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영화를 봤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바스터즈> 

...쿠엔틴 타란티노 답게 이것 저것 쓸어 담았다.음악적으로 보면 The Green Leaves Of Summer라는 올드패션한 분위기로 시작해서 데이빗 보위까지...타란티노는 원래 음악을 잘쓰는 감독인데 잘 쓴다는 것 역시 '하이브라드'하게 갖다 쓴다는 말이다. 

영화는 잔인함을 보여주지만 사실 그것도 영화적 '당의정'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폭력을 이해하려면 스크린 안에 헐리우드식의 이미지에만 멈추어 서면 안된다. 원래 현실이 영화보다 더 영화같고 더 현실적이고 더 폭력적이다. 오늘도 바닷가에서는 돌이 묶인 시체 한 두구 인양되고..하여간.

철학적 폭력과 실제적 폭력은 같은 단어를 쓰지만 정말 그 사이에는 핏빛 강이 놓여 있을 만큼 간격이 멀다. 그러니까 그 차이는 면허시험 교재의 교통사고 대처 요령과 실제 '아 ..죽는구나' 하는 속도와 충격의 육체성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혁명을 실험실의 몰모트 정도로 생각하는 '똘똘이 스머프들'에게야 뭤이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걸로 자기연명하라고 조물주가 주신 각자의 탈렌트중에 하나일 텐데. (그들 중 일부 애송이들은 밥벌이는 못하고 밥벌이를 비난하는 일은 잘한다.)  나는 그래서 자신의 육체성을 자결이란 극단적인 폭력의 방식으로 극화해낸 미시마 유키오가 오히려 이해가 간다. (무지하게 우파적인것 같군. ^^ 그 양반 성질 좀 참으시지...욱하시긴...) 하여간 어떤 똘똘이들은 육체성을 위해 헬스를 한단다...아니 어떤 친구들은 현장의 고귀함 경험을 텍스트와 결합하기 위해 시위 참가 숫자를 센다. 기념 트로피를 제작할 생각인가?  

타란티노의 메시지 

 " 너는 고결하게 죽음을 택해. 너의 머리 가죽은 우리가 가져갈께.. 헤헤.. 다 죽는겨"

하여간...애가 왜 그 모양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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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 평전 - 부치지 않은 편지
이윤옥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서른 셋에 죽은 김광석 보다 오래 살았다.  나보다 먼저 태어나서 더 일찍 죽은 이들을 추월하여 살고 있다. 김광석은 언제나 내게 '형'의 이미지였다. 그런 마음 속 이미지와 정지된 사진 속 이미지는 작은 충격을 만든다. 그가 죽음으로 자신의 시간을 멈춰세운 후에도 나의 시간은 떠밀려 가듯 흘러 왔기 때문이다. 젊은 김광석을 보면서 드는 낯섦은 그렇게 떠밀려온 시간이 만든 틈이다. 나무의 옹이를 쓰다듬는 심정으로 실로 오랜만에 김광석을 만난다. 

