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와트에서

지난번 여행갔을때 오래도록 사랑할 여인과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이른 아침이었는데 사원에 사람들이 없어서 고즈넉한게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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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2-26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헉... 뒷모습이잖아요^^ 넘 부러운 모습입니다^^

조선인 2005-02-26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멋진 연출입니다. *^^*

비로그인 2005-02-26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도록 행복하시길...^^ 멋지네요.

stella.K 2005-02-26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했다. 기왕이면 앞판을 보여주시지 저렇게 뒷모습이면 어찌 알겠습니까? 근데 제가 생각했던 드팀전님은 아니신가 봅니다. 전 샤프한 이미지를 상상했걸랑요. 암튼 오랫도록 사랑할 분과 늘 행복하십시오.^^

드팀전 2005-02-26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조선인,폭스님> 감사 ..^^ 삼각대에 타이머걸어놓고 후다닥 뛰어갔어요.어찌나 날쌘지^^
스텔라님>아니 등만봐도 안 샤프한지 아시나보네요^^ 등판이 넓어서 그런가?^^ 아님 머리가 너무 큰가?

stella.K 2005-03-01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둘 다인 것 같습니다. ㅋㅋ.
 
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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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다 읽었다.몰입하게 하는 소설이다.사건은 현실과 비현실을 넘실거린다.또 사건의 흐름은 상하좌우에서 사정없이 뺨을 때리는 미친 봄바람같다.작가는 질퍽거리는 내면여행 타령에는 시간을 쓸 틈이 없어보인다. 숨이 벅차다.그나마 친철한 작가는 스스로 변사 역할을 맡아 헐떡거리는 독자들을 잠시 쉬어가게끔 해준다. 등장인물들은 신체변형을 이루어낸 그로테스크한 인물들이다.마치 조엘 피터 위트킨의 <머이브리지의 대역>이란 사진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그러면서도 소설속 주인공들은 현실에 비릿한 숨결을 내뱉고 있다.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현실 속에 있지만 신화나 전설속에서나 나옴직한 인물들이다. 인물들은 모두 '욕망'이란  공통된 상징으로 수렴된다. 인물 자체가 가진 외형적 특징은 최근 한국 소설에서 그다지 만나 본적 없는 설정이라 독특한 즐거움이 있다.

 .... 뱀같이 작은 눈에 쥐의 형상을 한 노파,거대한 양물을 가진 반편이 도련님,살이 방바닥을 덮어버린 걱정,여성에서 남성으로 변해버리는 금복,둘이면서 하나인 쌍둥이 써커스단 자매,수백킬로를 넘는 벙어리 춘희...그외에도 또 있다.죽을 때까지 비린내를 버리지 못하는 생선장수,얼굴의 반을 잃고 파괴를 정체성으로 삼는 철가면,수만마리의 벌꿀을 몰고다니는 야수같은 노파의 딸....

이 인물들이 서로 촘촘한 관계를 맺고 소설을 이끌어 나간다.기묘한 이야기이다.하지만 읽다보면 뭔가 속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뭔가 속고 있다는 혐의가 내 피해의식 때문일까? 그런데 다시금 양보하고 생각해봐도 허용의 범위 안에서 속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원래 소설이란게 그럴싸한 이야기로 사람을 속이는 행위이니 이런 속임을 당한 듯한 느낌은 소설의 미덕에 대한 칭찬일 수 도 있다.하지만 또하나의 혐의가 있다.평론가들도 뒤에서 말한 장르의 혼성모방이다.작가 스스로도 수많은 장르의 수혜를 입었다고 밝히고 있으니 결코 나의 피해의식이 허황된 것 만은 아니다.영화로도 제작된 적 있는 안정효의 <헐리웃 키드의 생애>를 떠올려 보자.주인공의 친구 임병석 말이다.어린 시절 부터 영화에 관한 모든 것을 수집한다.주인공에게 영화적 헤게모니를 빼앗기지도 않는다.폐인이 다 된 그가 건넨 시나리오.각종 평단에서 최고의 영화라고 추켜세운다.주인공은 그런 인기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찜찜한 감정을 없앨 수 없다.결국 찾아낸것은 임병석이 어린시절 보았던 여러 영화들을 조금씩 짜집기를 했다는 것이다.'태양아래 새로운 것이 없으니 뭐 어쩔것인가'가 대량복제 시대의 예술이 가진 자족적 한계이고 감상자의 슬픈 운명이라면 긍정도 부정도 아닌 시선으로 받아들인다.

