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효숙 헌재재판관 "남성 성욕 해소책 마련돼야"

[오마이뉴스 2004-10-19 15:42]
[오마이뉴스 우먼타임스 기자]
▲ 전효숙 헌재 재판관
ⓒ2004 우먼타임스
[황훈영 기자] 헌정사상 첫 여성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주목을 받아온 전효숙 재판관이 지난 15일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성매매방지법와 관련, "과거 윤락행위등방지법에 비해 여성의 입장에서 볼 때 한층 진보된 법률"이라고 평가하면서도 "그러나 남성의 성 욕구 해소가 문제될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책이 고민되어야 한다"고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전 재판관은 이날 한국여성정치연맹이 주최한 47차 오찬 포럼에서 강연을 마친 뒤 성매매방지법 시행의 실효성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또 "남성의 성적 욕구는 여성과 비교할 때 신체적인 구조에 있어서 차별성이 있기 때문에 남성의 성욕 해소와 관련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대책 마련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고민 중"이라고 덧붙였다.

전 재판관의 이같은 발언은 "남성의 성욕 해소 기회 박탈" 혹은 "공창제 인정" 등의 최근 성매매방지법 시행 이후 불고 있는 역풍과 관련해 주목을 끌고 있다.

전 재판관은 또 이에 앞서 열린 '성인지적 관점에서 본 한국법률'이란 주제 강연에서도 "우리 나라는 성별, 종교, 신분 등의 차별을 기준으로 평등권 위배 여부를 심사하는데, 이때 비례성 원칙을 적용한다"면서 "그러나 성별에 따른 모든 차별이 평등권을 위반한다고 볼 수는 없다. 신체적, 본질적 차이는 차별이 아니기 때문에 인정되어야한다"고 말했다.

전 재판관은 또 "성과 관련된 사건은 재판관의 성별에 따라 사건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고 지적한 뒤 "여성이 남성의 신체나 심리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듯이 남성도 여성의 신체 구조나 감정 변화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양성평등적 판결이 나오려면 어렸을 때부터 양성평등교육이 이뤄져야 하고, 여성 법관의 진출이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성고용할당제나 여성비례대표 50% 할당제의 남녀평등권 위배 여부와 관련, "여성고용할당제나 여성비례대표 50% 할당제는 과거 사회적 환경 속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행해졌던 점에 비춰볼 때 평등권에 위배된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97년 동성동본금혼에 대한 헌법 불합치 결정, 제대군인에 대한 가산점 폐지 등은 소수자의 평등권을 인정하는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  도대체 이 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 이해가 안갑니다.남성은 성적 욕망을 억제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풀 방법을 정부차원에서 만들어 줘야 된다는 겁니까?  마치 일제시대 ..군인들의 성욕은 어쩔수 없고 또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성노예"(일명 종군위안부) 가 있어야 된다는 아이들 논리와 똑같군요.헌법재판관은 탄핵심판 할 수 없나????  요즘 마치 공창제가 성매매방지법 적용에 대한 현실적 대안인 양 떠오르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요?  90년대 스웨덴은 과감한 단속과 함께 공창제를 폐지했다고 합니다. 일견 그럴싸한 공창제에 대해 생각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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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10-19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그런거였군요. 저 분의 말씀대로라면 남자들은 성적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짐승적 존재인가 봐요. 이거야 말로 성차별 아닌가요?..님의 말씀처럼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남성분들의 위험(?)을 제어 시키려면 위안부를 두어야 한단 말인지...성질 납니다. 정말 헌재 재판관은 누가 탄핵하죠?

마태우스 2004-10-20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파란여우님과 같은 맥락으로 읽었어요. 남성은 성욕을 억제 못하는 짐승이니, 거세해야 겠군요...................
 

③ 20세기 피아니즘의 흐름

정말로 하늘의 별만큼이나 그 숫자가 많은 20세기의 피아니스트들을 모두 살펴보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악기를 가지고 무대에 오르지 않는(몇 명의 예외는 있지만) 거의 유일한 연주자들이며,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더욱 많은 해석의 갈래와 개성, 그리고 무수한 카리스마들이 생겨나는 분야라고 하겠다.

우선 맞닥뜨리는 것이 분류의 문제이다. 각자만의 고유한 개성과 음악적 기질을 띠고 있는 이들을 무슨 수로 헤아려 나눌 것인가. 21세기가 바로 앞에 다가온 이 시점에서 드라마틱한 피아니스트, 서정적인 피아니스트, 혹은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와 아카데믹한 피아니스트 등의 나눔에 공감하는 이가 얼마나 될지도 의문이다. 궁여지책(?)으로 필자는 사람과 사람을 구분하는 가장 일반적인 원칙, 즉 민족과 국가라는 기준으로 20세기를 마음껏 ‘두들겼던’ 대표적 피아니스트들을 일별해 보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1950년 이전에 태어난 피아니스트만을 언급했으며, 선정된 피아니스트는 가급적 제외시키려 노력했다.