나는 김광석을 좋아했다. 그렇다. 정말 좋아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그에 대한 나의 마음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었다. 왜였을까?  <김광석 평전>을 읽으며 내가 왜 그동안 그에 대한 이야기를 아꼇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우선 '보이지 않는 특별함'을 선택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내 세대 사람들 중에는 김광석을 좋아하는 이들,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나름 팬이라면 팬일 수도 있는 층이 꽤 넓은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마디라도 그에 대해서라면 거들 수 있는 사람들도 많다. 나의 애정은 그런 '보편적 애정'을 거두어드리는 방식에 있다. 그를 내 마음 속에 더 특별하게 남겨 놓는 방식은 그에 대해 그런 보편적 애정을 수동적으로 퇴각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김광석'에 대한 이야기도, 그의 노래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나는 지나온 20대를 김광석과 함께 봉인했다. 나의 20대는 김광석과 함께 흔들렸고 그와 함께 사멸했다. 여기서 사멸은 그의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가 죽고 난 뒤 얼마지나지 않아. 나는 서른을 넘겼고 서른 어느 즈음부터 나는 김광석을  피했다. 장마가 시작되어도, 코 끝에 겨울 냄새가 흘러도, 아무 일도 하기 싫은 흐린 날에도, 돌이키고 싶은 추억들이 가슴을 치밀고 올라올 때도, 나는 애써 김광석을 피했다. 나는 내 20대를 그와 함께 묻어두고 싶었다. 가끔 서글픔이 밀려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의 심연으로 다기 내려가고 싶진 않았다. 결국 이런 생각들임에도 김광석을 운운하는 것은 내 내밀한 공간을 들먹이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사실은 대중음악의 보편성이고 거기에 삶의 노래와 사람의 노래를 들려준 김광석이 가진 가장 큰 강점이기도 하다.) 나는 그를 사랑했고 내 20대를 사랑했기에 섬세하게 그에 공명했으며 또 어느 시점에선 그것 조차 물 밑으로 가라앉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김광석을 처음 알게된 건 고등학교 자율학습 시절이다. 친구가 듣던 카세트를 빌려 들었는데 그게 <동물원 2집>이었다. 나는 그들의 순수한 노래에 빠져들었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를 필두로 <혜화동>까지. 어떤 노래 하나 버릴 곡이 없었다. 이 음반에서 나는 김광석, 김창기, 박기영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그 때는 김광석에 비해 김창기나 박기영의 설익은 목소리를 더 좋아했다. 2집에서 나는 특히 박기영이 부른 <이별을 할 때><별빛 가득한 밤에>같은 발라드를 좋아했다.(나는 아직도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다.) 그리고 동물원에 대한 관심은 1집을 듣게 만들었다. 김광석이 부른 <거리에서>와 함께 김창기가 부른 <잊혀지는 것>은 한동안 나의 18번이었다. (나는 김광석이 <다시부르기>에서 노래한 버전보다 김창기 버전을 더 좋아한다. 무기교로 덤덤하게 불러서 그렇다.)  

대학을 들어가고 나서도 나의 '동물원'에 대한 애정은 가시지 않았다. 김광석이 탈퇴하고 난 이후에는 그의 솔로 앨범도 찾아 들었고, 박기영의 솔로 앨범도 들었다. (이 둘은 모두 카세트로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마지막으로 들었을 때 테잎의 상태는 웅웅 거릴 정도로 늘어나 있었다.) 김광석의 1집에서는-확실히 그의 이후 음반들에 비하면 범작일 수 밖에 없는데- <기다려줘>,<너에게>,<슬픈우연>등을 좋아했다. 1집만 비교해 볼 때는 비슷한 시기에 구한 박기영의 앨범이 사실 더 애정이 갔다. <백마에서>라는 곡이 수록되어 있었다. (이 곡은 동물원 5집에 재수록된다. 하지만 박기영 솔로앨범에 있는 곡이 훨씬 좋다. 눈이 내리는 날마다 이 곡을 얼마나 들었는지.) 다른 멤버들중 기타를 치던 이성우가 프로그레시브 장르로 음반을 내었는데 사실 크게 관심을 갖진 않았다.  

김광석이 동물원 멤버들 중에서 눈에 확 들어오시 시작한 건 2집부터다. 나는 이 앨범을 대학 동기들에게 무척 많이 선물했다. 마땅히 줄만한 선물이 없으면 김광석의 음반이었다. 나는 동기들 사시에서 음악을 좀 안다는 축으로 평가 받았고 내가 고른 음반에 친구들의 반응은 '역시'였다. 더 신이나서 동네 방네 김광석 2집을 선물했다. 그리고 과방에서는 그의 첫번째 히트곡이라할 만한 '사랑했지만'을 기타를 치며 불러댔다. '사랑해에지..마....안.    그대를' 이 곡은 물론 내게 좌절을 안겨준 곡이기도 했다. 김광석 처럼 잘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잊혀지는 것'이 좋은 지도 모른다.더 문제는 우리 과에 지금은 연극 연출을 하는 한 선배가 있는데, 이 곡을 나보다 10배쯤은 잘 불렀다는 데 있다. 하여간 나는 나름 '김광석 전도사'로 맹렬히 활약했다. 하여간 조금 지나니까 모두들 김광석에 주목했다. (내가 열심히 뛰어서 그런건가? 아닐것이다. 그래서 내가 열심히 뛴 건 역사에 기록되지 못햇다.^^) 