먼저 기묘한 인물들의 설정을 한번 떠올려본다. 그로테스크한 일본영화를 보는 듯하다.평론가들은 전설과 신화속 인물을 거론한다.하지만 작가가 영화에 더 깊이 경도되어 있는 사람임을 미루어 볼 때 오히려 영화 속의 신체변형적 인물들에 혐의를 두고 싶다. 노파와 딸의 원색적인 야생성은 이마무라 쇼헤이의 <나라야마 부시코>속 마을과 인물들을 떠올리게 한다. 오래된 원한이 원초적 욕망과 결함되어 마치 귀혼이 들린 듯한 강렬한 이미지를 생성해낸다.책 말미에 어떤 평론가는 인물을 시대 상징으로 읽는다.읽는 거야 서로 지마음이니까 뭐라 할 건 없지만 인물을 중심으로 전근대(노파)-근대(금복)-탈근대(춘희)로 구획짓는 것은 진짜 선무당 사람잡는 짜?是甄?작가 역시 어느 정도 인정은 하면서도 특유의 웃음으로 '그럼 재미없지 않나요..'라고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대답한 것 같다. 쌍둥이 자매는 어떠한가.둘 이면서도 하나인 캐릭터는 정신분석학에서 뭐라는 지 모르겠으나 영화의 스릴러 영화의 주요소재이다.쌍둥이는 아니지만 히치콕의 유명한 영화<싸이코>에서 주인공은 어머니와 정체성을 공유한다.쌍둥이 자매 역시 책 말미로 오면서 언니가 동생이고 동생이 언니이고 또 언니가 언니이고 동생이 동생인 상태로 평생을 살아 왔음이 밝혀진다.그렇다고 무슨 엽기적 행각을 펼친건 아니니 이상한 시선으로 볼 필요야 없다. 주인공 춘희는 조엘 피트 위트킨의 사진속 주인공보다는 훨씬 근육질의 통뼈였을 것이나 작가가 말한 '거대한 것의 비극'이라는 점에서는 정서적 동일성을 같는다.영화 <빅 피쉬>에서 주인공이 동굴에서 끌어낸 거인의 뒷 모습.평생 주인공의 친구가 되준 그 거대하면서 슬픈 표정은 춘희의 얼굴과 오버랩된다.춘희의 영원한 친구인 코끼리까지 더불어 생각해본다.우리 영화 <오아시스>의 뇌성마비지체아-아마 문소리가 연기했던-의 상상속에 코끼리가 등장한다.그러다 보니 데이빗 린치의 <엘리펀트 맨>까지 생각이 미친다.선천적 기형으로 서커스단에서 일하며 거대한덩치로 인해 코끼라라 불리우는 사람. 물론 이 모든 생각은 짧은 지식을 이것 저것 섞어놓은 가당치 않은 음모론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이 또 빚지고 있는 것은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이다.먼저 소설의 배경이 되는 평대-남발안을 떠올려본다.근대화의 공간으로 수많은 욕망이 서로 교차한다.또 현실과 신화.산 자와 죽은 자가 자연스럽게 공존한다.현실에 있는 공간인지 현실 속에 고립된 신화의 공간인지 알 수 없다.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의 중심무대인 마콘도가 그러했다.새롭게 철길이 들어서고 근대적 욕망들이 모여들지만 그곳은 전설과 미신이 공존한다.오히려 그것들이 현실에 힘을 작용하여 변화를 주도한다.후안 롤포의 <빼드로 파라모>의 공간 꼬말라는 어떠한가.아예 산자와 죽은자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공간이다. 이 소설 속 평대라는 공간은 남미 소설의 공간에 비해 신화성은 떨어진다.그렇기때문에 현실 속 인물들의 실제적 갈등과 욕망의 충돌이 실제감있게 들어설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작가의 시나리오 작가 경험은 인물들의 등장과 퇴장의 합에 주도면밀하다.이 소설의 구성 역시 드라마나 시나리오의 구성에서 혜택을 입었다.어느 한 사람 헛되이 등장하지 않고 평범하게 사라지지 않는다.딱 아귀가 맞는다.잘 만든 영화가 그렇듯이.이걸 구성의 힘이라고 한다.소설이 이런 드라마적 아귀맞춤에 순응해야 하는 가는 읽는 사람마다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오히려 작위적이고 진부하다고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하지만 읽는 입장에서는 이런 딱떨어지는 맞춤이 가진 매력을 모른채 하긴 어렵다.