19세기 전통의 계승자들

지금까지도 역사상 최고의 피아니스트라고 일컬어지던 프란츠 리스트에서부터 현대 피아니스트들의 기원을 찾아야 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리스트는 잘 알려진 대로 명교사 카를 체르니를 사사했는데, 체르니의 또 다른 제자 테오도르 레셰티츠키는 우리에게 그다지 친숙하지 않다. 레셰티츠키는 폴란드 출신으로, 19세기 초까지 통용되던 다소 딱딱하고 경직된 손모양과 손가락에 부담을 많이 주던 주법을 버리고 릴랙스된 팔과 전신을 이용하는 소위 ‘자연주법’을 개창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전에 비해 확연히 무거워진 피아노의 액션이나, 텍스처의 확대에 따라 요구되는 오케스트라적인 음향을 위해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하겠다. 물론 리스트도 그의 연주 모습을 묘사한 삽화들에서 알 수 있듯이 의자와 악기 사이를 넓게 벌려 움직이기에 충분한 공간을 만들고, 팔을 쭉 편 상태에서 상체의 무게를 이용하여 연주하는 ‘그랜드 스타일’의 자연주법을 몸에 익히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우선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반까지를 가로질러 살았던 리스트의 제자들을 살펴보면, 대표적인 인물들로 한스 폰 뷜로·카를 타우지히·에밀 폰 자우어·모리츠 로젠탈·오이겐 달베르트·프레데릭 라몬트·조피 멘터·알렉산드르 질로티·아르투르 프리드하임·콘라트 안조르게 등을 들 수 있다. 이중 자우어·로젠탈·달베르트·라몬트·프리드하임 등은 20세기의 피아니스트로서 필수라고 할 만한 레코드 녹음(일부는 피아노 롤)을 남겼으며, 지극히 개성적이나 리스트의 학생이었다는 이미지와 다르게 의외로 단정한 표정을 띤 연주를 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특히 지금도 구할 수 있는 레코드로 에밀 폰 자우어가 만년에 녹음한 리스트의 2개의 협주곡은 느긋한 템포로 결코 테크닉적이지 않은 연주를 들려주고 있는데, 동시에 귀족적이고 장려한 분위기를 연출해내는 훌륭한 솜씨여서 역시 리스트의 수제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한편 레셰티츠키의 제자들은 리스트 계열보다 더욱 화려하고 다양한 음악성을 자랑했는데, 스승 스스로가 표현의 자유로움과 자발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그들의 연주는 저마다 극히 유일무이한 개성을 지니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인물로 역시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를 들 수 있겠는데, 거장적이고 루바토를 많이 쓰는 다소 옛스런 스타일의 피아니스트였다고 전해진다. 또 파데레프스키는 역사상 최대의 인기를 누렸던 ‘스타’로 알려져 있는데, 후에 폴란드 공화국 초대 대통령을 지낼 만큼 강력한 카리스마와 무대에서의 독특한 흡인력이 그 비결이었다고 하겠다. 이밖에도 오시프 가브릴로비치·마크 함부르크·이그나츠 프리드만·엘리 나이·아르투르 슈나벨·파울 비트겐슈타인·벤노 모이셰비치·미에치슬라프 호르초프스키·알레산더 브라일로프스키 등이 레셰티츠키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20세기 초의 대가들인 이들 모두가 전혀 다른 강력한 설득력을 가진 스타일리스트였다는 데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이들 중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던 슈나벨이나, 실내악 연주에 주력했던 호르초프스키 정도가 19세기풍의 주관적이고 로맨틱한 비르투오시즘을 추구한 레셰티츠키 악파에서 다소 벗어난 이색적인 존재들이었다고 하겠다.


새롭게 선 20세기 피아니즘의 전통

아마도 20세기를 누빈 피아니스트들의 본격적인 시작은 쇼팽의 나라 폴란드부터 살펴봐야 그 순서가 맞을 것이다. 앞서 말한 파데레프스키나 프리드만 외에도 파데레프스키를 사사한 쇼팽의 대가 비톨드 말쿠진스키, 그와 동시대의 할리나 체르니 스테판스카 등과 한 세대 전의 명인 요제프 호프만과 레오폴드 고도프스키를 잊을 수 없다. 단정한 조형과 상쾌한 매력을 지닌 음악성으로 높이 평가되었던 요제프 호프만의 얼마 남지 않은 레코드를 들어보면, 이 피아니스트가 얼마나 예민한 귀와 손가락을 가졌는지 실감하게 된다. 또 그의 친구였던 고도프스키는 쇼팽의 작품을 포함한 각종 편곡의 명수로도 유명한데, 섬세하면서도 세련된 서정미와 웅대한 효과의 테크닉으로 독자적인 피아니즘을 구축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우리 시대 마지막 스타일리스트 슈라 체르카스키도 원래 우크라이나 태생이나, 요제프 호프만을 사사했으므로 폴란드 계열에 포함시켜도 좋을 듯하다.

호프만이나 고도프스키와 라이벌 관계를 이루었던 러시아의 거장이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였다. 그는 대선배격인 안톤 루빈슈타인의 전통을 이어받아 스크랴빈 등과 함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로 활약했다. 흔히 러시아적이라고 하면 선이 굵고 큰 스케일의 음악만을 떠올리게 되지만 라흐마니노프의 연주는 거기에 섬세한 뉘앙스와 작품에의 뛰어난 통찰력을 수반한 짙은 표현력이 더해진 것이었다. 이런 전통은 후에도 이어져 미국의 줄리어드에서 활약한 조셉과 로지나 레빈 부부, 러시아에서 많은 피아니스트들을 길러낸 알렉산드르 골덴바이저·겐리히 네이가우스·시몬 바레르·레프 오보린, 여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였던 타티아나 니콜라예바·라자르 베르만·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등이 그 자랑스러운 계승자들이라고 하겠다. 이중 시몬 바레르는 오데사 출신으로 호로비츠보다 여덟 살 위인데, 한때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불렸으나 비교적 일찍 숨을 거둔 대가이다. 명교사 펠릭스 블루멘펠트를 사사했으며, 글라주노프는 그를 가리켜 “오른손은 리스트, 왼손은 루빈슈타인”이라 평했다고 한다. 전해져 오는 레코드는 대부분 1930년대의 것으로, 확실히 기교적인 면에서는 호로비츠나 길렐스를 능가하며, 명쾌하고 현대적인 악상도 기억에 남는다. 아울러 바레르는 호로비츠와 더불어 20세기 초 미대륙에서 최초로 성공을 거둔 피아니스트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서구로 눈을 돌리면 전통이라는 면에서 우선 주목해야 할 나라는 프랑스다. 19세기 말 파리 음악원에서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을 배출한 루이 디에메의 공적은 매우 크다고 하겠으며, 그후에 마르그리트 롱·알프레도 코르토·라자르 레비·이브 나트·로베르 카자드쉬·블라도 페를르뮈테르·상송 프랑수아·에릭 하이드섹 등이 프랑스적 에스프리를 뽐낸 바 있다. 이중 롱 여사의 교육자로서의 활동과 나트·하이드섹(프랑스인으로는 다소 이색적인)의 베토벤 연구 등은 금세기를 마감하면서 다시금 짚어봐야 할 대목이다. 또한 프랑스 계열로 넣어야 할 인물에 스페인계이며, 풀랑크의 친구이기도 한 리카르도 비니예스와 루마니아 출신의 클라라 하스킬·디누 리파티를 빼놓을 수 없다. 현재 원숙기에 들어선 라두 루푸도 루마니아 태생인데, 후에 모스크바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에서는 박하우스·기제킹·켐프와 함께 에트빈 피셔를 언급해야겠다. 원래 스위스인으로 라이프치히 악파의 거두 마르틴 크라우제를 사사하여 독일 음악의 정통을 이어받았다. 그의 바흐와 베토벤 연주는 현대 독일 악파의 하나의 규범이 되고 있으며, 레코드를 통해 들을 수 있는 그의 연주는 고귀하고 세련된 매너 위에 강한 생명력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나타난 피아니스트로는 콘라트 한젠·헬무트 롤로프·한스 리히터·베르너 하스 등이 있는데, 이들의 전통을 가장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피아니스트로는 현재 크리스토프 에셴바흐가 그 대표격이라고 할 만하다.