1000회를 넘긴 학전의 콘서트에도 나는 세 번쯤 갔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으나 학전 위에는 작은 커피샵이 있었다. 당시로서는 인테리어가 꽤 괜찮았다. 거기서 공연을 앞두고 있는 김광석을 흘깃 흘깃 보기도 했다. 쑥스러워서 싸인 같은 것은 부탁조차 하지 못했다. 언젠가 그가 <이등병의 편지>를 부르고 있는데 제일 앞 보조석에 앉은 여자 하나가 노래 하는 내내 울었다. 무슨 사연이 있나보다 하면서 생각하고 있었는데 노래가 끝나자 김광석이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손수건....이거 라도 쓰세요. 괜찮아요. 좀 지저분하긴 해도...괜찮아요.자" 하며 사양하는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그러면서 " 애인이 군대 가있나요. 하여간 전 좀 짧게 단기사병,6방으로 갔다 왔는데...요즘 30개월인가요.좀 줄었나요. 하여간 너무 길어요. 군대 간 사람도 그렇고, 기다리는 사람도 그렇고...그런 생이별이 없지요. 빨리 통일이되서 좀 ...." 이렇게 이야기했다.  

대중가요는 원래가 동새대와 호흡한다. 그렇기 때문에 60먹은 사람도 젊은 시절 듣던 노래를 들으면 지난 추억이 떠오르고, 70먹은 사람도 그렇고...내게는 김광석이 또 그렇다.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는 나의 20대의 시련과 좌절, 사랑과 배신, 고민과 탈출 속에 있었다. 학교 다니며 이런 모든 고민들을 기다려주던 곳은 술집이었다. 나는 저녁이 되기도 전에 혼자 술마시러 내려가기도 했다. 가끔은 6시쯤 들어오는 같은 과 친구들이나 선배들을 만나서 머쓱해지기도 했다."야..왜 혼자 와있어" 하여간 이 술집에서는 늘상 김광석 노래만 또 틀어놨다. 술집 형과 친했기 때문에 아무 때나 혼자 가서 술 먹어도 눈치를 주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가끔 청소도 해주고 심부름도 해주고. 이 양반은 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이 나오면 '야...거 봐라. 광석이도 그러지 않냐.' 라며 위로가 되지도 않는 말을 해 주었다.(사실 진짜 위로는 그 형과 그 술집이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던거였다. 그 형은 내가 대학을 1-2년뒤 가게를 정리했다. 가끔은 그가 보고 싶기도 하다. 무척이나 반겨줄 텐데) 재미난건, 내가 아내와 처음 만난 날 아내를 데리고 간 곳도 그 술집이고 그날도 김광석을 주구 장창 틀어댔다. 그 술집은 의자 하나 제대로된 세트가 없을 만큼-여기저기서 주워와서 그렇다- 후졌는데 아내는 그런 분위기를 무척 좋아해주었다. 언젠가 내게 "그날 그 술집에 가지 않았으면 아마 나랑 흐지부지되었을 거야'라고 말해주었다. 인생 재밌는거는 그런거다. 사랑와 번민의 20대의 난망함을 소진하던 곳이 결국 희망의 싹도 키워준거..인생 참 재밌다.  

나는 김광석 노래 중에 <기대어 앉은 오후>를 좋아한다. 한 낮의 컴컴한한 이국의 단칸방, 열리지 않는 창문, 바람에 펄럭이는 하얀 빨래, 멀리 지붕 뒤로 보이는 작은 바다한 조각,낯선 언어들 속의 고립...중고 오디오에서 <기대어앉은 오후>를 좋아하게 된 건 그 때 기억때문이다. 다른 모든 것들이 움직이는데 나와 내 공간만 차갑게 동면하고 있었다. 김광석의 앨범 중에는 박기영이 피아노 반주한 곡과 기타로 연주한 버전이 각각 있는데 모두 마음에 든다. 

김광석이 죽던 날, 내 주변 사람들은 술을 마셨다. 김광석이 죽다니...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 때 어땟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술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데....  