작가는 소설<고래>가 '거대한 것의 슬픔'이라는 모티브에서 출발했다고 한다.우연히 마주친 덩치 큰 여고생이 준 이미지였다고 한다.언젠가 나 역시 거대한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더 작아 보이는 모순적인 감정이었다.소설 속 고래는 푸른 바다에서 떠밀려 나와 자신의 내장까지 바닥에 흩어내며 놓여있다.주인공 금복이 그렇게 거부하고자 했던 죽음의 이미지이다.죽음에서 벗어나려는 삶의 의지는 욕망이란 형태로 현실에서 구현된다.구전 소설에서 나옴직한 성공과 몰락,그리고 춘희로 이어지는 삶. 개망초로 상징되는 죽음은 춘희라는 순수를 통해 정화된다.그녀가 쌓아 놓았던 석양을 머금은 붉은 벽돌 처럼말이다.

좋은 소설이면서도 무언가 불안하게 만드는 소설이다.기묘한 여운이 작품과 작가에게 남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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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달 2005-02-25 11:10   좋아요 0 | URL
와~굉장하네요!!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전출처 : 분홍달 > 평화로운 세상을 위하여....
농부와 산과의사
미셀 오당 지음, 김태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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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누구라도 한번쯤은 이런 얘기를 해봤을 것이다. 묘한 안도감과 여유를 주는 말이다. 고달픈 삶에 소박한 위로가 됐던 '먹다'라는 행위, 하지만 이제 더이상 생존을 위해서도, 잠시 잠깐 짐을 내려놓고 쉼을 갖기 위해서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먹을거리'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이 사라진지 꽤 오래, 바야흐로 돈을 벌기위해 만두에 상한 재료을 넣는 사람도 있고, 일부러 만두에 돌덩어리를 넣는 사람들이 출현한 대단히 흥미로운 시대인 것이다. 바로 어제, 돈을 벌고 싶었던 한 여배우는 자살을 했다. 세상이 '돈'에 의해 돌아가고 돈 때문에 미쳐간다.무엇이 이렇게 세상을 어지럽게 만드는가? 무엇이 삶을 이다지도 척박하게 만드는가? 무엇이 사람들을 이렇게 폭력적으로 만드는가? 

'농부와 산과의사' 묘한 이끌림을 주는 제목이다. 인간의 생명과 인간 세상의 번영을 위해 가장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식량을 생산하는 것과 인간을 생산하는 일일 것이다. 이 두가지의 생산이 바르게  서지 않는 한, 우리 사는 세상의 많은 문제들은 극복되지 못할 것이다.