오스트리아는 슈나벨 이후 다소 피아니스트의 공백이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나 프리드리히 뷔러·브루노 자이들호퍼, 그리고 교육자로도 유명한 요제프 디힐러 등이 연이어 나타났고, 그후 유명한 빈의 삼총사들이 아직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낙천적인 빈의 전통은 21세기에도 결코 약해지지 않을 전망이다.


신대륙에서 꽃핀 열정과 환희

이탈리아를 포함한 라틴계 피아니스트들의 활동 역시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며 더욱 거세지고 있다. 우선 라틴계를 살펴보면 오이겐 달베르트의 부인이었던 테레사 카레뇨 정도가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오래된 라틴계 피아니스트이며, 남미 출신들이 거의 나타나지 않던 금세기 초 칠레에서 온 클라우디오 아라우가 유럽에서 성장하여 성공했다. 그후 알리시아 데 라로차·브루노 레오나르도 겔버·마르타 아르헤리치·다니엘 바렌보임 등이 한 세대 후에 등장했고, 이들의 활약상은 여기서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이다. 이탈리아는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의 존재가 너무 커서 양적으로 조금 모자란 듯한 느낌이지만, 만능 피아니스트인 알도 치콜리니가 건재하고, 현대적인 피아니스트의 전형인 마우리치오 폴리니가 바야흐로 대가의 반열에 들어서고 있어서 든든하다.

이웃나라 프랑스에 비해 화려한 전통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영국의 피아니스트들은 대부분 순수하고 아카데믹한 연주 양식을 고수하고 있어서 호감이 간다. 한때 피아노의 여왕 자리를 차지했던 마이라 헤스·커트너 솔로몬·클리포드 커즌, 그리고 아깝게 일찍 세상을 떠난 대형 피아니스트 존 옥돈 등이 대표격이다. 이중 솔로몬은 20세기 초·중반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서정미의 터치와 강철과 같은 테크닉으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은 바 있다. 또 요즘 들어 그 활동이 뜸한 대기만성형의 피아니스트 피터 도노호 역시 발군의 테크닉과 작품을 꿰뚫는 혜안으로 매니어들의 주목 대상이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미국이다. 미국의 피아노계는 본의 아니게 유럽세에 잠식당한 부분이 있었고, 그 결과 여러 면(특히 우리나라에 소개된 음반)에서 과소평가돼 온 경향이 없지 않았다. 우선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떠오른 피아니스트로는 요절한 윌리엄 카펠, 그리고 유진 리스트·유진 이스토민·얼 와일드 등이 있다. 동 시대의 줄리어스 카첸은 유럽으로 건너가 브람스 등의 해석에 이름을 날렸으나 역시 43세로 사망했다. 그후 레너드 페나리오·바이런 재니스·아베이 시몬 등이 기교파로 명성을 떨쳤고, 이제는 선생님으로 더 유명한 게리 그라프만과 레온 플라이셔 등도 이전 세대를 사로잡았던 대가들이다. 또 텍사스의 영웅 반 클라이번을 위시하여 존 브라우닝·어거스틴 아니에바스·미샤 디히터·앙드레 와츠 등도 여전하다. 이들의 영광은 다양한 레퍼토리의 피터 제르킨이나, 갈수록 깊어지는 예술성을 자랑하고 있는 머레이 페라이어 등에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다음 세기 미 대륙에서 울려퍼질 피아노 소리 역시 더욱 더 흥미로워질것이 분명하다.

글·박정준 기자 / 김주영 피아니스트

-- 자료 ; 월간 <객석> 98년 5월호 특집 기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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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알프레드 브렌델(1931∼ )

브렌델이야말로 20세기의 피아니스트들 가운데서 가장 특이한 존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유난히 개성이 강하고, 신경질적이고, 까다로워서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서 그렇다. 언제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게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20세기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의 자리까지 올라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 못한다. 그는 어떻게 보면 공기와 같이 원래부터 ‘그저 그냥 있는’ 존재같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다른 연주가들의 떠들썩함에 비한다면 말이다.

그의 연주도 그렇다. 다른 연주가들처럼 자신의 개성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무색 무미 무취의 연주라 할 수 있다. 다른 요소들을 다 배제하고 ‘남은 것은 그저 음악’인 셈이다. 무엇이 그의 연주를 그렇게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그는 작품의 전체적인 구도를 읽어내는 탁월한 혜안을 가졌다. 따라서 다른 요소들을 많이 집어넣지 않고도 그저 구도를 잡아나가는 것에 의해서만 작품의 의미를 청중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표현해 내는 슈베르트와 베토벤은 다른 그 누구의 연주보다 강한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그렇다고 그가 전혀 노력 없이 직관에 의해서만 그렇게 된 ‘신적인 천재’라는 얘기는 아니다. 브렌델 자신이 고백하길 자신은 절대로 신동이 아니었다 한다. 과거 체코 땅이었던 모라비아에서 태어나 17세 되던 1948년 첫 연주회를 열었다. 하지만 그리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에트빈 피셔라는 위대한 피아니스트를 스승으로 둔 것만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는 독일-오스트리아계의 정통 피아니스트가 될 자질을 전부 그에게서 물려받았다. 1949년 부조니 콩쿠르에 입상한 경력은 그가 기교적인 측면에서 다른 피아니스트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증명할 뿐이다.

빈에 거주하다 런던으로 옮겨 소리 소문 없이, 하지만 알차고 꾸준히 활동을 전개해온 브렌델. 그는 계속해서 연구하며 저술활동도 펼치는 학구적인 면모도 보였다. 그의 성실성만은 연주에 아주 쉽게 반영되는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꾸준한 레코딩을 펼쳐왔다.