 그보다 더 많은 나이를 살고 있다는게 부끄럽지 않아야 할텐데...라는 생각을 해본다. 가끔은 그가 원망스럽다. 하지만 누가 그의 상처와 고민들을 알 수 있었겠는가. 만약 그가 살아있다면 나와 그는 분명히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 인연의 촉수를 드리우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의 작은 인연도 생겼을 것이다.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회마저 그의 이른 죽음이 앗아갔다. 그래서 살아생전 나는 그와 노래를 매개로 이야기를 나눌 수 밖에 없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고마운 일이다. 나의 20대는 그의 노래가 배경이 되지 않고 울린적이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삶을 깊은 우울로, 때로는 희망으로 채워주었던 광석이 형, 지난 힘든 시절, 형의 노래로 함께 그 시간을 견뎌올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합니다. 먼 곳에서도 60이 되면 해보고 싶다던 오토바이 여행을 하시며 아름답고 자유로운 노래를 울리고 다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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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리뷰에 <김광석 평전>에 대한 책이야기는 거의 없다. 김광석은 그렇게 동시대를 산 사람에게 항상 과거의 추억과 함께 오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김광석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부조된 시간을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노래는 늘 지난 시간 속에 고정된 풍경이다. 

  이 책은 연대기 순으로 김광석의 삶을 따라간다. 그러면서 각 앨범을 통해 그의 음악이 어떻게 성숙해나가는지를 그려낸다. 김광석 노래가 가진 힘'삶의 노래,소통의 노래'에 대해서도 구체화 해나간다. 무난한 평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가지 크게 아쉬운 점은 이 평전이 그다지 '발로 뛴' 평전이 아니던가 아니면 그 흔적을 스스로 지운 것이다. 대개 인용되는 인터뷰들은 이미 많이 알려진 내용들이거나 신문,PC통신의 자료들이다. 그의 죽음과 관련된 미묘한 문제,유가족에 대한 배려 등등으로 작가가 더 이상 쓰지 못한 부분이 있음은 작가도 암시한다. 하지만 그런 내용을 떠나서 김광석의 주변인물들이나 동료들의 증언 등등이 그다지 충실하지 못하다는 인상이 강하다. 예를 들어 김광석이 자기 음악 인생에 큰 선생님이라고 했다는 김민기의 인터뷰도 하나 정도 들어있으며, 김창기나 안치환,강산에 등등 동료들의 인터뷰도 거의 실려 있지 않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발로 뛴' 평전을 처음부터 기획하지 못했다면 좀 아쉬운 부분이다. 작가 역시 이것이 '김광석 평전'의 시작이되길 바란다는 소망처럼 더 충분한 자료와 인터뷰들으로 그의 이야기가 다시 쓰여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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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라디오에선 이런 류의 연주곡들도 나왔다. 

락을 즐겨듣던 시절, 나를 앗아갔던 연주곡들...창고 안에 묻혀있는 내 LP판에 미안하기도 하고, 라디오를 끼고 살던 시절도 생각나고.... 그 당시 내게 TOP3의 연주곡이 아니었을까? 

황인용, 김광한, 전영혁, 성시완 같은 이들을 기억하는 라디오키드들은 기억하지 않을까.. 

늦은 밤, 나를 키워준건 9할은 음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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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sa님의  1:1 게시판으로 올라온 알라딘의 해명입니다. 

안녕하세요?
알라딘 고객팀장 표종한입니다.

깊은 우려와 안타까움 속에서 기사를 대하셨을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건,송구한 일로 글 드리게 되어, 저희 또한 마음이 한없이 무겁고 안타깝습니다.

질의하신 사항에 대하여 솔직하게 저희 상황과 입장을 회답드립니다.

알라딘은 연중 최대 성수기인 3월1일~3월31일, 9월1일~9월30일 두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단기근무인원을 모집합니다.
성수기에는 비수기보다 주문량이 30~50% 이상 증가하는데, 그 지속기간이 2~3주밖에 되지 않아 단기인력의 확보가 불가피합니다.

게다가 파주지역은 대규모 인력확보가 어려워 도급업체의 지원 없이는 정상운영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기고하신 김종호님도 이 경우에 해당하여 8월 31일~9월30일간 도급업체를 통해 근무하셨습니다.

이런 단기근무에 대해서는 계약시에 특별히 주의하여 이 사실을 고지하도록 도급업체에 요청하고 있습니다만,계약과 관리에 문제가 있었는지, 이런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앞으로 개선할 점이 없는지 확인하고 조치하겠습니다.