20세기 동안 농사와 출산의 산업화는 대단히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우선 농사에 있어서 강력한 합성 살충제와 비료의 출현으로 비용은 절감, 생산성은 크게 증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전세계적인 환호를 받으며 산업화의 가속화가 이루어졌고, 가난한 농부에게조차 커다란 희망으로 자리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땅심은 더욱 척박해지고, 유전적 변이와 항생제가 득시글 거리는 먹을거리들이  건강을 위협하고, 듣도보도 못했던 해괴한 병들이 각국을 쓸어버리며 인간의 숨통을 죄고 있다. 결국 비료와 살충제를 생산하고 해마다 막대한 이득을 취하는, 한 나라보다 더 힘있는 저 유수한 다국적기업들만 신이 나있다. 그러나 그들도 언제까지나 행복할 수만은 없지 않을까....또한 그토록 존귀한 인간을 생산하는 '출산'에서 조차 엄청난 산업화가 이루어졌다. 출산과 산업이란 말이 어찌보면 참 어울리지 않는 것이나 실제로 엄청난 산업화가 이루어진 출산은 삼신할미와 하늘의 뜻이라던 한 아기의 탄생은 매스와 겸자를 들고 날치는 산과의사와 소란스런 관람객들 속에서 위생과 과학이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산모와 아기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안전한 출산이란 것 역시, 오히려 생명을 경시하며 거칠고 폭력적인 인간들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자각아래 '농부와 산과의사'라는 책이 씌어졌으며, 다양한 연구결과들을 토대로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평화로운 만남들을 강조하고 있다.

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편과 함께 출산의 순간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것이 아기를 위해서도 좋을 것 같았고 고통과 환희의 순간을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하는 것이 힘이 될 것 같다는 생각때문이었다. 혹시라도 그것을 두려워하는 남편이라면 참 서운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서 생각이 바뀌었다. 연구결과 출산의 순간을 함께한 부부의 경우 동지애는 두터워졌으나 이혼의 확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또 무엇보다도 출산에 참여하는 남편의 스트레스가 그대로 아내에게 전해져 순조로운 출산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포유류의 동물들은 새끼를 낳을 때가 되면 아무도 보지 않는 안전한 장소에서 혼자 출산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것은 여러가지 연구결과를 통해서 증명이 되는데, 종합을 해보면 조용하고 프라이버시가 존중되며 조명은 좀 어두운 것이 좋고 기계적인 개입이나 사람이 많지 않은 평화로운 상황에서의 출산이 아기와 산모 모두에게 스트레스를 줄여 순산을 돕고 회복도 그만큼 빨라진다고 한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법으로 태어났느냐가 한 인간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데, 기계적인 개입이 많거나 스트레스가 많은 상황에서 태어난 아이는, 성장해서도 폭력적이거나  약물중독, 자살에 이르기까지도 한다고 한다. 참 무서운 일이다. 아기가 세상과 첫 대면하는 순간이 이만큼 중요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출산을 치유함으로써 지구를 치유하자" 저자는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고 싶다면 평화로운 출산을 통해 평화를 사랑하는 아이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한다.

이 책은 그다지 읽기가 좋은 글은 아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글솜씨까지 겸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주려는 메시지만큼은 조금도 무시해서는 안되는 인간의 운명과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적어도 앞으로 부모가 되려는 모든 사람들은 한번쯤 이 비슷한 내용의 글이라도 읽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또 좋은 음악과 유기농 음식만이 좋은 태교는 아니며, 출산을 앞둔 모든 여성들이 자신과 아기의 첫만남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인간의 뇌에서는 사랑의 호르몬, 이타적 호르몬이라 불리는 '옥시토신'과 '엔돌핀' 이 만들어 진다고 한다.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인간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우리 안에서 생성되는 '옥시토신'과 '엔돌핀'이 더 많이 생성될 수 있도록 자신에게 좀 더 관심을 가져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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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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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가월령가'라고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의 세시풍속과 시기별 농사일을 노래 형식으로 만든 노래이다. "정월이라....어쩌구 저쩌구...달도 밝고...어쩌구..."   뭐 그렇다. 10년도 훨씬 지난일이니 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탓 하지는 마시라. 분필 맞아가며 배웠던 추억이 떠올라 도저히 참을 수다 하시는 그런 분들을 위해 알려드린다.

  " 손가락 쫙악 펴서 인터넷 검색창에 '농가 월령가' 를 치세요."