이미 그가 필립스에 남긴 녹음들은 상당수가 된다. 베토벤의 소나타와 슈베르트의 소나타가 역시 대표적인 레퍼토리.


7. 아르투르 베네데티 미켈란젤리(1920∼1995)

기인적인 생활을 하다 지난 95년, 마침내 우리 곁을 떠난 또 한 사람의 괴팍한 피아니스트 미켈란젤리. 그는 20세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1939년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할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코르토로부터 ‘리스트의 재래’라 불릴 정도로 젊은 시절부터 테크닉과 카리스마를 자랑했던 그는 다재다능하긴 했으나 좀처럼 굽힐 줄 모르는 곧은 성격으로 좌충우돌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나서는 생각보다 여리고 섬세한 성격으로 결국 자신이 상처를 받는 결과를 낳았다.

마음에 드는 제자라면 돈 한 푼 안 받고 오히려 생활을 돌봐줘가며 데리고 있던 진정한 예술가적 기질의 소유자. 그도 역시 자신의 피아노를 연주에 끌고 다녔고, 별별 기행으로 가는 곳마다 화제를 뿌리고 다녔다. 그의 행적을 보면 ‘저게 과연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희한하기 그지없다. 카레이서이자, 의사이기도 했던, 마치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시한폭탄 같았던 그다.

제2차 세계대전에 공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독일군에 생포된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기도 했다. 음악가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경력 아닌 경력’이다. 전쟁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세계무대에서 각광받기 시작한 그는 조금만 기분이 좋지 않아도 연주회를 취소시키기 일쑤였다. 그리고 자신이 계약했던 음반사의 파산으로 경제적 책임을 지게 되자 조국 이탈리아를 가차없이 떠났고, 이후 이탈리아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제대로 된 소리를 재생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레코딩은 극도로 기피했던 그에게 내릴 수 있는 판결은 ‘완벽주의자이자 천재’밖에는 없을 것이다. 미켈란젤리는 가정용도 아닌 콘서트용 피아노를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할 정도로 피아노의 물리적인 특성을 속속들이 잘알고 있었다. 또 피아노를 자신의 몸처럼 다루며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믿기지 않는 제어능력으로 초절적인 기교를 자아냈고, 페달링에도 통달해 있어 자신이 원하는 음향을 마음대로 빚어냈던 마술사이기도 했다. 역시 그런 특성에 딱 들어맞는 레퍼토리가 그가 남긴 가장 훌륭한 음반이다.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로 발매된 드뷔시의 전주곡 1집과 2집, 영상 1, 2집과 ‘어린이 차지’가 그것. 이 음반을 들으면 드뷔시를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사람도 드뷔시가 미켈란젤리의 몸을 빌려 그리는 ‘인상주의적인 음화(音畵)’의 마력에 빨려들고 만다. TV 방송용으로 녹음된 줄리니 지휘의 빈 심포니와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음반(DG) 중에 3번과, 5번 등도 유명하다.


8. 마우리치오 폴리니(1942∼ )

미켈란젤리에 이어 폴리니와 아르헤리치가 선정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폴리니는 미켈란젤리에게 고작 6개월간 배웠으나 가장 큰 영향을 받은 피아니스트이자 가장 존경하는 예술가로 꼽는다. 아르헤리치도 미켈란젤리에게서 배운 적이 있다. 미켈란젤리는 세상을 떠났고, 폴리니와 아르헤리치도 나름대로의 예술세계를 찾아 비상하고 있는 중이지만, 이들이 후대에 하나의 유파로 묶여 분류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지금 보기엔 이들의 공통점은 예민함밖에는 없어 보이지만. 예술이라는 마법의 세계에서 스승과 제자의 얘기는 신비로움을 더하는 면이 있다.

폴리니라는 이름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1960년 쇼팽 콩쿠르에서의 심사위원 만장일치 우승이라는 경력과 함께 거기에 딸린 유명한 일화들을 떠올릴 것이다. 당시 심사위원장이던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이 ‘우리 심사위원들 중에 과연 누가 폴리니만큼 연주할 수 있겠는가?’ 하며 감탄했다는 것과, 협주곡이 끝난 후 한 심사위원이 ‘그는 음표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며 한숨을 쉬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이어지는 또 하나의 유명한 일화는 폴리니가 콩쿠르 우승 후 곧 바로 잠적했다가 약 10년이 흐른 후에 무대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 사이 자신의 부족함을 보충하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다는 일설도 있지만, 이는 분명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폴리니는 쇼팽 콩쿠르 우승 후 약 1년간 꽉찬 일정으로 순회 연주회를 가졌고, 다시 1년간은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5년간 많지는 않았지만 규칙적으로 연주회를 열었고, 1968년부터 본격적으로 연주회 수를 늘려가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르헤리치와의 묘한 인연을 갖고 있다. 그보다 한 해 먼저 태어난 아르헤리치가 1957년 제네바 콩쿠르에서 우승할 당시 폴리니는 2위를 차지했다. 다음해 폴리니는 제네바 콩쿠르에 재차 도전해 1위 없는 2위를 차지했다. 쇼팽 콩쿠르에서의 우승은 폴리니가 먼저 따냈다. 다음회인 1965년의 쇼팽 콩쿠르에서는 아르헤리치가 우승했다. 이는 두사람이 그 세대를 대표하는 걸출한 연주가였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연주 스타일을 한마디로 잘 깎여진 다이아몬드에 비교하기도 한다. 그만큼 완벽하게 다듬어진 치밀함과 빈틈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 김용배는 그의 연주에 대해 ‘기교가 기교로 느껴지지 않는다. 피나는 노력이 전혀 없이 얻어진 듯한, 즉 선천적으로 그저 타고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 엄청난 기교가 그의 몸에 융해되어 있었다’고 평했다.

그런 폴리니가 최근 들어 많이 유해졌다는 평가가 많이 나오고 있다. 전에는 맑고 투명하기 그지없어 순수한 얼음같이 차가웠던 연주를 들려주던 그가 천부적 기교의 바탕 위에 인간적인 면모를 쌓아가는 법을 터득했다는 얘기다.