알라딘은 2년을 계속 근무한 비정규직원에 대해서는 별도의 절차를 거쳐 정규직화하는 정책을 법정의무기한 이전부터 시행해 오고 있습니다. 또한 도급업체를 통한 근무자에 대해서도 급여차등을 두지 않으며, 도급 근무규모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안정적인 인력채용이 가능할 수만 있다면 도급업체에 별도로 수수료를 지출할 필요가 없는 이점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부족한 점을 다시 돌아보고, 서비스뿐 아니라 회사의 모든 면에서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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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문제는 궁극적으로 알라딘이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 알라딘을 '정의의 담론 공동체'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알라딘은 인터넷을 통해 책을 판매하는 기업이다. 여기서 두 가지로 나누어 이야기해야 한다. 하나는 기업 경영이라는 기술적 측면과 기업 경영의 철학적인 면이다. 알라딘의 사장이 전직 운동권이었고 또 진보잡지 말의 기자 출신이었다는 것은 기업 경영의 철학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앞선 경영의 기술적인 측면과 충돌하는 경우가  발생할 것이다. 이런 간격, 이런 틈은 분명히 발생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런 충돌의 공간이 있다는 점은 반드시 인정해야한다고 본다.  갈림길에서 알라딘이 우리 사회에 일반적인 사기업의 경영 방식과 달리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주길 바라는 편이다. (내가 그렇지 못한 회사에 다녀서 더 그렇다.) 최소한 알라딘의 표팀장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는면-이건 잠정적인데- 알라딘이 다른 기업에 비해 노동착취적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없어 보인다. 물론 원청업체로서 하청업체의 고지의무 관리에 소홀한 점은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근원적인 것이다. 근로자파견법의 가장 허술한 지점은 원청업체의 책임과 하청업체의 책임 소재를 분리한데 있다. 아마 그것이 많은 대기업들이 근로자파견업체를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원청업체는 책임 소재를 하청업체에 넘기면 되기 때문이다. (알라딘이 최소한 원청업체로서 일련의 책임을 외면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먼저 알라딘이 사회정의에 부합하고,좌파적(?) 기업에 어울리게, 단기고용인원 마저 정규직화해서 쓰기는 어려워 보인다. 내가 좋아하는 알라딘이 그랬으면 좋겠다는 반응은 그냥 소망이다. 어떻게는 모르고 그냥 아름답기만을 바라는 막연한 소망. 그건 기업 경영의 기술적 측면에서 어불성설이다. (내가 가장 피하고 싶어하는 열혈 좌파는 '다 필요없다. 그건 정의가 아니다.' 라고 해버리는 속시원한 명쾌함이다. 얼마나 시원한가? 자기는 선명,명쾌한 정의의 사도가 될 수 있고..)   표팀장이 밝혔던 두 시즌 동안 인력공급이 단기적으로 많이 필요한 건 분명 사실일 듯 하다. 농촌을 예로 들어보면 쉽다. 과일 하우스를 한다고 쳐보자. 일년 내내 하우스에는 손이 많이 간다. 하지만 출하기 때는 정말 정신이 없다. 그냥 능력되는데까지 두 부부가 출하하면 될까?...물론 자급자족형 소규모 농사에서는 가능하다. 그런데 대부분은 서울 가락동이나 부산 반여동 농수산물 시장으로 보내야 한다. 과일을 따는 시점은 아주 한정적이다. 더 놔두면 낙과하거나 상품성이 떨어진다. 결국 웃돈을 주고라도 사람을 써야한다. 서부 경남 같은데 가보면 출하기때는 진주나 부산같은 도시에서 일당받고 일하러 오는 아주머니들도 꽤 많으시다. 왜 같은 지역에서 쓰면 될 텐데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농촌에는 노인분들 외에 사람이 없다. 그래서 교통비를 더 얹져주고라도 도시에 있는 아주머니 아저씨들을 일당으로 쓴다.  앞서 말했듯이 알라딘이라는 원청업체의 하청관리 문제는 지적받아야 하지만 기업의 특수성에 따라 단기 고용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 길게 농촌 이야기를 썼다.  

그 단기 고용이 필요한 시점이 끝났는데 그 기업이 더 어떻게 고용상태를 유지하겠는가?  농촌에서 사과,배 다 따고 서리 내리는데 더 이상 어떻게 하겠는가?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이걸 가지고 '정의'를 운운하고 '좌파'를 운운 할 수 없는 부분이다. 물론 인정상 보면 정말 안타깝다. 가장이 일자리를 잃어버리는데 그렇지 않겠는가. 알라딘이 귀책사유가 있어서 부당노동행위 소송을 걸 수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소를 통해서 알라딘에 승리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장기적으로 안정된 직장도 얻을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란다.    

