이버 부자의 보로딘 교향곡 음반이다.커플링의 묘미가 살아있다.카를로스 클라이버 사후 계속 쏟아져 나오는 음반중 하나이다. 보로딘 음반에서 역시 업템포의 탄력있는 음악을 들려준다. 아버지 클라이버 보다 약 2분 가량 빠른 연주다.음반 내외지에 총연주시간은 아들 클라이버가 더 길게 표시되어 있다.명백한 오타이다.개별 악장의 시간을 더해보니 역시 아들의 연주가 빠르다.그냥 듣기에도 훨씬 빠른데... 세계 시장으로 판매하는 음반에도 더하기 잘못을 하다니.뭐라 하고 싶은 맘 전혀 없다.이런 실수가 귀엽지 않은가? 이런거 가지고 분개하고 그런 사람들도 있다만 뭐 그럴 필요있나 싶다. 삶에 그러한 허허로움이 빠진다면 너무 빡빡하다.그 다음 음반은 알프레도 캄폴리라는 바이올린 연주자의 헨델 바이올린 소나타 음반이다.알프레도 캄폴리는 CD세대들에겐 좀 덜알려진 연주자이다 나 역시 이 음반이 그의 첫음반이 되는 셈이다.LP 시대에서 CD시대로 넘어오며 그의 연주가 음반화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이력을 대략 살펴보았다. 오이스트라흐나 밀슈타인과 비슷한 연배였고 1991년이 되서 사망했다.정규 바이올린 교육을 받지 않았는데 그의 아버지가 음악원 교수여서 따로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 들어본 그의 연주는 균형감이 있으면서 단아하다는 인상이다. 헨릭 쉐링의 연주가 많이 떠오른다.헨델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요즘 원전 연주자들의 주요레퍼토리가 되어 있다.하지만 그 전에는 그다지 좋은 음반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안동림 교수덕에 재발매된 아르투르 그뤼미오 연주이후 이 레퍼토리에 추가된 아름다운 음반이다. 그뤼미오 연주가 우아함이 지나쳐 거북하다면 캄폴리의 단아하고 과잉없는 연주가 대안이 될 수 있겠다.


이름이 좀 긴 지휘자다.스타니슬라브 스크로바체프스키.음악 활동을 한지는 아주 오래되었는데 메이저 악단 상임과 그다지 인연이 없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지휘자다. 이건 그의 브루크너 전집인데..내가 산 건 이중 브루크너 5번 교향곡이다.브루크너 5번은 그의 교향곡중 신비주의 성격이 가장 강한 곡이다.그래서 곡의 전체적 윤곽을 잡기가 쉽지 않다.대부분 브루크너 4번듣고 후기 교향곡으로 뛰어넘는다.아직 한번 밖에 듣지 못했지만 흔히 말하는 연주의 자발성이란게 조금 떨어지는 듯하다.오케스트라의 수준 역시 메이저에는 조금 못미친다.내가 들었던 오이겐 요훔의 두장짜리 브루크너 5번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그런 것 같기도하다.그 음반도 1장 가격이었는데.



이 음반은 앞에서도 한번 소개한 카멜라 윅스의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언젠가 집에서 이 음반과 하이페츠의 음반을 비교해서 와이프와 함께 들었다. 둘다 공통적으로 카멜라 윅스에게 한표를 던졌다.물론 1악장 앞부분 정도만 같이 들어서 공정한 평가라 할 수는 없지만 전체적인 분위기 측면에서 카렐라 윅스의 음반이 더욱 맘에 들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 위주의 평가는 늘 같은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또 어떨때 들으면 하이페츠의 손이 올라갈 지 모른다.어쨋거나 시벨리우스 협주곡에 잊혀졌던 강자의 부활이라 할만하다.



너무 많이 알려지고 각종 TV,CF등에 많이 쓰여서 오히려 음악성이 가려진 조금은 억울한 아티스트,척 맨지오네의 <FUN & GAME>음반이다. 세계 최초로 CD화 되었다는 음반홍보 멘트에 혹해서 사고 말았다.거기에 펑키한 사운드...뭐 이러니 어찌 그냥 지나갈 수 있었으랴. 요즘 차안에서 운전할때 많이 듣고 다니는데 맘에 든다.

 



이 음반은 영화<레이>의 O.S.T이다. 원래 살 계획은 없었다.근데 최근에 와이프랑 쇼핑몰에 뭔가 사러 갔다.한참 이것 저것 돌아보았는데 마땅한 것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나오게 되었는데 그럼 주차료를 물어야 했다. 왜 있지 않은가 주차료나 이런건 몇천원 안해도 그냥 내기 진짜 아까운거.그래서 고민하다가 지하에 있는 음반매장에 들어가서 하나 빨리 골랐다.클래식 음반을 살 경우에는 이것 저것 한참 봐야하기 때문에 한장 사더라도 시간오바에서 주차료를 또 물어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냥 머리에 떠올랐던게 레이찰스 음반이었다.아마 영화를 본지 그리 오래지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돌아오는 차안에서 들었는데 영화의 장면들이 떠오르는게 즐거웠다.이 음반은 나보다 와이프가 더 좋아한다.특히 경쾌한 곡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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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달 2005-03-25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내세요!! 좋은 날 오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