그의 음반으로 손꼽히는 것은 역시 쇼팽의 녹음들이다. 하지만 그의 레코딩에서의 관심도 워낙 넓은 편이어서 현대곡에서 그의 진정한 면모를 찾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9. 마르타 아르헤리치 (1941∼ )

아르헤리치는 94년, 기돈 크레머와의 내한 연주회에서 피아노 현을 끊어뜨리는 ‘시범 아닌 시범’으로 가공할 만한 파워와 타건의 집중력을 한국 팬들에게 확인시켜준 바 있다. 그는 20세기 후반을 풍미한 명 피아니스트임에 틀림없다. 그를 특별히 ‘여류’라는 꼬리표를 달아 따로 분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의 연주는 남녀를 통틀어도 스케일이 크고 힘차며 역동적인 편에 속한다. 그렇다고 섬세한 시정의 표현에 약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특히 아르헤리치를 들어 제멋대로이고 변덕이 심하며 신경질적인 피아니스트라 할 수도 없다. 그녀가 여성이라 그렇다는 얘기는 아예 입 밖으로 내지 않는 편이 좋다. 남성 피아니스트들은 더욱 심하지 않은가! 물론 그가 연주회 취소를 밥먹듯 해오긴 했지만. 최근에는 실내악 연주가 많은 편이라 훨씬 덜하다는 얘기다. 그는 자신이 신뢰하는 파트너와의 연주는 취소하는 경우가 드물다.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인 1949년에 데뷔했으니 그의 연주인생도 올해로 반백년인 셈이다. 16세 때인 1957년에는 3주 간격으로 열린 부조니 콩쿠르와 제네바 콩쿠르에서 연속 우승하면서 스타덤에 오른다. 하지만 그는 그 때문에 혹사당하기 시작했다. 그후 해마다 150회나 되는 협연은 그를 신경쇠약 직전으로 몰고 갔고 급기야 일단 후퇴해서 휴식기에 들어간다.

1961년부터 그는 미켈란젤리에게 배웠다. 너무나 열정적이고 외향적인 그녀의 스타일이 마음에 안 들어서일까? 아니면 정말 무리한 연주로 감각을 잃은 탓일까? 미켈란젤리는 그녀에게 ‘피아노를 그만두라’는 선고를 내렸다. 어쨌든 그 처방은 들어맞아 그녀는 재차 휴식기를 거친 뒤 1965년의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화려하게 재기했다.

그리고 한동안 뒤도 안 돌아보고 질주하던 아르헤리치는 83년에야 멈춰섰다. 그리고 그녀는 실내악으로 연주의 초점을 돌렸다. 마이스키, 기돈 크레머, 그리고 마음맞는 음악친구들과의 공동작업이 역시 성공을 거두며 나타났다.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소나타(DG)는 그중 대표적인 명반으로 손꼽힌다.

그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녹음은 모두 3종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최근의 것인 아바도 지휘의 베를린 필과의 것(DG, 1994년)이 좋으냐 키릴 콘드라신 지휘의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의 것 (필립스, 1980년)이 좋으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역시 아바도와의 프로코피예프 협주곡 3번과 라벨 협주곡(DG)이나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와 ‘소나티네’(DG)도 유명하다.


10. 글렌 굴드(1932∼1982)

굴드에 대해서는 의견이 크게 엇갈렸다. 너무 주관적이고 독특한 스타일, 그리고 한정된 레퍼토리라는 점에서 그를 20세기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 보기 힘들다는 의견이 있었는가 하면, 그래도 그가 20세기 후반의 모든 음악인들에 미친 지대한 영향도 있고, 주관적이라 하더라도 피아노를 ‘너무나 잘 치는’ 연주가이므로 20세기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의 대열에 꼭 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굴드에 대해선 ‘신경쇠약 직전’이라고 표현하기가 오히려 어색하다. ‘신경쇠약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이토록 섬세하고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영혼이 또 있었을까. 그는 진정으로 미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영혼이 음악의 심오한 본질에까지 미쳤다’라고 다시 표현하면 어떨까.

그의 죽음은 어땠는가. 그는 너무 자주 신경증적인 ‘가짜 통증’을 호소했다. 그래서 정작 치명적인 ‘진짜 통증’이 왔을 때 의사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그는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 ‘거짓말쟁이 소년과 늑대’라기 보다 ‘가녀린 영혼과 죽음’에 가까운, 너무나 아까운 죽음이었다.

굴드가 그토록 기인처럼 보였던 이유도 이제는 너무나 명백하다. 그는 그야말로 진정한 예술가였고 순수한 사람이었다. 진정한 예술의 구현을 위해서 주변의 모든 조건들은 가장 적합한 상태로 준비되어 있어야 했지만 그 어느 것도 굴드의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학대하고 희생해 준비한 것으로 진정한 예술을 들려준 것이다.

그의 연주는 기계적인 정확성과 제어능력을 바탕으로 한 기교의 바탕 위에 섰다. 그리고 성부간의 우열이 없다. 바흐에서처럼 다른 곡들도 각 성부가 평등하게 대화하도록 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는지 모른다. 그에 따라 모차르트의 소나타 연주(소니)와 같은 결과를 빚어내기도 했다.

굴드의 최종 목표는 바흐가 항상 그랬듯이 푸가였다. 그의 음반을 말하자면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소니)만을 얘기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굴드의 바흐 연주는 모두 굴드가 자신을 희생해서 준비한 위대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예술의 구현을 위해 신경쇠약에 걸리는 사람들이 있는 한, 언제까지나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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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빛낸 10인의 피아니스트

1. 블라디미르 호로비츠(1904∼1989)

20세기의 대지휘자들은 ‘카리스마’라는 단어로 특징지어질 수 있었다. 20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들은 어떨까. 섬세, 예민, 선병질적, 신경질적, 신경과민, 까다로움, 변덕, 자존심, 만, 고집불통 등의 단어들이 유난히 쉽게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이는 19세기 낭만주의 예술가들이 보여준 특성들과 거의 고스란히 일치한다. 쇼팽과 리스트를 떠올리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호로비츠를 보라! 마치 느긋하고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인 듯 보이는 말년의 사진에 익숙해진 이들에게는 이런 말들이 이해되기 힘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까다로웠다!