  나는 알라딘의 부당노동 행위여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그건 잠정적으로 두고 봐야겠다. 그 때까지 불매 운동이나 서재 폐지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앞서 말한 기업경영의 기술적 측면과 철학적 측면의 공간에서 어떤 결과가 어떤 조정이 나오는지를 봐야지, 일단 무슨 일만 벌어지면 '정의'와 '선'의 이름으로 현실의 냉혹함과 사안의 미묘함을 장악하려는 것은 문제다. 우리들은 사실 모두 파견업체와 관련되어 있고, 그런 노동 구조 속에 있다. 그런게 구조의 힘이고 무서움이아닌가. 마트에 가면 파견업체 소속 직원들이 태반이다. 학교는 아니라고? 학교 경비원들도 과거에 감단직 노동자였다.아파트에도 그런 파견업체 소속 경비원들이 거의 다수다. 택배 회사는 아닌가?  이건 거시적인 문제이다. 

  파견업체를 쓰는 것 자체가 권장할만한 일은 결코 아니다. 아니 기업은 직접 고용비율을 높여야만 한다. 그렇지만 진보적(?) 성향의 알라딘이 그것을 썻다는 것이 더 부도덕한 일이라거나 더 이율배반이라고 생각하는 것, 또는 그런 틀로 문제를 보고 있는 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바이다. 그건 자칫하면 도덕적 근본주의에 빠질 위험이 농후하다. '노동 유연성'의 문제는 당위론적 방식으로 해결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흐름이 되어 버렸다. 이론적으로 노동 유연성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저항하는 것과 그런 현실의 흐름이 슬금슬금 세상을 장악하고 그에 대해 대책을 세우는 것은 다른 일이다. 전자의 방식이라면 결론은 한가지 밖에 없다. 파견업체를 불법화하고 모두 정규직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불가능하다. 파견업체의 부당성을 인식하고 수정해 나가돼  불법노동이나 부당노동 행위문제를 제기하고 사안별로 대응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있는 회사에서도 과거 파견근로자의 초과근로 수당문제가 파견업체 퇴직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있을 때는 고용문제로 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말 많으면 바꾸면 되니까...(이게 파견업체법의 악랄함이다.) 젊은 친구들이 서명을 부탁해서 나와 우리 팀 사람들은 아주 흔쾌히 싸인을 해주었다. 원청에 해당하는 우리 회사 경영진을 비난했고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과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회사 노조에서는 거래가 있는 노무사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결국 원청인 우리 회사에서는 그 친구들과 어느정도 합의 의사가 있었기 때문에 더이상 가지 않고 절충안으로 소급해주었다.   내가 다니는 회사의 3분의 1이상이 비정규직 또는 아웃소싱이다. 나는 물론 이 회사와 동일한 정체성을 갖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해당 기업의 구성원으로서 이 상황이 부끄러운 것은 사실이다.  

 정의로운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직접 고용의 형태가 늘어나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아직 정규직 완전고용을 달성하지 못했더라도 그런 노력과 정규직화의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이 사회에서 좋은 기업이라 칭할만하다. 알라딘이 전향적으로 전직원의 정규직화를 내건다면 모범이 될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성수기 단기고용까지 그렇게 해내기는 힘들것이다.)내 블로그가 있는 알라딘이 좀 더 섬세하게 이 문제에 대처해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점점 더 나은 기업이 되어주길 바란다. (내가 있는 회사는 거의 불가능하니 말이다.이 곳은 대놓고 말로 하진 않지만 장기적으로 현재 있는 부서들 중 몇 개의 분사까지도 심심파적으로 생각해 보는 것 같다. 위기를 계속 강조할 때 위협적으로 그런 말도 가끔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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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가 많아지니 나 역시 스스로 댓글 하나를 더 써여겠다. rosa님의 '연대론'은 내가 객관적인 것처럼 쓴 글에 대한 가장 좋은 돌파법이다. 그리고 오래도록 지켜봐온 분들은 알겠지만 나는 '객관주의'나 '사실판단'의 추종가가 아니다. 오히려 '권력은 모듯 곳에 있다'는 푸코식의 언명을 믿는 편이다. 물론 연대의 방법은 동일하거나 같은 강도일 필요는 없다. 꼭 읽어 보시길 바란다blog.aladin.co.kr/petite/3189244 