"달싸쵸"(우리 와이프가 그렇게 불렀다. 똑똑한 친구같으니..) 이 책의 형식은 '농가월령가'를 그대도 빼어박았다. 머리가 유달리 비상한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 하면 "아...12장으로 구성되었군" 하신다. 그럼에도 꼭 확인하고 싶으시다. (원래 포커판에서도 지는 패를 들고도 꼭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분들은 책을 사서 펴 보면된다. 그리고 펼친 김에 읽으면 도랑치고 가재 잡는 격이니 이 아니 좋을 쏘냐. '농가월령가'가 반복되는 세시풍속을 1년 12달로 나누었다면 '달싸쵸'는 한 사람의 출생, 성장, 죽음의 기록을 12단락으로 나눈다. 거기에 각 장은 맛있는 요리로 시작된다.시각과 미각을 동시에 자극한다. 레서피... 주인공 티타의 가문에 전수되어 온 멕시코 전통 요리가 주재료이다.티타 가문의 이야기가 얇게 저린 부재료로 쓰인다. 이 두 이야기가 때론 강한 불에 때론 옅은 훈제 연기에 데워져서 '달싸쵸'라는 멋진 요리 하나가 완성된다. 물론 남미 특유의 에로틱한 정서와 마술적 리얼리즘의 세계가 향긋한 향신료로 미식가를 감동시킨다.

앞 문단을 다 읽기 귀찮은 분을 위한 공식: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멕시코 요리 + 티타가문의 가족사 + 티타의 사랑+ 섹스+ 마술적 리얼리즘+페미니즘 + x(x= 읽는 독자가 마음껏 추가해도 되는 미지수)

이 소설은 원래 영화를 만들려고 기획되었다고 한다. 결국 작가의 남편을 통해서 영상화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영화를 보지는 못했다.  그런 선입견때문인지 소설의 줄거리와 형식이 헐리우드 영화구조를 닮아 있다. 선악의 구조가  명확하다. 마마 엘레나를 중심으로 한 전통가치를 수호하는 세력과 티타와 그녀의 큰 언니로 대표되는 새로운 가치 세계의 대립이 간단명료한 이분법으로 나뉘어 있다. 불행하게도 마마 엘레나는 이사벨 아엔데의 <영원의 집>에 나오는 가부장적 아버지처럼 살아 생전 가치체계의 변화를 겪지 못한다. 오히려 그녀의 딸 로사우라를 통해 그 가치가 이어져 간다.오히려 현실성이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결국 이 구세대의 가치관은 죽음이란 형태로 소멸해 간다. 이 과정이 현실적이긴 하지만 조금은 판에 박힌 듯 하다. 물론 믿음직한 남미의 딸 답게 저자는 마술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들 삶의 변화를 형상화한다. 로사우라의 희안한 신체왜곡,마마 엘레나의 죽음과 그 영혼의 재생,죽은 나차의 영혼의 등장 등등.결론 역시 에브리 바디 해피로 끝난다.물론 이게 맘에 안드는 건 아니다. 녹차 아이스크림으로 후식을 한 것 처럼 깔끔하게 떨어진다. 읽는 독자입장에서는 뭔가 덜 닥고 나온 것같은 것 보다야 낫다. 마치 비데하고 뜨뜻한 바람으로 엉덩이 드라이 한것 같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바로 음식과 성의 결합이다. 영화감독 피터 그리너웨이의 작품을 처음 봤을때 " 음식과 성의 결합"이란 단어가 생경했다. 지금도 별반 달라지진 않았다. 식욕과 성욕이 둘다 인간의 기본적 욕구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나는 조금 통속적 용어를 써서 "먹는다"(이거 아주 귀에 거슬리지만 ..이런 말들을 남자 애들이 ›?때문에 리얼리티를 위해 쓴다) 는 말이 주는 반페미니즘적 공통어 외엔 떠오르는게 없었다.사실 아직도 음식과 성이 어떠한 알레고리로 결합되는지 잘 이해하고 있진 못하다.오히려 이 소설에도 등장하지만 어떤 향기가 최음의 효과가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다.그게 어떠한 정도의 영향을 미치는 지 알 수는 없으나.내 상상력 부족인지 아니면 인문학적 지식의 부족인지 알 수 없지만 내게 음식은 음식이고 성은 성이다.^^ (뭔가 좀 더 아시는 분은 멋지게 설명해달라.) 또 한가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요리에 난 전혀 관심이 없다.이유는 무슨 요리인지 본적도 없고 재료를 소개해도  머릿속에 그려지지가 않으니 좀 답답할 뿐이다.물론 요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것은 신기하다.별개의 음식들이 모여서 제3의 맛을 만들어내다니.거기에 그럴싸한 장식까지 갖추어지면 요리는 눈과 입을 동시에 즐겁게 해주는 아트가된다.드라마 대장금을 봐도 이영애 만큼 멋지게 나오는게 수랏상에 오르는 음식들 아니던가.내가 남미 요리를 한 번도 먹어본적 없다는게 아쉬운 뿐이다.