호로비츠는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악기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유일한 연주가’라는 명제를 뒤집었다. ‘지휘자들마저 자신의 악기인 오케스트라를 대동하고 다니는데, 피아니스트는 왜 안되지?’라는 그의 순간적인 의문은 ‘점보 747을 타고 하늘을 나는 피아노’를 만들어냈다. 전속 요리사와 정수기도 연주회에 꼭 따라다녔다.

그렇지만 그의 연주를 듣는 사람들은 그 ‘까다로움’에 항상 감사해야 했다. 완벽한 테크닉과 무궁무진한 표현력을 바탕으로 철저히 주관에 입각해 빚어낸 호로비츠의 개성적인 피아니즘 역시 보통의 예민함과 보통의 감수성으로는 빚어지지 않는 위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 키에프에서 탄생할 당시 그의 이름은 블라디미르 고로비츠였다. 아버지는 기술자였고, 어머니와 누이는 피아니스트였으며 동생은 바이올린을 했다. 피아노도 처음에는 어머니에게서 배우기 시작했다. 안톤 루빈슈타인의 제자였던 또 하나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인 펠릭스 블루멘펠트에게서 배운 것이야말로 호로비츠를 러시아 피아니즘 전통의 적자이자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만든 시작이었다.

18세의 나이에 가진 데뷔 연주회의 성공으로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고, 1925년, 21세의 나이에 서유럽으로 건너가, 이듬해 함부르크에서 가진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대성공으로 명성을 확고히 했다. 28년, 뉴욕 필과 역시 차이코프스키 1번을 협연하며 이루어낸 카네기홀 데뷔 또한 그에게 성공을 안겼다.

이렇게 가는 곳마다 성공만 한 피아니스트가 또 있을까. 33년, 토스카니니의 뉴욕 필과의 베토벤 시리즈는 성공과 함께 토스카니니의 딸 완다를 그의 품에 안겼다. ‘토스카니니의 사위’는 또 하나의 막강한 권력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36년, 불과 32세의 나이로 그는 은퇴를 선언했다. 1939년 무대에 복귀한 그는 20년이 채 흐르기 전인 53년, 다시 은퇴한다. 왜 이렇게 자주 은퇴와 복귀를 거듭한 것일까. 역시 그의 까다로운 성품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1965년, 지금은 ‘역사적 귀환’이라 기억되는 연주회를 카네기 홀에서 열었다. 이후 그가 남긴 역사적 연주회는 78년 백악관에서의 ‘미국 데뷔 50주년’ 연주회, 86년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의 ‘61년 만의 귀향 연주회’ 87년 베를린에서의 ‘최후의 연주회’ 등이다. 89년 심장발작으로 사망, 밀라노에 있는 토스카니니의 무덤 옆에 묻혔다.

150여 장에 이르는 방대한 음반을 남긴 호로비츠. 그중에서 ‘이것이 그의 명반이다’라고 꼬집어 내기 무척 힘들다. RCA 레이블의 호로비츠 전집은 그의 예술혼을 엿보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밖에도 ‘역사적 귀환’ 실황녹음(소니), 최만년의 도이치 그라모폰의 소품 위주의 녹음 등도 새겨들을 만한 음반들이다.


2.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1915∼1997)

리히테르의 연주에서도 간혹 섬세함과 신경질적인 면이 내비치기는 한다. 만년에 이르러 그의 연주가 느려지고 무뎌졌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내면의 사유에 충실해지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를 들어 까다롭다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완벽한 기교와 강력한 연주력이 언뜻 그런 느낌을 줄 수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작곡가와 청중들 사이의 영적 교류를 가능케 하는 음악의 구도자 같은 이미지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굴드는 ‘리스트’ 타입과 ‘리히테르’ 타입의 두 부류로 연주가를 분류한 적이 있다. 단순히 말해 이는 악마적인 기교파냐 진중한 사유파냐, 또는 외향적이냐 내향적이냐 하는 분류였다. 다시 말해 리히테르는 중용과 절제를 통해 음악의 본질을 꿰뚫는 연주를 들려준 모범적인 연주가의 전형이라는 얘기다.

역시 리스트가 시작한 ‘암보로 연주하기’의 관행에 대해 철저히 반대했던 이가 리히테르였다. 그래서 그의 연주회에는 피아노 악보대에 항상 악보가 놓여 있었고, 그의 옆자리에는 그것을 넘기는 보조자가 있었다. 그리고 청중들이 연주가의 모습에 현혹되어 음악을 파악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무대 위의 조명을 최소화했다. 따라서 피아노 바로 위에 작은 조명을 켜놓고 연주하던 리히테르였다. 이도 또한 리스트가 시작한 ‘왕자 연주가’의 전통을 거부한 것이었다. 최근의 많은 연주가들은 그의 이러한 합리적인 태도에 대해 존경과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가 겪은 가족사의 질곡도 만만찮다. 그 질곡은 그의 아버지의 비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폴란드계 독일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빈 음악원에서 공부한 피아니스트였다. 하지만 결투로써 법을 어기고 도망자의 몸으로 우크라이나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제자였던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리히테르를 낳았다. 그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중에 독일계라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어 피살당한다. 리히테르가 불과 26세 되던 1941년의 일이었다. 리히테르는 이 당시 모스크바 음악원에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와의 연락도 끊겼다. 전쟁이 끝난 후 소련 당국은 리히테르에게 어머니가 사망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녀는 후퇴하는 독일군을 따라 독일로 망명했던 것이고, 우연히 라디오를 통해 리히테르의 연주를 들은 어머니가 그에게 연락해 이들은 서로의 생존을 확인했다. 리히테르가 철의 장막 밖으로 나온 1960년에야 20여년 만의 모자상봉이 이루어졌고, 3년 뒤 그의 어머니는 숨을 거두었다.

피아니스트로서 리히테르를 ‘대기만성형’이라 보는 시각도 있는데,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22세의 나이에 네이가우스의 문하에 들어가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어린시절의 그의 천재성도 만만찮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오래도록 네이가우스의 문하에 남아 있었던 것은 이 위대한 스승이 그의 큰 그릇을 알아보고 유달리 아꼈기 때문이다. 실제로 네이가우스는 프로코피예프에게 리히테르를 소개했고, 리히테르는 1940년, 25세의 나이로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소나타 6번을 초연했다. 이 어려운 소나타의 초연을 선뜻 맡긴 것은 리히테르가 당시 이미 완성된 피아니스트였다는 점을 증명한다.