 잘 보면 알겠지만 내 글은 기본적으로 초월적 견지에서 객관의 이름을 가장하고 있다. 나같은 쁘띠 회색분자들의 특징은 핵심에 몸을 던지기 보단 외곽에서 말을 던진다는 것이다. 분열적인가? 맞다.  그런데 내가 왜 이런 분열적 자기 고백을 하느냐 하면 '객관' 의 이름으로 내 글이 작동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무슨 판단,무슨 판단 등등으로 바뀌는 과정은 결국 현실의 구체적인 땀과 피를 텍스트화하는 것이다. 그런 텍스트화는 철학하는 길이긴 하지만 현실과의 쟁투는 아니다. 그런 종류의 텍스트화는 자칫 주체를 현실에서 건져내며 분리시킨다. 즉 내가 분열적이라고 말한 것은 알라딘에 대해 유보적인 이런 생각임에도 궁극적으로 그 노동자와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런면에서 나는 결코 분열적이지 않다.  내가 말한 것은 '연대'비판이 아니라 '판단방법'의 비판이었기 때문이다. 도덕이나 정의의 이름으로 또는 통상적인 당위론의 이름으로 내리는 판단과정에 대한 것 말이다.   rosa님의 연대론은 실천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며 그 가치를 잊어서는 안된다. 연대는 100% 동일한 조건과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것이 연대의 기본이다. 상황을 텍스트화하여 공중에 붕띄워 놓고 이런 저런 방향으로 실험하는 것은 연구실 실험자의 일이지 생의 중심에서 쟁투하는 사람들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영복 선생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비를 맞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훌륭한 도움은 내 우산을 버리고 함께 비를 맞아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산을 함께 쓰는 것이 합리적이라고...그렇다.그런데 그 경우에는 나와 상대만을 구제만을 의미할 뿐 '연대'의 힘을 발휘하긴 힘들다. 비를 맞는 것은 비합리적이지만 그 비합리가 가장 큰 힘을 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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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내가 속해 있는 팀의 팀장이 명예퇴직을 했다. 당시 회사는 술렁였다. 인간적인 흠결들을 떠나서 일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 등이 강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직종의 후배인 내가  보기에도 그는 업무적인 면에서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모종의 순수함같은 것도 지키고 있었다. 또한 내가 있는 직종 출신으로는 간부회의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우리 팀의 입장을 전하려면 싫으나 좋으나 그를 통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역시 중간 간부로서 회사와 직원들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 뒤에 온 팀장들과 비교해 봤을 때 그 스트레스를 본인이 다 감당한 편에 가까왔다. 이후 팀장들은 회사 경영진의 공포감을 조성하는 말들을 시시콜콜 전체회의에서 전달한다. 마치 고장난 녹음기처럼. 어쨋거나 회사가 주는 스트레스로 그는 신경계에 스트레스성 질환까지 생겼다. 그리고 몇 달 후 자진해서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나 역시 그 점에 있어서는 안타까와 했다. 

하지만 난 이 양반과 불가원불가근의 관계였다. 그의 정치적 위치-즉 그가 같은 직종으로 위협받는 현재의 권리들에 깊이 공감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그에 대해 지지를 보낸 것이다. 이 양반은 가끔 술 먹으면 개가 되곤 했다. 기분 좋은 술자리에서도 점점 술이 과해지면 폭언과 폭력이 일상적이었다. 내가 겪은 것만도 한 두가지가 아닌데....칠 팔년전 쯤인가 오후 5시쯤 갑자기 낮술을 먹다가 내게 전화를 한 적이 있다. 회사 앞의 술집인데 X빠지게 뛰어오라는 거다. 부랴 부랴 내 동기랑 뛰어갔더니 무릎 끓고 앉으란다. 시키는대로 했는데...그 때 부터 밑도 끝도 없이 "너희 xx놈들은 X라 맘에 안들어. 너희들이 제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해. 너희들이 최선을 다해 살고 있어? " 하여간 이런 식으로 다그치는 것이다. 자기가 계속 호통을 치다가 다시 한숨 가다듬도 또 밑도 끝도 없이 분통작열. 하여간 어처구니 없었지만 그냥 눈 깔고 있었다. 속으로 부글 부글... 

그런데 결국 그것도 맘에 안든거다. '너희가 최선을 다하고 있냐고...이 XX새끼들아...너희들은 다 자격없어" 뭐 이러다가 컵에 든 물을 얼굴에 확 끼얹는 것이었다.  