남미 소설들을 그다지 많이 봤다고 할 수는 없다.하지만 이름난 주요 작가들의 작품을 한두편 쯤은 본 것같다.(보르헤스는 아직 노려보고만 있다.아직 내 내공으로는) 아직 까지 남미 작가들은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그들의 소설에는 삶에 묻어 있는 역사가 있다.또 산자와 죽은자가 동시에 공존하는 세상이 있다.이 책에는 거기에 더하여 향긋한 요리의 향기와 한 숨 놓게 하는 행복한 결말이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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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달 2005-02-22 19:03   좋아요 0 | URL
멋진 리뷰네요^^
 
아나키즘, 대안의 상상력
콜린 워드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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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학 다니던 시절 친하게 지내던 조교누나가 있었다.타과 출신이었지만 학회일 때문에 지속적인 도움이 필요했던 관계로 가까와 지게 되었다. 어느날 술먹는 자리, 그 누님 왈 "너 취향도 맘에 들고 우리 리틀 아나키 클럽에 들어와라?"  ".... .... ... "  . 내가 아나키란 말을 나름대로 고민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 누님이 말한 '리틀 아나키'가 존재했었는지도 사실 모르겠다.내 생각에 그저 마음 맞는 몇몇사람들의 술자리 모임을 낭만적으로 펌프질한게 아닌가 싶다.행여 그 구성원이 있다손 치더라도 실제 아나키스트들은 그닥 많지 않았을 것이다.추측컨대 나름대로 사회의식을 가지고 운동에 참여하지만 조직적 운동세력으로 편입하기 싫은 자유주의자들이 주를 이루었을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아나키스트들을 두가지 오해를 받고 있다.하나는 '이상주의적 폭력주의자' 라는 것(요즘도 이런 사람이 많은지는 모르겠으나) 또 하나는 '극단적 자유주의자'라는 것이다.특히 이런 오해에는 스스로 아나키스트라고 믿고 싶어하는 이도저도 아닌 자유주의자들이 다수 포함되어 오해를 가중시킨다.솔직히 이도 저도 아닌 자유주의자는 좋게 말하면 상식적 시민주의자이거나 비판적 기성체제 옹호자이다. 하지만 고전적 아나키즘이건 이 책에서 말하는 현대적 아나키즘이건 아나키즘의 혁명적인 기치와는 함께 갈 수 없다.