그가 늦게 시작했다는 시각은 첫째 서너 살만 되면 피아노 앞에 앉히는 20세기의 잘못된 음악교육관행 때문에, 둘째 그가 40이 넘도록 철의 장막 뒤에 가려진 채 숨은 공력을 쌓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가 서방세계에 알려진 순간부터 그야말로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듯한 파장을 퍼뜨린 것이 이를 증명한다.

말년에 필립스 레이블을 통해 발표한 리히테르 에디션과 최근 BMG를 통해 국내에도 소개된 멜로디아의 리히테르 에디션(12CD) 등이 그의 연주예술을 이해하는 지름길을 제공한다.


3. 아르투르 루빈슈타인(1887∼1982)

'그의 경이적인 신통력에 감탄하고, 시(詩)를 사는 생활인임을 실감했다.’ 루빈슈타인의 1966년의 내한 연주에 대해 이강숙이 남겼던 감탄어린 평이다. 당시 루빈슈타인은 79세였다(그의 생년이 1886년이라는 설과 1889년이라는 설, 그리고 1890년이라는 설도 있으나 여기서는 1887년이라는 가장 유력한 설을 기준으로 잡았다). 어쨌든 그로부터 10년 뒤인 1979년에야 비로소 그는 연주무대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그리고 90세를 넘기며 장수했다.

낭만주의 시대의 끝자락에 걸쳐 있는 그를 흔히 ‘마지막 낭만주의자’라고 칭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80세가 넘어서의 귀족같이 여유로운 생활에서 낭만주의의 이미지를 끌어내서는 안될 것이다. 폴란드에서 태어난 그는 역시 쇼팽의 이미지로서 기억된다. 하지만 그가 지녔던 딜레마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아주 어릴 적부터 두각을 나타낸 그는 20세기 초의 신동 연주가였다. 비정상적으로 빠른 템포나 화려한 기교를 내세운 그는 미소년적인 수려한 용모와 세련된 무대매너로서 더욱 열광적인 청중의 반응을 얻어낼 수 있었다. 가는 곳마다 청중들의 환호와 찬사가 이어졌지만 비평가들은 냉담했다. 그는 사실 불성실하게도 너무나 많은 음을 빠뜨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청중들은 겉치레만 잘하면 속아넘어갔다. 이것은 루빈슈타인 자신도 느끼는 딜레마였다.

‘불완전한 쇼팽, 불완전한 리스트’로서의 딜레마.

20대까지 이런 연주를 계속하던 그는 30대를 넘기면서 기교를 갈고 닦는 데 전념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은 그의 연주생활의 중기로 분류되는 1937년, 그의 나이 50세가 가까워서이다. 이로부터 절정기를 구가하는 그는 1957년, 70세에 이를 때까지 정력적인 활동을 펼친다. 이를 중기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진정한 대기만성형의 연주가는 루빈슈타인인 셈이다.

70세가 넘어서 그의 연주는 화려한 기교에 더 이상 집착할 수 없었다. 다시 낭만주의를 회상하게 된 그의 연주에서는 기름기가 빠졌다. 위에서 언급된 대로 몽롱하고 환상적인 낭만주의 시대의 마법과 시정으로 돌아가 섬세한 감정의 진동을 표현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많이 노쇄해 표현력이 감퇴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청중들은 그가 전달하는 이미지만으로도 그러한 것들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연주는 주로 RCA 레이블의 음반을 통해서 들을 수 있다. 역시 쇼팽이 레퍼토리의 중심을 이룬다. 생상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 그리고 라인스도르프가 지휘한 차이코프스키와 그리그의 협주곡 등도 유명한 음반.


4. 빌헬름 박하우스(1884∼1969)

박하우스가 ‘건반 위의 사자’로 통했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다. 하지만 좀 어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가 기억하는 박하우스의 모습은 주로 만년의 높은 정신성을 담은 구축적이고 균형잡힌 음악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젊은 시절의 사진을 보라! ‘독일산 사자’라는 별명은 그의 젊은 시절을 두고 일컫기에 알맞다. 외모도 외모려니와 그는 젊은 시절, 독일 피아니스트로는 드물게 화려한 기교와 강렬한 힘으로 각광을 받았다.

19세기 이후 피아노의 비르투오소는 동유럽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독일 작곡가들이 현란한 기교의 과시보다는 음악의 구축미를 중시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기교파 박하우스의 등장은 20세기 초의 독일에서는 상당한 화젯거리였다.

라이프치히에서 정통 독일계 혈통을 이어받아 태어난 그는 7세 때인 1891년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들어가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10대 중반의 이른 나이로 음악원을 졸업한 그는 1899년부터 당시 큰 스케일과 구축력으로 유명했던 위대한 피아니스트 오이겐 달베르트를 사사하게 되었다. 그에게서 베토벤에 대한 해석을 물려받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훗날 ‘기교파 박하우스’가 아닌 ‘예술가 박하우스’로 완성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00년 16세의 나이로 런던에 데뷔했고, 이듬해 아르투르 니키쉬 지휘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20세기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피아노를 포효하게 하는 연주를 선보이며 유럽 각지를 누볐다. 그는 만년이라 할 수 있는 1950년대 이후에는 녹음에 집착해 데카 레이블에 많은 녹음을 남겼는데, 이는 독일음악 팬들에게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남긴 음반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의 녹음일 것이다. 한스 슈미트 이세르슈테트가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과의 연주로 50년대에 녹음된 이 전집 중에는 역시 1959년 녹음된 5번 ‘황제’가 가장 유명하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은 1950년대 초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69년까지 녹음된 것이다. 칼 뵘이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과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위대한 명반 중의 하나로 꼽히는 것이다.


5. 에밀 길렐스(1916∼1985)

네이가우스 문하의 두 피아니스트, 리히테르와 길렐스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높이 평가받는다는 것은 역시 그 스승의 영광이기도 하면서 러시아 피아니즘의 영광이기도 할 것이다.