아...그 순간 임계점까지 갔다. 아 못참겠네 쓰발...술상을 엎어..하는 순간까지 온거다. 그 때 술자리에 동석했던 사람이-그 양반과 호형호제 하던 사이인데- 큰 일나겠다 싶어서 "아...형 많이 취했다. 다들 잘 하는데 왜 그래요? 하면서 그 양반을 반강제적으로 일으켜 세웠다"  그 양반을 거의 끌려가면서도 헛발길질을 해 댔다.  

나와 내 동기는 몹시 기분이 상했고...서로 얼굴만 보면서 씁슬한 한숨만 쉬었다. 

그리고 다음날.  이 양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나타났다. 

이후에도 대상을 바꿔가면서 이런 일들은 툭하면 일어났다. 

한번은 낮술을 먹고 들어와서 눈에 보이는 사람을 자기 자리에 불러앉히고 다짜고짜 "너...제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 이렇게 시작한거다. 당시 책상 머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나 역시 이 양반이 술먹고 들어왔다는 소리를 듣고 사무실에 들어가질 않았다. 그냥 아무나 눈빛이 마주치면 불러 놓고 시비를 걸고 싶은거다. 이런 일이 두 세번쯤 있었다. 

언젠가 나는 멀찍이 기둥에 숨어서 회사의 여자선배 하나가 딱 걸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정말 갖은 욕을 다하고 ...고성을 질러댔다. 모두 하나 둘 자리를 떠서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단 일방적인 욕지거리 바탕이 끝나고 그 여자선배는 울음과 분노가 뒤섞여서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말했다. 

다음 날 아침, 전체 회의에서 이 양반은 "어제...일은 내가 공식적으로 사과합니다. 후배님들에게 정말 죄송합니다." 라고 이야기했다. 나중에 이 양반 퇴직하는 날 이 여자선배는 정말 애증의 눈물을 흘렸다.이건 지난 일에 대한 분노만은 아니었다. 정말 애증이었다. 

하여간 이 양반은 퇴직할 때쯤...채 50도 안된 나이이다.... "직장이 전부는 아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평생 그렇게 살았고 그런 줄만 알았는데 세상은 넓고 ,너무 우물안 개구리처럼 살았다는 각성의 말을 한 것이다. 이 양반은 본인이 술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일주일에 6번쯤 밤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그게 다 일의 연장이고 술을 잘 마시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게 진짜 진정성 있게 일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의 가정사는 잘 모르겠으나 집에 일찍 들어가는 -나 같은 인간들-은 일 안하는 인간들로 그는 받아들였다. 그런 그의 입에서 퇴직을 앞두고 다른 각성의 말이 나온거다. 그는 너무 늦게 안 것이 아닐까?  아니 40대에 알았으니 늦은 건 아닌것 같기도 하다. 하여간 그동안 그의 삶의 방향과 다르다고 폭언을 당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늦거나 또는 너무 빠른 각성일지 모른다.

최근에 들은 그에 대한 이야기는 그가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새벽 예배까지 말이다. 이건 거의 쇼킹한 뉴스였다. 그는 과거에 교회 다닌다고 술 안먹는 사람들은 아예 자기 옆으로 불러와서 인격모독에 가까운 술 권유 고문을 했다. 방법도 가지가지였고 일종의 가학적 쾌감까지 있는 듯 했다. 몇 몇 여자 친구들은 그것때문에  훌쩍훌쩍 울기도 했다. 그러면 "됐다...치워라. 안 먹으면 됐지. 울긴 와우노? ..하여간 예수쟁이들은...니 예수가 가깝나 니 부장이 가깝나? 대답해봐라.....니 앞으로 나보지 말제이." 이런 식으로 어찌할바 몰라하는 친구들에게 끊임없이 부담감을 주었다. 그랬던 그가....새벽 기도 다닌단다. 나야 물론 기독교와 별로 친하지 않지만 어쨋거나 그가 지난 날의 과오를 새벽에 잘 씻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의 늦은 각성을 토대로 신앙 간증하고 다니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직장이 전부는 아니다." "교회다녀라"는 식으로 말이다. 또한 그가 새롭게 시작하는 사업도 잘 됐으면 한다.  

하여간 재미있는게 세상이고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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