이 책<아나키즘 대안의 상상력>은 70년대 영국의 상황에 바탕을 둔 비교적 현대적 아나키즘 이야기이다.이 책은 아나키즘의 역사와 이론을 밝히지는 않는다.대신 전반적으로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에 바탕을 두고 사회 각 영역에서 아니키즘의 적용을 살펴본다.이를 통해 저자는 아나키즘이 우리사회에서 어떠한 식으로 조직되고 활용되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또  아나키즘이 도전하고 있는 영역과 목표로 삼고 있는 부분을 밝힘으로써 아나키즘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가치의 일면을 살필 수 있게 도와준다.저자가 밝히고 있는 아니키즘은 인간조직을 대하는 한 형태-즉 라이프스타일로써의 아나키즘-이다. 즉 나 자신의 자율성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기존 시스템에 대해 도전해야하고 DIY해야 하고 연대해야 한다는 것이다.이것이 인간성의 회복과 행복한 삶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아나키즘은 기본적으로 반국가주의,반자본주의,반권위주의를 모토로한다. 아나키즘에서 국가는 최고의 악마이다. 대개의 아나키즘 이론가에게 공통으로 파악되는 것이 국가의 해체이다.국가를 위해 목숨 바치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교육받았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한발을 양보해도 '미워도 우리 나라 아니인가.' 지난 광복절, 좌우파(?) 대규모 시위에서도 양쪽이 전부 대형 태극기를 휘두르며 우국충정을 불사르는데 이 싸가지없는(?) 아나키즘은 국가를 없애잖다.이러니 아니키즘이 미움을 받을 수 밖에 ...국가가 아니면 도대체 워쩌자는 것인가?  저자를 비롯한 아나키스트들은 지역공동체의 네트워크를 주장한다.책말미에 인용된 '피라미드보다 네트워크를' 이란 말은 아나키즘이 주장하는 반권위주의와 프르동의 동맹개념에 대한 좋은 비유이다.어쨋든 이 책에서는 스위스의 자치주들의 연대를 예로 들며 어렵기는 하지만 자치연대가 불가능한 상상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자치 연대를 위한 가장 중요한 관건은 자발적 질서이다.저자가 예를 드는 것은 60년대의 유럽의 사회운동이다.반권위주의적이면서도 자발적인 연대가 있었던 그 기간이 네트워크의 가능성과 조직의 자율성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킨다고 말한다.

저자가 아나키즘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 눈을 돌리는 분야는 도시,교육,가족,복지이다.각 상황마다 진행역사가 다르겠지만 단순화 시켜보자면 정부를 중심으로한 중앙집권형 계획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도시계획이라는 것은 도시빈민을 도시의 바깥으로 몰아내어 도시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이다.제도 교육이란것 역시 체제의 순응적인 과목과 교육방식을 통해 제도의 영속화를 추진하는 것이다.결국 저자는 공교육의 폐지를 주장한다.이점은 70년대의 영국상황과 현재의 한국의 왜곡된 사교육시장을 감안하다면 금방 와닿지는 않을 것이다. 좀 더 원론적인 이해가 오히려 간섭효과를 줄여준다.복지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인데 격리라는 형식을 통해 비인간화만을 자초하고 있다는 것이다.이 모든 것에 대한 답 역시 분권과 자율화,공동체의 연대로 드러난다.저자는 시스템의 문제점을 헤집고 들어간 아나키스트적 대안에 대한 구체적 실험과 예를 들어 독자의 시각 교정을 유도한다.하지만 저자 역시 아나키즘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구체적 답을 제시하진 못한다.몇번쯤은 반대자들의 문제제기를 들먹이지만 부수적인 예를 들어 질문을 피해간다.사실 이 책에서 언급된 몇번의 문제제기는 아나키즘의 고전적인 논쟁에 해당한다.

흔히들 말하는 아나키즘과 볼세비키의 논쟁은 책을 보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국가에 대한 맑스주의자와 아나키즘의 시각차,생산과 분배문제에 있어서 대규모의 생산양식하에서 자급자족적 아나키즘의 문제점,인간성향에 대한 규정문제,연대조직내의 권위화 등등...

아나키즘이 분명히 근대국가의 여러제반 문제에 대한 돌파구로써 상상력을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다.그리고 위대한 이상주의의 깃발 아래서 인간의 삶을 개선하려는 방향성 역시 옳다고 본다.하지만 의문이 끊임없이 떠오른다.물론 머릿속으로 또는 글장난으로 거대한 사회주의 개혁을 하는 것보다 -어차피 그것도 요원하긴 마찬가지다- 지금이라도 작은 공동체에 힘을 싣는게 훨씬 실천적이다.하지만 목표는 너무 멀고 실천은 과거의 태도에 대한 절연을 전제로 한다면 대중성을 확보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을 수 밖에 없다.결국 아나키즘은 영원한 소수자이고 끊이지 않는 비판의 샘물이고 마르지 않는 이상주의의 보고가 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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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02-15 16:18   좋아요 0 | URL
추천합니다. 좋은 책이 나와 있었네요. 책 구입하게 되면 땡스 투도 함께 가도록 하겠습니다.

burningham 2007-04-08 17:24   좋아요 0 | URL
좋은 리뷰네요 담아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