길렐스는 리히테르보다 한 해 늦게 우크라이나의 오데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발군의 기량을 선보여 17세 때인 1933년, 전 소비에트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때까지 길렐스는 천부적인 재능과 손가락의 힘과 테크닉을 향상시키는 철저한 훈련이 합일점을 이루어 탄생한 사회주의 예능 교육의 성공작으로서 인식되고 있었다. 만일 거기에 머물렀으면 연주기계로 전락하는 비극이 일어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행히 네이가우스를 만났다. 1935년부터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그에게 배우게 된 것이다. 게다가 구소련이 자랑스럽게 내놓는 강철 같은 타건과 테크닉을 지닌 청년 피아니스트의 자격으로 서방세계의 콩쿠르에도 나갈 기회가 주어졌다.

그래서 그는 정책적으로 서방에 소개되기 시작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구도의 형성으로 ‘철의 장막’이 쳐진 이후에도 한동안 유일하게 서방을 오가며 연주를 할 수 있는 구소련의 연주가였다.

1954년의 파리공연과 55년의 미국 데뷔 공연은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길렐스에 이름에는 ‘강철 터치’라는 상표가 따라붙게 되었다. 하지만 길렐스의 예술성을 설명하는 데 이런 상표는 오히려 해가 되는 것이었다. 과연 길렐스가 가진 것이 육중한 체구와 두터운 손, 막강한 손가락 힘에서 뿜어나오는 폭발과도 같은 터치와 오케스트라마저 압도해 버릴 듯한 소리의 중량감뿐일 것인가.

오히려 길렐스는 섬세한 신경과 따뜻한 인품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리고 블루멘펠트의 조카이자 고도프스키의 제자였던 스승 네이가우스의 영향으로 고전적인 정신의 계승자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졌다. 따라서 그의 연주에서는 정연한 질서와 견고하게 쌓아올리는 구축력이 두드러졌고, 따라서 그가 모차르트와 스카를라티를 연주해도 베토벤의 음악을 듣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70년대에 오이겐 요훔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녹음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2번(DG)과 80년대 들어 죽음 직전까지 녹음한 베토벤의 소나타들(DG)은 귀중한 유산으로 남았다. 한편 최근에 BMG를 통해 국내에도 소개된 멜로디아 레이블의 ‘길렐스 에디션’은 60년대에서 80년대까지의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개하고 있어서 좀더 다양한 측면에서 길렐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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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6년전 98년 월간 객석에 실린 기사입니다.지금이랑 조금변화는 있겠으나  큰 틀은 비슷하겠지요.^^  

 

윌간 ‘객석’은 창간 14주년을 맞이해 음악사상 ‘연주가의 세기’였던 20세기를 정리하는 연재 특집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호의 ‘10인의 지휘자’에 이어 이번 호에는 ‘10인의 피아니스트’를 선정해 발표한다. 이 기사에 소개될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10인’은 지난 호와는 조금 다른 구성의 선정위원단에 의해 선정되었다. ‘피아니스트’라는 점이 고려되어 우리나라의 원로와 중견, 그리고 신예급의 평론가와 칼럼니스트들과 함께 역시 원로급과 중견급, 그리고 신예를 망라하는 피아니스트들이 선정위원에 참여했다.

선정위원은 김주영, 유윤종, 유형종, 강충모, 이영록, 김범수, 최갑주, 박승민, 김길영, 박은희, 임화섭, 이성일, 김상현, 우광혁, 송영택, 류태형, 김방현, 이재준,신민자, 이혜경, 김용배, 김영호, 김대진, 이순열, 선병철, 박제성, 박성수, 서동진, 김정순, 윤정열, 신수정(응답순서) 등 모두 31명이었다.

역시 복수 투표와 점수제 투표를 혼합한 방식으로 투표를 진행한 결과 고득점 순으로 1위부터 30위까지가 1.호로비츠 2.리히테르 3.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4.박하우스 5.길렐스 6.브렌델 7.미켈란젤리 8. 폴리니 9.아르헤리치 10.굴드 11.켐프 12.슈나벨 13.코르토 14.하스킬 15.리파티 16.기제킹 17.아슈케나지 18.페라이어 19.아라우 20. 라흐마니노프 21.루돌프 제르킨 22.피셔 23.프랑수아 24.쉬프 25. 체르카스키 26.루프 27.백건우 28.무어 29.베르만 30.나트, 데 라로차 (동률)의 순으로 나타났다. 간발의 차로 여기에 들지 못한 피아니스트는 굴다, 솔로몬, 크라우스, 바렌보임, 코바체비치 등이다.

결과를 살펴보면 최근 10년 사이에 세상을 떠난 호로비츠, 리히테르, 미켈란젤리, 켐프, 아라우, 제르킨, 체르카스키 등이 비교적 높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나타난 것이 특징적이다. 지난 호의 ‘지휘자’의 선정결과와 가장 큰 차이점은 현존하는 피아니스트들 중에 브렌델, 폴리니, 아르헤리치 등 3명이 ‘10인’ 안에 들었고, 여성 피아니스트들 중에서도 아르헤리치, 하스킬, 데 라로차, 릴리 크라우스 등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점이다. 켐프, 슈나벨, 코르토, 하스킬 등은 아쉽게도 아주 근소한 차로 ‘10인’ 안에 들지 못했다. 그밖에 선정과정에서의 특기할 만한 사항은 각각의 피아니스트를 소개하는 본문기사에 소개한다.

참고로 ‘객석’ 1989년 6월호에 소개된 특집기사(pp.75∼81) ‘한국 피아니스트 100인이 선정한 현존 명피아니스트 10인’에서의 순위는 1. 폴리니 2.호로비츠 3.아슈케나지 4.브렌델 5.아라우 6.데 라로차 7. 페라이어 8.아르헤리치 9.켐프 10.침머만 11.부닌, 미켈란젤리 13. 리히테르, 헤블러 15.루돌프 제르킨 16.백건우 17.바두라 스코다, 베르만 18.루프의 순서였다. 물론 각각 ‘현존’과 ‘20세기 총망라’로서 두 기사의 선정 기준이 다르긴 해도, 지난 9년 사이에 세상을 떠난 피아니스트들이 상당수 되고, 또 언급되는 피아니스트들도 순위 차이만 있을 뿐 상당 부분 겹치고 있어 당시와 지금의 선호도의 변화를 살핀다는 의미로서 두 기사를 비교해 보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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